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9년 『일식』으로 제120회 아쿠타가와 상을 수상하며 데뷔, 진중하고 깊이 있는 작품으로 순수문학계에서 독보적인 행보를 보이며 일본 현대문학의 기수로 자리매김한 히라노 게이치로의 세번째 소설집. 소설로 만든 삽화, 문자로 그린 그림, 동시 진행 소설 등, 기존의 어떤 작품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던 독특한 형식적 실험이 돋보인다. 특히 그가 프랑스 파리에서 체재하면서 느낀 이방인의 감정과 작가로서의 자아를 솔직하게 담아낸 「페캉에서」는 소설가 히라노 게이치로의 생생한 내면을 엿볼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당신이 가보지 못한 세계, 그러나 알고 있는 그곳
여태껏 체험한 적 없는 새로운 소설의 문이 열린다!
『일식』 『달』 『장송』으로 이어진 ‘로맨틱 3부작’ 이후 히라노 게이치로는 당분간 단편 창작에 전념하기로 하고 5년여 동안 총 25편의 작품을 집필한다. 스스로 제2기라 칭한 이 단편 창작기의 작품들은 『센티멘털』 『방울져 떨어지는 시계들의 파문』 『얼굴 없는 나체들』(국내 미출간) 등의 소설집으로 출간되었고, 마지막으로 2005년에서 2006년에 걸쳐 발표한 11편을 엮은 것이 이 『당신이, 없었다, 당신』이다.
나의 시도에 어떤 새로움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현대의 세계와 현대의 인간이 직접 요구한 새로움이다. 누구나가 변화를 실감하고 있는 지금 이 시대에 소설만이 언제까지나 2세기 이전의 스타일로 그것을 좇을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러한 창작상의 변화에 거부반응을 보이는 보수적인 독자와는 아예 깨끗이 ‘작별할’ 생각이었다. (『파도(波)』 2007년 2월호에서)
데뷔 당시부터 연달아 장편소설을 발표하며 중세 유럽, 19세기 프랑스, 메이지 시대 일본 등 역사적 요소가 강한 시대를 배경으로 삼아 의고체 문장과 전통적인 소설작법을 보여준 그는, 단편에서는 주로 현대사회의 병폐와 개인의 고독을 다루면서 파격적인 형식상의 실험을 시도해왔다. 『당신이, 없었다, 당신』 역시 일반적인 상식을 깨뜨리는 작품들이 다수 수록되어 있다. 본문의 하단에 짤막한 시구를 곁들여 마치 소설의 삽화 같은 효과를 노린 「이윽고 광원이 없는 맑은 난반사의 표면에서……/TSUNAMI를 위한 32점의 그림 없는 삽화」, 등장인물과 대화의 흐름은 같지만 각기 다른 배경과 상황을 지닌 다섯 가지의 이야기가 교차하며 동시에 진행되는 「어머니의 아들」, 양쪽 페이지에 가득한 글자들을 불규칙하게 잘라내어 소설의 배경이 되는 방의 모습을 그려낸 「여자의 방」, 한 문장으로만 구성된 「거울」 등이 그렇다. 소설의 표현방식 영역뿐 아니라 작가와 독자의 관계까지 새로이 구성하는 이런 작품들을 통해, 그가 말하는 ‘21세기형 소설’의 일면을 엿볼 수 있다.
종이 위에서 일어날 수 있는 모든 도전
『당신이, 없었다, 당신』에서는 그의 주특기라 할 수 있는 현학적이고 심도 있는 묘사가 돋보이는 정통적인 작법의 소설 작품도 물론 찾아볼 수 있다. 소설집에서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하고 있는 「페캉에서」는, 히라노 자신이 문화청 문화교류사업의 파견으로 1년 동안 프랑스 파리에 체류하면서 느낀 이방인의 감정과, 『장송』이라는 대작을 집필한 후 작가로서의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보다 근원적이고 내적인 문제에 천착하게 된 내면의 모습을 고스란히 드러낸 사소설적 성격의 작품이다. 여행길에서의 사색과 기차 창문 너머로 지나가는 아름다운 풍경 묘사도 그의 섬세한 필력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소설가로서의 그에게 어떠한 형태로든 관심과 흥미를 갖고 있는 사람에게, 이 작품은 다른 어떤 에세이나 기사보다도 노골적이고 자연스러운 방식으로 히라노 게이치로라는 작가를 이해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마찬가지로 프랑스를 무대로 한 「이방인#7-9」는 우연찮은 계기에 타국에서 생활하게 된 일본인 남자가 느끼는 낯설고 서늘한 도시의 분위기와 초현실주의적인 서술이 교차하며 독특한 리얼리티를 만들어낸다. 「모노크롬 거리와 네 명의 여자」는 SF적 상상력까지 느껴지는 강한 인상의 단편. 「자선」은 평범한 중년 샐러리맨 가장에게 일어난 작은 갈등과 아이러니한 에피소드를 건조하고 담담한 문체로 풀어가면서 고립과 상호작용이 공존하는 현대사회의 몽타주를 그려낸다.
어느 것 하나 비슷한 작품을 찾아볼 수 없을 만큼 다양한 형식과 내용을 선보인 이 작품집에는, 공통적으로 의사소통의 단절과 현대인의 고독이라는 감정이 짙게 깔려 있다. 그것은 창작이라는 행위와 소설이라는 요소를 끊임없이 의식하고 고민하는 그의 작가다운 ‘장인정신’에서 기인하는 것일 터이다. 젊은 패기와 자신감에 더해 어느덧 데뷔 10주년이 가까워오는 작가로서의 노련함을 갖추기 시작한 히라노 게이치로의 앞으로의 행보를 더욱 기대하게 만드는 작품집이다.
문학 외적인 영역에서도 활발한 활동을 보이고 있는 그는 올 9월 30일부터 대산문학재단 주최로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열리는 제1회 한중일 동아시아문학포럼에 일본 측 조직위원으로 방한한다. 10월 1일 ‘고향, 국가, 지역 공동체, 세계-1’ 세션에서 황석영, 천운영, 쑤퉁, 아오야마 신지 등과 함께, ‘문학의 미래-2’ 세션에서 나희덕, 은희경, 히라이데 다카시 등과 함께 발제와 토론에 참가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