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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ltimate 80s Dance Party : The Greatest 80s Party Music (얼티메이트 80` 댄스 파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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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ltimate 80s Dance Party : The Greatest 80s Party Music (얼티메이트 80` 댄스 파티)

[ 4CD / 오리지널 음원 / 절판된 앨범 속 희귀곡 다수 수록 ]
Whitney Houston, Wham, KC & The Sunshine Band, Matthew Wilder, Odyssey 노래 외 40명 정보 더 보기/감추기 | SonyMusic | 2016년 11월 01일 첫번째 구매리뷰를 남겨주세요. | 판매지수 36 판매지수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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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ltimate 80s Dance Party : The Greatest 80s Party Music (얼티메이트 80` 댄스 파티)

품목정보

품목정보
발매일 2016년 11월 01일

관련분류

음반소개

디스크

CD1
  • 01 How Will I Know - Whitney Houston
  • 02 Wake Me Up Before You Go-Go - Wham!
  • 03 Give It Up - K.C. & The Sunshine Band
  • 04 Break My Stride - Matthew Wilder
  • 05 Going Back To My Roots - Odyssey
  • 06 Funkin' For Jamaica - Tom Browne
  • 07 Bad Boy - Miami Sound Machine
  • 08 Together Forever - Rick Astley
  • 09 Maneater - Daryl Hall & John Oates
  • 10 Get Outta My Dreams, Get Into My Car - Billy Ocean
  • 11 Freeway Of Love - Aretha Franklin
  • 12 I Really Didn't Mean It - Luther Vandross
  • 13 Dance Little Sister - Terence Trent D'Arby
  • 14 She Bop - Cyndi Lauper
  • 15 No Memory - Scarlet Fantastic
  • 16 Rosanna - Toto
  • 17 Kyrie - Mr. Mister
CD2
  • 01 Holding Out For A Hero [Club Mix] - Bonnie Tyler
  • 02 Waiting For A Star To Fall - Boy Meets Girl
  • 03 Call Me - Spagna
  • 04 People Hold On - Coldcut (feat. Lisa Stansfield)
  • 05 Blame It On The Boogie - Big Fun
  • 06 Lovely One - The Jacksons
  • 07 You're My Heart, You're My Soul - Modern Talking
  • 08 You Spin Me Round (Like A Record) - Dead Or Alive
  • 09 Don't Talk To Me About Love - Altered Images
  • 10 I'm Not Scared - Eighth Wonder
  • 11 I Wonder If I Take You Home - Lisa Lisa And Cult Jam (feat. Full Force)
  • 12 Love Come Down - Evelyn 'Champagne' King
  • 13 The Slightest Touch - Five Star
  • 14 After The Dance Is Through - Krystol
  • 15 Deep In Vogue - Malcolm Mclaren & The Bootzilla Orchestra
  • 16 Girl You Know It's True (Remix) - Milli Vanilli
  • 17 Lovely Day (7" Sunshine Mix) - Bill Withers
CD3
  • 01 Theme From S-Express - S'Express
  • 02 Beat Dis - Bomb The Bass
  • 03 Rockit - Herbie Hancock
  • 04 Release The Beast - Breakwater
  • 05 John Wayne Is Big Leggy - Haysi Fantayzee
  • 06 Prince Charming - Adam & The Ants
  • 07 I Ran - A Flock Of Seagulls
  • 08 Heaven (Must Be There) - Eurogliders
  • 09 Neutron Dance - The Pointer Sisters
  • 10 Boxer Beat - Joboxers
  • 11 Crash - The Primitives
  • 12 Can U Dig It ? - Pop Will Eat Itself
  • 13 The King Of Rock 'N' Roll - Prefab Sprout
  • 14 Talking In Your Sleep - The Romantics
  • 15 Rhythm Of The Jungle - Quick
  • 16 This Is Your Life - The Blow Monkeys
  • 17 Brilliant Mind [12" Mix] - Furniture
CD4
  • 01 I'm Gonna Tear Your Playhouse Down - Paul Young
  • 02 I Feel The Earth Move - Martika
  • 03 (I've Had) The Time Of My Life - Bill Medley & Jennifer Warnes
  • 04 Footloose - Kenny Loggins
  • 05 Party All The Time - Eddie Murphy
  • 06 Nothing's Gonna Stop Me Now - Samantha Fox
  • 07 Point Of No Return - Expos?
  • 08 Toy Boy - Sinitta
  • 09 Got To Get - Rob 'N' Raz Feat. Leila K
  • 10 It's Tricky - Run-Dmc
  • 11 Hangin' Tough - New Kids On The Block
  • 12 It Takes Two - Rob Base & DJ Ez Rock
  • 13 Joy - Marvin Gaye
  • 14 System Of Survival - Earth, Wind & Fire
  • 15 Say Yeah - The Limit
  • 16 I Owe You Nothing - Bros
  • 17 Riding On A Train - The Pasadenas

아티스트 소개 (45명)

휘트니 휴스턴(Whitney Houston)은 1980, 1990년대 남성들에 의해 주도되던 메탈의 포화를 뚫고 스탠다드 팝 시장을 개척해 낸 대표적인 ’디바’ 뮤지션이다. 휘트니 휴스턴은 1963년 미국 뉴저지에서 태어났다. 알앤비 가수 씨시 휴스턴(Cissy Houston)의 딸이었으며 시대를 풍미한 여가수 디온 워윅(Dionne Warwick)이 친척이었던 그녀는 어려서부터 대형 가수들을 옆에서 지켜볼 수 ... 휘트니 휴스턴(Whitney Houston)은 1980, 1990년대 남성들에 의해 주도되던 메탈의 포화를 뚫고 스탠다드 팝 시장을 개척해 낸 대표적인 ’디바’ 뮤지션이다. 휘트니 휴스턴은 1963년 미국 뉴저지에서 태어났다. 알앤비 가수 씨시 휴스턴(Cissy Houston)의 딸이었으며 시대를 풍미한 여가수 디온 워윅(Dionne Warwick)이 친척이었던 그녀는 어려서부터 대형 가수들을 옆에서 지켜볼 수 있었고, 어머니의 재능을 이어받아 어려서부터 성가대에서 노래하며 그 실력을 뽐냈다. 수려한 외모까지 겸비한 휘트니는 10대의 나이에 이미 모델, 배우, 가수의 세 가지 활동을 병행하고 있었다. 샤카 칸(Chaka Khan) 등의 백업보컬로 또 클럽에서 가수로 활동하던 그녀는 1982년 19살의 어린 나이에 폴 자바라(Paul Zabara)의 ’Eternal love’라는 곡에 보조 보컬로 참여하며 처음으로 정식 음반 녹음에 참여한다. 이듬해 아리스타(Arista)와 계약을 체결했고, 그녀의 능력을 높이 평가한 레코드사는 데뷔 앨범에 27만 달러의 제작비를 투자하며 전폭적으로 지원했다. 1985년 데뷔앨범 < Whitney Houston >은 흑인 디바 시대의 새로운 시작을 알린다. 앨범은 14주간 빌보드 차트 정상에 오르며 솔로 아티스트의 데뷔 앨범 중 가장 오랜 기간 1위에 머무른 앨범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세계적으로 2,300만장이라는 경이적인 앨범 판매를 이루어내며 데뷔 앨범 하나로 팝계 최고의 여가수로 자리하게 된다. 앨범 내에서는 ’Saving all my love for you’, ’How will I know’, ’Greatest love of all’(조지 벤슨의 곡 리메이크)의 세 곡이 연속해서 차트 정상에 오르고, 앨범의 경이적인 성공으로 86년 그래미와, 86,87년 아메리칸 뮤직 어워드를 차지한다. 1987년 그녀는 두 번째 앨범 < Whitney >를 통해 전작의 인기를 이어간다. 전작보다 비트감을 더한 이 앨범 역시 대단한 성공을 일구어 낸다. 발매 첫 주에 미국과 영국차트에서 동시에 1위에 오르는데 팝 역사상 처음으로 이룩한 기록이었다. 앨범은 차트 정상에 11주간 머물렀으며 세계적으로 2,000만장이 팔려나갔다. 싱글들의 인기도 대단해서 ’Wanna dance with somebody(Who loves me)’, ’Didn’t we almost have it all’, ’So emotional’, ’Where do broken hearts go’ 네 곡이 연속해서 차트 정상을 밟으며 이전 앨범부터 7개의 싱글이 연속해서 정상을 밟는 대 기록을 세우게 된다. 이 앨범으로 또다시 1988년 그래미를 거머쥐었고, 역시 88년, 89년의 아메리칸 뮤직어워드를 수상한다. 아레사 프랭클린(Aretha Franklin) 같은 정통 소울 아티스트들로부터 음악적 영감을 얻었던 그녀이지만 1,2집에서 보여준 음악은 대중성이 지나치게 강조된 흑, 백의 사운드가 뒤섞인 음악이었다. 자신도 그런 자신의 음악에 만족하지 못했는지 1990년 발표한 세 번째 앨범 < I’m Your Baby Tonight >에서는 대중성을 신경 쓰지 않고 정통 소울 음악으로 변신을 시도한다. 스티비 원더(Stevie Wonder), 루떠 반데로스(Luther Vandross)등과 함께 작업하는 등 흑인 아티스트로서의 정체성에 집착했던 이 앨범은 역시 이전 앨범들만큼의 성공을 이끌어내지는 못한다. 하지만 ’I’m your baby tonight’, ’All the man that I need’가 1위에 올랐고, 앨범은 전 세계 1,200만장의 판매를 기록하는 등 여전히 그 인기는 대단했다. 세 장의 정규 앨범 이후 그녀는 영화 배우로의 변신을 시도하며 세 장의 사운드 트랙을 연속 발표한다. 시작은 < 보디가드 >였다. 1992년 케빈 코스트너와 함께 출연한 ’보디가드’의 사운드 트랙에서 6곡을 노래했고, 이는 팝 역사에 길이 남을 경이적인 상업적 성공을 이끌어낸다. 첫 싱글 ’I will always love you’(돌리 파튼의 곡을 리메이크)는 차트 정상에 14주간 머물렀으며, 앨범은 20주간 1위를 지켰고, 세계적으로 3,500만장이라는 어마어마한 판매고를 기록한다. 1994년 그녀는 다시 한 번 그래미를 거머쥐었고, 아메리칸 뮤직 어워드에서는 8개 부문 수상이라는 대 기록을 세우게 된다. 1995년 휘트니 휴스턴은 다시 한 번 사운드 트랙에 참여한다. 자신이 주연한 < Waiting for Exhale >의 사운드 트랙에 3곡을 수록하면서 영화와 앨범의 성공에 기여한다. 이 앨범은 노장 흑인 여가수들과 신예 흑인 여가수들이 총 동원되어 만들어졌으며, 프로듀서로 참여한 베이비페이스(Babyface)는 그래미 12개 부문 후보에 오르는 영예를 누리게 된다. 1996년 그녀는 영화 < The Preacher’s Wife >에서 주연을 맡으며 다시 한 번 사운드 트랙에 참여한다. 14곡을 자신이 직접 맡은 이 앨범은 가스펠 위주의 곡들로 채워져 있으며 대중성보다는 종교적 방향성을 보여주고 있어 앨범판매에 있어서는 그다지 큰 성공을 이끌어내지 못하였다. 정규 앨범을 발표하지 않고 영화와 사운드 트랙에만 전념해왔던 그녀는 98년 8년 만에 정규앨범 < My Love Is Your Love >을 발표한다. 흑인 아티스트로서의 음악에 충실함을 기했던 이 앨범은 1,000만장의 앨범 판매를 기록하며 그녀의 앨범 중 가장 저조한 성적을 거두게 된다. 앨범 내에는 영화 ’이집트의 왕자’ 주제곡인 머라이어 캐리(Mariah Carey)와의 듀엣 곡 ’When you believe’가 수록되어 있다. 2000년 그녀는 자신의 15년 음악생활을 결산하는 베스트 앨범 < The Greatest Hits >를 발표한다. 조지 마이클, 엔리케 이글레시아스와의 듀엣 곡 등 네 곡의 신곡도 포함하고 있는 이 앨범은 발라드 곡들만을 모은 < Cool Down >과 댄스곡 및 댄스 리믹스 곡들을 모은 < Throw Down > 두 장으로 구성되어져 있다.
조지 마이클이라는 걸출한 팝 스타를 배출한 팝 듀오 왬(Wham!)은 80년대 팝 역사에서 빼놓아서는 안 될 중요한 그룹이다. 소울 음악과 결합된 즐겁고 흥겨운 팝 댄스를 들려줬던 이들은 80년대 특유의 ‘가벼움’을 관통함으로써 80년대 팝의 중흥기를 이끌었으며, 수많은 여성 팬들의 인기를 한 몸에 받았다. 또한 이들은 사실상 90년대에 들어 맹위를 떨친 보이밴드의 효시였다. 잘 생긴 외모와 수준급 가창력, 거기... 조지 마이클이라는 걸출한 팝 스타를 배출한 팝 듀오 왬(Wham!)은 80년대 팝 역사에서 빼놓아서는 안 될 중요한 그룹이다. 소울 음악과 결합된 즐겁고 흥겨운 팝 댄스를 들려줬던 이들은 80년대 특유의 ‘가벼움’을 관통함으로써 80년대 팝의 중흥기를 이끌었으며, 수많은 여성 팬들의 인기를 한 몸에 받았다. 또한 이들은 사실상 90년대에 들어 맹위를 떨친 보이밴드의 효시였다. 잘 생긴 외모와 수준급 가창력, 거기에 경쾌한 댄스 팝과 매혹적인 발라드 등 현 보이밴드의 전형이랄 수 있는 특질을 이미 80년대 초반에 확립해, 전부 보여줬기 때문이다. 1981년, 왬은 ‘나이트클럽 광’이었던 조지 마이클과 그의 친구 앤드류 리즐리에 의해 탄생되었다. 조지 마이클이 작곡과 작사, 보컬, 제작 등 음악에 관한 한 모든 걸 담당했고, 앤드류 리즐리는 그룹의 스타일과 이미지, 비주얼 등 외적인 측면에만 힘을 기울였다. 그 때문에 팀 해산할 때까지 자주 앤드류 리즐리의 역할 부재론이 거론되기도 했다(그렇지만 그룹의 방향성은 앤드류 리즐리가 결정했던 만큼 역할이 아주 없었다고는 말할 수 없다). ‘꽝!’이란 의미의 그룹이름과 이미지는 앤디 워홀과 더불어 팝 아트를 대표하는 인물로서, 주로 미국의 대중적인 만화를 주제로 매스미디어를 묘사한 바 있는 로이 리히텐슈타인의 그림에서 따왔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우정을 쌓아온 이 둘은 1979년, 이그제큐티브(Executive)라는 스카 밴드활동을 하면서 음악여정을 시작했다. 하지만 곧 밴드가 해산되고 향후 약 2년간 작곡과 홈메이킹 데모 테이프를 녹음하는 등 수련과정에 들어간다. 당시 작곡한 곡 중에는 나중 메가히트를 기록하는 ‘Careless whisper’와 ‘Club tropicana’가 있었다. 몇 번의 오디션 끝에 1982년, 댄스 레이블 < 이너비전 >(Innervision)과 계약을 체결한 왬은 데뷔싱글 ‘Wham rap!’을 발표했지만 영국차트 100위권에도 못 오르는 실패를 맛봤다. 그러나 그 해 10월에 내놓은 두 번째 싱글 ‘Young guns(go for it)’은 BBC 방송국의 프로그램 < 탑 오브 더 팝스 >(TOTP)에서의 인상적인 댄스 공연으로 차트 3위로 도약했다. 1983년 6월 9일, 팝 댄스로 가득 찬 이들의 데뷔앨범 < Fantastic >이 발매되었고, 이 앨범은 곧장 영국차트 1위를 기록했다. 한편 조지 마이클은 이미 이때부터 독자적인 행보를 걷기 시작한다. 같은 해 8월 그는 미국의 머슬 쇼울스(Muscle Shoals) 스튜디오에서 전설적인 프로듀서 제리 웩슬러와 함께 ‘Careless whisper’를 녹음했다(하지만 별로 성공적이지 않았고 나중에 런던에서 재녹음되어 나중에 출시된다). 1984년부터 왬의 센세이션이 일어났고, 동시에 그들의 히트 퍼레이드가 시작된다. 침대 맡에 적어놓았던 앤드류 리즐리의 노트에서 영감을 얻어 조지 마이클이 만든 ‘Wake me up before you go go’는 영국차트는 물론 미국차트에서도 정상을 차지했다. 수년간 공력을 들인 발라드 ‘Careless whisper’도 3주간 영국차트 넘버원을 지켰다. 이듬해에는 미국차트에서도 역시 3주간 1위를 기록했다. 조지 마이클이 자신의 부모님께 바친 이 싱글의 미국판 크레딧에는 ‘조지 마이클이 피처링한 왬의 곡’이라고 명시되어 있었다. 앤드류 리즐리가 두 번째 앨범을 구상하는 동안, 조지 마이클은 다른 음악인들과도 활발한 교류를 했고, 엘튼 존과의 파트너십도 쌓기 시작했다. 12월에는 밴드 에이드의 난민 구호곡 ‘Do they know it''s christmas time?’ 녹음에도 참여했다. 아이러니한 것은 이 곡 때문에 그들의 크리스마스송 ‘Last christmas’가 차트 2위에 머물렀다는 사실이다. 이듬해인 1985년 3월에는 서포모어 앨범 < Make It Big >이 출시되었고, 그 앨범은 제목대로 미국에서만 5백만 장이 팔리는 ‘빅 히트’를 기록했다. 당해 4월 왬은 서구 팝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주인공이 되었다. 그들은 1만여명이 운집한 중국 베이징의 인민대회당에서 공연함으로써 ‘중국에서 공연한 최초의 서방 그룹’으로 기록되었다. 계속해서 조지 마이클은 라이브 에이드 행사에서 엘튼 존과 듀엣으로 ‘Don''t let the sun go down on me’를 불렀고, 또 엘튼 존의 싱글 ‘Nikita’에서 백업보컬을 담당하는 등 확실하게 솔로활동의 교두보를 마련했다. 결국 조지 마이클과 앤드류 리즐리는 여전히 친한 사이였지만 서로를 위해 1986년 왬을 해체하기로 결정했다. 1986년 4월 발매된 조지 마이클의 두 번째 솔로 싱글 ‘A different corner’는 공식적으로 밴드의 종말을 알리는 곡이었다. 같은 해 6월 윔블던 스타디움에 모인 7만2천명의 관객 앞에서 행한 마지막 콘서트 ‘The Final’을 끝으로 왬은 해산되었다. 왬 이후 조지 마이클은 < Faith >를 시작으로 솔로가수로서 놀랄만한 성공가도를 달리고 있다. 반면 앤드류 리즐리는 < Son Of Albert >를 발표했지만 ‘Shake’라는 희미한 히트곡만 남겼을 뿐 그다지 주목받지 못했다. 왬의 음악을 담당했던 조지 마이클이 성공을 거두고, 음악적으로는 아무런 역할도 못했던 앤드류 리즐리가 실패한 건 어쩌면 당연한 귀결이다. 그렇지만 추억 속에 남아있던 앤드류 리즐리의 아름다운 매력이 솔로활동의 참담한 실패로 그나마 퇴색해버린 것 같아 아쉽기만 하다. 어쨌거나 왬은 80년대를 살아왔던 음악팬들에게는 아련한 기억으로, 또 아쉬움으로 존재하는 그런 그룹이다.
