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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untry - The Ultimate Country Collection :The Real… Cou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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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D

Country - The Ultimate Country Collection :The Real… Country

[ 3CD ]
Carter Family, Bill Monroe, Johnny Cash, Jim Reeves, Marty Robbins 노래 외 19명 정보 더 보기/감추기 | SonyMusic | 2016년 04월 25일 첫번째 구매리뷰를 남겨주세요. | 판매지수 72 판매지수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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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untry - The Ultimate Country Collection :The Real… Country

품목정보

품목정보
발매일 2016년 04월 25일
시간, 무게, 크기 330g

관련분류

카테고리 분류

음반소개

디스크

CD1
  • 01 Can The Circle Be Unbroken - The Carter Family
  • 02 In The Jailhouse Now - Jimmie Rodgers
  • 03 Foggy Mountain Breakdown - Flatt & Scruggs
  • 04 New San Antonio Rose - Bob Wills and His Texas Playboys
  • 05 Tennessee Blues - Bill Monroe & his Blue Grass Boys
  • 06 Mister Sandman - Chet Atkins
  • 07 The Battle Of New Orleans - Johnny Horton
  • 08 I Walk the Line - Johnny Cash
  • 09 I'll Hold You in My Heart (Till I Can Hold You in My Arms) - Eddy Arnold
  • 10 Rawhide - Frankie Laine with Jimmy Carroll & His Orchestra
  • 11 He'll Have to Go - Jim Reeves
  • 12 Big Iron - Marty Robbins
  • 13 Blue Moon Of Kentucky - Elvis Presley
  • 14 San Antonio Rose - Floyd Cramer
  • 15 Wolverton Mountain - Claude King
  • 16 The End of the World - Skeeter Davis
  • 17 500 Miles Away from Home - Bobby Bare
CD2
  • 01 Flowers On The Wall - The Statler Brothers
  • 02 Stand by Your Man - Tammy Wynette
  • 03 Lay, Lady, Lay - Bob Dylan
  • 04 Ballad of Easy Rider - The Byrds
  • 05 Sunday Mornin' Comin' Down - Kris Kristofferson
  • 06 Rose Garden - Lynn Anderson
  • 07 For the Good Times - Ray Price
  • 08 Kiss an Angel Good Mornin' - Charley Pride
  • 09 I'm Movin' On - Hank Snow
  • 10 Good Hearted Woman - Waylon Jennings & Willie Nelson
  • 11 Delta Dawn - Tanya Tucker
  • 12 I Can Help - Billy Swan
  • 13 The Most Beautiful Girl - Charlie Rich
  • 14 I'm A Ramblin' Man - Waylon Jennings
  • 15 Jolene - Dolly Parton
  • 16 Thank God I'm A Country Boy - John Denver
CD3
  • 01 Take This Job and Shove It - Johnny Paycheck
  • 02 Silver Moon - Michael Nesmith And The First National Band
  • 03 The Devil Went Down to Georgia - The Charlie Daniels Band
  • 04 He Stopped Loving Her Today - George Jones
  • 05 When You're Hot, You're Hot - Jerry Reed
  • 06 Highway 40 Blues - Ricky Skaggs
  • 07 Are the Good Times Really Over - Merle Haggard
  • 08 Love in the First Degree - Alabama
  • 09 Always On My Mind - Willie Nelson
  • 10 No Memories Hangin' Round - Rosanne Cash with Bobby Bare
  • 11 Highwayman - The Highwaymen
  • 12 I Couldn't Leave You If I Tried - Rodney Crowell
  • 13 Killin' Time - Clint Black
  • 14 One Good Well - Don Williams
  • 15 Maybe It Was Memphis - Pam Tillis

아티스트 소개 (24명)

