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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D

1990~2000년대 영화음악 모음집 (The Time Of My Life: The Greatest Hits Of The Movies)

더티 댄싱/사관과 신사/탑 건/귀여운 여인/플래시댄스/보디가드/노팅 힐/타이타닉/사랑과 영혼/러브 액츄얼리 등 영화 주제곡 오리지널 60곡

[ 3CD / 디지팩 ]
Bill Medley, Jennifer Warnes, Whitney Houston, Ronan Keating, Wet Wet Wet 노래 외 51명 정보 더 보기/감추기 | SonyMusic / SonyMusic | 2015년 12월 28일 첫번째 구매리뷰를 남겨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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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2000년대 영화음악 모음집 (The Time Of My Life: The Greatest Hits Of The Movies)

품목정보

품목정보
발매일 2015년 12월 28일
제조국 EU

관련분류

음반소개

디스크

CD 1
선택듣기
  • 01 (I've Had) The Time Of My Life (from -dirty Dancing- 더티댄싱) - Bill Medley & Jennifer Warnes 선택듣기
  • 02 It Must Have Been Love (from -pretty Woman- 귀여운 여인) - Roxette 선택듣기
  • 03 I Will Always Love You (from -the Bodyguard- 보디가드) - Whitney Houston 선택듣기
  • 04 When You Say Nothing At All (from -notting Hill- 노팅 힐) - Ronan Keating 선택듣기
  • 05 Take My Breath Away (love Theme From -Top Gun- 탑건) (love Theme From -Top Gun- 탑건) - Berlin 선택듣기
  • 06 Love Is All Around (from -four Weddings And A Funeral- 네 번의 결혼식과 한번의 장례식) - Wet Wet Wet 선택듣기
  • 07 My Heart Will Go On (love Theme From -titanic- 타이타닉) - Celine Dion 선택듣기
  • 08 Here With Me (from -love Actually- 러브 액추얼리) - Dido 선택듣기
  • 09 Turn Back Time (from -sliding Doors- 슬라이딩 도어즈) - Aqua 선택듣기
  • 10 How Do I Live (from -con Air- 콘 에어) - Leann Rimes 선택듣기
  • 11 Pure Shores (from -the Beach- 비치) - All Saints 선택듣기
  • 12 Kiss Me (from -she's All That- 쉬즈 올 댓) - Sixpence None The Richer 선택듣기
  • 13 Nothing's Gonna Stop Us Now (from -mannequin- 마네킨) - Starship 선택듣기
  • 14 Don't You (forget About Me) (from -the Breakfast Club- 조찬 클럽) - Simple Minds 선택듣기
  • 15 When The Going Gets Tough, The Tough Get Going Going (from -romancing The Stone- 로맨싱 스톤) - Billy Ocean 선택듣기
  • 16 Holding Out For A Hero (from -footloose- 풋루즈) - Bonnie Tyler 선택듣기
  • 17 Show Me Heaven (from -days Of Thunder- 폭풍의 질주) - Maria Mckee 선택듣기
  • 18 I Believe I Can Fly (from -space Jam- 스페이스 잼) - R. Kelly 선택듣기
  • 19 Up Where We Belong (-an Officer And A Gentleman- Soundtrack Version 사관과 신사) - Bill Medley & Jennifer Warnes 선택듣기
CD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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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01 Happy (from -despicable Me 2- 슈퍼배드 2) - Pharrell Williams 선택듣기
  • 02 Jump (from -love Actually- 러브 액추얼리) - Girls Aloud 선택듣기
  • 03 Can't Fight The Moonlight (from -coyote Ugly- 코요테 어글리) - Leann Rimes 선택듣기
  • 04 Footloose (from -footloose- 풋루즈) - Kenny Loggins 선택듣기
  • 05 The Power Of Love (from -back To The Future- 빽 투 더 퓨쳐) - Huey Lewis 선택듣기
  • 06 Lovefool (from -romeo + Juliet-) (from -romeo & Juliet- 로미오와 줄리엣) - The Cardigans 선택듣기
