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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여운 여인 [프리티 우먼] 영화음악 (Pretty Woman OST) [L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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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여운 여인 [프리티 우먼] 영화음악 (Pretty Woman OST) [LP]

David Bowie, Red Hot Chili Peppers, Robert Palmer, Natalie Cole, Peter Cetera 노래 외 2명 정보 더 보기/감추기 | Universal / Capitol | 2016년 05월 25일 첫번째 구매리뷰를 남겨주세요. | 판매지수 48 판매지수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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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여운 여인 [프리티 우먼] 영화음악 (Pretty Woman OST) [LP]

품목정보

품목정보
발매일 2016년 05월 25일
제조국 미국

관련분류

음반소개

디스크

Disc
  • 01 Nathalie Cole: Wild women do
  • 02 David Bowie: Fame 90
  • 03 Go West: King of wishful thinking
  • 04 Jane Wiedlin: Tangled
  • 05 Roxette: It must have been love
  • 06 Robert Palmer: Life in detail
  • 07 Peter Cetera: No explanation
  • 08 Christopher Otcasek: Real wild child
  • 09 Lauren Wood: Fallen
  • 10 Roy Orbison: Oh pretty woman
  • 11 Red Hot Chili Peppers: Show me your soul

아티스트 소개 (7명)

노래 : David Bowie (데이비드 보위)
무차별 변신으로 일관해온 록의 순례자 1947년 영국 런던의 브릭스턴 태생인 데이비드 보위는 애청곡이 많은 뮤지션은 아니다. 이름도 꽤 알려졌고 차트 활동도 부진한 편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정감에 맞는 음악을 하지 않았던 탓인지 인기곡 하나 남겨 놓지 못했다. 그러나 영미 록 역사에서, 특히 1970년대를 논할 때, 빠질 수 없는 인물로 기록된다. 이른바 ‘살아 있는 전설’이다. 그는 1969년 미국에서... 무차별 변신으로 일관해온 록의 순례자 1947년 영국 런던의 브릭스턴 태생인 데이비드 보위는 애청곡이 많은 뮤지션은 아니다. 이름도 꽤 알려졌고 차트 활동도 부진한 편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정감에 맞는 음악을 하지 않았던 탓인지 인기곡 하나 남겨 놓지 못했다. 그러나 영미 록 역사에서, 특히 1970년대를 논할 때, 빠질 수 없는 인물로 기록된다. 이른바 ‘살아 있는 전설’이다. 그는 1969년 미국에서 아폴로 11호가 사상 최초로 달에 착륙했을 때에 맞춰 공상 과학(SF)의 환상을 실은 ‘우주의 괴짜(Space oddity)’를 발표해 주목을 받았다. 그리고는 불세출의 걸작 앨범 < 지기 스타더스트와 화성에서 온 거미들의 흥망(The Rise And Fall Of Ziggy Stardust And Spiders From Mars) >을 통해 남녀 일체의 파격을 선보이며 진보적인 록 뮤지션으로 떠올랐다. 그는 스스로 동성이자 초월자인 ‘지기’로 분해 무대의 시각적 충격을 강조했으며 현상을 거부하는 반란을 일상화했다. 흔히 ‘자극의 시대’로 일컬어지는 1970년대와 맞물린 이러한 퍼스낼리티 설정은 즉각 록의 새로운 규범으로 확립되었다. 그것이 ‘글램 록’ 또는 ‘글리터 록’이란 것이었다. 그는 가수가 노래하는 사람, 무대가 노래하는 장소라는 등식과 관념을 넘어섰다. 화려하고 원색적인 화장에 반짝거리는 의상을 하고 나와 무대에서 노래할 뿐만 아니라 ‘연기’를 했다. 그것은 자극적인 퍼포먼스였다. 그는 1972년 “지금 충격을 줄 수 있는 유일한 것은 극단으로 가는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는 팬들이 지기의 이미지를 오용하여 반사회적인 폭력을 일삼게 되자 곧바로 지기의 탈을 벗어버렸다. 