노래 : Bill Monroe (빌 먼로 ,Bill Monroe & His Bluegrass Boys)
컨트리 가수, 만돌린 연주자 컨트리 가수, 만돌린 연주자
자니 캐쉬(Johnny Cash)는 2차 세계대전 직후 컨트리 음악계에서 가장 인상적이고 영향력 있는 활동을 펼친 뮤지션 중 한명이다. 깊고 낭랑한 중음역대의 보컬과 간결한 기타와 함께 그는 기본에 충실하면서도 자신만의 진보적이고 독특한 사운드를 추구했다. 컨트리뮤직의 고향인 내쉬빌사운드(Nashville), 홍키통크(Honky Tonk), 로큰롤(Rock’n’Roll), 그 어떤 것에도 치우치지 않은 자신만의 ... 자니 캐쉬(Johnny Cash)는 2차 세계대전 직후 컨트리 음악계에서 가장 인상적이고 영향력 있는 활동을 펼친 뮤지션 중 한명이다. 깊고 낭랑한 중음역대의 보컬과 간결한 기타와 함께 그는 기본에 충실하면서도 자신만의 진보적이고 독특한 사운드를 추구했다. 컨트리뮤직의 고향인 내쉬빌사운드(Nashville), 홍키통크(Honky Tonk), 로큰롤(Rock’n’Roll), 그 어떤 것에도 치우치지 않은 자신만의 서브장르를 만들고 구축했다. 감성적으로 무디고 정직한 포크(Folk)와 반항적인 로큰롤(Rock’N’Roll) 그리고 염세적인 컨트리(Country)뮤직 사이의 중간지점에서 캐쉬는 로큰롤의 탄생과 반항적 태도 그리고 다분히 록적인 간소함과 솔직한 음악적 발성법을 적절히 융화시켜냈다. 거기에는 깊은 역사적 공감대가 존재했다. 그는 음악적 사명을 다하는 그 날까지 100곡이 넘는 히트싱글을 내며 흑과 백 모두에게 인정받았고, 특히 록의 황제(King of Rock) 엘비스 프레슬리(Elvis Presley)를 비롯해 한 시대를 풍미한 당대의 거목들(칼 퍼킨스, 제리 리 루이스, 척 베리)과 함께, 1950년~60년대를 빛낸 로커빌리(Rockabilly)음악의 대표적 인물 중 하나였다. 아칸사스 출신인 자니 캐쉬는 세 살 때에 다이에스(Dyess)로 이주했다. 열둘 어린나이에 그는 이미 자신의 노래를 쓰기 시작했다. 라디오에서 들은 컨트리 송에 음악적 영감을 얻은 그는 고등학교시절 아칸사스 라디오 방송국(KLCN)에서 노래했다. 대학을 졸업한 1950년에는 자동차회사에 취직해 디트로이트로 거처를 옮겼다. 한국전쟁의 발발과 함께 그는 공군에 입대했다. 공군에 있는 동안 캐쉬는 기타를 구입해 스스로 연주를 익혔다. 그는 ‘Folsom prion blues’를 포함해 본격적으로 곡을 쓰기 시작했다. 캐쉬는 1954년 공군에서 예편해 텍스사 여성 비비안 리베르토(Vivian Leberto)와 결혼했다. 멤피스에서 신혼생활을 시작한 그는 라디오 아나운서과정을 밟았다. 밤에는 기타리스트 루더 퍼킨스와 베이시스트 마샬 그랜트로 구성된 트리오의 일원으로 컨트리음악을 연주했다. 지방라디오방송국(KWEM)에서 무료로 공연을 간간히 겸하면서 안정된 연주의 기틀을 마련하던 트리오는 선 레코드사에 오디션을 볼 기회를 잡게 된다. 마침내 1955년 샘 필립스가 설립한 선 레코드사(Sun Records)에 오디션을 치르게 된 캐쉬는 처음에 자신을 가스펠싱어로 소개했다. 필립스는 자니에게 좀 더 상업적인 것을 요구했고, 그는 ‘Hey Porter’로 곧 필립스를 매료시켰다. 이를 계기로 캐쉬는 자신의 데뷔싱글 ’Cry Cry Cry’/Hey Poter’를 발매하게 된다. 필립스는 싱글레코드에 캐쉬를 “자니”라고 기입했다. 레코드 프로듀서는 또한 퍼킨스와 그랜트를 테네시 투(Tennessee Two)라고 불렀다. 1955년에는 ‘Cry Cry Cry’가 인기를 얻으며 컨트리차트 14위에 올랐다. 그리고 루이지애나 헤이라이드(Louisiana Hayride) 지역에서 거의 1년간 머물렀다. 두 번째 싱글 ’Folsom prison blues’가 1956년 초 컨트리차트 4위의 쾌거를 올렸고, 연이어 ‘I walk the line’이 6주간 1위를 차지함과 더불어 팝 차트에도 탑20위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1957년에도 컨트리싱글차트 13위에 랭크된 ‘Give my love to rose’를 포함해 몇 곡의 히트곡을 내며 히트행진을 이어갔다. 캐쉬는 또한 화려한 장식으로 치장한 타 뮤지션들과 달리 완전히 검정복장으로 그해 그랜드 올 오프리(Grand Ole Opry debut)에 데뷔했다. 이로 인해 그는 ’맨 인 블랙‘이라는 별명을 얻게 된다. 그리고 1957년 11월에 그는 드디어 자신의 처녀작 < Johnny Cash with his hot and blue guitar >를 발매해 음반매장을 강타했다. 1958년에는 10주간 차트 정상을 지킨 ‘Ballad of a teenage queen’을 비롯해 또 다른 넘버원 싱글 ’Guess thing happen that way을 포함해 무려 8곡을 컨트리와 팝 차트 공히 상위권에 올리며 성공가도를 질주했다. 1958년에 그는 가스펠앨범을 녹음하고자 했으나 선(sun)에서는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선 레코드는 또한 캐쉬의 음반로열티 인상에도 반대했다. 두 가지 결정적 연유로 캐쉬는 결국 1958년 콜롬비아레코드사(Columbia Records)로 레이블을 옮겨 그해 말 싱글 ‘All over again’을 내놓았다. 이 곡은 컨트리차트 4위와 팝 차트 38위에 올랐다. 1959년 초에는 콜럼비아에서 발표한 두 번째 싱글 ‘Don’t take your guns to town’ 또한 컨트리차트 정상을 차지했다. 팝 차트에도 32위까지 올라 그의 최대히트곡 중 하나가 된 이 곡과 함께 그해 내내 발매된 싱글들이 앞 다퉈 차트 정상에 등극했다. 캐쉬는 가스펠앨범을 낼 기회도 맞았다. 자니 캐쉬의 찬송가는 1970년대까지 주제앨범연작으로 만들어졌다. 하지만 지칠 줄 모르는 히트행진을 지속하던 그의 쾌속질주에도 제동이 걸리기 시작했다. 1959년에, 그는 1년에 거의 300회가 넘는 공연일정을 소화하는 동안 암페타민(각성제)을 복용하기 시작했다. 1961년까지 그의 약물복용은 날로 증가했다. 그로인한 악영향은 히트 싱글과 앨범 수의 감소세로 나타났다. 1963년에 그는 가족을 떠나 뉴욕으로 이주하기에 이른다. 그러던 중 캐쉬는 술친구 칼 스미스(Carl Smith)의 아내 준 카터(June Carter)에게서 받은 ‘Ring of fire’로 컨트리차트 정상을 마크한다. 이 곡은 7주간 차트정상에 머무르며 팝 차트에도 20위에 올랐다. 1964년에는 ‘Understand your man’가 넘버원 히트를 기록했다. 그러나 약물중독의 어두운 그림자에 둘러싸여있던 캐쉬는 1965년 자신의 기타케이스로 엠페타민을 다량 밀수하다 엘 파소(El Paso)에서 체포되었다. 같은 해 그랜드 올 오프리(Grand Ole Opry)에서의 공연이 거절당했고, 그동안 각광받아온 커리어에도 치명적 타격을 입었다. 1966년에는 아내 비비안이 이혼을 제소했다. 이혼 후 캐쉬는 내쉬빌로 이주했다. 거기에서 그는 칼 스미스와 이혼한 준 카터와 친밀해졌다. 카터의 조력으로 그는 약물중독에서 서서히 벗어날 수 있었다. 그녀는 또한 캐쉬를 기독교신자로 바꿨다. 1968년 초 ’Jackson’과 ‘Rosanna’s going wild’가 탑 텐 히트 기록하면서 재비상의 날개를 펴기 시작한 자니는 공연 중 무대 위에서 운명의 여인 준 카터에게 드라마틱한 청혼을 했고, 1968년 봄 결혼식을 올렸다. 1968년에, 자니 캐쉬는 가장 큰 인기를 끈 앨범 < Johnny Cash at Folsom Prison >을 녹음 발표했다. 교도소 공연실황을 녹음한 이 앨범에서 싱글 커트된 ‘Folsom prison blues’가 팝 차트에 걸쳐 큰 인기를 얻으며 컨트리차트 정상을 재확인했다. 그리고 연말에 레코드는 골드를 기록했다. 이듬해, 그는 후속앨범 < Johnny Cash at San Quentin >을 발표했다. ’A boy named sue’는 컨트리차트 1위와 팝 차트 2위에 오르며 히트싱글이 되었다. 캐쉬는 1969년 밥 딜런(Bob Dylan)의 컨트리앨범 < Nashville Skyline >에 게스트로 참여했다. 딜런은 ABC 가수 텔레비전프로그램 ‘자니 캐쉬 쇼’에 출연해 그에 화답했다. 자니 캐쉬쇼는 1969년과 71년, 2년에 걸쳐 방영되었다. 캐쉬는 1970년대 들어 제2의 전성기를 누린다. 자신의 텔레비전쇼와 더불어, 그는 백악관에서 리차드 닉슨(Richard Nixon)을 위해 공연한 것을 비롯해, (Gunfight)에서는 명배우 커크 더글라스(Kirk Douglas)와 함께 공연했으며, 존 윌리엄스(John Williams)와 보스턴 팝스 오케스트라와 함께 공연했다. 다큐멘터리영화의 테마로도 주목받은 그는 ’Sunday morning coming down’과 ‘Flesh and blood’이 넘버 원 히트를 기록하며 변함없는 인기를 이어갔다. 1971년을 통해, 자니 캐쉬는 차트 3위를 기록한 ’Man in black’을 포함해 히트행진을 지속했다. 캐쉬와 카터 모두 1970년대 초 토착미국인과 죄수들의 시민권을 위한 캠페인에 참여하며 사회적 활동을 넓혀갔다. 가끔은 빌리 그래험(Billy Graham)과 함께 하기도 했다. 1970년대 중반, 캐쉬의 차트 등장횟수는 줄어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는 마이너히트를 이어갔다. 그리고 1976년 ‘One piece at a time’(컨트리차트1위)를 비롯해 웨일론 제닝스(Waylon Jennings)와 듀엣으로 노래한 ’There ain’t no good chain gang’(컨트리차트 2위)와 ‘(Ghost)riders in the sky’와 같은 빅 히트싱글을 간간이 냈다. 1975년 캐쉬는 자서전 < Man in black >을 출간했다. 1980년에 그는 가장 젊은 나이에 컨트리 명예의 전당에 올랐다. 그러나 1980년대에는 눈에 띄는 히트싱글을 내지 못하면서 고전했다. 콜럼비아 레코드사와도 마찰을 빚었다. 자니 캐쉬(Johnny Cash)는 1982년 선(Sun)출신의 로커빌리 명인 칼 퍼킨스(Carl Perkins), 제리 리 루이스(Jerry Lee Lewis)와 함께 팀을 이뤄 레코드 < The Survivors >를 발표했고 괜찮은 성과를 올렸다. 캐쉬, 웨일론 제닝스, 윌리 넬슨(Willie Nelson) 그리고 크리스 크리스토퍼슨(Kris Kristofferson)이 동참한 밴드 The highwaymen은 1985년 그들의 첫 앨범을 발표했다. 이 앨범 또한 적당한 성공을 거뒀다. 다음 해, 캐쉬와 콜럼비아사의 계약이 만료됐다. 그리고 그는 머큐리 내쉬빌(Mercury Nashville)과 계약했다. 새로운 레이블은 그러나 그의 성공을 입증해주지 못했고, 스타일의 방향을 둘러싼 논쟁을 해야 했다. 게다가 컨트리 라디오방송 프로는 더욱 현대적인 아티스트에게 호감을 가지기 시작했다. 캐쉬는 곧 자신이 차트에서 밀려날 것을 알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콘서트를 통해 대중들과의 소통을 계속해 나갔다. 하이웨이멘(Highwaymen)은 1992년 두 번째 앨범을 녹음했다. 그리고 머큐리에서 낸 캐쉬의 어떤 레코드보다 상업적으로 더 큰 성공을 거뒀다. 그 즈음 머큐리와의 계약기간이 끝난 그는 1993년에 아메리칸 레코드사(American Records)에 새 둥지를 틀었다. 새 레이블에서 낸 첫 앨범 < American Recordings >는 설립자 릭 루빈(Rick Rubin)이 프로듀싱을 맡았다. 이 앨범의 전 수록곡은 어쿠스틱한 노래들이었다. 이 앨범은 대박을 터뜨리지는 못했으나, 그의 커리어를 되살리는 기폭제가 됨과 동시에 그를 록 중심의 젊은 음악팬들과 호흡할 수 있게 했다. 1995년에 하이웨이멘은 그들의 세 번째 앨범 < The Road Goes on Forever >를 발표했다. 이듬해 캐쉬는 탐 페티& 하트브레이커스가 피처링으로 참여한 그의 두 번째 앨범 < Unchained >를 발표했다. 그리고 2000년 봄 캐쉬는 자신의 생애를 되돌아 본 회고조의 앨범을 사랑, 신, 살인 세장으로 묶어 선보였다. 그 다음해에는 새로운 스튜디오앨범 < American Ⅲ: Solitary Man >이 뒤이어 발매되었다. 1990년대와 2000년에 들어 자니 캐쉬는 건강문제로 힘든 나날을 보냈지만 루빈과의 레코드작업을 지속해나갔다. 그들은 네 번째 합작품 < American Ⅳ: The man comes around >을 2002년 후반에 발매했다. 이듬해에는 나인 인치 네일스(Nine Inch Nails)의 ‘Hurt’를 커버한 뮤직비디오가 기대이상의 갈채를 받으며 미디어의 주목을 받았다. 또한 MTV뮤직비디오시상식에서 ’올해의 비디오‘에 후보로 지명돼 그 인기는 절정에 달했다. 수많은 화제를 뿌리며 한창 분위기에 젖어있을 때, 운명적 음악인생의 동반자(아내) 준 카터 캐쉬가 심장수술 경과 악화로 2003년 5월 15일 그의 곁을 떠나갔다. 4개월 후 자니도 당뇨 합병증으로 테네시 내쉬빌에서 숨을 거뒀다. 그의 나이 71세였다.
리브스(Jim Reeves)는 부드럽고 편안한 목소리로 ‘50~60년대를 주름 잡았던 스탠더드 팝과 내쉬빌 사운드의 대가로 컨트리와 팝의 크로스오버인 ‘컨트리 팝’ 음악계에서 특히 빛을 발했던 가수이다. 신사적인 풍모로 '젠틀맨(Gentleman)’으로도 불리던 그는 1924년 8월 20일 텍사스에서 9남매의 막내로 태어났다. 고교시절에 투수로서 명성을 날려 장학금을 받고서 ‘42년에 텍사스 주립대에 입학... 리브스(Jim Reeves)는 부드럽고 편안한 목소리로 ‘50~60년대를 주름 잡았던 스탠더드 팝과 내쉬빌 사운드의 대가로 컨트리와 팝의 크로스오버인 ‘컨트리 팝’ 음악계에서 특히 빛을 발했던 가수이다. 신사적인 풍모로 '젠틀맨(Gentleman)’으로도 불리던 그는 1924년 8월 20일 텍사스에서 9남매의 막내로 태어났다.

