1939년, 수전 손택은 다섯 살에 결핵으로 아버지를 여의었다. 당시 그녀의 어머니는 처음에는 남편의 죽음을, 그 다음에는 죽음의 원인을, 마지막으로는 무덤의 위치를 딸에게 속였다. 그 당시에만 해도 결핵은 뭔가 수치스러운 질병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린 나이였던 손택은 어머니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녀가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37년이라는 시간이 더 필요했다.
자신에게 ‘뉴욕 지성계의 여왕’이라는 찬사를 안겨줬던 <해석에 반대한다>(1966)를 전후로 두 권의 소설, 두 권의 에세이 모음집, 두 편의 영화를 발표하며 활발하게 활동하던 손택은 1976년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듣게 된다. 유방암 제4기라는 진단을 받은 것이다. 이때부터 손택은 질병 자체, 그리고 질병에 들러붙어 환자의 재활 의지를 꺾는 낙인, 은유, 이미지와 투쟁을 벌이기 시작한다.
손택은 의학적이고 지성적으로 질병과 투쟁하기 시작했다. 1976년 파리로 건너가 유방절제 수술과 화학 요법을 받은 뒤 1978년 완치된 그녀는 질병을 이겼다는 데 만족하지 않았다. 그녀는 사람들이 질병을 대하는 태도, 질병을 신비화하는 언어를 쫓아내고자 했다. 투병 중이던 1977년부터 <뉴욕타임스>에 자신의 성찰을 실었던 그녀는, 이듬해 그 성찰을 확장해 『은유로서의 질병』으로 발표했다.
그렇지만, 손택의 싸움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1986년 폐암으로 어머니를 여읜 그녀는 미처 마음을 추스르기도 전에 자신의 친구들도 저 세상으로 떠나보내야 했다. 이번에는 에이즈였다.
어느 날 자신의 친구가 에이즈로 사망했다는 전화를 받은 뒤 망연자실해 있던 그녀는 단 이틀만에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방법>이라는 단편 소설을 써 내려갔다. 1986년 11월 24일 <뉴요커>에 실린 이 글은 에이즈로 부모나 친지, 친구를 잃은 모든 사람들에게 용기와 희망, 위로를 전해줬다.
1988년, 손택은 ?에이즈와 그 은유?를 발표했다. 이 책에서 그녀는 에이즈와 결부된 ‘역병’이라는 은유에 이의를 제기한다. 역병이라는 은유는 에이즈를 도덕적 타락에 대한 천벌로 받아들이게 만들 뿐만 아니라, 일종의 종말론을 부추긴다는 것이다. 그래서 ‘편집증적 정치’의 군사적 은유가 가능해진다. 에이즈는 인류의 적이기 때문에 그 어떤 희생을 치르고서라도 무찔러야 한다는 은유가.
1998년, 손택은 자궁암으로 또 한번 고통받아야만 했다. 그러나, 비록 자궁절제 수술을 받아야 했지만, 이번에도 그녀는 질병에 굴복하지 않았다. 오랜 투병 생활 뒤에 그녀는 어느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질병은 그저 질병이며, 치료해야 할 그 무엇일 뿐이라고.
“일단 사형선고를 받고 나면, 당신은 태양도 죽음도 똑바로 쳐다보지 않으려 할 겁니다. 당신의 마음은 슬픔으로 가득 차지요. 그러나 당신의 마음 속에는 끊임없이 강해지고 깊어지는 뭔가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걸 생명이라고 부른답니다.”
질병은 질병이며, 치료해야 할 그 무엇일 뿐이다
“에이즈 환자와는 밥도 먹기 싫다”
지난 12월 1일에 있었던 유엔이 정한 ‘세계 에이즈의 날’을 맞아 <한국에이즈퇴치연맹>이 우리나라 성인 1천5백여 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11월 1일~15일)의 결과다. 이 설문조사는 에이즈 환자에 대한 일반인들의 편견과 차별을 그대로 보여준다. “에이즈라면 혐오스러운 생각이 든다”는 응답이 73.2%, “에이즈 환자를 법적으로 격리시켜야 한다”는 응답이 48.7%로 나왔던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각종 대중매체들은 에이즈 환자나 감염인을 보도할 때에 “후천성 면역 결핍증(에이즈) 공포, 환자 판명, 특수전염병 관리대상자 지정, 접대부, 신고 없이 몰래 옮겨가, 매춘(윤락), 상습적 성관계, 잔여 수명, 격리 수용, 잠적, 색출” 같이 마치 범죄자를 다루는 듯한 용어를 많이 쓴다.