이 시점부터 그는 어느 것 하나에 정착하는 법이 없었다. ‘다이아몬드의 개(Diamond dogs)’로 예언자가 되는 듯 하더니 ‘로우(Low)’에서는 은둔자로 변신했으며 나중에는 ‘야윈 백인공작(Thin white duke)’으로 탈바꿈했다. 음악도 이곳 저곳을 넘나들었다. 하드한 기타록을 하다가 소울 음악을 시도하기도 했으며 전자 음악도 했고 심지어 디스코 댄스 음악 세계에 빠지기도 했다. 긍정적으로 볼 때 그는 새로운 것에 과감히 가슴을 열어 끊임없는 혁신을 이룩한 음악인이었다. 데카당적인 틀은 유지했지만 그 속에서는 종잡을 수 없는 ‘예술적 보헤미안’임을 의도적으로 나타냈다. 하지만 ‘한 우물 파기’에 의미를 두는 사람들은 그를 ‘뿌리 없는 실험 병자’로 ‘음악적 곡예사’로 배격했다. 그가 펼쳐 놓은 무수한 장르의 파편들과 끝없는 변신의 행적을 보면 카멜레온이요, 기회주의자였음은 누구도 부인하기 어렵다. 과연 이같은 무차별 변신을 두둔해야 하는가. 그러나 록계에서는 그의 음악이 언제나 예측 불허였으며 누구도 흉내낼 수 없을 만큼 독창적이라는 점을 높게 평가한다. 30년간 록계에 몸담으면서 오로지 실험 정신으로 일관해 온 순례자로 떠받드는 것이다. 그는 1993년 AP통신과의 회견에서 자신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난 내가 한 것을 동료들과 비교할 때 나를 모험적인 작가로 생각한다. 난 한 곳에 머무는 것이 체질적으로 싫다. 그래서 악평이 나오기도 한다... 난 스튜디오에 들어가 머릿속에 담은 구체화된 아이디어가 내 자신을 놀라게 하는지를 본다. 밖에서 누군가 그것을 좋아할 사람이 있을 테지만 그러나 나는 기본적으로 나 자신을 위해 곡을 쓴다.” 그의 곡예는 대중의 기호를 쫓은 상술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예술성을 자극하는 것, 바로 그 점에 봉사했다. 즉 ‘예술적 동기’로 자신의 음악 세계를 형상화해 온 셈이다. 이처럼 록예술에 집착한, 그리고 진보적인 뮤지션의 음악은 대중의 폭넓은 사랑과는 대부분 무관하다. 음악적으로 볼 때도 곡조나 편곡에 있어서 일반적인 패턴을 따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그는 빌보드 차트 1위곡을 두 곡이나 보유하고 있다. 예술의 개가로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사실은 그가 때로 ‘대중적인 접근’을 시도하기도 했다는 반증이다. 때문에 1위곡들인 ‘명성(Fame)’이나 ‘춤을 춥시다(Let’s dance)’는 그다지 호평을 받는 편이 아니다. 특히 디스코 리듬에 전자 댄스 음악적 요소가 전면화된 ‘춤을 춥시다’는 노골적으로 상업성을 겨냥, 보위의 골수 팬들을 실망시켰다. 1977년 < 로우 >앨범 발표 당시 “되도록 이 앨범이 팔리지 않기를 바란다”는 요지의 말을 했던 그를 전제할 때 그것은 명백한 일탈이었다. 그는 ‘춤을 춥시다’의 성공이 너무 거대했던지 이후 그 그림자에 가려 주류에서 급격히 멀어졌다. 줄기차게 앨범을 내놓았지만 상업적 성과도 내리막길을 달렸고 평자들의 호의도 식었다. 세월이 많이 흐른 뒤 그 자신도 그때의 성공을 부끄러워했다. 그는 1995년 < 뉴욕 타임스 >지에 “‘춤을 춥시다’로 빅히트를 한 것은 최악의 상황이었다. 난 대중적인 인기를 누른 적이 없었는데 갑자기 내가 풍선껌 포장지와 같은 처지에 서게 된 느낌이었다.” 라고 술회했다(가끔 목격할 수 있는 일이지만 서구 록스타들은 반성도 참 잘한다!). 그는 이때 2년만에 이색적인 앨범 < 아웃사이드(Outside) >와 함께 컴백했다. 이색적이라고 표현한 것은 한편의 심리적인 추리소설을 사운드트랙화 했기 때문이다. ‘나단 애들러의 일기’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이 앨범은 기괴한 10대 소년의 살인 사건을 수사하는 사립 탐정과 그 주변 용의자들에 관해 노래하고 있다. 이 ‘예술적 추리 사건’의 진상은 1999년 발매될 마지막 앨범에서 규명된다고 한다. 그러니까 이번 < 아웃사이드 >앨범은 시리즈의 첫편인 셈이다. 데이비드 보위는 이 앨범을 제작하기 위해 한 때 명콤비였던 걸출한 프로듀서 브라이언 이노(Brian Eno)와 다시 손을 잡았다. 그것은 1980년대의 부끄러운 상업적 성공을 기억에서 지우려는 몸부림처럼 보인다. ‘비상업적’인 과거의 면모를 회복하기 위한 의지의 산물이라고나 할까? 즉흥성이 중시된 연주나 몽환적 부유(浮遊)의 분위기가 그것을 설명해 준다. 마치 ‘안 팔려도 그만’이라는 당당함이 배어 있는 음반이다. 그는 인기의 억압으로부터 탈출하려는 자세를 되찾음으로써 ‘영원한 로커’임을 재확인시키고 있다. 록이란 게 원래 그런 음악이다.