노래 : KC & The Sunshine Band (케이시 앤 더 선샤인 밴드)
디스코, 펑키, 알앤비 그룹 디스코, 펑키, 알앤비 그룹
멤버: 릴리안 로페즈, 스티븐 콜라조, 로미나 존슨, 앤 피터스, 애니스 피터스 멤버: 릴리안 로페즈, 스티븐 콜라조, 로미나 존슨, 앤 피터스, 애니스 피터스
옆모습을 보면 코보다 입이 더 돌출되어 있어 그다지 호감 가는 외모를 갖고 있지 않은 빌리 오션(Billy Ocean)은 그 반대급부인 풍부하고 찰진 중저음의 진한 음색으로 1980년대 중반에 대중적인 인기를 얻은 흑인 남성 가수다. 1950년 1월 21일, 서인도제도에 있는 섬나라 트리니다드에서 레슬리 세바스찬 찰스라는 이름으로 태어난 빌리 오션은 8살 때 영국으로 이민가 낮에는 자동차 공장에서 일하고 밤에는 ... 옆모습을 보면 코보다 입이 더 돌출되어 있어 그다지 호감 가는 외모를 갖고 있지 않은 빌리 오션(Billy Ocean)은 그 반대급부인 풍부하고 찰진 중저음의 진한 음색으로 1980년대 중반에 대중적인 인기를 얻은 흑인 남성 가수다. 1950년 1월 21일, 서인도제도에 있는 섬나라 트리니다드에서 레슬리 세바스찬 찰스라는 이름으로 태어난 빌리 오션은 8살 때 영국으로 이민가 낮에는 자동차 공장에서 일하고 밤에는 작은 클럽에서 노래하며 인지도를 획득해 1975년에는 셀프타이틀 데뷔앨범을 발표했다. 여기서 모타운 풍의 경쾌한 싱글 ‘Love really hurts without you’가 미국 차트 22위와 영국 차트 2위에 오르며 성공적인 상견례를 가졌지만 이건 워밍업에 불과했다. 1970년대 후반에 미국에 정착한 빌리 오션은 1980년에 < City Limit >와 1981년에 < Nights (Feel Like Getting Down) >, 1982년에 < Inner Feelings >까지 3장의 음반을 더 발매했지만 미국에서는 댄스 차트와 흑인음악 차트에서만 두각을 나타냈다. 그리고 1984년에 탄생한 다섯 번째 작품 < Suddenly >는 빌리 오션을 전 세계에 메모리시킨 결정타였다. ‘Caribbean queen’은 마이클 잭슨(Michael Jackson)의 ‘Billie Jean’과 베이스 리듬이 유사해 표절의혹을 받았지만 2주 동안 넘버원을 차지해 지금까지 그의 시그니처 송으로 남아있으며 빌로 오션이 명 프로듀서이자 작곡가인 로버트 존 ‘머트’ 랭(샤니아 트웨인의 전 남편)과 공동으로 작곡한 후속 싱글인 ‘Loverboy’는 2위, 당시 국내 나이트클럽에서 소위 ‘부루스 타임’의 단골이었던 음반타이틀 ‘Suddenly’는 4위, ‘Mystery lady’는 24위에 랭크되어 한 앨범에서 4곡이나 40위권 내에 오르는 대박 히트를 기록했다. 특히 ‘Caribbean queen’으로 빌리 오션은 그해 그래미에서 최우수 리듬 앤 블루스 남성 가수상을 수상했다. 앨범 < Suddenly >의 성공은 1985년까지 이어졌고 1986년에는 그 여세를 몰아 6집 < Love Zone >을 공개했다. 여기서도 히트 싱글이 쏟아졌는데 캐서린 터너와 마이클 더글라스가 주연한 영화 < 나일강의 보석 >에 삽입된 흥겨운 ‘When the going gets tough, the tough gets going’이 2위를 차지했고 고품격 리듬 앤 블루스 ‘There'll be sad songs’가 그의 두 번째 넘버원이 되었다. 그리고 ‘Love zone’이 10위, ‘Love is forever’는 16위에 올라 모두 4곡이 밀리언셀러를 기록했다. 2년 후인 1988년에 발표한 앨범 < Tear Down These Walls >에서도 다시 한번 1위곡을 배출하는데 국내에서도 큰 인기를 얻은 댄스곡 ‘Get outta my dreams, get in to my car’이다. ‘Loverboy’와 ‘When the going gets tough, the tough gets going’에 이어 로버트 존 ‘머트’ 랭과 합작한 이 노래 외에도 발라드 ‘Colour of love’와 ‘Licence to chill’이 각각 17위와 32위를 차지하며 3연타석 홈런을 쳤다. 또한 이 음반에는 ‘Because of you’라는 곡이 있는데 나중에 푸른하늘이 1990년에 발표한 ‘이 밤이 지나도록’에서 이 노래를 표절해 우리나라에서 조용히 화제가 되었다.
노래 : Aretha Franklin (아레사 프랭클린)
20세기를 정리하는 작업이 러시를 이루는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궁금중이 있다.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가수는 누구였는가? 많은 음악팬들이 먼저 프랭크 시내트라 또는 앨비스 프레슬리를 떠올릴 것이다. 신세대 같으면 머라이어 캐리라고 답할 수도 있다. 하지만 서구 대중음악계는 거의 그 주인공을 흑인 여가수 아레사 프랭클린(Aretha Franklin)으로 낙점한 상황이다. 먼저 시사주간지 < 타임 >이 선정한 ‘2... 20세기를 정리하는 작업이 러시를 이루는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궁금중이 있다.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가수는 누구였는가? 많은 음악팬들이 먼저 프랭크 시내트라 또는 앨비스 프레슬리를 떠올릴 것이다. 신세대 같으면 머라이어 캐리라고 답할 수도 있다. 하지만 서구 대중음악계는 거의 그 주인공을 흑인 여가수 아레사 프랭클린(Aretha Franklin)으로 낙점한 상황이다. 먼저 시사주간지 < 타임 >이 선정한 ‘20세기 문화예술인 20인’을 보자. 여기에는 대중음악인 넷이 포함되었는데 그들은 프랭크 시내트라, 비틀즈, 밥 딜런 그리고 아레사 프랭클린이었다. # 20세기는 왜 아레사 프랭클린인가? 놀라운 사실은 로큰롤의 황제라는 엘비스 프레슬리와 자타가 공인하는 팝의 황제 마이클 잭슨이 빠졌다는 점이다. 두 대중음악사의 거인은 누가 봐도 아레사 프랭클린에 비해서는 대중적 지명도나 후대의 영향력 측면에서 앞선다. 만약 흑인 음악인 한 사람을 꼽았어야 했어도 그 주인공은 마이클 잭슨이 되어야 당연하다. 그런데 왜 아레사 프랭클린인가? 아레사 프랭클린이 명단에 오른 이유는 마이클 잭슨을 누른 ‘흑인의 대표성’ 때문으로만 볼 수 없다. 흑백을 떠나서 팝 음악계 전체를 진동시킨 ‘경이로운 가창력’ 때문이다. 아레사 프랭클린은 42년생 미국 멤피스에서 태어나 1960년대말 스타덤에 오른 왕년의 가수지만 지금도 노래하면 음악관계자들은 만장일치로 그녀를 거명한다. 얼마나 노래를 잘하길래 그런가. 몇가지 에피소드가 있다. 그녀가 1967년 프로듀서 제리 웩슬러의 지원 아래 어틀랜틱 음반사에서 처음 앨범을 취입했을 때 반주를 해준 사람들. 이른바 세션맨들은 아레사 프랭클린의 노래솜씨에 그만 넋을 잃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너도나도 ‘이런 환상적인 레코딩에 내가 참여한 것이 영광’이라며 어울려 춤을 췄다는 것이다. 지난해 미국의 유선방송국VH원이 주최한 ‘디바스 라이브’(음반으로도 나왔다) 공연에서는 관람객 중 한 사람이었던 여배우 사라 제시카 파커가 인상적인 소감을 남겼다. “아레사를 보기 전에 난 스타에 반한 적이 없다. 그런데 지금 난 홀린 기분이다. 아레사가 나한테 ‘옷이 멋져요’ 하길래 난 주저없이 ‘가지세요’라고 했다. 발가벗고 여기를 나가게 되더라도 상관없다. 그녀는 옷을 가질만하다!” 지난해 그래미상 시상식에서 아레사 프랭클린은 다시 한번 천부적인 가창력으로 사람들의 혼을 뺐다. 그녀는 시상식장에서 노래부르기로 돼있던 루치아노 파바로티가 병으로 불참하게 되자 갑작스럽게 대타로 뛰게 되었다. 뒷무대에서 불과 몇분 연습하고 나서 그녀는 거뜬하게 파바로티의 ‘네순 도르마’를 불렀다. 더욱이 72인조 오케스트라에 맞추기 위해 그 곡을 파바로티의 키로 노래했다. 주최측, 오케스트라 단원 그리고 객석 모두가 ‘경외’의 박수를 쳤다. 그녀에 대한 평자들의 찬사와 칭송은 끝이 없다. ‘형언하기 어렵다’(No other description will do)가 대부분이다. 음악평론가 벤 에드먼즈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지난 50년간 우리를 놀라게 하고 겁에 질리게 한 또다른 목소리를 들어본 적이 있는가?” 영국의 록잡지 < 모조 >는 지난해 ‘대중음악 역사상 가장 위대한 가수 100인’을 음악관계자 설문을 통해 선정한 바 있다. 여기서 1위는 말할 것도 없이 아레사 프랭클린이었다. < 모조 >측은 2위와 표차를 엄청나게 내고 그녀가 넘버 원 싱어가 된 것에 놀랐다. 다시금 아레사 프랭클린이 남녀, 흑백, 장르를 통틀어 ‘20세기의 최고 가수’라는 사실이 입증된 것이다. # 그녀는 소울의 영원한 여왕 그녀의 음악은 목소리와 창법의 미학뿐 아니라 시대성이 있다. < 타임 >지가 20세기의 위대한 문화예술인 중 한 사람으로 뽑은 진정한 이유다. 1960년대 후반 아레사 프랭클린이 불러 유명한 곡 ‘존경(Respect)’, ‘체인 오브 풀스(Chain of fools)’, ‘생각해요(Think)‘ 등에는 당시 흑인들의 당당한 의식이 배어 있다. 흑인 민권운동의 불길이 솟아오르던 그 무렵 흑인들은 백인 지배사회에서 결코 흑인들이 열등한 인종이 아니며, 따라서 자부심을 갖고 살아가자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것이 흑인의 영혼을 의미하는 소울(Soul)이었다. 소울 음악은 때문에 목청을 돋워 질러대는 ‘샤우트’를 특징으로 했다. 국내에서도 록의 비조로 불리는 신중현이 소울을 창조적으로 도입해 김추자, 박인수, 펄 시스터즈와 같은 소울 가수가 1970년대 초반 두각을 나타낸 바 있다. 1967년 미국의 디트로이트에 흑인 폭동이 발발했을 때 성난 흑인 민중들은 백인들에게 존경을 요구하는 의미에서 아레사 프랭클린의 그해 히트곡 ‘존경’을 시위대의 찬가로 불렀다. 이듬 해 디토로이트 시장 제롬 카바나는 ‘아레사 프랭클린의 날’을 선포하기도 했다. 미국사회가 이때부터 흑인의 음악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백인들도 흑인의 레코드를 구입하게 된 것이다. 아레사 프랭클린은 다시 말해 흑인 소울의 존재를 만천하에 고한 인물로 기억되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신(神)의 조리에 의한 거 같은 지존(至尊)의 가창력으로 그것을 전했으니 그 위력은 더할 나위가 없다. 또 지적하는 바이지만 ‘존경’을 듣고 동료가수 오티스 레딩은 혀를 내둘렀다. 이 곡은 그가 쓴 곡으로 직접 불러 발표한 바도 있는데, 아레사 프랭클린이 완전히 새롭게 그리고 완벽하게 소화한 것을 듣고 질려버린 것이었다. 오티스 레딩의 경탄. “난 내 노래를 잃어버렸어. 저 여자가 내 곡을 빼았아갔어!” 아레사는 조금도 변함없는 ‘소울의 여왕(Queen of soul)’으로 통한다. ‘여성 소울(Lady soul)’이란 별명도 있다. < 디바스 라이브 >에서 아레사 프랭클린과 호흡을 맞춘 머라이어 캐리도 그렇게 호칭하고 있지만 이 호칭들은 영원히 아무도 넘아다볼 수 없을 것 같다.
