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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브 60주년 기념 한정반 (The Best Jazz Is Played With Verve) [3L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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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P

버브 60주년 기념 한정반 (The Best Jazz Is Played With Verve) [3LP]

[ 12P 북릿 / 팔라스((Pallas) 프레싱 / 독일의 LP명가 SST 브뤼그만 레커 커팅, 한정판 ]
Billie Holiday, Ella Fitzgerald, Louis Armstrong, Mel Torme, Astrud Gilberto 노래 외 25명 정보 더 보기/감추기 | Universal / Verve | 2016년 10월 21일 첫번째 구매리뷰를 남겨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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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브 60주년 기념 한정반 (The Best Jazz Is Played With Verve) [3LP]

품목정보

품목정보
발매일 2016년 10월 21일

관련분류

음반소개

디스크

LP1
  • 01 [Side A] April In Paris - Count Basie Orchestra
  • 02 Strange Fruit - Billie Holiday
  • 03 All of Me - Lester Young
  • 04 Cheek to Cheek - Ella Fitzgerald & Louis Armstrong
  • 05 On the Sunny Side of the Street - Dizzy Gillespie / Sonny Stitt / Sonny Rollins
  • 06 [Side B] Soulville - Ben Webster Quintet
  • 07 Squeeze Me - Duke Ellington With Johnny Hodges
  • 08 Mack the Knife - Ella Fitzgerald
  • 09 Too Close for Comfort - Mel Torme
LP2
  • 01 [Side C] Walkin' - Gene Ammons & Sonny Stitt
  • 02 Morning of the Carnival - Gerry Mulligan
  • 03 The Girl from Ipanema - Stan Getz
  • 04 The Days of Wine and Roses - Oscar Peterson Trio
  • 05 Tristeza - Astrud Gilberto
  • 06 [Side D] Baby, It's Cold Outside - Jimmy Smith & Wes Montgomery
  • 07 Mother of Earl - Bill Evans Trio
  • 08 Giblet Gravy - George Benson
  • 09 Lotus Blossom - Joe Henderson
LP3
  • 01 [Side E] A Go Go - John Scofield
  • 02 Potato Head Blues - Nicholas Payton
  • 03 The Look Of Love - Diana Krall
  • 04 It's Crazy - Natalie Cole
  • 05 [Side F] Don't Let Me Be Lonely Tonight - Michael Brecker
  • 06 River - Herbie Hancock
  • 07 Baby I'm a Fool - Melody Gardot
  • 08 Buckjump - Trombone Shorty
  • 09 Hit Me - Dirty Loops

상세 이미지

상세 이미지 1

아티스트 소개 (30명)

노래 : Billie Holiday (빌리 할리데이)
재즈 보컬 재즈 보컬
노래 : Ella Fitzgerald (엘라 피츠제랄드)
엘라 핏제랄드는 재즈 보컬의 역사를 다시 쓴 디바이다. 그녀는 아무 의미 없이 재잘거리는 스캣(Scat)이라는 창법을 가장 능숙하게 소화해냈다는 평가를 받은 인물이다. ‘목소리’ 하나만으로도 그 어느 악기 못지 않은 즉흥성을 표현할 줄 알았으며 스윙과 비밥 시대에 걸쳐 더욱 빛난 달콤한 목소리와 넘실대는 스윙감을 통해 엘라 핏 랄드는 재즈의 ‘퍼스트 레이디’로 재즈역사에 각인되었다. 사라 본, 빌리 홀리데이와 함... 엘라 핏제랄드는 재즈 보컬의 역사를 다시 쓴 디바이다. 그녀는 아무 의미 없이 재잘거리는 스캣(Scat)이라는 창법을 가장 능숙하게 소화해냈다는 평가를 받은 인물이다. ‘목소리’ 하나만으로도 그 어느 악기 못지 않은 즉흥성을 표현할 줄 알았으며 스윙과 비밥 시대에 걸쳐 더욱 빛난 달콤한 목소리와 넘실대는 스윙감을 통해 엘라 핏 랄드는 재즈의 ‘퍼스트 레이디’로 재즈역사에 각인되었다. 사라 본, 빌리 홀리데이와 함께 재즈 음악사에 길이 남는 ‘여인천하’를 이뤄낸 엘라 핏제랄드는 1917년 4월 25일 버지니아주 뉴포트에서 태어났다. 비운의 여가수 빌리 홀리데이처럼 엘라 역시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내는데, 성장기의 대부분을 홈리스(homeless)로 보낼 정도로 어려운 시기를 보낸다. 엘라는 1934년 뉴욕 할렘가에 소재한 아폴로 극장에서 열린 노래 경연 대회에서 우승하면서 본격적인 가수의 길을 걷게 된다. 청중의 자격으로 그녀의 노래를 듣고 있던 밴드 리더이자 드러머인 칙 웹(Chick Web)은 이 체구 작은(?) 소녀에게서 가능성을 발견, 자신의 빅 밴드의 반주에 맞춰 노래를 부르게 한다. 칙 웹의 도움으로 엘라는 그의 밴드의 리드 싱어 자격으로 대중 앞에 섰고 얼마 후 그녀가 데카(Decca) 레이블에서 처음 녹음한 ‘A-tiskete, A- Taskete’(1938), ’Undecided’(1939)가 공전의 히트를 거두며 가수로서의 순조로운 출발을 한다. 그러나 1939년, 칙 웹의 갑작스런 요절로 인해 엘라는 그 후 2년 간 그가 떠난 밴드의 빈 공간을 메워 나가야 했다. 1942년 솔로로 독립한 그녀는 예전 소녀의 상큼함과 순수함이 느껴지던 데뷔시절과 달리 좀 더 완숙한 목소리로의 변신을 필요로 했다. 잉크 스팟(Ink Spot), 루이스 조던(Louis Jordan)과 같은 R&B 싱어들과 잠시 활동을 같이 하던 엘라였지만 자신이 가야할 길은 역시 ‘재즈’임을 깨 닳고, 1946년 노먼 그란즈(Norman Granz-훗날 버브 레코드의 사장이 됨)를 새 매니저로 맞이하며 비밥의 거성인 트럼펫 주자 디지 길레스피(Dizzy Gillespie) 밴드의 리드 싱어로 일하게된다. 디지와의 연주 경험은 엘라가 비밥의 문법을 자기의 목소리로 소화할 수 있게 된 결정적인 계기였다. 변화무쌍한 리듬과 속도감 있게 진행되는 파트별 연주에 맞춰 터져 나오는 유창한 스캣 창법은 비밥의 연주와 그녀의 보컬이 어울림을 갖는다는 것을 증명했다. 당시 그녀의 남편이기도 한 베이시스트 레이 브라운(Ray Brown) 트리오의 백업 연주로 녹음된 ‘How high the moon’(1947)같은 곡에서 그녀의 스캣 창법은 악기에 버금가는 애드립이 목격된다. 1955년 버브(Verve)와 전속 계약을 맺은 엘라는 이 때부터 음악 인생의 최고의 황금기를 맞는다. < Songs from Pete Kelly’s blues >(1955)가 앨범 차트 7위를 기록하는 것을 시작으로 인기가도를 질주한다. 이듬해, 구수한 목소리의 트럼펫 주자 루이 암스트롱과의 듀엣 < Ella & Louis >(1956)가 오스카 피터슨(Oscar Peterson) 쿼텟의 백업 연주로 발표 되 대중적, 비평적 찬사를 얻었으며 두 사람간의 음악적 교분은 < Ella & Louis again >(1957)과 < Porgy & Bess >(1958)로 이어진다. 이 앨범들은 재즈 팬들의 필수 컬렉션 대상들이기도 하다. 같은 해 < Ella Fitzgerald Sings The Cole Porter Song Book >(1956)이 재즈 판을 휩쓸며 베스트셀러로 기록되는 성공을 거둔다. 이를 시작으로 엘라는 조지 거쉰(George Gerswin), 제롬 컨(Jerome Kern), 해롤드 알렌(Harold Arlen), 어빙 벌린(Irving Berlin)등 1세대 틴 팬 앨리 작곡가들의 명곡들을 자신의 목소리로 담아내는 방대한 작업을 수행한다. 이런 그녀의 노력은 틴 팬 엘리 작곡가 리처드 로저스(Richard Rodgers)와 하트 로렌즈(Hart Lorenz)의 곡으로 꾸며진 실황 앨범 < Ella Fitzgerald Sings The Rodgers And Hart Song >(1957)의 성공으로 이어지며 마침내 재즈의 ‘퍼스트 레이디‘로 군림하게 된다. 틴 팬 앨리 음악에 대한 그의 열정은 1958-59년 사이에 녹음해 발표한 조지 & 이라 거쉰(George & Ira Gershwin)의 곡을 집대성한 < The George & Ira Gershwin Song Book >(1959)을 통해 정점에 다다른다. 1960년대에 접어들어 엘라는 < Mack The Knife-Ella In Berlin >(1960)을 폴 스미스(Paul Smith) 쿼텟의 연주로 녹음된 라이브 앨범을 공개, ‘How high the moon’, ’Mack the knife’를 히트시킨다. 이후 1963년엔 명 프로듀서이자 작곡가인 퀸시 존슨(Quincy Jones)이 편곡으로 연주된 카운트 베이시(Count Basie)와의 협연작 < Ella & Basie! >과 1965년엔 오랫동안 음악적 교분을 쌓아온 듀크 엘링턴(Duke Ellington)과 다시 의기투합해 < Ella At Duke Place >를 각각 발표하는 등 스윙의 거장과의 잇단 명작을 공개한다. 캐피톨(Capitol)로 이적해 다시 왕성한 활동을 이어나간 엘라는 1969년 그만 백내장으로 인해 잠시 활동을 중단한다. 1973년 연로한 나이에 불구하고 < Ella Fitzgerald At The Carnegie Hall >을 발표했고, 1977년 몬트럭스 재즈 페스티벌에도 참가해 실황 앨범 < Ella Fitzgerlad With The Tommy Flanagan Trio-Montreux’77 >을 공개하며 예순이라는 나이가 무색한 손색없는 보컬 기량을 선보였다. 1980년대 이르러 지병인 심장병으로 인해 예전만큼의 노련함이 느껴지지 않았지만, 엘라는 근근히 연주 활동을 지속해나간다. 그러나 나빠진 건강과 시력을 인해 그녀는 1994년 공식적으로 은퇴를 선언한다. 그리고 2년 후인 1996년 6월 15일 비버리 힐즈에 있는 자신에 집에서 세상을 떠난다.
