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YES24 카테고리 리스트

YES24 유틸메뉴

Global YES24안내보기

Global YES24는?

K-POP/K-Drama 관련상품(음반,도서,DVD)을
영문/중문 으로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Korean wave shopping mall, sell the
K-POP/K-Drama (CD,DVD,Blu-ray,Book) We aceept PayPal/UnionPay/Alipay
and support English/Chinese Language service

English

作为出售正规 K-POP/K-Drama 相关(CD,图书,DVD) 韩流商品的网站, 支持 中文/英文 等海外结账方式

中文

검색


어깨배너

9월 상품권
9월 혜택모음
북클러버
주말엔 보너스
인스타툰
1/6

빠른분야찾기


윙배너

마우스를 올려주세요.

마케팅 텍스트 배너

웹진채널예스


2CELLOS (2첼로스) - In2ition 투첼로스 2집
미리듣기 공유하기 예스24 음반 판매 수량은
차트와 차트 집계에 반영됩니다. 한터차트/가온차트 집계 반영 안내
수입
CD

2CELLOS (2첼로스) - In2ition 투첼로스 2집

Sting, Elton John, Karl Jenkins, Paul Gilbert, Stephin Merritt 작곡 외 4명 정보 더 보기/감추기 | Sony Classical / Sony Classical | 2016년 03월 16일 첫번째 구매리뷰를 남겨주세요. | 판매지수 36 판매지수란?
상품 가격정보
판매가 22,100원
할인가 17,900 (19% 할인)
YES포인트
추가혜택쿠폰 및 사은품(1종)
추가혜택쿠폰 쿠폰받기
  • 주문금액대별 할인쿠폰
카드혜택
결제혜택
카드할인 정보
카카오페이 카카오페이 3천원 즉시할인 (5만원 이상 결제시, 1회) 자세히 보기
 모바일팝 모바일 5% 즉시할인 (모바일 결제시) 자세히 보기
네이버페이 네이버페이 1% 적립 (전체결제) 자세히 보기
페이코 페이코 포인트결제 2% 적립 (신규고객 4,500원 할인) 자세히 보기
할인/적립 카드 더보기
구매 시 참고사항
구매 시 참고사항

판매중| 한정판매

수량
배송비 : 2,000원 해당 상품과 도서 포함하여 만원
이상 구매 시 무료배송 배송비 안내
  • 국내배송만 가능
1/4
광고 AD

2CELLOS (2첼로스) - In2ition 투첼로스 2집

품목정보

품목정보
발매일 2016년 03월 16일
제조국 EU

관련분류

음반소개

구성

디스크

Disc
선택듣기

상세 이미지

상세 이미지 1

아티스트 소개 (9명)