고교시절에 투수로서 명성을 날려 장학금을 받고서 ‘42년에 텍사스 주립대에 입학을 했다. 대학에서 일급투수로 활약하다가 센트루이스의 프로야구팀 카디날스의 스카우트에게 발탁되어 마이너 리그에서 3년간 선수생활을 했다. 그러나 연습도중 발목부상으로 인해 야구를 그만두게 된 후, 루이지애나 주의 라디오 방송국에서 아나운서겸 DJ로 재출발하게 된다. ‘40년대 후반에 서부 스윙(Western swing) 밴드인 문 물리컨(Moon Mullican)의 멤버가 되었으며, 물리컨 스타일의 “Each Beat of my Heart” 등의 레코드를 취입하였다. 가수로서의 전기는 ‘52년에 ‘루이지애나 헤이라이드(Hayride) 쇼’의 진행자로 일하던 중에 유명가수 슬리피 라비프(Sleepy LaBeef)가 펑크를 내자 땜빵 가수로 무대에 서게 되면서 기회를 얻게 된다. ‘49년도에 첫 레코드를 취입하고 ‘52년에 애보트 레코드사와 계약하면서 본격적인 가수 활동에 전념하였으나, 그 돌파구가 된 것은 ‘53년에 "Mexican Joe" 를 싱글로 발표하면서 부터이다. 초기에 그의 목소리는 전형적인 컨트리 웨스턴 가수처럼 고음으로 노래를 했다. 이후 쳇 애킨스(Chet Atkins)를 만나게 되면서 도움을 받아 창법을 바꾸어 ‘57년에 "Four Walls"을 발표한다. 그리고 ‘59년에 발표한 “He'll Have To Go”가 ‘60년에 엄청난 히트를 하면서 정상에 올랐고 ‘50~60년대를 화려하게 주름잡는 세계적인 스타가 되었다. 그러나 자신의 41 번째 생일을 20여일 앞둔 ‘64년 7월 31일, 자신이 직접 단발 경비행기를 조종하여 테네시주 내시빌로 돌아가던 도중, 폭풍우에 의한 기상악화로 비행기가 추락하였다. 불행하게도 인기절정의 시기에 아까운 생을 마감하였다.
노래 : Elvis Presley (엘비스 프레슬리)
얼마 전 폴 매카트니가 50년대 초기 로큰롤 역사에 헌정한 앨범 < Run Devil Run > 속지에는 이런 글이 들어있다. ‘로큰롤이 첫 반세기로 차츰 다가가고 있다. 멤피스의 선(Sun) 스튜디오로 한 트럭 운전사가 어슬렁거리며 들어가 혁명의 끈을 풀어놓은 지 거의 50년이다. 스타에 정신이 팔린 수만의 10대들처럼 그가 처음 엘비스를 들었을 때 기회는 리버풀시 알레톤의 제임스 폴 매카트니에게도 던져졌다.’... 얼마 전 폴 매카트니가 50년대 초기 로큰롤 역사에 헌정한 앨범 < Run Devil Run > 속지에는 이런 글이 들어있다. ‘로큰롤이 첫 반세기로 차츰 다가가고 있다. 멤피스의 선(Sun) 스튜디오로 한 트럭 운전사가 어슬렁거리며 들어가 혁명의 끈을 풀어놓은 지 거의 50년이다. 스타에 정신이 팔린 수만의 10대들처럼 그가 처음 엘비스를 들었을 때 기회는 리버풀시 알레톤의 제임스 폴 매카트니에게도 던져졌다.’ 오늘날 폴과 비틀스를 있게 한, 단 한사람의 영향을 꼽는다면 위 해설처럼 단연 트럭운전사출신 엘비스 프레슬리다. 존 레논은 이를 결정적 한마디로 축약한다. “엘비스가 나타날 때까지 내게 영향을 끼친 것은 아무 것도 없다(Nothing affects me until Elvis)." 존과 폴이 만나서 처음 마음먹은 것은 사실 엘비스의 음악을 더 강하게 표출해내는 것일 뿐이었다. 그들을 통해서 로큰롤의 진정한 역사는 ‘시대의 풍운아’ 엘비스 프레슬리와 함께 개막되었다는 사실이 다시금 확인된다. 물론 역사가에 따라 로큰롤의 효시를 행크 발라드(Hank Ballard)나 빌 헤일리(Bill Haley) 또는 척 베리(Chuck Berry)로 꼽기도 한다. ‘Work with me, Annie’ ‘Crazy man crazy’ ‘Maybellene’ 등과 같은 이들의 대표곡들이 시기적으로 먼저 구동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때 다수 대중들은 여전히 로큰롤의 존재를 알지 못했고 엘비스가 나와서야 비로소 그것을 인식하기 시작했다. 빌보드지의 결론. ‘1953년 록음악이 시작되었다고 하나 정작 차트나 방송에서 그 시대를 풍미하기 시작한 것은 1956년 엘비스 프레슬리의 싱글 ‘Heartbreak hotel’이 연속 8주 넘버원에 머물면서부터였다.’ 초기 로큰롤은 척 베리나 버디 할리와 같은 탁월한 ‘작가’를 소유했다. 리틀 리처드나 제리 리 루이스라는 출중한 ‘배우’ 그리고 조 터너, 보 디들리와 같은 ‘음악감독’들도 있었다. 그러나 당시 로큰롤은 강풍을 휘몰아칠 역동적 ‘스타’가 필요했다. 그가 엘비스였다. 그 시대는 흑인의 리듬 앤 블루스를 소화해줄 백인가수를 요구했고 엘비스는 백인대중들로부터 ‘저 친구는 백인이면서 왜 검둥이노래를 부르는 거야?’라는 의아함을 일으킬 만큼 탁월한 흑인감성의 보유자였다. 이러한 시의성은 그러나 일반의 인식처럼 56년 RCA 소속의 엘비스로부터 비롯된 것은 아니었고 이미 54년 선 레코드사의 엘비스로서 확립된 것이었다. 샘 필립스 사장의 전설적인 선 시절에 엘비스는 ‘That`s all right’, ‘Blue moon of Kentucky’ 와 ‘Mystery train’ 등을 부르면서 컨트리와 R&B를 크로스오버화한 신종의 로커빌리를 선보이면서 벌써 ‘웨스턴 밥의 왕’으로 불렸다. 이 때 이미 순회공연에서 팝 음악사상 초유의 센세이션을 일으키고 있었다. 『뉴스위크』는 ‘금세기 백년간의 스타’ 특집기사를 다루며 그의 등장을 ‘20세기의 사건’ 가운데 하나로 꼽았다. 당시 엘비스 백업 밴드에서 드럼을 쳤던 D.J. 폰타나는 54년 상황을 다음처럼 술회한다. “엘비스 무대가 끝나고 나면 노래를 따라해 줄 관객들은 다 빠져버려 아무도 없었지요. 애들은 백 스테이지에서 그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곤 했습니다. 내 생각에 그 애들은 아마 우리 연주는 듣지도 않았을 겁니다. 그들이 원한 것은 오로지 ‘처음으로 흔드는 가수’ 엘비스를 보고자 하는 것이었죠.” 로컬 무대에서 전국 네트워크 TV로 진출하면서 마침내 ‘엘비스마니아’는 폭발했다. 미국의 3대 전국 공중파 방송 ABC CBS NBC의 체제가 정립된 것도 바로 이 때였다. 그는 텔레비전시대의 영웅으로서 ‘라디오스타를 죽이는’ 새로운 미디어의 문화적 아이콘으로 떠올랐다. (타미와 지미) 도시 브라더스의 CBS < 스테이지 쇼 >, NBC의 < 밀턴 벌 쇼 >와 < 스티브 알렌 쇼 > 그리고 저 유명한 CBS의 < 에드 셜리번 쇼 >에 잇따라 출연하면서 벌써 음악의 영상시대를 주도했다. 음악이 음반으로만 소구하던 시대는 ‘섹시 가이’ 엘비스의 출현으로 끝났다. ‘보는 음악’ 시대를 주도한 최초의 인물은 다른 누구도 아닌 엘비스였다. 스탠다드 팝의 파수꾼 프랭크 시내트라도 자기 TV 쇼의 떨어지는 시청률을 참다못해 ‘음악의 공적(公敵)’이라고 성토해마지 않았던 엘비스를 출연시켜야 했다. TV 뿐만 아니라 영화 최초의 로큰롤 스타도 엘비스 프레슬리였다. < 러브 미 텐더 > < 러빙 유 > < G.I. 블루스 > < 블루 하와이 > 등 31편의 영화에 출연하면서 그는 관객들에게 로큰롤의 열정과 록 가수가 부르는 발라드의 호소력을 제공했다. 음반 텔레비전 그리고 영화라는 ‘삼국통일’에 성공하며 천하를 제패한 것이다. 그는 모든 것이 아래로 보일 정도의 막강한 부와 명예를 거머쥐었다. 77년 사망하면서 그의 캐리어가 마침표를 찍을 때까지 그는 무려 2억5천만장의 앨범을 팔았다. 이 기록에 가장 접근한 인물은 비틀스가 아닌 2억장의 빙 크로스비(캐롤 ‘White Christmas’가 결정적이다)며 프랭크 시내트라는 겨우 4천만장에 불과했다. ‘1인 기업’ 엘비스는 막대한 돈으로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색깔인 핑크를 포함한 갖가지 칼라의 자동차 캐딜락을 구입했고 멤피스에 4만 달러 짜리 목장 그리고 10만 달러로 저택 그레이스랜드를 샀다. 전용 비행기는 물론 텔레비전 세트 그리고 첨단기계들도 마련했다. 물론 지금이야 흔해 빠진 것들이지만 당시에는 특히 엘비스와 같은 하층계급 청년들은 감히 꿈도 꿀 수 없는 부의 상징들이었다. 동시대 그리고 후배가수들이 일개가수에서 기업으로 융기한 엘비스를 통해 신분상승과 스타덤 획득 욕구를 품는 것은 당연했다. 그들은 엘비스처럼 슈퍼스타이면서 동시에 부자가 되고 싶어했다. 