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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erve - The Sound Of America: The Singles Collection (버브 - 사운드 오브 아메리카: 싱글 컬렉션)

[ 5CD ]
Diana Krall, Ella Fitzgerald, Louis Armstrong, Joao Gilberto, Blossom Dearie 노래 외 39명 정보 더 보기/감추기 | Universal / Verve | 2016년 07월 26일 첫번째 구매리뷰를 남겨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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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erve - The Sound Of America: The Singles Collection (버브 - 사운드 오브 아메리카: 싱글 컬렉션)

품목정보

품목정보
발매일 2016년 07월 26일

관련분류

음반소개

구성

디스크

Just Friends, 1947-1956
  • 01 Perdido Pt 1 & Pt 2 (Live At Carnegie Hall/1947) - Jazz At The Philharmonic
  • 02 No Noise [feat. Machito Orchestra] - Charlie Parker
  • 03 Opera In Vout - Pt 1 & Pt 2 (Live At Embassy Auditorium, Los Angeles/1946) - Slim Gaillard
  • 04 Just Friends - Charlie Parker
  • 05 I Cover The Waterfront - Buddy Rich and Lester Young and Nat King Cole
  • 06 Bloomdido - Charlie Parker & Dizzy Gillespie
  • 07 There's A Small Hotel - Coleman Hawkins
  • 08 Debut - Oscar Peterson
  • 09 Castle Rock - Johnny Hodges
  • 10 Port Of Rico - Illinois Jacquet
  • 11 You Go To My Head - Billie Holiday
  • 12 Dale's Wail - Roy Eldridge
  • 13 Tenderly - Billie Holiday
  • 14 Tenderly - Ben Webster
  • 15 Alright, Okay, You Win - Count Basie & Joe Williams
  • 16 April In Paris - Count Basie
  • 17 I Can't Get Started - Dizzy Gillespie
  • 18 The Rock And Roll Waltz - Anita O'Day
  • 19 Too Young For The Blues - Ella Fitzgerald
  • 20 Boogie Blues [feat. Anita O'Day] - Gene Krupa Big Band
Stairway To The Stars. 1956-1957
  • 01 Hello Baby - Fred Astaire
  • 02 A Beautiful Friendship - Ella Fitzgerald
  • 03 Stay There - Ella Fitzgerald
  • 04 Stars Fell On Alabama - Ella Fitzgerald & Louis Armstrong
  • 05 Mountain Greenery - Bing Crosby & Buddy Bregman
  • 06 Manhattan - Ella Fitzgerald
  • 07 I Wonder - Woody Herman & His Orchestra
  • 08 I've Never Left Your Arms - Oscar Peterson
  • 09 It's All Right With Me - Ella Fitzgerald
  • 10 I'm Gonna Sit Right Down And Write Myself A Letter - Johnny Hodges
  • 11 Derek's Blues - Buddy Bregman
  • 12 Sayonara - Teddy Wilson
  • 13 The Golden Striker - Oscar Peterson
  • 14 Sing Sing Sing - Gene Krupa
  • 15 Stairway To The Stars - Ella Fitzgerald
  • 16 Swing Low Sweet Cadillac - Dizzy Gillespie
  • 17 Frenesi - Mel Torme
  • 18 Lulu's Back In Town - Louis Bellson
  • 19 Strange Fruit - Billie Holiday
  • 20 Nobody Knows The Trouble I've Seen - Louis Armstrong
Bossa Nova. 1958-1963
  • 01 On The Street Where You Live - Oscar Peterson
  • 02 Mack The Knife - Ella Fitzgerald
  • 03 Let's Do It - Terry Gibbs
  • 04 I'm Gonna Go Fishin' - Gerry Mulligan
  • 05 How High The Moon (Live In Berlin/1960) - Ella Fitzgerald
  • 06 Bossa Nova - Roy Eldridge
  • 07 (You'll Have To Swing It) Mr. Paganini (Live At The Crescendo/1961) - Ella Fitzgerald
  • 08 Cry Me A River - Ella Fitzgerald
  • 09 Walk On The Wild Side - Jimmy Smith
  • 10 Desafinado - Charlie Byrd & Stan Getz
  • 11 Ol' Man River - Jimmy Smith
  • 12 Teach Me Tonight - Blossom Dearie
  • 13 The Hippie Twist - Terry Gibbs
  • 14 Desafinado - Ella Fitzgerald
  • 15 Manha De Carnaval (Morning Of Carnival) - Stan Getz
  • 16 Hobo Flats - Jimmy Smith
  • 17 Bill Bailey Won't You Please Come Home - Ella Fitzgerald
  • 18 Sambalero [feat. Maria Toledo] - Luiz Bonfa and Stan Getz
  • 19 On Broadway (Live At Webster Hall/1963) - Bill Evans
  • 20 More (Theme From Mondo Cane) [feat. Kenny Burrell] - Kai Winding
Goldfinger. 1963-1965
  • 01 Theme From the V.I.P.s - Bill Evans
  • 02 What'd I Say - Jimmy Smith
  • 03 Theme From Any Number Can Win - Jimmy Smith
  • 04 Hymn To Freedom - The Oscar Peterson Trio
  • 05 Corcovado - Antonio Carlos Jobim
  • 06 Into Each Life Some Rain Must Fall - Count Basie and Ella Fitzgerald
  • 07 If That's The Way You Want It - Wynton Kelly
  • 08 Mondo Cane #2 - Kai Winding
  • 09 Who's Afraid Of Virginia Woolf - Jimmy Smith
  • 10 Blowin' In The Wind - Stan Getz
  • 11 The Girl From Ipanema [feat. Antonio Carlos Jobim] - Joao Gilberto and Stan Getz
  • 12 Hello Dolly - Ella Fitzgerald
  • 13 Makin' Whoopee - Louis Armstrong
  • 14 The Cat - Jimmy Smith and Lalo Schifrin
  • 15 Bachianas Brasileiras No. 5 - Lalo Schifrin
  • 16 Ringo Beat - Ella Fitzgerald
  • 17 You've Been Talkin' 'Bout Me Baby - Donald Byrd
  • 18 Soul Sauce - Cal Tjader
  • 19 Goldfinger - Jimmy Smith
  • 20 Agua De Beber [feat. Antonio Carlos Jobim] - Astrud Gilberto
Bumpin' On Sunset. 1965-2001
  • 01 Organ Grinder's Swing [feat. Grady Tate] - Jimmy Smith
  • 02 Loie - Kenny Burrell
  • 03 Imagine My Frustration - Duke Ellington and Ella Fitzgerald
  • 04 Spanish Grease - Willie Bobo
  • 05 Goin' Out Of My Head - Wes Montgomery
  • 06 Got My Mojo Workin' - Jimmy Smith
  • 07 Pavane - Bill Evans Trio
  • 08 Hoochie Coochie Man - Jimmy Smith
  • 09 Bumpin' On Sunset - Wes Montgomery
  • 10 Sunshine Superman - Willie Bobo
  • 11 California Dreaming - Wes Montgomery
  • 12 Dindi - Astrud Gilberto
  • 13 Evil Ways - Willie Bobo
  • 14 Manteca - Chico O'Farrill
  • 15 Chain Of Fools - Jimmy Smith
  • 16 The Word - Don Sebesky
  • 17 The Preacher - Kenny Burrell
  • 18 Agnus Dei - Lalo Schifrin
  • 19 Communications '72 - Stan Getz
  • 20 The Look Of Love - Diana Krall

상세 이미지

상세 이미지 1

아티스트 소개 (44명)

노래 : Diana Krall (다이애나 크롤)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주(州) 밴쿠버섬에 있는 도시 너나이모(Nanaimo)출신 가수 겸 피아니스트 다이애나 크롤(Diana Krall)은 타고난 음악적 교육환경에서 성장했다. 4살 때부터 클래식 피아노 교습을 받기 시작해 고교시절에는 재즈밴드에서 연주를 계속해 나갔다. 하지만 그의 음악활동영역에 대부분은 음반수집가이자 스트라이드 피아노 연주자인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았다. 여기에 대해 다이애나는 다음과 같이 말한 ...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주(州) 밴쿠버섬에 있는 도시 너나이모(Nanaimo)출신 가수 겸 피아니스트 다이애나 크롤(Diana Krall)은 타고난 음악적 교육환경에서 성장했다. 4살 때부터 클래식 피아노 교습을 받기 시작해 고교시절에는 재즈밴드에서 연주를 계속해 나갔다. 하지만 그의 음악활동영역에 대부분은 음반수집가이자 스트라이드 피아노 연주자인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았다. 여기에 대해 다이애나는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제 생각에 아버지께선 팻츠 웰러(Fats Waller)의 전 음반을 모두 소유하고 계셨어요. 그리고 전 그걸 다 익히려했죠.”라고. 1980년대 초 버클리 음대 진학 후 로스앤젤레스로 터전을 옮긴 다이애나는 3년 간 머물다 토론토로 다시 거처를 옮겼다. 1990년에는 뉴욕을 거점도시로 트리오와 함께 노래를 불렀다. 저스틴 타임 음반사(Justin Time Records)에서 자신의 첫 번째 앨범 < Steppin’ Out >(1993)을 발매 한 그는 이듬해 GRP와 계약을 맺고 2집 < Only Trust Your Heart >를 발표했다. 그리고 1995년과 1997년에는 지알피(GRP)와 더불어 1960년대 아방가르드 시대의 대표적인 레이블 임펄스!(Impulse!)를 통해 냇 킹 콜(Nat King Cole)트리오에게 바치는 헌정앨범 < All for You >(impulse)와 < Love Scenes >를 발매했다. 1998년 말 크리스마스시즌에 세션앨범 < Have Yourself A Merry Christmas >을 내놓으며 한껏 분위기를 탄 크롤은 곧이어 발표한 < When I Look in Your Eyes >(1999)로 국제적 부와 영예를 한꺼번에 얻기에 이른다. 앨범은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그해 그래미시상식에서 최우수 재즈 보컬 연주부문(Best Jazz Vocal Performance) 트로피를 손에 거머쥐었다. 비록 수상은 하지 못했지만 ‘올해의 앨범’(Album of The Year)상 후보에 오른 것도 경이로운 결과였다. 이는 곧 25년 동안 꾸준히 음악활동을 펼쳐온 그의 다년간에 명성과 실력을 공인받는 순간이었다. 재즈아티스트로 공력을 인정받은 다이애나는 또한 여성뮤지션 중심의 록뮤직 투어 ‘릴리스 페어’(Lilith Fair)에 동참해 연주한 것을 비롯해 TV드라마 < 섹스 앤 시티 >(Sex in the City) 에피소드와 영화< Midnight in the Garden of Good and Evil >(1997)의 사운드트랙에 자신의 곡을 삽입시키며 크로스오버 뮤지션으로도 성공을 맛보았다. 그리고 2001년에는 < The Look of Love >를 빌보드 ‘Top Canadian Album’차트 정상에 쏘아 올리며 주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캐나다 출신 재즈아티스트로는 최초로 캐나다에서만 5백만 장 이상의 앨범이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다. 앨범대박은 기정사실. 2002년 캐나다의 ‘그래미어워드’(Grammy Award)아 불리는 ’주노 어워드’(Juno Award)에서는 ‘올해의 아티스트’(Artist of the Year), ‘올해의 앨범’(Album of the Year), ’올해의 최우수 보컬 재즈 앨범‘(Best Vocal Jazz Album of the Year) 3개 부문 트로피를 품에 안는 기염을 토했다. 바로 다음해 인 2002년에는 < Live in Paris >로 그래미 ‘최우수 재즈 보컬 앨범’(Best Jazz Vocal Album)상을 수상해 확고부동한 크로스오버/컨템포러리 재즈아티스트로서의 존재적 가치를 제고했다. 과거 유명선배뮤지션들의 스탠더드 커버 곡을 자신의 감성을 담아 재해석한 트랙들로 꾸민 < The Girl in the Other Room >(2004)을 발표해 다재다능한 역량을 발휘한 다이내나 크롤은 1999년과 2002년에 이어 2005년 3월 내한해 한국 팬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기도 했다. 우아한 외모까지 갖춘 다이애나 크롤을 향한 한국음악팬들의 사랑은 현재진행형이다.
