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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상의 노래 - 보첼리 / 파바로티 / 네트렙코 / 카우프만 (Paradisum - Serene Sacred Songs - Bocelli / Pavarotti / Netrebko / Kaufman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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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D

천상의 노래 - 보첼리 / 파바로티 / 네트렙코 / 카우프만 (Paradisum - Serene Sacred Songs - Bocelli / Pavarotti / Netrebko / Kaufmann)

[ 2CD ]
Franz Schubert, Gabriel Faure, Johann Sebastian Bach, Andrew Lloyd Webber, Georg Fridrich Handel 작곡 외 29명 정보 더 보기/감추기 | Universal / DECCA | 2016년 03월 25일 첫번째 리뷰어가 되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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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상의 노래 - 보첼리 / 파바로티 / 네트렙코 / 카우프만 (Paradisum - Serene Sacred Songs - Bocelli / Pavarotti / Netrebko / Kaufmann)

품목정보

품목정보
발매일 2016년 03월 25일

관련분류

디스크

Disc 1
  • 01 Ave Maria Schubert [Pavarotti]
  • 02 Pie Jesu Faure [Fleming]
  • 03 Jesu, Joy of Man’s Desiring Bach [The Choir of King’s College, Cambridge]
  • 04 Du bist die Ruh’ Schubert [Terfel]
  • 05 Pie Jesu Lloyd Webber [Netrebko]
  • 06 ?Ombra mai fu Handel [Scholl]
  • 07 Repentir (O Divine Redeemer) Gounod [Te Kanawa]
  • 08 Ave Verum Corpus Mozart [The Choir of King’s College, Cambridge]
  • 09 ?Ave Maria Caccini [Garanca]
  • 10 Mille Cherubini in coro Schubert [Bocelli]
  • 11 Der Engel Wagner [Kaufmann]
  • 12 Lacrimosa Mozart [Schreier]
  • 13 Bogoroditse Devo Rachmaninov [Voces8]
  • 14 Song for Athene Tavener [The Holst Singers]
  • 15 In Paradisum Faure [Marriner]
Disc 2
  • 01 Ave Maria Gounod/Bach [Florez]
  • 02 Cantique de Jean Racine Faure [The Choir of King’s College, Cambridge]
  • 03 The Ground Gjeilo
  • 04 Simple Song Bernstein [Fleming]
  • 05 Panis Angelicus Franck [Pavarotti]
  • 06 We Praise Thee Rachmaninov [Kornieva]
  • 07 Sancta Maria Mascagni [Bocelli]
  • 08 Kyrie (vidala-babuala) Ramirez [Carreras]
  • 09 Auf Flugeln des Gesanges Mendelssohn [Gheorghiu]
  • 10 Os Justi Bruckner [Voces8]
  • 11 Nulla in mundo pax Vivaldi [Kirkby]
  • 12 Zdes’ khorosho Rachmaninov [Netrebko]
  • 13 Laudate Dominum Mozart [Palmer]
  • 14 Quia respexit Bach [Gheorghiu]
  • 15 Lux Aurumque Whitacre

아티스트 소개 (34명)

작곡 : Franz Schubert (프란츠 슈베르트)
프란츠 페터 슈베르트(독일어: Franz Peter Schubert, 1797년 1월 31일 ~ 1828년 11월 19일)는 오스트리아의 작곡가이다. 음악의 최고봉 중 한 사람이다. 관현악곡·교회 음악·실내악·피아노곡 등 명작이 많은데, 특히 리트(독일 가곡)에 뛰어난 작품이 많으며, 19세기 독일 리트 형식의 창시자이다. 여러 가지 의문점을 남긴 채 31세로 병사한 그는 가난과 타고난 병약함 등의 어려움에도 불... 프란츠 페터 슈베르트(독일어: Franz Peter Schubert, 1797년 1월 31일 ~ 1828년 11월 19일)는 오스트리아의 작곡가이다. 음악의 최고봉 중 한 사람이다. 관현악곡·교회 음악·실내악·피아노곡 등 명작이 많은데, 특히 리트(독일 가곡)에 뛰어난 작품이 많으며, 19세기 독일 리트 형식의 창시자이다. 여러 가지 의문점을 남긴 채 31세로 병사한 그는 가난과 타고난 병약함 등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600여 편의 가곡, 13편의 교향곡, 소나타, 오페라 등을 작곡했으며, 가곡의 왕이라고 불린다.

오스트리아 대공국 빈의 교외 리히텐탈에서 독일의 슐레지엔의 자작농 출신이자 초등학교 교장인 아버지와 요리사인 어머니 사이에서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음악을 좋아하는 아버지는 음악에 재능이 있는 슈베르트에게 5살부터 악기교육을 시켰고, 1년 뒤 그의 아버지의 학교에 입학한 슈베르트는 그때부터 공식적인 음악 교육을 받기 시작했는데, 그의 아버지는 슈베르트에게 바이올린의 기초를 가르쳤으며, 그의 형 이그나츠는 슈베르트에게 피아노 교습을 시켰다. 7살부터 지역 교회의 합창단장인 미하엘 홀처로부터 교습을 받았다. 또한 가족 현악 4중주에서 형 이그나츠와 페르디난트는 바이올린을, 아버지는 첼로를, 자신은 비올라를 맡아 연주하기도 하였다. 슈베르트는 어려서부터 음악에 대한 재능이 뛰어났으나 아버지가 음악을 가르친 이유는 단순히 취미였을 뿐, 슈베르트를 음악인으로 키우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나중에 어른이 된 슈베르트는 교사가 되길 바라는 아버지와 진로문제로 갈등을 겪게 되었다. 1804년 슈베르트는 살리에리의 지도를 받았으며 그 재능을 인정받기도 하였다. 1808년에는 궁정신학원에 장학생으로 입학하고 그곳에서 모차르트의 서곡이나 교향곡을 접하게 되었는데 그는 특히 모차르트를 좋아하고 베토벤을 존경하였다. 13세 때 변성기로 인해 궁정학교 수업을 그만두었다.

오스트리아에서는 군복무를 일정기간의 교사근무로 대신하는 대체복무제를 허용하고 있었으므로 아버지의 뜻에 따라 1814년부터 아버지가 근무하는 초등학교에서 조교사로 일했다. 이때부터 작곡 활동을 시작했으며, 이 해에 바 장조의 미사곡(로마 가톨릭교회에서 장례미사에 사용하는 음악)을 작곡하였는데, 이 곡의 독창을 부른 테레제 그로브는 슈베르트의 첫번째 애인이었다. 하지만 둘 사이의 사랑은 내성적인 성격 때문에 결실을 보지 못하고, 테레제는 다른 남자와 결혼을 하였다.

1815년 18세 때에 그의 재능을 아는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 수백 곡의 가곡을 썼으며, 괴테의 시에 곡을 붙인 《마왕》, 《휴식 없는 사랑》, 《들장미》 등의 명작도 이 해에 작곡되었다. 그가 지은 가곡 중 일부는 지인들의 도움을 받아 책으로 편집되었다. 1816년 슈파운이 소개한 시인 친구 프란츠 폰 쇼버의 권유로 친구 집에 머물며 작곡에 몰두하였다. 이때부터 그의 방랑생활이 시작되며, 죽는 날까지 그를 괴롭힌 매독 또한 이 시기에 감염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 후 1817년 당시 최고의 성악가이자 25세 연상인 요한 미하엘 포글을 만났다. 1818년에는 가곡 《죽음과 소녀》, 《송어》를 작곡하였으며 에스테르하지 공작 집안의 두 딸의 가정교사가 되어 한여름을 첼리즈에서 보냈다. 이듬해에 포글과 함께 북오스트리아 각지로 연주 여행을 하였는데, 그의 음악이 포글에 의해 처음으로 공개 연주되어 호평을 받았다. 이 좋은 벗의 도움으로 그의 명성은 차츰 높아지고, 오스트리아에 있는 그의 친구들을 중심으로 Schubertiads 라는 모임이 결성되었다. 1819년 라이바흐 사범학교의 교사가 되려고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부친의 학교에 머물면서 많은 작품을 작곡하였다. 가곡 《방랑자》나 《교향곡 제5번》 등이 이때의 작품이다. 1823년에는 《방랑자의 환상곡》, 《로자문데》 등을 발표했고 그 해 여름, 친구의 집에서 읽은 뮐러의 시에 감동하여 《아름다운 물방앗간의 처녀》를 작곡하였다. 1824년, 다시 에스테르하지 가의 음악 교사가 되어 전원 생활을 즐기며 《현악 4중주곡》을 작곡하였다. 이듬해 다시 포글과 서부 오스트리아로 여행하였는데, 이때 《아베 마리아》를 작곡하였다. 1827년 30세가 되자 자신의 인생이 겨울을 맞았음을 아는 듯 《겨울 여행》을 작곡하였다. 1828년 3월 자작 연주회를 열어 성공을 거둔 뒤 교향곡 9번인 《대교향곡》을 완성하였으며, 그가 죽은 뒤 출판된 《백조의 노래》에 수록된 가곡의 대부분이 그 해 8월에 완성되었다.