영국 출신의 팝 아티스트 스팅은 절대 현실의 삶에 안주하지 않는 인물이다. 20년 넘게 계속된 그의 음악세계는 ‘도전’과 ‘실험’이라는 두 단어로 압축된다. 그는 스타덤에 오르면서 겪는 매너리즘에 한번도 빠지지 않고 발표하는 앨범마다 팬들에게 신선함과 새로움을 선사했다. 그는 뉴 밀레니엄 특수(特需)에 발맞춰 1999년에 발표한 앨범 < Brand New Day >에서도 컨트리와 랩을 과감히 수용하여 젊은 피 못... 영국 출신의 팝 아티스트 스팅은 절대 현실의 삶에 안주하지 않는 인물이다. 20년 넘게 계속된 그의 음악세계는 ‘도전’과 ‘실험’이라는 두 단어로 압축된다. 그는 스타덤에 오르면서 겪는 매너리즘에 한번도 빠지지 않고 발표하는 앨범마다 팬들에게 신선함과 새로움을 선사했다. 그는 뉴 밀레니엄 특수(特需)에 발맞춰 1999년에 발표한 앨범 < Brand New Day >에서도 컨트리와 랩을 과감히 수용하여 젊은 피 못지 않은 독창력을 선보였다. 이 앨범으로 스팅은 올해 그래미 시상식에서 ‘최고의 팝 가수’와 ‘최고의 팝 앨범’ 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안기도 했다. 이처럼 음악에 녹아있는 스팅의 탐구적인 철학은 장외로까지 연결되어 그 강도가 더욱 강해졌다. 얼마 전 그는 6월 7일과 13일 오스트리아 비엔나와 버그에서 갖기로 예정되어 있던 콘서트를 전격 취소했다. 이유는 외르크 하이더 당수가 이끄는 극우 자유당이 오스트리아 새 연정에 참여하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의 음악관이 퇴보나 보수가 아닌 진보와 개혁임을 말해준다. 하지만 스팅의 음악색깔은 그의 외곬수적인 성격과는 달리 ‘다색(多色)’이다. 그의 음악 속에는 하나의 장르가 아니라 여러 개의 장르가 만나서 함께 살아가고 있다. "나는 순수하지 않은 혼합적인 음악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순수한 록, 순수한 재즈에는 흥미가 없다." 한 채널에 귀를 구속시키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채널 안에 귀를 열어놓고 있는 것이다. 스팅의 퓨전 지향은 아트록 그룹 커브드 에어 출신의 스튜어트 코플랜드, 애니멀스 출신의 앤디 서머스와 함께 했던 록그룹 폴리스 시절부터 이미 시작됐다. 그룹의 음악은 단순하게 몰아치는 펑크에 머물지 않고 레게, 재즈, 민속음악 등을 집어넣어서 감칠맛 나게 요리한 당시에는 보기 드문 유니크한 사운드였다. 스팅의 재즈 어프로치가 돋보이는 베이스라인, 레게 리듬을 완벽히 구사하는 코플랜드의 드럼 테크닉, 그리고 에코가 약간 가미된 서머스의 클린 톤의 기타는 폴리스 사운드의 결정체였다. 그들의 데뷔작 < Outlandos D’ Amour >와 2집 < Reggatta De Blanc >의 히트곡 ‘Can’t stand losing you’, ‘Walking on the moon’에서 시도된 이국적인 레게 뮤직이 그 한 예다. 영·미 음악 중심에서 벗어나 제3세계로 음악의 발판을 넓힌 것이다. 스팅은 1983년에 발표한 폴리스의 5집 앨범 < Synchronicity >의 수록곡 ‘Every breath you take’로 8주 동안 빌보드 차트 정상을 차지하며 인기정점에 섰을 때 그룹을 해산시켰다. 멤버간의 불화도 원인이었지만 가장 큰 해체이유는 자신의 음악적 영역을 확장시키기 위해서였다. "나는 처음 시작하는 나의 입장이 전혀 두렵지 않다. 나는 모든 상황 속에 내 자신을 던져버리고 싶다." 새로운 것에 도전하고자 하는 그의 확고한 의지의 표현이다. 솔로 활동과 함께 스팅은 월드 뮤직으로 한 단계 도약을 꾀했다. 그는 자메이카에서 녹음한 1985년 솔로 데뷔작 < The Dream Of The Blue Turtles >에서 색소폰 주자 브랜포드 마샬리스, 키보디스트 케니 커크랜드 등 젊은 재즈 뮤지션을 영입하여 고품격·고감도 재즈 음악을 선보였다. 하지만 단순히 재즈로만 끝나지 않았다. 그는 러시아 민속 음악을 차용한 ‘Russians’, 중동 풍의 리듬이 인상적인 ‘We work the black seam’ 등 전세계에 펼쳐져 있는 다채로운 음악 소재들을 자신의 앨범에 담았다. 모든 곡을 포르투갈어로 부른 1988년 EP < ...Nada Como El Sol >, 1996년 앨범 < Mercury Falling >의 ‘Valparaiso’에서 나타나는 아일랜드의 민족정서, 1997년 베스트 앨범 < The Very Best Of Sting & The Police >에서 퍼프 대디가 참여하여 힙합 버전으로 새롭게 탈바꿈된 < Roxanne ’97 > 역시 크로스오버를 위한 스팅의 실험정신이 담겨진 작품들이다. 스팅의 음악은 세련되고 고급스럽다. 그래서 선뜻 받아들이고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그의 음악은 대중적으로 커다란 성공을 거두었다. 특히 스팅에 대한 국내 여성 팬들의 사랑은 절대적이다. 여기에는 영화음악이 한몫을 했다. 