노래 : Ella Fitzgerald (엘라 피츠제랄드)
엘라 핏제랄드는 재즈 보컬의 역사를 다시 쓴 디바이다. 그녀는 아무 의미 없이 재잘거리는 스캣(Scat)이라는 창법을 가장 능숙하게 소화해냈다는 평가를 받은 인물이다. ‘목소리’ 하나만으로도 그 어느 악기 못지 않은 즉흥성을 표현할 줄 알았으며 스윙과 비밥 시대에 걸쳐 더욱 빛난 달콤한 목소리와 넘실대는 스윙감을 통해 엘라 핏 랄드는 재즈의 ‘퍼스트 레이디’로 재즈역사에 각인되었다. 사라 본, 빌리 홀리데이와 함... 엘라 핏제랄드는 재즈 보컬의 역사를 다시 쓴 디바이다. 그녀는 아무 의미 없이 재잘거리는 스캣(Scat)이라는 창법을 가장 능숙하게 소화해냈다는 평가를 받은 인물이다. ‘목소리’ 하나만으로도 그 어느 악기 못지 않은 즉흥성을 표현할 줄 알았으며 스윙과 비밥 시대에 걸쳐 더욱 빛난 달콤한 목소리와 넘실대는 스윙감을 통해 엘라 핏 랄드는 재즈의 ‘퍼스트 레이디’로 재즈역사에 각인되었다. 사라 본, 빌리 홀리데이와 함께 재즈 음악사에 길이 남는 ‘여인천하’를 이뤄낸 엘라 핏제랄드는 1917년 4월 25일 버지니아주 뉴포트에서 태어났다. 비운의 여가수 빌리 홀리데이처럼 엘라 역시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내는데, 성장기의 대부분을 홈리스(homeless)로 보낼 정도로 어려운 시기를 보낸다. 엘라는 1934년 뉴욕 할렘가에 소재한 아폴로 극장에서 열린 노래 경연 대회에서 우승하면서 본격적인 가수의 길을 걷게 된다. 청중의 자격으로 그녀의 노래를 듣고 있던 밴드 리더이자 드러머인 칙 웹(Chick Web)은 이 체구 작은(?) 소녀에게서 가능성을 발견, 자신의 빅 밴드의 반주에 맞춰 노래를 부르게 한다. 칙 웹의 도움으로 엘라는 그의 밴드의 리드 싱어 자격으로 대중 앞에 섰고 얼마 후 그녀가 데카(Decca) 레이블에서 처음 녹음한 ‘A-tiskete, A- Taskete’(1938), ’Undecided’(1939)가 공전의 히트를 거두며 가수로서의 순조로운 출발을 한다. 그러나 1939년, 칙 웹의 갑작스런 요절로 인해 엘라는 그 후 2년 간 그가 떠난 밴드의 빈 공간을 메워 나가야 했다. 1942년 솔로로 독립한 그녀는 예전 소녀의 상큼함과 순수함이 느껴지던 데뷔시절과 달리 좀 더 완숙한 목소리로의 변신을 필요로 했다. 잉크 스팟(Ink Spot), 루이스 조던(Louis Jordan)과 같은 R&B 싱어들과 잠시 활동을 같이 하던 엘라였지만 자신이 가야할 길은 역시 ‘재즈’임을 깨 닳고, 1946년 노먼 그란즈(Norman Granz-훗날 버브 레코드의 사장이 됨)를 새 매니저로 맞이하며 비밥의 거성인 트럼펫 주자 디지 길레스피(Dizzy Gillespie) 밴드의 리드 싱어로 일하게된다. 디지와의 연주 경험은 엘라가 비밥의 문법을 자기의 목소리로 소화할 수 있게 된 결정적인 계기였다. 변화무쌍한 리듬과 속도감 있게 진행되는 파트별 연주에 맞춰 터져 나오는 유창한 스캣 창법은 비밥의 연주와 그녀의 보컬이 어울림을 갖는다는 것을 증명했다. 당시 그녀의 남편이기도 한 베이시스트 레이 브라운(Ray Brown) 트리오의 백업 연주로 녹음된 ‘How high the moon’(1947)같은 곡에서 그녀의 스캣 창법은 악기에 버금가는 애드립이 목격된다. 1955년 버브(Verve)와 전속 계약을 맺은 엘라는 이 때부터 음악 인생의 최고의 황금기를 맞는다. < Songs from Pete Kelly’s blues >(1955)가 앨범 차트 7위를 기록하는 것을 시작으로 인기가도를 질주한다. 이듬해, 구수한 목소리의 트럼펫 주자 루이 암스트롱과의 듀엣 < Ella & Louis >(1956)가 오스카 피터슨(Oscar Peterson) 쿼텟의 백업 연주로 발표 되 대중적, 비평적 찬사를 얻었으며 두 사람간의 음악적 교분은 < Ella & Louis again >(1957)과 < Porgy & Bess >(1958)로 이어진다. 이 앨범들은 재즈 팬들의 필수 컬렉션 대상들이기도 하다. 같은 해 < Ella Fitzgerald Sings The Cole Porter Song Book >(1956)이 재즈 판을 휩쓸며 베스트셀러로 기록되는 성공을 거둔다. 이를 시작으로 엘라는 조지 거쉰(George Gerswin), 제롬 컨(Jerome Kern), 해롤드 알렌(Harold Arlen), 어빙 벌린(Irving Berlin)등 1세대 틴 팬 앨리 작곡가들의 명곡들을 자신의 목소리로 담아내는 방대한 작업을 수행한다. 이런 그녀의 노력은 틴 팬 엘리 작곡가 리처드 로저스(Richard Rodgers)와 하트 로렌즈(Hart Lorenz)의 곡으로 꾸며진 실황 앨범 < Ella Fitzgerald Sings The Rodgers And Hart Song >(1957)의 성공으로 이어지며 마침내 재즈의 ‘퍼스트 레이디‘로 군림하게 된다. 틴 팬 앨리 음악에 대한 그의 열정은 1958-59년 사이에 녹음해 발표한 조지 & 이라 거쉰(George & Ira Gershwin)의 곡을 집대성한 < The George & Ira Gershwin Song Book >(1959)을 통해 정점에 다다른다. 1960년대에 접어들어 엘라는 < Mack The Knife-Ella In Berlin >(1960)을 폴 스미스(Paul Smith) 쿼텟의 연주로 녹음된 라이브 앨범을 공개, ‘How high the moon’, ’Mack the knife’를 히트시킨다. 이후 1963년엔 명 프로듀서이자 작곡가인 퀸시 존슨(Quincy Jones)이 편곡으로 연주된 카운트 베이시(Count Basie)와의 협연작 < Ella & Basie! >과 1965년엔 오랫동안 음악적 교분을 쌓아온 듀크 엘링턴(Duke Ellington)과 다시 의기투합해 < Ella At Duke Place >를 각각 발표하는 등 스윙의 거장과의 잇단 명작을 공개한다. 캐피톨(Capitol)로 이적해 다시 왕성한 활동을 이어나간 엘라는 1969년 그만 백내장으로 인해 잠시 활동을 중단한다. 1973년 연로한 나이에 불구하고 < Ella Fitzgerald At The Carnegie Hall >을 발표했고, 1977년 몬트럭스 재즈 페스티벌에도 참가해 실황 앨범 < Ella Fitzgerlad With The Tommy Flanagan Trio-Montreux’77 >을 공개하며 예순이라는 나이가 무색한 손색없는 보컬 기량을 선보였다. 1980년대 이르러 지병인 심장병으로 인해 예전만큼의 노련함이 느껴지지 않았지만, 엘라는 근근히 연주 활동을 지속해나간다. 그러나 나빠진 건강과 시력을 인해 그녀는 1994년 공식적으로 은퇴를 선언한다. 그리고 2년 후인 1996년 6월 15일 비버리 힐즈에 있는 자신에 집에서 세상을 떠난다.
클래식을 얘기할 때 바하를, 팝을 논할 때 비틀스를 빼 놓을 수 없듯 재즈 하면 떠오르는 인물이 바로 루이 암스트롱(Louis Armstrong)이다. 재즈에 문외한 사람일지라도 루이 암스트롱 이름을 대면 고개를 끄덕인다. 루이 암스트롱은 20세기의 대표적인 대중 음악 ‘재즈’를 정의한 거장이다. 백인 재즈 보컬 빙 크로스비(Bing Crossby)는 루이 암스트롱을 두고 ‘미국 대중음악의 시작이자 끝’이라고 극... 클래식을 얘기할 때 바하를, 팝을 논할 때 비틀스를 빼 놓을 수 없듯 재즈 하면 떠오르는 인물이 바로 루이 암스트롱(Louis Armstrong)이다. 재즈에 문외한 사람일지라도 루이 암스트롱 이름을 대면 고개를 끄덕인다. 루이 암스트롱은 20세기의 대표적인 대중 음악 ‘재즈’를 정의한 거장이다. 백인 재즈 보컬 빙 크로스비(Bing Crossby)는 루이 암스트롱을 두고 ‘미국 대중음악의 시작이자 끝’이라고 극찬했다. 그의 코넷/트럼펫 연주는 ‘재즈 연주에 꽃’이라 할 즉흥 솔로(Improvisation)를 창안했다. ‘트럼펫 비르투오조 1호’로 칭송되는 그의 트럼펫 연주엔 떨림(비브라토)과 미끄러짐(글리산도)와 같은 클래식 연주 주법을 독창적으로 소화해 낸 천재성이 돋보인다. 뉴 올리안스의 무명악사 시절을 거쳐 1920년대 초부터 시카고와 뉴욕을 거점으로 암약하면서 1925년 자신이 리드하는 캄보(Combo-소규모 재즈 연주 편성)밴드 핫 파이브 앤 핫 세븐(Hot Five’& Hot Seven) 통해 본격적인 재즈의 서막을 온 세상에 알렸다. 그러나 루이 암스트롱의 음악 여정은 ‘재즈의 선구자’로만 국한시킬 수 없을 정도로 그 폭이 넓다. 그는 재즈의 천재 일뿐 아니라 팝의 제왕이자 만인의 사랑을 받는 엔터테이너였다. 아무 의미 없는 말들을 리드미컬하게 구사하는 스캣(Scat)이라는 창법을 개발, 재즈 보컬(Jazz vocal)의 길을 열어줬음은 물론이고 천재적인 트럼펫 연주 실력에 더해 그의 출중한 보컬 실력은 그를 ‘위대한 재즈 보컬리스트’로 기억하게 만들었다. 가방만큼 크고 두터운 입술을 지녔다 하여 사치모(Satchmo)라는 애칭을 지녔던 루이 암스트롱은 얼굴만큼이나 커다란 입으로 끓어오르는 독특한 베이스 보컬(속칭 더티 톤)을 들려준다. 이런 그의 독특한 보컬 스타일은 재즈 보컬 빙 크로스비나 토니 베넷(Tony Bennet)을 비롯하여 1930-50년대 전설전인 재즈 디바 빌리 홀리데이(Billie Holiday)의 창법에까지 영향을 준다. 국내에서도 ‘쾌지나 칭칭 나네’의 가수 김상국도 그 보컬을 흉내냈다. 천진 난만(?)한 웃음을 머금으며 청중을 압도할 만한 열정을 뿜어내는 무대 매너로 루이는 대중들에게 잊을 수 없는 넉넉함을 선사했다. ‘만능 재즈 맨’은 그의 또 다른 이름이었다. 1901년 재즈의 고향 뉴 올리안스(New Orleans)에서 태어난 루이 암스트롱은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낸다. 그가 어머니인 메리 암스트롱의 뱃속에 있을 때 아버지는 가출을 했고, 유복자로 태어난 루이는 빈민가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다. 길거리의 매춘부였던 어머니는 항상 집을 비워 가족을 돌보지 않았고, 결국 루이는 5살 때부터 생업 전선에 나서야 했다. 