노래 : Luther Vandross (루더 밴드로스,Luther Ronzoni Vandross)
흑인 남성 싱어 송라이터이자 프로듀서로 입지전적인 위치를 다진 루더 밴드로스(Luther Vandross)는 본격적인 캐리어를 쌓기 시작한 1980년대부터 현재까지 왕성한 음악 활동을 펼치면서 20세기 후반 리듬 앤 블루스를 언급하는데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거물급 인사가 되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1990년대 이후 그의 노래들이 빌보드 싱글 차트의 높은 순위에 오르면서 알려졌다. 제작자로서 그에 대한 평가는 스티비... 흑인 남성 싱어 송라이터이자 프로듀서로 입지전적인 위치를 다진 루더 밴드로스(Luther Vandross)는 본격적인 캐리어를 쌓기 시작한 1980년대부터 현재까지 왕성한 음악 활동을 펼치면서 20세기 후반 리듬 앤 블루스를 언급하는데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거물급 인사가 되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1990년대 이후 그의 노래들이 빌보드 싱글 차트의 높은 순위에 오르면서 알려졌다. 제작자로서 그에 대한 평가는 스티비 원더(Stevie Wonder)나 프린스(Prince), 테디 라일리(Teddy Riley) 등과 동등한 위치에서 언급되고 있으며 초코 우유처럼 감미로운 그의 테너와 바리톤의 중간 음색으로 그려지는 가창력은 현존 최정상임을 입증한다. 1951년 4월 20일 뉴욕에서 태어난 이 재능 있는 뮤지션은 샘 쿡(Sam Cooke), 아레사 프랭클린(Aretha Franklin)같은 소울 가수들의 음반들을 들으며 음악적인 진실함을 마음 속 깊은 곳에서부터 채득했다. 1970년대에는 선배 가수들의 백보컬 활동과 TV 광고 노래를 부름으로서 음악 생활을 시작했다. 1981년, 루더 밴드로스는 첫 번째 정규 앨범 < Never Too Much >를 자신이 직접 어레인지와 제작을 담당해 음악 관계자들을 놀라게 했다. 그 당시까지만 해도 음반 제작을 관장하는 흑인 아티스트가 드물었기 때문에 루더 밴드로스의 처녀작은 높은 평가를 받았다. 이 작품에 대한 호평으로 그는 1980년대 초반 ‘소울의 영왕’ 아레사 프랭클린을 위해 퓨젼 재즈 베이시스트 마커스 밀러(Marcus Miller)와 파트너가 되어 ‘Jump to it(24위)’, ‘Get it right(61위)’ 등을 작곡하고 음반을 제작하면서 그녀에게 재기의 발판을 마련해 주었다. 이후 이들의 관계는 음악적인 파트너쉽을 넘어 인간적인 우정으로 지속된다. 1980년대를 활동하면서 모두 6장의 정규 음반을 발표했지만 싱글 종합 차트와 국내에서의 반응은 흑인 음악 차트에 비해 폭발적이지는 못했다. 데뷔 곡 ‘Never too much(33위)’, 댄서블한 ‘Stop to love(15위)’와 ‘She won’t talk to me(30위)’, 그리고 ‘Give me the reason(57위)’과 ‘Any love(44위)’ 등이 주로 차트의 허리권에서 멤돌다가 사라지곤 했었다. 1990년대가 밝아오면서 루더 밴드로스는 지난 10년을 재조명하는 베스트 음반을 발표했다. 이 앨범에 수록된 신곡 ‘Here and now(6위)’가 최초로 Top10에 랭크되면서 20세기의 마지막 10년을 화려하게 장식할 준비를 시작했다. 1991년의 < Power Of Love >는 싱글 ‘Power of love/Love power(4위)’와 ‘Don’t want to be a fool(9위)’의 호 성적으로 그의 앨범들 중에서 가장 높은 판매고를 기록했으며, 1992년에는 영화 < 모 머니 >에 수록된 ‘The best thing in life are free(10위)’를 자넷 잭슨(Janet Jackson)과 함께 호흡을 맞추었고 1994년에는 머라이어 캐리(Mariah Carey)와 함께 ‘Endless love(2위)’를 리메이크 했다. 루더 밴드로스의 음악 스타일과 역량은 예전과 크게 다르지 않지만 친절하게 멜로디를 살려주는 그의 노래들은 화음보다 최소한의 리듬을 강조하는 현재의 흑인 음악의 트랜드와 다소 차이점을 보이고 있다. 그래서 지금, 그의 음악이 발전하지 못하고 제자리에 정체하고 있는 것처럼 비추어 지는 면이 없지 않지만 음악에 대한 그의 열정은 한 번도 식은 적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음악은 언제든지 사랑 받을 준비가 되어 있다.
1983년 후반, 두 백인 여성 가수의 데뷔곡이 2개월의 짧은 간격을 두고 빌보드 싱글 차트에 나란히 등장했다. 본의 아니게 시작부터 라이벌 관계를 형성하게 된 두 여가수의 경합은 1980년대 동안 가장 흥미롭고(본인들에게는 피 말리는 싸움이었겠지만) 긴장감 넘치는 팝의 핫 이슈였다. 두 여인은 1983년 10월에 데뷔 싱글을 차트에 등록시킨 이후 현재까지 20년이 달하도록 사그라지지 않는 창작력을 과시하는, 매... 1983년 후반, 두 백인 여성 가수의 데뷔곡이 2개월의 짧은 간격을 두고 빌보드 싱글 차트에 나란히 등장했다. 본의 아니게 시작부터 라이벌 관계를 형성하게 된 두 여가수의 경합은 1980년대 동안 가장 흥미롭고(본인들에게는 피 말리는 싸움이었겠지만) 긴장감 넘치는 팝의 핫 이슈였다. 두 여인은 1983년 10월에 데뷔 싱글을 차트에 등록시킨 이후 현재까지 20년이 달하도록 사그라지지 않는 창작력을 과시하는, 매브릭 음반사의 CEO 마돈나(Madonna)와 2개월 늦게 인기차트에 합류했지만 고지를 선점하고 나선 끝내 마돈나에게 밀려버린 ‘귀여운 악녀’ 신디 로퍼(Cyndi Lauper)다. 마돈나의 ‘Holiday’와 신디 로퍼의 ‘Girls just want to have fun’은 아직까지 그들을 정의하는 대표 곡으로 남아 있다. 선의의 경쟁이 시작된 지 20여 년이 흐른 현재, 레이스의 최후 승자는 알다시피 마돈나다. 그것도 판정승 아닌 분명한 KO승이다. 그러나 그들이 풋풋했던 데뷔 시절, 둘의 위치는 지금과 정반대였다. 애초 평단에서 마돈나는 ‘아니 벌써’의 반짝 스타로, 신디 로퍼는 ‘장수 만세’의 아티스트로 전망되었다. 평론가들이 신디 로퍼를 높이 산 이유는 페미니즘을 남근의 음악인 록과 포스트 펑크가 어우러진 ‘뉴 웨이브’로 설파했다는 점과, 마돈나처럼 섹시한 외모나 춤으로 판단되지 않기 위해 일부러 약간은 덜 섹시한 이미지를 고집하면서 음악으로 당당하게 자신의 가치를 인정받길 원했기 때문이다. 그녀의 이러한 독립적인 태도는 고등학교 중퇴, 소규모 클럽에서의 노래 시작, 자신이 결성한 밴드 블루 엔젤(Blue Angel)의 상업적인 실패와 파산, 그리고 남자 친구와의 불화 등 온갖 산전수전을 겪으면서 터득한 그녀의 인생관이 배양했다. 30살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의연하게 망가질(?) 수 있는 자신감은 바로 이 굴곡의 삶을 극복한 인간승리의 드라마에서 비롯된 떳떳함이 원천이다. 그녀의 성공을 가져온 많은 요인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시대적인 요구에 정확히 부응했다는 점이다. 소녀적 감성을 읊은 신디의 밝고 통통 튀는 가사는 그 시대 정서의 흐름을 타고 대중들을 심각하고 무거운 주제로 괴롭히지 않았으며, 당대의 뉴 미디어인 MTV의 지원사격을 받은 것이었다. 10대 소녀들을 정신 없으면서도 쾌활하게 묘사한 뮤직비디오 덕분에 데뷔 싱글 ‘Girls just want to have fun’은 차트 2위라는 스매시 히트를 치면서 이 신인 여가수의 시대가 화려하게 개막했음을 알렸다. 이 곡이 수록된 솔로 데뷔 앨범 < She’s So Unusual >에서는 발라드인 ‘Time after time(1위)’과 ‘She bop(3위)’, ‘All through the night(5위)’, 그리고 ‘Money changes everything(27위)’를 포함해 5곡이 빌보드 싱글 차트를 유린하면서 그 무렵 완벽하게 재기에 성공한 티나 터너(Tina Turner)와 함께 1984년 팝 음악계를 가장 화려하게 수놓은 인물이 되었다. 그래미상도 펄펄 난 그녀를 응대해 신인상 트로피를 안겼다. 그 해 마돈나는 그래미상 후보에도 오르지 못한 것을 비교하면 당시 마돈나와 신디 로퍼의 위상이 어땠는지를 알 수 있다. 1985년에는 어린이들을 위한 영화 < 구니스 >의 주제가 ‘The goonies ‘r’ good enough(10위)’로 기세를 유지했지만 이듬해 1986년 가을에는 두 번째 대결인, 이른바 ‘True 경쟁’을 통해 신디는 마침내 마돈나에게 추월을 당했다. 록, 팝, 펑크, 뉴웨이브, 펑크(funk), 레게 등 젊은층에 어필할 수 있는 색조의 음악을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재구성해 큰 성공을 낚은 < She’s So Unusual >에 비해 두 번째 앨범 < True Colors >는 그녀 특유의 톡 쏘는 감각이 많이 희석된 대중적 팝으로 약간 빛깔을 달리했다. 앨범의 타이틀 트랙 ‘True colors’로 두 번째 차트정상의 영광을 안고, ‘Change of heart(3위)’와 ‘What’s going on?(12위)’, ‘Boy blue(71위)’가 연속으로 차트를 밟았지만 기존 팬들은 성인 취향의 팝으로 전향한 신보에 적지 않게 실망했고, 이 LP를 기점으로 그녀는 하향 곡선을 그리기 시작했다. 앨범 판매량도 전작 600만장에서 200만장(현재)으로 격감했다. 반면 경쟁자 마돈나의 < True Blue >는 700만장이나 팔려나갔다. 1989년에 공개된 세 번째 음반 < A Night To Remember >에서는 싱글 ‘I drove all night(6위)’와 ‘My first night without you(62위)’가 차트에 등장하긴 했지만 어느덧 음악적인 매력은 뚝 떨어져있었다. 반면 마돈나는 역작 < Like A Prayer >를 발표해 음악적인 면과 대중적인 면 모두를 포유(包有)하면서 5년간의 라이벌 대결은 마돈나의 완승으로 결판이 났다.(신디 로퍼는 그러나 새 앨범의 홍보 차원으로 내한공연을 가져 국내 팬들에게 시원스런 무대를 선사했고 공연실황이 TV로도 방송되어 열기를 현장에서 맛보지 못한 많은 사람들을 달래주었다). 1993년과 1998년에는 < A Hat Full Of Stars >와 < Sisters Of Avalon >을 발표해 재기를 노렸지만 결과는 참패였다. 1994년에는 < 12 Deadly Cyns And Then Some >이라는 제목의 베스트 음반을 공개해 ‘Girls just want to have fun’을 리믹스한 ‘Hey now(87위)’로 마지막 희미한 불꽃을 태웠다. 이 곡은 또한 1970년대 팝 그룹 레드본(Redbone)의 히트곡 ‘Come and get your love(댄스 팝 그룹 리얼 맥코이가 커버해 1995년 19위)’를 샘플링했으며 1995년 웨슬리 스나입스(Wesley Snipes)와 패트릭 스웨이즈(Patrick Swayze)가 주연한 영화 < 투 웡 푸 >(To Wong Foo)에 삽입되었다. 흑인 싱어송라이터 루더 밴드로스(Luther Vandross)는 신디 로퍼의 노래 실력을 두고 “팝의 디바 휘트니 휴스턴에 견주어도 전혀 뒤지지 않는다”고 밝힌 바 있다. 데뷔 싱글 ‘Girls just want to have fun’과 1960년대 틴 아이돌 팝 가수 진 피트니(Gene Pitney)의 오리지널을 재해석한 ‘I’m gonna be strong’, 그리고 ‘My first night without you’, ‘True colors’ 등은 그녀의 뛰어난 곡 소화력을 가감 없이 보여준다. 하지만 데뷔 초기의 우스꽝스러운 외모와 펑크적인 스타일에 의해 굳어진 ‘왈패’ 이미지로 인해 그녀의 음악적 진가는 과소평가 받기 일쑤였으며, 성인 취향의 팝 록으로 변신하자 많은 팬들은 그녀에게서 등을 돌렸던 것이다. 이제는 많이 잊혀졌지만 신디 로퍼의 이미지는 여전히 많은 팬들의 뇌리에 박혀있다. 깜직한 소녀(계집애?) 목소리, 중고품 할인가게 풍의 패션, 레슬링을 즐기는 여성 그리고 MTV 시대. 하지만 무엇보다 팬들은 그녀를 통해 그 시절에 ‘여자들은 단지 재미를 원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런 의미에서 신디 로퍼야말로 ‘1980년대 팝의 바로미터’라고 할 것이다. 그 시대를 그녀만큼 ‘비범하게’ 산 사람도 없다.
노래 : Mr. Mister (미스터 미스터)
남성의 존칭을 두 번이나 강조한 미스터 미스터(Mr. Mister)는 1980년대 중반의 팝 계에 짧지만 굵은 선을 그으며 영국 그룹에 밀렸던 미국 밴드의 체면을 세웠지만 인기의 불꽃이 점화된 지 2년도 안되어 산화한 불가사의한 그룹이다. 고급 세션맨 출신인 각 멤버들의 역량만을 따로 분리해 보면 아쉬울 게 없었지만 그 음악적 실력을 충분히 보여주기도 전에 우리의 기억에서 지워졌기 때문이다(롱런한 토토와 비교해보... 남성의 존칭을 두 번이나 강조한 미스터 미스터(Mr. Mister)는 1980년대 중반의 팝 계에 짧지만 굵은 선을 그으며 영국 그룹에 밀렸던 미국 밴드의 체면을 세웠지만 인기의 불꽃이 점화된 지 2년도 안되어 산화한 불가사의한 그룹이다. 고급 세션맨 출신인 각 멤버들의 역량만을 따로 분리해 보면 아쉬울 게 없었지만 그 음악적 실력을 충분히 보여주기도 전에 우리의 기억에서 지워졌기 때문이다(롱런한 토토와 비교해보라). 미스터 미스터는 죽마고우였던 리차드 페이지(Richard Page/보컬, 베이스)와 스티브 조지(Steve George/보컬, 키보드)가 1979년에 도원결의(桃園結義)한 페이지스(Pages)가 그 시발점이다. 페이지스는 국내에선 다큐멘터리인 < 실크로드 >에 삽입된 ‘Caravan sary’로 아직까지도 기억되지만 본토에서의 반응은 우리나라와는 180도 달랐다. 페이지스의 역사는 1981년에 그 페이지를 넘기며 팝 역사의 비사(?史)로 남게 되었고 리차드와 스티브는 이듬해인 1982년에 기타리스트 스티브 패리스(Steve Farris)와 드러머 팻 마스텔로토(Pat Mastelotto)를 새로운 친구로 맞이하면서 미스터 미스터의 공식적인 명함을 찍었다. 페이지스를 접은 후에 포인터 시스터스(Pointer Sisters), 샤카 칸(Chaka Khan), 도나 서머(Donna Summer) 등과 음악활동을 하면서 그 인지도를 각인시킨 리차드와 스티브는 어렵지 않게 메이저 음반사와의 계약을 통해 1984년에 데뷔작 < I Wear The Face >을 발표했다. 여기서 첫 싱글 ‘Hunters of the night(57위)’을 커트시켜 차트에 처음으로 진입시켰다. 그러나 1집으로 팀 이름에 걸맞지 않은 대접을 받은 미스터 미스터는 1985년에 공개한 두 번째 음반 < Welcome To The Real World >로 자신들이 세운 음악세계에 대중들을 초대했다. 베이스가 주도하는 첫 싱글 ‘Broken wings’와 ‘주여,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뜻의 두 번째 싱글 ‘Kyrie’가 연속으로 넘버원을 차지했고 세 번째 커트 싱글 ‘Is it love?’는 8위에 랭크되면서 < Welcome To The Real World >는 빌보드 앨범 차트 정상에 올랐다. 특히 ‘Is it love?’는 리차드 드레이퓨스와 에밀리오 에스테베즈가 주연한 1987년도 영화 < 잠복근무(Stakeout) >의 마지막에 삽입되기도 했다. 이러한 선전으로 미스터 미스터는 1985년도 그래미에서 최우수 그룹 후보에 올랐지만 ‘We are the world’의 주인공 USA for Africa에 양보하며 더 큰 인류애(?)를 발휘했다. 하지만 1987년에 부화한 세 번째 앨범 < Go On >은 상업적인 실패를 잉태했다. 첫 싱글 ‘Something real (Inside me/Inside you)’만이 유일하게 싱글 차트에 진입했지만 27위라는 상대적으로 초라한 결과를 낳으면서 대중들과의 눈 맞추기에 난항을 보였지만 그해 그래미에서 두 번째로 올해의 그룹 부문 후보로 지명되었다(수상자는 영화 < 더티 댄싱 >의 주제가 ‘The time of my life’를 부른 빌 메들리와 제니퍼 원스). 3집의 저조한 성과는 밴드의 해산을 가져왔다. 1988년에 미스터 미스터는 해체를 결정했으며 연주 실력이 뛰어난 각 멤버들은 마돈나(Madonna)나 케니 로긴스(Kenny Loggins), 쥬얼(Jewel), 화이트스네이크(Whitesnake), 토리 에이모스(Tori Amos) 같은 뮤지션들의 레코딩에 참여하면서 자신들의 음악 경력을 쌓고 있다.