  • 07 Flashdance... What A Feeling (from -flashdance-) (from -flashdance- 플래시 댄스) - Irene Cara 선택듣기
  • 08 Goldeneye (from -goldeneye- 골든아이) (single Edit) - Tina Turner 선택듣기
  • 09 Pretty Woman (from -pretty Woman- 귀여운 여인) - Roy Orbison 선택듣기
  • 10 Wherever You Will Go (from -love Actually- 러브 액추얼리) - The Calling 선택듣기
  • 11 Hold On (from -bridesmaids- 내 여자친구의 결혼식) - Wilson Phillips 선택듣기
  • 12 Let's Hear It For The Boy (from -footloose- 풋루즈) - Deniece Williams 선택듣기
  • 13 Living In America (from -rocky Iv- 록키 3) - James Brown 선택듣기
  • 14 To 5 (from -9 To 5- 나인 투 파이브) - Dolly Parton 선택듣기
  • 15 Danger Zone (from -top Gun- 탑 건) - Kenny Loggins 선택듣기
  • 16 Eye Of The Tiger (from -rocky Iii- 록키 4) - Survivor 선택듣기
  • 17 Ghostbusters (from -ghostbusters-) (from -ghostbusters- 고스터버스터즈) - Ray Parker Jr. 선택듣기
  • 18 Fame (from -fame- 페임) - Irene Cara 선택듣기
  • 19 Loco In Acapulco (from -buster- 도둑과 아내) - The Four Tops 선택듣기
  • 20 Stand By Me (from -stand By Me- 스탠 바이 미) - Ben E. King 선택듣기
  • 21 Unchained Melody (from -ghost- 사랑과 영혼) - The Righteous Brothers 선택듣기
CD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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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01 Out Of Reach (-bridget Jone's Diary- Soundtrack Version) (from -bridget Jone's Diary- 브리짓 존스의 일기) - Gabrielle 선택듣기
  • 02 It Will Rain (from -twilight-) (from -twilight- 트와일라잇 브레이킹 던 part.1) - Bruno Mars 선택듣기
  • 03 She's Like The Wind (from -dirty Dancing- 더티 댄싱) - Patrick Swayze Feat. Wendy Fraser 선택듣기
  • 04 Waiting For A Star To Fall (from -three Men And A Little Lady- 세 남자와 아기 2) - Boy Meets Girl 선택듣기
  • 05 You Make My Dreams (from -(500) Days Of Summer- 500일의 썸머) - Daryl Hall & John Oates 선택듣기
  • 06 Baby, I Love Your Way (from -reality Bites- 청춘 스케치) - Big Mountain 선택듣기
  • 07 Here Comes The Hotstepper (from -bad Neighbours- 나쁜 이웃들) - Ini Kamoze 선택듣기
  • 08 Teenage Dirtbag (from -loser- 아메리칸 촌놈) - Wheatus 선택듣기
  • 09 Deeper Underground (from -godzilla- 고질라) (remastered) - Jamiroquai 선택듣기
  • 10 Everybody (backstreet's Back) (from -this Is The End- 디스 이즈 디 엔드) (radio Edit) - Backstreet Boys 선택듣기
  • 11 Wake Me Up Before You Go-go (from -happy Feet 2- 해피 피트 2) (remastered) - Wham! 선택듣기
  • 12 Brown Eyed Girl (from -sleeping With The Enemy- 적과의 동침) - Van Morrison 선택듣기
  • 13 Arthur's Theme (best That You Can Do) (from -arthur- 미스터 아더) - Christopher Cross 선택듣기
  • 14 Everybody's Talkin' (from -forrest Gump- 포레스트 검프) - Harry Nilsson 선택듣기
  • 15 Hi-fidelity (from -fame- 페임) - Kids from Fame 선택듣기
  • 16 Neutron Dance (from -beverly Hills Cop- 비버리 힐스 캅) - The Pointer Sisters 선택듣기
  • 17 Cuddly Toy (from -alan Partridge- Alpha Papa- 앨런 파트리지: 알파 파파) - Roachford 선택듣기
  • 18 Lead Me On (from -top Gun- 탑 건) - Teena Marie 선택듣기
  • 19 I'm Kissing You (from -romeo + Juliet- 로미오와 줄리엣) - Des'ree 선택듣기
  • 20 From The Heart (from -notting Hill- 노팅 힐) - Another Level 선택듣기

상세 이미지

상세 이미지 1

아티스트 소개 (56명)