슈베르트는 한때 베토벤과 만난 적이 있었다. 평소에 베토벤을 존경해왔던 슈베르트는 그를 만나고자 했지만 자신의 소심한 성격 탓에 쉽사리 만날 용기를 가지지 못했다. 게다가 베토벤의 청력상실을 비롯한 합병증으로 만난다 하더라도 제대로 된 대화를 하지 못하기 때문에 만날 기회를 더더욱 가지지 못했다. 그러다 지인들의 권유로 슈베르트가 용기를 내어 1827년 3월 19일, 베토벤 집에 방문하여 만나게 되었다. 놀라운 것은 이렇게 어렵게 만난 두 사람이 불과 2 km 정도 떨어진 곳에 살고 있었다는 것이다. 슈베르트는 베토벤에게 인사하는 한편 자신이 작곡한 악보를 보여준다. 베토벤은 슈베르트로부터 받은 그의 악보를 보고 감탄을 금치 못했으며 이렇게 늦게 만난 것에 대해 후회를 했고 슈베르트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자네를 조금만 더 일찍 만났으면 좋았을 것을… 내 명은 이제 다 되었네. 슈베르트, 자네는 분명 세상에 빛낼 수 있는 훌륭한 음악가가 될 것이네. 그러니 부디 용기를 잃지 말게…"

이러한 베토벤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합병증으로 인해 힘이 들어 보였고 말할 때마다 계속되는 기침으로 슈베르트는 자신이 말하는 것보다 듣는 것이 더 괴로울 지경이었다. 그 후 베토벤은 청력상실로 듣지 못하는 탓에 슈베르트에게 자신에게 하고 싶은 말을 글로 적으라고 했지만 슈베르트는 자신이 존경하는 음악가의 병이 든 처참한 모습을 보고 소심한 성격때문에 일찍 만나지 못한 자괴감과 후회감에 빠져 괴로운 나머지 인사말도 없이 그대로 방을 뛰쳐나가고 말았다. 베토벤이 죽기 일주일 전의 일이었고 이것이 처음이자 마지막 만남이었다. 그러나 슈베르트는 1주일 뒤인 3월 26일, 베토벤이 죽자 그의 장례에 참여하였다.

베토벤이 세상을 떠난 1년 뒤인 1828년, 그는 자신이 대위법이 부족한 것을 스스로 깨닫고 다시 공부하다가(키즐러에게) 11월 17일에 원인을 알 수 없는 병을 얻어 몸져 누웠다. 그의 병세는 날로 악화되어 기억력이 감퇴하여 술에 취한 사람처럼 몸을 비틀거리는데다 허깨비가 보이며 혼잣말을 하는 등 정신이상의 증세를 보이다가 이틀 뒤인 11월 19일에 31세의 젊은 나이로 빈에서 요절하고 말았다. 슈베르트의 아버지는 유해를 교회에 묻으려 했으나 당시 그를 돌보던 둘째 형 이그나츠가 평소에 존경하던 베토벤의 옆에 묻어주자고 제안을 해 빈 중앙 묘지의 베토벤 무덤 옆에 나란히 묻혔다. 슈베르트의 죽음에 대한 의문은 아직 풀리지 않았는데 식중독으로 사망했다는 설, 장티푸스로 사망했다는 설과 매독의 악화로 사망했다는 설도 있으며 현재는 매독으로 인한 사망이 신빙성을 얻고 있다.[주해 1] 별세한 해에 만들어진 최후의 가곡 14곡을 모은 것이 《백조의 노래》이다.

슈베르트는 그 짧은 일생에 수많은 가곡과 기악곡, 교향곡 등을 작곡하였으나, 그의 이름을 유명하게 한 것은 가곡이다. 690곡에 이르는 가곡들이 모두 훌륭하다는 평을 듣지만, 특히 《겨울 여행》이나 《아름다운 물방앗간의 처녀》, 《백조의 노래》 등이 특히 뛰어난 작품이며, 자유로운 표현력을 지니는 멜로디의 아름다움, 그리고 화성의 미묘한 변화 등 낭만주의의 특색을 잘 나타내고 있다. 교향곡에서는 제8번의 《미완성》이 특히 유명하나, 제9번 《대교향곡》의 아름다움도 잊어서는 안된다. 피아노곡에서는 《마왕》, 《방랑자 환상곡》, 《스케르초》, 《악흥(樂興)의 한때》 등이 알려져 있고, 실내악곡에도 《죽음과 소녀》나 《송어》 등 걸작이 많다. 그 밖에 오페라·음악극의 작품도 있으며, 가곡을 비롯하여 교향곡·실내악·피아노곡 등 1,200여 곡의 많은 작품을 남겼다.
작곡 : Gabriel Faure (가브리엘 포레)
가브리엘 위르뱅 포레는 프랑스의 작곡가이자, 오르가니스트, 피아니스트, 교사였다. 파리의 니데르마이어 음악학교에서 공부하고, 카미유 생상스에게서 가르침을 받았으며, 교회의 오르간 연주도 하였다. 파리 음악원의 원장을 역임하였고, 제자로는 모리스 라벨 등 뛰어난 음악가가 많이 있다. 가브리엘 위르뱅 포레는 프랑스의 작곡가이자, 오르가니스트, 피아니스트, 교사였다. 파리의 니데르마이어 음악학교에서 공부하고, 카미유 생상스에게서 가르침을 받았으며, 교회의 오르간 연주도 하였다. 파리 음악원의 원장을 역임하였고, 제자로는 모리스 라벨 등 뛰어난 음악가가 많이 있다.
작곡 : Johann Sebastian Bach (요한 세바스찬 바흐)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독일어: Johann Sebastian Bach, 1685년 3월 21일 ~ 1750년 7월 28일)는 독일의 작곡가이자 오르가니스트이며, 개신교회의 교회 음악가이다. 교회 성기사와 오케스트라, 듀오 악기를 위한 종교적이거나 세속적인 음악을 창작했고, 그의 작품은 바로크 시대의 종말과 궁극적인 성숙을 동시에 가져왔다. 그는 바로크 시대의 최후에 위치하는 대가로서, 일반적인 작품은 독일음...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독일어: Johann Sebastian Bach, 1685년 3월 21일 ~ 1750년 7월 28일)는 독일의 작곡가이자 오르가니스트이며, 개신교회의 교회 음악가이다.

교회 성기사와 오케스트라, 듀오 악기를 위한 종교적이거나 세속적인 음악을 창작했고, 그의 작품은 바로크 시대의 종말과 궁극적인 성숙을 동시에 가져왔다. 그는 바로크 시대의 최후에 위치하는 대가로서, 일반적인 작품은 독일음악의 전통에 깊이 뿌리박고 있을 뿐 아니라, 그 위에 이탈리아나 프랑스의 양식을 채택하고 그것들을 융합하여 독자적 개성적인 음악을 창조하였다. 종교적 작품은 기존 구교 음악과 차별화하여 새로운 음악을 통해 개신교회 예배에 기여하고자 노력하였다.

바흐의 집안은 200년에 걸쳐서 50명 이상의 음악가를 배출한 일대 음악가계였다. 바흐 집안의 음악가들은 대대로 개신교회인 루터교회의 경건한 신자들이었고, 교회음악가로도 활동하였다. 또한 그들의 일에 강한 장인(匠人)적인 긍지를 품고 있었다. 이 '신앙'과 '장인기질(匠人氣質)'은 요한 제바스티안에게도 계승되어서, 마치 2개의 정선율(定旋律)과 같이 그의 일생을 관통하게 된다. 제바스티안 이전에도 17세기 초엽 이래 많은 유명한 작곡가를 배출했고, 일족의 중심지이었던 중부독일의 튀링겐 지방에서는 '바흐'가 '거리의 악사'를 가리키는 용어로 쓰였을 정도였다. 그중에서도 제바스티안의 큰할아버지 하인리히 바흐(1615-1692), 그 아들 요한 크리스토프 바흐(1642-1703)와 요한 미하엘 바흐(1648-94)는 음악사(史)에도 이름을 남긴 뛰어난 작곡가들이었다.

바흐는 사후 고전주의 음악사의 흐름에 밀려 완전히 잊혔으나 1802년 독일의 음악사학자인 포르켈이 바흐에 대한 최초의 연구서인 "바흐의 생애와 예술, 그리고 작품"(Uber Johann Sebastian Bachs Leben, Kunst und Kunstwerke)을 1802년에 발표함으로써 전 유럽적 바흐 광풍을 몰고 오게 하였으며 또한 사후 바흐에 대한 재평가에 결정적인 계기를 제공하였다. 오늘날에는 일반적으로 온 시대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작곡가 중 한 사람으로 여겨지고 있다. 음악의 아버지라고 불릴 만큼 아주 훌륭한 곡을 많이 작곡 하였다.

바로크 음악에 있어서 바흐는 대위법 기술의 정수를 다한 사람이나, 그것에만 만족하지 않고 당시에 이미 궁정문화에 침투했던 프랑스나 이탈리아의 양식을 스스로 받아들여 칸타타에 아름다운 꽃을 피우기도 했다. 거기에는 그가 직접적 또는 간접적으로 배운 여러 나라의 온갖 요소가 모두 투입되어 그만이 지닐 수 있는 최고로 천재적이게 융화되어 일치미를 이루고 있다. 콘티누오(통주저음)만으로 반주되거나 또는 여러 개의 악기로 반주되는 독창이나 중창에 의한 이탈리아식 다 카포 아리아, 오페라적인 아리오소와 레치타티보, 가장 초기의 가브리엘 형태에서 바흐 시대의 프랑스식 서곡에 이르기까지의 관현악 신포니아, 협주곡, 트럼펫의 팡파르, 풍요한 장식성을 지니고 성악성부에 얽혀드는 기악의 오블리가토 성부, 복합창형식, 때로는 성악에까지 적용되는 프랑스의 리드미컬한 춤곡, 이러한 것이 독일의 오랜 전통인 코랄과 결부되고 있다. 대체로 바흐만큼 코랄을 훌륭하게 활용하고 또 코랄을 창작의 중심으로 삼기에 정당함을 느낀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여러 나라 양식의 혼합은 기악 분야에서도 볼 수 있다. 프로베르거의 전통, 쿠프랭의 프랑스 모음곡형식, 쿠나우에 의하여 전해진 이탈리아의 소나타 다 카메라양식, 도메니코 스카를라티의 건반 텍스처(鍵盤書法), 푸가에 있어서도 클라비어 푸가는 이탈리아 협주양식의 영향을 나타내나 오르간 푸가는 북독일 오르간 악파의 전통을 따르고 있다. 협주곡 분야에서는 끊임없이 비발디가 모범으로 숭앙되며, 가장 이탈리아의 특징을 나타낸다. 이와 같이 바흐의 작품은 매우 많은 여러 가지 양식을 포함하고, 또한 작곡한 분야도 넓으며 바흐 개인으로서도 시대에 따라 기술적, 내용적으로 현저하게 발전하고 있기 때문에 그의 개인양식을 간단히 종합하기란 곤란하다고 하겠다.