그는 영화 < 레옹(Leon) >의 ‘Shape of my heart’, < 네 번의 결혼식과 한번의 장례식(Four Weddings & A Funeral) >의 ‘The secret marriage’, < 라스베가스를 떠나며(Leaving Las Vegas) >의 ‘Angel eyes’, ‘It’s a lonesome old town’ 등을 통해 팬들과의 거리를 좁혔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스팅은 아예 까메오가 아닌 배우로서 1979년 영화 < Quadrophenia >를 비롯 < Brimston & Treacle >, < Dune >, < The Bride >, < Plenty >, < Lock, Stock And Two Smoking Barrels > 등 많은 작품에서 열연을 했다. 그가 영화에 남다른 애정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스팅은 대중이 아닌 자기자신을 위해 음악을 한다. "나는 먼저 나 자신을 즐겁게 하기 위해 곡을 쓴다." 상업성에 포박 당하여 자아(自我)를 상실해버린 뮤지션들에 대한 따끔한 질책이다. 때문에 그의 음악에는 예술성이 베어있다. 50이 넘는 나이에도 다양한 변화를 모색하며 왕성한 창작력을 과시하는 자신감 또한 마찬가지다.
세상일에 아무 관심없는 천재 작곡가 대중 음악인을 ‘음악 하는 자세’와 관련하여 분류한다면 크게 두 부류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하나는 그가 처해 있는 시대 상황을 면밀히 관찰하여 대중 정서의 현 위치를 찾으려는 사람들이며, 다른 한쪽은 주변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든 무관하게 자신의 음악만을 표출하는 데 심혈을 쏟는 사람들이다. 두 가지 스타일이 혼재되어 있는 음악인도 있을 테지만 대체로 전자의 무게 중심은 시각... 세상일에 아무 관심없는 천재 작곡가 대중 음악인을 ‘음악 하는 자세’와 관련하여 분류한다면 크게 두 부류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하나는 그가 처해 있는 시대 상황을 면밀히 관찰하여 대중 정서의 현 위치를 찾으려는 사람들이며, 다른 한쪽은 주변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든 무관하게 자신의 음악만을 표출하는 데 심혈을 쏟는 사람들이다. 두 가지 스타일이 혼재되어 있는 음악인도 있을 테지만 대체로 전자의 무게 중심은 시각(view)일 것이며 후자는 예술(art)이다. 엘튼 존은 바로 후자를 대표하는 금세기 최고 록 스타 가운데 한사람이다. 흔히 그는 1970년대를 대변하는 톱 가수로서 록 역사에 기록된다. 1970년대가 개막되면서 ‘보더 송(Border song)’을 빌보드 차트에 랭크시키며 등장한 그는 이후 당대 누구도 따를 수 없는 탁월한 선율로 인기 차트를 석권했다. 그의 멜로디를 뽑아내는 재주는 존 레논과 폴 매카트니의 쌍포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 경이적이었고 또 천재적이었다. 만약 1970년대에 그가 없었더라면 팝계의 ‘예술적 활기’는 기대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이와 관련, 록 평론가인 로버트 크리스트고(Robert Christgau)의 엘튼 존에 대한 서술은 참으로 맹쾌하다. “1960년대의 비치 보이스처럼 엘튼 존은 1970년대의 필수적인 시금석으로 남아 있다. 따라서 그가 해악의 진부성을 축약하고 있다고 믿는다면 그렇게 하라. 하지만 내 생각으로 그는 가장 유순하고 황량한 시절마저도 생기로 가득 채울 수 있다는 것을 입증한 인물이다.” 그런데 크리스트고도 인정하고 있듯이 1970년대는 사회성으로 특징지어진 1960년대 록 혁명의 정신이 함몰되어 버린 ‘록 예술성의 시대’로 정의된다. 크리스트고가 그때를 ‘해악’이니 ‘유순하고 황량한 시절’이니 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인식에 기초한 것이다. 엘튼 존 스스로도 ‘음악을 만들면서 정치적 이슈를 내거는 것은 넌센스다. 세상사를 개선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가서 음악하는 것뿐’ 이라며 자신의 비(非)참여적 음악관을 천명하곤 했다. 그는 “음악에 있어서 정치가 영향력을 발휘한다고 생각지 않는다. 말로 세상을 바꾸려 했던 1960년대 가수들을 보라. 삶은 여전히 똑같지 않은가”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가 록의 사회성에 얼마나 등을 돌렸는지는 곡 쓰기에서도 여실히 나타난다. 그는 다른 송라이터들과 달리 작사는 직접 하지 않고 남에게 맡겼는데 당시 그의 작사 파트너는 버니 토핀(Bernie Taupin)이었다. 버니가 쓴 노랫말은 지극히 개인적인 내용으로 가득 찼다. 