클래식을 얘기할 때 바하를, 팝을 논할 때 비틀스를 빼 놓을 수 없듯 재즈 하면 떠오르는 인물이 바로 루이 암스트롱(Louis Armstrong)이다. 재즈에 문외한 사람일지라도 루이 암스트롱 이름을 대면 고개를 끄덕인다. 루이 암스트롱은 20세기의 대표적인 대중 음악 ‘재즈’를 정의한 거장이다. 백인 재즈 보컬 빙 크로스비(Bing Crossby)는 루이 암스트롱을 두고 ‘미국 대중음악의 시작이자 끝’이라고 극... 클래식을 얘기할 때 바하를, 팝을 논할 때 비틀스를 빼 놓을 수 없듯 재즈 하면 떠오르는 인물이 바로 루이 암스트롱(Louis Armstrong)이다. 재즈에 문외한 사람일지라도 루이 암스트롱 이름을 대면 고개를 끄덕인다. 루이 암스트롱은 20세기의 대표적인 대중 음악 ‘재즈’를 정의한 거장이다. 백인 재즈 보컬 빙 크로스비(Bing Crossby)는 루이 암스트롱을 두고 ‘미국 대중음악의 시작이자 끝’이라고 극찬했다. 그의 코넷/트럼펫 연주는 ‘재즈 연주에 꽃’이라 할 즉흥 솔로(Improvisation)를 창안했다. ‘트럼펫 비르투오조 1호’로 칭송되는 그의 트럼펫 연주엔 떨림(비브라토)과 미끄러짐(글리산도)와 같은 클래식 연주 주법을 독창적으로 소화해 낸 천재성이 돋보인다. 뉴 올리안스의 무명악사 시절을 거쳐 1920년대 초부터 시카고와 뉴욕을 거점으로 암약하면서 1925년 자신이 리드하는 캄보(Combo-소규모 재즈 연주 편성)밴드 핫 파이브 앤 핫 세븐(Hot Five’& Hot Seven) 통해 본격적인 재즈의 서막을 온 세상에 알렸다. 그러나 루이 암스트롱의 음악 여정은 ‘재즈의 선구자’로만 국한시킬 수 없을 정도로 그 폭이 넓다. 그는 재즈의 천재 일뿐 아니라 팝의 제왕이자 만인의 사랑을 받는 엔터테이너였다. 아무 의미 없는 말들을 리드미컬하게 구사하는 스캣(Scat)이라는 창법을 개발, 재즈 보컬(Jazz vocal)의 길을 열어줬음은 물론이고 천재적인 트럼펫 연주 실력에 더해 그의 출중한 보컬 실력은 그를 ‘위대한 재즈 보컬리스트’로 기억하게 만들었다. 가방만큼 크고 두터운 입술을 지녔다 하여 사치모(Satchmo)라는 애칭을 지녔던 루이 암스트롱은 얼굴만큼이나 커다란 입으로 끓어오르는 독특한 베이스 보컬(속칭 더티 톤)을 들려준다. 이런 그의 독특한 보컬 스타일은 재즈 보컬 빙 크로스비나 토니 베넷(Tony Bennet)을 비롯하여 1930-50년대 전설전인 재즈 디바 빌리 홀리데이(Billie Holiday)의 창법에까지 영향을 준다. 국내에서도 ‘쾌지나 칭칭 나네’의 가수 김상국도 그 보컬을 흉내냈다. 천진 난만(?)한 웃음을 머금으며 청중을 압도할 만한 열정을 뿜어내는 무대 매너로 루이는 대중들에게 잊을 수 없는 넉넉함을 선사했다. ‘만능 재즈 맨’은 그의 또 다른 이름이었다. 1901년 재즈의 고향 뉴 올리안스(New Orleans)에서 태어난 루이 암스트롱은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낸다. 그가 어머니인 메리 암스트롱의 뱃속에 있을 때 아버지는 가출을 했고, 유복자로 태어난 루이는 빈민가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다. 길거리의 매춘부였던 어머니는 항상 집을 비워 가족을 돌보지 않았고, 결국 루이는 5살 때부터 생업 전선에 나서야 했다. 스토리 빌(뉴 올리언즈의 재즈 음악인들의 활동 무대)의 홍등가를 지나다가 접한 재즈음악에 매료되어버린 어린 루이는 차츰 재즈라는 세계에 관심을 갖게 된다. 11살에 학교를 그만둬 그만 폭력을 일삼는 불량 써클에 가담, 1912년 신년 축하 행사 때 술에 취해 사람들이 모인 장소에서 폭죽 대신 총을 쐈다는 혐의로 소년원에 들어간다. 그러나 그게 전화위복이 되어 소년원에 있는 동안 브라스 밴드에 가입, 제1 코넷 주자로 활동하게 된다. 이를 통해 본격적으로 음악을 접할 수 있었고, 여기서 접한 코넷(트럼펫과 비슷하나 관이 약간 짧아서 수월하게 다룰 수 있는 악기) 연주는 루이로 하여금 음악을 소명으로 삼게 한다. 1914년 소년원에서 풀려나서 시카고로 이주, 노동자 생활을 하며 차츰 음악가로의 꿈을 키워간다. 광부로, 신문 배달부로, 청소부를 일을 전전해가며 그는 코넷을 사기 위해 돈을 마련해 갔다. 시카고에 여러 바를 전전하며 무명악사로 밑바닥을 기었다. 1918년 기회가 왔다. 당시 재즈의 왕으로 군림하던 킹 올리버(King Oliver)의 도움을 받아 루이는 올리버의 보조 밴드였던 키드 오리(Kid Ory) 밴드에서 프로 뮤지션으로서의 첫 발을 내딛는다. 일년 후인 1919년 루이는 시카고에 진출, 미시시피강을 따라 뉴 올리언즈와 세인트루이스 사이를 운행하던 증기선에서 백인들을 위해 음악을 연주한 페이트 매러블(Fate Marable) 밴드에서 3년 간 코넷 주자로서 내공을 다진다. 1922년 루이 암스트롱은 드디어 재즈 연주자로서 날개를 단다. 평소 그를 유심히 지켜보던 ‘재즈의 왕’ 조 킹 올리버는 그가 이끄는 크레올 재즈 밴드(Creole Jazz Band) 밴드의 코넷 주자로 그를 가입시킨다. 크레올 재즈 밴드의 정식 멤버 자격으로 루이는 1923년 시카고에서 첫 레코딩을 한다. ‘Chimes blues’(1923), ’Lonesome weary blues’(1923) 등 10여 곡의 싱글 녹음을 통해 독특한 음색의 코넷 연주가 좋은 평가를 이끌어냈고, 이에 자신감을 얻은 루이는 피아노 주자 릴리언 하든(그의 두 번째 부인이며 그는 일생동안 4명의 부인을 맞는다)의 권유로 크레올 밴드를 탈퇴, 이듬해인 1924년 뉴욕으로 진출해 플레처 핸더슨(Fletcher Henderson) 밴드에 제1 트럼펫 주자로 활동한다. 1925년 솔로로 독립, 악기를 코넷에서 트럼펫으로 바꾸고 자신의 밴드 핫 파이브 앤 핫 세븐(Hot Five & Hot seven)을 출범시킨다. 재즈 인디 레이블 오케이(Okeh)레코드 사와 계약, 스캣(scat)의 매력이 넘치는 ‘Heebie jeebies’(1926)를 비롯하여, ’Cornet’(1926), ’Big butter & egg man’(1926), ’Ski-dat-de-dat’(1926), ‘Willie the weeper’(1927), ’Potato head blues’(1927), ’I’m not rough’(1927)를 통해 당시로선 가히 혁명적인 재즈 연주를 선보이며 일약 재즈음악계의 스타로 떠오른다. 1928년 ‘핫 파이브 앤 세븐’을 해체, 자신의 빅 밴드 루이 암스트롱 앤 히스 오케스트라(Louis Armstrong And His Orchestra)’를 결성, ‘Mahogany hall stomp’를 시작으로 이듬해인 1929년 ’Sweet heart on parade’를 발표하며 스윙 밴드 리더로서의 여정에 들어간다. 이때부터 재즈 보컬리스트로서도 활약이 눈에 띄는데, 이미 1927년 ‘핫 파이브 & 세븐‘시절 여성 보컬 메이 엘릭스와 듀엣으로 부른 ’Big butter & egg man’으로 팝 차트에 진출한 루이는 1931년 미쉘 페리시가 작사한 미국의 영원한 스탠다드 명곡 ‘Stardust’를 발표, 선풍적인 인기를 얻는다. 1930년대는 루이 암스트롱의 전성기였다. ‘I gotta right to sing the blues’(1933), ’Struttin’ with some barbecue’(1938) 등 클래식스(Classics)레이블을 통해 발표한 그의 빅 밴드 싱글들은 동시대 카운트 베이시(Count Basie) 악단, 듀크 엘링턴(Duke Ellington) 악단에 필적할 만한 대중성을 획득하는데 성공한다. 1944년 흑인 아티스트로서는 처음으로 링컨 센터에서 공연했으며 이어 할리우드에 진출, 영화배우로서도 활동하며 < 랩소디 인 블랙 & 블루 >(1933)와 1956년의 < 상류사회 >(High Society) 등의 작품을 남긴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며, 스윙의 열풍은 비밥(Bebop)의 혁명으로 인해 재즈의 중심에서 차츰 언저리로 몰리고 있었다. 스윙을 부정하며 비밥에 물결에 동참한 젊은 재즈음악인들로부터 루이는 ‘엉클 톰’(백인에게 굴종하는 흑인) 식의 비난의 화살을 감내해야 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이 무렵 슬럼프를 맞게 된다. 빅 밴드 활동이 더 이상 진척이 되지 않음을 느낀 루이는 결국 빅 밴드를 해체시키고 데카(Decca)레이블로 이적하며 초기의 소 편성 악단의 구성을 한 올 스타즈(All Stars)를 출범시킨다(이후 올 스타즈는 맴버를 교체해 가며 그가 죽을 때까지 유지된다). 1947년 로스앤젤레스에서 데뷔 공연을 가지며 예전보다 활발한 월드투어를 갖는다. ‘High society’(1948), ‘That’s a plenty’(1949), ‘Basin street’(1947), ‘Dippermouth blues’(1947) 등을 히트시키며 1951년에는 투어 실황을 녹음해 발표한 라이브 앨범 < Satchmo At Symphony Hall >을 발표해, LP차트 10위권에 오른다. 같은 해 루이의 히트 송 ‘(When we are dancing) I get ideas’와 ‘A kiss to build a dream on’이 담긴 더블 사이드 싱글을 발표, 이듬해인 1952년 처음으로 싱글 양면이 모두 톱10을 기록한다. ‘A kiss to build a dream on’은 영화 < The Strip >에서 루이가 직접 불렀던 곡인데, 멕 라이언이 주연한 1993년 영화 <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 >에 다시 삽입돼 화제를 모았다. 1954년 데카와 재계약을 앞두고 루이는 독점 계약 대신 프리랜서를 선언한다. 이 때부터 그의 음악은 다른 음반사를 통해서도 발표되는데, 당대 재즈 명인들과의 협연 앨범들이 눈에 띈다. 1920년대 스트라이드 피아노 대가 팻츠 월러(Fats Waller)에게 헌정하는 < Satch plays Fats >를 1955년 콜롬비아 레코드사에서 발표해 톱10을 기록했고, 재즈 보컬 엘라 핏제럴드와 호흡을 맞춘 명반 < Ella & Louis >를 1956년 버브 레코드사에서 공개한다. 흑인 공민권 운동이 시작될 무렵인 1956년, 백인 공립학교에 흑인 학생이 군인의 호위를 받고 등교하는 리틀 록(Little Rock)사건을 두고 당시 대통령이었던 아이젠하워를 ‘위선자’라 비난한 사건이 신문으로 보도되면서 루이는 잠시동안 FBI의 감시를 받으며 ‘요시찰 인물’이라는 불명예를 겪기도 한다. 가뜩이나 나빠진 건강은 1959년 이태리 공연도중 심장 발작으로 잠시 병원 신세를 지게 끔 한다. 이런 악조건을 딛고 루이 암스트롱은 1960년대에도 여전히 ‘제2전성기’라고 할 왕성한 활동을 전개했다. 1963년 12월, 브로드웨이 뮤지컬 < 헬로 돌리 >(Hello Dolly!)의 타이틀곡으로 미국을 침공한 비틀스의 ‘Do you want to know a secret’를 따돌리며 당당히 팝 차트 정상에 등극한다. ‘Hello dolly!’는 1964년 내내 팝 차트 5위권을 고수하며 이듬해 그에게 그래미상 보컬 퍼포먼스부문 수상의 영광도 안겨주었다. 이 곡에 이어 4년 후인 1968년 ‘What a wonderful world’로 루이는 다시 한번 노익장을 과시한다. 평소에 자신이 추구한 팝(pop)음악에 대한 철학을 담아낸 이 곡은 영국에선 발표 즉시 차트1위를 차지했지만 정작 본토 미국에선 별 반응이 없다가, 1987년 로빈 윌리엄스가 주연한 영화 < 굿모닝 베트남 >의 배경음악으로 주목받으면서 뒤늦게 톱40에 오른다. 넉넉한 그의 보컬이 멋진 선율과 어우러진 이 곡은 그 무렵 만화가 이현세가 출연한 모 맥주광고 CF에 깔려 국내에서도 광풍을 일으켰다. 그의 마지막 히트 곡 ‘We have all the time in the world’과 함께 루이는 결국 건강상의 이유로 무대에서 은퇴한다. 그와 함께 정확히 7주 후인 1971년 3월15일 건강 악화로 병원에 입원했고, 7월 6일 뉴욕 롱아일랜드의 코로나 소재 자신의 집에서 70세를 일기로 역사의 뒤안길로 물러난다. 루이 암스트롱처럼 재즈와 팝이라는 별개의 영역을 넘나들었던 사람도 드물다. 1920-30년대 초기재즈에서 스윙에 이르기까지 재즈의 연주 스타일을 제시했던 선구자 루이 암스트롱은 이에 더해 대중들과 함께 울고 웃을 줄 알았던 진정한 팝 스타였다. 사실 재즈라는 장르에 집착하는 팬들은 그가 보여준 엔터테이너 기질에 못마땅해하는 사람들도 있다. 쿨(cool)의 혁명가 마일즈 데이비스도 자서전에서 “루이의 뛰어난 즉흥 연주엔 고개를 숙인다. 하지만 그의 익살스러운 무대매너엔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고 피력할 정도였다. 하지만 루이는 50년을 넘게 연주 생활을 해온 재즈맨이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둔다면 그가 음악 대중들을 위한 ‘팝’에 천착한 사실은 당연하다. 루이는 음악에 있어서 순수한 지향을 잃지 않았고, 자신의 음악을 들어주고 좋아해 줄 청중을 찾아 나서길 원했다. 그의 음악이 꿈꾼 최종 지향점이란 바로 ‘What a wonderful world!’라고 까지 칭송한 팝(pop)이었던 셈이다. 숱한 우여곡절 끝에 팝의 세계에 안긴 한 재즈 거장의 허심탄회한 고백은 명언으로 남아있다. ‘그래 팝이 옳았어! 이 얼마나 아름다운 세상이야!’