버디 할리는 엘비스를 빅 스타로서 존경했고 밥 딜런의 음악동기는 엘비스보다 큰(bigger than Elvis) 가수가 되는 것이었다. 톰 존스는 아예 영국의 제록스판 엘비스였다. 엘비스처럼 구레나룻을 길렀던 브루스 스프링스틴은 직접 그를 만나기 위해 그레이스랜드 담을 넘다가 제지당했고 그룹 퀸은 엘비스를 안중에 두고 50년대 로큰롤풍의 ‘Crazy little thing called love’를 만들었다(로저 테일러의 증언 “처음으로 텔레캐스터와 부기 앰프를 쓴 다소 빈약한 사운드였다. 분명 엘비스를 염두에 두고 만든 곡이었다.”). 마크 알몬드(Mark Almond)의 명쾌한 한마디를 들어보자. “그는 왕이다. 그밖에 다른 코멘트는 일체 필요없다!” 하지만 60년 전역 이후 엘비스는 달라졌다. 매니저였던 톰 파커 퇴역대령의 입김이 강해지면서 음악방향이 빗나간 것이었다. 예의 로큰롤 넘버와는 거리가 먼 It`s now or never나 Surrender와 같은 감상적인 이탈리아 민요를 영역해 불렀다. 변화(아니면 변신?)의 징조는 프랭크 시내트라 쇼에 출연했을 때 뚜렷이 나타났다. 이 쇼에서 엘비스는 스탠다드 가수의 상징인 턱시도 정장을 했으며 호스트 프랭크 시내트라와 서로의 대표적 히트곡인 ‘Witchcraft’와 ‘Love me tender’를 바꿔 불렀다. 이 시점을 계기로 엘비스가 로큰롤을 버리고 스탠더드 팝 가수로 돌아서 청춘진영을 배신했다는 주장이 고개를 비집는다. 명백한 훼절이라고 단정해도 선뜻 반대논리를 펴기 어렵다. 그러나 친(親)엘비스 측은 그로써 그가 로큰롤 가수에서 ‘국민가수’로 승격하는 의미 있는 업적을 남기게 됐다고 반박한다. 로큰롤만의 논리로 음악을 풀고 엘비스를 규정하지 말자는 것이다. 어떻게 가치판단을 하느냐는 것은 관련자의 이데올로기나 각 시대의 성격에 따를 수밖에 없다. 변절이든 성숙이든 이 점만은 분명하다. 엘비스의 보컬이 초기의 로큰롤가수로 한정되었을 때 과연 후대에의 보컬 영향력을 소지할 수 있었겠느냐는 것이다. 그의 가창력은 음역, 에너지, 통제력, 피치 등 모든 면에서 압권으로 평가되어왔다. 상대적으로 덜 조명되었지만 ‘멀티칼라’인 그의 보이스에는 자니 레이의 급격한 변색, 두왑 그룹인 잉크스파츠(Inkspots) 빌 케니의 테너, 딘 마틴의 솜사탕 그리고 마리오 란자의 풍미가 동거했다. 그러면서도 로이 오비슨과 같은 유니크한 개성을 놓치지 않았다. 그가 스탠더드 발라드를 소화함으로 해서 우리들은 ‘Are you lonesome tonight’, ‘Suspicion’, ‘In the ghetto’, ‘The wonder of you’, ‘Fool’, ‘My boy’ 등의 팝 고전을 들을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은 명백한 역사의 유산이다. 그가 없었다면 성악가나 스탠더드 가수가 부르는 발라드만을 접했을 것이고 로큰롤 싱어가 선사하는 발라드의 진미(珍味)를 영원히 맛보지 못했을 것이다. 이와 함께 로큰롤과 스탠더드의 공존공영 가능성을 그처럼 실감나게 시범한 가수도 없다는 사실을 간과해선 안 될 것이다. 이미 흑인감성의 전달로 로큰롤이 ‘흑백의 퓨전’임을 목소리 하나로 입증한 그는 이어서 역시 매직 보컬로 로큰롤과 스탠더드의 제휴를 일궈내는 업적을 남겼다. 어쩌면 우리가 70년대 록과 메탈 분야에서 형식을 확립한 이른바 ‘록발라드’라는 것도 그 원조는 엘비스일지도 모른다. 엘비스는 목소리를 통해 대중의 공감대를 전달한 몇 안 되는 가수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건조한 보이스와는 거리가 먼, ‘이끼가 잔뜩 낀’ 풍부한 목소리였다. 아마 신나는 로큰롤 ‘Burning love’ 한 곡으로도 충분히 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이것이 후대 음악팬들이 그의 노래를 듣고 더러 ‘느끼하다’는 느낌을 받는 이유일 것이다. 후반기의 노래 가운데는 그런 요소를 풍기는 곡이 있었다. 하지만 엘비스와 동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은 거기서 느끼함이 아닌 되레 ‘풍성한 감성’을 수혈 받곤 한다. 미트 로프(Meat Loaf)는 말한다. “엘비스는 노래하는 것 무엇이든지 감정적으로 가사로 스피릿을 감상자들에게 전할 수 있었던 사람이다.” 그는 스스로 희구했던 명성과 부를 얻고 난 뒤 아쉽게도 그것들의 노예가 되는 비극적인 위인이기도 했다. 아무 데도 나갈 수가 없었고 편안히 사람을 만나 대화를 나누는 것도 불가능했다. 60년대나 70년대 로커였다면 이런 사실상의 ‘수감생활’을 극복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런 ‘생래적 반항아’가 아니었다. 스타덤의 고독과 소외에 차츰 무너져간 그의 말년을 잘 나타내주는 일화는 무수히 많다. 70년대 들어서 조울증이 불거진 그는 때로 격렬해져 텔레비전 세트나 당구대, 주크박스, 자동차 등 가장집기를 부수는 발작증세를 보이기도 했다. 언젠가 D.J. 폰타나와 그의 아내 앞에서 엘비스는 자신의 감정상태를 이렇게 토로했다. “당신들은 운이 좋은 겁니다. 난 엘비스인게 너무 지겨워요! 뭘 해야될 지를 모르겠어요. 뭔가 딴 일을 했으면 제발 한이 없겠어요.” 고고음악의 대명사인 자니 리버스의 해석. “엘비스는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었지요. 그래야만 했을 겁니다. 그가 할 수 있는 그 밖의 다른 일이란 없었지요.” 엘비스만큼 화려한 명성과 처절한 고독이라는 양극단을 겪은(아니면 겪기로 강제된) 인물도 없을 것이다. 그야말로 영욕의 교차요, 희비의 쌍곡선이다. 그래서 그를 통해 우리는 슈퍼스타덤의 빛 외에 냉혹함과 잔인성이라는 그림자를 동시 확인한다. 그의 사인은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공식적으로는 심장마비로 발표되었지만 사후 마약중독 비만증 그리고 자살 등 정황에 근거한 갖가지 설들이 난무했다. 이는 그의 후반기 삶이 얼마나 철저히 비공개로 갇혀 있었는지를 반증한다. 스스로 창조한 혁명에 쓰러진 순종파 가수일 수 있지만 그렇다고 그런 비평에 의해 그의 역사적 위상이 훼손되는 일은 없다. 여전히 그는 만인이 공감하는 ‘킹 오브 로큰롤’이며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금세기 최고 가수’다. 비틀스가 그 없이는 불가능했다는 한마디로 모든 엘비스의 가치는 입증된다. 세월이 흐르면서 오류로 더러 지적되지만 비평가 고(故) 레스터 뱅스(Lester Bangs)의 엘비스 예찬은 되새길 가치가 있다. “우리는 엘비스에게 해준 것과 같은 동의를 앞으로 어떤 누구에게도 해주지 않을 것이다!”
노래 : Skeeter Davis (스키터 데이비스)
노래 : Tammy Wynette (태미 와이네트)
노래 : Bob Dylan (밥 딜런 ,Robert Allen Zimmerman)
밥 딜런의 발자취는 거대하다. 그 이름은 마치 선대의 성인(聖人)처럼 하나의 위엄으로 우리를 억누른다. 딜런과 그의 음악을 피해 가는 것은 ‘록 역사에 대한 접근’을 포기하는 것과 같다. 그를 아는 것은 납세와 같은 신성한 의무에 다름 아니다. 미국의 음악계와 학계에서 ‘딜런 읽기’는 실제로 교양필수 과정으로 인식되어 있다. 그는 록의 40년 역사에서 엘비스 프레슬리(Elvis Presley), 비틀스(The B... 밥 딜런의 발자취는 거대하다. 그 이름은 마치 선대의 성인(聖人)처럼 하나의 위엄으로 우리를 억누른다. 딜런과 그의 음악을 피해 가는 것은 ‘록 역사에 대한 접근’을 포기하는 것과 같다. 그를 아는 것은 납세와 같은 신성한 의무에 다름 아니다. 미국의 음악계와 학계에서 ‘딜런 읽기’는 실제로 교양필수 과정으로 인식되어 있다. 그는 록의 40년 역사에서 엘비스 프레슬리(Elvis Presley), 비틀스(The Beatles) 그리고 롤링 스톤즈(Rolling Stones)와 함께 최정상의 위치를 점한다. 그러나 이들 ‘전설의 빅 4’ 가운데에서도 딜런이 남긴 궤적은 차별화 아닌 특화(特化)되어 역사를 장식한다.