스토리 빌(뉴 올리언즈의 재즈 음악인들의 활동 무대)의 홍등가를 지나다가 접한 재즈음악에 매료되어버린 어린 루이는 차츰 재즈라는 세계에 관심을 갖게 된다. 11살에 학교를 그만둬 그만 폭력을 일삼는 불량 써클에 가담, 1912년 신년 축하 행사 때 술에 취해 사람들이 모인 장소에서 폭죽 대신 총을 쐈다는 혐의로 소년원에 들어간다. 그러나 그게 전화위복이 되어 소년원에 있는 동안 브라스 밴드에 가입, 제1 코넷 주자로 활동하게 된다. 이를 통해 본격적으로 음악을 접할 수 있었고, 여기서 접한 코넷(트럼펫과 비슷하나 관이 약간 짧아서 수월하게 다룰 수 있는 악기) 연주는 루이로 하여금 음악을 소명으로 삼게 한다. 1914년 소년원에서 풀려나서 시카고로 이주, 노동자 생활을 하며 차츰 음악가로의 꿈을 키워간다. 광부로, 신문 배달부로, 청소부를 일을 전전해가며 그는 코넷을 사기 위해 돈을 마련해 갔다. 시카고에 여러 바를 전전하며 무명악사로 밑바닥을 기었다. 1918년 기회가 왔다. 당시 재즈의 왕으로 군림하던 킹 올리버(King Oliver)의 도움을 받아 루이는 올리버의 보조 밴드였던 키드 오리(Kid Ory) 밴드에서 프로 뮤지션으로서의 첫 발을 내딛는다. 일년 후인 1919년 루이는 시카고에 진출, 미시시피강을 따라 뉴 올리언즈와 세인트루이스 사이를 운행하던 증기선에서 백인들을 위해 음악을 연주한 페이트 매러블(Fate Marable) 밴드에서 3년 간 코넷 주자로서 내공을 다진다. 1922년 루이 암스트롱은 드디어 재즈 연주자로서 날개를 단다. 평소 그를 유심히 지켜보던 ‘재즈의 왕’ 조 킹 올리버는 그가 이끄는 크레올 재즈 밴드(Creole Jazz Band) 밴드의 코넷 주자로 그를 가입시킨다. 크레올 재즈 밴드의 정식 멤버 자격으로 루이는 1923년 시카고에서 첫 레코딩을 한다. ‘Chimes blues’(1923), ’Lonesome weary blues’(1923) 등 10여 곡의 싱글 녹음을 통해 독특한 음색의 코넷 연주가 좋은 평가를 이끌어냈고, 이에 자신감을 얻은 루이는 피아노 주자 릴리언 하든(그의 두 번째 부인이며 그는 일생동안 4명의 부인을 맞는다)의 권유로 크레올 밴드를 탈퇴, 이듬해인 1924년 뉴욕으로 진출해 플레처 핸더슨(Fletcher Henderson) 밴드에 제1 트럼펫 주자로 활동한다. 1925년 솔로로 독립, 악기를 코넷에서 트럼펫으로 바꾸고 자신의 밴드 핫 파이브 앤 핫 세븐(Hot Five & Hot seven)을 출범시킨다. 재즈 인디 레이블 오케이(Okeh)레코드 사와 계약, 스캣(scat)의 매력이 넘치는 ‘Heebie jeebies’(1926)를 비롯하여, ’Cornet’(1926), ’Big butter & egg man’(1926), ’Ski-dat-de-dat’(1926), ‘Willie the weeper’(1927), ’Potato head blues’(1927), ’I’m not rough’(1927)를 통해 당시로선 가히 혁명적인 재즈 연주를 선보이며 일약 재즈음악계의 스타로 떠오른다. 1928년 ‘핫 파이브 앤 세븐’을 해체, 자신의 빅 밴드 루이 암스트롱 앤 히스 오케스트라(Louis Armstrong And His Orchestra)’를 결성, ‘Mahogany hall stomp’를 시작으로 이듬해인 1929년 ’Sweet heart on parade’를 발표하며 스윙 밴드 리더로서의 여정에 들어간다. 이때부터 재즈 보컬리스트로서도 활약이 눈에 띄는데, 이미 1927년 ‘핫 파이브 & 세븐‘시절 여성 보컬 메이 엘릭스와 듀엣으로 부른 ’Big butter & egg man’으로 팝 차트에 진출한 루이는 1931년 미쉘 페리시가 작사한 미국의 영원한 스탠다드 명곡 ‘Stardust’를 발표, 선풍적인 인기를 얻는다. 1930년대는 루이 암스트롱의 전성기였다. ‘I gotta right to sing the blues’(1933), ’Struttin’ with some barbecue’(1938) 등 클래식스(Classics)레이블을 통해 발표한 그의 빅 밴드 싱글들은 동시대 카운트 베이시(Count Basie) 악단, 듀크 엘링턴(Duke Ellington) 악단에 필적할 만한 대중성을 획득하는데 성공한다. 1944년 흑인 아티스트로서는 처음으로 링컨 센터에서 공연했으며 이어 할리우드에 진출, 영화배우로서도 활동하며 < 랩소디 인 블랙 & 블루 >(1933)와 1956년의 < 상류사회 >(High Society) 등의 작품을 남긴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며, 스윙의 열풍은 비밥(Bebop)의 혁명으로 인해 재즈의 중심에서 차츰 언저리로 몰리고 있었다. 스윙을 부정하며 비밥에 물결에 동참한 젊은 재즈음악인들로부터 루이는 ‘엉클 톰’(백인에게 굴종하는 흑인) 식의 비난의 화살을 감내해야 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이 무렵 슬럼프를 맞게 된다. 빅 밴드 활동이 더 이상 진척이 되지 않음을 느낀 루이는 결국 빅 밴드를 해체시키고 데카(Decca)레이블로 이적하며 초기의 소 편성 악단의 구성을 한 올 스타즈(All Stars)를 출범시킨다(이후 올 스타즈는 맴버를 교체해 가며 그가 죽을 때까지 유지된다). 1947년 로스앤젤레스에서 데뷔 공연을 가지며 예전보다 활발한 월드투어를 갖는다. ‘High society’(1948), ‘That’s a plenty’(1949), ‘Basin street’(1947), ‘Dippermouth blues’(1947) 등을 히트시키며 1951년에는 투어 실황을 녹음해 발표한 라이브 앨범 < Satchmo At Symphony Hall >을 발표해, LP차트 10위권에 오른다. 같은 해 루이의 히트 송 ‘(When we are dancing) I get ideas’와 ‘A kiss to build a dream on’이 담긴 더블 사이드 싱글을 발표, 이듬해인 1952년 처음으로 싱글 양면이 모두 톱10을 기록한다. ‘A kiss to build a dream on’은 영화 < The Strip >에서 루이가 직접 불렀던 곡인데, 멕 라이언이 주연한 1993년 영화 <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 >에 다시 삽입돼 화제를 모았다. 1954년 데카와 재계약을 앞두고 루이는 독점 계약 대신 프리랜서를 선언한다. 이 때부터 그의 음악은 다른 음반사를 통해서도 발표되는데, 당대 재즈 명인들과의 협연 앨범들이 눈에 띈다. 1920년대 스트라이드 피아노 대가 팻츠 월러(Fats Waller)에게 헌정하는 < Satch plays Fats >를 1955년 콜롬비아 레코드사에서 발표해 톱10을 기록했고, 재즈 보컬 엘라 핏제럴드와 호흡을 맞춘 명반 < Ella & Louis >를 1956년 버브 레코드사에서 공개한다. 흑인 공민권 운동이 시작될 무렵인 1956년, 백인 공립학교에 흑인 학생이 군인의 호위를 받고 등교하는 리틀 록(Little Rock)사건을 두고 당시 대통령이었던 아이젠하워를 ‘위선자’라 비난한 사건이 신문으로 보도되면서 루이는 잠시동안 FBI의 감시를 받으며 ‘요시찰 인물’이라는 불명예를 겪기도 한다. 가뜩이나 나빠진 건강은 1959년 이태리 공연도중 심장 발작으로 잠시 병원 신세를 지게 끔 한다. 이런 악조건을 딛고 루이 암스트롱은 1960년대에도 여전히 ‘제2전성기’라고 할 왕성한 활동을 전개했다. 1963년 12월, 브로드웨이 뮤지컬 < 헬로 돌리 >(Hello Dolly!)의 타이틀곡으로 미국을 침공한 비틀스의 ‘Do you want to know a secret’를 따돌리며 당당히 팝 차트 정상에 등극한다. ‘Hello dolly!’는 1964년 내내 팝 차트 5위권을 고수하며 이듬해 그에게 그래미상 보컬 퍼포먼스부문 수상의 영광도 안겨주었다. 이 곡에 이어 4년 후인 1968년 ‘What a wonderful world’로 루이는 다시 한번 노익장을 과시한다. 평소에 자신이 추구한 팝(pop)음악에 대한 철학을 담아낸 이 곡은 영국에선 발표 즉시 차트1위를 차지했지만 정작 본토 미국에선 별 반응이 없다가, 1987년 로빈 윌리엄스가 주연한 영화 < 굿모닝 베트남 >의 배경음악으로 주목받으면서 뒤늦게 톱40에 오른다. 넉넉한 그의 보컬이 멋진 선율과 어우러진 이 곡은 그 무렵 만화가 이현세가 출연한 모 맥주광고 CF에 깔려 국내에서도 광풍을 일으켰다. 그의 마지막 히트 곡 ‘We have all the time in the world’과 함께 루이는 결국 건강상의 이유로 무대에서 은퇴한다. 그와 함께 정확히 7주 후인 1971년 3월15일 건강 악화로 병원에 입원했고, 7월 6일 뉴욕 롱아일랜드의 코로나 소재 자신의 집에서 70세를 일기로 역사의 뒤안길로 물러난다. 루이 암스트롱처럼 재즈와 팝이라는 별개의 영역을 넘나들었던 사람도 드물다. 1920-30년대 초기재즈에서 스윙에 이르기까지 재즈의 연주 스타일을 제시했던 선구자 루이 암스트롱은 이에 더해 대중들과 함께 울고 웃을 줄 알았던 진정한 팝 스타였다. 사실 재즈라는 장르에 집착하는 팬들은 그가 보여준 엔터테이너 기질에 못마땅해하는 사람들도 있다. 쿨(cool)의 혁명가 마일즈 데이비스도 자서전에서 “루이의 뛰어난 즉흥 연주엔 고개를 숙인다. 하지만 그의 익살스러운 무대매너엔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고 피력할 정도였다. 하지만 루이는 50년을 넘게 연주 생활을 해온 재즈맨이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둔다면 그가 음악 대중들을 위한 ‘팝’에 천착한 사실은 당연하다. 루이는 음악에 있어서 순수한 지향을 잃지 않았고, 자신의 음악을 들어주고 좋아해 줄 청중을 찾아 나서길 원했다. 그의 음악이 꿈꾼 최종 지향점이란 바로 ‘What a wonderful world!’라고 까지 칭송한 팝(pop)이었던 셈이다. 숱한 우여곡절 끝에 팝의 세계에 안긴 한 재즈 거장의 허심탄회한 고백은 명언으로 남아있다. ‘그래 팝이 옳았어! 이 얼마나 아름다운 세상이야!’