청아한 음색과 미인은 아니지만 이지적이고 고결한 모습으로 다른 가수들과는 확실한 차별성을 둔 제니퍼 원스(Jennifer Warnes)는 영화 < 사관과 신사 >와 < 더티 댄싱 >의 주제곡 'Up where we belong'과 '(I've had) The time of my life'로 1980년대에 알려졌지만 음악을 꼼꼼히 찾아 듣는 사람들에겐 그 이전인 1977년에 전미 차트 6위를 차지한 'Rig... 청아한 음색과 미인은 아니지만 이지적이고 고결한 모습으로 다른 가수들과는 확실한 차별성을 둔 제니퍼 원스(Jennifer Warnes)는 영화 < 사관과 신사 >와 < 더티 댄싱 >의 주제곡 'Up where we belong'과 '(I've had) The time of my life'로 1980년대에 알려졌지만 음악을 꼼꼼히 찾아 듣는 사람들에겐 그 이전인 1977년에 전미 차트 6위를 차지한 'Right time of the night'로 이미 익숙해진 여가수다. 우리나라에서는 이 두 곡 외에도 1987년에 공개한 'Famous Blue Raincoat'로 다운타운을 점령하며 국내 팬들과의 착상에 다시 한번 성공하기도 했다. 1947년 3월 3일, 시애틀에서 태어난 제니퍼 원스는 갓 20살이던 1967년에 텔레비전 쇼 프로그램에 고정으로 출연하면서 인지도를 쌓기 시작해 이듬해에 뮤지컬 < 헤어 >에 주연 급으로 출연하면서 가수로서의 워밍업을 시작했다. 뮤지컬에서 능력을 인정받은 그는 정치, 사회적으로 어수선하던 1968년에 차분한 포크 성향의 데뷔앨범 < I Can Remember Everything >으로 가멸찬 스타트를 했지만 블루스 리바이벌과 사이키델릭이 대세이던 당시의 음악 시장에 삼투하지 못했다. 1969년에는 더 후(The Who)의 노래 제목에서 힌트를 얻은 듯한 앨범 < See Me, Feel Me, Touch Me, Heal Me >로 기백 있는 두 번째 도전을 시도했지만 이 역시 철저히 가려졌다. 좌절한 제니퍼 원스는 3년 동안 신작을 발표하지 않은 채 자신의 정체성을 심각하게 고민한 후 벨벳 언더그라운드(Velvet Underground)의 멤버였던 존 케일(John Cale)이 프로듀서로 참여한 3집 < Jennifer >를 발표했지만 이 역시 성공하지 못하자 개인적인 좌절을 마음에 안고 캐나다 출신의 거물 싱어 송라이터 레너드 코헨(Leonard Cohen)의 백 보컬리스트가 되었다. 하지만 제니퍼 원스는 레너드 코헨으로부터 많은 것을 배우고, 공감하고, 느끼게 된다. 결국 레너드 코헨은 제니퍼 원스의 '멘토'와 같은 존재가 되었고 제니퍼는 레너드 코헨에 대한 존경의 뜻으로 1987년에 그의 노래들로만 채워진 명반 < Famous Blue Raincoat >를 내놓아 흠모의 정을 표했다. 이 앨범은 미국에서는 72위까지 밖에 오르지 못했지만 국내에서 이 타이틀곡만큼은 라디오 프로그램을 확실히 장악했고 지금도 비 오는 날이면 신청이 끊이지 않는 그의 시그니처 송이 되었다. 제니퍼 원스가 세인들의 주목을 받은 것은 1977년에 자신의 이름을 타이틀로 내세운 4집에서 컨트리 풍의 'Right time of the night'이 빌보드 싱글 차트 6위에 오르면서부터. 후속 곡 으로 낙점된 발라드 'I'm dreaming'이 50위에 랭크되는 성적을 거둔 그는 1979년에 다섯 번째 음반 < Shot Through The Heart >을 발표해 컨트리 팝 스타일의 'I know a heartache when I see one'이 19위를 차지하며 '원히트원더 가수'라는 꼬리표를 뗐다. 그로부터 8년 동안 제니퍼 원스는 정규앨범 제작에 착수하지 않았지만 그 사이 그는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화려하고 바쁜 시간을 보내는 아이러니를 맞이했다. 제니퍼 원스는 1982년에 리차드 기어와 데보라 윙어가 주연한 영화 < 사관과 신산 >의 주제곡 'Up where we belong'을 허스키 보이스로 유명한 블루 아이드 소울 가수 조 카커(Joe Cocker)와 듀엣으로 불러 그해 가장 큰 히트 곡이 되었다. 이 곡은 3주 동안 싱글 차트 정상을 지켰으며 그래미 최우수 듀엣 부문과 아카데미에서 주제가 부문도 수상하는 그랜드슬램을 달성했다. 이제 제니퍼 원스는 더 이상 '레너드 코헨'의 백 보컬리스트가 아니라 당대를 대표하는 여가수로 그 위치가 격상됐다. 하지만 이 노래의 스매시 히트는 그를 옭아맸다. 1983년에는 당시 신인이었던 탐 크루즈가 주연한 미식축구 영화 < All The Rights Moves/뜨거운 가슴으로 내일을 >의 동명 주제곡을 크리스 톰슨(Chris Thompson)과 함께 부르며 'Up where we belong'의 성공 공식을 그대로 따랐으나 영화와 주제곡 모두 참패하자 제니퍼 원스는 다시 자신 속으로 움츠려 들었다. 4년 후인 1987년, 이 지적인 여가수는 다시 남성 가수와 함께 영화 주제곡을 취입했다. 바로 'Unchained melody'로 유명한 라이처스 브라더스(Righteous Brothers)의 멤버였던 빌 메들리(Bill Medley)와 함께 그 유명한 댄스 무비 < 더티 댄싱 >의 주제가 '(I've had) The time of my life'를 부른 것. 이 곡으로 제니퍼 원스는 'Up where we belong'으로 달성한 그랜드슬램(싱글차트 1위, 그래미 수상, 아카데미 주제가 부문 수상)을 재현하며 다시 한번 영화 주제가 여왕으로서의 명성을 이어갔다. 1992년에 발표한 일곱 번째 앨범 < The Hunter >와 2001년에 공개한 8집 < The Well >은 빌보드 앨범차트 200위에 랭크되지도 못한 채 대중들과의 접점 찾기에 실패했지만 < The Well >에 수록된 빌리 조엘(Billy Joel)의 원곡을 재해석한 'And so it goes'는 국내에서 은은한 사랑을 받았다.