바흐는 생전에도 동시대의 음악가였던 비발디나 텔레만과 같이 국제적 지명도를 가진 음악가는 아니었다. 사후에는 당시 음악가들이 대부분 그랬듯이 작곡가로서는 완전히 잊혀진다. 바흐 생애 후반부에 이미 고전파 음악의 전조가 시작되었고 바흐 음악은 낡은 것으로 취급되었다. 바흐는 비발디나 헨델과 같이 음악가의 프리랜서화를 선도하는 인물도 아니었고 끝까지 교회 음악가로 남았다. 고전파 시대에 바흐는 고전파의 문을 연 아들들의 아버지로서 오히려 유명하였다. 유명인 중에는 모차르트가 바흐의 악보를 찾아서 탐구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모차르트 음악에 가끔 훌륭한 푸가가 보이는 것이 바흐의 영향이라고 추측하기도 한다. 베토벤 또한 바흐를 연구하였다는 기록이 있으나 그 영향에 대해서는 불분명하다. 모차르트와 베토벤이 바흐를 극찬하는 말을 남겼다고하나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가 아닌 아들 바흐에 대한 찬사였다는 것이 일반적인 설이다.

그러나 1802년 독일의 음악사학자인 포르켈이 사후 완전히 잊혔던 바흐에 대한 최초의 연구서인 "바흐의 생애와 예술, 그리고 작품Uber Johann Sebastian Bachs Leben, Kunst und Kunstwerke"(1802)를 발표함으로써 바흐에 대한 인식의 전환점을 제공하였다. 근대 인문학으로서의 음악사학의 발전은 낭만주의 시대에 이전 시대의 음악에 대한 관심을 증폭시키고 이들의 작품을 출판, 연주하기 시작하면서 바흐는 그 핵심 레파토리로 떠오른다. 바흐 생존 시기나 고전파 시대의 지명도와는 달리 낭만주의 시대에 바흐는 이전 시기 어떠한 음악가보다 높이 평가되기 시작하여 멘델스존 이후 음악가들 중 바흐를 연구하지 않은 작곡가가 없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이다. 바흐에 대한 관심은 바흐가 많이 참고하고 편곡을 했던 다른 음악가들, 특히 비발디에 대한 관심을 촉발시켜서 19세기 말부터 시작된 바로크 음악의 부활을 이끌기도 하였다. 오늘 날에도 바흐는-그의 음악이 바로크 음악을 대표한다고 말할 수도 없고, 바로크 시대 가장 유명한 음악가도 아니었지만-바로크 시대를 대표하는 가장 위대한 음악가로 추앙받고 있다.

서양 음악의 아버지라고 일컫는 바흐의 가문에서는 약 200년 동안에 걸쳐 저명한 음악가가 많이 나왔다.
작곡 : Andrew Lloyd Webber (앤드류 로이드 웨버)
세계적으로 가장 뛰어난 작곡가 중 한 사람으로 평가받고 있는 앤드루 로이드 웨버는 '에비타' '오페라의 유령', '캣츠', '스타라이트 익스프레스' '에스펙츠 오브 러브' 등의 작품으로 전세계 뮤지컬 팬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는 뮤지컬 계의 거장이다. 그의 최근작 '봄베이 드림스'가 브로드웨이에서 공연 중이며 최근에는 웨스트엔드 극장에서 월키 콜린스의 클래식 소설을 바탕으로 한 신작 '더 우먼 인 화이트'... 세계적으로 가장 뛰어난 작곡가 중 한 사람으로 평가받고 있는 앤드루 로이드 웨버는 '에비타' '오페라의 유령', '캣츠', '스타라이트 익스프레스' '에스펙츠 오브 러브' 등의 작품으로 전세계 뮤지컬 팬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는 뮤지컬 계의 거장이다. 그의 최근작 '봄베이 드림스'가 브로드웨이에서 공연 중이며 최근에는 웨스트엔드 극장에서 월키 콜린스의 클래식 소설을 바탕으로 한 신작 '더 우먼 인 화이트'를 선보였다. 또 감독 조엘 슈마허의 연출로 '오페라의 유령'을 영화화해 전세계적인 흥행몰이를 한 바 있다.

앤드루 로이드 웨버는 토니상 7회, 그래미상 3회, 올리비에상 6회, 골든 글러브상, 오스카상 등의 화려한 수상 경력을 가지고 있으며 2000년에는 리처드 로저스 최우수 뮤지컬상과 크리틱스 서클 최우수 뮤지컬상을 수상하였다. 1992년에 기사 작위(Knighthood)를, 1997년에는 종신작위(House of Lords)을 수여받아, 영국에서 그의 이름을 부를 때는 로드(Lord)라는 존칭어를 수반해야 한다.
작곡 : Georg Fridrich Handel (게오르그 프리드리히 헨델,George Frideric Handel)
1685년 2월 23일 ~ 1759년 4월 14일)은 독일에서 태어나 영국에서 활동한 바로크 시대의 작곡가이다. 헨델은 46곡의 오페라와 우수한 오라토리오를 비롯하여 오케스트라, 바이올린, 쳄발로, 오르간 분야에 이르기까지 많은 작품을 남겼다. 그의 음악은 명쾌하고 호탕하며 신선하여 생생한 리듬에 성악적이라고 평가된다. 독실한 개신교(루터교) 신자인 헨델의 대표적인 교회음악은 《메시아(Messiah)》로서 당시 ... 1685년 2월 23일 ~ 1759년 4월 14일)은 독일에서 태어나 영국에서 활동한 바로크 시대의 작곡가이다. 헨델은 46곡의 오페라와 우수한 오라토리오를 비롯하여 오케스트라, 바이올린, 쳄발로, 오르간 분야에 이르기까지 많은 작품을 남겼다. 그의 음악은 명쾌하고 호탕하며 신선하여 생생한 리듬에 성악적이라고 평가된다. 독실한 개신교(루터교) 신자인 헨델의 대표적인 교회음악은 《메시아(Messiah)》로서 당시 영어 번역 성경인 킹 제임스 성경의 구절에 곡을 붙인 오라토리오이다.

헨델은 프로이센의 할레(현재는 독일 영토)에서 태어났다. 함부르크, 피렌체 등지에서 활동하다 1712년 이후 런던에 정착하였다. 앤 여왕의 비호를 받아 오페라 작곡가로 이름을 떨치게 되었다. 1726년에는 영국에 귀화하여, 죽을 때까지 영국에 살면서 오페라 46작품과 오라토리오 23작품, 많은 양의 교회음악은 물론 많은 기악음악 작품을 남겼다.

그러나 헨델의 일생이 그리 평탄한 것은 아니었다. 이탈리아 악파인 조반니 보논치니(1670년-1747년)와는 음악상의 적수였다. 이들의 경쟁과 헨델을 질투하는 음모 때문에 수차례의 파산과 세 번이나 죽을 고비를 당했지만 헨델은 그를 원망하지않고 오히려 보논치니의 질투를 은근히 즐겼다고 한다.

1708년 피렌체와 베네치아로 수업하러 갔다가 이탈리아의 도메니코 스카를라티와 만나 오르간과 하프시코드 경기를 하여 그 뒤부터 그와 친교를 맺었다

헨델은 그 후 영국으로 건너가 1732년까지 오라토리오를 작곡하기 시작하였다. 아일랜드 더블린에서 필생의 대작인 《메시아》를 24일이란 단기간에 탈고하였고 1742년 4월 12일 더블린에서 초연하여 절찬을 받았다. 《메시아》 초연후 8년째인 그가 65세 되던 해에는 완전한 승리자가 되었다. 그의 생존 중 《메시아》 공연만 해도 34회나 되었다고 한다. 1732년의 《에스테르》 개정판에 이어 1735년 사순절(四旬節)[3]에는 성가작품을 포함한 약 15편의 오라토리오를 헤이마케트 극장에서 연속 연주하여 점차 오라토리오 작곡가로서의 명성을 높였다. 또 1736년에는 《메시아》에 버금가는 유명한 오라토리오 《알렉산더의 향연(Alexander's Feast)》을 작곡하고 1738년∼1751년까지도 거의 모두를 오라토리오의 작곡에 경주하였다.

헨델은 가난한 음악가 구제회에 1000 파운드를 남겨 놓고 세상을 떠났다. 영국의 국가적인 음악가로서 존경을 받아 사후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묻혔다.