얼핏 그의 위상은 ‘실적주의’로 따질 때 매우 허약해 보인다. 엘비스, 비틀스, 롤링 스톤즈는 그 화려한 전설에 걸맞게 무수한 히트곡을 쏟아냈다. 넘버 원 히트곡만 치더라도 엘비스는 18곡(통산 2위), 비틀스는 20곡(1위), 스톤즈는 8곡(11위)이나 된다. 하지만 딜런은 그 흔한 차트 1위곡 하나가 없다. ‘Like a rolling stone’과 ‘Rainy day woman #12 & 35’ 등 두 곡이 2위에 오른 것이 고작이다. 차트 톱 10을 기록한 곡을 다 합쳐봐야 4곡에 불과할 뿐이다. 그에게 대중성이란 어휘는 어울리지 않는다. 상업적이란 말과는 아예 인연이 없다. 이렇듯 실적이 미미한 데도 록의 역사는 마치 신주 모시듯 그를 전설적 존재로 떠받드는 이유는 무엇일까? 비틀스, 스톤즈, 엘비스는 차트 정복 외에도 또 다른 공통점이 있다. 비록 그 가지는 다를지언정 ‘록의 스타일 확립’ 이라는 몸체는 유사하다는 것이다.

비틀스는 록의 예술적 지반을 확대했고, 스톤즈는 록에 헌신하며 형식미를 완성했고, 엘비스는 록의 정체성을 부여했다고들 한다. 분명히 딜런도 몸체에 자리한다. 깃털은 결코 아니다. 그러나 타(他) 3인의 몸체가 외양이라면 그는 ‘내면’ 이라고 할 수 있다. 바로 노랫말이요, 메시지다. 왜 이것이 중요한가? 음악은 사운드와 형식만으로 이미 메시지가 아닌가? 하지만 그것은 그렇게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로큰롤이 폭발하여 확산되던 시점인 1950년대, 즉 엘비스가 활약하던 당시에 로큰롤은 메시지가 없었다. 1960년대 들어서 비틀스가 미국을 급습해 록의 르네상스를 일궈내고 있던 때까지도 록은 의미있는 가사와 격리된 상태였다. 그래서 의식계층으로부터 멸시를 당했다. 그 때 밥 딜런이 있었다. 비틀스는 누구보다 먼저 딜런의 위력을 절감했다. 그의 포크 사운드와 메시지를 귀담아 듣고 그것을 자신들의 음악에 적극 수용한다. 1965년말 < Rubber Soul > 앨범의 수록곡인 ‘In my life’, ‘Girl’, ‘Norwegian wood’ 등에서 ‘톤 다운’ 을 드러내며 메시지를 잠복시킨 것은 전적으로 딜런의 영향 때문이었다.

밥 딜런은 실로 대중 음악의 지성사(知性史)를 이룬다. 타임(Time)지의 제이 칵스는 1989년 기사에서 다음과 같이 묻는다. “존 업다이크의 소설과 밥 딜런의 앨범 가운데 어느 것이 미국인들의 삶에 보다 자극을 주었는가? 존 업다이크 쪽에 표를 던진 사람이라면 이 기사를 여기까지 읽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의 가사는 그러나 때론 메시지의 파악이 어려운 ‘난해한 현대시’ 와 같다. 밑줄 긋고 열심히 분석해도 도대체 명쾌하지가 않다. 1960년대 중반 < Another side of Bob Dylan >, < Bring it all black home >, < Highway 61 revisited >가 연속 발표되었을 때, 미국 각 대학의 영문과에 ‘밥 딜런 시분석’ 강좌 개설이 유행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우리의 팝팬들에게 딜런이 상대적으로 소원한 이유가 여기에 있을 것이다. 미국인들에게도 이 정도인데 영어의 벽에 막혀 있는 우리가 어찌 그를 쉽게 수용할 수 있었겠는가. 때문인지 음반마저 제대로 소개되지 않았다. 초기곡으로 알려진 것은 그나마 메시지가 확연한 ‘Blowin’ in the wind’정도였다. 하지만 그것도 1970년대 중반의 금지곡 태풍으로 반전(反戰) 노래라는 낙인이 찍히면서 방송과 판매가 금지되었다. 그 외 우리 팝 인구에 회자된 노래로 ‘One more cup of coffee’나 ‘Knockin’ on heaven’s door’가 있다. 그러나 그의 대표곡 반열에도 오르지 못하는 ‘One more cup of coffee’가 통한 것은 단지 낭만적 제목과 함께 친숙한 선율 때문이었을 뿐, 딜런의 음악 세계에 대한 천착의 결과물은 전혀 아니었다. ‘Knockin’ on heaven’s door’ 인기의 영예도 실은 건스 앤 로지스가 더 누렸다.

극소수의 곡을 제외하고 밥 딜런은 우리에게 인기가 없었다. 비틀스, 스톤즈, 엘비스에 비한다면 엄청난 ‘부당 대우’였다. 언어 장벽과 무관한 음악 스타일 측면에서도 우리의 ‘홀대’ 는 마찬가지였다. 멜로디가 그럴싸한 곡이 있더라도 풍기는 내음이 지극히 ‘미국적’ 이었기에 우리의 청취 감성은 딜런을 꺼리곤 했다. 그의 음악 세계라 할 포크, 컨트리, 블루스는 미국 전통과 긴밀한 함수 관계를 지닌다. 선율과 사운드의 영국적인 맛에 길들여진 우리로서는 그의 음악에 잠기기가 쉽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 사이에 우린 어느덧 딜런과 크게 멀어져버렸다. 록의 흐름을 거슬러 올라가다가 꼭 딜런에서 막힌다. 신세대 가운데 더러는 우리의 팝 수용 문화에서 딜런 공백이 가져온 취약성을 맹렬히 질타하기도 한다. 우리 기준에서의 ‘팝 음악 여과’는 바람직하고 필요하다. 그러나 의역은 정확한 직역이 기초돼야 올바르다. 미국의 해석을 전제한 뒤라야 우리식 필터링의 의의가 배가된다.

그 직역의 첫 번째 대상이 바로 밥 딜런이다. 밥 딜런이 미국의 현대 음악사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이유는 그의 음악몸체가 곧 시대와 세대의 흐름을 떠안고 있기 때문이다. 딜런의 음악이 변화하는 과정과 그것을 있게 한 배경, 또한 그것을 주도해간 그의 자세는 ‘음악외적 환경’과 긴밀한 관계가 있다. 먼저 포크 록(Folk-Rock)이다. 그가 1960년대 초반 저항적인 모던 포크로 베이비 붐 세대를 견인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없다. 통기타만으로 연주되는 단순한 구조이지만 그것의 포획력은 비틀스가 사정권에 들어올 만큼 대단한 것이었다. 비틀스가 베이비 붐 세대를 발현시켰다면 그는 그들의 의식화를 유도했다. 그러나 딜런은 케네디의 피살에 자극받으면서 스스로 ‘위기감’ 을 불어넣는다. 이미 비틀스가 세대의 청취 볼륨을 증폭시킨 마당에 포크의 음량 가지고 과연 세대를 관통할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1971년 그는 이렇게 술회한 바 있다. “그들(비틀스)은 아무도 하지 않은 것을 하고 있었다. 그들의 코드는 정말 도에 지나친 것이었지만 하모니가 그것을 타당하게끔 했다. 그러나 맹세하건데 난 정말 그들에게 빠졌다. 모두들 그들이 어린 10대를 위한 광대이며 곧 사라질 것이라고들 했다. 그러나 내겐 명확했다. 그들이 지속력을 갖고 있다는 사실이. 난 그들이 음악이 가야할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내 머리 속에는 비틀스가 전부였다.” 그는 일렉트릭 기타를 잡아야 했다. 그것이 포크 록이었다. 포크의 순정파들로부터 배신자라는 질타는 불 보듯 뻔했다. 그가 뉴포트 포크 페스티벌에서 알 쿠퍼(Al Kooper), 마이크 블룸필드(Mike Boomfield)가 참여한 버터필드 블루스 밴드(Butterfield Blues Band)와 함께 전기 기타 연주를 했을 때 관중들은 “이건 포크 공연이야 나가!”라고 야유하며 돌과 계란 세례를 퍼부었다. 무대에서 내쫓긴 그는 통기타를 들고 되돌아왔지만 의미심장한 ‘It’s all over now’, ‘Baby blue’를 부르며 포크 관객들에게 아듀를 고했다. 껄끄러운 통과의례를 거친 뒤 밥 딜런의 포크 록은 ’Like a rolling stone’의 빅히트와 함께 만개했다. 이젠 막을 자도 없어졌다. 포크 록은 당시에 막대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존 레논과 밥 딜런을 결합해야 한다’는 것을 인식한 그룹 버즈(Byrds)는 ‘Mr. Tambourine man’으로 인기 가도를 질주했다. 그러나 그 곡은 딜런의 작품이었다.

버즈 뿐만 아니라 당시 포크 록계열 뮤지션치고 딜런의 곡을 손대보지 않은 사람은 없었다. 단숨에 포크 록은 1960년대 록의 주류로 부상했다. 1960년대 중.후반을 강타한 싸이키델릭 록(제퍼슨 에어플레인, 그레이트풀 데드)도 실상 포크 록에 영향받은 흐름이었다. 그럼 어째서 포크 록은 1960년대 청춘들을 사로잡아 그들의 의식을 대변할 수 있었을까? 비틀스가 딜런에게 배우고, 딜런이 비틀스로부터 영감을 얻은 ‘포크와 록의 결합’ 은 시대성 견인을 가능케 한 절묘한 무브먼트였다. 록은 생태적으로 거리의 청춘에 의해 확립된 ‘하위문화적 표현’이다. 따라서 하이 클래스나 인텔리겐차와는 일정한 거리를 둔다. 또한 포크는 저항성을 견지하는 민중 음악이지만 음악의 주체나 주소비자층은 학생과 지식인 세력이다. 성질상 엇비슷하면서도 걸어온 길이나 ‘계급성’은 엄연히 다른 것이다. 밥 딜런이 포크 오리지널로부터 급격히 퇴각하여 록으로 전향한 것은 단지 추세의 편승이 아닌 완전함을 향한 ‘하층문화의 긴급 수혈’로 보인다. 이를테면 ‘위’의 고매한 문제의식과 ‘아래’의 근원적 반항을 한고리로 엮는 것이다. 그러면서 저항 영역의 지반 확대와 수요자의 확충을 기할 가능성은 올라가게 된다.