휘트니 휴스턴(Whitney Houston)은 1980, 1990년대 남성들에 의해 주도되던 메탈의 포화를 뚫고 스탠다드 팝 시장을 개척해 낸 대표적인 ’디바’ 뮤지션이다. 휘트니 휴스턴은 1963년 미국 뉴저지에서 태어났다. 알앤비 가수 씨시 휴스턴(Cissy Houston)의 딸이었으며 시대를 풍미한 여가수 디온 워윅(Dionne Warwick)이 친척이었던 그녀는 어려서부터 대형 가수들을 옆에서 지켜볼 수 ... 휘트니 휴스턴(Whitney Houston)은 1980, 1990년대 남성들에 의해 주도되던 메탈의 포화를 뚫고 스탠다드 팝 시장을 개척해 낸 대표적인 ’디바’ 뮤지션이다. 휘트니 휴스턴은 1963년 미국 뉴저지에서 태어났다. 알앤비 가수 씨시 휴스턴(Cissy Houston)의 딸이었으며 시대를 풍미한 여가수 디온 워윅(Dionne Warwick)이 친척이었던 그녀는 어려서부터 대형 가수들을 옆에서 지켜볼 수 있었고, 어머니의 재능을 이어받아 어려서부터 성가대에서 노래하며 그 실력을 뽐냈다. 수려한 외모까지 겸비한 휘트니는 10대의 나이에 이미 모델, 배우, 가수의 세 가지 활동을 병행하고 있었다. 샤카 칸(Chaka Khan) 등의 백업보컬로 또 클럽에서 가수로 활동하던 그녀는 1982년 19살의 어린 나이에 폴 자바라(Paul Zabara)의 ’Eternal love’라는 곡에 보조 보컬로 참여하며 처음으로 정식 음반 녹음에 참여한다. 이듬해 아리스타(Arista)와 계약을 체결했고, 그녀의 능력을 높이 평가한 레코드사는 데뷔 앨범에 27만 달러의 제작비를 투자하며 전폭적으로 지원했다. 1985년 데뷔앨범 < Whitney Houston >은 흑인 디바 시대의 새로운 시작을 알린다. 앨범은 14주간 빌보드 차트 정상에 오르며 솔로 아티스트의 데뷔 앨범 중 가장 오랜 기간 1위에 머무른 앨범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세계적으로 2,300만장이라는 경이적인 앨범 판매를 이루어내며 데뷔 앨범 하나로 팝계 최고의 여가수로 자리하게 된다. 앨범 내에서는 ’Saving all my love for you’, ’How will I know’, ’Greatest love of all’(조지 벤슨의 곡 리메이크)의 세 곡이 연속해서 차트 정상에 오르고, 앨범의 경이적인 성공으로 86년 그래미와, 86,87년 아메리칸 뮤직 어워드를 차지한다. 1987년 그녀는 두 번째 앨범 < Whitney >를 통해 전작의 인기를 이어간다. 전작보다 비트감을 더한 이 앨범 역시 대단한 성공을 일구어 낸다. 발매 첫 주에 미국과 영국차트에서 동시에 1위에 오르는데 팝 역사상 처음으로 이룩한 기록이었다. 앨범은 차트 정상에 11주간 머물렀으며 세계적으로 2,000만장이 팔려나갔다. 싱글들의 인기도 대단해서 ’Wanna dance with somebody(Who loves me)’, ’Didn’t we almost have it all’, ’So emotional’, ’Where do broken hearts go’ 네 곡이 연속해서 차트 정상을 밟으며 이전 앨범부터 7개의 싱글이 연속해서 정상을 밟는 대 기록을 세우게 된다. 이 앨범으로 또다시 1988년 그래미를 거머쥐었고, 역시 88년, 89년의 아메리칸 뮤직어워드를 수상한다. 