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가부장제를 향한 심미적 액티비즘:
타자에 대한 책임, 폐쇄와 종결 없는 열린 정치학, 개인의 특이성으로 말하기
예술의 역사에서 여성은 거의 대부분 대상의 위치에 머물러 있었다. 예술작품에 대한 여성 주체의 심미적 경험은 존재하지 않았는가? 만일 존재했다면, 그것이 미학과 예술사 안에서 진지하게 다뤄지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가? 여성들의 심미적 경험은 남성들의 심미적 경험과 다른가? 동일한 작품에 대한 심미적 경험에서 성별이 만들어내는 차이는 무엇인가?
2006년 한국학술진흥재단이 선정한 우수 논문을 수정ㆍ보완하여 만든 『여성주의 미학과 예술작품의 존재론』은 이런 문제들을 제기하며 여성의 심미적 경험과 예술적 실천을 해명할 긍정적인 심미적 기초 개념과 이론 틀을 제시하고자 한다. 또한 그 중심에 ‘예술작품의 존재론’을 두고 성차별적 불균형과 그로 인한 억압이 지속되고 있는 가부장제 사회에서 예술작품은 과연 어떤 존재이며, 개별 작품의 의미와 가치는 어떻게 평가될 수 있을 것인지를 탐구한다.
전통 미학의 틀 깬, 한국 여성주의 미학 첫 번째 연구서
보편성과 객관성을 표방해온 전통 미학은 그 출발에서부터 여성 성별을 배제하고 폄하해왔다. 전통 미학의 남성 중심적 태도는 여성예술가들을 다루는 방식에서 확연히 드러난다. 전통 미학은 여성예술가들을 주목할 만한 가치를 가지지 않은 이류의 혹은 비전문적인 예술가로 무시해왔다. 따라서 의심의 여지없이 놀라운 재능과 성취를 보여준 몇몇 여성예술가에 대해서는 성을 잘못 타고난 기이한 존재로 간주하면서 그녀들의 예술적 재능을 방해하는 여성이라는 성별에 아쉬움을 표명해왔다. 이것은 전통 미학의 예술, 예술가 개념이 남성에 편향되어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전통 미학의 이론적 결함은 단지 미학과 예술사 안에 여성들을 첨가하고 섞음으로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게릴라 걸스, 로라 나이트, 앨리스 닐, 애니 라이보비츠 등 여성주의 미학의 예로 제시될 수 있는 서양의 유명 여성작가들의 작품뿐 아니라 한국의 여성미술을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는 이 책은, 여성과 여성주의자들 스스로 전통 미학의 뿌리에 자리 잡고 있는 성차별적 관점을 비판하고 전체 패러다임의 변경을 긍정적인 방식으로 요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전통 미학의 기초 개념들(심미적인 것, 심미적 주체, 심미적 대상〔예술작품〕)이 남성적 관점에 경도되어 있음을 밝히는 과정은 여성주의 미학의 필요성을 증명하는 과정이면서, 동시에 여성주의가 긍정적이고 대안적인 미학을 구성하는 준비 과정으로서도 의미를 갖기 때문이다. 이러한 작업은 본문의 Ⅰ장에서 자세하게 논의된다.
이 책은 여성주의 미학의 긍정적인 형식을 탐구하면서 그 논의의 중심에 예술작품의 존재론을 둔다. 예술작품의 존재론은 작품의 내적 속성을 규정하고 그것에 기초하여 작품에 대한 평가를 인도한다. 전통 미학이 예술 작품의 내적 속성과는 무관하며 우연적인 것이라 주장해왔던 성차별적 환경, 성별적 경험, 성별에 대한 정치적ㆍ도덕적 견해, 예술 실행자와 작품의 성별 정체성, 성별적 가치 등등이 작품의 내적 요소로 간주될 수 있다면, 가부장제하에서 성별과 관련된 예술적 실행은 그 자체로 작품을 구성하며 동시에 평가하는, 중요한 인자로 작동할 것이다.
예술작품의 ‘내적인 요소’에 대한 새로운 탐구
한편 Ⅱ장에서는 하나의 사물이 어떻게 예술작품이 되는지, ‘예술로서의 정체성 확인(artistic identification)’의 문제를 다루면서 예술작품이란 작품의 지각적 표면, 형식적 구조만이 아니라 그것을 산출한 맥락과 관점을 작품의 내적인 요소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논의한다. 이때 하나의 대상이 예술작품이 되는 것은 작품이 내부에 가지고 있는 지각적 특질만이 아니라, 그 작품이 생산된 과정에 의한다.