노래 : Red Hot Chili Peppers (레드 핫 칠리 페퍼스 (락 밴드))
Christ, I’m a sidewinder, I’m a California King. I swear it’s everywhere it’s everything(주여, 나는 미사일이고 캘리포니아의 왕입니다. 맹세컨대 그것은 모든 곳에 존재하고 그것은 (나에게) 전부입니다.) -‘Parallel universe’ 중- It’s the edge of the world and all of western civilizat... Christ, I’m a sidewinder, I’m a California King. I swear it’s everywhere it’s everything(주여, 나는 미사일이고 캘리포니아의 왕입니다. 맹세컨대 그것은 모든 곳에 존재하고 그것은 (나에게) 전부입니다.) -‘Parallel universe’ 중- It’s the edge of the world and all of western civilization. The sun may rise in the East. At least it settles in the final location. It’s understood that Hollywood sells Californication(그곳은 세상의 끝 그리고 서구 문명의 모든 것이지. 태양은 동쪽에서 떠오를지 몰라도 적어도 그것은 마지막 장소에서 머무르지. 할리우드가 캘리포니아화(化)를 파는 것은 이해가 돼.) -‘Californication’ 중- 미국, 그 중에서도 캘리포니아(California)는 매우 특별한 장소이다. 그곳은 로스앤젤레스(Los Angeles)와 샌프란시스코(San Francisco)라는 메트로폴리스의 거점으로서 최첨단 자본주의의 상징인 동시에 다양한 인종과 문화가 한데 섞여 있는 지역이기도 하다. 따라서 1980년대 초까지 철저히 분리노선을 추구하던(혹은 당했던) 흑과 백이 중반 이후부터 이 장소에서 교류관계를 형성하기 시작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멀티컬처(Multiculture), 그리고 LA식 평등주의가 지배하는 색다른 공간의 탄생. 가사에서 잘 보여지듯 레드 핫 칠리 페퍼스(Red Hot Chili Peppers, RHCP)의 음악적 뿌리가 바로 여기에서 출발한다. 레드 핫 칠리 페퍼스는 고등학교 동창이었던 앤소니 키에디스(Anthony Kiedis), 플리(Flea 본명:Michael Balzary)와 힐렐 슬로박(Hillel Slovak), 잭 아이언스(Jack Irons)의 라인업으로 1983년 미국 LA에서 결성되었다. 훗날 밴드의 트레이드마크가 되는 광적인 무대 매너를 초기 시절부터 뽐내면서 서서히 유명세를 탄 이들은 1984년 셀프타이틀인 < Red Hot Chili Peppers >를 발표하며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당시 LA의 언더그라운드 씬을 장악하고 있던 과격한 펑크(Punk)사운드와 슬라이 앤 더 패밀리 스톤(Sly & the Family Stone), 팔리아먼트(Parliament)등에 영향 받은 흑인 펑크(Funk)의 크로스오버를 실현한 이 앨범은 LA만의 특수한 문화 형성 과정을 대중 음악의 관점에서 표현해냄으로서 밴드에게 펑크 메탈(Funk Metal)이라는 레테르를 붙여주었다. 1970년대 이후 하드코어 흑인 음악을 가리키는 용어인 펑크와 백인 하드코어의 상징인 펑크/메탈의 극적인 만남이 성사된 시점이었다. 각 밴드마다 미세한 차이는 존재하지만 제인스 어딕션(Jane’s Addiction), 리빙 컬러(Living Color), 피시본(Fishbone)등도 같은 흐름에 속해있는 이들로 평가받는다. 1985년에 발매한 < Freaky Styley >는 밴드 역사에 있어 매우 중요한 순간을 포착한 작품이었다. 우선 펑크(Funk)의 대부인 조지 클린턴(George Clinton)이 펑크의 고향인 디트로이트(Detroit)에서 손수 프로듀스를 해줌으로서 이들의 음악 지향에 날개를 달아주었고 1집 때 잠시 밴드를 떠났던 슬로박과 아이언스가 다시 가세함으로서 탄탄한 멤버쉽을 구축해냈다. 자연스레 내용물은 대만족. 비록 상업적으로 히트하진 못했지만 앨범은 신인이라는 꼬리표를 떼어내는데 산파 역할을 해줌으로서 언더그라운드에서 인지도를 넓히는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 그러나 막 성공 가도의 입구에 들어선 이들에게도 위기는 찾아왔다. 1987년 < The Uplift Mofo Party Plan >을 선보인 후 슬로박이 약물과다 복용으로 사망하고 잭 아이언스도 그룹을 떠나고 만 것. 다행히 사태는 더 좋은 방향으로 흘렀다. 존 프루시안테(John Frusciante), 채드 스미스(Chad Smith)를 새로이 보강한 이들은 밴드 역사상 최강의 호흡을 보여주며 절정기를 구가했다. < Mother’s Milk >(1989)와 < Blood Sugar Sex Magik >(1991) 두 작품이 이를 대변하는 레드 핫 칠리 페퍼스만의 사운드트랙이다. 특히 후자는 같은 해에 등장한 너바나(Nirvana)의 < Nevermind >, 펄 잼(Pearl Jam)의 < Ten >과 함께 얼터너티브가 주도한 최상의 대중적/예술적 성취를 이뤄낸 걸작이었다. ‘Give it away’와 최초로 싱글 차트 10위권에 진입한 ‘Under the bridge’등이 선전하며 700만장 이상이 팔리는 몬스터 히트를 기록했다. 테크니컬한 펑키 라인을 선호하는 플리의 베이스와 미니멀리즘에 입각한 존 프루시안테의 기타플레이간의 완벽한 매치, 비스티 보이즈(Beastie Boys)와 퍼블릭 에네미(Public Enemy)와의 작업으로 유명한 프로듀서 릭 루빈(Rick Rubin)의 참여가 성공의 주원동력이었다. 이 후 밴드는 25년 만에 다시 개최된 1994년 우드스탁(Woodstock) 페스티발에 초청되어 최고의 공연을 치러내는 등, 탄탄대로를 질주했다. 허나 갑작스런 부(富)에 따르는 부작용은 이들에게도 여지없이 급습했다. 특히 과도한 약물 중독 증세를 보인 존 프루시안테는 결국 밴드를 떠나게 되었다. 애릭 마샬(Arik Marshall), 제시 토비아스(Jesse Tobias)등이 잠시 거쳐간 후 최종 낙점된 후임자는 데이브 나바로(Dave Navarro). 같은 계열의 동료 밴드인 제인스 어딕션(Jane’s Addiction)의 일원이었던 그의 가입으로 밴드는 전열을 재정비하며 새출발을 준비했다. 하지만 아쉽게도 1995년의 < One Hot Minute >는 음악적인 포커스가 흐려지는 결과를 양산해냈다. 전작과는 반대로 플리의 베이스와 정돈된 메탈 스타일을 선호하는 데이브 나바로의 기타가 평행선을 그으며 합일점을 찾지 못했던 것이다. 이런 이유로 데이브 나바로는 탈퇴했고 존 프루시안테 역시 솔로작인 < Niandra Ladies and Usually Just a T-Shirt >(1995), < Smile from the Streets You Hold >(1997)를 내놓으며 레드 핫 칠리 페퍼스의 해체설을 부추겼다. 그러나 그와 밴드는 서로를 필요로 하고 있었다. 여기에 릭 루빈까지 가세, 전성기 때의 작업 멤버로 돌아간 RHCP는 1999년에 < Californication >을 내놓으며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가장 팝적인 접근법을 선보인 이 작품은 단숨에 빌보드 정상을 꿰찼고, ‘Scar tissue’, ‘Otherside’등의 차트 1위 싱글들을 배출하며 어느새 노장이 되어버린 밴드에게 음악적 활로를 개척해주었다. 상복도 많을 것으로 예상됐지만 ‘Scar tissue’만이 그래미(Grammy)에서 베스트 록 송 부문을 수상하는 것에 그치고 말았다.