아레사 프랭클린(Aretha Franklin) 같은 정통 소울 아티스트들로부터 음악적 영감을 얻었던 그녀이지만 1,2집에서 보여준 음악은 대중성이 지나치게 강조된 흑, 백의 사운드가 뒤섞인 음악이었다. 자신도 그런 자신의 음악에 만족하지 못했는지 1990년 발표한 세 번째 앨범 < I’m Your Baby Tonight >에서는 대중성을 신경 쓰지 않고 정통 소울 음악으로 변신을 시도한다. 스티비 원더(Stevie Wonder), 루떠 반데로스(Luther Vandross)등과 함께 작업하는 등 흑인 아티스트로서의 정체성에 집착했던 이 앨범은 역시 이전 앨범들만큼의 성공을 이끌어내지는 못한다. 하지만 ’I’m your baby tonight’, ’All the man that I need’가 1위에 올랐고, 앨범은 전 세계 1,200만장의 판매를 기록하는 등 여전히 그 인기는 대단했다. 세 장의 정규 앨범 이후 그녀는 영화 배우로의 변신을 시도하며 세 장의 사운드 트랙을 연속 발표한다. 시작은 < 보디가드 >였다. 1992년 케빈 코스트너와 함께 출연한 ’보디가드’의 사운드 트랙에서 6곡을 노래했고, 이는 팝 역사에 길이 남을 경이적인 상업적 성공을 이끌어낸다. 첫 싱글 ’I will always love you’(돌리 파튼의 곡을 리메이크)는 차트 정상에 14주간 머물렀으며, 앨범은 20주간 1위를 지켰고, 세계적으로 3,500만장이라는 어마어마한 판매고를 기록한다. 1994년 그녀는 다시 한 번 그래미를 거머쥐었고, 아메리칸 뮤직 어워드에서는 8개 부문 수상이라는 대 기록을 세우게 된다. 1995년 휘트니 휴스턴은 다시 한 번 사운드 트랙에 참여한다. 자신이 주연한 < Waiting for Exhale >의 사운드 트랙에 3곡을 수록하면서 영화와 앨범의 성공에 기여한다. 이 앨범은 노장 흑인 여가수들과 신예 흑인 여가수들이 총 동원되어 만들어졌으며, 프로듀서로 참여한 베이비페이스(Babyface)는 그래미 12개 부문 후보에 오르는 영예를 누리게 된다. 1996년 그녀는 영화 < The Preacher’s Wife >에서 주연을 맡으며 다시 한 번 사운드 트랙에 참여한다. 14곡을 자신이 직접 맡은 이 앨범은 가스펠 위주의 곡들로 채워져 있으며 대중성보다는 종교적 방향성을 보여주고 있어 앨범판매에 있어서는 그다지 큰 성공을 이끌어내지 못하였다. 정규 앨범을 발표하지 않고 영화와 사운드 트랙에만 전념해왔던 그녀는 98년 8년 만에 정규앨범 < My Love Is Your Love >을 발표한다. 흑인 아티스트로서의 음악에 충실함을 기했던 이 앨범은 1,000만장의 앨범 판매를 기록하며 그녀의 앨범 중 가장 저조한 성적을 거두게 된다. 앨범 내에는 영화 ’이집트의 왕자’ 주제곡인 머라이어 캐리(Mariah Carey)와의 듀엣 곡 ’When you believe’가 수록되어 있다. 2000년 그녀는 자신의 15년 음악생활을 결산하는 베스트 앨범 < The Greatest Hits >를 발표한다. 조지 마이클, 엔리케 이글레시아스와의 듀엣 곡 등 네 곡의 신곡도 포함하고 있는 이 앨범은 발라드 곡들만을 모은 < Cool Down >과 댄스곡 및 댄스 리믹스 곡들을 모은 < Throw Down > 두 장으로 구성되어져 있다.