버니는 사회를 떠난 신변잡기의 소재에 집착하면서 공상을 써내기에 급급했다. 그러나 엘튼은 그의 가사를 좀처럼 따지지 않았다. 그저 즐겁게 그의 공상을 팬들에게 전달할 뿐이었다. 그는 심지어 “난 정말 버니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른다. 어떤 사람에 대한 노래냐고 묻기는 하지만 의미를 캐내지는 않는다. 난 그의 가사 10편에 곡을 붙일 때까지 그를 만나지 않은 적도 있다”고 스스럼없이 밝히기도 했다. 자기 환상만을 늘어놓는 작사가, 그것을 검증도 없이 곡을 쓰고 즐겁게 노래하는 가수, 그들에게서 시각을 바랄 수 없다. 그런 음악은 본질적으로 예술 쪽으로 치우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엘튼 존이 1970년대의 특성을 떠 안은 인물임을 시사하는 또 하나의 중요한 단서가 있다. 1970년대는 1960년대 히피의 프리 섹스 여파로 성의 일반적 개념이 철저히 해체되어 독신, 동성애, 그룹 섹스, 배우자 바꾸기 등 새로운 섹스 스타일이 마구 고개를 들던 시기이기도 했다. 때문에 1970년대를 ‘자극의 시대’라고도 일컫는 것이다. 엘튼은 소문난 양성(兩性)주의자였다. 아니, 스스로 바이 섹슈얼(Bi-sexual)이라고 공언하고 다녔다. 그런 충격적 신상 공개는 데이비드 보위(David Bowie)를 뺀다면 록 스타들 중에서는 그에게서 최초로 나온 것이었다. 하지만 실상은 달랐다. 그는 양성주의자가 아니라 동성주의자, 즉 게이라는 사실이었다. 최근 < 디테일즈 >지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왜 그 때 호모라고 하지 않고 바이 섹슈얼이라고 했냐”하는 질문에 “아마 겁이 나서였기 때문일 거다. 진실 파기이지만 그 당시에는 가능한 한 ‘외교적’으로 말하려고 생각했다”고 답변했다. 이 부분에 관해서 그의 실체를 파악하기 위해 인터뷰 내용을 더 살펴보기로 하자. - 언제부터 여성 관계를 단계적으로 끝냈는가? :끝내다니? 어떠한 여성 관계도 결코 없었다. 그 누구도 나는 끝내고 자시고 하지 않았다. - 몇 살 때부터 자신이 게이임을 알았는가? :대략 23세쯤이었을 거다(그는 1947년생이므로 1970년쯤 된다). 그때가 나의 첫 실제 경험이었다. 아마 그 전부터 게이인지 알았을 텐데 23살에 실질적으로 그것을 맞이했다. - 그런데 결혼은 왜 했나? :잘못된 이유로 결혼했다. 난 결혼하면 내가 당하고 있는 모든 고통으로부터 벗어날 것이라고 생각했다. ‘난 게이야. 난 정말 불행해’라고 여기곤 했으니까. 동성연애자라는 여론의 화살을 피하려고 결혼했다는 얘기다. 그는 1984년 독일 출신의 레코딩 엔지니어인 레니트 블라우어(Renete Blauer)와 결혼식을 올렸다. 게이라고 공공연히 밝힌 사람이 여자에게 갔다는 이유로 화제를 모았던 이 관계는 당연히 오래가지 못했다. 둘은 3년을 채 넘기지 못하고 1987년 이혼했다. 게이 발언, 여성과 결혼, 그리고 이혼 등의 사건으로 이미 타블로이드 신문의 가십 단골이 된 그는 1988년 마침내 한 차례 커다란 홍역을 치러야 했다. 영국의 < 선 >지가 “엘튼이 10대 어린이들을 모아 놓고 입에 담을 수 없는 추잡한 섹스 파티를 벌였다”는 기사를 게재한 것이었다. 그 기사에 따르면 그는 게이를 초월하는 ‘성도착증 환자’이자 ‘성격 장애자’나 다름없었다. 인간 관계 전반에 영향을 미치고 어머니마저 창피해 스페인으로 떠나버리자 분기탱천한 그는 두주먹 불끈 쥐고 < 선 >지를 고소했고 이어 치열한 법정 공방을 벌이게 됐다. 그는 이 재판에서 승소해 명예를 회복했지만 이후 언론으로부터는 ‘흥미의 대사(Ambassador of Fun)’라는 불명예스런 타이틀을 얻었다. 애초부터 매스컴과 우호적인 관계는 아니었지만-언론의 등쌀이 마릴린 먼로를 죽이게 했다는 내용을 노래 ‘바람속의 촛불(Candle in the wind)’로 알 수 있다-그는 이 사건을 계기로 언론에 몸서리를 치게 되었다. 그는 영화 < 라이온 킹 >의 사운드 트랙은 ‘오늘밤 그대는 사랑을 느끼나요?(Can you feel the love tonight?)’으로 재기한 94년까지 근 7년 간 가능한 한 언론과의 인터뷰를 회피했다. 그의 기자 혐오증은 너무나 유명하다. 스스로도 “난 영국의 언론에 분노가 치민다. 정말로 그들이 싫다. 그들은 거짓말쟁이들이며 지구의 깡패들이다”라고 강도 높게 말하기도 했다. 그의 언론에 대한 분노는 지금도 살아 끓어 넘친다. 올해 발표된 새 앨범의 타이틀 송 ‘메이드 인 잉글랜드(Made in England-8월 19일자 빌보드 싱글 차트 52위)’가 그것을 실증해 주는 곡이다. “난 영국에서 만들어졌어. 블루 코티나차처럼 말야... ...넌 스캔들의 냄새를 좇았지. 여기 내 가운데 손가락을 봐. 난 고통의 40년을 살았어. 아무것도 기댈 것이 없어... ...넌 아직도 호모라고 얘기하고 모든 사람이 웃지.” 그가 이처럼 투정을 부리는 것도 일리는 있다. 원래가 솔직하고 감성적인 성격으로 자신의 성(性)을 고백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언론을 거치면서 일반인들의 미움과 손가락질이 생겨난 것이라고 그는 믿기 때문이다. 