노래 : Joao Gilberto (주앙 질베르토,Joao Gilberto Prado Pereirade Oliveira)
보사노바/재즈 기타 연주자 보사노바/재즈 기타 연주자
노래 : Blossom Dearie (블로섬 디어리)
노래 : Billie Holiday (빌리 할리데이)
재즈 보컬 재즈 보컬
재즈 보컬 재즈 보컬
노래 : Fred Astaire (프레드 아스테어)
솜사탕같이 부드럽고 격조 있는 발라드 음악을 들려준 냇 킹 콜은 1940-50년대 백인 재즈 보컬의 대명사 프랭크 시내트라의 인기전선에 위협을 가한 유일한 흑인 크루너(crooner)이다. 반세기가 넘도록 대중들의 끊임없는 추종을 받고있는 그는 틴 팬 앨리 출신의 작곡가 어빙 벌린이 작곡한 발라드의 고전 ‘Unforgettable’(1951), 바로 그 곡의 주인공이다. 대중들은 그의 이름을 듣고 ‘가수’로서의 ... 솜사탕같이 부드럽고 격조 있는 발라드 음악을 들려준 냇 킹 콜은 1940-50년대 백인 재즈 보컬의 대명사 프랭크 시내트라의 인기전선에 위협을 가한 유일한 흑인 크루너(crooner)이다. 반세기가 넘도록 대중들의 끊임없는 추종을 받고있는 그는 틴 팬 앨리 출신의 작곡가 어빙 벌린이 작곡한 발라드의 고전 ‘Unforgettable’(1951), 바로 그 곡의 주인공이다. 대중들은 그의 이름을 듣고 ‘가수’로서의 냇 킹 콜만을 떠올릴지 모르지만, 가수로 성공하기 전인 1930-40년대에 그는 미국 로스엔젤레스(L.A) 지역에서 이름을 날리던 재즈 피아니스트였다. ‘냇 킹 콜 트리오’를 결성해 활동하던 1930년대 말-1940년 대 초까지 그는 수많은 레코드를 녹음해 발표했다. 기타, 베이스, 피아노로 구성된 독특한 재즈 트리오 양식을 정립한 선구자이기도 하다. 비밥 재즈의 봉인 버드 파웰이 드럼-베이스-피아노로 이뤄진 트리오 양식을 제시하면서 지금까지 이 편성이 굳혀지긴 했지만, 재즈 트리오로 대중적인 인지도를 처음 얻은 사람은 바로 냇 킹 콜이었다. ‘Route 66’(1943) 와 같은 히트곡을 발표하기도 한 냇 킹 콜 트리오는 한결 부드럽고 팝 적인 색채의 재즈 연주로 주목받으며 이후 1950년대 명성을 얻은 오스카 피터슨(Oscar Peterson) 트리오의 출현을 예견케 했다. 1945년 캐피톨(Capitol) 레코드사와 계약하면서 이후 그는 피아니스트로서보다 수많은 히트곡을 팝 차트에 올리는 가수로서 우리에게 기억된다. 1917년 생으로 어린 시절을 시카고에서 보낸 그는, 12살 때 부터 교회 성가대에서 오르간을 연주했다. 형제가 모두 재즈 음악인으로 성장했을 정도로 어렸을 때부터 음악적으로 유복했던 그는 1936년 재즈 베이스주자 에디 콜(Eddie Cole)의 밴드에서 잠시 몸을 담지만, 얼마 후 자신의 무대를 찾아 로스엔젤레스로 이주한다. 이런저런 쇼 무대에서 피아노를 연주하며 자신의 음악세계를 찾기에 몰두한 끝에 기타리스트 오스카 무어(Oscar Moore), 베이시스트 웨슬리 프린스(Wesley Prince)를 만나며 ‘냇 킹 콜 트리오’를 헐리우드에서 출범시킨다. 이들의 음악은 초기엔 순수 연주곡 중심이었으나, 1940년 데카(Decca)레코드와 계약하면서 ‘Sweet Lorraine’(1940)을 그의 노래로 녹음했고, 이내 대중들의 호응에 힘입어 그는 트리오에서 피아노와 노래를 병행하게 되었다. 냇 킹 콜 트리오는 1940년대 초반 대중들의 성원에 힘입어 ‘Route 66’, ’Straighten up and flying right‘(1943)와 같은 히트곡들을 연이어 발표한다. 40-50년대 명성을 구가했던 아마드 자말 트리오, 오스카 피터슨 트리오, 아트 테이텀 트리오는 모두 냇 킹 콜 트리오(피아노/베이스/기타)를 모델로 삼은 것이었다. ‘The christmas song’(1947) , ’Nature boy’(1947)와 같은 히트곡을 연이어 발표한 냇 킹 콜 트리오활동은 1940년대 말까지 지속된다. 그러다 1950년, 그의 트리오가 오케스트라 세션을 넣어 발표한 ‘Mona risa’가 차트 넘버원을 기록하며 냇 킹 콜은 더 이상 피아노 연주자가 아닌 인기 정상에 가수로 탈바꿈한다. 그의 노래는 어느덧 재즈뿐만 아니라 팝 청취자들의 애청 곡 리스트에 올라가게 되었고 대중들은 차츰 그가 재즈 피아니스트였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게 된다. 이후 ‘Unforgettable’, ’Ramblin’ rose’(1962)를 비롯한 수많은 히트곡을 차트에 올려놓으며 발라드 가수로서만 활동하게 된다. TV가 미국 대중들의 안방에 자리하면서 그는 쇼에 출연하며 50-60년대 내내 인기가수로서 분주한 나날을 보낸다. 하지만 1965년 폐암으로 사망할 때까지 그의 음악엔 더 이상 재즈 피아니스트로서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게 된다. 이후 그에 대한 평가는 상반된 양상을 띄게 된다. 트리오 양식의 대중화를 가져온 ‘재즈의 선구자’라는 호평에 반해 발라드 가수로서 백인 청취자들의 귀를 즐겁게 하며 ‘재즈를 팔아먹은 장본인’이라는 비난 역시 감수해야 했다. 재즈의 선조 루이 암스트롱을 비롯해, 마일즈 데이비스, 조지 벤슨과 같은 거물급 재즈 스타가 겪은 이 대중성과 음악성과의 숙명과도 같은 패러독스는 냇 킹 콜에게도 해당되는 얘기였다. 그럼에도 그는 2000년대인 지금에 와서도 여전히 추앙 받는 뮤지션이다. 초기의 그의 연주 스타일은 재즈 연주의 백미라 할 트리오 양식의 발전에 기여했고, 부드럽게 감싸주는 듯한 그의 바리톤 보컬은 샘 쿡, 마빈 게이, 루더 밴드로스로 이어지는 소울 팝 가수들이 반드시 참고해야 할 ‘보컬 연주의 교과서’로 자리 메김 했다. 아버지의 목소리가 이룩했던 위업을 지금껏 꾸준히 이어나가는 그의 딸이자 재즈 보컬 나탈리 콜(Natalie Cole)과 함께 한 ‘Unforgettable’(1994)로 탈바꿈 해 대중들을 놀라게 했다. 이미 세상에 안 계신 아버지와 딸의 목소리를 절묘하게 조화시킨 첨단 디지털 기술은 그 만의 독창적인 보컬 스타일은 지금에도 여전히 살아 꿈틀거리며 많은 후배 보컬리스트들에 의해 여전히 계승되고 있음을 느끼게 한다.
노래 : Anita O'Day (애니타 오데이,Anita Belle Colton)
재즈 가수 재즈 가수
1955년 3월12일, 뉴욕의 어느 조그만 아파트에서 한 흑인이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신고를 받고 달려온 경찰 관계자들은 시신을 살펴본 뒤 조사내용을 서류에 기입했다. 사인은 약물중독에 의한 심장마비, 인종은 흑인, 나이는 약 65세. 당시 현장의 경찰 관계자들은 그것이 누구의 시신인지 아무도 알지 못했다. ‘비밥의 혁명가’ 찰리 파커(Charlie Parker; 이하 버드)의 죽음은 이토록 비참했다. 1920년... 1955년 3월12일, 뉴욕의 어느 조그만 아파트에서 한 흑인이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신고를 받고 달려온 경찰 관계자들은 시신을 살펴본 뒤 조사내용을 서류에 기입했다. 사인은 약물중독에 의한 심장마비, 인종은 흑인, 나이는 약 65세. 당시 현장의 경찰 관계자들은 그것이 누구의 시신인지 아무도 알지 못했다. ‘비밥의 혁명가’ 찰리 파커(Charlie Parker; 이하 버드)의 죽음은 이토록 비참했다. 1920년 생이니까 사망 당시 그의 나이는 겨우 35살, 하지만 술과 마약에 찌든 그의 몸은 망가져 있었고, 그를 모르는 사람들은 그를 65살 노인으로 착각했을 정도이니 그의 건강이 얼마나 절체 절명의 상황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영화배우이자 제작자인 클린트 이스트우드(Clint Eastwood)가 감독한 영화 < Bird >(1988)는 이 비운의 버드의 생애를 상세히 묘사하고 있다. 1945년, 민턴스 플레이 하우스(Minton’s Play House)에서 동료 디지 길레스피(Dizzy Gillespie)와 함께 한 성공적인 데뷔를 시작으로 그는 하루아침에 재즈계의 유명 인사로 떠올랐다. 하지만 그가 창안한 비밥이란 문법은 ‘음악에 맞춰 춤을 출 수 없다’는 이유로 대중들의 차가운 시선을 피할 수 없었다. 그의 뇌리 속엔 ‘자신은 흑인’이라는 운명이 자리잡고있었다. 공연 때마다 그를 보러오는 백인 여성들은 그를 유혹했고 하루에도 몇 번씩 그는 이들과 성의 향연(?)을 벌이곤 했다. 하지만 흑인이었기에, 그의 천재성은 백인이 패권을 지고 있던 미국 사회에서 결코 용납될 수 없었다. 타협이라곤 모르는 그의 성격은 그를 차츰 고립의 늪으로 치닫게 했고, 외로움을 잊기 위해 20년 넘게 해온 마약과 술은 그를 파멸로 몰아넣었다. 민턴스 플레이 하우스에서 디지가 작곡해 준 ‘Groovin’ high’를 그의 색스폰으로 우렁차게 울린 그 날, 재즈의 역사는 다시 쓰여졌다. 비밥(Bebop)이라는 재즈의 신종 문법은 1940년대 주류 대중음악인 스윙의 대세를 벗어나 20대 초의 젊은 흑인 재즈 뮤지션들을 중심으로 ’음악적 실험‘을 끝에 비밥은 빛을 본다. 바야흐로 모던 재즈 시대를 활짝 열어놓은 이들 젊은 뮤지션들은 중 단연 눈길을 끌었던 인물은 바로 버드였다. 그의 천재성은 이미 어린 시절부터 싹트기 시작했다. 미국 캔사스 씨티 출신인 그는 카운트 베이시(Count Basie)와 같은 스윙 스타를 배출한 캔사스 씨티 음악 씬의 중심부에서 소년기를 보낸다. 바리톤 색스폰을 독학으로 익힌 그는 14세가 되던 1934년, 학교를 그만두고 그 지역 밴드들을 따라다니며 색스폰 연주를 익혀나간다. 이곳저곳을 배회하며 잼(Jam) 세션을 벌인 그는 얼마 후 그는 그 지역의 스타 카운트 베이시 악단과 연주할 기회를 얻게 된다. 하지만 카운트 베이시 악단과 함께 했던 기억은 버드에게 영원히 지워질 수 없는 상처가 되고 만다. 그의 어설픈(?) 솔로가 진행되던 도중, 당시 드럼을 연주하던 조 존스는 갑자기 연주하던 심발을 풀어 그를 향해 내던졌다. 순간 그가 대중들의 웃음거리로 전략하고 만 이 일화는 물론 16세라는 나이를 감안할 때 아직 완성도가 떨어지는 그의 열악한 연주실력을 반증해주는 사례였지만, 스윙시대를 주름잡은 그의 선배들이 그의 독창적인 솔로 전개를 매우 거북스러워했음을 또한 증명해 준다. 스윙이 대세였던 당시까지만 해도 그가 새로운 재즈의 물결을 주도할 것이라는 예상은 그 누구도 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색스폰 주자 레스터 영(Lester Yong)의 음악에 심취해 있던 그는 다시 몇 년의 치열한 내공을 쌓은 후인 1940년, 뉴욕 52번가에 자리한 클럽 ‘민턴스 플레이 하우스’의 매니저 테디 힐(Teddy Hill)의 주선으로 뉴욕에 입성하며 ‘무서운 신인’으로 두각을 나타낸다. 그는 케니 클라트, 델로니우스 몽크, 닉 팬톤, 하워드 맥기, 조 가이, 그리고 그의 비밥 혁명을 가능케 해준 동반자 디지와 어깨를 나란히 하며 비밥으로 대변되는 새로운 재즈의 흐름을 모색해 간다. 당시 재즈 평론가 제임스 콜리어가 옮겨 전하고 있는 케니 클라크의 말은 버드와의 첫 만남에 대해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는 우리가 전혀 들어본 적도 없는 것들을 연주하고 있었어요. 이미 내가 드럼으로 연주하고 싶어했던 것들을 들려주었죠. 래스터 영보다 두 배는 빠르게 연주했고, 영이 다루지 못한 음들도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우리가 생각하고 있던 것과 마찬가지의 것을 추구하고 있었지만, 우리보다 한 발 앞서 있었어요. 무엇보다도 그는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1943년, 최초의 비밥 보컬리스트 사라 본(Sarah Vaughan)의 백업 밴드를 맡고 있던 드러머 빌리 엑스타인 밴드에 합류해 그의 첫 레코딩을 하게 되고, 1944년 말 디지와 듀오를 결성, 버드 파웰(피아노), 막스 로치(드럼), 찰스 밍거스(베이스)으로 구성된 퀸텟을 결성한다. 이듬해 민턴스 플레이 하우스에서 성공적인 데뷔식을 치룬 그는, 자신의 애칭인 ‘새’(Bird)를 자신의 공식적인 이름으로 대신한다. 1945-1947년 디지와 함께 하며 미국 L.A. 지역 클럽들을 중심으로 활발한 투어를 펼치던 이 시기에 ‘Groovin’ high’, ’Salt peanuts’, ’Shaw’ nuff’, ’Hot house’, ’Donna lee’, ’Ko ko’등 그의 음악성을 대표하는 명곡들을 발표한다. 다시 뉴욕으로 돌아온 그는 1947-1949년 동안 자신의 새로운 퀸텟을 이끌며 듀크 조던, 토미 포터, 막스 로취, 그리고 줄리어드 음대를 다니다 그의 문하생이 된 신인 마일스 데이비스(Miles Davis)를 영입한다. 1950년까지 지속적인 활동을 보인 그의 퀸텟은 사보이(Savoy)레이블에서 활발한 레코딩 작업과 유럽 투어를 펼치며 연주경력의 절정을 맞이한다. 같은 해 버브(Verve)레이블과 계약, 디지와 다시 함께 한 앨범 < Bird & Diz >(1950)을 발표한다. 그러나 당시까지 그의 음악은 대중들로부턴 철저히 외면당하고 있었다. 그나마 생계를 유지해 준 뉴욕의 클럽들도 하나둘씩 문을 닫고 R&B와 로큰롤이 서서히 고개를 들며 대중들은 점점 재즈를 외면하기 시작했다. 사생활 문제까지 겹친 그는 헤로인과 술로 시름을 달래려 했고, 이로 인해 결국 자살까지 시도하기에 이른다. 1953년 그의 생애 마지막 녹음이 된 명반 < Jazz at Massey Hall >을 데뷔 시절 한솥밥을 먹은 디지 길레스피, 버드 파웰, 찰스 밍거스, 막스 로치와 함께 녹음한다. 악화된 건강은 결국 심장마비를 불러왔고 35세란 젊은 나이에 그는 자신의 여자친구 집에서 객사한다. 50년대 말 그의 영향을 고스란히 계승한 존 콜트레인의 등장으로 인해 그의 업적이 재즈계 내에서 차츰 부각되기 시작, 후대 재즈 학자들은 그를 기점으로 ‘아티스트의 주도’하에 이뤄진 찬란한 모던 재즈(Mordern Jazz) 시대가 개화했다고 칭송해마지 않는다.