머라이어 캐리(Mariah Carey), 토니 브랙스톤(Toni Braxton) 등과 함께 1990년대 중 후반의 팝 시장을 천하 삼분했던 셀린 디온(Celine Dion)은 디바(diva)의 정점을 대표하는 여가수이다. 1990년대 중반까지 머라이어 캐리에게 밀려 만년 2등 가수의 한을 삭였던 그녀는 영화 < 타이타닉 >의 테마송인 ‘My heart will go on’을 통해 단숨에 넘버원 팝 싱어의 반열에 ... 머라이어 캐리(Mariah Carey), 토니 브랙스톤(Toni Braxton) 등과 함께 1990년대 중 후반의 팝 시장을 천하 삼분했던 셀린 디온(Celine Dion)은 디바(diva)의 정점을 대표하는 여가수이다. 1990년대 중반까지 머라이어 캐리에게 밀려 만년 2등 가수의 한을 삭였던 그녀는 영화 < 타이타닉 >의 테마송인 ‘My heart will go on’을 통해 단숨에 넘버원 팝 싱어의 반열에 올랐다. 캐나다에서 유일하게 불어를 쓰는 퀘벡 지방의 작은 집에서 1968년 첫 울음보를 터트린 셀린 디온. 그녀는 합계가 무려 16명인 대식구의 막내로 태어나 유년기를 보냈다. 또한 부모님 모두 노동자 출신이었기에 물질적으로 그다지 풍요롭지 못한 환경 속에서 자랐다. 그러나 음악에 지대한 관심을 가졌던 부모님의 우산 아래 셀린 디온의 음악적 재능은 어린 시절부터 싹을 맘껏 틔웠다. 5살 때부터 부모님의 피아노 바에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고 12살 때에는 ‘It was only a dream’이라는 최초의 자작곡을 썼다는 등의 후일담들이 잘 증명해준다. 오빠와 어머니의 전폭적 지원 하에 상기한 곡을 테이프화(化)했던 셀린 디온. 그녀는 그것을 매니저인 르네 앤젤릴(Rene Angelil)에게 보낸 뒤, 답변을 기다렸지만 묵묵 부답이었다. 허나 독촉 전화를 받고 그제서야 셀린 디온의 숨은 재능을 발견한 르네 앤젤릴은 그 날로 오케이 사인을 보냈고 그녀는 정식 데뷔 코스를 밟기 시작했다.(셀린 디온의 노래를 직접 들은 순간, 르네 앤젤릴은 그녀가 곧 인터내셔널 슈퍼 스타가 될 것임을 확신했다고 한다.) 1983년 15살의 나이에 발표했던 음반 < D’Amour Ou D’Amite >을 통해 캐나다 출신 아티스트로는 최초로 프랑스에서 골드 레코드를 기록하고 일본에서 개최되었던 야마하 작곡 대회에서 금메달을 수상하는 등, 이후 셀린 디온의 행보는 거칠 것 없는 탄탄대로였다. 또한 그녀는 그 즈음 조우했던 베테랑 프로듀서 데이비드 포스터(David Foster)와의 인연 덕에 걸프 전 참전 용사들을 위한 기획 앨범 < Voices That Care >에 참여, 수많은 팝 필드의 거물들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 그녀에게 남은 것은 미국 시장 진출이라는 ‘좁은 문’뿐인 듯 보였다. 이를 위해 그녀는 우선 음악 외적인 면에서 파격적 변신을 단행했다. 팝 계의 별이 되기 위해서는 음악만큼이나 이미지 메이킹 또한 중요한 요소였기 때문. 동시에 셀린 디온은 영국의 랭귀지 스쿨에서 언어 교육을 받으며 만반의 준비 태세를 갖춰나갔다. 어느새 그녀는 틴에이저에서 성숙미를 내뿜는 여인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피드백 효과는 즉시 나타났다. 1990년에 발매했던 처녀작 < Unison >(74위)이 각각 빌보드 싱글 차트 35위와 4위를 기록한 ‘If there was (any other way)’와 ‘Why does my heart beat now’의 선전에 힘입어 꽤 괜찮은 성적표를 받았던 것. 허나 정작 그녀를 꼭지점으로 견인했던 곡은 디즈니 애니메이션의 테마였던 ‘Beauty and the beast’였다. 차트 1위를 단박에 꿰찬 곡은 그녀에게 1992년 그래미의 팝 듀오/그룹 부문 트로피를 안겨주며 이후의 성공 시대를 예감케 했다. 또한 2집 앨범인 < Celine Dion >(1992)에도 수록되어 소포모어 징크스를 깨부수는데 일등 공신의 역할을 해주었다. 곡 외에 다이안 워렌(Diane Warren) 작곡의 ‘If you asked me to’(4위), ‘Nothing broken but my heart’(29위), ‘Love can move mountains’(36위) 등이 팬들의 애정 공세를 한 몸에 받았다. 