그의 인기가 하향세로 접어든 것도 양성주의자임을 밝힌 1976년부터였다. 그는 1989년 < 파리 마치 >지와의 인터뷰에서 “지난번 앨범 < 레그 스트라이크스 백(Reg Strikes Back) >은 전세계적으로 판매 성적이 대단히 좋았는데 유독 영국에서만은 결과가 안 좋았다. 영국인들 대부분이 < 선 >지의 악의적인 기사를 믿고 있기 때문일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의 어떤 논리적인 응수에도 불구하고 그가 ‘예술과 자극’의 1970년대라는 보수 시대를 살아왔으며 보수 성향의 인물이라는 점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그는 또 명백한 ‘록 엘리트’다. 부자라는 점에서도 그렇거니와 음악 능력의 측면에서도 그렇다. 그는 “버니의 가사를 받아 기분이 좋을 때면 곡을 쓰는데 15분도 안걸린다”고 자랑했다. 그런 천부적 재능을 밑천 삼아 그는 지금까지 무려 32장의 앨범을 발표했다. 물론 이 왕성한 생산력을 아티스트의 성실성이라는 측면에서 극구 칭송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비틀어보면 그것은 음악 엘리트만이 할 수 있는 일 아닐까. 실제로 그는 비평계 일각으로부터 ‘음악의 과소비’를 행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으며 그가 1970년대 후반 ‘엘리트만이 아니라 누구나 음악할 수 있다’는 평등의 이데올로기를 내건 펑크 진영의 공격 대상이 된 것도 이 때문이었다. 아직도 그의 이름에는 ‘로커’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그러며 연상되는 과거의 거친 피아노 연주나 기행적 무대는 분명 폭발과 반란을 특질로 하는 록의 전형적 제스처였다. 그러나 지금 그에게서 그러한 ‘록의 반항적 미학’을 발견하기는 어렵다. ‘오늘밤 사랑을 느끼나요’가 말해주듯 중산층의 격조와 결탁한 ‘AOR(Adult Oriented Rock)’이나 스탠더드 팝으로 색깔을 바꾸어 안전지대에 정착해 있다. < 타임 >지는 얼마전 그의 새로운 전성기가 도래했음을 대서특필하는 순간에도 ‘그에게는 실재(實在)하는 록 스타의 고뇌와 거친 감정이 부족하다’는 지적을 빼놓지 않았다. 그가 ‘팝계의 불사조’라는 작위를 하사 받아야 함은 마땅하다. 정글과도 같은 팝계를 4반세기에 걸쳐 롱런한 ‘영광의 생존’만으로도 그는 위대하다. 1993년에 이미 엘비스 프레슬리의 벽을 넘어 24년간 한 해도 거르지 않고 매년 차트 40위권의 히트곡을 낸(올해로 그 햇수는 26년으로 늘어났다) 사실만으로도 그의 위력을 충분히 실감할 수 있다. 마흔여덟 살의 노장이 신인들 틈새에서 몇 백만 장의 음반 판매고를 올리는 것 또한 우리 입장에서는 부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사실 그 나이의 사람에게 록에 대한 충성을 요구하는 것도 무리일 것이다. 하지만 그에게는 시각이 없다. 그는 4반세기 동안 그의 관점을 개인으로부터 해방시킨 적이 없었다. 그렇기에 보수적인 시대에 환영을 받고 있는 것이다. 내내 부진하다가 미국 사회에 보수적인 기류가 소생한 지난해(1994년) 재기한 것을 보라. 그의 노래들 ‘굿바이 옐로 브릭 로드(Goodbye yellow brick road)’ ‘오늘밤(Tonight)’ ‘미안하다는 말은 정말 어려워(Sorry seems to be the hardest word)’ 등은 아직도 우리들에게 높은 인기를 누리고 있다. 그는 실로 우리의 팝송 청취와 수용이 예술적 가치에만 집중되어 있음을 상징하는 인물이라는 생각이 든다.
싱어송라이터 싱어송라이터
노래 : Sky Ferreira (스카이 페레이라)
# 스테판 하우저 24세의 첼리스트 스테판 하우저(Stjepan Hauser)는 21개의 국제 대회에서 우승해왔고, 여러 메이저 오케스트라와 함께 솔로이스트로서 전세계 각지를 돌아다녔다. 런던에서의 대학생활 당시에는 나탈리아 파브루츠카야(Natalia Pavlutskaya)에게 사사했는데, 당시 그는 명성 있는 그린위치 트리오(Greenwich Trio)의 멤버이기도 했다. 대학졸업 이후에는 맨체스터의 Rncm... # 스테판 하우저
24세의 첼리스트 스테판 하우저(Stjepan Hauser)는 21개의 국제 대회에서 우승해왔고, 여러 메이저 오케스트라와 함께 솔로이스트로서 전세계 각지를 돌아다녔다. 런던에서의 대학생활 당시에는 나탈리아 파브루츠카야(Natalia Pavlutskaya)에게 사사했는데, 당시 그는 명성 있는 그린위치 트리오(Greenwich Trio)의 멤버이기도 했다. 대학졸업 이후에는 맨체스터의 Rncm(Royal Northern College Of Music)에서 랄프 커쉬바움(Ralph Kirshbaum)에게, 그리고 미국으로 넘어가면서는 버나드 그린하우스(Bernard Greenhouse)에게 사사했다.