지식인만이 아닌 1960년대 젊은이들의 ‘계층포괄적 무브먼트’ 는 포크 록과 이 점에 있어 밀접한 관계를 맺는다. 1960년대 중후반을 물들인 ‘히피보헤미안’ 물결도 딜런과 떼어낼 수 없는 흐름. 1960년대 록 역사에서 두 번째로 중요한 부분이다. ‘Like a rolling stone’은 포크 지식인의 소리라기보다 보헤미안적 정서의 노출로 파악해야 한다. 당시 딜런은 가치의 상대성을 신뢰하고 제도에 흡수되기룰 거부하는 이른바 비트(Beat) 사상에 빠져 있었다. 그가 진보적 시인인 알렌 긴스버그(Allen Ginsberg)와 교류하며 ‘개인 혁명’에 골똘해 있을 때가 바로 이 무렵이다. 비트는 이후 히피의 융기에 주요 인자가 되는데, 1960년대 중반 딜런의 음악을 가로지르는 것이 바로 이 ‘히피 보헤미안 정서’라 할 수 있다. 스스로 록 세계로 옮아가고 방랑적 지향을 설파한 것은 기존과 기성의 틀 깨기에 목말라 있던 베이비 붐 세대들에게 영도자가 제공한 ‘산교육’과 다름없었다. 따라서 밥 딜런은 그에게 등을 돌린 포크 근본주의자들의 수보다 휠씬 더 많은 록팬을 거뜬히 확보하게 된다. 음악적으로 딜런의 창작성이 이 때만큼 가공의 위력을 떨친 적도 없다. < Highway 61 Revisited >와 < Blonde On Blonde > 앨범은 포크의 엄숙주의에서 해방되어 록과의 결합으로 자유분방한 이미지를 포획한 결과였다. 그리고 그 음악은 ‘남을 위해’ 이데올로기에 봉사한 결과가 아니라 자신의 즐거움이 가져온 산물이기도 했다. 그가 포크의 프로테스트로부터 이탈한 것은 바로 ‘자유’와 등식화되는 ‘예술성’을 찾기 위한 노력이었다.

그는 저항성 대신 예술성을 얻었다. 개인적 경사도 겹쳤다. 사적으로 사라 로운즈와의 결혼은 그의 창작력 한층 북돋아주었으며 그 충만한 행복감은 그대로 < Blonde On Blonde > 앨범에 나타났다. 이 앨범의 탁월한 질감은 상당부분 사라와의 결혼이 낳은 것이라는 게 평자들의 일치된 시각이다. 나중 사라와의 파경 또한 그에게 또 하나의 명반 < Blood On The Tracks >를 안겨준다. 히피의 낭만적인 집단주의와 곧바로 이어진 이피(Yippie)의 전투성이 극에 달할 무렵 그가 뉴욕의 외곽 빅 핑크(Big Pink) 지하실에서 한가로이 더 밴드(The Band)의 멤버들과 자유 세션을 즐기고 있었다는 사실은 아이러니컬하다. 불의의 오토바이 사고가 가져온 행보이기도 했지만 그가 의도적으로 은둔을 택한 것은 분명했다. 세상이 소란함으로 가득할 때 그는 정반대로 정적을 취한 것이다, 그는 자신이 물꼬를 터준 미국 사회의 격랑이 결국 아무런 소득도 없을 것으로 예측했는지도 모른다. 세대의 공동체 지향은 지극히 ‘비이성적’으로 비춰졌을 테고 오히려 그는 그럴수록 자신에게 돌아와 근본을 탐구하는 것이 올바른 행위라고 여겼던 것 같다. 그러한 심저(心底)가 < John wesley Harding >과 < Nashiville Skyline >의 골간에 자리한다. 이 작품들에서 그는 ‘뜻밖에’ 재래식 컨트리 음악을 선보였다. 두 앨범은 모두 내쉬빌에서 녹음되었고 < Nashiville Skyline >의 경우 딜런은 컨트리 음악의 거성 자니 캐시(Johnny Cash)와 듀오로 ‘Girl from the north country’에서 다정히 호흡을 맞추기도 했다. 이 앨범에서 톱 10 히트곡 ‘Lay lady lay’가 나왔다. 이 곡을 비롯해 대부분의 수록곡에서 딜런의 보컬은 예의 날카로움이 거세된 채 한결 부드러워졌고 가사도 접근이 비교적 용이해지는 등 멜로딕한 무드가 전체를 지배했다. 다시 세상은 소용돌이에서 호수의 조용함으로 돌아왔다. 그것이 1970년대 초반의 분위기였다. 딜런이 씨앗을 뿌린 ‘컨트리 록’ 은 1970년대 내내 주요 장르 중 하나로 맹위를 떨쳤다.

딜런은 언제나 흐름의 주역이었다. 나중 음반화된 더 밴드와의 세션 앨범 < Basement Tapes >가 록 역사에서 ‘특혜’를 받는 것도 이러한 배경 속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1970년대 들어서 그는 ‘대중적’ 관점에서 뿌리에 대한 천착에 박차를 가했다. 예전에 그는 ‘좋은 사람만 따르면’ 된다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사람이 많이 따를수록 좋다’는 쪽으로 입장을 정리했다. 그가 1970년 < Self Portrait > 앨범에서 ‘Moon river’를 포함한 팝 스탠다드 넘버들을 노래한 것은 이러한 사고와 맥락이 닿아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대부분의 비평가들이 눈을 흘겼다. 레코드 월드(Record World)지는 이 앨범을 두고 “혁명은 끝났다. 밥 딜런이 ‘미스터 존스’에게 ‘Blue moon’을 불러주고 있다”며 혹평했다.(미스터 존스는 딜런이 < Highway 61 Revisited >의 ‘Ballad of thin man’에서 “여기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아, 존스 씨?”라고 했던 가공의 인물로 ‘제도권 인사’를 상징한다.) 빌보드 차트3위에 오르는 성공을 거두었지만 이처럼 평단의 이해를 구하는 데는 실패했다. 그러나 < Self Portrait >앨범을 상업적 표현으로 볼 수는 없다. 비판의 칼을 휘두르는 비평가들도 그렇게 생각하진 않는다. 근본을 탐구하는 방법론의 연장선에서 파악하는 것이 보다 정확하다. 딜런이 1970년대 후반부에 기독교에 귀의한 것도 비슷한 문맥으로 풀어야 할 것이다. 사실 신(神)에의 의지가 엿보인 < Show Train Coming >, < Saved >, < Shot Of Love > 등 3장의 종교풍 음반은 ‘사고의 깊이’가 두드러졌지만 ‘변신’이라는 부정적 의미에 가치가 함몰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1970년대 딜런을 ‘혼미의 거듭’으로 규정한다. 표면적으로는 그렇다. 그러나 그것을 뒤집어보면 그는 자신의 사고와 감정에 충실했다는 얘기가 된다. 이것이야말로 아티스트의 본령이다. 밥 딜런은 언제나 음악을 통해 세상과 삶의 근본 원리를 탐구하고자 했다.