재즈 보컬 재즈 보컬
노래 : Astrud Gilberto (아스트루드 질베르토)
삼바, 보사노바 보컬 삼바, 보사노바 보컬
감칠맛 나는 기타 선율을 블루스의 진한 리듬감에 실어 내는 재즈 기타리스트 조지 벤슨(George Benson)은 웨스 몽고메리(Wes Montgomery) 사후 그의 음악적 유산을 가장 명징 하게 간직한 음악인이다. 팻 메스니, 리 리트너, 존 스코필드 등 1980-90년대 대중적인 인기를 얻은 재즈 기타리스트들의 계보를 따져 올라가 보면 항상 조지 벤슨의 기타 연주가 자리한다. 하지만 조지 벤슨은 재즈 연주자... 감칠맛 나는 기타 선율을 블루스의 진한 리듬감에 실어 내는 재즈 기타리스트 조지 벤슨(George Benson)은 웨스 몽고메리(Wes Montgomery) 사후 그의 음악적 유산을 가장 명징 하게 간직한 음악인이다. 팻 메스니, 리 리트너, 존 스코필드 등 1980-90년대 대중적인 인기를 얻은 재즈 기타리스트들의 계보를 따져 올라가 보면 항상 조지 벤슨의 기타 연주가 자리한다. 하지만 조지 벤슨은 재즈 연주자 이전에 탁월한 보컬리스트이기도 하다. 일반 팝 음악 청중들에게도 그의 이름이 낯설지 않은 건 그의 기타 연주만큼이나 정평 높은 노래실력 때문이다. 그의 공식적인 보컬 데뷔 곡이기도 한 ’This Masquerada’(1976) 이후 그는 재즈 기타 연주자로서보다는 소울/팝 가수로서 인기스타 반열에 등극한다. 1943년 3월22일, 미국 펜실베니아주 피츠버그에서 태어난 조지 벤슨은 4 세 때 처음 기타를 손에 잡고, 7세부터는 나이트 클럽 무대에 설 정도로 일찍 음악에 두각을 나타낸다. 청소년 시절에 그는 행크 가랜드, 찰리 크리스천, 찰리 파커의 음악을 들으며 차츰 재즈에 흥미를 갖는다. 독학으로 재즈 연주를 배워나간 그는 1960년대 초, 하몬드 오르간 주자 잭 맥프(Jack Mcduff) 밴드에 가입하면서 본격적인 음악 활동을 시작, 1964년 그의 데뷔 앨범< New Boss Guitar >를 프레스티지(Prestige) 레이블에서 발표한다. 이듬해 잭 맥더프와 결별한 조지 벤슨은 웨스 몽고메리의 문하생이 되어 기타 연주를 사사 받는다. 1965년 가을, 명 프로듀서이자 콜롬비아 레코드 소속 A&R맨 존 하몬드(John Hammond)의 주선으로 콜롬비아 레코드와 계약, < It’s Uptown >(1965)과 < George Benson Cook Book >(1966)을 연달아 발표한다. 특히 < It’s Uptown >에 수록된 조지 거쉰(George Gerswin)의 고전 ’Summertime’은 그의 보컬 데뷔 곡이기도 하다. 그가 당시의 일을 회고하기를 "나는 연주자이기보다는 가수가 되길 바랬다"고 했을 정도로 노래에 대한 조지 벤슨의 애정은 강했다. 1967년 다시 버브(Verve)사로 이적한 조지 벤슨은 허비 핸콕, 론 카터, 빌리 코브햄 등 호화 세션진들이 참여해 녹음한 < Gilblet Gravy >(1967)를 발표하며 재즈 연주자로서 순조로운 여정을 밟아나간다. 틈틈이 앨범 세션 작업에도 열심이었던 그는 1968년, 마일스 데이비스(Miles Davis)의 요청으로 < Miles In The Sky >에서 일렉트릭 기타 연주를 들려주며 이후 마일스가 재즈 퓨전(Jazz Fusion)으로의 여정을 찾아가는데 일조한다. 이듬해 1968년, 자신의 스승이었던 웨스 몽고메리의 죽음을 맞이한다. 그가 소속되어있던 A&M 레코드의 프로듀서 크리드 테일러(Creed Taylor)는 웨스에 필적할만한 기타리스트를 찾던 중 조지 벤슨을 찾게 된다. 크리드 테일러가 프로듀스한 앨범 < Shape Of Things To Come >(1968)을 발표했고 수록곡 중 ’Last train to Clarksville’이 좋은 반응을 얻는다. 이듬해 비틀스의 공식적인 마지막 앨범 < Abbey Road >(1969)의 발매에 맞춰 꾸며진 조지 벤슨의 연주로 꾸며진 답가 < The Other Side Of Abby Road >(1969)를 발표한다. 수록곡 중 조지 해리슨이 작곡한 ’Here comes the sun’을 소울풀한 보컬로 소화해, 가수로서의 가능성을 다시 한번 입증한다. 1970년, 그를 기용한 크리드 테일러가 세운 CTI 레코드사와 계약하며 그의 연주력은 정점에 달한다. 내공이 집약된 블루지한 명반 < Beyond The Blue Horizon >(1971)을 시작으로 제퍼슨 에어플레인(Jefferson Airplane)의 명곡 ’White rabbit’과 마마 앤 파파스(Mama & Papa’s)의 ’California dreamin’이 연주로 수록된 앨범 < White Rabbit >(1971)은 조지 벤슨을 일약 팝 스타에 버금가는 연주자로 부상시킨다. 이에 기세를 몰아 < Body Talk >(1973), < Bad Benson >(1974), < Good King Bad >(1975) 연달아 발표했다. 기타 연주자로서 기량이 정점에 다다랐던 1970년대 중반, 여전히 노래에 대한 미련을 못 버리고 있던 그의 재능을 눈여겨보던 명 프로듀서 토미 리푸마(Tommy Lipuma)를 만난다. 그의 노래를 높이 평가한 리푸마는 자신이 소속된 워너 브라더사에 그를 영입, 전대미문의 트리플 플래티넘(Tripple Platinum) 재즈 앨범을 만들어내게 된다. 그것이 1976년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앨범 < Breezin’ >이었다. 이 앨범은 조지 벤슨의 음악 활동의 일대 전기가 되어 6곡의 수록곡 중 유일한 보컬 넘버 ’This masquerade’는 재즈 보컬 곡으로는 드물게 싱글로 발표되어 빌보드차트 10위까지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 Breezin’ >은 빌보드 차트에서 재즈, R&B, 팝 차트 모두 정상에 오르는 사상 최초의 앨범이 되었고 이듬해 그래미 시상식에서 올해의 레코드상, 팝 인스트루멘털 퍼포먼스 상, 최우수 엔지니어 상을 휩쓸며 1976년을 ’조지 벤슨의 해’로 만들었다. 이후에도 싱글히트 행진은 지속되어 ’On Broadway’(1977), 팝 가수 휘트니 휴스턴의 노래로도 유명한 ’The greatest love of all’(1977), , ’Turn you love around’(1977), ’Give me the night’(1980), ’Kisses in moonlight’(1986)가 줄줄이 차트를 점령했다. 이 때문에 조지 벤슨은 재즈 기타리스트보다 팝 뮤지션으로 대중들에게 인식되었다. 확연한 각이 느껴지는 조지 벤슨의 일렉트릭 기타 연주가 그립던 차에 그의 수제자인 재즈 기타리스트 얼 클루(Earl Klugh)와 함께 발표한 < Collaboration >(1987)은 다시 한번 ’제즈 연주자’로서의 정체성을 한껏 세워준다. 이후 그는 정통 재즈로의 외도(?)를 감행한다. 2년 후 발표된 < Tenderly >(1989)에선 론 카터, 맥코이 타이너, 알 포스터와 같은 메인스트림 계열 재즈 뮤지션들과 좋은 호흡을 보여줬고, 이듬해엔 스윙의 대가 카운트 베이시에게 헌정하는 < Big Boss Band >(1990)로 넘실대는 부기 리듬을 선보였다. 하지만 그의 보컬 음악에 익숙해진 대중들에게 부담스러운 결과물이었던지 반응은 모두 저조했다. 6년여의 공백 끝에 GRP 레이블에서 발표한 < That’s Right >(1996)로 컴백한다. 업 템포의 흥겨움을 배가시킨 재즈 퓨전 연주로 돌아온 이후의 음악은 특별히 새롭진 않지만 여전히 심중을 파고드는 날카로움을 선사했다.