모든 사람들은 기나긴 인생을 항해하면서 좋든 싫든 호사다마(好事多魔)와 전화위복(轉禍爲福)의 순간을 맞는다. 어떤 이들은 자신의 뜻대로 일이 진행되지 못해 좋지 않은 결과를 초래하기도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이것을 슬기롭고 현명하게 대처해 자신의 운명을 바꾸는 절호의 기회로 탈바꿈시키기도 한다. ’It’s a heartache’와 ’Total eclipse of the heart’, ’Holding out for... 모든 사람들은 기나긴 인생을 항해하면서 좋든 싫든 호사다마(好事多魔)와 전화위복(轉禍爲福)의 순간을 맞는다. 어떤 이들은 자신의 뜻대로 일이 진행되지 못해 좋지 않은 결과를 초래하기도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이것을 슬기롭고 현명하게 대처해 자신의 운명을 바꾸는 절호의 기회로 탈바꿈시키기도 한다. ’It’s a heartache’와 ’Total eclipse of the heart’, ’Holding out for a hero’ 등으로 우리나라에서 꾸준한 리퀘스트를 받는 보니 타일러(Bonnie Tyler)는 자신에게 주어진 불리한 여건을 자신만의 장점으로 승화시킨 불사조 같은 인물이다. 1970년대 중반 목에 생긴 혹을 제거하는 수술을 받은 이후 허스키한 음색을 소유하게 된 보니 타일러는 197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 중반까지 ’Bette Davis eyes’로 유명한 킴 칸스(Kim Carnes)와 함께 대표적인 ’여성판 로드 스튜어트’로서 당대를 풍미했다. 1953년 6월 8일 영국 연방인 웨일즈에서 게이너 홉킨스(Gaynor Hopkins)라는 본명으로 태어난 그녀의 음악은 1970년대와 1980년대가 확연하게 구별된다. ’It’s a heartache’로 대표되는 어쿠스틱 스타일이 두드러진 성인 취향의 팝이 그녀의 1970년대를 정의했다면, 미트 로프(Meat Loaf)의 음반 제작으로 유명한 작곡자 겸 제작자인 짐 스타인만(Jim Steinman)과 손잡은 1980년대 이후부터는 오페라 형식의 웅장하고 화려한 곡들이 그녀의 후반기를 책임졌다. 1978년, 빌보드 싱글 차트 3위를 기록한 타일러의 ’It’s a heartache’는 국내에서도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1980년대 보니 타일러의 음악과는 달리 경쾌한 전형적 어덜트 컨템포러리 스타일인 이 곡은 그녀의 두 번째 정규 앨범의 타이틀 트랙이었다. 이후 전자 음원이 없는 포크와 컨트리 성향의 음반을 공개했지만 만족할 만한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1980년대 초반에 음반사를 RCA에서 콜롬비아로 옮겨 회심의 역작을 구상하면서 제2의 도약을 준비한다. 1983년 세상에 공개된 < Faster Than The Speed Of Night >은 보니 타일러에게 새로운 음악 인생을 열어 준 걸작 앨범이다. 그녀를 대표하는 ’Total eclipse of the heart’는 1983년 10월 무려 4주 동안이나 빌보드 싱글 차트 정상의 자리를 지켰다. 뒤이어 후속곡 ’Take me back’도 46위를 기록하면서 1984년에 거행된 그래미상 시상식에서 가장 유력한 여자 가수상 후보로 예견되었으나 그녀는 ’Flashdance.....what a feeling’의 주인공 아이린 카라(Irene Cara)에게 영광의 트로피를 양보(?)했다. ’Total eclipse of the heart’가 한 달 동안 싱글 차트 1위를 지키고 있을 때 바로 그 밑에서 3주간이나 2위를 지킨 노래도 짐 스타인만이 작곡하고 프로듀싱 한 에어 서플라이(Air Supply)의 ’Making love out of nothing at all’이었다. 그 정도로 당시 짐 스타인만의 명성은 하늘을 찌를 만큼 기세가 등등했다. 강산이 변한다는 10년에 2년이 더 지난 1995년에는 여성 댄스 팝 가수 니키 프렌치(Nicki French)가 ’Total eclipse of the heart’를 댄스 스타일로 커버해 다시 한번 싱글 차트 2위의 자리에 올려놓음으로써 이 곡이 전천후 명곡임을 재확인시켰다. 1984년, 미 전역을 춤바다의 물결로 침몰시킨 영화 < 푸트루스 >의 사운드트랙에는 강력한 보컬과 드럼 연주가 휘몰아치는 ’Holding out for a hero(34위)’가 수록되어 그녀의 지속적인 인기를 유지시켜 주었고, 1920년대 SF 영화를 복원해 1984년에 재개봉한 < 메트로폴리스 >에 삽입된 ’Here she comes(76위)’ 같은 영화 수록곡들을 취입하면서 비교적 여유 있는 한 해를 보냈다. 1986년에는 < Secret Dreams & Forbidden Fire >로 다시 한번 도약을 시도했지만 3년 전과 같은 센세이셔널한 결과를 재현하는데는 실패했다. 이전의 앨범 < Faster Than The Speed Of Night >처럼 짐 스타인만 식의 장대한 스케일이 반복되었으며 대부분 곡들의 길이도 5분대를 훌쩍 뛰어 넘었기 때문에 싱글로 커트 하기엔 약간 무리가 따랐다. 팝 메탈의 기폭제 역할을 한 본 조비(Bon Jovi)의 ’You give love a bad name’(1986년 11월 1위)과 비슷한 멜로디를 가진 ’If you were a woman (And I was a man)’만이 1986년 77위를 끝으로 추락하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하지만 이 곡은 1990년대 초반에 국내 자동차 광고의 배경 음악으로 쓰인바 있어 우리 귀에 그다지 낯설지 않다. 1970년대 후반 ’It’s a heartache’의 대대적인 인기로 우리나라에서 개최된 국제 가요제에도 참가해 그 특유의 거친 허스키 음색을 직접 들려준 이 금발의 미녀는 천재 아티스트 마이크 올드필드(Mike Oldfield)의 1987년 음반 < Islands >에 게스트 보컬로 초청되어 그녀만의 보컬 전율을 다시 한번 과시하기도 했다. 보니 타일러는 1990년대 후반까지 꾸준하게 신보를 발표했지만 그 작품들은 제대로 조명을 받지 못한 채 금새 잊혀졌다. 하지만 ‘It’s a heartache’와 ‘Total eclipse of the heart’의 메아리는 아직까지 우리의 뇌리에 남아 그녀의 노래들처럼 격정적인 환희와 감동을 전한다.
1980년 영국에서 날아온 데드 오어 얼라이브(Dead or Alive)의 음악은 뉴웨이브 댄스팝으로 정의되지만 사실 그 속을 들춰보면 여러 가지 음악적 요소들이 내재되어 있다. 이 성분들이 어지러이 널려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유심히 보고 들으면 기계의 톱니바퀴처럼 정확하게 맞물려 돌아가고 있다. 우선 프론트 우먼이라 해도 의심치 않을 정도로 기막히게 여성 분장을 한 보컬리스트 피트 번스(Pete Burns)의 ... 1980년 영국에서 날아온 데드 오어 얼라이브(Dead or Alive)의 음악은 뉴웨이브 댄스팝으로 정의되지만 사실 그 속을 들춰보면 여러 가지 음악적 요소들이 내재되어 있다. 이 성분들이 어지러이 널려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유심히 보고 들으면 기계의 톱니바퀴처럼 정확하게 맞물려 돌아가고 있다. 우선 프론트 우먼이라 해도 의심치 않을 정도로 기막히게 여성 분장을 한 보컬리스트 피트 번스(Pete Burns)의 외형에선 글램적인 요소를, 그리고 그가 데드 오어 얼라이브를 조직하기 이전에 몸담았던 미스테리 걸스(Mystery Girls)와 나이트메어스 인 왁스(Nightmares in Wax)같은 밴드에서 어둠을 찬미했기 때문에 고딕적인 분위기도 있다. 음악적으로는 팝과 댄스뿐만 아니라 록, 펑크(funk), 디스코 등이 혼재되어 있어 훨씬 더 복잡하지만 듣고 춤추면서 즐기기엔 안성맞춤이다. 이들의 음악을 만들어 줬던 재단사는 1980년대 릭 애슬리(Rick Astley)의 ‘Never gonna give you up'', 카일리 미노그(Kylie Minogue)의 ’I should be so lucky‘ 등을 만들었던 ‘스톡-아이트켄-워터맨(Stock-Aitken-Waterman) 사단’이었다. 데드 오어 얼라이브의 대표적 히트곡인 ‘You spin me round(Like a record)(85년 11위)’와 ‘Brand new lover(87년 15위)’도 이들이 작곡했다. 비틀즈의 고향 리버풀에서 출발한 이들은 피트 번스(Pete Burns/보컬)를 중심으로 마티 힐리(Marty Healey/키보드), 미치(Mitch/기타), 수 제임스(Sue James/베이스), 조 머스커(Joe Musker/드럼)의 5인조 체제였으나 리더 피트의 화장만큼 짙은 그의 카리스마 때문에 잦은 멤버 교체를 겪었다. 1980년대 중반에서 후반을 왕성한 활동으로 보낸 ‘죽거나 혹은 살거나’는 이후 뉴웨이브가 급속히 쇠퇴하던 때 오버그라운드에서는 자취를 감췄지만 지속적인 음악 활동을 하고 있다. 1994년엔 일본 팬들만을 위한 CD를 발표했을 정도로 이들에 대한 일본에서의 인기는 예나 지금이나 열광적이다. 데드 오어 얼라이브의 짙은 메이크업, 화려한 의상과 같은 비주얼한 외모, 록커와 록팬들로부터 얻은 음악적 지지, 그리고 유독 일본 내에서의 좋은 평판 등은 일본의 국보급 록밴드 엑스 재팬(X-Japan)에 영향을 줬다. 지금까지 이들의 CD는 국내에 단 한 장도 라이센스로 발매되지 않았다.
노래 : Altered Images (얼터드 이미지스)
뉴웨이브-포스트펑크 밴드 뉴웨이브-포스트펑크 밴드
노래 : Lisa Lisa & Cult Jam (리사 리사 앤 컬트 잼)
감각적인 유로 팝/댄스를 ‘연기’했던 밀리 바닐리는 팝 역사에 ‘희대의 사기꾼’이라는 오명을 남긴 남성 듀오다. 로브 필라투스(Rob Pilatus)와 패브 모번(Fab Morvan)으로 구성된 이들은 잘 생긴 외모에 수준급의 음악을 선사해서 순식간에 엄청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이들의 데뷔앨범 < Girl You Know It`s True >는 데뷔와 동시에 차트 정상에 등극했으며 전세계적으로 1천만장 이상이 ... 감각적인 유로 팝/댄스를 ‘연기’했던 밀리 바닐리는 팝 역사에 ‘희대의 사기꾼’이라는 오명을 남긴 남성 듀오다. 로브 필라투스(Rob Pilatus)와 패브 모번(Fab Morvan)으로 구성된 이들은 잘 생긴 외모에 수준급의 음악을 선사해서 순식간에 엄청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이들의 데뷔앨범 < Girl You Know It`s True >는 데뷔와 동시에 차트 정상에 등극했으며 전세계적으로 1천만장 이상이 팔려나갔다. 보니 엠의 프로듀서로 유명한 프랭크 파비안(Frank Farian)이 프로듀스한 이 앨범은 절정의 팝 감각을 보여주고 있었다. 유로 디스코와 랩, 팝 사운드가 잘 버무려져서 팬들의 큰 호응을 얻으며 팝 차트를 잠식했다. ‘I`m gonna miss you’를 포함해 수록곡 중 무려 4곡이 차트 5위권 내에 올랐다. 그 여세로 이들은 그래미 신인상까지 수상했다. 그러나 이러한 성공시대는 채 1년을 넘지 못하고 끝나고 만다. 1989년 12월 이들이 앨범 녹음 과정에서 실제로 아무런 노래도 부르지 않았고 무대에서는 단지 붕어처럼 ‘립싱크’만 했다는 사실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래퍼 찰스 쇼(Charles Shaw)의 폭로에 의해 밝혀진 이 해프닝은 팬들과 평단의 엄청난 분노를 불러일으켰고 급기야 그래미 측에서도 신속히 이들의 신인상 트로피를 박탈했다. 결국 이 파문은 프로듀서 프랭크 파비안의 시인과 래퍼 찰스 쇼에게 보상금을 주는 형식으로 일단락 되는 듯했다. 하지만 깜박 속았던 팬들의 분노마저 가라않질 수는 없었다. 밀리 바닐리는 2년 후 자신들이 직접 노래해서 만든 앨범 < Moment Of Truth >를 발표했지만 이번엔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시간이 흘러 1998년 4월 멤버 중 한 명인 로브 필라투스는 죄책감 때문인지 마약을 과다복용해서 사망함으로써 비극적 최후를 맞았다. 그의 나이 고작 서른 둘이었다. 이로써 사상 최단기간 동안 팝 음악계를 흥분시켰고 또한 격노하게 만든 밀리 바닐리는 영원히 기억 저편으로 사라졌다. 이 ‘전대미문의 사기극’이 시사하는 바는 분명하다. MTV 뮤직비디오의 비주얼적 측면에만 치중하던 ‘비디오 가수’들에게 경종을 울렸다. 아무리 훌륭한 외모의 가수라도 가창력이 없다면 미국 시장에서는 절대로 준엄한 심판이 뒤따른다는 현실을 알렸다. 이런 것이 바로 받아들여야 할 선진문화가 아닐까. 립싱크가 판을 치고 오히려 옹호되는 국내 가요계에서도 한번 곰곰이 생각해 봐야 할 문제일 듯하다. 국내 팬들에게 흥미로운 것이 또 하나가 있다. 익히 알려졌지만 1989년에 나온 이들의 히트곡 ‘Girl you know it`s true’가 서태지와 아이들의 기념비적 명곡 ‘난 알아요’와 무척이나 흡사한 구조를 가졌다는 것이다. 전주 부분의 신서사이저로 찍어내는 음이나 코러스 부분 그리고 전반적인 진행과 래핑이 아주 비슷하다. 아마 서태지가 많이 참조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이 두 곡을 ‘비교감상’해보는 것도 재미있는 청취거리다.