운 좋게도 거장 므스티슬라프 로스트로포비치(Mstislav Rostropovich)의 마지막 제자들 중 하나이기도 했다. 스테판 하우저는 2006년 10월 이태리 플로렌스에서 열린 로스트로포비치 공연의 갈라 콘서트를 위해 선택된 유일한 첼리스트였다. 2007년 로스트로포비치가 서거하면서 스테판은 수많은 공연을 그에게 바친 바 있다고 한다. 영국의 찰스 왕세자 앞에서 버킹험 궁과 세인트 제임스 궁전에서 각각 공연했던 경력도 있다.

참고로 그가 존경하는 아티스트들은 로스트로보비치, 버나드 그린하우스 이외에도 다음과 같다. 하인리히 쉬프(Heinrich Schiff), 아르토 노라스(Arto Noras), 프란스 헬머슨(Frans Helmerson), 필리페 뮐러(Philippe Muller), 스티븐 코바세비치(Stephen Kovacevich), 그리고 피아니스트인 메너햄 프레슬러(Menahem Pressler)와 바이올리니스트 이브리 기틀리스(Ivry Gitlis) 등을 언급했다.

# 루카 쉴릭
올해 스물 다섯 살인 루카 쉴릭(Luka Sulic)은 수많은 국제 공연과 경연대회를 통해 점점 명성을 쌓아 올려나갔다. 일단은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열린 명성있는 루토슬라브스키(Lutoslawski) 첼로 콩쿨에서 우승했고, 유럽연합 방송국 주최의 뉴 탈렌트(New Talent) 대회에서도 1위를 거머쥔다. 독일 라디오 필하모니, 바르샤바 필하모닉, 그리고 러시안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함께 유럽의 유서깊은 공연장은 물론 아시아, 아프리카를 포함한 전세계를 순회하며 솔로이스트로서 공연을 완수해냈다. 크로아티아 출신의 세계적 혼 주자 라도반 블라코빅(Radovan Vlatkovi?), 그리고 내한공연을 하기도 했던 피아니스트 보리스 베레조프스키(Boris Berezovsky) 등과 함께 실내악 파트너로서 함께했던 바도 있다.
뉴욕타임즈가 “클래식계에서 가장 뛰어난 아티스트”로 찬사를 받고 있는 랑랑은 파워풀하고 화려한 연주로 세계 청중을 사로잡고 있다. 1982년 중국 선양에서 태어난 그는 세 살 때부터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섯 살 때에는 선양 피아노 대회에서 우승을 했고, 첫 독주회를 가졌다. 또 열세 살 때에는 차이코프스키 영 뮤지션 콩쿠르에서 우승을 했다. 랑랑은 베를린 필하모닉, 빈 필하모닉, 그리고 미국의 빅 ... 뉴욕타임즈가 “클래식계에서 가장 뛰어난 아티스트”로 찬사를 받고 있는 랑랑은 파워풀하고 화려한 연주로 세계 청중을 사로잡고 있다. 1982년 중국 선양에서 태어난 그는 세 살 때부터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섯 살 때에는 선양 피아노 대회에서 우승을 했고, 첫 독주회를 가졌다. 또 열세 살 때에는 차이코프스키 영 뮤지션 콩쿠르에서 우승을 했다. 랑랑은 베를린 필하모닉, 빈 필하모닉, 그리고 미국의 빅 파이브라 불리는 모든 오케스트라와 협연한 최초의 중국 피아니스트이다. 그리고 2008년 베이징 올림픽 개막식에 클래식 음악가로는 이례적으로 연주를 해 스타 파워를 증명했다. 그리고 2008년 마에스트로 정명훈의 지휘로 한국에서 라 스칼라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협연도 하였다. 한편 랑랑은 자신의 불우했던 어린 시절을 잊지 않고, 유니세프 친선대사로 아프리카의 빈곤과 질병에 시달리는 많은 어린이들을 위해 도움의 손길을 보냈으며, 2008년 중국 쓰촨성에 지진이 났을 때에는 자신의 피아노를 경매에 붙여 피해자들을 돕기도 했다. 현재 랑랑은 자신의 힘든 어린 시절을 생각하면서, ‘랑랑 국제 음악 재단’을 설립하여 세계의 재능 있지만 경제적 어려움으로 음악 할 기회가 주어지지 못한 어린이와 젊은이들이 장학금을 지원하고 있다.
연주 : Steve Vai (스티브 바이)