노래 : Diana Krall (다이애나 크롤)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주(州) 밴쿠버섬에 있는 도시 너나이모(Nanaimo)출신 가수 겸 피아니스트 다이애나 크롤(Diana Krall)은 타고난 음악적 교육환경에서 성장했다. 4살 때부터 클래식 피아노 교습을 받기 시작해 고교시절에는 재즈밴드에서 연주를 계속해 나갔다. 하지만 그의 음악활동영역에 대부분은 음반수집가이자 스트라이드 피아노 연주자인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았다. 여기에 대해 다이애나는 다음과 같이 말한 ...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주(州) 밴쿠버섬에 있는 도시 너나이모(Nanaimo)출신 가수 겸 피아니스트 다이애나 크롤(Diana Krall)은 타고난 음악적 교육환경에서 성장했다. 4살 때부터 클래식 피아노 교습을 받기 시작해 고교시절에는 재즈밴드에서 연주를 계속해 나갔다. 하지만 그의 음악활동영역에 대부분은 음반수집가이자 스트라이드 피아노 연주자인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았다. 여기에 대해 다이애나는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제 생각에 아버지께선 팻츠 웰러(Fats Waller)의 전 음반을 모두 소유하고 계셨어요. 그리고 전 그걸 다 익히려했죠.”라고. 1980년대 초 버클리 음대 진학 후 로스앤젤레스로 터전을 옮긴 다이애나는 3년 간 머물다 토론토로 다시 거처를 옮겼다. 1990년에는 뉴욕을 거점도시로 트리오와 함께 노래를 불렀다. 저스틴 타임 음반사(Justin Time Records)에서 자신의 첫 번째 앨범 < Steppin’ Out >(1993)을 발매 한 그는 이듬해 GRP와 계약을 맺고 2집 < Only Trust Your Heart >를 발표했다. 그리고 1995년과 1997년에는 지알피(GRP)와 더불어 1960년대 아방가르드 시대의 대표적인 레이블 임펄스!(Impulse!)를 통해 냇 킹 콜(Nat King Cole)트리오에게 바치는 헌정앨범 < All for You >(impulse)와 < Love Scenes >를 발매했다. 1998년 말 크리스마스시즌에 세션앨범 < Have Yourself A Merry Christmas >을 내놓으며 한껏 분위기를 탄 크롤은 곧이어 발표한 < When I Look in Your Eyes >(1999)로 국제적 부와 영예를 한꺼번에 얻기에 이른다. 앨범은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그해 그래미시상식에서 최우수 재즈 보컬 연주부문(Best Jazz Vocal Performance) 트로피를 손에 거머쥐었다. 비록 수상은 하지 못했지만 ‘올해의 앨범’(Album of The Year)상 후보에 오른 것도 경이로운 결과였다. 이는 곧 25년 동안 꾸준히 음악활동을 펼쳐온 그의 다년간에 명성과 실력을 공인받는 순간이었다. 재즈아티스트로 공력을 인정받은 다이애나는 또한 여성뮤지션 중심의 록뮤직 투어 ‘릴리스 페어’(Lilith Fair)에 동참해 연주한 것을 비롯해 TV드라마 < 섹스 앤 시티 >(Sex in the City) 에피소드와 영화< Midnight in the Garden of Good and Evil >(1997)의 사운드트랙에 자신의 곡을 삽입시키며 크로스오버 뮤지션으로도 성공을 맛보았다. 그리고 2001년에는 < The Look of Love >를 빌보드 ‘Top Canadian Album’차트 정상에 쏘아 올리며 주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캐나다 출신 재즈아티스트로는 최초로 캐나다에서만 5백만 장 이상의 앨범이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다. 앨범대박은 기정사실. 2002년 캐나다의 ‘그래미어워드’(Grammy Award)아 불리는 ’주노 어워드’(Juno Award)에서는 ‘올해의 아티스트’(Artist of the Year), ‘올해의 앨범’(Album of the Year), ’올해의 최우수 보컬 재즈 앨범‘(Best Vocal Jazz Album of the Year) 3개 부문 트로피를 품에 안는 기염을 토했다. 바로 다음해 인 2002년에는 < Live in Paris >로 그래미 ‘최우수 재즈 보컬 앨범’(Best Jazz Vocal Album)상을 수상해 확고부동한 크로스오버/컨템포러리 재즈아티스트로서의 존재적 가치를 제고했다. 과거 유명선배뮤지션들의 스탠더드 커버 곡을 자신의 감성을 담아 재해석한 트랙들로 꾸민 < The Girl in the Other Room >(2004)을 발표해 다재다능한 역량을 발휘한 다이내나 크롤은 1999년과 2002년에 이어 2005년 3월 내한해 한국 팬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기도 했다. 우아한 외모까지 갖춘 다이애나 크롤을 향한 한국음악팬들의 사랑은 현재진행형이다.
나탈리 콜(Natalie Cole)은 파워와 가녀림을 함께 담아 내는 특색 있는 보컬로 재즈와 팝을 넘나들며 오랜 기간 인기를 누려왔다. 1900년대 중반 흑인 최고의 스탠다드 보컬로 인기를 누렸던 냇 "킹" 콜(Nat "King" Cole)의 딸로도 유명한 그녀는 1991년 아버지의 목소리에 자신의 목소리를 입혀 부른 ’Unforgettable’로 그래미(Grammy) 7개 부문을 수상하며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나탈리 콜(Natalie Cole)은 파워와 가녀림을 함께 담아 내는 특색 있는 보컬로 재즈와 팝을 넘나들며 오랜 기간 인기를 누려왔다. 1900년대 중반 흑인 최고의 스탠다드 보컬로 인기를 누렸던 냇 "킹" 콜(Nat "King" Cole)의 딸로도 유명한 그녀는 1991년 아버지의 목소리에 자신의 목소리를 입혀 부른 ’Unforgettable’로 그래미(Grammy) 7개 부문을 수상하며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1950년 미국 로스 앤젤리스(Los Angeles)에서 태어난 나탈리는 아버지 곁에서 어린 시절부터 자연스럽게 음악을 접했다. 10살 정도의 어린 나이에 아버지와 함께 무대에 오르는 등 뮤지션으로 성장할 수 있는 최적의 환경 속에서 재즈 싱어로서의 자질을 키워 나간다. 음악적 재능이 뛰어났고 아버지의 유명세를 통해 쉽게 가수로 데뷔할 수 있었지만 나탈리는 대학생이 된 1970년대가 되어서야 비로소 가수로서의 길을 결정한다. 매사추세츠(Massachusetts) 대학 재학 중이던 그녀는 매니저인 케빈 헌터(Kevin Hunter)를 만나게 되고 재즈 클럽을 무대로 노래하기 시작한다. 물론 그녀에게는 냇 "킹" 콜의 딸이라는 꼬리표가 항상 붙어 다녔고, 그녀의 독특한 음악적 신분은 프로페셔널로서의 활동에 큰 힘을 실어주게 된다. 클럽 활동을 하면서 만난 여러 재즈 뮤지션들과 앨범을 내려고 했던 그녀의 생각은 그다지 쉽게 풀려 나가지 않았다. 그녀는 여러 레이블에서 음반 제의를 거절당했고, 결국 아버지가 소속되어 있었던 캐피톨(Capitol) 레코드의 문을 두드리게 된다. 1974년 캐피톨 레코드와 계약을 체결한 그녀는 1975년 적지 않은 나이에 데뷔 싱글인 ’This will be’를 발표한다. 시작부터 성공의 연속이었다. 첫 싱글인 ’This will be’는 싱글 차트 6위의 성공을 거두었고, R&B 차트에서는 No.1에 오르는 성공을 거두었다. 그녀는 데뷔 싱글의 성공에 힘입어 데뷔 이듬해인 1976년 그래미에서 ’Best Female R&B Vocal Performance’와 ’Best New Artist of the Year’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누린다. 이어지는 싱글들 ’Inseparable’, ’Sophisticated lady (She’s a different lady)’, ’I’ve got love on my mind’, ’Our love’ 또한 R&B 차트에서 1위에 오르는 성공들을 거두어 들였다. 프로듀서 겸 작곡가 척 잭슨(Chuck Jackson)과 마빈 얀시(Marvin Yancy)는 데뷔 때부터 나탈리의 성공을 이끈 숨은 공로자들이었고, 마빈 얀시는 1976난 나탈리 콜의 남편이 된다.(결혼 생활이 그리 길지는 않았다.) 1970년대 후반에도 줄기찬 성공 행진을 이어갔다. 여섯 장의 앨범 < Inseparable >, < Natalie >, < Unpredicatable >, < Thankful >, < Natalie Live! >, < I Love You So >를 모두 골드와 플래티넘에 올려놓았으며 가수로서의 연이은 성공 덕분에 CBS와 NBC에서 음악 프로그램을 진행하게 되는 기쁨까지 누렸다. 엘라 핏제럴드의 음악을 듣고 부르며 자란 그녀의 음악적 기반은 분명 재즈에 있었다. 