소울 펑크 가수 소울 펑크 가수
노래 : A Flock of Seagulls (플록 오브 시걸스)
1990년대 중반 드루 베리모어와 아담 샌들러가 주연한 < 웨딩 싱어 >는 1980년대를 배경으로 한 로맨틱 코미디 영화다. 영화 종반부에 비행기를 타고 떠난 드루 베리모어를 찾기 위해 아담 샌들러는 공항으로 간다. 특이한 헤어스타일에 원색의 옷을 입은 뚱뚱한 항공사 직원은 표를 구입한 아담에게 묻는다. “어 플록 오브 시걸스 좋아하세요?” 영국의 리버풀 출신으로 비틀즈의 동향 후배인 뉴웨이브 밴드 ‘어 플록 오... 1990년대 중반 드루 베리모어와 아담 샌들러가 주연한 < 웨딩 싱어 >는 1980년대를 배경으로 한 로맨틱 코미디 영화다. 영화 종반부에 비행기를 타고 떠난 드루 베리모어를 찾기 위해 아담 샌들러는 공항으로 간다. 특이한 헤어스타일에 원색의 옷을 입은 뚱뚱한 항공사 직원은 표를 구입한 아담에게 묻는다. “어 플록 오브 시걸스 좋아하세요?” 영국의 리버풀 출신으로 비틀즈의 동향 후배인 뉴웨이브 밴드 ‘어 플록 오브 시걸스(A Flock Of Seagulls)는 1980년에 전열을 정비했다. 베이스에 프랭크 머드슬리(Frank Maudsley), 기타는 폴 레이놀즈(Paul Reynolds), 보컬과 기타엔 마이크 스코어(Mike Score), 그리고 드럼엔 그의 동생 알리 스코어(Ali Score)의 구성원들 중에서 프랭크와 밴드 리더인 마이크가 전직 헤어드레서 출신이기 때문에 이들의 머리 모양은 매우 독특했으며 의상도 원색의 화려한 옷을 고집했다. 영화에 나온 그 항공사 직원은 바로 ‘어 플록 오브 시걸스’ 그 자체였으며 영화에서 이 밴드에 대한 언급을 삽입함으로써 1980년대 분위기를 훌륭하게 살려냈다. 이들은 1981년 데뷔앨범을 발표해 언더그라운드에서 주목을 받았고 이듬해에 나온 2번째 음반 < A Flock Of Seagulls >부터 자신들의 음악 방향타를 정확하게 설정한 4인조는 싱글 차트 9위까지 오르며 뉴웨이브의 고전으로 자리를 굳힌 ‘I ran(So far away)’와 연주곡 ‘D.N.A.’, 그리고 현재 CBS FM에서 오후 2시에 방송되는 ‘FM 팝스’의 시그널 음악으로 사용되는 ‘Space age love song’(1983년 싱글차트 30위)과 같은 곡들이 MTV의 막강한 지원에 힘입어 인기가 상승했다. 대부분의 뉴웨이브 밴드들은 연주 음악을 하지 않았지만 ‘4마리의 갈매기들’은 수준 급의 연주를 했기 때문에 ’D.N.A.’로 그래미 최우수 록부문 연주곡 상을 수상했다. 1983년에 나온 < Listen >에서는 ‘Wishing(If I had a photograph of you)’가 싱글차트 26위에 올랐고 연이어 나온 < The Story Of A Young Heart >에서는 ‘The more you live, The more you love’만 56위를 차지하는 부진을 보이자 약간의 멤버 교체가 있었다. 폴 레이놀즈 대신 기타리스트로 임명장을 수여 받은 게리 스테드닌(Gary Steadnin)이 새로운 키보디스트 크리스 크라이사피스(Chris Chryssaphis)와 함께 입성했다. 새로운 식구와 함께 한 5번째 앨범 < Dream Come True >를 1986년에 공개했지만 이 음반으로 혹독한 침체기를 겪고나서 곧 밴드를 해체했지만 1989년 다시 재 결성해서 10여 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꾸준하게 공연 위주의 활동을 하고 있다. 1982년부터 1986년까지 연속적으로 나온 3장의 앨범들이 시간이 지날수록 대중의 인기와 반비례했다는 것은 그만큼 대중 음악에 대한 청취자들의 기호가 급속히 변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 4장의 음반은 음악적인 면이나 사운드적인 면에서 별다른 차이점이 없었지만 어 플록 오브 시걸스는 불과 4년 사이에 천당과 지옥을 경험했다. 변덕스런 유행에 의해 희생된 또 하나의 제물 밴드다.
노래 : Pointer Sisters (포인터 시스터즈)
청아한 음색과 미인은 아니지만 이지적이고 고결한 모습으로 다른 가수들과는 확실한 차별성을 둔 제니퍼 원스(Jennifer Warnes)는 영화 < 사관과 신사 >와 < 더티 댄싱 >의 주제곡 'Up where we belong'과 '(I've had) The time of my life'로 1980년대에 알려졌지만 음악을 꼼꼼히 찾아 듣는 사람들에겐 그 이전인 1977년에 전미 차트 6위를 차지한 'Rig... 청아한 음색과 미인은 아니지만 이지적이고 고결한 모습으로 다른 가수들과는 확실한 차별성을 둔 제니퍼 원스(Jennifer Warnes)는 영화 < 사관과 신사 >와 < 더티 댄싱 >의 주제곡 'Up where we belong'과 '(I've had) The time of my life'로 1980년대에 알려졌지만 음악을 꼼꼼히 찾아 듣는 사람들에겐 그 이전인 1977년에 전미 차트 6위를 차지한 'Right time of the night'로 이미 익숙해진 여가수다. 우리나라에서는 이 두 곡 외에도 1987년에 공개한 'Famous Blue Raincoat'로 다운타운을 점령하며 국내 팬들과의 착상에 다시 한번 성공하기도 했다. 1947년 3월 3일, 시애틀에서 태어난 제니퍼 원스는 갓 20살이던 1967년에 텔레비전 쇼 프로그램에 고정으로 출연하면서 인지도를 쌓기 시작해 이듬해에 뮤지컬 < 헤어 >에 주연 급으로 출연하면서 가수로서의 워밍업을 시작했다. 뮤지컬에서 능력을 인정받은 그는 정치, 사회적으로 어수선하던 1968년에 차분한 포크 성향의 데뷔앨범 < I Can Remember Everything >으로 가멸찬 스타트를 했지만 블루스 리바이벌과 사이키델릭이 대세이던 당시의 음악 시장에 삼투하지 못했다. 1969년에는 더 후(The Who)의 노래 제목에서 힌트를 얻은 듯한 앨범 < See Me, Feel Me, Touch Me, Heal Me >로 기백 있는 두 번째 도전을 시도했지만 이 역시 철저히 가려졌다. 좌절한 제니퍼 원스는 3년 동안 신작을 발표하지 않은 채 자신의 정체성을 심각하게 고민한 후 벨벳 언더그라운드(Velvet Underground)의 멤버였던 존 케일(John Cale)이 프로듀서로 참여한 3집 < Jennifer >를 발표했지만 이 역시 성공하지 못하자 개인적인 좌절을 마음에 안고 캐나다 출신의 거물 싱어 송라이터 레너드 코헨(Leonard Cohen)의 백 보컬리스트가 되었다. 하지만 제니퍼 원스는 레너드 코헨으로부터 많은 것을 배우고, 공감하고, 느끼게 된다. 결국 레너드 코헨은 제니퍼 원스의 '멘토'와 같은 존재가 되었고 제니퍼는 레너드 코헨에 대한 존경의 뜻으로 1987년에 그의 노래들로만 채워진 명반 < Famous Blue Raincoat >를 내놓아 흠모의 정을 표했다. 이 앨범은 미국에서는 72위까지 밖에 오르지 못했지만 국내에서 이 타이틀곡만큼은 라디오 프로그램을 확실히 장악했고 지금도 비 오는 날이면 신청이 끊이지 않는 그의 시그니처 송이 되었다. 제니퍼 원스가 세인들의 주목을 받은 것은 1977년에 자신의 이름을 타이틀로 내세운 4집에서 컨트리 풍의 'Right time of the night'이 빌보드 싱글 차트 6위에 오르면서부터. 후속 곡 으로 낙점된 발라드 'I'm dreaming'이 50위에 랭크되는 성적을 거둔 그는 1979년에 다섯 번째 음반 < Shot Through The Heart >을 발표해 컨트리 팝 스타일의 'I know a heartache when I see one'이 19위를 차지하며 '원히트원더 가수'라는 꼬리표를 뗐다. 그로부터 8년 동안 제니퍼 원스는 정규앨범 제작에 착수하지 않았지만 그 사이 그는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화려하고 바쁜 시간을 보내는 아이러니를 맞이했다. 제니퍼 원스는 1982년에 리차드 기어와 데보라 윙어가 주연한 영화 < 사관과 신산 >의 주제곡 'Up where we belong'을 허스키 보이스로 유명한 블루 아이드 소울 가수 조 카커(Joe Cocker)와 듀엣으로 불러 그해 가장 큰 히트 곡이 되었다. 이 곡은 3주 동안 싱글 차트 정상을 지켰으며 그래미 최우수 듀엣 부문과 아카데미에서 주제가 부문도 수상하는 그랜드슬램을 달성했다. 이제 제니퍼 원스는 더 이상 '레너드 코헨'의 백 보컬리스트가 아니라 당대를 대표하는 여가수로 그 위치가 격상됐다. 하지만 이 노래의 스매시 히트는 그를 옭아맸다. 1983년에는 당시 신인이었던 탐 크루즈가 주연한 미식축구 영화 < All The Rights Moves/뜨거운 가슴으로 내일을 >의 동명 주제곡을 크리스 톰슨(Chris Thompson)과 함께 부르며 'Up where we belong'의 성공 공식을 그대로 따랐으나 영화와 주제곡 모두 참패하자 제니퍼 원스는 다시 자신 속으로 움츠려 들었다. 4년 후인 1987년, 이 지적인 여가수는 다시 남성 가수와 함께 영화 주제곡을 취입했다. 바로 'Unchained melody'로 유명한 라이처스 브라더스(Righteous Brothers)의 멤버였던 빌 메들리(Bill Medley)와 함께 그 유명한 댄스 무비 < 더티 댄싱 >의 주제가 '(I've had) The time of my life'를 부른 것. 이 곡으로 제니퍼 원스는 'Up where we belong'으로 달성한 그랜드슬램(싱글차트 1위, 그래미 수상, 아카데미 주제가 부문 수상)을 재현하며 다시 한번 영화 주제가 여왕으로서의 명성을 이어갔다. 1992년에 발표한 일곱 번째 앨범 < The Hunter >와 2001년에 공개한 8집 < The Well >은 빌보드 앨범차트 200위에 랭크되지도 못한 채 대중들과의 접점 찾기에 실패했지만 < The Well >에 수록된 빌리 조엘(Billy Joel)의 원곡을 재해석한 'And so it goes'는 국내에서 은은한 사랑을 받았다.
1990년대 후반 일기예보가 발표한 ‘좋아 좋아’의 클라이맥스 소절을 들었을 때 많은 음악 팬들은 팝록, 어덜트 컨템포러리 싱어 케니 로긴스(Kenny Loggins)가 1982년에 공개한 ‘The more we try’를 떠올렸다. 일기예보의 노래가 케니 로긴스의 발라드 스타일보다 업템포로 밝은 면을 강조했지만 클라이막스의 기본 멜로디는 같았다. ‘The more we try’는 ‘Forever’, ‘Footl... 1990년대 후반 일기예보가 발표한 ‘좋아 좋아’의 클라이맥스 소절을 들었을 때 많은 음악 팬들은 팝록, 어덜트 컨템포러리 싱어 케니 로긴스(Kenny Loggins)가 1982년에 공개한 ‘The more we try’를 떠올렸다. 일기예보의 노래가 케니 로긴스의 발라드 스타일보다 업템포로 밝은 면을 강조했지만 클라이막스의 기본 멜로디는 같았다. ‘The more we try’는 ‘Forever’, ‘Footloose’와 함께 우리나라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케니 로긴스의 베스트 트랙이다. 1948년 1월 7일 미국의 워싱턴 주에서 태어난 케니 로긴스는 1970년대 초반 짐 메시나(Jim Messina)와 함께 포크록 듀오 로긴스 & 메시나(Loggins & Messina)를 만들어 ‘Your Mama don''t dance(4위)’나 ‘Thinking of you(18위)’같은 히트곡을 배출했는데 특히 ‘Your mama don''t dance’는 1988년 팝메탈 밴드 포이즌(Poison)이 커버해 다시 한번 탑 텐에 올려놓아 다시 한번 명곡임을 입증했다. 케니는 성공적인 듀엣 활동을 접고 1977년부터 결별해 본격적으로 독립 활동을 시작해 멜리사 맨체스터(Melissa Manchester)와 공동으로 작곡한 ‘Whenever I call you friend(5위)’를 비롯해 ‘This is it(11위)’, 케니 로긴스의 오리지날을 두비 브라더스가 리메이크해 차트 정상은 물론 그래미 올해의 레코드를 수상한 ‘What a fool believes’ 등으로 1970년대를 마감했다. 그의 진정한 성공은 1980년대를 맞이하면서 화려하게 개화하기 시작했다. 1982년에 저니(Journey)의 보컬리스트 스티브 페리(Steve Perry)와 호흡을 맞춘 ‘Don''t fight it(17위)’와 ‘Heart to heart(15위)’, 그리고 유독 국내에서 사랑 받았던 ‘The more we try’가 들어 있는 그의 역작 < High Adventure >는 곧 다가올 성공에 대한 워밍업이었다. 1984년부터 쏟아지는 케니 로긴스의 히트곡들은 우연인지 필연인지 거의 모두가 영화에 삽입된 노래들이었다. 그의 대표곡 ‘Footloose(1위)’와 ‘I''m free(22위)’는 영화 < 풋루스 >의 사운드트랙에 수록된 노래들이었고, ‘Danger zone(2위)’은 < 탑 건 >에서, ‘Meet me half way(11위)’는 < 오버 더 탑 >으로부터, ‘Nobody''s fool(8위)’은 < 캐디섁Ⅱ >에서 배출된 히트 싱글들이다. 그러나 이 ‘Nobody''s fool’을 마지막으로 싱글 차트와의 친분을 정리한 케니 로긴스는 1990년대 중반을 기점으로 가족의 소중함과 어린이들을 위한 음반을 만드는데 열중했다. 1990년대 초반 아내와의 이혼이 그에겐 큰 충격이었던 셈이다. 그의 예민하고 가녀린 목소리는 ‘Danger zone’이나 ‘Don''t fight it’처럼 강한 음악보다 ‘The more we try’나 ‘Forever’, ‘Whenever I call you friend’와 같은 차분하고 부드러운 노래에 더 잘 어울린다. 그의 성공은 팝시대로 대표되는 1980년대 음악 풍토에 정확히 들어맞는 시대적 요청이었기에 가능했다.
더 이상의 수식이 필요 없는 배우 에디 머피는 80년 ABC의 < saturday night live >에 캐스팅 되었고, 그때부터 은막의 무대에서 성공적인 경력을 갖추게 되었다. 형사 닉 놀테와 함께 범죄를 추적하는 죄수 역할로 출연한 <48시간>으로 영화에 데뷔했으며, 이 영화들은 성공적 흥행결과에 힘입어 속편으로 이어졌다. 또한 <베벌리 힐즈 캅>의 대 히트로 90년대 초 최고의 코미디 배우로 자리 매김했다... 더 이상의 수식이 필요 없는 배우 에디 머피는 80년 ABC의 < saturday night live >에 캐스팅 되었고, 그때부터 은막의 무대에서 성공적인 경력을 갖추게 되었다. 형사 닉 놀테와 함께 범죄를 추적하는 죄수 역할로 출연한 <48시간>으로 영화에 데뷔했으며, 이 영화들은 성공적 흥행결과에 힘입어 속편으로 이어졌다. 또한 <베벌리 힐즈 캅>의 대 히트로 90년대 초 최고의 코미디 배우로 자리 매김했다. 공포 영화의 대명사 웨스 크레이븐 감독의 영화 <브루클린의 뱀파이어>에 출연하여 새로운 이미지 변신을 시도하였으며 <너티 프로페서>에서 1인 7역이라는 놀라운 연기를 보여주며 미국 박스오피스를 강타해 재기에 성공했다. 98년에도 동물들을 앞세운 <닥터 두리틀>이 흥행에 성공했다. 2000년에 출연한 <너티 프로페서 2>에서는 96년의 전편에 비해서 업그레이된 1인 8역의 놀라운 연기를 보여주기도 하였다.

에디 머피의 놀라운 재능중에 하나는 바로 목소리 연기이다. 98년 디즈니의 <뮬란>에서는 무섭고 능력있는 용이 아닌 귀여운(?) 용 무슈 역으로 나와 이 애니메이션을 재미있게 해주는 조연이었다. 2001년에는 드림웍스의 애니메이션인 <슈렉>에 수다쟁이 당나귀 덩키 역으로 나와 그의 재치있는 입담을 들려주기도 했다.