백인으로서 소울을 구사하지만 대중들에게는 록에 바탕을 둔 노래를 불러 널리 알려진 가수로 1980년대 중반에 전성기를 누렸다. 말끔한 정장차림 만큼이나 깨끗하면서도 힘에 넘치는 록을 불렀다. 지중해의 말타 섬에서 유년기를 보냈으나 영국에서 10대에 이미 맨드레이크 패들 스티머라는 이름의 밴드에서 노래를 불렀고 1968년에는 앨런 보운 세트라는 그룹 그리고 이어서 비네가 조(Vinegar Joe)에 가입해서 활동했... 백인으로서 소울을 구사하지만 대중들에게는 록에 바탕을 둔 노래를 불러 널리 알려진 가수로 1980년대 중반에 전성기를 누렸다. 말끔한 정장차림 만큼이나 깨끗하면서도 힘에 넘치는 록을 불렀다. 지중해의 말타 섬에서 유년기를 보냈으나 영국에서 10대에 이미 맨드레이크 패들 스티머라는 이름의 밴드에서 노래를 불렀고 1968년에는 앨런 보운 세트라는 그룹 그리고 이어서 비네가 조(Vinegar Joe)에 가입해서 활동했고 이 그룹은 3장의 앨범을 발표했으나 주목받지 못한 채 해산했다. 솔로에 나선 로버트 파머는 1975년 미국 뉴올리언스에서 저명한 재즈 밴드의 리더 알랭 투생(Allen Toussaint)이 쓴 곡을 제목으로 한 첫 앨범 < Sneakin'' Sally Through The Alley >를 발표했다. 매니아들의 수집용이 된 이 수작 앨범은 미터스(Meters)와 리틀 피트(Little Feat)의 멤버들을 백 밴드로 기용해 만들었고 그중 파머가 쓴 ''Hey Julia''와 로웰 조지가 만든 ''Sailing shoes'' 메들리는 백인 소울의 클래식으로 평가받는다. 하지만 다음 앨범 < Pressure Drop >은 유명 레게 밴드 투츠 앤 히버트(Toots And Hibbert)의 곡을 타이틀로 한 것이 증명하듯 레게 성향으로 흘렀다. 바하마로 옮겨서 만든 1976년 앨범 < Some People Can Do What They Like >에 와서 앨범이 톱10에 오르며 기지개를 켰고 1978년 앨범 < Doble Fun >의 싱글 ''Every kinda people''은 차트 16위에 올라 존재가 부각되기 시작했다. 자신감을 얻은 이듬해 자신이 직접 프로듀스한 앨범 < Secrets >에서는 ''Bad case of lovin'' you''가 싱글 차트 14위에 올라 좀더 대중과 친숙해졌다. 영국의 뮤지션 문 마틴(Moom Martin)이 작곡한 이 노래는 차트 순위에 무관하게 경쾌한 록 리듬으로 국내에서도 애청 팝송으로 남아있다. 하지만 그는 이 무렵에 신시사이저에 의한 일렉트로닉 팝으로 혜성처럼 떠오른 개리 뉴먼(Gary Numan)이 쓰고 연주해준 앨범 ''Clues''를 발표, 결코 한 장르에 머무르지 않는 실험주의자로서의 측면을 과시했지만 대중적 지명도는 답보상태에 빠졌다. 그가 다시 수면 위로 부상한 때는 1985년 그룹 두란 두란의 멤버 존 테일러와 앤디 테일러 그리고 쉭(Chic)의 드러머 토니 톰슨과 결성한 프로젝트형 슈퍼그룹 파워 스테이션(Power Station)에서 노래부르면서였다. 여기서 ''Some like it hot''(6위), T. 렉스의 것을 리메이크한 ''Get it on''(9위)과 같은 히트송이 나왔다. 그러나 공연을 싫어했던 그는 라이브 에이드 출연을 앞두고 그룹과 작별하고 말았다. 파워 스테이션 활동은 잊혀질 뻔했던 그의 이름을 되살리면서 솔로활동에 윤활유역할을 했다. 록 성향의 1985년 말 앨범 < Riptide >에서 차트 정상을 밟은 자작 곡 ''Addicted to love''와 지미 잼 앤 테리 루이스 작품 ''I didn''t mean to turn you on''(2위) 등 차트 대박 곡을 잇따라 내놓으면서 마침내 최고가수로 부상했다. 특히 무표정하면서 미니 스커트 차림의 모델들이 백업 밴드로 흉내를 낸 비주얼한 뮤직 비디오는 인기몰이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그의 성공은 1988년 앨범 < Heavy Nova >의 ''Simply irresistible''(2위)와 ''Early in the morning''(19위)으로 계속되었다. 이 앨범에서는 제목처럼 보사노바와 1940년대 발라드를 시도해 실험과 절충에 강한 집착을 보였다. 이후에도 그는 마빈 게이와 같은 모타운 노래를 위시해 틴 팬 앨리와 카바레 스타일을 실험했다. 1999년 이글 레코드사에서 5년 만에 신보 < Rhythm & Blues >를 발표했으나 전성기는 이미 끝나 있었다. 그의 음악인생은 대체로 성공적이었으나 워낙에 이런저런 음악에 많이 ''이사'' 다닌 탓인지 비평적 호응을 얻은 편은 못되었다. 본고장에서 로버트 파머를 규정하는 곡은 물론 ''Addicted to love''이나 국내에서는 2001년 관객동원 신기록을 수립한 블록버스터 < 친구 >에 삽입된 ''Bad case of lovin'' you(doctor doctor)''로 더 알려져 있다.