1980년대의 밥 딜런은 1970년대의 습기를 벗고 ‘열기’를 회복한다. 정치적 시각도 이입한 < Infidels >, < Empire Burlesque > 그리고 1989년에 나온 < Oh Mercy >는 이전의 앨범들과 명백한 분리선을 긋는다. 날카로운 보컬은 오히려 1960년대의 모습에 더 가깝다. 그는 1980년대 중반 라이브 에이드(Live Aid), 아파르트헤이트에 반대하는 아티스트의 모임(Sun City) 등 일련의 자선행사에 얼굴을 내밀어 저항 전선에 복귀했다. 한 무대에서 그는 U2의 보노(Bono)와 함께 ‘Blowin’ in the wind’를 부르기도 했다. 딜런의 1980년대 앨범들에는 당시의 보수적이고 위압적 풍토를 거부하는 저항성이 숨쉰다. 그는 시대의 주류 한복판에는 없었지만 ‘시대의 공기’와 늘 함께 호흡했다. 그 공기를 어떤 때는 앞장 서 조성하고 어떤 때는 그것을 피해갔다. 밥 딜런의 한 면만을 바라보게 되면 그의 진면목을 알 수 없다. 그가 서 있던 ‘양쪽’ 자리를 다 관찰해야만 그 ‘드라마틱한 록 역사의 굴곡’ 을 읽을 수 있다. 록의 역사는 실로 위와 아래, 진보와 보수, 주류와 비주류, 기존과 대안이 끊임없이 부침을 되풀이 해왔다. 밥 딜런이 밟아온 길은 그것의 축소판이었다. 그러나 어떤 시점에서라도 - 가령 프로테스트의 깃발을 울렸을 때나, 대중성에 기웃거렸을 때나 - 딜런이 주변의 압박에 수동적으로 임한 적은 없다. 남이 시켜서 일렉트릭의 세계로 떠밀려 간 것이 아니었고, 의도적으로 신비를 축적하기 위해 은둔했던 것도 아니다. 그의 터전은 언제나 자신의 의지가 지배하는 세계였다. 비평가들이 밥 딜런을 전설로 숭앙하는 것은 그가 대중 음악계에서는 보기 드문 ‘음악의 주체’이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이야말로 음악인의 최고 영예인 ‘아티스트’란 소리를 들어 마땅했다. 그는 록에 언어를 불어넣었다. 포크와 컨트리를 록의 영역으로 끌어들였다. 시대와 맞서기도 했고 자신의 예술성에 천착하기도 했다. 그러한 업적과 성과의 편린들이 모여 그의 ‘광활한 아티스트의 세계를 축조하고 있다. 밥 딜런은 역사의 수혜와 위협 속에서 ‘인간’을 살려냈다. 음악인으로서 인간의 몸체는 다름 아닌 자유일 것이다. 밥 딜런의 위대함이 바로 여기에 있다.
록 밴드 록 밴드
노래 : Kris Kristofferson (크리스 크리스토퍼슨)
1990년대 초반 국내에서 컨트리 곡들의 인기는 대단했다.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100만장의 판매고를 보인 < 보디가드 > 사운드트랙에 수록된 휘트니 휴스턴(Whitney Houston)의 ‘I will always love you’를 비롯해 4인조 보컬 그룹 올 포 원(All 4 One)의 ‘I swear’, ‘I can love you like that’ 등의 원곡은 모두 컨트리 아티스트의 노래였다. ‘I wi... 1990년대 초반 국내에서 컨트리 곡들의 인기는 대단했다.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100만장의 판매고를 보인 < 보디가드 > 사운드트랙에 수록된 휘트니 휴스턴(Whitney Houston)의 ‘I will always love you’를 비롯해 4인조 보컬 그룹 올 포 원(All 4 One)의 ‘I swear’, ‘I can love you like that’ 등의 원곡은 모두 컨트리 아티스트의 노래였다. ‘I will always love you’는 ‘9 to 5''로 유명한 돌리 파튼(Dolly Parton)이 1974년에 발표한 노래이고, ‘I swear’와 ‘I can love you like that’은 남성 컨트리 싱어 존 마이클 몽고메리(John Michael Montgomery)의 원곡을 커버한 것이다. 1946년 1월 19일 컨트리 음악의 심장부 테네시 주에서 출생한 돌리 파튼은 작사, 작곡은 물론 영화 배우와 TV 프로그램 사회자로도 활동하는 컨트리 계의 만능 엔터테이너이자 실력자다. 1960년대 컨트리 싱어 포터 와고너(Porter Wagoner)와 결혼 반지를 주고받은 그녀는 1960년대 후반에 발표한 음반들을 통해 차세대 컨트리 음악의 기대주로 인정받기 시작했고, 30여 년이 지난 현재는 컨트리 음악계의 거목으로 대우 받고 있다. 그러나 이 은발의 컨트리 여성 싱어에 대한 국내 팬들의 관심은 1980년대 영화 < 나인 투 파이브 >가 개봉하면서 드높아졌다. 영화의 주연도 맡고 주제가도 불러 제작비를 절감하는데 혁혁한 공을 세운 그녀는 이 곡으로 컨트리 차트는 물론 생애 처음으로 싱글 차트에서도 정상을 차지하면서 미국을 넘어 전 세계적인 만능 연예인으로 급부상했다. 이후 영화 출연에 적극적이었던 돌리는 버트 레이놀즈(Burt Reynolds), 실베스터 스탤론(Sylvester Stallone) 등과 함께 스크린에 모습을 보였다. 그렇다고 그녀는 자신의 존재 가치를 부여하는 음악을 소홀히 하진 않았다. 거의 매년 새로운 음반을 발표했고, 1983년에는 비지스(Bee Gees)의 배리 깁(Barry Gibb)이 작곡한 ‘Islands in the stream’을 케니 로저스(Kenny Rogers)와 듀엣으로 취입해 다시 한번 싱글 차트를 탈환했다. 이 곡에서 케니 로저스가 돌리 파튼의 보컬에 눌린 듯한 인상을 지울 수 없을 정도로 그녀의 보컬이나 곡의 소화력은 압권이었다. 그러나 밀물로 들어왔으면 썰물로 나가는 것이 세상의 이치. 1980년대 초반 이렇듯 화려한 시절을 보냈지만 1980년대 중반에는 그녀의 음악 인생 중 가장 우울한 시기를 겪게 된다. 더 이상 컨트리 팝은 컨트리 팬들은 물론 팝 팬들에게도 어필하지 못했다. 그 타개책으로 이 영특한 가수가 선택한 것은 린다 론스태드(Linda Ronstadt), 에밀루 해리스(Emmylou Harris)와 함께 정통 컨트리로 회귀한 음반 < Trio >였다. 그 당시 랜디 트래비스(Randy Travis)를 중심으로 신 전통주의 컨트리가 개화하려던 시점을 정확히 포착한 이 앨범으로 그녀는 다시 한번 멋지게 부활했다. 돌리 레베카 파튼(Dolly Rebecca Parton-본명)은 현재까지 새로운 앨범을 제작하고 구상하면서 컨트리 음악계의 지존으로 남아 있다. Hello Dolly!
1970년대 복고적인 ‘미국의 소리’ ‘32세의 그는 미국의 가장 대중적인 가수’라고 < 뉴스 위크 >지가 1976년 공언한 대로 존 덴버는 전성기 시절 내내 ‘미국의 목소리’(The voice of America)로 통했다. 그의 청량제 같은 노래들과 수더분한 ‘촌놈’ 외모는 곧 1970년대 중반의 ‘미국 그 자체’였다. 그 무렵 미국은 존 덴버와 같은 존재를 필요로 했다. 1974년과 1975년 미국인들은 워... 1970년대 복고적인 ‘미국의 소리’ ‘32세의 그는 미국의 가장 대중적인 가수’라고 < 뉴스 위크 >지가 1976년 공언한 대로 존 덴버는 전성기 시절 내내 ‘미국의 목소리’(The voice of America)로 통했다. 그의 청량제 같은 노래들과 수더분한 ‘촌놈’ 외모는 곧 1970년대 중반의 ‘미국 그 자체’였다. 그 무렵 미국은 존 덴버와 같은 존재를 필요로 했다. 1974년과 1975년 미국인들은 워터게이트와 월남전 패색이라는 최대의 국가적 위기를 맞고 있었다. 워싱턴 정가는 갈피를 못 잡고 휘청거렸고 국론은 ‘고도의 민주주의 나라’라는 위상을 무색케 할만큼 완전 분열되었다. 미국인들은 허탈했고 피곤했으며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누군가가 나서서 정체성의 위기에 시달리고 있는 그들에게 ‘건강한 미국’을 얘기해 주고 공허한 그들의 마음을 위무해 주어야 했다. 그가 가수라면 좋았고 나아가 ‘쉽고 깨끗한’ 노래를 들려준다면 더 좋았다. 거기에 존 덴버는 딱 알맞은 구세주와 같은 인물이었다. 명반 < 궤적의 피(Blood On The Tracks) >를 내놓은 밥 딜런이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실의에 빠진 미국인들을 달래 주기란 힘들었다. 그는 이름만 들어도 격동의 1960년대가 떠오르는, 골치 아픈 존재였다. 그러나 존 덴버는 편했다. 그에게 근심거리란 없어 보였고, 다시 세상은 살 만한 곳인 듯 했다. 그 자신도 1970년대 중반의 상황이 자신을 수면 위로 부상 시켜준 원천임을 알았다. 그는 < 세븐틴 >지와의 인터뷰에서 “사람들이여, 내가 세상이 왜 행복한 곳인가를 노래할 때 내게 그대의 귀를 주오”라고 말했다. “난 미국에 대해, 가족에 대해, 삶의 축복에 대해 노래한다. 난 내가 알고 있는 것에 대해 노래부른다.” 당시 미국인들은 그의 노래 제목만 들어도 즐거워했다. ‘내 어깨 위의 햇살이 나를 행복하게해(Sunshine on my shoulder)’ ‘나를 고향으로, 시골길로 보내주오(Take me home, country roads)’ ‘나의 달콤한 여인(My sweet lady)’ ‘내가 촌놈인 것을 신께 감사드려요(Thank god I’m a country boy)’ 등.. 참으로 낙천적이고 전원적이며 명랑했다. 이 곡들은 모두 싱글 차트에서 1, 2위를 기록했다. ‘차라리 카우보이가 되고 싶다(I’d rather be a cowboy)’고 하고 ‘집에 다시 돌아온(Back home again)’ 것을 찬양하고 산과 바다, 시골이 무대인 그의 노래가 거부감을 줄 리 없었다. 그는 실제로 산을 사랑한 컨트리 보이였다. 공군 조종사의 아들로(1943년생) 존 헨리 듀센도르프가 본명인 그는 로스앤젤레스에 가서 산이 많은 도시 덴버의 이름을 따 개명했다. 또 유랑과 속세의 삶을 살다가 27세에 로키산에 올라가 새로운 인생을 발견한 사람이었다. 그는 아무리 바빠도 매년 시간을 내 콜로라도의 전원에 있는 아스펜 집에 묵곤 했다. 그는 ‘콜로라도의 정신’이었다. 주지사 존 밴더후프는 그에게 ‘콜로라도의 계관 시인’이란 칭호를 부여했다. 그는 1970년대 중반 닉슨과 포드 대통령 교체 이후 미국 사회에 자리 잡은 전통적이고 복고적인 가치를 대변했다. 해맑은 컨트리 음악을 들고 나온 그가 환영받은 것은 당시의 보수 바람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그가 미국인이었고 미국의 정서를 견인한 주역이었기에 1974년과 1975년에 그의 인기는 경쟁자인 영국 로커 엘튼 존을 추월했다. 팝적인 컨트리 록은 강렬한 하드 록과 복잡한 프로그레시브 록이 대세였다. 그러나 워터게이트와 월남전 패망으로 시끄럽고 혼잡스런 사람들에게 이러한 음악들은 귀에 들려 오지 않았다. 존 덴버는 정반대의 ‘컨트리 팝’으로 록의 퇴각을 강제했다. 록 진영은 갑작스런 그의 인기 행진에 놀랐다. 