재즈 색소폰 연주자 재즈 색소폰 연주자
“비범한 창작력과 뛰어난 역량을 지닌 음악가” LA타임스(Los Angeles Times) “매우 번뜩이는 지성…매우 고상한…원대한 뮤지션” 라 르뷔 뮈지깔, 파리, 프랑스(La Revue Musical, Paris, France) 톰 크루즈 주연의 극장판 시리즈로 더욱 화려하게 부활했지만 본래 TV연속극으로 인기를 누린 (Mission Impossible)의 테마음악으로 유명한 랄로 쉬프린(Lalo Schifr... “비범한 창작력과 뛰어난 역량을 지닌 음악가” LA타임스(Los Angeles Times) “매우 번뜩이는 지성…매우 고상한…원대한 뮤지션” 라 르뷔 뮈지깔, 파리, 프랑스(La Revue Musical, Paris, France) 톰 크루즈 주연의 극장판 시리즈로 더욱 화려하게 부활했지만 본래 TV연속극으로 인기를 누린 (Mission Impossible)의 테마음악으로 유명한 랄로 쉬프린(Lalo Schifrin)은 아르헨티나 태생 작편곡가이자 피아노연주자이며 오케스트라지휘자다. 그는 클래식교육을 이수하고 재즈에 심취해 터득한 음악적 기반을 토대로 영화음악작곡가로 영토를 확장하면서 성공가도를 달렸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1932년 6월21일 출생한 그의 본명은 보리스 클로디오 쉬프린. 부에노스아이레스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수석바이올린연주자인 아버지의 재능을 물려받은 그는 6세에 피아노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1952년 파리음악원에 입학하면서 밤에는 재즈 신(scene)에서 피아노를 쳤다. 본토로 돌아온 후 쉬프린은 19인조 재즈오케스트라를 구성해 음악활동을 지속했다. 밴드와 함께 공연활동을 하던 그는 1956년 재즈 트럼펫의 거목 디지 길레스피를 만났다. 공연을 관람하던 길레스피는 그에게 자신의 피아노연주와 편곡을 맡아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같은 해 그는 또한 자비어 쿠거(Xavier Cugat)를 위해 편곡가가 되었다. 1960년 그는 뉴욕으로 이주해 길레스피 퀸텟에 합류했다. 거기서 녹음해 발표한 앨범 (Gillespiana, 1961)는 대중적 찬사를 받았다. 쉬프린은 또 다른 조곡 ’The New Continent'를 헌사하면서 1962년까지 길레스피의 음악감독이 되었다. 개인 작곡에 전념하기 위해 음악 감독직을 사임하고 나온 그는 라틴 재즈와 보사노바의 리더로 나서며 음반을 내기도 했다. 1963년 마침내 그는 자신의 영화 < Rhino > 스코어링 작업을 수락하며 영화음악가로서의 첫발을 내딛었다. 쉬프린은 할리우드로 그해 후반 이주했고 (Mission Impossible, 1966)과 (Mannix, 1967)에 쓴 잊을 수 없는 테마로 주류성공을 맛봤다. 이후 10년 이상, 쉬프린은 (The Cincinnati Kid, 1965), (Bullitt, 1968) , (Cool Hand Luke, 1967), (Dirty Harry, 1971) 그리고 (Enter the Dragon, 1973)와 같은 영화에 음악을 작곡해 넣었다. 재즈뮤지션으로서 그는 1965년 호평 받은 ‘Jazz Mass'조곡을 썼다. 1975년엔 < Black Widow >앨범을 통해 스타일리시한 재즈 펑크에 깊이 탐구했다. 디지 길레스피를 위시해 사라 본, 엘리 핏제랄드, 스탄 게츠, 카운트 베이시 등의 재즈거목들과 함께 공연하고 앨범을 낸 쉬프린은 1990년대 들어서도 영화음악에 손을 놓지 않았다. < F/X 2 >(1991), (1995), (1996), (1998), (1998)가 당대의 대표작. 10년 동안 그는< Jazz Meets the Symphony >(재즈 교향악을 만나다)로 명명된 오케스트라 재즈앨범을 연속 녹음해 시리즈로 발표했다. 그리고 1990년 이태리월드컵 폐막식 축하연을 시작으로 1994년 미국, 1998년 프랑스, 2002년 일본에서 열린 3 테너(호세 까레라스, 플라시도 도밍고, 루치아노 파바로티)의 공연 편곡을 담당했다. 그는 또한 런던 필하모닉, 런던 심포니, 비엔나 심포니, 로스앤젤레스 필하모닉, 이스라엘 필하모닉, 멕시코 필하모닉, 휴스턴 심포니, 로스앤젤레스 챔버, 멕시코 시티 필하모닉, 애틀랜타 심포니, 뉴욕시의 세인트 루크, 아르헨티나의 내셔널 심포니, 글렌데일 심포니 오케스트라 등 다국적 교향 및 실내악단의 지휘자로 역임하며 클래식음악가로서의 명성을 만방에 과시했다. 일일이 다 열거하기 버거울 정도로 랄로 쉬프린의 커리어와 실력은 화려하고도 눈부시다. 고전음악과 대중음악을 아울러 영화판까지 휩쓴 그는 진정한 대가다. (Mission: Impossible III, 2006)까지 영화판 시리즈마저 작곡과 지휘한 그는 2007년 쿵푸액션 버디영화 로 돌아왔다.
재즈 기타 연주자 재즈 기타 연주자
연주 : Jimmy Smith (지미 스미스 )
재즈 피아노, 오르간 연주자 재즈 피아노, 오르간 연주자
연주 : Willie Bobo (윌리 보보 ,William Correa)
라틴, 재즈 퍼커션 연주자 라틴, 재즈 퍼커션 연주자
연주 : Astrud Gilberto (아스트루드 질베르토)
삼바, 보사노바 보컬 삼바, 보사노바 보컬
연주 : Wes Montgomery (웨스 몽고메리 )
재즈 기타 연주자 재즈 기타 연주자
연주 : Bill Evans Trio (빌 에반스 트리오)
‘음의 마술사’ 듀크 엘링턴(Duke Ellington)은 두말할 필요없이 재즈역사에 커다란 획을 그은 대가로 첫손에 꼽히는 인물이다. 1927년 데뷔이래 근 50년에 이르는 오랜 활동 기간동안 무려 6000곡이라는 미증유의 창작력을 보이며 빅 밴드 재즈 연주가 표현할 수 있는 다양한 실험과 혁신을 선보였다. 그는 빅 밴드를 구성하는 악기 하나 하나의 특색을 정확히 이해했다. 관악기의 독특한 울림이 들리는 그의 ... ‘음의 마술사’ 듀크 엘링턴(Duke Ellington)은 두말할 필요없이 재즈역사에 커다란 획을 그은 대가로 첫손에 꼽히는 인물이다. 1927년 데뷔이래 근 50년에 이르는 오랜 활동 기간동안 무려 6000곡이라는 미증유의 창작력을 보이며 빅 밴드 재즈 연주가 표현할 수 있는 다양한 실험과 혁신을 선보였다. 그는 빅 밴드를 구성하는 악기 하나 하나의 특색을 정확히 이해했다. 관악기의 독특한 울림이 들리는 그의 음악엔 그만의 음색이 느껴진다. 여기에 그는 재즈의 정체성을 강화해주는 다양한 화성 전개를 고안했고, 클래식 음악에서나 볼 수 있는 조곡(suite) 형식의 대곡을 재즈로 소화해낸다. 사후에도 그의 음악유산은 막대한 영향력을 과시, 많은 음악 학자들이 “듀크 엘링턴은 세계 대중음악을 20년 이상 앞당겼다”고 평했을 만큼 그는 재즈를 예술적인 차원으로 승화시켰다. 1899년 4월29일, 에드워드 케네디 엘링턴이라는 본명으로 미국 워싱턴에서 태어난 그는 어린 시절부터 피아노 연주를 접한다. 아버지는 백악관에서 일하는 집사였고 당시 흑인들 중에선 드물게 중산층에 속했던 덕에 가정교사를 통해 정규 클래식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1914년, ‘Soda fountain rag’와 ’What you gonna do when the bed breaks down’를 처음으로 작곡했고, 18세 때에는 워싱턴 지역의 유명한 밴드 리더로서 지역의 유명인사로 떠오른다. 1923년 재즈의 메카로 부상하던 뉴욕에 진출한 그는 자신의 밴드 ‘더 워싱턴스’(The Washingtons)를 결성한다. 이 때 자신의 이름에 영예로운 공작(Duke) 칭호를 부여하며 듀크 엘링턴으로 개칭한다. 1927년에 이르러 밴드는 뉴욕 지역의 여러 나이트클럽에서 인정을 받았고, 얼마 후 백인 전용클럽이었던 코튼 클럽(Cotton Club)에 입성한다. 그가 악장으로 일하게 된 코튼 클럽은 미국의 상류층들이 가무를 즐기던 곳으로 이후 재즈의 상징어가 된다. 뉴 올리언즈의 스토리 빌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에서 음악 생활을 하게 된 그는 바야흐로 자신의 음악세계를 마음껏 펼칠 수 있게 되었고 여기서 그의 첫 출세작 ‘East St. Louis toddle-oo’(1927)가 발표된다. ’와우-와우‘하는 독특한 트럼펫 소리가 시작을 알리는 이 곡은 당시까지의 재즈 연주가 대부분 장조였던 것과 달리 구슬픈 멜로디가 들리는 단조 풍의 연주곡이었다. 독특한 악기 음색과 치밀한 계산이 돋보이는 연주 편곡은 당시 28세를 갓 넘은 청년 듀크 엘링턴을 일약 재즈의 비범한 뮤지션으로 상승시킨다. 1931년까지 코튼 클럽에서 연주를 하며 ‘Black beauty’(1928), ’Mood indigo’(1930)와 같은 걸작을 남긴다. 하지만 대공황이라는 경제 한파는 코튼 클럽에 사람들의 발길을 주춤케 했고 그는 잠시 유럽으로 진출, 이후에 있을 전성기를 위한 ’일보후퇴‘를 택한다. 루즈벨트 대통령의 경제 개혁은 미국 사회에 다시 활기를 되찾게 해준다. 여기에 NBC, CBS, ABC 미국 3대 라디오 방송국이 뉴욕에 생기면서 재즈 음악인들은 금주(禁酒)령으로 묶인 그들의 창작 혼을 다시금 살려 낼 수 있는 분위기를 맞이한다. 듀크 엘링턴은 이 절호의 찬스를 통해 ‘스윙의 왕’으로 군림하며 1930-40년대를 그의 음악 경력 상 최고의 절정기로 기록되게 한다. 경제 공황이라는 무거운 짐을 떨쳐버린 1930년대 미국 시민들은 신나고 경쾌한 음악을 필요로 했고, 1935년 베니 굿맨과 카운트 베이시로 대표되는 스윙(Swing)의 폭발은 뉴욕 시내의 무도장을 뜨겁게 달구고 있었다. 코튼 클럽에서 다시 지휘봉을 잡은 듀크 엘링턴은 이 시기에 ’It dont mean a thing(If it ain’t got that swing)’(1932), ’Echoes of Harlem’(1936), ‘Dimuniendo in blue’(1937), ‘Cotton tail’(1940), ’Ko-ko’(1940), ’Take the “A" train’(1941) 등 그를 대표하는 수많은 명곡들을 발표한다. 특히 1937년에 발표한 ’Dimuniendo in blue’는 재즈 역사에서 처음으로 접하는 7분이 넘는 대곡이다. ‘Dimuniendo in blue’가 탄생하기까지엔 웃지 못할 애피소드가 있다. 1930년대 당시 SP(78회전)음반 한 면에는 대략 3분 정도의 음악 밖에 수록할 수 없었다. 이 음악을 녹음하기 위해 그는 앞뒷면을 전부 사용해서 녹음을 했고, 결국 7분이 넘는 연주 테입은 SP 음반에 앞뒷면으로 나뉘어져 실린다. ‘3분 짜리 춤곡’으로 인식되었던 당시 스윙 음악 스타일에 그는 자신의 음악성을 한정 당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스윙이 아니면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당당하게 외친 그는 스윙이라는 음악을 단순한 ’춤곡‘ 이상의 가치를 부여하고자 했다. 훗날 마일스 데이비스가 애용했던 플런저(Plunger; 트럼펫 앞을 막았다 닫았다 하며 음색을 조절하는 기구, 우리말로 소음기라고도 한다)를 이용한 트럼펫의 독특한 울림은 여전히 연주 전체에 ’약방의 감초‘처럼 짜릿한 생기를 불어넣었고, 정적인 분위기와 웅장한 분위기를 번갈아 가며 연출하는 세련된 편곡은 스윙 연주 편곡의 전형을 제시했다. 