헨델은 그 명성을 거의 그의 극적 작품에서 얻었지만 통주저음을 바탕으로 성립되는 바로크적 협주양식에 기초를 두고 유려한 벨칸토의 성악적 멜로디와 결부하여 항상 간결·명쾌하며 밝은 표현을 나타냈다. 그의 멜로디에서 벨칸토 양식은 독일의 내면적인 힘찬 표현과 결부되어 호모포니의 방향으로 향한다. 또한 바로크 특유의 일정한 악형(樂型)의 반복이 사라반드, 쿠랑트, 가보트 등의 리듬에 지탱되면서 단조롭게 고수(固守)되고 있는 경우가 많으며, 바흐에서 볼 수 있는 표현의 길이라든가 다양성은 없으나 그 대신 알기 쉽고 명쾌한 표정을 보여준다. 그는 합창에서도 뛰어난 솜씨를 발휘했다.
작곡 : Charles Gounod (샤를르 구노,Charles-Francois Gounod)
대표작: 오페라 '파우스트', '로미오와 줄리엣'. 바흐의 '평균율 클라비어 곡집'의 전주곡을 딴 '아베 마리아', 레퀴엠 대표작: 오페라 '파우스트', '로미오와 줄리엣'. 바흐의 '평균율 클라비어 곡집'의 전주곡을 딴 '아베 마리아', 레퀴엠
작곡 : Wolfgang Amadeus Mozart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
서양 고전주의 음악의 완성자이자 현재까지도 전 세계에서 가장 사랑받는 음악가. 35년의 생애 동안 교향곡, 협주곡, 소나타, 오페라, 실내악, 미사곡 등 600개가 넘는 작품을 남겼으며 많은 작품이 각 장르의 정점에 있다고 평가받고 있다. 다섯 살 때 첫 작곡을 했으며 열네 살 때 이탈리아 여행 중에 오페라 [폰투스의 왕 미트라다테스]를 무대에 올려 대성공을 거두었다. 좋은 일자리를 얻기 위해 몇 차례에 걸쳐 유... 서양 고전주의 음악의 완성자이자 현재까지도 전 세계에서 가장 사랑받는 음악가. 35년의 생애 동안 교향곡, 협주곡, 소나타, 오페라, 실내악, 미사곡 등 600개가 넘는 작품을 남겼으며 많은 작품이 각 장르의 정점에 있다고 평가받고 있다. 다섯 살 때 첫 작곡을 했으며 열네 살 때 이탈리아 여행 중에 오페라 [폰투스의 왕 미트라다테스]를 무대에 올려 대성공을 거두었다. 좋은 일자리를 얻기 위해 몇 차례에 걸쳐 유럽 전역을 여행했으나 경이적인 음악의 신동이라는 평판과 작품들의 대성공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그것을 얻는 데 실패했다. 고향인 잘츠부르크로 돌아와 궁정 오르가니스트로 잠깐 동안 일했으나 대주교와의 불화로 해고되고 이후 빈으로 거처를 옮겨 작곡과 연주에 전념했다. 피아니스트, 작곡가로서의 높은 명성과 [피가로의 결혼], [돈 조반니] 등 오페라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당시 그것에 대한 보수는 그의 형편없는 경제관념과 낭비벽을 감당하기에는 충분치 않았다. 안정적인 예술 활동을 위해서는 궁정이나 귀족으로부터의 후원이 필수적이었던 시대에 높은 급료를 안정적으로 지급받을 수 있는 일자리를 죽을 때까지 얻지 못했던 모차르트는 짧은 생애 동안 주로 생계를 위해 곡들을 썼고, 만년에는 닥치는 대로 주위 사람들에게 돈을 빌려 달라는 편지를 보냈다. 그런 불안정한 생활 속에서도 모차르트의 창작열은 죽기 직전까지 조금도 식지 않아 음악사에 영원히 남을 수많은 작품들을 썼다. 모차르트의 천재성에 관한 일화는 무수히 많은데 바티칸에서 외부에 그 악보를 공개하지 않고 있던 비곡 알레그리의 [미제레레]를 처음 듣고 거의 완벽하게 채보했고 이틀 뒤 두 번째에는 몇 개의 소소한 것들을 수정해 악보를 완성했다. 모차르트에 의해 처음으로 [미제레레]는 일반에 악보가 공개되었다. [교향곡 36번]을 사흘 만에 작곡했고 그의 3대 교향곡으로 평가받는 [교향곡 39번]부터 [교향곡 41번]까지를 6주 만에 완성했다. 모차르트 스스로 자신은 음악에 대한 천재를 타고났다고 자부했으나 작곡을 위해서 자신보다도 많은 시간을 생각하고 거장들의 작품을 연구한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다고 단언했을 정도로 그는 음악에 전념한 천재이기도 했다. 모차르트의 작품은 가볍고 경쾌한 장조의 작품이 대부분인데 만년에 접어들어서는 장조의 작품이라도 비장함과 애수에 넘치는 작품이 늘었고, 그런 작품들은 ‘천상의 음악’이라고 형용되었다. 죽기 두 달 전 건강이 이미 안 좋은 상황에서도 [마적]을 작곡해 초연하는 등 정력적으로 곡들을 썼으나 미완의 걸작 [레퀴엠]을 쓰던 도중 쓰러져 불과 2주 뒤에 35년 10개월의 젊은 나이로 빈에서 사망했다. 모차르트의 [레퀴엠]은 하이든, 베버, 베토벤, 슈베르트, 쇼팽, 로시니, 베를리오즈 같은 음악가들뿐 아니라, 실러, 괴테, 나폴레옹을 비롯해 많은 저명인사와 유럽 왕족들의 장례식에서 연주되었다.
작곡 : Richard Wagner (리하르트 바그너,Wilhelm Richard Wagner)
1813년 5월 22일 ~ 1883년 2월 13일)는 독일의 작곡가, 극작가, 극 연출가, 지휘자, 음악 비평가 및 저술가였다. 독일의 오페라에 있어서 대표적인 작곡가 중의 하나이며, 19세기 유럽의 음악 및 문화 전체에 있어서도 독보적인 예술가 중의 하나였다. 그의 종합예술관과 종교적 예술관은 각 예술의 분야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음악에 있어서 독일의 낭만주의 오페라의 전성시대를 열었으며, 음악극이라는 새로... 1813년 5월 22일 ~ 1883년 2월 13일)는 독일의 작곡가, 극작가, 극 연출가, 지휘자, 음악 비평가 및 저술가였다. 독일의 오페라에 있어서 대표적인 작곡가 중의 하나이며, 19세기 유럽의 음악 및 문화 전체에 있어서도 독보적인 예술가 중의 하나였다. 그의 종합예술관과 종교적 예술관은 각 예술의 분야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음악에 있어서 독일의 낭만주의 오페라의 전성시대를 열었으며, 음악극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창시하였다. 활동후기에는 풍부한 반음계적 음악언어를 발전시켜, 후대의 작곡가들로 하여금 조성을 약화시키고 결국에 파기하도록 하는 견인차 역할을 했다. 또한 본인의 작품을 공연하는 바이로이트 축제만을 위한 전용 공연장인 바이로이트 페스트슈필하우스를 건립했다.

그는 음악사에 있어서 뿐 아니라 문학사에서도 많은 영향을 준 독보적 예술가이다. 음악사에서는 초기 낭만파의 뒤를 이어 낭만파 음악을 대성한 음악인이며, 문학사에서는 신낭만파의 희곡 영역에 있어서의 거봉이었다. 또한 니체에게도 영향을 준 그는, 쇼펜하우어의 영향을 받아 염세주의, 종교적인 신비주의, 탐미주의적인 경향의 작품으로 19세기 말 낭만주의 부흥의 터전을 마련하였다.

바그너의 유럽 예술과 문화에 기여한 바는 부인할 수 없으며 기념비적이다. 그의 생전과 사후 여러 해 동안, 바그너는 그의 다수의 애호가들 사이에서 광적인 호응을 이끌어냈으며, 그들 사이에서 거의 신과 같은 지위를 가지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의 음악인 트리스탄과 이졸데는 특히 중요한 새 지평을 열었다. 이후 여러 해 동안 많은 작곡가들은 바그너 편에 서거나 바그너에 반대하는 편 중 하나에 설 수밖에 없었다. 안톤 브루크너와 휴고 볼프는 그에게 특히 많은 빚을 졌으며, 세자르 프랑크, 앙리 뒤팍, 에르네스트 쇼송, 쥘 마스네, 알렉산더 폰 쳄린스키, 한스 피츠너 등등의 수많은 음악가들 또한 그러하였다. 구스타프 말러는 "오직 베토벤과 바그너만이 있었다"고 말했다. 클로드 드뷔시와 아르놀트 쉔베르크의 이십 세기 화성 혁명은 트리스탄으로부터 그 근원을 찾을 수 있다. 처음으로 어떤 종류의 드라마적인 공연 동안에 불빛을 희미하게 해야 한다고 처음 요구했던 사람이 바그너였으며, 처음으로 관현악단 피트(바이로이트에서는 관중석과 완전히 차단되어 있다)를 바이로이트 극장에서 사용했던 것도 그였다. 바그너는 그의 작품이 청중들의 상상 속에서 경험될 수 있는 "보이지 않는 극장"을 꿈꿨다. 오디오 기기의 발달로 이 꿈은 현실이 되었다.