록 비평가들이 볼 때 덴버 노래의 낙천적 분위기는 건강한 정서의 반영이 아니라 단순한 ‘도피적 심리’에 불과했다. 혼탁한 세상을 잊고 편하게 살자는 심산이 아니냐는 것이었다. 그를 악평하는 사람들은 때문에 그를 ‘팝음악의 극단적 낙천주의자’라고 일컫는가 하면 ‘록의 미키 마우스’라고 내리깔곤 했다. 그러나 이러한 그의 노래가 대중들을 사로잡은 ‘어처구니없는’ 실상에 록 언론의 주도층은 궁지에 빠진 것이 사실이었다. 1974년 여름 전미 차트 정상에 오른 ‘애니의 노래(Annie’s song)’만 해도 그렇다. 삶의 축복을 노래하는 그의 지향을 축약한 이 노래는 이후 수년간 결혼식 때 축가로 가장 많이 연주되었다. 이 곡은 영국 차트에서도 1위를 차지했으며 4년 뒤에는 아일랜드 플루트 주자 제임스 골웨이(James Galway)가 연주곡으로 리메이크해 3위에 랭크 시켰다. 널리 알려졌다시피 이 곡은 그가 캠퍼스 커플로 1967년 결혼한 아내 앤 마텔(Ann Martell)을 위해 쓴 곡이었다. 스키 리프트에서 10분만에 썼다는 이 곡은 노랫말 가운데 애니(앤의 애칭)라는 말을 집어넣지 않은 것이 오히려 이 노래가 애송되는 이점으로 작용했다. 이 곡은 < 피플 >지로부터 그가 쓴 가장 훌륭한 러브 발라드라는 평판을 얻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1980년대 들어서 존 덴버는 이 축복의 찬가를 부를 수 없게 되었다. 영원할 것만 같던 아내 앤 마텔과의 관계가 삐꺽거리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두 사람의 관계는 1979년에 이미 궤도를 이탈했다. 잉꼬나 다름없던 둘은 덴버의 엄청난 성공에 불안과 위기를 느낀 앤이 남편과 ‘의사 소통이 중단됨을 느끼면서’ 악화되었다. 이혼 수속을 밟은 두 사람은 마침내 1983년 갈라서고 말았다. 존은 이 무렵을 이렇게 회고한다. “애니와의 이혼은 내 생애 가장 뼈아픈 순간 중의 하나였다. 우리는 16년간 부부였다. 결혼 15주년 기념일에 우리는 조용히 앉아 ‘우리 잘 안되고 있어’라고 얘기했다. 난 그녀에게 ‘당신이 내게 원하는 것을 난 당신에게 줄 수가 없어. 그러니 다른데 눈을 돌리는게 나을 거야’라고 말했다” 이혼을 맞아 그는 자신의 미래에 대해서도 슬쩍 입장을 내비쳤다. “난 다시 사랑에 빠지고 싶지만 그렇게 될 거라고 확신하지 않는다. 난 너무도 바빠 한 여인을 내 인생에서 가질 수 없다. 내 마음속의 마지막 일은 관계를 지속할 여인을 찾는 것이다. 그러니 하여튼 그리 쉽지 않을 것 같다. 여성에 대해 정말 배워야 할 것이 많다” 당시 언론은 잉꼬 부부였던 존과 애니의 이혼에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한결같이 ‘아니 존 덴버가 이혼이라니...’라는 반응이었다. 아마도 그가 ‘애니의 노래’만 부르지 않았어도 충격은 훨씬 덜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충격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더욱 커다란 쇼크가 대기하고 있었다. 그는 1988년 8월 ‘너무 바빠서 여자를 사귈 수 없다’는 말과 달리 호주 출신의 늘씬한 가수 겸 배우인 카산드라 델라니(Cassandra Delaney)와 재혼해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당시 28살인 델라니는 45세였던 존 덴버보다 무려 17살 연하였다. 그는 지난 1990년 한국을 찾아 힐튼호텔에서 공연을 가진 바 있다. 콘서트에 앞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그는 “‘애니의 노래’의 주인공인 애니와 왜 헤어지게 됐는가”라는 한 기자의 질문에 당혹스런 표정을 지으며 “사람은 좋아질 때도 싫어질 때도 있다”고 말끝을 흐렸다. 휴식도 없이 내리 10곡 이상을 부르는 등 환상적인 호흡과 성량을 자랑한 이 내한 무대에서 그는 끝내 최고의 레퍼토리인 ‘애니의 노래’는 부르지 않았다. 하지만 두 번째 아내인 델라니와의 부부 생활도 순탄하진 못했다. 4년간의 짧은 인연을 끝내고 두 사람은 1992년 이혼 법정에 들어서야 했다. 이 과정에서 불미스런 일이 발생, 그는 다시 언론의 도마 위에 올랐다. ‘환경운동가’ 또 ‘마음씨 좋은 컨트리 보이’라는 명성에 어울리지 않게 그가 음주 운전 사고를 일으켜 구속된 것이었다. 1993년 8월의 일이었다. 그는 델라니와 이혼을 확정짓고 난 뒤 축하하는 뜻에서(아니 이런!) 과음하게 됐다고 진술했다. 50만 달러의 벌금과 자선 콘서트를 개최하라는 징계를 받고 풀려나긴 했지만 이 사건은 그의 이미지에 단단히 먹칠을 했다. 일이 안되다 보니 그가 1976년에 설립한 윈드스타 파운데이션(Windstar Foundation)도 갈수록 재정이 악화돼 규모와 인원을 줄이는 조치를 취해야만 했다. 그러나 존의 고행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그는 음주 운전 사건 1년 뒤인 1994년 8월 21일 자정, 다시 만취상태에서 1963년형 포르셰가 가로수를 들이받는 사고를 일으켰다. 이날 사고도 델라니와 이혼 별거 수당을 협의하는 과정에서 ‘뜻대로 잘 안 풀려’ 그만 홧김에 음주한 것 때문이었다. 존 덴버는 ‘캐시(카산드라)가 나의 인생을 지옥으로 만들었다’고 불평했다. 음주 운전 사고 재범으로 그는 유죄판결이 날 경우 2년 간 옥살이를 하게 될 위기에 몰렸지만 명성에 힘입어 다행히 그 같은 화는 면했다. 하지만 이는 ‘만능 연예인’으로서의 그의 제기를 불능으로 만드는 치명타 역할을 했다. 환경 운동에 나서고 기아 문제와 복지 부문, 그리고 반전 활동에 아낌없이 자신을 바쳤던, 모든 찬란한 순간이 빛을 잃어 가는 순간이었다. 1976년 이후 그가 인기 차트 톱 10에 랭크시킨 곡은 없었다. 1982년 플라시도 도밍고와 ‘아마도 사랑은(Perhaps love)’을 함께 부르며 건재를 과시했지만 주류에서는 이미 떨어져 있었다. 그는 1984년 < 로스앤젤레스 타임스 >지의 테니스 헌트와의 인터뷰에서 “난 노력을 계속할 것이다. 난 요즘 젊은이들이 살 레코드를 만들 수 있다”고 장담했다. 그러나 그의 신념은 실현되지 않았다. 그의 가수로서의 시대는 소실점을 향했고 4년 연속 그래미상 시상식 사회를 본 엔터테이너로서의 시대도 거의 마침표를 찍었다. 그는 1970년대 중반 미국 상황이 불러낸 가수일 뿐이었다. 사회기류가 바뀌면서 그에 대한 ‘효용가치’는 뚝 떨어졌다. 그가 가수보다 ‘예능인’에 비중을 둔 것도 외부 환경 변화에 따른 적응의 방편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는 우리나라에서도 엄청난 인기를 누렸다. 위에 나열한 곡 외에도 ‘오늘(Today)’ ‘정크(Junk)’를 비롯해 무수한 곡들이 라디오 전파를 탔다. 그러나 그의 노래가 지금은 나오지 않는다. 아마도 그는 우리의 1970년대 팝송 청취가 압도적으로 ‘백인 팝(White Pop)’에 젖어 있음을 상징하는 인물일 것이다. 그는 언젠가 ‘내가 낙천적인 이유는 내가 할 때마다 모든 것이 새롭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제 전혀 그럴 것 같지 않다.
노래 : George Jones (조지 존스,George Glenn Jones)
4인조 밴드 알라바마(Alabama)는 ‘컨트리 계의 비틀즈’였다. 1980년대 개막과 함께 시작된 이들의 성공은 컨트리 음악계에서 가장 눈부신 ‘성공 시대’를 의미한다. 1980년대에만 27곡의 컨트리 차트 1위 곡을 쏟아 냈으며, 아메리칸 뮤직 어워드나 그래미, 컨트리 뮤직 어워드 등은 알라바마를 위한 시상식이었다. 발표하는 앨범마다 수 백만 장의 판매고를 올렸으며, 순회 공연은 인산인해를 이뤘다. 1980년... 4인조 밴드 알라바마(Alabama)는 ‘컨트리 계의 비틀즈’였다. 1980년대 개막과 함께 시작된 이들의 성공은 컨트리 음악계에서 가장 눈부신 ‘성공 시대’를 의미한다. 1980년대에만 27곡의 컨트리 차트 1위 곡을 쏟아 냈으며, 아메리칸 뮤직 어워드나 그래미, 컨트리 뮤직 어워드 등은 알라바마를 위한 시상식이었다. 발표하는 앨범마다 수 백만 장의 판매고를 올렸으며, 순회 공연은 인산인해를 이뤘다. 1980년대는 알라바마를 위한 10년이었다. 최소한 컨트리 음악에 한해서는 그랬다. 이 4인조가 이렇게 크나큰 인기와 명성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이글스(Eagle) 이후 그들의 대를 이을 만한 컨트리록 밴드의 부재가 가장 큰 이유였으며, 또한 당시의 대세였던 컨트리팝에 대한 카운터 펀치였다. 이들은 정통 록밴드의 형식을 따랐지만 작곡 문법이나 보컬 하모니 등은 컨트리에서 따왔다. 랜디 오웬(Randy Owen-보컬, 기타)과 테디 젠트리(Teddy Gentry-베이스), 그리고 제프 쿡(Jeff Cook-키보드, 기타, 피들)이 서로 친척 사이인 이들은 1977년 알라바마가 공식적으로 출발하기 이전인 1960년대부터 함께 모여 지역 밴드 생활을 했다. 마지막에 합류한 드러머 마크 헌든(Mark Herndon)은 영입파였는데 이들의 음악이 록적으로 들리는 것은 그가 ‘알라바마’에 오기 전엔 록밴드에서 드럼 스틱을 쥐고 있었기 때문이다. 1982년에 발표된 3번째 정규 앨범 < Mountain Music >의 타이틀곡은 자국인 미국은 말할 것도 없고 정통 컨트리의 불모지인 우리나라의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들릴 정도로 컨트리의 영역을 넓힌 최상의 앨범이었으며 1년 후에 공개된 < The Closer You Get >에서 당시의 대세였던 신시사이저를 사용해 음악적 표현력을 넓히기도 했다. 가스 브룩스(Garth Brooks)나 샤니아 트웨인(Shania Twain)처럼 알라바마의 인기에 견줄 만한 솔로 가수들은 있지만 아직까지 이들의 명성에 버금가는 밴드는 출현하지 못하고 있다. 앞으로도 힘들 것이다.
노래 : Willie Nelson (윌리 넬슨,Willie Hugh Nelson)
컨트리, 락 기타 연주자, 싱어송 라이터 컨트리, 락 기타 연주자, 싱어송 라이터
노래 : The Highwaymen (더 하이웨이멘)
컨트리 기타, 바이올린, 노래, 작곡 컨트리 기타, 바이올린, 노래, 작곡
편곡 : Charlie Daniels Band (찰리 다니엘스 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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