단조와 장조를 교묘하게 합쳐 놓은 듯한 정교한 멜로디 진행, 싱코페이션(당김음)을 이용한 원활한 감정 처리, 극적인 느낌을 자아내는 빠르기 조절과 다양한 악기 음색을 실험하며 그는 정통 재즈(mainstream)의 알파에서 오메가까지를 자신의 음악에 모두 담아내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가던 무렵 ’재즈의 세대교체’를 선언하며 등장한 비밥(Bebop)의 선풍에 아랑곳없이 듀크 엘링턴은 여전히 자신의 빅 밴드를 지속시키며 스윙을 고집했고, 주변의 많은 밴드들을 위해 수많은 곡을 써 줄 정도로 왕성한 창작력을 유지한다. 1950년대 중반에 들어 그는 작곡 구조에 새로운 시도를 감행하기에 이른다. 이른바 ‘조곡’(suite)형식이 바로 그것인데, 하나의 커다란 주제를 갖고 여러 소품들을 만들어 전체가 하나의 큰 대곡 형식을 갖추는 조곡을 재즈에 도입해 그는 다시 한번 재즈 역사에 방점을 찍는다. 그의 작곡 콤비로 오랜 동안 함께 해온 작곡가 빌리 스트레이혼(Biily Strayhorn)과 공동으로 작, 편곡하여 1957년 발표한 < Such Sweet Thunder >같은 앨범은 조곡 스타일의 재즈 연주 가운데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극찬을 받았다. 세익스피어(Shakespear)의 작품들에 나오는 등장인물들의 이야기를 음악으로 묘사한 이 작품은, 재즈 역사에 손꼽히는 명반 중 하나로 남아있다. 1956년 뉴욕 재즈 페스티벌에 참가하며 듀크 엘링턴은 ‘제2의 전성기’를 맞이한다. 1950년대 말엽과 1960년대의 활동은 비록 1930년대만큼의 호응을 얻지 못했지만 쉬지 않고 빅 밴드를 이끌며 세계 투어를 비롯하여, 활발한 음반 발표와 곡 작업을 지속한다. 이 당시에 대표작으로 거론되는 ‘Tourist point of view’(1966)같은 곡에선 말년에 아랑곳없이 기세 등등한 멤버들의 연주실력과 그의 변함 없는 음악성이 느껴진다. 빅 밴드 단원들은 기복 없는 안정적인 연주를 했는데, 이는 1930년대부터 그가 죽을 때까지 평생을 같이한 단원들이 함께 남아있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바리톤 색스폰 주자 해리 카네이(Harry Carney)는 듀크 엘링턴이 코튼 클럽에서 데뷔한 1927년 때부터 무려 47년 동안 그가 그의 밴드 멤버로서 활동한다. 후반기 명작으로 거론되는 재즈 조곡 < Latin American Suite >(1970)를 발표하고 끊임없는 투어는 1970년대 초까지 계속 되었으나 몸이 쇠약해진 듀크 엘링턴은 결국 1974년 5월 24일 세상을 떠나고 만다. 끊임없이 재즈 음악에 새로움을 불어넣기 위해 자기개발에 부단했던 그는 죽을 때까지도 피아노 앞에서 작곡을 놓지 않는 열정의 소유자였다. ‘위대한 재즈 맨’ 듀크 엘링턴은 그의 밴드와 자신의 곡으로 미국 대중음악의 국보인 재즈의 위상을 한껏 높이는데 기여했다. 클래식 계를 비롯한 전 세계의 유명한 작곡가들은 지금까지도 초연 되지 않은 그의 곡들을 연구하며 지금도 그의 놀라운 음악성에 찬사를 아끼지 않고 있다.
연주 : Cal Tjader (칼 제이더 ,Callen Radcliffe Tjader, Jr)
라틴 재즈 퍼커션, 드럼, 비브라폰 연주자 라틴 재즈 퍼커션, 드럼, 비브라폰 연주자
연주 : Donald Byrd (도널드 버드,Donaldson Toussaint L'Ouverture Byrd II)
재즈 트럼펫 연주자 재즈 트럼펫 연주자
연주 : Kai Winding (카이 와인딩 )
재즈 트럼본 연주자 재즈 트럼본 연주자
연주 : Wynton Kelly (윈튼 켈리,Wynton Charles Kelly)
재즈 피아노 연주자 재즈 피아노 연주자
연주 : Count Basie (카운트 베이시)
1930-40년대 스윙 열풍의 주인공 중 한 명이었던 카운트 베이시(Count Basie)는 듀크 엘링턴, 베니 굿맨과 함께 스윙(Swing)의 대중화에 공헌한 재즈음악계의 위인이다. 그가 이끈 카운트 베이시 오케스트라(Count Basie Orchestra)는 그의 사후인 지금까지도 남아서 그가 남긴 스윙의 유산을 재현하고 있다. 그는 듀크 엘링턴과 같은 뛰어난 작곡가도, 베니 굿맨과 같은 탁월한 솔리스트는 아... 1930-40년대 스윙 열풍의 주인공 중 한 명이었던 카운트 베이시(Count Basie)는 듀크 엘링턴, 베니 굿맨과 함께 스윙(Swing)의 대중화에 공헌한 재즈음악계의 위인이다. 그가 이끈 카운트 베이시 오케스트라(Count Basie Orchestra)는 그의 사후인 지금까지도 남아서 그가 남긴 스윙의 유산을 재현하고 있다. 그는 듀크 엘링턴과 같은 뛰어난 작곡가도, 베니 굿맨과 같은 탁월한 솔리스트는 아니었지만 자신의 빅 밴드만의 차별점을 제시했다. 그는 멤버들 각자의 탁월한 연주 기량에 더해 솔로와 리듬연주간의 긴밀한 조화를 일궈내며 재즈 연주에서 앙상블(Ensemble)의 매력을 만끽케 한다. 그는 1920년대 스트라이드(랙타임에서 발전된 피아노 연주법)의 대가 팻츠 월러(Fats Waller)의 피아노 주법을 계승하며 부기우기(Boogie Woogie)라는 독특한 리듬 패턴을 제시한다. 12마디 블루스 형식의 부기우기(셔플 리듬이라고도 함)는 일반적인 스윙 연주가 1박과 3박에 강세가 오는(츄우 추 취- 츄우 추 취-)리듬패턴이었던 것과는 달리 2박과 4박에 비트가 가해지는(칙 둥- 칙 둥-)식의 리듬을 창조해내며 향후 재즈에서 비트(Beat)가 중요해 질 것을 예견케 했다. 카운트 베이시가 제시한 이 ’리듬의 혁명’은 당시까지 밴드 안에서 그 역할이 미비했던 드럼과 베이스, 그리고 기타의 리듬 연주를 강화하며 재즈 쪽에서 1940년대 비밥(Bebop)의 전야(前夜)를 수놓았고, 블루스 쪽에선 루이스 조던(Louis Jordan)과 빅 조 터너(Big "Joe" Turner) 와 같은 점프 블루스(Jump Blues) 스타의 출현을 가져오게 한다. 1904년 미국 뉴저지주 생으로 피아니스트인 어머니 덕에 일찍부터 음악 레슨을 받았고, 1920대에 이르러 할렘 스트라이드 피아노 주자 팻츠 월러로부터 사사한다. 1927년 미국 중소도시를 도는 유랑극단인 보드빌(vaudeville) 무대에서 처음 직업 음악인 생활을 시작한 그는 1928년 곤젤 화이트의 빅 재즈 잼보리(Gonzelle White’s Big Jazz Jamboree)의 멤버로 미국 중서부 지역을 순회하다 뉴 올리언즈에 버금가는 재즈의 고장 캔사스(Kansas City)에 도착해 밴드의 해산을 맞았지만 곧바로 캔사스에 정착한다. 뉴욕은 대공황으로 실업자들이 들 끌고 금주령으로 클럽들은 하나 둘 문을 닫았지만 정치적인 보스였던 톰 팬더개스트의 지배 아래 캔사스 시는 완전히 개방되어 있었다. 불법적인 음주와 도박이 벌어지던 수많은 클럽이 도시 안에 성행했고, 거의 모든 클럽에서 재즈 라이브가 열렸다. 그를 비롯해 수많은 흑인 뮤지션들은 일자리를 찾아 캔사스 시티로 몰려들어 1930년대 스윙 시대에 만개할 ’리듬의 향연’을 준비한다. (로버트 알트만 감독의 영화 < 캔사스 시티 >(1995)를 보면 1930년대 그곳의 사회상을 짐작할 수 있다) 1928년 캔사스 지역을 무대로 연주활동을 한 월터 페이지(Walter Page)가 이끄는 블루 데빌스(Blue Devils)의 멤버로 가입, 여기서 훗날 그의 페르소나(Persona)로 남게 된 가수 지미 러싱(Jimmy Rushing)과 테너 색스폰 주자 레스터 영(Lester Young)을 만난다. 이듬해엔 캔사스 시티 출신인 밴드 리더 베니 모튼(Bennie Morton)을 만나며 모튼의 빅 밴드에 가입한다. 모튼의 밴드에서 편곡을 맡았던 그는 1935년 모튼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밴드의 리더로 나서게 되고, 이때 블루 데빌스 시절에 만났던 동료들을 규합해 1936년 자신의 밴드 ’카운트 베이시 오케스트라’를 결성한다. 이때 자신의 본명 윌리엄 베이시(William Basie) 대신 ’백작(Count)’의 작위를 수여하며 ’카운트 베이시’로 개칭한다. 1936년, 그의 음악을 라디오 방송을 통해 접했던 세기의 명 프로듀서 존 해몬드(John Hammond)의 주선으로 그와 그의 밴드는 캔사스를 떠나 뉴욕으로 입성하게 되었고, 1937년 1월, 데카(Decca) 레코드사와 계약하며 수많은 밴드의 명곡들을 녹음하게 된다. ’One o’clock jump’(1937)를 차트 톱10에 진입시키는 것을 시작으로, ’Boogie woogie’(1937), 지미 러싱의 보컬로 더 유명한 ’Stop beatin’ round the Mulberry Bush’(1938), ’Cherokee’(1939)등을 모두 차트에 진입시키는 성과를 거둔다. 그의 창작력의 정점이었던 이 당시 그의 대표 곡들은 3장 짜리 CD 박스세트 < Count Basie-The Complete Decca Recordings >를 통해 만날 수 있다. 1940년대 들어 그의 밴드는 전 세계를 투어하며 활발한 연주활동을 했지만, 2차 세계대전 발발로 지속되지는 못했다. 하지만 1942-1944년까지 그와 밴드는 미국 서부에 머물며 5편의 영화에 출연하고, ’I didn’t know about you’(1945), ’Red bank blues’(1945), ’Rusty dusty blues’(1945) ’Jimmy’s blues’(1945), ’Blue skies’(1946)등을 팝, R&B 차트에 진입시키면서 그의 인기는 절정에 다다랐다. 모던 재즈 창궐과 함께 스윙음악이 점차 그 인기가 시들해지자 그도 몇 년의 공백기를 거친 후인 1952년에서야 다시 그의 밴드를 부활시켜 활동에 들어간다. 버브 (Verve) 레이블을 통해 활동한 1950년대는 그가 제2의 전성기를 맞게 되는 시기다. 지미 러싱에 이은 재즈 보컬리스트 조 윌리엄스(Joe Willliams)를 밴드에 영입해 만든 < Count Basie Swings, Joe Williams Sings >(1955), < April In Paris >(1955)를 각각 앨범차트 톱40와, R&B 차트 톱10에 진입시키며 성공적인 재기를 거둔다. 특히 1957년 발표한 < Count Basie At New Port >는 레스터 영(Lester Young), 지미 러싱(Jimmy Ryshing), 로이 엘드리지(Roy Eldridge), 프레디 그린(Freddie Green)등 과거 1930년대 그에게 명성을 가져다 준 밴드 멤버들을 다시 불러들여 만든 연주라는 점에서도 가치 있는 스윙 명반이다. 1960년대 들어 그는 주로 보컬 연주의 대가들과 함께 음반을 발표한다. 엘라 핏제럴드(Ella Fitzgerald)와 함께 한< Ella And Basie! >(1963), 프랭크 시나트라와 함께 한 < Sinatra Again >(1964- 수록곡 ’It might as well be swing’이 팝 차트 톱20에 오름), 새미 데이비스 주니어와 함께 한 < Our Shining Hour >(1965), 밀스 브라더즈와 함께 한 < The Board Of Directors >(1968), 그리고 소울 가수 재키 윌슨과 함께 한 < Manufacturers Of Soul >(1968)등이 있다. 1970년대 들어 지병인 심장병으로 예전처럼 왕성한 창작열을 보여주진 못했지만, 휠체어에 몸을 의지하면서 그는 계속 세계 투어를 통해 연주활동을 지속했고, 파블로(Pablo) 레이블을 통해 발표한 그의 말년 작들은 그래미 상 재즈 부문에 다수 노미네이트 되는 영광을 얻으며 변함 없는 노익장을 드러냈다. 리드 악기 주자 주트 심스(Zoot Sims)와 발표한< Basie & Zoot >(1975), 그의 빅 밴드 작품 < Prime Time >(1976), 혼 주자 디지 길레스피와 함께 한 < The Gifted Ones >(1978)은 모두 그래미 상 재즈 부문 후보에 오른 작품들이다. 1981년 건강 악화로 결국 무대를 떠나 병원 생활을 하던 카운트 베이시는 암으로 1984년 향년 79세에 ’찬란한 스윙 백작’의 일대기를 접는다.