바그너의 문학과 철학, 미술에 대한 영향 또한 분명하다. 영향력 있는 저작물인 비극의 탄생의 저자인 프리드리히 니체는 처음에 바그너를 숭배했는데, 그의 음악에서 유럽 정신이 다시 젊어지는 가능성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니체는 《파르지팔》 이후에 바그너와 결별했다. 그는 《파르지팔》를 기독교 신앙심에 영합하는 표현으로 보았기 때문이었다. 20세기에, W. H. 오든은 한때 바그너를 "아마도 모든 사람들 가운데 가장 위대했던 천재"로 불렀으며, 제임스 조이스, 토마스 만, 그리고 마르셀 프루스트도 바그너에게 크게 영향을 받아 그들의 소설에서 바그너를 논했다. 바그너는 T. S. 엘리엇의 《황무지》의 주요 주제 중 하나이며, 그의 오페라에서 많은 부분을 인용하고 있다. 반지의 제왕 작가 존 로널드 로웰 톨킨은 바그너와 그의 음악에 대해 아주 잘 알고 있었다. 톨킨 자신이 옥스포드의 고대영어 교수이었기에 북구 신화와 사가에는 정통했었고, 따라서 북구 신화를 차용한 바그너의 작품을 그냥 넘어갈 수가 없었다. 또한 그의 절친한 친구였던 C.S. 루이스가 열렬한 바그네리안이었으며, 20세기 초의 유럽 문화계의 풍토를 보아도 바그너에 대한 자기만의 관점을 가지지 않을 수 없는 상태였었다. 게다가 톨킨은 C.S. 루이스와 함께 종종 바그너 공연을 보러 갔었으며, 한때는 C.S. 루이스와 함께 <니벨룽의 반지>의 2부 발퀴레를 영어로 번역하는 작업을 시도하기도 했다. 또, 그는 바그너를 즐겨 들었고 또 열심히 연구를 했다. 스테판 말라르메, 폴 베를렌느, 그리고 샤를르 보들레르는 그를 숭배했다. 사랑과 죽음(즉 에로스와 탄토스)의 관계에 대한 것 등 그의 음악 속의 많은 발상은, 지그문트 프로이트에 의한 정신 분석을 예고했다. 추상미술의 아버지 바실리 칸딘스키는 바그너 신봉자이기도 했다. 바그너의 오페라 '로엔그린'을 듣고 깊은 감명을 받아 음악을 들으면서 색을 보는 공감각을 경험했다. 그 후 칸딘스키는 음악이 그림이 될 수 있고, 또 그림이 음악이 될 수 있다고 믿었고 그의 그림들은 대상에 연연하지 않는 추상화로 바뀌게 된다. 또 칸딘스키는 '로엔그린'을 듣고 깊은 감명을 받아 '바그너의 음악에서 바이올린, 베이스, 관악기의 울림, 나의 마음 속에서 나의 모든 빛깔을 보았다. 야성적이며 미친 것 같은 선들이 내 앞에 그려졌다. 회화는 음악이 갖고 있는 것과 같은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일이었다.' 라고 말했다

바그너의 영향이 꼭 긍정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한 때, 독일 음악계는 바그너 지지자와 요하네스 브람스 지지자의 두 파로 나뉘었다. 브람스 지지파는 강력한 비평가인 에두아르트 한슬릭의 도움을 받고 있었는데, 그는 전통 형태를 최고로 인정하고 바그너식 혁신에 반대하는 보수파를 이끌었다. 클로드 드뷔시는 바그너를 심하게 비판했던 사람이지만 ("그 오래된 중독자"), 바그너의 영향을 가장 크게 받은 작곡자 중 한 사람임을 부인할 수는 없었다. 사실 드뷔시는 바그너의 영향을 의심할 여지도 없이 받았기 때문에 바그너와 결별할 필요가 있었던 많은 작곡가들 중에 한 명이었다.

바그너의 음악은 강한 반응을 계속 일으켰다. 그의 후기작에서, 그는 바그너 작품의 그것처럼 긴 시간과 깊은 맥박을 만들어내어 음악을 완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청자들이 바그너의 시간 개념에 완전히 익숙해지기를 요구하는 그런 음악을 만들어 냈다. 로시니("바그너는 굉장한 순간과 진절머리나는 15분을 가지고 있다")를 포함해 많은 저항이 있었지만, 그 자신의 "Guillaume Tell"이 네 시간 이상의, 어떤 바그너 작품 하나보다도 긴 시간을 요구했다. 바그너의 이상은, 지크프리트의 "금발의 괴물" 영웅주의로부터, 그의 열성적인 쇼펜하우어 오독과 더불어 죽음과 신격화에 대한 매혹에 이르기까지, 이제는 심하게 유행에 뒤떨어져 있다. 그러나 여전히 그의 오페라는 계속 강한 추종을 불러일으키고 있으며, 바그너는 나폴레옹의 뒤를 이어 두 번째로 그에게 자극받은 이차 문학의 양이 많은 역사적 인물로 꼽히고 있다. 그렇게 그는 계속적으로 많은 찬반 논란과 존경을 동시에 받고 있다. 그 원인이 그의 음악의 뿌리에 있는 능가할 자 없는 숭고함, 힘, 장엄함, 그리고 때때로 위험한 초월적인 아름다움 때문이다.

종합적인 음악 표현과 유도동기의 사용은 20세기의 영화음악에 강한 영향을 주기도 하였다. 바그너는 또한 극도로 찬반이 엇갈리는 평가를 받는 인물로서, 이는 그의 음악과 드라마에 대한 혁신으로 인한 것뿐만 아니라, 그의 반유대인적 시각에도 기인한다.

바그너는 새로운 교향악적인 오페라(또는 "음악극")로 잘 알려져 있다. 그는 작품에 새로운 화성, 연속적인 대위법적 텍스처, 풍부한 오케스트레이션, 그리고 유도동기(라이트모티프, Leitmotif; 특정한 인물이나 상황에 연관된 음악 동기)을 사용하였다. 바그너의 반음계적 음악 언어는 유럽의 고전음악에 중대한 변화를 끼쳤으며, 이는 극단적인 반음계법과 무조성을 지향한다. 그의 음악극들은 "총체예술(Gesamtkunstwerk)"이라는 미학적 개념에 기반을 두었으며 니벨룽의 반지(1876)의 4부작이 대표적인 작품이다.

바그너의 오페라와 음악극은 그의 대표적 예술적 유산이며 시기별로 세 범주로 나눌 수 있다.

바그너의 초기 단계는 나이 열 아홉에 그의 첫 오페라 도전 혼례(Die Hochzeit)로 시작되었는데, 작곡의 초기 단계에서 1832년에 포기했다. 바그너의 완성된 초기 단계 오페라는 세 개로, 요정(Die Feen), 연애금제(Das Liebesverbot - 쉽게 말해서 연애 금지), 그리고 리엔치이다. 이 작품들의 작곡 양식은 전형적인 것으로 음악사에서 바그너의 위치를 매김해 준 혁신적인 발상은 포함되어 있지 않다. 그의 생의 나중에, 바그너는 이 비성숙한 작품들은 그의 예술 작품의 일부로 치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 작품들은 거의 연주되지 않지만, 리엔치 서곡은 콘서트용 작품이 되었다.

바그너의 중기 단계의 작품은 굉장히 뛰어난 것으로 여겨지며, 그의 드라마 작가이자 작곡가로서의 힘이 깊어가는 것을 보여주기 시작한다. 이 시기의 작품은 방황하는 네덜란드인(Der Fliegnde Hollander), 그 뒤를 이어서 탄호이저(Tannhauser)와 로엔그린(Lohengrin)을 포함한다. 이 작품들은 오늘날 광범위하게 연주되고 있다.

바그너의 후기 단계의 오페라 작품들은 총체예술을 본격적으로 실현시킨 음악으로서 음악극이라는 명칭을 사용한다. 트리스탄과 이졸데(Tristan und Isolde)은 그의 가장 위대한 단편 음악극 작품으로 거론되기도 한다. 뉘른베르크의 마이스터징어(장인 가수)(Die Meistersinger von Nurnberg)는 바그너의 유일한 희극이며 (그의 잊혀진 초기작인 연애금제를 제외하면) 현재 공연되는 오페라 가운데 가장 긴 것들 중 하나이다. 니벨룽의 반지는 흔히 반지 사이클이라고 회자되며, 독일과 스칸디나비아 신화에 기초한 네 개의 오페라 모음이다. 연주에 걸리는 시간은 대략 16시간 가량으로, 반지 사이클은 이제까지 작곡된 음악 작품 중 가장 야심찬 것으로 불린고 있다. 바그너의 최후의 오페라, 파르지팔(Parsifal)은 바그너의 바이로이트 축제를 위해 특별히 작곡되었으며 악보에 "무대신성제전극"("Buhnenweihfestspiel")이라고 쓰여 있다. 이 작품은 성배에 대한 기독교 전설에 기초해 쓰여진 명상적인 작품이다.

그의 오페라와 음악 이론에 대한 수필에 걸쳐, 바그너는 오페라라는 매체에 대한 강한 영향력을 행사해 왔다. 그는 그가 "악극"이라고 부른, 음악과 드라마의 요소를 모두 함께 융합한 새로운 오페라 형태에 대한 옹호자였다. 대본 작성 작업을 직접 하지 않은 다른 오페라 작곡가들과 달리, 바그너는 그의 오페라를 위한 대본을 직접 썼으며 자신은 그것을 "시"라고 지칭했다. 그의 작품의 줄거리 대부분은 북유럽 신화와 전설에 기초해 있다. 거기에 더해, 바그너는 오케스트라의 역할이 가수의 그것과 동등한 작품 양식을 개발해 냈다. 오페라의 드라마에 대한 오케스트라의 역할에는, 특정한 인물, 장소, 줄거리 요소를 알려 주는 음악 주제인 유도동기의 연주가 포함된다; 유도동기가 서로 복잡하게 얽히고 진화해 나가는 양상이 드라마의 발전을 설명하고 있다.