''기타 혁신주의자'' 스티브 바이는 기타가 표현해낼 수 있는 모든 소리들을 현란한 테크닉과 다양한 이펙터 사용으로 재현해낸 인물이다. 그는 트레몰로(Tremolo)와 라이트 핸드(Right Hand) 주법을 트레이드마크로 최첨단 하이 테크닉을 구사했으며, 저음부가 추가된 7현 기타를 사용하여 음(音)의 기복을 심하게 요동치게 만들었다. 또한 크라이 베이비 와와(Cry Baby Wah-Wah), 디지텍 왜미 페달... ''기타 혁신주의자'' 스티브 바이는 기타가 표현해낼 수 있는 모든 소리들을 현란한 테크닉과 다양한 이펙터 사용으로 재현해낸 인물이다. 그는 트레몰로(Tremolo)와 라이트 핸드(Right Hand) 주법을 트레이드마크로 최첨단 하이 테크닉을 구사했으며, 저음부가 추가된 7현 기타를 사용하여 음(音)의 기복을 심하게 요동치게 만들었다. 또한 크라이 베이비 와와(Cry Baby Wah-Wah), 디지텍 왜미 페달(DigiTech Whammy Pedal), 딜레이(Delay) 등의 이펙터를 이용하여 인간의 음성, 동물 울음소리 등 기묘하고 재기 넘치는 효과음들을 곡의 적재 적소에 배치시켜 풍성한 기타 연주의 성찬을 일궈냈다. 이것은 분명 잉베이 맘스틴(Yngwie Malmsteen)과 토니 매칼파인(Tony Macalpine) 등이 뽐내던 클래시컬 속주 기타와는 달랐다. 스티브 바이는 그들과는 반대로 기타의 형식미에서 과감히 탈피하여 변칙적인 박자전개, 스케일의 자유로운 변화 등을 강조했다. 장르의 범주 역시 과감히 탈피하여 메탈, 펑크(Funk), 블루스, 재즈, 클래식 등 모든 장르를 아우르고 있다. 바로 ''사고의 전환''이 그의 영원한 기타 테마였다. 1995년 앨범 < Alien Love Secrets >에서 드러나듯 매번 가상 현실을 기타 연주의 소재로 삼는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때문에 그의 기타 음색은 과거가 아닌 ''미래지향적''이다. 1960년 뉴욕에서 태어난 스티브 바이는 13살 되던 해부터 기타를 치기 시작했다. 그의 첫 기타 스승은 당시 학교 친구였던 조 새트리아니(Joe Satriani). 바이는 새트리아니에게 1년 정도 기타를 배웠다고 한다. 둘의 우정은 지금까지도 끈끈하게 유지되고 있다. 에릭 존슨(Eric Johnson)을 포함한 G3 투어가 그 예이다. 몇 년 뒤 버클리음대에 진학한 바이는 음악 이론과 채보를 정식으로 배우며 탄탄한 기본기를 완성했다. 스티브 바이는 1980년대 접어들면서 괴짜 기타리스트 프랭크 자파(Frank Zappa)의 밴드를 비롯해, 잉베이 맘스틴이 재직했던 알카트라즈(Alcatrazz), 밴 헤일런(Van Halen) 출신의 보컬리스트 데이빗 리 로스(David Lee Roth) 밴드, 데이빗 커버데일(David Coverdale)이 이끄는 화이트 스네이크(White Snake) 등 명 그룹들에서 활동하며 ''용병'' 기타리스트로서 최고의 주가를 올렸다. 그의 빛나는 기타 테크닉이 이 당시에 차곡차곡 쌓여졌음은 물론이다. 이후 스티브 바이는 1990년 작품 < Passion And Warfare >를 발표하며 화려한 솔로의 길로 들어섰다(이미 그는 1984년 솔로 데뷔작 < Flex-Able >을 내놓은바 있다). 이 앨범은 스티브 바이의 최고 명반으로 꼽히며 기타 인스트루멘틀계에 일대 회오리를 일으켰다. 기존 기타리스트들의 연주에서는 들을 수 없었던 독창적이고 충격적인 사운드로 가득 찼다. 바로 1997년 2월 19일에 열린 내한 공연에서도 연주하여 국내 팬들에게 뜨거운 박수를 받았던 명 연주곡 ''For the love of god''가 수록되어있는 음반이다. 그는 계속해서 1993년 < Sex & Religion >, 1995년 < Alien Love Secrets >, 1996년 < Fire Garden >, 1999년 < The Ultra Zone >를 발표하며 기타리스트뿐만 아니라 작곡가로서의 역량도 훌륭히 선보였다. 특히 1996년 앨범 < Fire Garden >은 스티브 바이 자신이 직접 보컬까지 담당하며 숨겨진 재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이어서 2000년에는 ''For the love of god'', ''Tender Surrender'' 등 기존의 곡들과 신곡 3곡이 추가된 편집 앨범 < The 7th Songs >를 내기도 했다.