에이즈만 이런 일을 빚은 것은 아니다. 견디기 어려울 만큼 고통스런 죽음을 가져오는 질병, 인간성을 말살한다고 인식되는 질병, 얼굴을 손상시킨다거나 변형시키는 질병 등 사람들을 두려움에 떨게 만드는 수많은 질병들은 늘 사람들의 집단적 상상력을 부추겼다. 결핵, 천연두, 암 같은 질병들이 그랬다. ‘현대의 흑사병,’ ‘현대의 역병’이라는 불리는 에이즈는 이런 질병들의 ‘새로운 상속자’일 뿐이다. 은유로서의 질병은 이처럼 특정 질병에 낙인을 찍으며, 좀더 나아가서는 질병을 앓는 사람들에게 낙인을 찍게 만드는 질병을 둘러싼 은유를 비판하는 책이다. 질병 자체, 그리고 질병에 들러붙어 환자의 재활 의지를 꺾는 낙인, 은유, 이미지와의 투쟁. 손택의 목적은 질병을 신비화하는 언어를 쫓아내 우리가 질병, 더 나아가서는 삶과 죽음을 제대로 대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다.
수전 손택은 “어원학적으로 보자면, 환자는 고통받는 사람을 뜻한다. 그러나, 환자들이 가장 깊이 두려워하는 것은 이런 의미에서의 고통 자체가 아니라, 사람들이 자신의 고통을 비하한다는 고통이다”라는 사실을 지적한다. 즉, 질병을 둘러싼 은유는 환자들이 불필요한 고통을 겪게 만들며, 자신들의 질병에 혐오감을 내비치고 일종의 수치감을 느끼도록 만들 뿐만 아니라, 조기에 치료를 받거나 적절한 치료를 받지 못하도록 만든다는 것이다. 손택은 우리에게 이렇게 권유한다. “나는 병을 앓고 있는 나머지 공포에 질린 사람들을 설득해 이렇게 말해주고 싶었다. 질병은 질병일 뿐이라고, 질병은 저주도 아니며 신의 심판도 아니고 곤혹스러워 할 필요가 없다고. 별다른 ‘의미’를 부여하지 말라고.”
그리고 수전 손택은 질병의 은유를 둘러싼 자신의 사색을 통해서, 유한한 존재인 인간의 상상력을 사로잡는 궁극적인 이미지, 즉 인간이라는 종의 종말을 암시하는 재앙의 이미지, 이런 이미지를 발생시키고 부추긴 사회의 현실에까지 눈길을 던진다. 특히, 질병을 은유로 사용하면서 “국가의 생존, 시민사회의 생존, 세계 자체의 생존이 위기에 처했다”는 말로 사람들의 공포심을 자극하는 편집증적 사회가 손택의 공격 대상이다. ‘최후의 심판’ 같은 재앙을 연상시키는 수사를 남발하는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갖가지 방식으로 현실을 부정하는 태도를 지닐 수밖에 없다는 것이 손택의 입장이다. 요컨대, “유태인이 국민들 사이에 인종적 폐결핵을 낳는다”라는 히틀러의 웅변이나 “에이즈는 신이 자신의 법도대로 살지 않은 사회에 가한 심판이다”라는 폴웰의 설교는 질병을 은유로 사용하며 사회적?성적 소수자들에 대한 증오를 부추기고, 민주주의의 기본이 되는 자비와 관용을 방종, 우유부단함, 혼란, 타락과 동일시하게 만든다는 것이 손택의 주장이다. 실제로, 프랑스의 극우주의자 르펭은 “에이즈 같은 sidatique”이라는 표현으로 자신의 정적들을 물리치는 데 톡톡히 재미를 봤다.
그렇지만, 은유로서의 질병은 건조한 논설이 아니다. 수전 손택은 은유로서의 질병을 “일종의 문학적 성과물”로 봐달라고 어느 인터뷰에서 밝혔다. 이 책은 “과학 저술가들이나 에이즈 전문가, 시사 해설자에게” 보여주려는 책이 아니라, 질병으로 고통받고 있는 동시대의 사람들에게 보여주려는 책, 자신과 함께 질병의 은유가 가져오는 폐해를 직시해 보자고 초대하는 “사색의 목적을 지닌 전통적 문학 형식인 에세이”다. 즉, 이것은 바로 우리의 이야기인 셈이다. 이런 목적을 위해 손택은 톨스토이의 이반 일리치의 죽음, 골드스미스의 지는 것이 이기는 것이다, 스티븐슨의 질서정연한 남쪽, 베리만의 외침과 속삭임, 드뷔시의 펠레아스와 멜리장드 등, 총 77편에 달하는 소설, 희곡, 에세이, 영화, 오페라, 그리고 각종 의학 서적들에서 질병을 둘러싼 은유를 골라낸다. 다독 多讀으로 유명한 손택의 손에서 이 인용문들은 질서정연하게 저마다의 자리를 갖게 되고, 손택 자신의 주장을 입증해 주는 강력한 원천이 된다. 따라서, 어느 평자의 말처럼 ?은유로서의 질병?은 “풍부한 인문학적 지식과 독창적인 사유로 질병과 당대의 모습을 보여주는 책”이자 “사람들에게 보내는 공감 어린 권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