[필모그래피]

48시간(1982)|주연배우
비버리 힐스 캅(1984)|주연배우
비버리 힐스 캅 2(1987)|주연배우
48시간 2(1990)|주연배우
제이제이(1992)|주연배우
부메랑 (1992)(1992)|주연배우
비버리 힐스 캅 3(1994)|주연배우
너티 프로페서 (1996)(1996)|주연배우
메트로 (1997)|주연배우
뮬란(1998)|주연배우
닥터 두리틀(1998)|주연배우
너티 프로페서 2(2000)|주연배우
닥터 두리틀2(2001)|주연배우
슈렉(2001)|주연배우
플루토 내쉬(2002)|주연배우
아이 스파이(2002)|주연배우
쇼타임(2002)|주연배우
헌티드 맨션(2003)|주연배우
대디 데이 케어(2003)|찰리
슈렉 2(2004)|동키
슈렉 2(우리말 녹음)(2004)|주연배우
그것에 관하여(2005)|주연배우
드림걸즈(2006)|지미 썬더 얼리
슈렉 3(한글자막)(2007)|주연배우
슈렉 3(우리말녹음)(2007)|주연배우
슈렉 3(디지털-우리말녹음)(2007)|주연배우
슈렉 3(디지털-한글자막)(2007)|주연배우
노르빗(2007)|주연배우
미트 데이브(2008)|주연배우
1980년대 초반 놀란스(Nolans)의 ’Sexy music’ 이후 우리나라에서 가장 듣기 민망한 노래 제목으로 꼽히는 ’Touch me(I want your body)’로 1987년에 혜성처럼 등장한 댄스 팝 싱어 사만사 폭스(Samantha Fox)는 음악보단 귀여운 외모와 풍만한 몸매, 그리고 아슬아슬한 무대 의상으로 뭇 남성들(혹은 일부 여성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았던 육체파 여가수였다. 그녀에 대한... 1980년대 초반 놀란스(Nolans)의 ’Sexy music’ 이후 우리나라에서 가장 듣기 민망한 노래 제목으로 꼽히는 ’Touch me(I want your body)’로 1987년에 혜성처럼 등장한 댄스 팝 싱어 사만사 폭스(Samantha Fox)는 음악보단 귀여운 외모와 풍만한 몸매, 그리고 아슬아슬한 무대 의상으로 뭇 남성들(혹은 일부 여성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았던 육체파 여가수였다. 그녀에 대한 음악 전문가들의 평가는 언제나 ’더 이상 나쁠 수 없다’였지만 1980년대 후반 당시 사만사 폭스의 대중적인 인기는 다이아나 왕세자 비 다음으로 높았다. 1966년 4월 15일 영국에서 태어나 10대 시절이던 1980년대 초반 누드 모델과 포르노 배우로 활동하면서 입지를 넓힌 사만사 폭스는 자신의 무대를 음지(?)에서 양지로 옮겼다. 1986년 끝자락에서 공개된 폭스의 처녀작 < Touch Me >는 싱글 히트곡 ’Touch me(I want your body-4위)’와 ’Do Ya Do Ya(Wanna please me-87위)’를 잉태했고, 이어진 앨범에는 1980년대 가장 유명한 작곡 팀 중 하나인 에이트킨-스톡-워터맨(Aitken-Stock-Waterman)이 만든 ’Nothing’s gonna stop me now(80위)’와 리사 리사 & 컬트 잼(Lisa Lisa & Cult Jam)을 키운 풀 포스(Full Force) 사단이 제공한 ’Naughty girls(Need love to-3위)’, 그리고 롤링 스톤스(Rolling Stones)의 ’Satisfaction’이 댄스 버전으로 수록되어 있어 브레이크 없는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댄스 팝의 여우 사만사 폭스가 ’Satisfaction’을 재해석한 것은 2000년에 브리트니 스피어스(Britney Spears)가 ’Satisfaction’을 리메이크 한 것보다 한층 더 형식적인 구색을 맞추려는 위장전입이다. 1989에는 ’I wanna have some fun(8위)’과 더스티 스프링필드(Dusty Springfield)의 원곡을 새롭게 한 ’Only wanna be with you(31위)’의 인기를 바탕으로 9월 15일 내한 공연을 가져 세계적인 인기를 지속시키려고 했지만 그녀의 생명력은 오래가지 못했다. 1990년대 초반을 휩쓴 얼터너티브 록과 그런지 화산의 대폭발은 대중 음악의 지형도를 다시 그렸다. 상업적인 성공을 좇고 화려함을 추구하는 가수들은 1980년대의 잠복기를 거쳐 융기한 X세대에겐 공격의 대상으로 전락했다. ’암여우’ 사만사 폭스 또한 새로이 등장한 젊은 뮤지션들의 융단 폭격을 받았다. 그리곤 그런지의 광풍이 잠잠해진 1998년에 새로운 앨범을 발표하면서 재기의 가능성을 타진했으나 부활이 불가능하다는 사실만을 확인했다.
노래 : New Kids On The Block (뉴 키즈 온 더 블록)
90년대 초반 구미 각국에 ‘뉴 키즈’ 태풍이 불었다. 미국 보스톤 지역에서 발생한 그 태풍은 사정권에서 벗어난 지역으로 보이던 우리나라도 사정없이 강타했다. 그러나 태풍 뉴 키즈호는 우리에게 엄청난 피해만 남긴 채 스쳐 갔다. 92년 3월 서울 잠실벌에 불어온 뉴 키즈 태풍의 위력은 막강했다. 그것이 할퀴고 간 흔적에 한국 사회 전체가 들썩거렸다. 피해 상황은 사망 1명, 부상 40여 명, 외형적으로는 그리 큰... 90년대 초반 구미 각국에 ‘뉴 키즈’ 태풍이 불었다. 미국 보스톤 지역에서 발생한 그 태풍은 사정권에서 벗어난 지역으로 보이던 우리나라도 사정없이 강타했다. 그러나 태풍 뉴 키즈호는 우리에게 엄청난 피해만 남긴 채 스쳐 갔다. 92년 3월 서울 잠실벌에 불어온 뉴 키즈 태풍의 위력은 막강했다. 그것이 할퀴고 간 흔적에 한국 사회 전체가 들썩거렸다. 피해 상황은 사망 1명, 부상 40여 명, 외형적으로는 그리 큰 피해는 아니었으나 급기야 청소년 한 명이 목숨을 잃었다는 데 언론이 흥분했고 기성 세대들이 비탄의 목소리를 높였다. 우리에게 잊을래야 잊을 수 없게 된 외국 팝 그룹 ‘뉴 키즈 온 더 블록’. ‘소녀를 몰고 다니는’ 그 그룹은 한국의 소녀들도 자극해 사망자까지 발생한 비극적 사태를 몰고왔다. 사건 직후 공연을 주최한 레코드사 사장이 업무상 과실치사 혐의로 구속되었으며 문화부의 해외 팝스타 공연 불허조치로 예정되어 있던 공연이 무산 또는 연기되었다. 이 공연을 계기롤 우리 공연 문화가 수술대 위에 올랐고, 더 나아가 청소년 문화에 대한 전면적 검토가 이루어지기도 했다. 그만큼 뉴 키즈 사태의 후유증은 컸고, 많은 시간과 정력을 피해복구 작업에 쏟게 했다. 뉴 키즈 사태는 한마디로 틴에이저의 ‘히스테리’가 빚어낸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환호 괴성 아우성 열광 기절 졸도 등의 양상으로 나타나는 히스테리는 팝스타 공연만이 갖는 고유 현상이다. 십대들은 영화배우와 TV 탤런트보다는 가수에게 열광한다. 음반과 비디오로 접하고, 다른 연예계 스타들과는 달리 공연 현장에서 직접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무대를 통해 팬들과의 접촉이 빈번하게 이뤄지는 관계로 공연장 경비 등 ‘히스테리를 객석에 한정시키는’ 대책이 강구되지 않을 경우 사고는 필연적이기도 하다. 따라서 뉴 키즈 사태는 히스테리를 보인 청소년들을 매도할 것이 아니라 공연 기획 및 주최자의 준비 소홀에 그 책임을 지워야 한다. 팝스타와 관련한 틴에이저의 히스테리는 또 전통적이다. 우리나라만 하더라도 뉴 키즈가 팝 히스테리의 최초 사례는 아니다. 1971년 클리프 리차드 내한 공연 때와 80년 광주항쟁 직후 어수선한 분위기에서 개최된 레이프 가렛 공연 때는 흥분한 일부 여성 관중이 속옷을 벗어 던진 해프닝까지 발발하였다. 그때의 한국 사회는 지금처럼 ‘앙팡 테리블’(무서운 아이들)의 시대가 아니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그같은 해프닝은 충격적 히스테리였고, 따라서 뉴 키즈 공연 때 관객들이 보여준 히스테리는 오히려 약과일지도 모른다. 영미 팝계에는 고금을 통해 십대의 히스테리를 유발시킨 가수 또는 그룹이 끊임없이 출현했다. 엘비스 프레슬리, 비틀스. 롤링 스톤즈. 오스몬즈, 몽키스, 잭슨5, 베이 시티 롤러즈, 마이클 잭슨 등등... 이들 중 강도에 있어서 가장 압권은 역시 비틀스라 할 수 있고, 그 가운데 더러는 제도권 팝계가 ‘마케팅’의 차원에서 틴에이저의 히스테리를 겨냥해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작품’도 있다. 몽키스와 잭슨5(후자의 경우는 시각에 따라 ‘자생적’이라 볼 수도 있다)가 여기 해당한다. 뉴 키즈는 바로 이 방식의 최신형이다. 비틀스 현상의 충격이 너무 컸기에 십대 소녀들로부터 유별난 인기를 끄는 그룹이 등장할 경우 흔히 ‘제2의 비틀스’라고 붙여주는 습관이 있다. 몽키스가 그랬고, 베이 시티 롤러즈가 그랬다. 뉴 키즈가 데뷔할 당시 미국의 일부 다운타운 DJ들은 그들을 제2의 비틀스라 일컬었다. 그러나 제도권의 시나리오에 의해서 탄생된 상품이라는 점에서 뉴 키즈는 제2의 비틀스라기보다는 ‘제2의 몽키스’라고 해야 옳다. 그래서 60년대의 몽키스가 제도권의 도구라는 지적을 받았던 것처럼 뉴 키즈 역시 음악 관계자들로부터 비슷한 문책을 받았다. < 타임 >지는 90년 그들을 “모리스 스타(뉴 키즈의 프로듀서)라는 제페토의 조종에 따라 움직이는 피노키오”로 비유했다. 모리스 스타는 80년대 중반 ‘뉴 에디션’이라는 흑인 틴에이저 그룹(바비 브라운이 이 그룹 출신)을 키워낸 역량을 인정받은 바 있는 인물이다. 그가 뉴 키즈 사단을 구성하려 했을 때의 출발점은 ‘경제 상황에 대한 고려’였다. 80년대 중반 당시 미국의 경기는 침체에 빠져있었고 따라서 호주머니의 사정이 여의치 않았던 시점. 모리스는 시장 조사를 통하여 그래도 돈 쓸 여유가 있는 백인 중산층의 자녀를 겨냥한 틴에이저 그룹이면 승산이 있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그룹의 구성원은 그들을 충족시킬 백인 소년들이라야 했다. 그는 민첩하게 거리로 나가 백인 중산층이 압도적으로 운집해 있는 보스톤 시내를 샅샅이 뒤져 ‘쓸 만한 애’들을 픽업해냈다. 도니 왈버그, 조나단 나잇, 조단 나잇, 조 매킨타이어, 그리고 대니 우드 등 5인조 ‘동네의 새 아이들’이 이렇게 하여 짜여졌다. 뉴 키즈는 ‘가장 완벽한 중부 미국적 그룹’이 되었다. 중부 미국(Middle America)은 지역적으로 중부일뿐 아니라 중산층이 많이 사는 지역을 상징하기도 한다. 뉴 키즈는 백인 중산층 자녀를 전문적으로 상대하는 그룹답게 외모나 의상 등 외형 총체에서 ‘고생 없이 자라난 신세대 애들’의 이미지가 진하게 풍겨나왔다. 당연히 그들 공연장에는 대부분 부모가 중산층인 백인 십대 소녀들이 몰려들었다. 그래서 이 그룹은 옛날의 그룹들과는 여러 측면에서 차이를 드러냈다. 그 중 하나가 ‘인기와 돈의 관계’를 보는 시각이었다. 이들의 선배 그룹들은 통상적으로 공연을 개최하면서 기업으로부터의 후원을 꺼리는 경향을 보여왔다. 관객들에게 행여 돈벌이에 집착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뉴 키즈는 스폰서가 붙는 것 자체를 ‘성공의 징표’로 보고 그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도니 왈버그는 이렇게 털어놓는다. “팬들이 우릴 줄줄 쫓아오고 스폰서가 우리에게 계약서를 내미는 것은 내 입장에서 짜릿하기만 하다. 난 그들을 쳐다보며 ‘맥도날드, 여기서 나가주세요’라고 하지 않겠다. 난 ‘저와 함께 일해 보실래요?’라고 말하겠다.” 맥도날드 햄버거 회사는 90년 뉴 키즈 미국 순회 공연 때 스폰서로 나섰다. 맥도날드측은 그들의 후원자가 되면서 “뉴 키즈는 맥도날드사가 갖고 있는 것과 똑같은 가족의 가치관을 갖고 있는 매우 건전하고 가장 미국적인 그룹”이라며 즐거워했다. 뉴 키즈는 실로 90년대의 팝계가 ‘성공과 판매술’에 포인트를 두고 있다는 사실을 생생하게 반영하는 표본적 존재였다. 멤버 전원의 기계적 율동, 현란한 쇼무대, 십대 감각을 예리하게 찌르는 음악 모두가 마케팅과 판매신장의 구도 아래서 기초되었다. 레코드가 팔리지 않는다면 의미가 없고 싱글이 빌보드 차트 정상에 오르지 않으면 실패나 다름없다. 공연 티켓을 구입하는 데 어려움이 없는 십대 고객들이 공연장을 찾지 않으면, 또 아우성을 치지 않으면 게임은 끝이다. 이유는 단 하나, 돈에 접근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또한 돈을 긁어모으려면, ‘소구력이 있는 상품’을 생산해야 한다. 그것이 모리스 스타의 이념이었다. 그는 뉴 키즈를 구성하고 즉각 스파르타식 훈련을 통해 율동을 주입했다. 춤의 스타일은 빈틈없이 맞아 돌아가는 마이클 잭슨식의 리듬과 랩 뮤직 가수들이 구사하는 탄력적인 스텝을 혼합시켰다. ‘외형 가꾸기’와 더불어 음악의 색깔에도 신경을 기울였다. 모리스는 ‘전통적으로 대중에게 잘 먹히는’ 흑인 음악을 최적의 장르라고 판단했다. 그리하여 ‘멋진 춤, 검은 음악, 흰 피부’의 뉴 키즈 온 더 블록이 탄생했다. 모리스의 기획과정 및 생산과정은 매우 ‘유서깊은 방식’이었다. 인재의 발굴, 상품화, 소구력 제고, 품질관리, 마케팅 전략 도입 등 제반 방법은 이미 몽키즈나 잭슨5 시절에 적용된 바 있었던 것들이었다. 다만 소구 대상(백인 중산층의 십대 자녀)을 확실히 정하고 들어갔다는 점이 달랐다. 그러나 모리스 기획의 효력은 즉시 나타나지 않았다. 출범한 뒤 86년 첫 음반을 발매했으나 반응이 신통치 않았다. 문제는 소구 대상과 관련되어 있었다. 그때는 아직 뉴 키즈의 소구 대상이 팝계의 주체세력으로 군림한 시점이 아니었다. 그룹 유투나 휘트니 휴스턴 등의 록과 스탠다드팝을 소화할 수 있는 ‘20대 이상의 소비자들’이 팝시장의 주요 고객층을 형성하고 있었다. 뉴 키즈가 성공하려면 십대 소녀가 음반의 주구매층, 공연의 주관객층으로 떠올라야 했다. 그들의 매니저인 딕 스코트는 “팝 사람들이 시장을 지배하기 시작했을 때 비로소 성공은 찾아왔다”고 지적했다. 팝 사람들(Pop People)이야말로 뉴 키즈가 고대하고 있던 소구대상이었는데, 바로 ‘백인 틴에이저 걸’을 지칭했다. 그 시점이 이듬해 두 번째 음반 < 굳세게(Hangin’ Tough) >가 발표된 88년이었다. 그리고 이듬해 그들의 인기는 폭발했다. 90년까지 뉴 키즈의 앨범은 미국에서만 1천 5백만 장이 팔렸다. 그들의 뮤직 비디오는 3백 30만 개 이상의 판매고를 올려 그 부문 최고였던 마이클 잭슨의 기록을 앞질렀다. 89년과 90년 2년에 걸쳐 벌어들인 수입은 7천 8백만 달러나 되어 해마다 연예인 수입을 공개하는 < 포브스 >지의 리스트에 처음 오르면서 당당 5위에 랭크되었다(당시 1위는 코미디언 빌 코스비, 2위는 마이클 잭슨, 3위는 롤링 스톤즈 순이었고, 마돈나는 6천 2백만 달러로 8위를 차지했다). < 뉴욕 타임즈 >는 90년 뉴 키즈의 대성공을 더 많은 관객으로 향하려는 ‘흑인음악의 마케팅’과 ‘적절한 그룹을 시장의 적재적소에 심어놓은 프로듀서의 뛰어난 안목’ 등 두 가지 전략의 우연한 결합이 일구어낸 성과로 분석했다. 어쨌든 뉴 키즈는 잘 만들어진 상품이었다. 그러나 물리적으로 조립한 상품은 어딘가 허점이 있기 마련, 춤을 강조하다 보니 노래가 빈약해지고 특히 공연 현장에서 춤과 노래의 병행은 벅차게 되어 있다. 이 문제점을 가끔 노래를 틀어놓고 입만 벙긋거리는 소위 ‘립 싱크’로 커버할 수 밖에 없는데, 뉴 키즈도 이러한 범행(?)을 수시로 저질러 마돈나, 폴라 압둘, 자넷 잭슨 등과 함께 ‘앵무새 가수 집단’으로 분류돼 비난받기도 했다. 잠실 공연에서도 이 점이 지적된 바 있었다. 립 싱크의 그룹, 돈과 성공을 위해 조직된 그룹 가장 양키적인 그룹, 그리고 또 하나 언급할 뉴 키즈의 중요한 성격이 있다. 뉴 키즈 진영에 뉴 키즈 빼고는 스탭 전원이 흑인이라는 점이다. 프로듀서 모리스 스타, 매니저 딕 스코트를 위시하여 로드매니저, 보디가드, 공연사회자, 백 밴드 모두가 흑인들이다. 뉴 키즈는 ‘흑인이 생산, 관리하는 백인 상품’의 첫 케이스이기도 하다. 미국의 한 평론가는 이를 흑백의 조화로운 결합이라고 했다. 흑백의 결합? 아니다. 그것은 생산자와 상품의 결합이다.