나탈리 콜(Natalie Cole)은 파워와 가녀림을 함께 담아 내는 특색 있는 보컬로 재즈와 팝을 넘나들며 오랜 기간 인기를 누려왔다. 1900년대 중반 흑인 최고의 스탠다드 보컬로 인기를 누렸던 냇 "킹" 콜(Nat "King" Cole)의 딸로도 유명한 그녀는 1991년 아버지의 목소리에 자신의 목소리를 입혀 부른 ’Unforgettable’로 그래미(Grammy) 7개 부문을 수상하며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나탈리 콜(Natalie Cole)은 파워와 가녀림을 함께 담아 내는 특색 있는 보컬로 재즈와 팝을 넘나들며 오랜 기간 인기를 누려왔다. 1900년대 중반 흑인 최고의 스탠다드 보컬로 인기를 누렸던 냇 "킹" 콜(Nat "King" Cole)의 딸로도 유명한 그녀는 1991년 아버지의 목소리에 자신의 목소리를 입혀 부른 ’Unforgettable’로 그래미(Grammy) 7개 부문을 수상하며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1950년 미국 로스 앤젤리스(Los Angeles)에서 태어난 나탈리는 아버지 곁에서 어린 시절부터 자연스럽게 음악을 접했다. 10살 정도의 어린 나이에 아버지와 함께 무대에 오르는 등 뮤지션으로 성장할 수 있는 최적의 환경 속에서 재즈 싱어로서의 자질을 키워 나간다. 음악적 재능이 뛰어났고 아버지의 유명세를 통해 쉽게 가수로 데뷔할 수 있었지만 나탈리는 대학생이 된 1970년대가 되어서야 비로소 가수로서의 길을 결정한다. 매사추세츠(Massachusetts) 대학 재학 중이던 그녀는 매니저인 케빈 헌터(Kevin Hunter)를 만나게 되고 재즈 클럽을 무대로 노래하기 시작한다. 물론 그녀에게는 냇 "킹" 콜의 딸이라는 꼬리표가 항상 붙어 다녔고, 그녀의 독특한 음악적 신분은 프로페셔널로서의 활동에 큰 힘을 실어주게 된다. 클럽 활동을 하면서 만난 여러 재즈 뮤지션들과 앨범을 내려고 했던 그녀의 생각은 그다지 쉽게 풀려 나가지 않았다. 그녀는 여러 레이블에서 음반 제의를 거절당했고, 결국 아버지가 소속되어 있었던 캐피톨(Capitol) 레코드의 문을 두드리게 된다. 1974년 캐피톨 레코드와 계약을 체결한 그녀는 1975년 적지 않은 나이에 데뷔 싱글인 ’This will be’를 발표한다. 시작부터 성공의 연속이었다. 첫 싱글인 ’This will be’는 싱글 차트 6위의 성공을 거두었고, R&B 차트에서는 No.1에 오르는 성공을 거두었다. 그녀는 데뷔 싱글의 성공에 힘입어 데뷔 이듬해인 1976년 그래미에서 ’Best Female R&B Vocal Performance’와 ’Best New Artist of the Year’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누린다. 이어지는 싱글들 ’Inseparable’, ’Sophisticated lady (She’s a different lady)’, ’I’ve got love on my mind’, ’Our love’ 또한 R&B 차트에서 1위에 오르는 성공들을 거두어 들였다. 프로듀서 겸 작곡가 척 잭슨(Chuck Jackson)과 마빈 얀시(Marvin Yancy)는 데뷔 때부터 나탈리의 성공을 이끈 숨은 공로자들이었고, 마빈 얀시는 1976난 나탈리 콜의 남편이 된다.(결혼 생활이 그리 길지는 않았다.) 1970년대 후반에도 줄기찬 성공 행진을 이어갔다. 여섯 장의 앨범 < Inseparable >, < Natalie >, < Unpredicatable >, < Thankful >, < Natalie Live! >, < I Love You So >를 모두 골드와 플래티넘에 올려놓았으며 가수로서의 연이은 성공 덕분에 CBS와 NBC에서 음악 프로그램을 진행하게 되는 기쁨까지 누렸다. 엘라 핏제럴드의 음악을 듣고 부르며 자란 그녀의 음악적 기반은 분명 재즈에 있었다. 하지만 가수로 데뷔한 후 그녀는 팝과 재즈의 경계를 의식하지 않으며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소화했다. 재즈, 소울, 가스펠, 알앤비, 팝을 다양하게 소화해 내었고, 그런 다양한 스타일은 재즈 싱어에게 강한 대중성을 부여했다. 화려한 1970년대를 보낸 그녀였지만 1980년대는 그리 평탄하게 시작되지 않았다. 