같은 해에 내놓았던 영화 <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 >의 주제곡인 ‘When I fall in love’(23위) 역시 대박이었다. 2년 뒤인 1994년에는 셀린 디온의 인생에 있어 중대한 터닝 포인트가 찾아왔다. 매니저였던 르네 앤젤릴과의 결혼이 바로 그것. 1988년부터 비밀리에 연인 관계를 유지해왔던 둘은 6년 뒤인 1994년에야 그 사실을 발표하고 몬트리올의 노틀담 성당에서 결혼, 세간을 놀라움 속에 빠뜨렸다. 정확이 배가 되는 나이차도 화제거리를 양산하기에 충분했다. 심리적으로 안정을 찾은 덕분인지 셀린 디온의 정상을 향한 질주는 도무지 멈출 줄을 몰랐다. 1992년부터 1996년까지 5년 간, 무려 6장의 앨범을 녹음했다는 사실이 주는 양적 포만감부터가 남달랐다. 1993년의 < Colour of My Love >(4위)가 첫 테이프를 끊으며 제니퍼 러시(Jennifer Rush)의 곡을 리메이크한 ‘The power of love’(4주간 1위), 그리고 ‘Misled’(23위) 등의 히트 넘버들을 배출했다. 1994년과 1995년에 셀린 디온은 두 장의 불어 LP를 내놓으며 음악적 본령을 되새김질하는 기회를 가졌다. 제베타 스틸(Jevetta Steele)의 팝 클래식인 ‘Calling you’를 수록한 < Live A L’olympia >와 장자크 골드만이 프로듀스해준 < D’eux >이었다. 특히 후자는 지금까지 800만장을 세일즈, 가장 많이 팔린 샹송 작품으로 남아있기도 하다. 절정의 순간은 단연코 1996년의 팝 마스터피스 < Falling Into You >였다. 현재까지 미국 내에서만 집계된 판매량이 1100만장인 작품은 그 해 그래미에서 ‘팝 앨범’과 ‘올해의 앨범’, 두 개 부문을 석권하며 엄청난 위세를 떨쳤다. < 업 클로즈 앤 퍼스널 >의 테마송이자 다이안 워렌이 써 준 ‘Because you loved me’(1위)를 위시로 팝 고전을 다시 부른 ‘All by myself’(4위), ‘It’s all coming back to me mow’(2위) 등이 차트에 핵 폭탄을 마구 투하했다. 어디 이 뿐이겠는가. 같은 해 제임스 카메론(James Cameron)이 감독한 블록버스터 무비 [타이타닉]의 주제곡 ‘My heart will go on’(14주 연속 1위)은 더했다. 또 다시 그래미 두 개상을 차지하는 등, ‘셀린 디온을 모르면 간첩’일 정도의 상황을 연출했다. 곡이 수록된 1997년의 앨범 < Let’s Talk About Love >(1위) 역시 사정은 마찬가지. 두 음반의 합산 판매고가 무려 6000만장을 상회했다. 이 시기를 전후해 그녀는 실로 당대에 무적, 팝 계 최고의 디바 자리에 우뚝 섰다. 그간 참여했던 뮤지션들을 포함해 새로 가세한 조지 마틴(George Martin), 비지스(The Bee Gees), 캐롤 킹(Carole King), 루치아노 파바로티(Luciano Pavarotti) 등, 후자에 참여한 초특급 아티스트들의 면면만 살펴봐도 당시 그녀의 입김이 어느 정도 수준이었는지를 짐작하기에 충분했다. 이후 셀린 디온은 크리스마스 스페셜 반인 < These Are Special Times >(1998, 2위)와 샹송 앨범 < S’il Suffisatt D’aimer >(1998)를 선보이고 베스트 컬렉션인 < All The Way: A Decade of Song >(1999, 1위)을 내놓는 등, 잠시 숨 고르기에 들어갔다. 남편의 후두암 투병이라는 절망적 사건이 발발한 때도 이 즈음이었다. 비극이 종결되고 셀린 디온에게 행복이 찾아왔던 때는 2001년이었다. 체외 수정에 성공하며 그토록 소망했던 아이를 갖게 되었기 때문이다. 더불어 남편의 증세도 나날이 호전되는 등, 셀린 디온이 가정에서 본업으로 컴백할 기운이 날로 충만해져 갔다. 그리고 2002년, 무려 5년 만에 출시했던 정규작 < A New Day Has Come >은 그녀의 디스코그라피 중 최초로 발매 첫 주에 정상에 등극하며 변함없는 팬 베이스를 과시했다. 허나 뒷심 부족을 드러내며 전성기 시절에는 많이 못 미치는 결과를 얻고 말았다. 