바그너의 음악적인 양식은 종종 서양 고전음악의 낭만파 시기의 축약으로 간주되는데, 이는 전례가 없는 감정적 표현에 대한 탐구 때문이다. 그는 화성과 음악 형식에 있어서 새로운 생각을 소개했으며, 여기에는 극단적인 반음계법이 포함된다. 트리스탄과 이졸데에서, 그는 전통적인 조성 체계의 한계를 탐구하여 조와 화음을 각각 인물과 동일시하는 방법으로, 20세기의 무조성으로의 길을 가리켰다. 몇몇 음악 사학자는 현대 서양 고전음악의 시작을, 소위 트리스탄 화음이라고 불리는 트리스탄의 첫 음표들로 보고 있다.

오페라를 떠나서는, 바그너는 상대적으로 적은 수의 음악을 작곡했다. 여기에는 2개의 교향곡 (나이 19세와 21세에 씀) 과 몇 개의 서곡, 합창곡 및 피아노곡, 그리고 글룩의 아울리데의 이피게니의 관현악 재편곡 등이 포함된다. 이들 중에 가장 자주 연주되는 작품은, 그의 두 번째 아내인 코지마의 생일을 위해 작곡된 실내악 작품인 지크프리트 목가이다. 목가는 반지 사이클에서 여러 모티프를 끌어오지만, 반지의 일부는 아니다. 그 다음으로 가장 유명한 것은 베젠동크 가곡으로, 이전에는 여성 성악을 위한 다섯 개의 노래로 알려졌으며, 바그너가 트리스탄을 작곡하는 동안에 마틸데 베젠동크를 위해 작곡되었다.

파르지팔을 끝낸 후, 바그너는 분명히 교향곡 작곡으로 방향을 전환하려 의도했다. 하지만 실질적으로 그가 죽을 때까지 아무것도 작곡되지 않았다.

바그너의 중기와 후기 오페라에서 서곡과 관현악 소절은 콘서트 작품으로 흔히 연주된다, 이들의 대부분에 대해, 바그너는 이 발췌부에 대해 짧은 소절을 덧붙여서 곡이 갑자기 끝나지 않도록 만들었다. 예를 들어, 이런 경우에 파르지팔 전주곡과 지크프리트의 장송 음악이 해당된다. 흥미로운 사실은 트리스탄 전주곡의 콘서트용 판은 인기가 없고 거의 들을 수 없다는 것이다; 전주곡의 원래 형태가 콘서트 연주를 위해서도 보통 더 나은 것으로 간주된다.

영어권 국가에서 신부의 입장 시에 연주되는 가장 대중적인 결혼 행진곡 중 하나(흔히 "여기 신부가 온다"("Here Comes the Bride")라고 알려져 있다)는 그 가락을 로엔그린의 "혼례 합창곡"에서 따 온다. 오페라에서 이 곡은 신부와 신랑이 축하 행사장을 떠나 결혼식장으로 들어갈 때에 불린다. 로엔그린과 엘자의 재앙과도 같은 결혼은, 합창곡이 불리는 20분 후에 회복할 수 없이 파경으로 도달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품의 이런 이상한 사용을 막는 이유가 되지는 못했다.
작곡 : Sergei Rachmaninov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Sergey Vasilyevich Rachmaninoff Sergej Rachmaninoff )
러시아계 미국인 작곡가, 피아노 연주가이자 지휘자이다. 라흐마니노프의 가족은 오래된 귀족 가문의 하나였다. 9세 때 페테르스부르크 음악원에 입학하였으며, 3년 뒤에 모스크바 음악원에서 피아노와 작곡을 공부하였다. 1895년에 완성된 1번 교향곡은 라흐마니노프의 불안증세 속에 1897년 발표되었는데, 이는 많은 혹평을 받게 되었다. 이 시기부터 그는 우울증에 시달려 약 3년 간 거의 작곡 활동을 하지 못하였... 러시아계 미국인 작곡가, 피아노 연주가이자 지휘자이다.
라흐마니노프의 가족은 오래된 귀족 가문의 하나였다. 9세 때 페테르스부르크 음악원에 입학하였으며, 3년 뒤에 모스크바 음악원에서 피아노와 작곡을 공부하였다.

1895년에 완성된 1번 교향곡은 라흐마니노프의 불안증세 속에 1897년 발표되었는데, 이는 많은 혹평을 받게 되었다. 이 시기부터 그는 우울증에 시달려 약 3년 간 거의 작곡 활동을 하지 못하였다. 하지만 19되었다. 1901년 완성된 제2번 피아노 협주곡 역시 니콜라이 달에게 헌정된 것이다.

1905-1906년에는 모스크바 황실 극장 지휘자를 거쳐 미국 및 유럽 연주 여행을 하였다.

1917년 러시아에서는 2월 혁명이 일어났고 곧 라흐마니노프의 재산도 몰수당하였다. 그는 가난 속에서 북유럽에 머물러있다가 미국에서 지휘자의 자리를 제안받고 건너가 음악활동을 계속했다.

1942년부터 건강이 급격히 악화되기 시작했고 결국 1943년 사망했다. 그는 모스크바에 묻히고 싶어했지만 이는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의 피아노 연주가로서의 기량은 널리 알려져 있었으나 작곡가로서의 명성은 뒤늦게 얻게 된 것이다. 그는 종종 자신의 작품을 직접 연주했다. 전설적인 기교와 13도의 음정까지도 연주해 낼 수 있을 만큼 컸던 손 등에 힘입어, 그는 당대 가장 위대한 피아노 연주가 가운데 한 명이었다. 라흐마니노프 스스로 연주한 자신의 음악이나 일반적인 레파토리 곡들의 연주는 빅터 토킹 머신 컴퍼니의 레이블로 출시되었다.

라흐마니노프는 후기 낭만파에 속하는 작품을 썼다. 그의 작품은 다양한 악곡 형식과 장르를 포괄하지만, 그 안에서도 슬라브적인 경향이 짙게 나타난다.

그의 작품에는 다섯 개의 피아노 협주곡, 세 개의 교향곡과 두 개의 피아노 소나타, 세 개의 오페라, 저녁기도곡, 《파가니니 주제에 의한 광시곡》, 전주곡 올림 다 단조를 포함한 스물 네 개의 전주곡, 열 일곱 개의 연습곡, 교향적 무곡과 많은 가곡 등이 있다. 그는 비록 명백히 쇼팽과 리스트의 영향을 받았지만, 그의 작품 대부분은 차이콥스키와 비슷한 후기 낭만파 양식이다.
작곡 : John Tavener (존 태브너,John Kenneth Tavener)
작곡 : Leonard Bernstein (레너드 번스타인)
레너드 번스타인은 1918년 매사추세츠주 로렌스에서 출생했다. 그의 부모는 러시아 출신이며 미국으로 이주한 유대인이다. 어린시절부터 피아노 연주하기를 좋아했으며 음악적인 재능을 보였다. 하버드대학교에 진학하여 작곡을 전공했고, 1937년 모더니즘 음악의 대가였던 디미트리 미트로폴로스(Dimitri Mitropolous)를 만나 그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또한 하버드의 미학교수였던 데이비드 프롤(David Pral... 레너드 번스타인은 1918년 매사추세츠주 로렌스에서 출생했다. 그의 부모는 러시아 출신이며 미국으로 이주한 유대인이다. 어린시절부터 피아노 연주하기를 좋아했으며 음악적인 재능을 보였다. 하버드대학교에 진학하여 작곡을 전공했고, 1937년 모더니즘 음악의 대가였던 디미트리 미트로폴로스(Dimitri Mitropolous)를 만나 그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또한 하버드의 미학교수였던 데이비드 프롤(David Prall)로 부터 예술을 이해하고 음악을 표현하는데 깊은 영향을 받았다. 1939년 그의 졸업논문은 '인종적 요소가 미국 음악에 끼친 영향'이라는 주제로 썼다.

졸업 후에는 F.라이너, S.쿠세비츠키에게 지휘법을, 톰프슨에게 관현악법을 배웠다. 1943년 뉴욕필하모니 음악감독이었던 아서 로진스키(Arthur rodzinski)의 인정을 받아 뉴욕필하모닉의 보조지휘자가 되었다. 그해 11월 14일 뉴욕필하모니의 지휘자 브루노 발터(Bruno Walter)가 급환으로 지휘를 못하게 되자, 그의 대신 뉴욕필하모니의 지휘를 맡았고 CBS방송을 통해 전국에 중계되었다. 번스타인은 이 한번의 기회로 유명세를 탔고 이름을 떨치게되었다. 1944년 피츠버그 교향악단을 지휘하였고 자신의 첫 교향곡 《예레미야 심포니 Jeremiah Symphony》을 연주했다.

당시 유럽에서 일어난 2차세계대전은 러시아로 확전되었고 히틀러가 저지런 대량학살 소식이 미국 전해졌다. 부모가 러시아 출신인 번스타인은 러시아 난민을 돕자는 자선행사에 자주 초대되어 나갔으며 카네기홀 등에서 자선 연주회를 열었다. 번스타인은 음악뿐만아니라 정치활동에도 적극적이었다. 디트로이트를 중심으로 진보당 창당에 관여하였고 진보적 단체의 단결을 주장했다. 이때부터 그는 FBI의 조사를 받았으며 그의 정치적 성향은 공산주의로 분류되었다. 그는 CBS 방송국 출입이 금지되고 블랙리스트에 올라 그의 음악과 공연은 취소되었다. 번스타인은 정치적인 성향 때문에 급격한 내리막길을 걷게 되었다. 마침내 미국의 유력지인 라이프 지에 50명의 대표적인 좌파 블랙리스트로 번스타인이 소개되었고 뉴욕필하모니 지위자 명단에서도 제외되었다.