연주 : Antonio Carlos Jobim (안토니오 카를로스 조빔,Tom Jobim 톰 조빔)
안토니우 카를루스 조빙(Antonio Carlos Jobim, 1927년 1월 25일, 리우 데 자네이루 ~ 1994년 12월 8일 뉴욕)은 브라질 출신의 세계적인 작곡가, 가수, 피아니스트로 보사 노바(Bossa nova)의 전설을 만든 인물이다. 통 조빔(Tom Jobim)이란 이름으로도 유명하다. 섬세한 멜로디와 하모니로 유명한 조빙의 곡들은 브라질뿐 아니라 전 세계의 음악가들에 의해 연주되었다. 조빙... 안토니우 카를루스 조빙(Antonio Carlos Jobim, 1927년 1월 25일, 리우 데 자네이루 ~ 1994년 12월 8일 뉴욕)은 브라질 출신의 세계적인 작곡가, 가수, 피아니스트로 보사 노바(Bossa nova)의 전설을 만든 인물이다. 통 조빔(Tom Jobim)이란 이름으로도 유명하다.

섬세한 멜로디와 하모니로 유명한 조빙의 곡들은 브라질뿐 아니라 전 세계의 음악가들에 의해 연주되었다. 조빙이 주로 같이 작업한 가수로는 보사 노바의 또다른 창시자로 불리는 주앙 지우베르투(Joao Gilberto)와 엘리스 헤지나(Elis Regina), 세르지우 멘데스(Sergio Mendes), 아스트루드 지우베르투(Astrud Gilberto), 스탠 게츠(Stan Getz), 프랭크 시나트라 등을 들 수 있다.

조빙의 음악적 뿌리는 1930년대 현대 브라질 음악의 시효가 되었던 전설적인 음악가 피싱기냐(Pixinguinha)의 작품에서 찾을 수 있다. 이와 더불어 조빙은 프랑스 인상주의 작곡가인 클로드 드뷔시와 재즈의 영향도 받았다.
연주 : Oscar Peterson (오스카 피터슨)
재즈 연주에서 가장 먼저 떠오르는 악기는 무엇일까? 사람의 목소리를 가장 닮았다는 달콤한 멜로디의 주인공 색스폰, 다른 악기의 보조를 맞추며 특유의 화성으로 다양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베이스 , 박진감 넘치며 복잡한 리듬감을 구사하는 드럼…. 하지만 이 모든 것을 완벽히 하나로 종합할 수 있는 악기는 다름아닌 피아노이다. 리듬, 화성 ,멜로디를 완벽하게 구현해내는 이 악기는 그래서 모든 음악 하는 사람들이 필수적으... 재즈 연주에서 가장 먼저 떠오르는 악기는 무엇일까? 사람의 목소리를 가장 닮았다는 달콤한 멜로디의 주인공 색스폰, 다른 악기의 보조를 맞추며 특유의 화성으로 다양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베이스 , 박진감 넘치며 복잡한 리듬감을 구사하는 드럼…. 하지만 이 모든 것을 완벽히 하나로 종합할 수 있는 악기는 다름아닌 피아노이다. 리듬, 화성 ,멜로디를 완벽하게 구현해내는 이 악기는 그래서 모든 음악 하는 사람들이 필수적으로 연주해봐야 하는 연주의 전공필수와 같은 위상을 지녔다. 재즈에서 피아노 연주자의 위상 또한 남달랐다. 스윙의 선구자로 추앙 받던 카운트 베이시, 듀크 엘링턴 모두 클래식으로 숙련된 피아니스트였고, 밴드에서 편곡과 리더를 맡는 등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다른 악기로는 표현할 수 없는 풍부한 연주의 세계를 피아노는 창조할 수 있었고, 이런 강점을 발판으로 재즈사를 통해 거론되는 피아니스트들은 또한 재즈의 진보를 일궜다. 영화 ‘스팅’의 주제가에서 목격 했던 스콧 조플린의 흥겨운 랙 타임, 랙 타임 리듬에 멜로디의 고난이 즉흥성이 가미된 할렘 스트라이드 주법의 팻츠 월러, 최초의 비밥 피아니스트로 평가 받는 아트 테이텀, 대중성을 바탕으로 범접할 수 없는 연주 세계를 창조한 피아노 예술가 에롤 가너… 한 때 리듬 악기로만 국한 되었던 피아노는 이들의 창조력으로 어느덧 풍부한 화성과 운치 있는 멜로디라는 두 날개를 달며 재즈 연주에선 없어선 안 될 악기로 부상했다. 오스카 피터슨은 위에 언급한 재즈 피아니스트 중 시기적으로 가장 나중에 위치한 사람이다. 1925년생이니까 동년배의 다른 아티스트들이라면 일반적으로 비밥, 하드 밥의 대가쯤으로 알려져야 할 사람이다. 하지만 그는 지금껏 줄기차게 ‘스윙 ’연주만을 고집한 피아니스트다. ‘재즈’는 곧 ‘스윙’이라 할 정도로 그는 이 매력적인 장르를 지금껏 생명력 있게 이어줄 수 있게 한 동인이다. 팝 가수 빌리 조엘(Billy Joel)은 자신의 음악을 구성하는 중요한 한 부분의 바로 ‘재즈’이며 (가령 ‘New york state of mind’를 들어보면 확연히 알 수 있다) 그런 재즈 연주자중 자신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인물을 오스카 피터슨으로 꼽았을 정도로 팝 가수, 특히 피아노 연주를 하는 싱어 송 라이터들에게 그의 영향은 절대적이었다. 그만큼 그의 연주는 동시대 ‘비밥’ 연주처럼 난해한 성질의 것은 아니었지만 탁월한 리듬감과 즉흥적으로 멜로디를 구성하는 능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1949년 당시 신생 레이블 버브(verve) 사의 사장 노먼 그란쯔의 주선으로 본격적으로 재즈의 중심에서 활동하게 된 그는 이후 1965년까지 버브 레이블을 통해 ‘피아노 트리오’ 편성(베이스에 레이 브라운, 기타에 허브 엘리스 또는 바니 케슬)으로 기억될 수많은 재즈 연주를 남겼다. 우리에겐 가수로 더 잘 알려진 냇 킹 콜(Nat King Cole)이 1940년대 초 보여준 피아노 트리오 양식을 계승해 그는 ‘드럼’이 없이 베이스와 기타로 구성된 트리오를 계승해 보다 리드미컬하고 다양한 화성과 노트를 사용해 스윙 특유의 경쾌하면서도 세련된 트리오 연주 스타일을 창조했다. 피아노 트리오를 고안한 건 냇 킹 콜이었지만 그가 가수로 나선 뒤 생긴 공백을 오스카 피터슨이 매우며 보다 다채롭게 발전시킨 셈이다. 1925년 캐나다 몬트리올에서 태어난 오스카 피터슨은 6살부터 클래식 피아노를 통해 음악에 입문한다. 청년시절, 냇 킹 콜의 트리오 연주를 통해 스윙에 마력에 푹 빠지고 만 그는 피아노 역주에 보다 역동성을 가미시키며 자신의 스타일을 정립하려 고군분투한다. 이런 노력 끝에 1949년 버브사의 사장 노먼 그란쯔에 의해 눈에 띄어, 같은 해 ‘Jazz at Philharmonic’ 공연에 초청되었고, 이내 미국에서 유명한 재즈 뮤지션 반열에 오른다. 이후 그에게 기회를 가져다 준 < Jazz at Philharmonic > 공연에 그는 1966년까지 단골 연주자로 참석한다. 사실 미국에서의 그의 첫 밴드는 트리오가 아닌 듀오였다. 데뷔 시절부터 그의 음악적 동반자가 되어 준 베이시스트 레이 브라운(Ray Brown)은 이후 ‘오스카 피터슨 트리오’의 핵심이었는데 오스카와 듀엣으로 활동하며 데뷔작 < Tenderly >(1950)을 발표하며 상업적, 비평적인 성공을 거둔다. 50년대 초엔 기타를 추가하며 명실상부 피아노 트리오의 위용을 갖춘다. 오스카 피터슨-레이 브라운-허브 엘리스(바니 케슬)로 구성된 3인조는 < Keyboard >(1950), < An Evening with Oscar Peterson >(1950), < Nostalgic Memories >(1951)등 발표되는 앨범마다 연이어 히트를 기록하며 향후 10년간 연주 경력에 상승곡선을 그린다. 스윙을 바탕으로 빈틈없고 깔끔한 트리오 연주는 이내 입 소문으로 퍼져 빌리 홀리데이, 엘라 핏 제랄드, 루이 암스트롱과 같은 재즈 보컬의 세션을 맡기도 했고, 카운트 베이시 빅 밴드, 레스터 영, 베니 카터, 로이 엘드리지, 벤 웹스터 등 스윙시대 최고의 솔리스트들의 백업을 담당하기도 했다. 스윙에 대한 그의 열정은 ‘고전의 재해석’에서도 남달랐는데, 콜 포터, 어빙 벌린, 조지 거쉰, 제롬 컨, 리처드 로저스으로 구성된 1세대 틴 팬 엘리 작품을 집대성한 송 북(Songbook)을 발표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렇게 전성시대를 구가하던 그의 트리오도 기타리스트 허브 엘리스의 탈퇴로 잠시 동안 그 견고함이 흔들리게 된다. 이에 기존 피아노-베이스-기타에서 기타를 빼고 드럼을 에드 씨그펜(드럼)을 가입시키며 ‘제 2기 오스카 피터슨 트리오’를 출범시킨다. 1965년까지 이어진 트리오 라인업은 우리에게도 친숙한 앨범 < The Trio >(1961)을 시작으로 West Side Story >(1962), < Night Train >(1962), < Canadian Suite >(1964), < We get Request >(1964), 트럼펫 주자 클락 테리가 참가한 중반기 걸작 < The Oscar peterson Trio+ one >(1964)와 같은 명연을 남기며 제 2의 전성시대를 구가한다. 1965년을 정점으로 그의 트리오는 차츰 와해되기 시작했다. 그의 동반자 레이 브라운 마저 탈퇴한 상황에서 잦은 멤버 교체로 그가 쌓아 온 명색도 차츰 퇴색되기 시작했다. 재즈 퓨전이 창궐한 1970년대에도 꾸준히 작품 활동을 한 그는 20여년 넘게 그의 동반자가 되준 버브 레이블을 떠나 파블로 레이블을 통해 활동을 지속했고 ‘기타 비르투조 조 파스와 함께 한 후반기 명반 < The trio >(1973)을 비롯, 엘라 핏 제랄드, 카운트 베이시, 디지 길레스피, 사라 본, 로이 엘드리지, 주트 심스 등 백전노장들과 교류하며 자신의 존재를 대중들에게 알리기에 노력했다. 80년대엔 이렇다 할 활동을 보여주지 못했지만 1990년대 들어 그는 왕년의 트리오 멤버 레이 브라운과 허브 엘리스를 다시 불러 오스카 피터슨 트리오를 한시적으로 다시 구성해 앨범 < Oscar Peterson trio Live at Blue Note >(1990)를 발표한다. 단 이틀간의 재결합이었지만 그 해 재즈 뉴스 중 단연 화제였던 이들의 재결성 이벤트는 그의 올드 팬들에게 잊지 못할 추억을 선사했다. 현재 여든을 앞둔 고령인 그는 지난 1993년 급작스런 심장마비로 팬들을 긴장하게 했지만 2년여의 치료 끝에 1995년 건강한 모습으로 다시 무대에서 만날 수 있었다. 이미 왼쪽 손이 약해져 현재로는 왕년의 다이내믹한 피아노 연주를 더 이상 들을 수 없게 되었지만 “중요한 건 나의 건강상태가 아니다, 다만 팬들 앞에서 완벽한 연주를 들려줄 수 없다는 게 아쉽다”라는 그의 말에서 무대를 향한 열정을 짐작케 한다. 영원한 ‘피아노 맨’으로 기억될 오스카 피터슨은 지금까지 재즈 연주 중 가장 매력적인 연주 스타일인 트리오 연주의 명맥을 지금껏 존재케 해준 선구자로 평가된다.