마빈 얀시와의 결혼 생활에서 아들까지 얻었지만 마빈과 이혼에 이르렀고, 과다한 약물 복용으로 콘서트를 취소하는 등 갑작스럽게 찾아온 개인적인 문제들 때문에 씨름해야 했다. 이러한 문제들로 캐피톨과의 재계약 마저 실패한 나탈리는 미네아폴리스의 한 클리닉에서 갱생치료를 받기 시작한다. 그리고 갱생 치료를 받기 시작한지 6년이 지난 후 이전의 모습으로 다시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내었다. 1987년 프로듀서인 안드레 피셔(Andre Fischer)와 재혼한 나탈리는 이전의 영광을 재현하는 두 번째 고공 비행을 시작한다. 1987년 작 < Everlasting >에서 ’Jump start’, ’I live for your love’, ’Pink cadillac’을 연이어 히트시키며 골드를 거머쥐었고, 의미 있는 앨범 제목을 담고 있는 1989년 작 < Good to Be Back >에서는 팝적 성향이 강한 ’Miss you like crazy’와 ’Wild women do’(1990년 히트 사운드트랙 < Pretty Woman >의 첫 곡으로 수록되었다.)를 히트시킨다. 1991년은 그녀의 삶에 있어서 최고의 해였다. 아버지인 냇 "킹" 콜이 생전에 녹음했던 ’Unforgettable’에 자신의 목소리를 입힌 새로운 방식의 듀엣 곡을 수록한 < Unforgettable >을 발표하였고, 이 앨범으로 그래미에서 7개 부문을 수상하는 대단한 영예를 누리게 된다. 1990년대 중반 이후 팝적인 곡보다는 재즈적 성향이 강한 노래들 또는 초기 스탠다드 팝들을 앨범에 수록하면서 꾸준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노래 : Roy Orbison (로이 오비슨 )
로이 오비슨(Roy "Kelton" Orbison)은 1936년 텍사스주 버논(Vernon)에서 태어났다. 6살 때부터 기타를 연주했던 그는 10대에 ’윙크 웨스터너스(Wink Westerners)’라는 밴드를 결성하여 인기를 얻는 등 어린 시절부터 천재로 두각을 나타냈다. 1956년 그룹명을 텐 킹스(The Ten Kings)로 바꾸고 버디 할리(Buddy Holly)의 프로듀서였던 노만 페티(Norman Pe... 로이 오비슨(Roy "Kelton" Orbison)은 1936년 텍사스주 버논(Vernon)에서 태어났다. 6살 때부터 기타를 연주했던 그는 10대에 ’윙크 웨스터너스(Wink Westerners)’라는 밴드를 결성하여 인기를 얻는 등 어린 시절부터 천재로 두각을 나타냈다. 1956년 그룹명을 텐 킹스(The Ten Kings)로 바꾸고 버디 할리(Buddy Holly)의 프로듀서였던 노만 페티(Norman Petty)와 함께 작업하며 첫 히트곡인 ‘Ooby dooby’를 발표한다. 하지만 1950년대 그의 주요 관심사는 작곡에 있었다. 싱어송라이터로서 인정받고 싶었던 그는 자작곡인 로크롤 넘버 ‘Only the lonely’를 당시 최고의 자리에 올라있었던 엘비스 프레슬리(Elvis Presley)와 에버리 브러더스(Everly Brothers)에게 권했지만 거절을 당하자 “내가 직접 노래하겠다”며 직접 이 곡을 녹음한다. 우수 가득하면서도 고음에서 불안한 듯한 독특한 목소리와 발군의 곡 제조로 록 역사에 길이 남게되는 로이 오비슨의 본격 가수인생은 이렇게 우연한 계기로 시작된다. 흥겨운 후렴 구를 가지고 있었던 ’Only the lonely’는 스피드와 파워가 특징이던 당시의 로큰롤과 분리 선을 그으며 인기를 누린다. 이 곡은 1960년 전미차트 2위에 올랐고 영국 차트에선 정상을 차지했다. 이후 그의 인기는 눈부셨다. 귀에 쏙쏙 들어오는 훌륭한 멜로디와 서정적인 보컬은 여타 음악과는 완전 차별되면서, 1960년대 중반까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히트행진을 이어간다. 1961년 ’Running scared’가 미국차트 정상을 밟았고 1964년에는 ‘Pretty woman’가 비틀매니아에 굴하지 않고 다시 차트정상에 올랐다. 1960년 ‘Blue angel’을 비롯해 1961년 ’Crying(2위)’, 1962년 ‘Dream baby’, 1963년 ‘In dreams’, ‘Mean woman blues’, 1964년 ‘It’s over(9위, 영국1위)’ 등은 모두 톱10에 진입했다. 