1953년 7월 미국 국무부는 번스타인의 여권 갱신을 거부하였고 항상 FBI의 감시를 받으며 고립되었다가 자신의 활동과 신념을 부정하는 진술서에 서명하고 나서야 여권을 받아 유럽으로 갈 수 있었다. 그해 8월에 이탈리아로 건너가 연주활동을 하였는데 음악활동을 계속하기 위해서는 표면적으로 보수적 성향의 미국인임을 증명해야만 했다. 그 결과 컬럼비아 영화사의 승인을 얻어내 《워터프론트 Waterfront》(1954)라는 영화음악 제작을 맡을 수 있었다. 그후 포드 자동차의 의뢰를 받아 연주회를 열었고 CBS를 통해 방송되었다. 번스타인은 다시 뉴욕 필하모니로 복귀하게 되었으며 미국에서 지휘자로서 활동할 수 있게 되었다. 1957년 뉴욕필하모닉의 상임지휘자, 이듬해 음악감독으로 취임하였고 그가 연주하는 음악회는 최대의 흥행을 보증하게 되었다. 번스타인은 뮤지컬《웨스트사이드 스토리 West Side Story》(1957)의 음악을 담당하면서 가장 미국적인 뮤지컬의 창작하였다는 칭송을 받았다.

하지만 그의 진보적인 성향이 보수로 전향한 것은 아니었으며 미국내 민권투쟁과 인종차별 등 사회적인 문제에 적극 참여하였다. 1964년 번스타인은 미국에서 일어난 흑인민권운동에 가담하여 마틴 루터 킹 목사(Martin Luther King)와 함께 앨라바마에서 열린 셀마 대행진에 참가하였다. 번스타인은 자신의 정치적 성향을 숨기지 않고 드러냈다. 닉슨 행정부가 일으킨 베트남 전쟁의 부당함을 지적하며 종전을 주장하였고 미국의 제국주의를 비판하였다. 이 시기에 자신의 사회사상을 표현한 교향곡《카디시 Kaddish》(1963)와《치체스터 시편 Chichester Psalms》(1965)을 발표하였다. 미국의 보수파인 레이건 행정부가 들어서자 미국내 진보세력의 몰락을 우려하였고 보수파가 추진하는 핵무기정책에 반대하는 운동에 참여하였다. 하지만 자신의 이상과 다르게 변모하는 미국사회의 모습으로 번스타인은 상실감으로 실의에 빠져들었다. 20세기 미국을 표현하는 오페라를 구상하였으나 끝내 작곡을 완성하지 못했다. 1985년 세계 청소년 오케스트라를 조직하여 영국, 일본, 그리스, 헝가리 등지에서 연주했으며 이후에는 주로 유럽을 무대로 연주활동을 했다. 1990년 10월 14일 사망했다.
작곡 : Cesar Franck (세자르 프랑크)
벨기에 출신의 프랑스 작곡가이자 오르간 연주자이다. 프랑크는 벨기에 리에주의 독일계 벨기에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그가 피아노 연주자가 되기를 바랐고, 리에주에 있는 음악원에 보냈다.리에주 음악원에서 배움을 시작해 1835년에 파리 음악원에 입학. 피아노에서 《푸가와 그 밖의 것》 등으로 1등상을 받는 등 우수한 성적을 거두었으나 부친으로 인해 일단 벨기에로 돌아온 뒤 1844년에 재차 파리로 ... 벨기에 출신의 프랑스 작곡가이자 오르간 연주자이다.

프랑크는 벨기에 리에주의 독일계 벨기에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그가 피아노 연주자가 되기를 바랐고, 리에주에 있는 음악원에 보냈다.리에주 음악원에서 배움을 시작해 1835년에 파리 음악원에 입학. 피아노에서 《푸가와 그 밖의 것》 등으로 1등상을 받는 등 우수한 성적을 거두었으나 부친으로 인해 일단 벨기에로 돌아온 뒤 1844년에 재차 파리로 나와 정주하기에 이르렀다. 당시 파리는 오페라 만능의 추세에 있었으며 그는 1845년 이후 교회 오르가니스트의 길을 택하여 1858년에는 생 클로티드 성당의 주자가 되었다. 1872년에는 실력을 인정받아 파리 음악원의 오르간과 교수가 되었다. 그는 교회의 오르간석에 앉아 있으면서 당시 일반적으로 관심이 적었던 바흐, 베토벤을 연구하는 등 꾸준히 실력을 기르고 있었다. 그리하여 이 기간의 남모르는 그의 노력은 만년에 이르러 작곡가로서의 천분을 풍족한 결실로 이끌었다고 할 수 있다.

즉 초기의 가곡, 실내악곡, 피아노곡 등은 아직 개성이 빈약하여 때로는 자칫하면 살롱풍의 요설(饒舌) 같은 위험을 범하기 쉬웠으며 그의 중기(中期)에는 미사곡, 오르간곡 외에 종교음악이 점차 충실함을 보이기 시작하였으나 프란츠 리스트 등 독일 낭만주의 음악의 영향에 바흐를 가미한 수법으로 충분한 확신을 엿볼 수는 없었다. 그러나 오라토리오 《속죄(贖罪)》(1861-1872)를 비롯한 만년의 여러 작품은 온갖 장르에서 리스트나 바그너의 반음계적 화성과 바흐에게 배운 폴리포니, 그리고 베토벤에게 배운 전개 내지는 변주를 개성의 내부에서 굳게 결부시키고 있다. 말하자면 중기(中期)에서 발견되었던 한 방향을 확실한 토대 위에 확립시키고 원숙해짐을 꾀하는 일에 성공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경우 교향곡이나 실내악곡에는 순환형식의 이름으로 불리는 한 수법이 다악장 구성을 주제적 및 논리적으로 연결짓는 것으로서 예리하게 추구되고 있다. 이리하여 프랑크는 독일음악에서 많은 것을 배워 프랑스 19세기 후반의 순수기악 부흥에 큰 추진력이 되었다. 그리고 일반이 그에 대한 몰이해를 마침내 개선하려 하고 있었을 때 불행하게도 마차에 치여 가슴을 다친 것이 원인이 되어 병상에 누워 몇 해 후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러나 그의 사망 후 그를 따랐던 많은 사람들, 즉 앙리 뒤파르크, 뱅상 당디, 에르네스트 쇼송, 보르드, 알렉시스 드 카스티용, 알투르 코키알(1846-1910), 피엘 드 브레빌(1861-1949), 가브리엘 피에르네(1863-1937), 폴 피달르(1863-1931), 조제프 기 로파르(1864-1955), 기욤 르쾨(1870-1894) 등의 준재(俊才)들은 '프랑키스트'라고 하는 그룹을 스스로 형성하여 스승 프랑크의 정신을 지주로 삼아 프랑스 근대음악에서 큰 세력을 이룩했다. 그리고 그 영향력은 또한 댕디의 '스콜라'를 통하여 현대에 이르고 있다. 주요 작품으로는 《교향곡 라단조 (1888)》, 피아노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교향적 변주곡 (1885)》, 《교향시》 3곡(1882, 1884, 1888), 《피아노 5중주》(1879),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 (1886)》, 《현악 4중주곡 D장조》(1889), 피아노 독주를 위한 《전주곡, 코랄과 푸가 (1884)》, 《전주곡-아리아와 피날레》(1887), 오르간을 위한 《3장》(1878), 오라토리오 《속죄》 《지복(至福)》(1879), 가곡 《녹턴(夜想曲)》(1884), 《행렬》(1888) 등이 있다.

그의 마지막 작품이자 위대한 작품 중 하나는 《코랄 제3번 가단조 (1890)》이다. 프랑크는 1890년에 마차채에 찔리는 사고로 늑막염을 얻어 사망하여 파리의 몽파르나스 구역에 있는 몽파르나스 묘지에 안장되었다.
작곡 : Pietro Mascagni (피에트로 마스카니)
작곡 : Felix Mendelssohn (펠릭스 멘델스존,Felix Mendelssohn-Bartholdy)
독일의 초기 낭만파 시대의 작곡가, 피아니스트, 오르가니스트, 지휘자로, 영어권 국가에서는 흔히 펠릭스 멘델스존이라고 한다. 펠릭스 멘델스존은 부유한 시민층 계급의 명망이 있는 유대인 가문에서 태어났다. 유명한 철학자인 모제스 멘델스존(Moses Mendelssohn)은 그의 할아버지다. 그의 아버지인 아브라함 멘델스존 바르톨디(Abraham Mendelssohn Bartholdy)는 1804년에 자신의 ... 독일의 초기 낭만파 시대의 작곡가, 피아니스트, 오르가니스트, 지휘자로, 영어권 국가에서는 흔히 펠릭스 멘델스존이라고 한다.

펠릭스 멘델스존은 부유한 시민층 계급의 명망이 있는 유대인 가문에서 태어났다. 유명한 철학자인 모제스 멘델스존(Moses Mendelssohn)은 그의 할아버지다. 그의 아버지인 아브라함 멘델스존 바르톨디(Abraham Mendelssohn Bartholdy)는 1804년에 자신의 맏형 요제프의 은행에서 일하게 된다. 어머니인 레아 멘델스존 바르톨디(Lea Mendelssohn Bartholdy)는 살로몬의 제조업 가문 출신이다.

아브라함과 레아는 1804년에 결혼하여 베를린에서 함부르크로 거처를 옮긴다. 1805년에 태어난 펠릭스 멘델스존의 누나인 파니 멘델스존은 음악적 재능을 가졌다고 한다. 다른 남매로는 1811년생인 레베카 디리흘레트(Rebecca Dirichlet), 1812년생인 파울 멘델스존(Paul)이 있다. 아브라함 멘델스존의 모든 자녀들은 1816년 3월 21일에 개신교 목사로부터 개신교의 가정 세례를 받았다. 여기서 바로 펠릭스는 야코프 루트비히라는 세례명을 받게 된다.