‘모타운(Motown) 가의 황태자’ 마빈 게이의 보컬엔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아우라가 느껴진다. 냇 킹 콜과 프랭크 시나트라의 달콤한 크루닝(crooning) 창법과 샘 쿡의 호소력 짙은 가스펠의 기운을 온전히 흡수한 그는 카리스마가 느껴지는 보컬로 창조해내며 청중들을 흥분시켰다. 기운이 서려있는 듯한 그의 보컬은 ’보컬 연주의 대가’라는 영광스런 칭호에 어울린다. 그의 사후 등장한 수많은 소울 팝 가수들은 모... ‘모타운(Motown) 가의 황태자’ 마빈 게이의 보컬엔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아우라가 느껴진다. 냇 킹 콜과 프랭크 시나트라의 달콤한 크루닝(crooning) 창법과 샘 쿡의 호소력 짙은 가스펠의 기운을 온전히 흡수한 그는 카리스마가 느껴지는 보컬로 창조해내며 청중들을 흥분시켰다. 기운이 서려있는 듯한 그의 보컬은 ’보컬 연주의 대가’라는 영광스런 칭호에 어울린다. 그의 사후 등장한 수많은 소울 팝 가수들은 모두 그의 보컬에 영향받았음을 인정하며 그의 음악성에 아낌없는 찬사를 보냈다. 하지만 그의 영향력은 단지 탁월한 창법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그는 록음악 역사에 있어 ‘뜨거운 감자’와도 같은 ‘아티스트의 창작의 자유’를 얻기 위한 투쟁을 몸소 실천한 음악인이라는 점에서 그를 더욱 기억하게 한다. 70년대가 되기 전 만해도 밤낮으로 사랑과 낭만만을 얘기하며 소일하던 모타운식 소울 음악은 당시 대다수 흑인들이 공감해오던 ‘어두운 현실’엔 둔감했다. ‘팔리는 음악’을 원했던 회사측과의 마찰은 불가피 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음악’을 위한 신념을 굽히지 않았고, 이런 산고 끝에 록 역사를 대표하는 명반 < What’s going on >(1971)은 탄생했다 소울 음악은 60년대 그가 소속되어있던 모타운 레코드사를 통해 보다 대중적인 음악 문법으로 자리 잡은데 이어, 그는 같은 회사 소속의 스티비 원더와 함께 미국 대도시 후미진 곳에서 벌어지는 ‘게토 리얼리티를’ 자신의 노래에 담아냄으로써 소울이 ‘사회성’이란 화두를 본격적으로 끌어내는데 기여를 했다. 스티비 원더와 함께 그는 소위 후배 흑인 뮤지션들의 ‘대부’이다. 80년대 이스트 코스트 힙합의 분수령을 일군 퍼블릭 에너미(Public Enemy)의 프론트 맨 척 디(Chuck D)는 1988년도 명반 < It takes a nation of millions to hold us back >을 발표하며 롤링스톤지와 가졌던 인터뷰에서 ‘나는 이번 앨범에서 힙합의 < What’s going on > 버전을 내놓고 싶었다’ 라고 얘기할 정도로 마빈 게이의 유산을 이어받았다고 인정했다. 마빈 펜츠 게이 주니어라는 본명으로 1939년 4월 2일 워싱턴 디씨에서 태어난 그는 목사를 아버지로 둔 기독교 가정에서 어린시절을 보낸다. 하지만 다소 억압적인 가정환경은 그로 하여금 음악에 몰입하게 해 아버지 때문에 억눌린 영혼을 달래줄 위안이 된다.(어렸을 때부터 그는 아버지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고 한다) 고등학교 졸업 후 공군에 입대, 제대 후 고향으로 돌아와 그는 락 앤 롤 스타 보 디들리(Bo Didely)를 만나 그의 문하생이 된다. 1958년 두왑 그룹인 레인보우에 가입, 이듬해엔 시카고로 진출해 ‘문 그로우’ 라는 두왑밴드에서 활동하며 체스(Chess) 레코드에서 그의 ct첫 싱글 ‘Mama roocie’를 녹음한다. 미국 전역 투어에 나선 문 그로우는 디트로이트에서 공연을 하게 되었고, 당시 그의 연주를 지켜보던 모타운의 설립자 베리 고디 주니어(Berry Gordy Jr.)는 3옥타브가 넘는 그의 탁월한 테너 창법에 매료되었다. 이를 계기로 그는 1961년 모타운과 전속 계약을 체결하며 베리 고디와 운명적인(?) 관계를 시작한다. 처음엔 세션 드러머로서 모타운의 일원이 된 그는 모타운 간판스타이자 작곡가인 스모키 로빈슨과 함께 활동한다. 1961년 그는 사장인 베리 고디의 누이인 안나와 결혼한다(무려 18살의 연상). 사장과 사돈관계가 된 덕에 회사측에 전폭적인 지원을 얻게 된 그는 이듬해 첫 싱글 ‘Stubborn kind of fellow’(1962)를 발표하고 흥겨운 댄스 팝 ’Hitch hike’(1962)로 빌보드 Top 40에 진입하는 순조로운 출발을 보인다. 냇 킹 콜과 프랭크 시나트라의 크루닝 창법에 영향 받았던 그는 당시 격조 있는 발라드 음악을 원했지만, 회사 측은 그에게 흥겹게 흔들기 좋은 빠른 댄스 음악만을 요구했다. 큰 키에 수려한 용모를 지닌 덕에 유난히 여성 팬들이 많이 따랐던 그였지만, 무대에 올라 몸을 흔들며 청중들에게 즐거움을 줘야 한다는 것은 늘 못 마땅했다. 후에 그가 회고하길 ‘나는 무대에 나가 청중들 앞에서 내 엉덩이를 흔들어야 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했을 정도이니, 얼마 후 있을 회사 측과 창작권을 두고 생긴 갈등은 이미 데뷔 때부터 예견된 것이었다. 1960년대 내내 그는 모타운 사를 통해 꾸준히 히트곡을 발표했다. ‘Pride & joy’(1963)로 처음 Top 10에 진출한 그는 잇달아 발표한 싱글 ’How sweet it is’(1964), ‘Aint that peculiar’(1965)을 Top 10에 진입시킨다. 솔로로서 확고한 입지를 다져갈 무렵 그는 모타운 소속의 실력 있는 디바들과 듀엣 곡을 많이 취입했는데, 메리 웰즈(Mary Wells)과 함께 한 ’What’s the matter with you baby’(1964)을 시작으로, 킴 웨스튼(Kim Weston)과 함께 한 ’It takes two’(1966), 70년대 다이아나 로스(Diana Ross)와 함께 한 ‘My mistake is to love you’(1974)등이 대중적인 호응을 얻었다. 하지만 그와 가장 인상적인 호흡을 보여준 디바는 바로 타미 테렐(Tammi Terell)이었다. 그녀와 함께 했던 ‘Ain’t no mountain high enough’(1966), ’Your precious love’(1967), ’Ain’t nothing like the real thing’(1968), ’You’re all I need to get by’(1968) 모두 Top 10에 진입시키는 성과를 거둔다. 하지만 ‘팝 역사상 가장 궁합이 잘 맞는 콤비’는 안타깝게도 타미 테렐의 요절로 인해 지속되지는 못했다. 그에게 첫 팝 차트 넘버원의 영광을 안겨준 ‘I heard it through grapevine’(1968)로 그의 인기전선은 절정에 다다랐다. 이듬해 ’Too busy thinking about my baby’(1969), ’That’s the way love is’(1969)를 Top 10에 진입시키며 인기는 더해갔지만, 이내 활동 중단을 선언하고 만다. 데뷔 때부터 창작권을 두고 벌어진 회사 측과의 끈질긴 줄다리기는 무려 2년이라는 시간을 그에게 투쟁의 시간으로 만들었다. 달콤한 사랑타령으로 점철된 지금까지의 음악과는 다른, 자신이 내면에서 꿈틀거리는 무언가를 표출해보길 갈망했던 그는 ‘자신의 음악’을 얻기 위한 힘겨운 투쟁 끝에 결국 모타운 사의 백기를 받아내며 ‘음반 제작에 관한 모든 전권을 그에게 위임할 것’이라는 전리품을 얻어낸다. 흑인의 입장에서 아프로 아메리칸(Afro-America)의 비참한 현실을 늘 생각해왔던 그는 주저 없이 이런 자신의 고민을 음악 속에 녹여내는 작업을 했다. 흑인 빈곤문제, 실업, 월남전등, 70년대 초 그의 눈에 보인 흑인의 현실은 ‘참담함’이었다. 핑크빛 미래를 노래했던 발랄한 60년대의 흑인 음악은 슬라이& 페밀리 스톤(Sly & The Family Stone), 커티스 메이필드(Curtis Mayfield)등 기라성같은 흑인 뮤지션들에 의해 한층 진지하고 어두워져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그가 내놓은 것이 컨셉 앨범 < What’s going on >(1971)이었다. 흑인 음악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내놓은 컨셉 앨범 < What’s going on >은 회사 측에 우려에도 불구, 앨범 수록 곡 중 무려 4곡(What’s going on, God is love, Mercy, mercy, me Inner city blues)이 Top 10에 진입하는 성과를 거뒀고, 앨범은 지금까지 8백만장이라는, 당시로선 경이적인 판매고를 올렸다. 스트링을 동원한 세련된 연주 편곡, 참회록을 쓰듯 스토리 텔링(Storytelling) 방식으로 진행되는 진솔한 자기 고백은 당시 소울음악에선 맛볼 수 없었던 신선한 충격이었다. 앨범 < What’s going on >은 그의 음악 경력에 새로운 이정표가 되었다. 이 때부터 그의 음악성에도 뚜렷한 변화가 감지된다. ’Inner city blues’(1971)에서 목격했던 퍼커션의 가열 찬 울림은 70년대 흑인 음악의 대표 트렌드인 ‘펑키 사운드’로의 변화를 예고했고, 앨범으로는 발표 안 된 저주받은 싱글 ‘You ’re the man pt. 1, 2’(1972)에선 가성, 두성, 진성 등 한층 다채로워진 그의 보컬 연기가 압권이다. 재즈에 대한 평소의 관심은 영화 음악 작곡으로도 이어져 노래보다 연주 쪽에 관심이 반영된 영화음악 앨범 < Trouble man >(1972)으로 이어진다. < What’s going on >의 여파가 채 가시기도 전, 그는 이전의 고뇌하는 흑인 지성임을 포기하고 이번엔 사랑의 세레나데를 부르는 사랑의 전령사로 변신한다. 그의 두 번째 넘버원을 안겨다 준 앨범< Let’s get it on >(1973)은 ‘성 행위’를 찬미하는 노래들로 가득 찬 앨범으로 주변을 다시 한번 어리둥절하게 했다. 빌보드 No.1 곡인 ‘Let’s get it on’은 그를 단번에 섹시 스타로 변모시켰고, 그가 앨범에서 얘기했던 ’자연스러운 성의 표현 ‘은 80년대 들어 프린스나 조지 마이클같은 팝 스타들의 음악 세계로 계승된다. 하지만 그는 당시 첫 아내였던 안나와의 관계가 흔들리고 있었다. 재니스라는 여인과 이미 두 집 살림을 차려 아이까지 낳았던 그의 성적 편력은 결국 아내와의 별거로 이어졌고, 한동안 그 충격에 슬럼프에 빠져 마약으로 세월을 보내게 된다. 재기의 몸부림을 친 그는 베리 고디의 주선으로 만난 레온 웨어(Leon Ware)의 곡으로 채워진 앨범 < I want you >(1976)을 발표하지만, 수록곡 ‘I want you’, ’After the dance’가 약간 주목을 받았을 뿐이었다. 히트곡에 목말라하던 그는 1977년 런던 팔라디움 구장에서의 콘서트 더블 실황 앨범< Live at the Palladium >을 발표하며, 13분이 넘는 디스코 곡 ‘Got to give up’을 수록하고, 4분대의 싱글로도 커팅, 그의 세 번째 넘버 원 싱글로 등극된다. 전형적인 댄스뮤직이었던 ’Got to give up’은 팝 차트, 앨 앤 비 차트 1위를 석권하며 그에게 가수로서 회생의 길을 열어준다. 하지만 ‘Got to give up’의 기쁨도 잠시, 결국 그는 안나와 이혼을 하게 되고 ,이혼에 대한 위자료를 다음에 발표하는 앨범 인세로 한다는 합의를 보게 된다. 앨범 < Here, my dear >(1978)는 이런 배경에서 탄생했고 수록 곡 ’When did you stop loving me, When did I stop loving you’의 제목에서 알 수 있듯 만남과 해어짐에 이르기까지 있었던 그의 뼈저린 고해성사는 아름다운 가사말과 편곡의 세련됨에도 불구, 이렇다할 히트 싱글 없이 앨범은 파묻히며 그의 디스코그래피 중 가장 안 알려진 앨범이 되고 말았다.(엎친데 덮친격으로 안나는 앨범 내용이 사생활 침해라며 소송을 걸기에 이른다.) 첫 번째 아내와의 이혼에 이어 다시 몇 년간은 그에게 혼란의 시기였다. 두 번째 아내였던 제니스와 급기야 파경에 이르렀고, < Love Man >(1979-발매 취소)과 < In our life time >(1981)의 흥행실패는 그를 더욱 마약으로 치닫게 했다. 급기야 그는 1981년 20년간 그에게 산전수전(?) 다 겪게 했던 모타운 사를 떠나, 하와이로 이주, 새로운 출발을 모색한다. 정확히 1년 후인 1982년, CBS 레코드와 전속 계약하며 그에겐 마지막 걸작으로 남게 된 < Midnight Love >(1982)를 발표한다. ‘Let’s get it on’에 버금갈만한 농염한 보컬이 인상적인 싱글 ‘Sexual healing’이 팝 차트 3위까지 오르며 그는 화려하게 재기한다. 공백기 동안대중들과의 소원함을 해소하기 위해 TV 출연 등 다시 활발한 활동을 벌인 그는 베리 고디와 함께 토크쇼에 출연해 둘의 악연(?)을 만회해보려고도 했고, NBA 농구 경기때 미국 국가를 소울 창법으로 불러 논란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지미 헨드릭스가 우드스탁에서 연주했을 때 이후로 최대의 사건이었다.) 하지만 이런 그의 재기 의지는 이내 사그러들고 있었다. 이미 코케인에 찌들 때로 찌든 그의 몸은 말을 듣질 않았고 평소에 사이가 안 좋았던 목사인 아버지와의 관계는 조금도 나아질 조짐이 보이지 않았다. 결국 비극은 그의 아버지와의 사소한 말다툼에서 시작되고, 1984년 4월, 그의 45회 생일을 하루 앞둔 날, 심한 다툼 끝에 화를 가누지 못한 아버지가 쏜 총에 맞아 유명을 달리하고 만다. 그의 어이없는 죽음은 충격적이었다. 많은 흑인 뮤지션들은 그의 죽음을 애도했고, 이듬해인 1985년 모타운사와 CBS가 공동으로 그의 미 발표곡을 모은 < Dream of a life time >과 < Romantically Yours >를 내놓는다. 그에 대한 재평가도 활발히 이뤄져 < 롤링스톤 >을 비롯한 록 전문지들은 앞 다투어 그의 앨범 < What’s going on >을 팝 역사에 남을 명반으로 추대하기 시작했고, 1987년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그의 이름이 등재된다.