노엘 캐롤(Carroll, Noёl)은 서사적 맥락주의를 통해 정체성 확인의 서사와 그 서사의 설득력이 하나의 작품을 예술로 만든다고 보았다. 정체성 확인의 서사는 과거의 예술(전통 예술사)과의 연속성에 기초하지만 그것으로부터 새로운 예술이 생산, 제시되는 과정은 다양한 양태(반복, 거부, 확장)를 통해 구성된다. 이때 예술로서의 정체성 확인의 서사는 단순히 자율적인 예술의 맥락뿐 아니라 사회ㆍ역사적인 맥락을 포함한다. 한 작품이 생산되고 제시된 맥락은 서사를 통해 구성되며 그것은 단순히 한 작품을 설명하는 배경이 아니라 그 작품을 구성하는 내적 인자이다.
Ⅲ장에서는 예술작품의 심미적 정체성을 논의한다. 한 작품의 심미적 정체성을 확인하는 일은 수반론적 법칙이나 실재론적 인과관계에 기초하지 않는다. 하나의 예술작품은 단순히 그 대상의 표면도 또 그것을 가능하게 만든 추상적인 실체도 아니다. 예술작품은 그 자체로 물리적 매체 안에 체현된 개별 존재이면서 동시에 매체에의 체현(embodiment)을 인도한 과정을 포함한다. 지은이는 이것을 설명하기 위한 존재론적인 고안으로서 커리(Currie, Gregory)의 ‘발견적 과정(heuristics)’을 차용한다. 발견적 과정은 하나의 예술적 실행에 있어서 그 물리적 귀결물에 도착하기까지 경유하게 되는 각 과정의 총화를 가리킨다. 예술의 실행은 예술적 목표의 설정, 목표를 성취할 방법, 실제 체현 과정 등 복합적이고 세밀한 경로를 밟아 하나의 물리적 귀결물에 도달한다.
또한 이것은 오직 예술가에 의해서만 독점되지는 않는다. 예술가와 감상자의 해석적 실행은 물리적 귀결물에 이르기 위해 가시적인 물질화만을 가하는 것이 아니라 그 발견적 과정을 밟아 구성된 해석을 그것에 귀속시킨다. 따라서 예술가의 창작뿐 아니라 감상자의 해석은 끊임없이 새로운 작품을 완성하는 과정이다. 하나의 해석적 실행이 완수될 때는 언제나 그 발견적 과정이 도달한 물리적 귀결물이 제시되며, 이 둘은 개별 작품의 심미적 정체성을 확인하는 요소이면서 동시에 작품의 개별화를 확인하는 기준이 된다.
한국 현대 여성미술의 성별 정체성
Ⅳ장에서는 1990년대와 2000년대 초반의 한국 현대 여성미술을 중심으로 하나의 작품이 특정 성별에 연루된 것으로 확인하는 작품의 성별 정체성 문제를 다룬다. 작품의 성별 정체성을 논의함에 있어서 여성예술과 남성예술은 모두 논의되어야 하지만, 전통 예술사와 미학의 역사에서 오래 동안 전문적으로 집중되었던 탐구는 남성 예술이었으므로, 여성주의 미학에서 남성 예술에 대한 언급은 그것들이 어떻게, 왜 남성적으로 실행되었는가를 보이는 것으로 충분하다.
반면, 다양한 개념적 조작과 침묵으로 방치되었던 여성예술에 대해서는 보다 정교한 논의가 필요하다. 여성예술에 속하는 여류/ 여성적/ 여성주의 예술은 그 해석 행위가 여성 성별과 관련되어 있지만, 여성과 가부장제에 대한 견해에서는 차이가 있다. 그럼에도 이들 간의 구분은 명확하지 않은데, 해석 행위가 진행되고 있는 맥락과 관점에 따라 그들에게 어떤 범주를 적용할 것인가에는 유동성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여성예술이나 그것의 하위 범주 예술을 분류하고 평가하는 것이 작품의 스타일적 특성이나 특정 여성주의에 의존한 ‘하나의’ 여성주의 예술관은 아니라는 것이다.