하지만 가수로 데뷔한 후 그녀는 팝과 재즈의 경계를 의식하지 않으며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소화했다. 재즈, 소울, 가스펠, 알앤비, 팝을 다양하게 소화해 내었고, 그런 다양한 스타일은 재즈 싱어에게 강한 대중성을 부여했다. 화려한 1970년대를 보낸 그녀였지만 1980년대는 그리 평탄하게 시작되지 않았다. 마빈 얀시와의 결혼 생활에서 아들까지 얻었지만 마빈과 이혼에 이르렀고, 과다한 약물 복용으로 콘서트를 취소하는 등 갑작스럽게 찾아온 개인적인 문제들 때문에 씨름해야 했다. 이러한 문제들로 캐피톨과의 재계약 마저 실패한 나탈리는 미네아폴리스의 한 클리닉에서 갱생치료를 받기 시작한다. 그리고 갱생 치료를 받기 시작한지 6년이 지난 후 이전의 모습으로 다시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내었다. 1987년 프로듀서인 안드레 피셔(Andre Fischer)와 재혼한 나탈리는 이전의 영광을 재현하는 두 번째 고공 비행을 시작한다. 1987년 작 < Everlasting >에서 ’Jump start’, ’I live for your love’, ’Pink cadillac’을 연이어 히트시키며 골드를 거머쥐었고, 의미 있는 앨범 제목을 담고 있는 1989년 작 < Good to Be Back >에서는 팝적 성향이 강한 ’Miss you like crazy’와 ’Wild women do’(1990년 히트 사운드트랙 < Pretty Woman >의 첫 곡으로 수록되었다.)를 히트시킨다. 1991년은 그녀의 삶에 있어서 최고의 해였다. 아버지인 냇 "킹" 콜이 생전에 녹음했던 ’Unforgettable’에 자신의 목소리를 입힌 새로운 방식의 듀엣 곡을 수록한 < Unforgettable >을 발표하였고, 이 앨범으로 그래미에서 7개 부문을 수상하는 대단한 영예를 누리게 된다. 1990년대 중반 이후 팝적인 곡보다는 재즈적 성향이 강한 노래들 또는 초기 스탠다드 팝들을 앨범에 수록하면서 꾸준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노래 : Melody Gardot (멜로디 가르도)
재즈 보컬 재즈 보컬
재즈 색소폰 연주자 재즈 색소폰 연주자
비밥의 선구자 찰리 파커(이하 버드)와 디지 길레스피(이하 디지)는 바늘과 실처럼 항상 따라다니는 존재였다. 엄청난 스피드의 솔로와 한번에 2개 이상의 음을 동시에 내는 찰리 파커의 연주 재능은 비밥의 혁명을 가능케 했다. 그러나 찰리 파커의 이런 재능을 먼저 알아본 것은 바로 그의 동반자이자 라이벌이었던 트럼펫 주자 디지 길레스피였다. 디지는 항상 버드의 막후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곤 했다. 그러나 이런 연유에서 ... 비밥의 선구자 찰리 파커(이하 버드)와 디지 길레스피(이하 디지)는 바늘과 실처럼 항상 따라다니는 존재였다. 엄청난 스피드의 솔로와 한번에 2개 이상의 음을 동시에 내는 찰리 파커의 연주 재능은 비밥의 혁명을 가능케 했다. 그러나 찰리 파커의 이런 재능을 먼저 알아본 것은 바로 그의 동반자이자 라이벌이었던 트럼펫 주자 디지 길레스피였다. 디지는 항상 버드의 막후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곤 했다. 그러나 이런 연유에서 그는 항상 ‘버드 다음’이라는 식으로 ‘2인자’ 취급을 받곤 했다. 하지만 버드의 음악성을 누구보다도 잘 이해했던 사람은 디지였고, 그것을 가능케 해준 사람도 바로 디지였다. (그리고 그들이 창조해낸 새로운 재즈 음악 ‘비밥’의 명칭 역시 디지가 고안했다.) 실제로 디지가 아니었다면 지금의 찰리 파커는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고 얘기할 정도로 버드에게 선사한 디지의 공헌은 막대했다. 눈칫밥을 먹어가며 독학으로 재즈를 익힌 버드와는 달리 디지는 노스 캐롤라이나 주립대에서 클래식을 전공했다.(물론 중간에 뛰쳐나온다.) 음악적인 지식이 전무했던 찰리 파커는 1930년대까지만 해도 이곳저곳을 배회하던 떠돌이 음악인 신세였고, 디지는 이미 그 실력을 인정받아 1937년부터 테디 힐 오케스트라의 트럼펫 주자였다. 하지만 1941년 민턴스 플레이 하우스에서의 이들 둘의 운명적인 만남을 통해 디지는 버드가 지닌 천재성에 매료 되 그와 의기투합한다. 버드가 연주해서 유명해진 ‘Groovin’ high’, ’Salt peanuts’, ’Hot house’, ’Shaw ’nuff’등은 모두 디지가 작곡했다. 1945년부터 민턴스 플레이 하우스를 무대로 활동한 이들 콤비는 버드가 곡의 영감과 아이디어를 제공하면 디지가 그것을 흡수해 곡을 쓰는 방식이었다. 독보적인 음악성을 지닌 찰리 파커의 악상은 이렇듯 디지의 체계적인 음악지식에 의해 악보로 재현되었기에 우리가 지금 버드의 연주를 감상할 수 있는 셈이다. 디지가 재즈사에 남긴 공헌은 버드와의 콤비 플레이 이상이다. 1947년 버드와 함께 한 퀸텟 활동을 접고 초유의 비밥 빅밴드(Bebop Big Band)를 결성해, 다양한 음악적 실험을 시도한다. 이중 가장 두드러지는 것이 바로 그가 고안한 ‘쿠밥’(Cubop)이라는 장르인데, 쿠바 출신의 타악기 연주 대가 차노 포조(Chano Pozo)를 초청해 비밥과 아프로 큐반 리듬의 온전한 결합을 시도하며 재즈 내에서 본격적인 ’퓨전‘을 실험한 최초의 인물로 디지는 기억되다. 재즈의 명 스탠다드로 자리 매김 한 대표 곡 ’A night in tunisia’, Cubana bop’과 같은 곡은 아프로 큐반 재즈의 원형을 제시했다. 또한 그의 빅 밴드에서 활동하던 밀트 잭슨, 제임스 무디, 유셉 라티프, J.J 존스과 같은 50-60년대 ‘모던 재즈 쿼텟’(Modern Jazz Quartet)이란 이름으로 모인 걸출한 뮤지션들을 배출했고, 그의 트럼펫 연주는 이후 팻츠 나바로, 클리포드 브라운 그리고 마일스 데이비스의 연주에 영향을 끼치며 비밥이 한층 그 흑인성을 더하며 하드 밥 (Hard Bop)으로 진화 해 가는데 기여한다. 1917년 노스 캘롤라이나 주 출신인 디지는 12세때부터 트럼펫을 손에 잡고 이후 대학에서 정규 음악교육을 받지만, 뮤지션이 되기 위해 자퇴한다. 30년대 스윙시대를 빛냈던 트럼펫 주자 로이 엘드리지(Roy Eldridge)의 영향을 받은 그는 1937년 테디 힐 오케스트라를 시작으로 프로로 데뷔한다. 이후 1939-1941년까지 캡 캘로웨이(Cab Calloway) 빅 밴드에서 활동하지만 리더와의 사소한 다툼으로 이윽고 해고된다. 이윽고 그의 첫 음악동지 테디 힐이 세운 민턴스 플레이 하우스에 입성, 버드를 비롯한 비밥의 명인들과 음악적 교분을 나누며 1941-1943년까지 엘라 핏 제럴드, 베니 카터, 콜맨 홉킨스의 레코딩 세션에 참여하며 비밥의 혁명을 준비한다. 1942년 얼 하인즈 빅밴드에 합류하며 디지는 버드와 본격적인 활동을 하게되었고 이때 밴드의 보컬주자 빌 엑스타인의 보컬로 그의 대표작 ‘A night in tunisia’(1943)을 발표한다. 1945-1947년까지 버드와 함께 퀸텟을 조직, 비밥을 세상에 알렸고, 1947년부터 자신의 비밥 빅밴드를 이끌면서 아프로 큐반 음악을 재즈에 소개한다. 1950년엔 버드와 다시 만나며 < Bird & Diz >를 버브 레이블에서 공개했고, 이후 1950년대 내내 버브사를 통해 자신의 연주에 큰 영향을 준 로이 엘드리지와 함께 한< Dizzy Gillespie & Roy Eldridge >(1954), 10년 동안의 빅 밴드 활동을 중간 결산하는 라이브 명반 < At Newport >(1957)을 발표한다. 젊은 나이에 유명을 달리한 버드와는 달리 디지는 이후 60년대부터 죽을 때까지 지속적인 활동을 보이는데, 자신의 빅 밴드를 해체시키고 소규모 밴드 중심으로 활동한 그는 레오 라이트(Leo Wright), 라로 쉬프린(Lalo Schifrin), 제임스 무디(James Moody), 케니 바론(Kenny Barron)과 같은 60년대 스타급 재즈 뮤지션들과 교류했고, 70년대 초엔 재즈 자이언츠(Jazz Giants)라는 프로잭트 밴드를 결성, 델로니우스 몽크 ,소니 스티츠, 아트 블래이키와 같은 40-50년대 비밥 명인들과 재결합을 시도한다. 이후 재즈 계에서 그의 영향력은 차츰 줄어 들어갔지만, 후배 재즈 뮤지션들은 그의 업적을 칭송하며 80년대까지 그와 함께 연주를 같이 한다. 그는 최근 개봉했던 영화 ‘리빙 하바나’를 통해 소개된 아르투로 산도발(트럼펫)과 파키토 리베라(색스폰)와 같은 쿠바 출신의 뮤지션들을 전 세계에 알리는 역할을 맡았다. 그의 정력적인 활동은 죽기 1년 전인 1992년까지 지속되었다. 디지는 비슷한 시기 자웅을 겨뤘던 버드와 같은 천재는 아니었다. 하지만 ‘흑인이라는 운명’에 자신을 파괴했던 버드와는 달리 그는 자신을 아낄 줄 알았고, 오랜 기다림 끝에 대중적인 인기도 얻을 수 있었다. 그는 버드와 함께 ‘비밥의 산파자’라는 영예와 더불어 많은 후배 뮤지션들을 키워내며 재즈 사에서 버드에 못지 않은 영향력을 행사한 인물로 기억된다.