회원리뷰 (0건)

매주 10건의 우수리뷰를 선정하여 YES상품권 3만원을 드립니다.
3,000원 이상 구매 후 리뷰 작성 시 일반회원 300원, 마니아회원 600원의 YES포인트를 드립니다.
(CD/LP, DVD/Blu-ray, 패션 및 판매금지 상품, 예스24 앱스토어 상품 제외)
리뷰쓰기

등록된 리뷰가 없습니다.

첫번째 리뷰어가 되어주세요.

한줄평 (0건)

1,000원 이상 구매 후 한줄평 작성 시 일반회원 50원, 마니아회원 100원의 YES포인트를 드립니다.
(CD/LP, DVD/Blu-ray, 패션 및 판매금지 상품, 예스24 앱스토어 상품 제외)
0/50

등록된 한줄평이 없습니다.

첫번째 한줄평을 남겨주세요.

배송/반품/교환 안내

배송 안내

배송 안내
배송 구분 YES24 배송
포장 안내

안전하고 정확한 포장을 위해 CCTV를 설치하여 운영하고 있습니다.

고객님께 배송되는 모든 상품을 CCTV로 녹화하고 있으며, 철저한 모니터링을 통해 작업 과정에 문제가 없도록 최선을 다 하겠습니다.

목적 : 안전한 포장 관리
촬영범위 : 박스 포장 작업

  • 포장안내1
  • 포장안내2
  • 포장안내3
  • 포장안내4
포스터 안내
  •  구매하신 상품에 포스터 사은품이 있는 경우, 포스터는 상품 수량과 동일한 수량이 제공됩니다.
  •  포스터는 기본적으로 지관통에 포장되며, 2장 이상의 포스터도 1개의 지관통에 담겨 발송됩니다.
  •  포스터 수량이 많은 경우, 상황에 따라 지관통 추가 및 별도 박스에 포장되어 발송될 수 있습니다.

반품/교환 안내

※ 상품 설명에 반품/교환과 관련한 안내가 있는경우 아래 내용보다 우선합니다. (업체 사정에 따라 달라질 수 있습니다)

반품/교환 안내
반품/교환 방법
  •  마이페이지 > 반품/교환 신청 및 조회, 1:1 문의, 고객만족센터(1544-3800), 중고샵(1566-4295)
  •  판매자 배송 상품은 판매자와 반품/교환이 협의된 상품에 한해 가능합니다.
반품/교환 가능기간
  •  출고 완료 후 10일 이내의 주문 상품
  •  디지털 콘텐츠인 eBook의 경우 구매 후 7일 이내의 상품
  •  중고상품의 경우 출고 완료일로부터 6일 이내의 상품 (구매확정 전 상태)
반품/교환 비용
  •  고객의 단순변심 및 착오구매일 경우 상품 반송비용은 고객 부담임
  •  직수입양서/직수입일서중 일부는 변심 또는 착오로 취소시 해외주문취소수수료 20%를 부과할수 있음

    단, 아래의 주문/취소 조건인 경우, 취소 수수료 면제

    •  오늘 00시 ~ 06시 30분 주문을 오늘 오전 06시 30분 이전에 취소
    •  오늘 06시 30분 이후 주문을 익일 오전 06시 30분 이전에 취소
  •  박스 포장은 택배 배송이 가능한 규격과 무게를 준수하며, 고객의 단순변심 및 착오구매일 경우 상품의 반송비용은 박스 당 부과됩니다.
반품/교환 불가사유
  •  소비자의 책임 있는 사유로 상품 등이 손실 또는 훼손된 경우
  •  소비자의 사용, 포장 개봉에 의해 상품 등의 가치가 현저히 감소한 경우 : 예) 화장품, 식품, 가전제품, 전자책 단말기 등
  •  복제가 가능한 상품 등의 포장을 훼손한 경우 : 예) CD/LP, DVD/Blu-ray, 소프트웨어, 만화책, 잡지, 영상 화보집
  •  소비자의 요청에 따라 개별적으로 주문 제작되는 상품의 경우
  •  디지털 컨텐츠인 eBook, 오디오북 등을 1회 이상 다운로드를 받았을 경우
  •  eBook 대여 상품은 대여 기간이 종료 되거나, 2회 이상 대여 했을 경우 취소 불가
  •  중고상품이 구매확정(자동 구매확정은 출고완료일로부터 7일)된 경우
  •  시간의 경과에 의해 재판매가 곤란한 정도로 가치가 현저히 감소한 경우
  •  전자상거래 등에서의 소비자보호에 관한 법률이 정하는 소비자 청약철회 제한 내용에 해당되는 경우
소비자 피해보상
  •  상품의 불량에 의한 반품, 교환, A/S, 환불, 품질보증 및 피해보상 등에 관한 사항은 소비자분쟁해결기준(공정거래위원회 고시)에 준하여 처리됨
환불 지연에 따른 배상
  •  대금 환불 및 환불 지연에 따른 배상금 지급 조건, 절차 등은 전자상거래 등에서의 소비자 보호에 관한 법률에 따라 처리
예스이십사(주)
서울시 영등포구 은행로 11, 5층~6층(여의도동,일신빌딩) 대표 : 김석환   개인정보보호책임자 : 권민석 yes24help@yes24.com 사업자등록번호 : 229-81-37000   통신판매업신고 : 제 2005-02682호 사업자 정보확인 호스팅 서비스사업자 : 예스이십사(주)
고객만족센터 T.1544-3800
상담 전화번호
  • 중고샵 문의 1566-4295
  • 영화예매 문의 1544-7758
  • 공연예매 문의 1544-6399
1:1 문의하기 자주 묻는 질문 상담시간 안내
YES24 수상내역 정보보호 관리체계 ISMS인증획득 개인정보보호 우수사이트
소비자피해보상보험 서울보증보험
고객님은 안전거래를 위해 현금 등으로 결제 시 저희 쇼핑몰에서 가입한 구매안전서비스를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서비스가입사실 확인
EQUUS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