노래 : Earth, Wind & Fire (어스 윈드 앤 파이어 )
소울, 펑키 그룹 소울, 펑키 그룹
재즈 피아니스트 허비 핸콕은 40년이 넘는 활동기간 동안 정통 재즈에서부터 최첨단 일렉트로닉 악기를 내세운 재즈 퓨전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음악 세계를 선보여왔다. 재즈 피아니스트 빌 에반스의 영향이 느껴지는 강한 서정성의 < Maiden Voyage >(1965)에서 슬라이 & 패밀리 스톤 풍의 펑키 리듬이 압도적인 < Headhunters >(1973)에 이르기까지 그의 음악은 특정 스타일로 규정될 수 없다. ... 재즈 피아니스트 허비 핸콕은 40년이 넘는 활동기간 동안 정통 재즈에서부터 최첨단 일렉트로닉 악기를 내세운 재즈 퓨전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음악 세계를 선보여왔다. 재즈 피아니스트 빌 에반스의 영향이 느껴지는 강한 서정성의 < Maiden Voyage >(1965)에서 슬라이 & 패밀리 스톤 풍의 펑키 리듬이 압도적인 < Headhunters >(1973)에 이르기까지 그의 음악은 특정 스타일로 규정될 수 없다. 정통 재즈에서부터, R&B, 일렉트로닉 뮤직, 펑키 등 다채로운 음악지형도를 펼쳐온 그는 한마디로 ‘변신’을 즐기는 재즈맨이다. 1940년 4월12일 미국 시카고의 사우스사이스에서 허버트 제프리 핸콕(Herbert Jeffery Hancock)이라는 본명으로 태어난 그는 7살부터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 일찍 두각을 나타내 11살에 이미 시카고 심포니 오케스트라와의 협연으로 모차르트 협주곡 D장조를 연주하는 천재성을 보였다. 기계 다루는데도 재능을 보여 나중에는 재즈 뮤지션으로서는 특이하게 대학서 전자공학을 전공한다. 이런 경력은 그가 1960년대 일렉트릭 피아노인 펜더 로즈(Fender Rhodes)나 클라비넷(Clavinet)과 같은 키보드 사운드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되었다. 대학서 만난 색스폰 주자 행크 모블리, 트럼펫 주자 리 모건과 연주 활동을 하면서 도날드 버드의 권유로 1961년 뉴욕으로 진출해 그의 밴드에 가입하면서 본격적인 재즈맨의 길을 걷게 된다. 잠시 후 재즈 레이블 블루 노트(Blue Note)사가 그에게 계약을 요청, 이듬해인 1962년 데뷔작 < Takin’ off >(1962)를 내놓는다. 호레이스 실버(Horace Silver) 풍의 펑키한 피아노 주법이 인상적인 이 앨범의 수록곡 ‘Watermelon man’은 라틴 재즈 퍼커션 주자인 몽고 산타마리아(Mongo Santamaria)의 노래 버전으로 더 유명하다. 총 7장의 앨범을 블루 노트를 통해 발표하는 동안, 1993년 애시드 재즈그룹 US3가 커버해 유명해진 ‘Cantaloupe island’가 수록된 < Empyrean Isle >(1964)를 비롯하여 < Maiden Voyage >(1965), < Speak Like A Child >(1968)과 같은 명반을 통해 빌 에반스 풍의 서정성과 호레이스 실버의 펑키한 감각을 합쳐놓은 듯한 개성 어린 피아노 연주를 들려줌은 물론, 그의 탁월한 곡 쓰기 실력을 유감 없이 발휘한다. 재즈 솔리스트로서 1960년대 내내 왕성한 활동을 보였지만, 재즈의 대가 마일스 데이비스 퀸텟에서의 활동은 그가 보다 진취적인 재즈뮤지션으로 나아갈 수 있는 발판이 되었다. 토니 윌리암스(Tony Williams), 론 카터(Ron Carter), 웨인 쇼터(Wayne Shorter), 마일스 데이비스(Miles Davis) 그리고 허비 핸콕(Herbie Hancock)으로 이루어진 제2기 마일스 데이비스 퀸텟은 < E. S. P >, < Miles In The Sky >, < Socerrer >, < Nefertiti >, < Filles De Killimanjaro >와 같은 명반을 잇달아 발표한다. 당시 “Miles In The Sky”(1968)를 작업하던 중 마일스 데이비스의 권유로 일렉트릭 피아노를 연주하게 된 허비 핸콕은 칙 코리아(Chick Corea)와 함께 키보드 사운드를 바탕으로 70년대 재즈-록 퓨전의 선두주자로 군림하는 초석을 다진다. 마일스와의 활동이 그가 ‘음악에 다양한 시도를 할 줄 아는 뮤지션’으로 비상하는데 상당한 영향을 미쳤던 것이다. 마일스 데이비스가 ‘재즈-퓨전’으로의 음악성을 표방했던 1969년 허비 핸콕은 마일스를 벗어나 독립, 므완디시(Mwandish)라는 이름의 7인조 밴드를 결성한다. < Mwandish >(1970), < Crossing >(1971), < Sextant >(1973)에서 실험적인 ‘일렉트로닉-펑키’ 뮤직을 선보인 허비 핸콕은 다양한 종류의 키보드 사운드를 재료로 한 진보적인 재즈-록 퓨전을 선보이며 비평적 찬사를 얻는다. 이런 므완디시 밴드에서 보여준 허비 핸콕의 새로운 시도는 주목할 만했지만, 대중들의 반응은 냉담했다. 실험적 사운드에 천착한 음악이 대중들이 수용하기엔 어려웠던 것이다. 허비 핸콕은 자신의 밴드에 쏟은 열정만큼 대중적 성과가 나오지 않자, 당시 유행하던 R&B의 문법을 자신의 음악에 대거 도입한다. 슬라이 앤 더 패밀리 스톤을 통해 경험한 ‘펑키 사운드’에 자신의 지향을 정했고 그 결과 나온 < Headhunters >(1973)는 엄청난 파장을 몰고 온다. 빌보드 앨범 차트 13위까지 오른 이 앨범은 명료한 백 비트를 바탕으로 펑키 사운드가 전면에 부각된 ‘파티용 댄스뮤직’이었다. 200만장 판매라는 상업적 성공을 거두며 자신감을 회복한 그는 연이어 발표한 < Thrust >(1974), < Man-Child >(1975), < Secret >(1976)를 계속 히트시키며 재즈 펑크(Jazz- Funk)의 전도사로서 1970년대 내내 대중적 인기를 얻었다. 재즈 퓨전을 이 시기에 표방하면서도 그는 1977년 V.S.O.P.라는 팀을 결성, 1960년대 마일스 데이비스 퀸텟에서 연주를 같이 했던 멤버들과 같이 ‘정통 재즈로의 외도(?)’를 즐기기도 한다. 재즈-퓨전에 이어 1980년대 윈턴 마샬리스(Wynton Marshallis)등에 의해 꽃 피운 포스트 밥(Post-bop) 혹은 신(新)전통주의라 불리는 새로운 경향을 그는 이미 V.S.O.P.를 통해 그 도화선을 제시했던 것이다. 1980년대 들어 허비 핸콕은 또 한번의 변신을 감행한다. 1983년 발표한 < Future Shock >에 수록된 ‘Rockit’은 힙합 뮤직에 퍼져있던 스크래치(scratch) 사운드를 도입, 독특한 리듬감이 느껴지는, 이른바 디스코-텍(Disco-Teque) 뮤직을 선보인다. < Head Hunters >에 이어 이번에는 컴퓨터로 찍어 낸 듯한 테크노 음악을 선보이며 다시 한번 음악 관계자들을 어리둥절하게 했다. < Future Shock >에 이은 1984년 작 < Sound System >으로 연속 그래미상을 거머쥔 허비 핸콕은 재즈 뮤지션의 한계를 뛰어 넘는 폭넓은 활동을 전개한다. 덱스터 고든이 주연했던 1986년 영화 < Round Midnight >에 참여, 이번엔 그래미상이 아닌 아카데미에서 오리지날 스코어 상을 수상한다. 1988년 테크노 팝 앨범 < Perfect Machine >을 끝으로 콜롬비아 레코드사를 떠난 허비 핸콕은 마일스의 추모앨범, TV 쇼 프로그램 진행자, 윈튼 마샬리스와의 협연 등 왕성한 활동을 벌인다. 1994년 버브 레코드를 통해 < Dis Is Da Drum >을 발표하여 비평적 찬사를 받는 동시에 < Future Shock >에 이은 테크노 팝 열풍을 재현한다. 1995년엔 커트 코베인, 프린스, 토킹 헤즈, 비틀즈, 사이먼 & 가펑클 등의 록과 팝을 그만의 재즈 연주로 리메이크한 < The New Standard >를 발표했고 1998년엔 조지 거슈인(George Gershwin)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여 발표한 < Gershwin’s World >를 통해 그의 명성을 공고히 했다. 21세기를 맡아 예순을 넘기면서도 그 특유의 변신은 멈추지 않아 올 9월에 발표한 신작앨범 < Future 2 Future >를 통해서는 일렉트로닉과 다양한 장르의 혼합을 꾀하기도 했다.
밴드 : Miami Sound Machine (마이애미 사운드 머신)
멤버 : 글로리아 에스테판(Gloria Estefan, 보컬), 에밀리오 에스테판 주니어(Emilio Estefan Jr., 프로듀서), 웨슬리 라이트(Wesley B. Wright, 기타), 멀시 나바로 머시아노(Merci Navarro Murciano), 주안 마코스 아빌라(Juan Marcos Avila) 멤버 : 글로리아 에스테판(Gloria Estefan, 보컬), 에밀리오 에스테판 주니어(Emilio Estefan Jr., 프로듀서), 웨슬리 라이트(Wesley B. Wright, 기타), 멀시 나바로 머시아노(Merci Navarro Murciano), 주안 마코스 아빌라(Juan Marcos Avila)
세션 맨들로 구성되어 화제를 뿌렸던 토토는 그 탄탄한 연주 실력과 고혹적인 팝 감수성으로 1980년대를 풍미했던 그룹이다. 한치의 오차도 없이 전개되는 엄밀한 곡 구성은 국내외를 막론하고 수많은 뮤지션들의 모범이 되었으며, 열렬한 추종자들을 양산해냈다. 전성기가 지난 지금까지도 그룹의 양대 산맥 스티브 루카서와 고(故) 제프 포카로는 전문 연주인들 사이에서 절대적인 추앙을 받고 있으며, 그들의 초, 중반기 레퍼토... 세션 맨들로 구성되어 화제를 뿌렸던 토토는 그 탄탄한 연주 실력과 고혹적인 팝 감수성으로 1980년대를 풍미했던 그룹이다. 한치의 오차도 없이 전개되는 엄밀한 곡 구성은 국내외를 막론하고 수많은 뮤지션들의 모범이 되었으며, 열렬한 추종자들을 양산해냈다. 전성기가 지난 지금까지도 그룹의 양대 산맥 스티브 루카서와 고(故) 제프 포카로는 전문 연주인들 사이에서 절대적인 추앙을 받고 있으며, 그들의 초, 중반기 레퍼토리들은 꾸준히 라디오 전파를 타고 있다. 1970년대 제프 포카로와 스티브 루카서의 고등학교 밴드로 출발한 토토는 그 개개인의 출중한 기량으로 1970년대 후반 이미 스타들의 세션을 도맡는 등 활발한 활동을 보였다. 팀이 완전히 정비된 후 발표한 대망의 데뷔 앨범 < Toto >는 밀리언셀러로 부상했으며, 재즈와 록이 정교하게 교직된 독특한 사운드로 마니아들을 사로잡았다. 여기에는 국내에서도 자주 리퀘스트를 받는 ‘George porgy’, ‘Hold the line’등이 실려 있다. 토토는 < Hydra >와 < Turn Back >를 계속해서 내놓으며 특급 아티스트의 길로 접어들기 위한 기반을 마련한다. 비록 1집에 비해 판매고는 저조했으나 곡들은 한층 세련되고 연주는 엄격해져 다음 작품에 대한 기대를 갖게끔 만들기에 충분했다. 3장의 음반으로 비행을 시작한 토토는 1982년에 공개한 4집 < Toto Ⅳ >로 모든 스포트라이트의 중심이 된다. 빌보드 정상을 밟은 ‘Africa’, 2위에 오른 ‘Rosanna’등 차트를 맹폭한 히트곡들이 터져 나왔으며 그래미는 < 올해의 앨범 >을 포함한 장장 7개 부문의 상을 < Toto Ⅳ >에 안겨주며 1982년을 토토의 해로 선포했다. 멀티 플래티넘을 따낸 이 음반에서 토토는 예측불허의 변박과 고난이도의 테크닉이 난무하던 기존의 현란함을 어느 정도 유지하면서도 거기에 듣기 좋은 멜로디를 부가해 골수 팬들과 팝 키드들을 동시에 포획하는 전과를 올렸다. 엄청난 성공 뒤에 토토는 데이빗 헝게이트와 바비 킴볼을 떠나보내는 아픔을 겪으며 5집 < Isolation >을 발표했다. 그러나 새로 영입된 퍼지 프레데릭슨(Fergie Frederiksen)의 보컬은 킴볼을 따라갈 수 없음이 입증되었고 전전긍긍하던 팀원들은 조셉 윌리엄스(Joseph Williams)를 < Fahrenheit >에서 대타로 기용했다. 고품격 발라드의 비중이 높아진 이 앨범은 ‘Lea’, ‘I’ll be over you’등의 히트곡을 배출하며 소기의 성과를 거두었다. 이후에도 키보디스트 스티브가 떨어져 나가는 등 멤버 교체와 탈퇴의 악순환을 계속 경험하던 토토는 1992년 팀의 중핵 제프 포카로가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나면서 난관에 봉착하게 된다. 당대 최고의 드러머 중 하나로 평가받던 그의 요절은 많은 팬들에게 아쉬움과 슬픔을 안겼다. 토토의 통산 여덟 번째 작품인 < Kingdom Of Desire >는 ‘Only you’라는 매혹적인 곡을 남긴 채 제프의 마지막 레코딩으로 기록되었다. 마이클 셍커 그룹(Michael Schenker Group >을 거친 1급 레벨의 록 드러머 사이먼 필립스(Simon Phillips)의 가세로 힘을 얻은 토토는 1999년 오리지널 멤버 바비 킴볼이 보컬리스트로 재가입해 또 한번의 비상을 노리고 있다. 멤버들 중 스티브 루카서는 재즈 기타의 도인 래리 칼튼과 공동 투어를 나서는 등 특히 두드러진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지난 1996년 있었던 토토의 내한 공연은 국내에서 있었던 최고의 공연 중 하나로 회자된다. 그들은 라이브와 스튜디오 앨범에서 모두 사람들을 만족시켜 왔으며, 결성 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변하지 않는 팀웍과 기량으로 사랑 받고 있다. 가수의 뒤에서 연주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던 세션 맨에서 토토는 당당히 무대 중앙으로 진출했었고, 이제는 자신들의 경륜을 하나하나 쌓아가고 있다.
멤버 : Patsy Kensit, Jamie Kensit, Steve Grantley, Geoff Beauchamp, Jake Walters Lawrence Lewis 멤버 : Patsy Kensit, Jamie Kensit, Steve Grantley, Geoff Beauchamp, Jake Walters Lawrence Lewis
밴드 : Prefab Sprout (프리팹 스프라우트 )
뉴웨이브 밴드 뉴웨이브 밴드
멤버 : 웰리 파커(Wally Palmar, 기타, 하모니카, 보컬), 마이크 스킬(Mike Skill, 베이스), 코즈 캔러(Coz Canler, 리드기타), 브래드 엘비스(Brad Elvis, 드럼) 멤버 : 웰리 파커(Wally Palmar, 기타, 하모니카, 보컬), 마이크 스킬(Mike Skill, 베이스), 코즈 캔러(Coz Canler, 리드기타), 브래드 엘비스(Brad Elvis, 드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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