재즈 색소폰 연주자 재즈 색소폰 연주자
연주 : Sonny Rollins (소니 롤린스,Walter Theodore Sonny Rollins)
재즈 테너 색소폰 연주자 재즈 테너 색소폰 연주자
연주 : Ben Webster Quartet (벤 웹스터 쿼텟 (재즈 밴드))
‘음의 마술사’ 듀크 엘링턴(Duke Ellington)은 두말할 필요없이 재즈역사에 커다란 획을 그은 대가로 첫손에 꼽히는 인물이다. 1927년 데뷔이래 근 50년에 이르는 오랜 활동 기간동안 무려 6000곡이라는 미증유의 창작력을 보이며 빅 밴드 재즈 연주가 표현할 수 있는 다양한 실험과 혁신을 선보였다. 그는 빅 밴드를 구성하는 악기 하나 하나의 특색을 정확히 이해했다. 관악기의 독특한 울림이 들리는 그의 ... ‘음의 마술사’ 듀크 엘링턴(Duke Ellington)은 두말할 필요없이 재즈역사에 커다란 획을 그은 대가로 첫손에 꼽히는 인물이다. 1927년 데뷔이래 근 50년에 이르는 오랜 활동 기간동안 무려 6000곡이라는 미증유의 창작력을 보이며 빅 밴드 재즈 연주가 표현할 수 있는 다양한 실험과 혁신을 선보였다. 그는 빅 밴드를 구성하는 악기 하나 하나의 특색을 정확히 이해했다. 관악기의 독특한 울림이 들리는 그의 음악엔 그만의 음색이 느껴진다. 여기에 그는 재즈의 정체성을 강화해주는 다양한 화성 전개를 고안했고, 클래식 음악에서나 볼 수 있는 조곡(suite) 형식의 대곡을 재즈로 소화해낸다. 사후에도 그의 음악유산은 막대한 영향력을 과시, 많은 음악 학자들이 “듀크 엘링턴은 세계 대중음악을 20년 이상 앞당겼다”고 평했을 만큼 그는 재즈를 예술적인 차원으로 승화시켰다. 1899년 4월29일, 에드워드 케네디 엘링턴이라는 본명으로 미국 워싱턴에서 태어난 그는 어린 시절부터 피아노 연주를 접한다. 아버지는 백악관에서 일하는 집사였고 당시 흑인들 중에선 드물게 중산층에 속했던 덕에 가정교사를 통해 정규 클래식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1914년, ‘Soda fountain rag’와 ’What you gonna do when the bed breaks down’를 처음으로 작곡했고, 18세 때에는 워싱턴 지역의 유명한 밴드 리더로서 지역의 유명인사로 떠오른다. 1923년 재즈의 메카로 부상하던 뉴욕에 진출한 그는 자신의 밴드 ‘더 워싱턴스’(The Washingtons)를 결성한다. 이 때 자신의 이름에 영예로운 공작(Duke) 칭호를 부여하며 듀크 엘링턴으로 개칭한다. 1927년에 이르러 밴드는 뉴욕 지역의 여러 나이트클럽에서 인정을 받았고, 얼마 후 백인 전용클럽이었던 코튼 클럽(Cotton Club)에 입성한다. 그가 악장으로 일하게 된 코튼 클럽은 미국의 상류층들이 가무를 즐기던 곳으로 이후 재즈의 상징어가 된다. 뉴 올리언즈의 스토리 빌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에서 음악 생활을 하게 된 그는 바야흐로 자신의 음악세계를 마음껏 펼칠 수 있게 되었고 여기서 그의 첫 출세작 ‘East St. Louis toddle-oo’(1927)가 발표된다. ’와우-와우‘하는 독특한 트럼펫 소리가 시작을 알리는 이 곡은 당시까지의 재즈 연주가 대부분 장조였던 것과 달리 구슬픈 멜로디가 들리는 단조 풍의 연주곡이었다. 독특한 악기 음색과 치밀한 계산이 돋보이는 연주 편곡은 당시 28세를 갓 넘은 청년 듀크 엘링턴을 일약 재즈의 비범한 뮤지션으로 상승시킨다. 1931년까지 코튼 클럽에서 연주를 하며 ‘Black beauty’(1928), ’Mood indigo’(1930)와 같은 걸작을 남긴다. 하지만 대공황이라는 경제 한파는 코튼 클럽에 사람들의 발길을 주춤케 했고 그는 잠시 유럽으로 진출, 이후에 있을 전성기를 위한 ’일보후퇴‘를 택한다. 루즈벨트 대통령의 경제 개혁은 미국 사회에 다시 활기를 되찾게 해준다. 여기에 NBC, CBS, ABC 미국 3대 라디오 방송국이 뉴욕에 생기면서 재즈 음악인들은 금주(禁酒)령으로 묶인 그들의 창작 혼을 다시금 살려 낼 수 있는 분위기를 맞이한다. 듀크 엘링턴은 이 절호의 찬스를 통해 ‘스윙의 왕’으로 군림하며 1930-40년대를 그의 음악 경력 상 최고의 절정기로 기록되게 한다. 경제 공황이라는 무거운 짐을 떨쳐버린 1930년대 미국 시민들은 신나고 경쾌한 음악을 필요로 했고, 1935년 베니 굿맨과 카운트 베이시로 대표되는 스윙(Swing)의 폭발은 뉴욕 시내의 무도장을 뜨겁게 달구고 있었다. 코튼 클럽에서 다시 지휘봉을 잡은 듀크 엘링턴은 이 시기에 ’It dont mean a thing(If it ain’t got that swing)’(1932), ’Echoes of Harlem’(1936), ‘Dimuniendo in blue’(1937), ‘Cotton tail’(1940), ’Ko-ko’(1940), ’Take the “A" train’(1941) 등 그를 대표하는 수많은 명곡들을 발표한다. 특히 1937년에 발표한 ’Dimuniendo in blue’는 재즈 역사에서 처음으로 접하는 7분이 넘는 대곡이다. ‘Dimuniendo in blue’가 탄생하기까지엔 웃지 못할 애피소드가 있다. 1930년대 당시 SP(78회전)음반 한 면에는 대략 3분 정도의 음악 밖에 수록할 수 없었다. 이 음악을 녹음하기 위해 그는 앞뒷면을 전부 사용해서 녹음을 했고, 결국 7분이 넘는 연주 테입은 SP 음반에 앞뒷면으로 나뉘어져 실린다. ‘3분 짜리 춤곡’으로 인식되었던 당시 스윙 음악 스타일에 그는 자신의 음악성을 한정 당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스윙이 아니면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당당하게 외친 그는 스윙이라는 음악을 단순한 ’춤곡‘ 이상의 가치를 부여하고자 했다. 훗날 마일스 데이비스가 애용했던 플런저(Plunger; 트럼펫 앞을 막았다 닫았다 하며 음색을 조절하는 기구, 우리말로 소음기라고도 한다)를 이용한 트럼펫의 독특한 울림은 여전히 연주 전체에 ’약방의 감초‘처럼 짜릿한 생기를 불어넣었고, 정적인 분위기와 웅장한 분위기를 번갈아 가며 연출하는 세련된 편곡은 스윙 연주 편곡의 전형을 제시했다. 단조와 장조를 교묘하게 합쳐 놓은 듯한 정교한 멜로디 진행, 싱코페이션(당김음)을 이용한 원활한 감정 처리, 극적인 느낌을 자아내는 빠르기 조절과 다양한 악기 음색을 실험하며 그는 정통 재즈(mainstream)의 알파에서 오메가까지를 자신의 음악에 모두 담아내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가던 무렵 ’재즈의 세대교체’를 선언하며 등장한 비밥(Bebop)의 선풍에 아랑곳없이 듀크 엘링턴은 여전히 자신의 빅 밴드를 지속시키며 스윙을 고집했고, 주변의 많은 밴드들을 위해 수많은 곡을 써 줄 정도로 왕성한 창작력을 유지한다. 1950년대 중반에 들어 그는 작곡 구조에 새로운 시도를 감행하기에 이른다. 이른바 ‘조곡’(suite)형식이 바로 그것인데, 하나의 커다란 주제를 갖고 여러 소품들을 만들어 전체가 하나의 큰 대곡 형식을 갖추는 조곡을 재즈에 도입해 그는 다시 한번 재즈 역사에 방점을 찍는다. 그의 작곡 콤비로 오랜 동안 함께 해온 작곡가 빌리 스트레이혼(Biily Strayhorn)과 공동으로 작, 편곡하여 1957년 발표한 < Such Sweet Thunder >같은 앨범은 조곡 스타일의 재즈 연주 가운데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극찬을 받았다. 세익스피어(Shakespear)의 작품들에 나오는 등장인물들의 이야기를 음악으로 묘사한 이 작품은, 재즈 역사에 손꼽히는 명반 중 하나로 남아있다. 1956년 뉴욕 재즈 페스티벌에 참가하며 듀크 엘링턴은 ‘제2의 전성기’를 맞이한다. 1950년대 말엽과 1960년대의 활동은 비록 1930년대만큼의 호응을 얻지 못했지만 쉬지 않고 빅 밴드를 이끌며 세계 투어를 비롯하여, 활발한 음반 발표와 곡 작업을 지속한다. 이 당시에 대표작으로 거론되는 ‘Tourist point of view’(1966)같은 곡에선 말년에 아랑곳없이 기세 등등한 멤버들의 연주실력과 그의 변함 없는 음악성이 느껴진다. 빅 밴드 단원들은 기복 없는 안정적인 연주를 했는데, 이는 1930년대부터 그가 죽을 때까지 평생을 같이한 단원들이 함께 남아있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바리톤 색스폰 주자 해리 카네이(Harry Carney)는 듀크 엘링턴이 코튼 클럽에서 데뷔한 1927년 때부터 무려 47년 동안 그가 그의 밴드 멤버로서 활동한다. 후반기 명작으로 거론되는 재즈 조곡 < Latin American Suite >(1970)를 발표하고 끊임없는 투어는 1970년대 초까지 계속 되었으나 몸이 쇠약해진 듀크 엘링턴은 결국 1974년 5월 24일 세상을 떠나고 만다. 끊임없이 재즈 음악에 새로움을 불어넣기 위해 자기개발에 부단했던 그는 죽을 때까지도 피아노 앞에서 작곡을 놓지 않는 열정의 소유자였다. ‘위대한 재즈 맨’ 듀크 엘링턴은 그의 밴드와 자신의 곡으로 미국 대중음악의 국보인 재즈의 위상을 한껏 높이는데 기여했다. 클래식 계를 비롯한 전 세계의 유명한 작곡가들은 지금까지도 초연 되지 않은 그의 곡들을 연구하며 지금도 그의 놀라운 음악성에 찬사를 아끼지 않고 있다.
재즈 색소폰 연주자 재즈 색소폰 연주자
연주 : Gene Ammons (진 아몬스,Eugene Ammons / "Jug" Ammons)
재즈 색소폰 연주자 재즈 색소폰 연주자
재즈 색소폰, 클라리넷 연주자 재즈 색소폰, 클라리넷 연주자
재즈 색소폰 연주자 재즈 색소폰 연주자
연주 : Jimmy Smith (지미 스미스 )
재즈 피아노, 오르간 연주자 재즈 피아노, 오르간 연주자
연주 : Wes Montgomery (웨스 몽고메리 )
재즈 기타 연주자 재즈 기타 연주자
연주 : Bill Evans Trio (빌 에반스 트리오)
재즈 색소폰 연주자 재즈 색소폰 연주자
기타리스트 존 스코필드는 블루지함과 펑키한 기운을 담은 독특한 기타 톤을 창조한 인물이다. 데뷔 때부터 줄곧 정통과 현대를 공히 아우르는 폭넓은 음악성을 선보인 존 스코필드는 재즈 기타리스트 팻 메스니(Pat Metheny), 빌 프리셀(Bill Frisell)과 함께 80-90년대 재즈계가 주목하는 3대 기타리스트 중 한 명으로 추앙받고 있다. 흡사 키보드를 연주하는 듯한 그의 독특한 기타 톤은 선명한 각을 느... 기타리스트 존 스코필드는 블루지함과 펑키한 기운을 담은 독특한 기타 톤을 창조한 인물이다. 데뷔 때부터 줄곧 정통과 현대를 공히 아우르는 폭넓은 음악성을 선보인 존 스코필드는 재즈 기타리스트 팻 메스니(Pat Metheny), 빌 프리셀(Bill Frisell)과 함께 80-90년대 재즈계가 주목하는 3대 기타리스트 중 한 명으로 추앙받고 있다. 흡사 키보드를 연주하는 듯한 그의 독특한 기타 톤은 선명한 각을 느끼게 한다. 비비 킹과 조지 벤슨으로부터 물려받은 블루지한 선율감각과 리듬감, 여기에 록(Rock)적이 기운마저 풍기는 존의 연주는 가히 독보적이라 할 수 있다. 아쉬운 건 이런 그의 연주스타일이 우리나라에선 그다지 환영받지 못했다는 것이다. 인상적인 선율을 기타로 연주하는 팻 메스니나 국내에 절대적인 매니아 층을 형성하고 있는 기타리스트 빌 프리셀만큼 존 스코필드는 기억되지 못하는 것이다. 감미로운 선율보다는 리듬과 섬뜩이는 기타 톤에 비중을 둔 그의 음악성이 우리 재즈 팬들에겐 익숙하지 않아서였을 것이다. 1951년 미국 오하이오주 출신인 존 스코필드는 고등학교 재학시절 처음 기타를 접하며 재즈계에 입문한다. 1970-1973년 재즈 명문 버클리 음대에서 수학하며 보스턴 지역 클럽가를 중심으로 활동하며 연주의 내공을 다진다. 이런 엘리트 코스를 밟은 존 스코필드의 첫 무대는 쿨 재즈의 대가 쳇 베이커, 제리 멀리건의 카네기 홀 실황 앨범 < Carnegie Hall Concert > (1974)이었다. 