하지만 그의 인기는 음악 외적인 면 때문에 제동이 걸려야 했다. 1966년 그의 아내 클라우데트(Claudette)가 자신의 오토바이 뒤에서 떨어져 죽는 어처구니없는 사고를 맞았고, 그 슬픔이 잊혀질 새도 없이 이듬해에는 집에 불이 나 두 아들이 화재로 죽게된다. 이 사건들이 일어난 이후 그에게는 ‘비운의 스타’라는 호칭이 계속해서 따라다니게 되다. 큰 슬픔을 여러 차례 겪은 후 활동은 암흑기에 접어들어 싱글 하나 제대로 히트하지 못했고, 라이브 공연도 가지지 않았다. 1960년대 초반을 풍미한 가수로 사라져가던 그였지만 전성기가 오로지 1960년대인 것만은 아니었다. 그의 우수한 곡들은 후대의 많은 아티스트들에 의해 다시 대중들에게 알려지게 되었다. 1976년 그의 컴필레이션 앨범이 영국 차트에서 두각을 나타내었고, 1977년 린다 론스태드(Linda Ronstadt)가 ‘Blue bayou’를 리메이크해 오리지널 뮤지션으로 재조명되는 순간을 맞았다. 결국 1980년대 시작과 함께 재기한다. 그 해 늦은 봄 에밀루 해리스(Emmylou Harris)와 함께 영화 주제곡인 ‘That lovin’ you feelin’ again(55위)’를 부르며 가수활동을 재개하게 됐고 옛 명성에 걸맞게 해리스와 함께 그래미상을 거머쥔다. 오랜 공백을 깨고 재기한 그에게 많은 사람들이 힘을 실어주는데, 1980년 수잔 잭스(Susan Jacks)가 그의 곡 ‘Evergreen’을 리메이크했으며, 1981년 돈 맥클린(Don McLean)이 그의 곡 ’Crying’(88년 K.D. Lang과 듀엣으로 다시 불러 영화 ’하이딩 아웃(Hiding out)’에 삽입되었다.)을 불러 빅히트를 기록했다. 1985년에 데이비드 린치 감독이 영화 < 블루 벨벳 >(Blue velvet)에 ‘In dreams’를 삽입한 것도 로이 오비슨 재림(再臨)을 도왔다.(’In dreams’는 국내에서도 영화 음악으로 사랑 받으며 친숙한 곡으로 자리해있다.) 후배들의 협조로 그는 1987년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추대되는 영광을 누리기에 이른다. 자신감을 회복한 그는 거물들의 프로젝트 그룹인 트래블링 윌베리스(Traveling Wilburys)에 가담하게 된다. 이 그룹의 멤버는 한 명만으로도 영광스러울만한 이름인 조지 해리슨(George Harrison), 밥 딜런(Bob Dylan), 톰 페티(Tom Petty) 그리고 이엘오(ELO)의 리더 제프 린(Jeff Lynne)으로 짜여졌고 데뷔 앨범 < Mystery Girl >에는 엘비스 코스텔로(Elvis Costello), 브루스 스프링스틴(Bruce Springsteen), 유투(U2)가 참여했다. 하지만 ‘비운의 스타’ 로이 오비슨은 자신의 별명대로(?) 이 역작의 완성을 보지 못하고 1988년 갑작스런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나게 된다. < Mystery Girl >은 1989년 그의 사후에 발매되었고, 비운의 스토리와 앨범 참여 면면들의 명성이 겹치면서 그의 앨범 중 가장 성공한 앨범이 된다. 이 가운데 싱글 ‘You got it’은 차트9위에 올라 정확히 25년 만에 톱10을 기록했다. 하지만 사후에도 그의 노래는 영화 삽입과 후배 아티스트들의 리메이크를 통해 부활을 계속했다. 1991년 넘버원 히트곡인 ’Pretty woman’이 동명영화에 삽입되어 오비슨 열풍을 야기했고, 같은 해 그와 함께 노래했던 동료, 후배 가수들이 그와 함께 불렀던 곡들을 모아 < A Black And White Night Live >라는 앨범을 발표했으며, 이 앨범으로 사후에 그래미상 최우수 남성 보컬상을 수상하는 이색적인 사건이 연출되기도 하였다. 또한 영화 보이즈 온더 사이드(Boys on the Side)에 ‘You got it’이 보니 레이트(Bonnie Raitt)에 의해 리메이크 되어 히트했다. 로이 오비슨은 최고의 전성기였던 1950년대 엘비스라는 거대한 존재로 인해 정상의 자리에 오르지 못했고, 1960년대 역시 비틀즈라는 거대한 존재 앞에 고개를 숙여야 했다. 날개를 펴야 할 1970년대는 자신 앞에 닥친 비극으로 좌절해야 했으며, 후배들의 도움으로 화려하게 일어선 1980년대는 어이없는 죽음으로 사라져야 했다. 비운으로 점철된 음악역정이었으나 팝 역사는 그 비운을 환대로 바꿔 기록했다. 끊임없는 역사적 재조명은 시공을 막론하고 그의 노래가 애청되는 길을 터 주었다.