지은이는 이러한 관점을 허난설헌과 나혜석부터 일본군 위안부였던 강덕경과 김순덕, 김수현, 김원숙, 유영희, 엄정순, 정정엽, 윤석남, 이불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한국 현대 여성미술가들의 작품을 예로 들어 풀어간다. 이들은 몇 가지 부류로 나뉘게 된다. 첫 번째는 ‘여성에게 익숙한 매체들 속에서 여성의 예술 전통을 만들고자 시도하는 작가’(요리를 소재 삼은 정소연, 베개를 수집하여 작품화한 김수현 등), 두 번째는 ‘열등하고 부적절한 것으로 폄하되어온 여성적 형식과 표현을 적극 도입한 작가’(삶의 경험을 바탕으로 서정적인 감성을 형상화한 김원숙, 보따리를 실은 트럭을 영상으로 보여준 김수자 등)이다. 세 번째는 ‘가부장제를 살아가는 여성들의 삶과 경험을 드러내는 작가’(가부장제적 질서에서 억제된 자아, 절망적인 자기 성취 등 여성의 존재와 삶의 모순을 지적한 김종례, 여성들이 일상에서 겪는 갈등과 고통을 표현한 한애규 등), 네 번째는 ‘여성의 몸과 섹슈얼리티를 이야기하는 작가’(나체로 자위하는 여성의 모습을 보여준 고희승, 여성의 젖가슴을 형상화한 주성혜 등)이다. 덧붙여 지은이는 1987년의 <여성과 현실전>, 1994년의 <여성, 그 다름과 힘>, 1999년의 여성미술제 <팥쥐들의 행진> 등 한국 현대 여성미술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점하는 전시와 행사를 통해 여성미술인들이 걸어온 발자취를 꼼꼼히 따라간다.
여성적 예술을 설명하기 위해 위에서처럼 채택한 네 가지 범주는 작품 표면의 구조적 속성과 모든 정체성 확인이 일반화된 것도, 고정된 것도 아니다. 작품의 심미적 정체성에 관한 논의에서 반복해서 주장했던 것처럼 정체성 확인은 해석자의 관점과 맥락에서 구성된다. 마찬가지로 여성이란 언제나 가부장제적 담론 안에서 실행되는 정체성 범주이다. 그러나 여성적 예술이 전통적인 남성적 예술에서 새로운 예술의 전통을 찾아내려고 한다고 해서 반드시 남성예술들과 단절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여성적 예술을 구성하기 위해서 여성이 남성과 분리된 예술언어를 반드시 구성해야 할 필요성은 없다.
심미적 행위, 포스트가부장제에 이르는 지름길
이 책은 여성주의 미학이 여전히 가부장제가 존속하고 있는 곳에서 여자들과 성별화된 행위자의 심미적 경험에 주목하면서 그것으로부터 가부장제적 예술과 현실을 종식시키도록 심미적 전략을 논의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여성주의 미학은 심미적 행동주의이다. 다양한 맥락과 관점에 서 있는 여성들과 여성주의자들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여성주의 미학을 실천할 것이다. 또한 여성주의 이론은 전체 여성주의 운동에 기여할 수 있는 실천적 함축을 의식해야 하며 궁극적으로는 성차별을 종식시키고 성차별로부터 발생한 여타의 억압들을 종식시키는 데 기여해야 할 것이다.
성차별과 그로부터 야기된 모든 억압이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 세계의 가능성은 구체적인 심미적 행위들을 통해 현실화될 수 있다. 심미적 행동은 여성주의 미학과 여성주의 예술을 통해 그 다양한 전략을 모의하고 구현하며, 나아가 가부장제적 성별 체계로부터 벗어나 타인에 대한 책임과 개인의 특이성으로 살아가는 포스트가부장제로 인도할 것이다. 지은이는 “우리 모두 출발지와 경로는 다르겠지만 꼼꼼히 계획은 세우고 가방을 싸자. 결정불가능성의 열린 세계에서 만나기 위해 더 많이 상상하고 더 많이 행동하자”(「나오는 글」)라고 주장한다. 이 책은 그 기나긴 여정의 든든한 동반자이자 이정표가 되어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