기타리스트 자격으로 참가한 존은 이를 통해 차츰 주목받는 기타리스트로 성장한다. 1975년, 마하비시누 오케스트라 출신의 드러머 빌리 코브햄(Billy Cobham)의 밴드에 기타리스트 존 에이버크롬비(John Abercrombie)의 후임으로 들어간 존 스코필드는 빌리 코브햄의 앨범 < A funky thide of sings > (1975)를 시작으로 이후 3년 동안 빌리 코브햄 밴드 멤버로 활약한다. 자신의 이름으로 발표한 첫 리더작 < John Scofield > (1977)는 일본 출신의 드럼,베이스 연주자가 참여했고 일본 출신의 트럼펫터 히노 테루마사(Hino Terumasa)가 참여해 록과 정통 재즈를 넘나드는 독창적인 시도를 선보인다. 트리오/쿼텟을 번갈아가며 선보인 존 스코필드의 초기작들은 이후 1981년까지 독일 레이블 엔자(Enja)를 통해 소개되었다. 솔로활동과 병행해 존은 베이시스트 찰스 밍거스와 협연, 비브라폰에 게리 버튼 퀸텟, 색소폰에 데이브 리브만 퀸텟 활동을 병행하며 선배 정통 재즈 연주인들과의 연주 교분을 만들어 간다. 80년대 접어들어 존은 당시 5년 만에 의욕 찬 컴백을 선언한 재즈-록 퓨전의 창시자 마일스 데이비스(Miles Davis)의 부름을 받게 된다. 존 스코필드가 만드는 독창적인 기타 그루브감에 매료된 마일스는 1982년, 존을 자신의 밴드에 합류시켰다. 마일스가 새로 조직한 재즈 록 밴드에 동참한 존은 세계 투어에 나섰고 < Star People > (1982), < Decoy > (1984), < You’re under Arrest > (1985) 을 통해 한층 리듬감으로 충만한 자신의 기타 주법을 정립해갔다. 엔자(Enja)레이블을 거쳐 존은 1984년부터 캐나다의 그라마비전(Gramavision) 레이블을 통해 작품활동을 한다. 이곳서 존은 < Still Warm > (1985) , < Loud Jazz > (1987) 와 같이 80년대를 대표하는 재즈 퓨전 명반들을 발표한다. 이와 병행해 존은 베이시스트 마크 존슨(Marc Johnson)과 ECM 레이블에서 발표한 < Bass Desires > (1985)에 기타리스트 빌 프리셀과 함께 참여, 두 걸출한 기타리스트의 개성이 발현된 창조적인 연주 대결을 펼쳐 보이기도 한다. 1989년 블루 노트(Blue Note)사로 소속사를 옮겨 7장의 앨범을 발표하며 보다 정통 재즈 작법에 근거한 연주를 들려주며 한층 절제된 기타 연주를 들려줬다는 평을 받는다. 테너 색소폰주자 조 로바노와 찰리 헤이든의 베이스, 잭 드자넷의 드럼이 참여한 블루 노트 데뷔작 < Time on my hand > (1989) 를 시작으로 내놓는 작품마다 호평을 받는다. 90년대 들어 존의 기타연주엔 소울과 펑키한 기운이 더욱 중요해졌다. 지금까지도 그의 대표작으로 칭송되는 < Hand Jive > (1993)는 60-70년대 소울 재즈스타 색소폰니스트 에디 헤리스(Eddie Harris)가 참여했고 1995년 발표한 < Groove Elation > 에선 해먼드 올갠주자 래리 골딩스(larry Gildings), 드러머 이드리스 무하마드(Idris Muhamad)의 참여가 돋보였다. 또한 기타리스트 팻 메스니와 함께 한 작품 < I can see your house from here > (1993) 도 빼놓을 수 없는 성과였다. 1997년 버브(Verve)로 소속사를 옮긴 존은 지금까지 8장의 앨범을 발표하며 정통-현대를 종횡무진 오가는 작품세계를 펼쳐내고 있다. 90년대 컨템포러리 재즈계의 무서운 신인으로 등장한 3인조 메데스키, 마틴 & 우드(MMW)와 함께 한 < A Go Go > (1998) 에선 애시드 재즈의 몽환감과 펑키 재즈의 약동감이 넘쳤고, 빌리 히긴스(Billy Higgins, 드럼), 크리스찬 맥브라이드(Christian Mcbride, 베이스) 케니 가렛(Kenny Garette, 앨토 색소폰)과 같은 정통파 뮤지션들이 함께 한 < Work For Me > (2001) 는 한층 성숙된 정통 재즈의 느낌을 실어냈다. 2002년, 예전 마일스 데이비스와의 작업을 생각하며 만들었다는 < Uberjam > (2002) 을 통해 인도의 라가 선율이 어우러진 펑키 리듬의 향연으로 다시 한번 재즈 팬들의 이목을 끌었다. 힙합의 턴테이블과 샘플링까지 도입된 그의 야심찬 시도는 폭발적인 반응을 이끌어냈고 그해 한국에 첫 내한 공연으로까지 이어진다. 이 당시 존 스코필드는 공연 내내 흡사 댄스홀을 방불케 하는 리듬의 향연으로 청중들을 몰아넣었다. 그의 음악성이 다시 정통으로 우회 할 것이다라는 일반의 예측을 뒤엎고 2003년, 존 스코필드는 < Up all night > 로 자신의 관심은 소울과 펑키의 있음을 만방에 천명했다. 존이 펼쳐가는 리듬의 향연은 클럽 공연으로 이어져 2004년엔 드러머 폴 모션과 베이시스트 스티브 스왈로우와 함께한 2003년 뉴욕 블루노트 클럽에서의 공연 실황을 담은 < EnRoute > 로 계속된다. 2005년 소울 싱어 레이 찰스에 대한 트리뷰트 붐을 타고 존 스코필드는 레이 찰스의 음악을 자신의 기타 연주로 해석한 < Play the music of Ray Charles > 를 발표한다. 닥터 존, 존 메이어, 마빈 스테이플, 아론 네빌 등 소울과 R&B계열의 기라성같은 보컬 주자들이 함께 한 작품이었다. 잠깐 쉬어가는 코너처럼 예전보다 한층 부담 없이 다가온 이번 작품은 평소 존경해마지않던 소울의 대부에 대한 존의 관심이 느끼게 한다.
연주 : Nicholas Payton (니콜라스 페이튼)
재즈 트럼펫 연주자 재즈 트럼펫 연주자
현란한 개인기와 격조 있는 발라드 연주까지 무리 없이 소화해내며 현 재즈계의 최고의 테크니션으로 추앙되는 테너 색스폰 주자 마이클 브레커는 어떤 스타일의 연주에서도 자신의 색채를 발하는 진정한 뮤지션이다. 70년대 인기 재즈 퓨전 듀오 ‘브레커 브라더스’를 형인 트럼펫 주자 랜디 브레커(Randy Brecker)와 함께 결성해 활동하며 지금껏 팝과 록, 재즈의 경계선을 넘나들며 자신의 솔로 앨범을 비롯해, 여러 ... 현란한 개인기와 격조 있는 발라드 연주까지 무리 없이 소화해내며 현 재즈계의 최고의 테크니션으로 추앙되는 테너 색스폰 주자 마이클 브레커는 어떤 스타일의 연주에서도 자신의 색채를 발하는 진정한 뮤지션이다. 70년대 인기 재즈 퓨전 듀오 ‘브레커 브라더스’를 형인 트럼펫 주자 랜디 브레커(Randy Brecker)와 함께 결성해 활동하며 지금껏 팝과 록, 재즈의 경계선을 넘나들며 자신의 솔로 앨범을 비롯해, 여러 뮤지션들의 음반 크레딧(credit)의 그의 이름을 들어냈다. 로큰롤의 태동 때부터 약방의 감초 격으로 연주의 흥을 돋우는 색스폰은 재즈를 논함에 있어 없어서는 안 되는 위상을 지니고 있다. 찰리 파커, 소니 롤린스, 그리고 존 콜트레인으로 이어지는 테너 색스폰 연주의 계보를 봐도 알 수 있듯 색스폰 연주는 곧 재즈의 역사이자 연주 혁신의 근원이었다. 마이클 브레커는 바로 이런 색스폰 연주의 선현들이 남긴 영감을 온전히 자신의 스타일로소화해 낸 몇 안 되는 연주자로서 웨더 리포트 출신의 웨인 쇼터와 함께 현 재즈 음악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색스폰 연주자로 기억된다. 1987년 첫 솔로 앨범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무려 8개의 그래미상을 거머쥐는 미증유의 기록을 만들었다. 1949년 미국 필라델피아 생인 그는, 재즈 연주를 즐기는 부모님 밑에서 어려서부터 재즈 연주를 접할 수 있었다. 형인 랜디 브레커가 트럼펫을 연주할 때 그는 클라리넷과 알토 색스폰으로 재즈의 감각을 익혀나갔다. 60년대 한창 주가를 올리던 비비 킹과 에릭 클랩톤의 일렉트릭 블루스에 심취해 있던 중, 고등학교 때 처음 접한 존 콜트레인의 연주는 그의 인생을 재즈에 헌신케 하며 이후 테너 색스폰 연주자로 진로를 결정한다. 1969년 뉴욕에 진출한 그는 형과 함께 막 태동하기 시작했던 재즈 록 사운드에 관심을 기울였고, 빌리 코브햄, 존 에이버크롬비를 만나며 재즈 록 밴드 드림스(Dreams)를 결성하며 2장의 앨범을 발표한다. 그러나 그의 첫 밴드활동은 다른 쟁쟁한 재즈 퓨전 밴드와 자웅을 겨루기엔 부족하다고 판단, 1972년 밴드 생활을 잠시 접고 빌리 코브햄, 호레이스 실버 악단을 비롯한 여러 선배 뮤지션들과 교류하며 자신만의 연주 스타일을 연마해나간다. 일렉트릭 블루스를 재즈 연주에 접목하길 원했던 그는 1974년, 형인 랜디 브레커와 의기투합, 재즈 펑크(Jazz Funk) 밴드 브레커 블라더스(Brecker Brothers)를 결성, 이듬해 1월 데뷔 작 < Brecker Brothers >(1975)를 당시 신생이었던 아리스타(Arista) 레코드에서 발표한다. 이내 대중적인 호응을 얻어 수록곡 ‘Sneakin’ up behind you’를 빌보드 차트에 진입시킨다. 1980년까지 지속된 브렉커 브라더스는 총 6장의 앨범을 발표한다. 뉴욕을 무대로 활동한 그는 팻 메스니, 칙 코리아, 잭 드자넷 과 같은 거물급 재즈 퓨전 스타와 음악적 교류를 가졌고 세션활동에도 두각을 보이며 조니 미첼의 재즈 퓨전 라이브 앨범 < Court & Spark >(1980), 스틸리 댄의 < Katy Lied >(1975), 폴 사이먼에게 재즈의 기운을 선사해준 명반 < Still Crazy After All these years >(1975), 브루스 스프링스틴의 역작 < Born To Run >(1975)등 수많은 팝 앨범에서 색스폰 연주를 맡으며 뉴욕 재즈계에서 가장 바쁜 연주인으로 주가를 올렸다. 1979년, 평소 세션 활동을 통해 친분이 있던 비브라폰 주자 마이크 마이니어리와 함께 재즈 퓨전 밴드 스텝스 어헤드(Steps Ahead)의 멤버로 합류하며 다시 6년 간 그곳에 몸담는다. 이미 서른을 넘은 나이였지만 그는 여전히 여러 연주자들과의 연주 경험을 중요시했고, 이런 내공의 축적 끝에 1987년 임펄스(Impulse!)사에서 그의 첫 솔로 앨범 < Michael Brecker >를 내 놓으며 중고 신인으로서 재즈 계에 독립 선언을 한다. 평소 잘 알고 지냈던 팻 메스니(기타), 찰리 헤이든(베이스), 잭 드자넷(드럼), 케니 커크랜드(키보드)가 기꺼이 그의 첫 출사표의 동지가 되어준 그의 첫 앨범은 ‘다운비트’, ‘재지즈‘와 같은 재즈 전문지로부터 ’올해의 앨범‘으로 뽑히며 이듬해 발표한 두 번째 솔로 작 < Don’t Try This At Home >(1988)은 그에게 첫 그래미상을 안겨준다. 90년대 들어서도 그의 활동은 지칠 줄 몰랐다. 1980년 해체되었던 브레커 브라더스가 1992년 재 결성되며 < The Return Of Brecker Brothers >(1992), < Out Of The Loop >(1994)를 발표하며 세계 투어에 나설 정도로 큰 인기를 얻는다. 1997년, 팻 메스니, 데이브 홀란드(베이스), 잭 드자넷이 함께 하며 그의 명성을 다시금 확고히 해준 < Tales From The Hudson >은 1990년대를 대표하는 재즈 앨범으로 칭송되며 그에게 다시 그래미 상의 행운을 안겨준다. 이후 < Two Blocks From Edge >(1998), < Time Is Of The Essence >(1999)을 연달아 성공시키며 웨인 쇼터와 함께 20세기를 대표하는 테너 색스폰 솔리스트로서의 영광스런 방점을 찍는다. 2001년, 버브사와 계약하며 발라드 연주로만 꾸며진 < Nearness Of You >를 선보이며 ‘Fire & rain’(1970)으로 1970년대를 풍미했던 싱어 송 라이터 제임스 테일러가 보컬로 참여한 ‘Don’t let me be lonely tonight’가 좋은 반응을 얻는다. 앨범은 2002년 올해, 그에게 통산 여덟 번째 그래미상을 안겨줬고, 얼마 후 허비 핸콕(피아노), 로이 할그로브(드럼)와 함께 한 정통 트리오 앨범 < Directions in Music: Live at Massey Hall >(2002)를 발표한다. 그리고 오는 10월 28일, 피아니스트 케니 베런과 비밥의 창시자 디지 길레스피의 딸이자 재즈 보컬 지니 브라이슨과 함께 그의 첫 서울 연주 나들이가 예정되어 있다.