1980년대 후반에 등장한 스웨덴 출신의 혼성 듀오 록시트는 자국인 스웨덴을 넘어 미국과 전지구촌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팝/록그룹이다. 1988년부터 몇 년간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던 이들은 그러나 90년대 중반이후 하향곡선을 긋기 시작했다. 급기야 1999년에는 활동을 잠정 중단해 영원히 팬들의 기억 저편으로 사라지는 듯 했다. 하지만 그로부터 2년이 채 안 된 2001년 록시트는 다시 뭉쳐 새 앨범 < R... 1980년대 후반에 등장한 스웨덴 출신의 혼성 듀오 록시트는 자국인 스웨덴을 넘어 미국과 전지구촌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팝/록그룹이다. 1988년부터 몇 년간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던 이들은 그러나 90년대 중반이후 하향곡선을 긋기 시작했다. 급기야 1999년에는 활동을 잠정 중단해 영원히 팬들의 기억 저편으로 사라지는 듯 했다. 하지만 그로부터 2년이 채 안 된 2001년 록시트는 다시 뭉쳐 새 앨범 < Room Service >를 발표하며 활동을 이어나가고 있다. 1986년 스웨덴에서 결성된 남녀 듀오 록시트는 기타리스트 페르 게슬(Per Gessle)과 보컬리스트 마리에 프레드릭슨(Marie Fredriksson)으로 구성되어 있다. 팝과 록이 결합된 크로스오버 사운드를 들려주는 이들의 음악에는 묘한 ‘이중성’이 있다. 우선 스웨덴 팝 특유의 후크를 갖고 있다. 그러면서도 이들의 사운드는 북구의 서늘한 맛이 난다. 차가우면서도 달콤한 멜로디랄까. 게슬과 프레드릭슨이 번갈아 담당하는 보컬(주로 마리에가 리드보컬을 맡긴 하지만)은 여타의 그룹들과는 상당히 다른 형식이다. 보컬 하모니도 있지만 개별적 느낌이 강하다. 음침한 톤을 지닌 게슬의 보이스와 프레드릭슨의 다소 격양된 보컬도 이채롭다. 여기에 ‘The look’ 같은 강한 록음악과 ‘Listen to your heart’ 같은 로맨틱 발라드가 공존한다. 이처럼 이질적이면서도 친숙한 이들의 매력은 팝 팬들로부터 상당한 반향을 일으켰다. 1988년부터 약 5-6년간 폭발했던 록시트의 활약은 선배그룹 아바에 비견할 만 했다. 특히 1990년 영화 < 귀여운 여인 >에 삽입되었던 발라드 ‘It must have been love’는 10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음악팬들의 애청 곡으로 남아있다. 미국 차트성적만 놓고 보자면 이들은 어쩌면 아바 이상이다. 아바가 세계를 평정했다지만 미국시장에서는 고전을 면치 못했었다. 록시트는 아바가 넘지 못했던 벽, 즉 미국차트를 가볍게 정복했다. 2장의 앨범과 4장의 싱글이 차트1위, 2장의 싱글이 차트2위에 올랐다. 물론 아바의 절대성에는 미치지 못하겠지만 이 놀라운 차트성적은 적어도 ‘포스트 아바 군단’에서는 록시트가 선두주자임을 입증한다. 록시트의 두 멤버는 한 팀으로 활약하지만 각자가 그전부터 쟁쟁한 뮤지션들이었다. 1979년부터 길렌 티더(Gyllene Tider)라는 록그룹을 성공적으로 이끌던 페르 게슬은 뛰어난 작곡능력을 인정받아 아바의 전 멤버 프리다에게 곡을 준 적도 있다. 마리에 프레드릭슨 역시 이미 3장의 솔로앨범을 발표했던 스웨덴에서 손꼽히는 가수였다. 그 때문에 작곡을 서로 분담하며 노래를 각자 따로 부르기도 한다(마치 비틀스의 레논과 매카트니처럼) 1988년 출시된 2집 < Look Sharp! >은 이들 ‘짧은 신화’의 신호탄이었다. 스웨덴에서 이들의 음악에 반한 미국 교환학생이 귀국하면서 그 테이프를 가져와 록시트가 미국에 알려졌다는 에피소드는 유명하다. 라디오 전파에 의해 저명인사가 된 이들은 곧바로 미국 레코드사와 계약하고 앨범을 발매한다. 그 앨범은 차트정상을 밟았고 이때부터 눈부신 히트행진이 이어진다. 발표순으로 ‘The look’이 1위, ‘Dressed for success’가 2위, ‘Listen to your heart’가 다시 1위, 이어 ‘It must have been love’가 또 1위를 기록했다. 이 흥행여파는 다음 앨범까지 이어져서 1991년 발표한 < Joyride > 역시 정상에 올랐다. "존 레논과 함께 곡을 쓰는 일은 ‘즐거운 여행’(joyride)을 하는 것 같았다"라는 폴 매카트니의 말에서 제목을 따왔다는 이 앨범에서는 ‘Joyride’, ‘Fading like a flower’, ‘Spending my time’ 등이 큰사랑을 받았다. 이후 계속 앨범을 냈지만 다소 주춤하던 이들은 1995년 중국 베이징에서 공연하며 건재함을 과시했다. 이는 1986년 조지 마이클의 왬이 공연한 이래 서구 록밴드로서는 최초였다. 한때 활동중단의 위기를 겪기도 했던 이들은 2001년에는 활동재개 앨범 < Room Service >를 발매하며 팬들 곁으로 돌아왔다. 한동안 ‘웅크린 호랑이와 숨은 용’이었던 록시트는 이제 막 잠행을 마쳤다. 비록 예전의 흡인력은 줄어들었을지 몰라도 당당히 팬들 앞에 선 이들, 음악을 놓지 않는 이들이 보기 좋다. 심기일전하여 새 출발하는 이들의 모습에 박수를 보낸다. 이들은 누가 뭐래도 여전히 스웨덴의 음악대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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