1844년 여름에 있었던 멘델스존의 8번째 영국 방문에서 그는 런던에서 다섯 개의 필 하모닉 콘서트를 진행했으며 다음과 같이 썼다. "이 계절은 이전과 같았습니다. 3주 전에 매일 약속이 채워졌고 나머지 2개월 동안 나는 더 많은 음악을 듣게되었습니다." (레베카 멘델스존 바르 톨디에게 보낸 편지, 소덴, 1844년 7월 22일). 계속되는 방문에서 멘델스존은 빅토리아 여왕과 남편 앨버트 왕자를 만났는데, 그는 자신의 음악을 크게 경외했던 작곡가였다.

멘델스존의 오라토리오 엘리야는 버밍엄 트리엔날레 뮤직 페스티벌(Birmingham Triennial Music Festival)에 의해 초대받아 1846년 8월 26일 버밍엄 타운 홀(Town Hall)에서 초연되었다. 그것은 영국에서 그의 시간 동안 많은 멘델스존의 작품을 저술하고 번역한 윌리엄 바돌로매에 의해 영어로 번역된 독일어 텍스트로 구성되었다.

1847년 영국을 마지막으로 방문한 멘델스존은 베토벤의 피아노 협주곡 4번 솔로 연주자였으며, 오케스트라와 협연하여 스코틀랜드 교향곡을 연주했다.

멘델스존은 인생의 마지막 몇 년 동안 신경계 문제와 과로로 인해 건강이 악화되어 곤란을 겪었다. 잉글랜드로의 생애 마지막 여행은 그를 지치고 병들게 했고 1847년 5월 14일 친누나 파니의 죽음으로 정신적 고통이 가중되었다. 6개월 후인 11월 4일 멘델스존은 뇌졸중으로 라이프치히에서 사망했다.

그의 일생은 실로 작곡과 연주의 연속이었다. 그는 슈베르트와 같은 생활의 고통이 없이 비상한 재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었는데, 그것이 작품상에 나타나, 명쾌하고도 아름다운 음악이 되었다. 그는 색채적이며 우아한 낭만적인 작품을 많이 남겼는데, 그의 바이올린 협주곡은 베토벤·브람스의 곡과 함께 3대 바이올린 협주곡으로 손꼽힌다. 그의 유명한 작품은 바흐의 고전 음악 연구에서 배워 얻은 바가 많고, 바흐를 세상에 소개한 공적은 실로 크다. 그는 낭만파의 선구자로, 신고전파의 길을 지시한 것으로서, 음악 사상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작곡 : Anton Bruckner (안톤 브루크너,Joseph Anton Bruckner)
오스트리아의 작곡가이자 오르가니스트이다. 교향곡과, 종교음악, 모테트로 유명하다. 그의 작품은 풍부한 화성, 복잡한 폴리포니, 유도동기, 긴 연주시간으로 유명하여 독일-오스트리아의 낭만파 최후의 상징으로 여겨지고 있다. 브루크너는 교사이자 오르가니스트인 아버지에게 음악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는 보조교사로도 일했고 마을 악단에서 바이올린을 켜기도 했으며 마침내 성 플로리안 성당의 오르가니스트가 되었다. 생전에... 오스트리아의 작곡가이자 오르가니스트이다. 교향곡과, 종교음악, 모테트로 유명하다. 그의 작품은 풍부한 화성, 복잡한 폴리포니, 유도동기, 긴 연주시간으로 유명하여 독일-오스트리아의 낭만파 최후의 상징으로 여겨지고 있다.

브루크너는 교사이자 오르가니스트인 아버지에게 음악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는 보조교사로도 일했고 마을 악단에서 바이올린을 켜기도 했으며 마침내 성 플로리안 성당의 오르가니스트가 되었다. 생전에 오르가니스트로서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으며, 특히 즉흥 연주에 능했다고 한다.

그는 나이가 들어서도 계속 여러 스승에게 작곡이나 대위법 등을 배워나갔으며 빈 음악원과 빈 대학에서 교직을 맡기도 했다. 그러면서 열한 개의 교향곡과 세 개의 미사, 테 데움 등의 종교 음악을 작곡했다. 그러나 그의 음악은 살아있는 동안 많은 비난을 받았는데, 이는 그가 바그너의 추종자(바그너파)로 알려져 브람스를 신봉하는 많은 비평가(브람스파)의 조건 없는 공격 대상이 되었기 때문이기도 하며, 그의 음악을 있는 그대로 이해해주는 사람이 주변에 드물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의 제자인 페르디난트 뢰베, 프란츠와 요제프 샬크 형제 등은 항상 그의 음악을 청중들이 더 '이해하기 쉽게' 한다는 명분으로 개작하도록 브루크너를 압박했고 이에 브루크너 자신의 유약함 내지 꼼꼼함이 덧붙어 지금까지도 문제가 되는 수많은 개정판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브루크너는 생애의 거의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제7번과 제8번 교향곡, 테 데움의 성공을 맛볼 수 있었으나 때는 너무 늦었다. 그는 빈에서 사망했고, 그의 유해는 성 플로리안 성당의 오르간 아래에 안장되어 있다.

브루크너의 중요한 작품으로는 교향곡과 종교음악을 꼽을 수 있다. 이외에도 실내악 작품이나 피아노 독주곡 등을 음반으로 찾아볼 수 있다. 19세기 서양고전음악에서 브루크너 작품의 위치는 슈만, 브람스가 계승한 신고전주의적인 구조와 슈베르트가 보여준 개성화된 내용의 결합이며 이러한 경향은 구스타프 말러로 계승된다.

한편, 가톨릭 신자이기도 했고 교회 오르가니스트였기에 브루크너의 종교음악은 펠릭스 멘델스존 바르톨디 이후 낭만주의 종교음악의 맥을 잇는 역할을 했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 그의 종교음악은 대규모 합창과 교향악의 결합으로 대변될 수 있으며 이러한 경향은 루트비히 판 베토벤의 장엄미사의 맥을 잇는 것이다.
작곡 : Antonio Vivaldi (안토니오 비발디 )
노래 : Luciano Pavarotti (루치아노 파바로티 )
성악가 (테너) 성악가 (테너)
성악가 (소프라노) 성악가 (소프라노)
성악가 (바리톤) 성악가 (바리톤)
노래 : Anna Netrebko (안나 네트렙코)
성악가 (소프라노) 성악가 (소프라노)
노래 : Andreas Scholl (안드레아스 숄)
성악가 (카운터테너) 성악가 (카운터테너)
노래 : Kiri Te Kanawa (키리 테 카나와)
성악가 (소프라노) 성악가 (소프라노)
노래 : Elina Garanca (엘리나 가랑차,Elina Garan?a)
클래식 성악가(메조소프라노) 클래식 성악가(메조소프라노)
노래 : Andrea Bocelli (안드레아 보첼리)
노래 : Jonas Kaufmann (요나스 카우프만)
성악가 (테너) 성악가 (테너)
노래 : Peter Schreier (페터 슈라이어)
테너, 지휘자 테너, 지휘자
국제적으로 많은 상을 수상한 바 있는 보체스8은 영국의 아카펠라 성악 악단이다. 이들은 로네상스의 다성음악부터 재즈나 팝 편곡물에 이르기까지 시대와 장르를 가리지 않고 넘나드는 레퍼토리뿐만 아니라 다채롭고 섬세한 음색 배합으로도 많은 찬사를 받아왔다. 국제적으로 많은 상을 수상한 바 있는 보체스8은 영국의 아카펠라 성악 악단이다. 이들은 로네상스의 다성음악부터 재즈나 팝 편곡물에 이르기까지 시대와 장르를 가리지 않고 넘나드는 레퍼토리뿐만 아니라 다채롭고 섬세한 음색 배합으로도 많은 찬사를 받아왔다.
노래 : Juan Diego Florez (후안 디에고 플로레스)
성악가 (테너) 성악가 (테너)
노래 : Jose Carreras (호세 카레라스)
성악가 (테너) 성악가 (테너)
노래 : Angela Gheorghiu (안젤라 게오르규)
안젤라 게오르규는 1965년 루마니아에서 태어났다. 1992년에는 '돈조반니'의 체를리나로 코벤트가든 무대에 처음 올랐고, 이듬해는 빈 국립오페라와 메트로폴리탄에 '사랑의 묘약'의 아디나와 '라보엠'의 미미로 각각 데뷔하였다. 1994년 코벤트가든에서의 '라트라비아타'로 일약 세계적인 오페라 히로인으로 등극하였고, 이후 테너 알라냐와 결혼함으로써 오페라 계에 큰 화제를 낳기도 했다. 안젤라 게오르규는 1965년 루마니아에서 태어났다. 1992년에는 '돈조반니'의 체를리나로 코벤트가든 무대에 처음 올랐고, 이듬해는 빈 국립오페라와 메트로폴리탄에 '사랑의 묘약'의 아디나와 '라보엠'의 미미로 각각 데뷔하였다. 1994년 코벤트가든에서의 '라트라비아타'로 일약 세계적인 오페라 히로인으로 등극하였고, 이후 테너 알라냐와 결혼함으로써 오페라 계에 큰 화제를 낳기도 했다.
성악가 (소프라노) 성악가 (소프라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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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자 피해보상
  •  상품의 불량에 의한 반품, 교환, A/S, 환불, 품질보증 및 피해보상 등에 관한 사항은 소비자분쟁해결기준(공정거래위원회 고시)에 준하여 처리됨
환불 지연에 따른 배상
  •  대금 환불 및 환불 지연에 따른 배상금 지급 조건, 절차 등은 전자상거래 등에서의 소비자 보호에 관한 법률에 따라 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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