재즈 피아니스트 허비 핸콕은 40년이 넘는 활동기간 동안 정통 재즈에서부터 최첨단 일렉트로닉 악기를 내세운 재즈 퓨전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음악 세계를 선보여왔다. 재즈 피아니스트 빌 에반스의 영향이 느껴지는 강한 서정성의 < Maiden Voyage >(1965)에서 슬라이 & 패밀리 스톤 풍의 펑키 리듬이 압도적인 < Headhunters >(1973)에 이르기까지 그의 음악은 특정 스타일로 규정될 수 없다. ... 재즈 피아니스트 허비 핸콕은 40년이 넘는 활동기간 동안 정통 재즈에서부터 최첨단 일렉트로닉 악기를 내세운 재즈 퓨전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음악 세계를 선보여왔다. 재즈 피아니스트 빌 에반스의 영향이 느껴지는 강한 서정성의 < Maiden Voyage >(1965)에서 슬라이 & 패밀리 스톤 풍의 펑키 리듬이 압도적인 < Headhunters >(1973)에 이르기까지 그의 음악은 특정 스타일로 규정될 수 없다. 정통 재즈에서부터, R&B, 일렉트로닉 뮤직, 펑키 등 다채로운 음악지형도를 펼쳐온 그는 한마디로 ‘변신’을 즐기는 재즈맨이다. 1940년 4월12일 미국 시카고의 사우스사이스에서 허버트 제프리 핸콕(Herbert Jeffery Hancock)이라는 본명으로 태어난 그는 7살부터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 일찍 두각을 나타내 11살에 이미 시카고 심포니 오케스트라와의 협연으로 모차르트 협주곡 D장조를 연주하는 천재성을 보였다. 기계 다루는데도 재능을 보여 나중에는 재즈 뮤지션으로서는 특이하게 대학서 전자공학을 전공한다. 이런 경력은 그가 1960년대 일렉트릭 피아노인 펜더 로즈(Fender Rhodes)나 클라비넷(Clavinet)과 같은 키보드 사운드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되었다. 대학서 만난 색스폰 주자 행크 모블리, 트럼펫 주자 리 모건과 연주 활동을 하면서 도날드 버드의 권유로 1961년 뉴욕으로 진출해 그의 밴드에 가입하면서 본격적인 재즈맨의 길을 걷게 된다. 잠시 후 재즈 레이블 블루 노트(Blue Note)사가 그에게 계약을 요청, 이듬해인 1962년 데뷔작 < Takin’ off >(1962)를 내놓는다. 호레이스 실버(Horace Silver) 풍의 펑키한 피아노 주법이 인상적인 이 앨범의 수록곡 ‘Watermelon man’은 라틴 재즈 퍼커션 주자인 몽고 산타마리아(Mongo Santamaria)의 노래 버전으로 더 유명하다. 총 7장의 앨범을 블루 노트를 통해 발표하는 동안, 1993년 애시드 재즈그룹 US3가 커버해 유명해진 ‘Cantaloupe island’가 수록된 < Empyrean Isle >(1964)를 비롯하여 < Maiden Voyage >(1965), < Speak Like A Child >(1968)과 같은 명반을 통해 빌 에반스 풍의 서정성과 호레이스 실버의 펑키한 감각을 합쳐놓은 듯한 개성 어린 피아노 연주를 들려줌은 물론, 그의 탁월한 곡 쓰기 실력을 유감 없이 발휘한다. 재즈 솔리스트로서 1960년대 내내 왕성한 활동을 보였지만, 재즈의 대가 마일스 데이비스 퀸텟에서의 활동은 그가 보다 진취적인 재즈뮤지션으로 나아갈 수 있는 발판이 되었다. 토니 윌리암스(Tony Williams), 론 카터(Ron Carter), 웨인 쇼터(Wayne Shorter), 마일스 데이비스(Miles Davis) 그리고 허비 핸콕(Herbie Hancock)으로 이루어진 제2기 마일스 데이비스 퀸텟은 < E. S. P >, < Miles In The Sky >, < Socerrer >, < Nefertiti >, < Filles De Killimanjaro >와 같은 명반을 잇달아 발표한다. 당시 “Miles In The Sky”(1968)를 작업하던 중 마일스 데이비스의 권유로 일렉트릭 피아노를 연주하게 된 허비 핸콕은 칙 코리아(Chick Corea)와 함께 키보드 사운드를 바탕으로 70년대 재즈-록 퓨전의 선두주자로 군림하는 초석을 다진다. 마일스와의 활동이 그가 ‘음악에 다양한 시도를 할 줄 아는 뮤지션’으로 비상하는데 상당한 영향을 미쳤던 것이다. 마일스 데이비스가 ‘재즈-퓨전’으로의 음악성을 표방했던 1969년 허비 핸콕은 마일스를 벗어나 독립, 므완디시(Mwandish)라는 이름의 7인조 밴드를 결성한다. < Mwandish >(1970), < Crossing >(1971), < Sextant >(1973)에서 실험적인 ‘일렉트로닉-펑키’ 뮤직을 선보인 허비 핸콕은 다양한 종류의 키보드 사운드를 재료로 한 진보적인 재즈-록 퓨전을 선보이며 비평적 찬사를 얻는다. 이런 므완디시 밴드에서 보여준 허비 핸콕의 새로운 시도는 주목할 만했지만, 대중들의 반응은 냉담했다. 실험적 사운드에 천착한 음악이 대중들이 수용하기엔 어려웠던 것이다. 허비 핸콕은 자신의 밴드에 쏟은 열정만큼 대중적 성과가 나오지 않자, 당시 유행하던 R&B의 문법을 자신의 음악에 대거 도입한다. 슬라이 앤 더 패밀리 스톤을 통해 경험한 ‘펑키 사운드’에 자신의 지향을 정했고 그 결과 나온 < Headhunters >(1973)는 엄청난 파장을 몰고 온다. 빌보드 앨범 차트 13위까지 오른 이 앨범은 명료한 백 비트를 바탕으로 펑키 사운드가 전면에 부각된 ‘파티용 댄스뮤직’이었다. 200만장 판매라는 상업적 성공을 거두며 자신감을 회복한 그는 연이어 발표한 < Thrust >(1974), < Man-Child >(1975), < Secret >(1976)를 계속 히트시키며 재즈 펑크(Jazz- Funk)의 전도사로서 1970년대 내내 대중적 인기를 얻었다. 재즈 퓨전을 이 시기에 표방하면서도 그는 1977년 V.S.O.P.라는 팀을 결성, 1960년대 마일스 데이비스 퀸텟에서 연주를 같이 했던 멤버들과 같이 ‘정통 재즈로의 외도(?)’를 즐기기도 한다. 재즈-퓨전에 이어 1980년대 윈턴 마샬리스(Wynton Marshallis)등에 의해 꽃 피운 포스트 밥(Post-bop) 혹은 신(新)전통주의라 불리는 새로운 경향을 그는 이미 V.S.O.P.를 통해 그 도화선을 제시했던 것이다. 1980년대 들어 허비 핸콕은 또 한번의 변신을 감행한다. 1983년 발표한 < Future Shock >에 수록된 ‘Rockit’은 힙합 뮤직에 퍼져있던 스크래치(scratch) 사운드를 도입, 독특한 리듬감이 느껴지는, 이른바 디스코-텍(Disco-Teque) 뮤직을 선보인다. < Head Hunters >에 이어 이번에는 컴퓨터로 찍어 낸 듯한 테크노 음악을 선보이며 다시 한번 음악 관계자들을 어리둥절하게 했다. < Future Shock >에 이은 1984년 작 < Sound System >으로 연속 그래미상을 거머쥔 허비 핸콕은 재즈 뮤지션의 한계를 뛰어 넘는 폭넓은 활동을 전개한다. 덱스터 고든이 주연했던 1986년 영화 < Round Midnight >에 참여, 이번엔 그래미상이 아닌 아카데미에서 오리지날 스코어 상을 수상한다. 1988년 테크노 팝 앨범 < Perfect Machine >을 끝으로 콜롬비아 레코드사를 떠난 허비 핸콕은 마일스의 추모앨범, TV 쇼 프로그램 진행자, 윈튼 마샬리스와의 협연 등 왕성한 활동을 벌인다. 1994년 버브 레코드를 통해 < Dis Is Da Drum >을 발표하여 비평적 찬사를 받는 동시에 < Future Shock >에 이은 테크노 팝 열풍을 재현한다. 1995년엔 커트 코베인, 프린스, 토킹 헤즈, 비틀즈, 사이먼 & 가펑클 등의 록과 팝을 그만의 재즈 연주로 리메이크한 < The New Standard >를 발표했고 1998년엔 조지 거슈인(George Gershwin)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여 발표한 < Gershwin’s World >를 통해 그의 명성을 공고히 했다. 21세기를 맡아 예순을 넘기면서도 그 특유의 변신은 멈추지 않아 올 9월에 발표한 신작앨범 < Future 2 Future >를 통해서는 일렉트로닉과 다양한 장르의 혼합을 꾀하기도 했다.
연주 : Trombone Shorty (트롬본 쇼티,Troy Andrews)
재즈 트롬본 연주자, 보컬 재즈 트롬본 연주자, 보컬
오케스트라 : The Count Basie Orchestra (카운트 베이시 오케스트라,Count Basie And His Orchestra)
재즈 피아니스트 카운트 베이시가 창단한 재즈 오케스트라. 재즈 피아니스트 카운트 베이시가 창단한 재즈 오케스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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