재즈 피아노 연주자 재즈 피아노 연주자
연주 : Luiz Bonfa (루이즈 본파,Luiz Floriano Bonfa)
기타 연주자 기타 연주자
재즈 비브라폰 연주자 재즈 비브라폰 연주자
재즈 기타 연주자 재즈 기타 연주자
연주 : Roy Eldridge (로이 엘드리지 )
재즈 트럼펫 연주자 재즈 트럼펫 연주자
재즈 색소폰, 클라리넷 연주자 재즈 색소폰, 클라리넷 연주자
비밥의 선구자 찰리 파커(이하 버드)와 디지 길레스피(이하 디지)는 바늘과 실처럼 항상 따라다니는 존재였다. 엄청난 스피드의 솔로와 한번에 2개 이상의 음을 동시에 내는 찰리 파커의 연주 재능은 비밥의 혁명을 가능케 했다. 그러나 찰리 파커의 이런 재능을 먼저 알아본 것은 바로 그의 동반자이자 라이벌이었던 트럼펫 주자 디지 길레스피였다. 디지는 항상 버드의 막후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곤 했다. 그러나 이런 연유에서 ... 비밥의 선구자 찰리 파커(이하 버드)와 디지 길레스피(이하 디지)는 바늘과 실처럼 항상 따라다니는 존재였다. 엄청난 스피드의 솔로와 한번에 2개 이상의 음을 동시에 내는 찰리 파커의 연주 재능은 비밥의 혁명을 가능케 했다. 그러나 찰리 파커의 이런 재능을 먼저 알아본 것은 바로 그의 동반자이자 라이벌이었던 트럼펫 주자 디지 길레스피였다. 디지는 항상 버드의 막후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곤 했다. 그러나 이런 연유에서 그는 항상 ‘버드 다음’이라는 식으로 ‘2인자’ 취급을 받곤 했다. 하지만 버드의 음악성을 누구보다도 잘 이해했던 사람은 디지였고, 그것을 가능케 해준 사람도 바로 디지였다. (그리고 그들이 창조해낸 새로운 재즈 음악 ‘비밥’의 명칭 역시 디지가 고안했다.) 실제로 디지가 아니었다면 지금의 찰리 파커는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고 얘기할 정도로 버드에게 선사한 디지의 공헌은 막대했다. 눈칫밥을 먹어가며 독학으로 재즈를 익힌 버드와는 달리 디지는 노스 캐롤라이나 주립대에서 클래식을 전공했다.(물론 중간에 뛰쳐나온다.) 음악적인 지식이 전무했던 찰리 파커는 1930년대까지만 해도 이곳저곳을 배회하던 떠돌이 음악인 신세였고, 디지는 이미 그 실력을 인정받아 1937년부터 테디 힐 오케스트라의 트럼펫 주자였다. 하지만 1941년 민턴스 플레이 하우스에서의 이들 둘의 운명적인 만남을 통해 디지는 버드가 지닌 천재성에 매료 되 그와 의기투합한다. 버드가 연주해서 유명해진 ‘Groovin’ high’, ’Salt peanuts’, ’Hot house’, ’Shaw ’nuff’등은 모두 디지가 작곡했다. 1945년부터 민턴스 플레이 하우스를 무대로 활동한 이들 콤비는 버드가 곡의 영감과 아이디어를 제공하면 디지가 그것을 흡수해 곡을 쓰는 방식이었다. 독보적인 음악성을 지닌 찰리 파커의 악상은 이렇듯 디지의 체계적인 음악지식에 의해 악보로 재현되었기에 우리가 지금 버드의 연주를 감상할 수 있는 셈이다. 디지가 재즈사에 남긴 공헌은 버드와의 콤비 플레이 이상이다. 1947년 버드와 함께 한 퀸텟 활동을 접고 초유의 비밥 빅밴드(Bebop Big Band)를 결성해, 다양한 음악적 실험을 시도한다. 이중 가장 두드러지는 것이 바로 그가 고안한 ‘쿠밥’(Cubop)이라는 장르인데, 쿠바 출신의 타악기 연주 대가 차노 포조(Chano Pozo)를 초청해 비밥과 아프로 큐반 리듬의 온전한 결합을 시도하며 재즈 내에서 본격적인 ’퓨전‘을 실험한 최초의 인물로 디지는 기억되다. 재즈의 명 스탠다드로 자리 매김 한 대표 곡 ’A night in tunisia’, Cubana bop’과 같은 곡은 아프로 큐반 재즈의 원형을 제시했다. 또한 그의 빅 밴드에서 활동하던 밀트 잭슨, 제임스 무디, 유셉 라티프, J.J 존스과 같은 50-60년대 ‘모던 재즈 쿼텟’(Modern Jazz Quartet)이란 이름으로 모인 걸출한 뮤지션들을 배출했고, 그의 트럼펫 연주는 이후 팻츠 나바로, 클리포드 브라운 그리고 마일스 데이비스의 연주에 영향을 끼치며 비밥이 한층 그 흑인성을 더하며 하드 밥 (Hard Bop)으로 진화 해 가는데 기여한다. 1917년 노스 캘롤라이나 주 출신인 디지는 12세때부터 트럼펫을 손에 잡고 이후 대학에서 정규 음악교육을 받지만, 뮤지션이 되기 위해 자퇴한다. 30년대 스윙시대를 빛냈던 트럼펫 주자 로이 엘드리지(Roy Eldridge)의 영향을 받은 그는 1937년 테디 힐 오케스트라를 시작으로 프로로 데뷔한다. 이후 1939-1941년까지 캡 캘로웨이(Cab Calloway) 빅 밴드에서 활동하지만 리더와의 사소한 다툼으로 이윽고 해고된다. 이윽고 그의 첫 음악동지 테디 힐이 세운 민턴스 플레이 하우스에 입성, 버드를 비롯한 비밥의 명인들과 음악적 교분을 나누며 1941-1943년까지 엘라 핏 제럴드, 베니 카터, 콜맨 홉킨스의 레코딩 세션에 참여하며 비밥의 혁명을 준비한다. 1942년 얼 하인즈 빅밴드에 합류하며 디지는 버드와 본격적인 활동을 하게되었고 이때 밴드의 보컬주자 빌 엑스타인의 보컬로 그의 대표작 ‘A night in tunisia’(1943)을 발표한다. 1945-1947년까지 버드와 함께 퀸텟을 조직, 비밥을 세상에 알렸고, 1947년부터 자신의 비밥 빅밴드를 이끌면서 아프로 큐반 음악을 재즈에 소개한다. 1950년엔 버드와 다시 만나며 < Bird & Diz >를 버브 레이블에서 공개했고, 이후 1950년대 내내 버브사를 통해 자신의 연주에 큰 영향을 준 로이 엘드리지와 함께 한< Dizzy Gillespie & Roy Eldridge >(1954), 10년 동안의 빅 밴드 활동을 중간 결산하는 라이브 명반 < At Newport >(1957)을 발표한다. 젊은 나이에 유명을 달리한 버드와는 달리 디지는 이후 60년대부터 죽을 때까지 지속적인 활동을 보이는데, 자신의 빅 밴드를 해체시키고 소규모 밴드 중심으로 활동한 그는 레오 라이트(Leo Wright), 라로 쉬프린(Lalo Schifrin), 제임스 무디(James Moody), 케니 바론(Kenny Barron)과 같은 60년대 스타급 재즈 뮤지션들과 교류했고, 70년대 초엔 재즈 자이언츠(Jazz Giants)라는 프로잭트 밴드를 결성, 델로니우스 몽크 ,소니 스티츠, 아트 블래이키와 같은 40-50년대 비밥 명인들과 재결합을 시도한다. 이후 재즈 계에서 그의 영향력은 차츰 줄어 들어갔지만, 후배 재즈 뮤지션들은 그의 업적을 칭송하며 80년대까지 그와 함께 연주를 같이 한다. 그는 최근 개봉했던 영화 ‘리빙 하바나’를 통해 소개된 아르투로 산도발(트럼펫)과 파키토 리베라(색스폰)와 같은 쿠바 출신의 뮤지션들을 전 세계에 알리는 역할을 맡았다. 그의 정력적인 활동은 죽기 1년 전인 1992년까지 지속되었다. 디지는 비슷한 시기 자웅을 겨뤘던 버드와 같은 천재는 아니었다. 하지만 ‘흑인이라는 운명’에 자신을 파괴했던 버드와는 달리 그는 자신을 아낄 줄 알았고, 오랜 기다림 끝에 대중적인 인기도 얻을 수 있었다. 그는 버드와 함께 ‘비밥의 산파자’라는 영예와 더불어 많은 후배 뮤지션들을 키워내며 재즈 사에서 버드에 못지 않은 영향력을 행사한 인물로 기억된다.
연주 : Gene Krupa (진 크루파 (재즈 드럼))
재즈 색소폰 연주자 재즈 색소폰 연주자
재즈 클라리넷, 색소폰 연주자, 빅 밴드 리더. 재즈 클라리넷, 색소폰 연주자, 빅 밴드 리더.
연주 : Joe Williams (조 윌리암스,Joseph Goreed)
재즈 색소폰 연주자 재즈 색소폰 연주자
연주 : Illinois Jacquet (일리노이 자켓 )
재즈 테너 색소폰 연주자 재즈 테너 색소폰 연주자
연주 : Coleman Hawkins (콜맨 호킨스,Coleman Randolph Hawkins)
재즈 테너 색소폰 연주자 재즈 테너 색소폰 연주자
재즈 드럼 연주자 재즈 드럼 연주자
재즈 색소폰 연주자 재즈 색소폰 연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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