현재 셀린 디온은 1년 만에 신작 < One Heart >를 내놓으며 팬들의 반응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2003/04 배순탁(greattak@izm.co.kr) 오이뮤직 머라이어 캐리가 있고 휘트니 휴스턴이 있지만 이들 못지 않게 지난 90년대를 화려하게 수놓은 가수가 셀린 디온(Celine Dion)이다. 흔히들 이들을 오페라의 주역가수에서 나온 말로 최고 인기의 여가수를 의미하는 어휘인 디바(diva)로 일컫는다. 휘트니 휴스턴과 머라이어 캐리가 팝 음악계의 디바 시대를 이끌었다면 셀린 디온은 디바 시대의 정점에 선 여가수라고 할 수 있다. 셀린 디온은 같은 음반회사 소니 뮤직에 소속된 머라이어 캐리에 밀려 90년대 중반까지 만년 2등 가수였다. 하지만 셀린 디온이 부른 영화 ‘타이타닉’의 주제곡 ‘나의 마음은 영원할 거예요(My heart will go on)’가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면서 모든 상황이 달라졌다. 그 동안 명실상부한 공동 1위였던 머라이어 캐리와 휘트니 휴스턴이 모두 셀린 디온의 밑으로 내려앉고 말았으며 급기야 ‘셀린 디온 격파’를 외치며 함께 듀엣 곡을 내놓는 공동 대항전선을 펴기도 했다. 근래 셀린 디온의 위풍당당한 기세를 이보다 잘 말해주는 단서도 없을 것이다. 1998년 연말호에서 영국의 잡지 ‘Q’는 소니 뮤직의 통계를 빌어 “지난 30개월 동안 셀린 디온은 매 1.2초마다 한 장의 앨범을 팔았다”고 보도했다. 96년 발표한 앨범 < 너에게 빠져 (Falling into you) >가 그때까지 세계적으로 2500만장, 97년 말에 나온 후속 앨범 < 사랑을 얘기합시다(Let`s talk about love) >가 2400만장이라는 경이적 판매고를 수립한 것을 두고 시간당 수치를 계산한 것이다. ‘1초당 한 장’의 파죽지세는 이후에도 변함없어 현재 두 앨범은 모두 3000만장을 돌파했으며 이어서 프랑스어 앨범과 히트곡 모음집도 날개돋친 듯 팔리고 있다. 셀린 디온이 이처럼 가공할 인기를 모으고 있는 이유는 말할 것도 없이 ‘노래를 잘하기 때문’이다. 참 단순한 설명이지만 가장 확실한 분석이다. 일례로 셀린 디온의 히트송 ‘이제 모두 나한테 되돌아오네요(It`s all coming back to me now)’를 들어보면 왜 때로 ‘질릴 정도로 노래를 잘한다’는 평을 듣는지 알게 된다. 셀린 디온은 엄청난 보컬의 파괴력이 주무기이다. 쉬지도 않고 20곡을 내리 한결같이 높은 음으로 질러대는 놀라운 힘을 보유하고 있다. 가창력이 뛰어난 다른 여가수들과 바로 이 점에서 다르다. 머라이어 캐리나 휘트니 휴스턴의 무대는 정적이고 우아한데 반해서 셀린 디온의 공연은 열띠고 힘이 넘친다. 공연장은 그래서 어떤 헤비메탈 그룹의 무대 못지 않은 열광의 도가니를 연출한다. 의자에 가만히 앉아 감상하더라도 관객들은 카타르시스를 만끽한다. 한마디로 시원하다. 이런 에너지와 파워 말고도 그녀를 당대 톱 가수로 부상시켜준 또 하나 원동력이 있다면 그것은 가사 해석이 아주 자연스럽다는 점이다. 결코 억지로 질러대지 않는다. “노래를 어떻게 불러야 할지 미리 짜놓은 적은 없다. 노래 부르기란 기본적으로 첫 키스나 첫 사랑을 하는 것과 같다고 생각한다. 키스나 포옹할 때 미리 리허설하는 사람이 있는가? 또 어떤 사람이 아무 생각 없이 그것을 치르는가?” 마치 실제처럼 가사의 감정을 충분히 살리되 정해진 공식대로 노래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셀린 디온은 철저히 백인 풍의 노래를 부른다는 점에서도 딴 가수와 차별화된다. 머라이어나 휘트니를 비롯해서 근래 디바들 노래는 흑인이건 백인이건 흑인음악 즉 리듬 앤 블루스의 느낌이 녹아있다. 하지만 셀린 디온은 그러한 공통분모를 배격하고 철저히 백인 스탠더드 팝을 구사한다. 여전히 흑인음악이 친근감이 덜 한 유럽의 기성세대 음악팬들이 이 때문에 셀린 디온에게 열광한다. 캐나다 퀘벡 태생인 그녀는 캐나다가 배출한 가장 위대한 가수이기도 하다. 캐나다 음반산업협회는 올해 초 셀린 디온이 지난 한 세기에 걸쳐 국내와 국외에서 가장 음반을 많이 판 캐나다가수라고 공식 발표했다. 1999년 말 캐나다의 음반판매고는 9백만장으로 어떤 캐나다가수보다 많았으며 해외에서는 1억1천장을 넘어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는 것이다. 근래 최고인 샤니아 트웨인과 브라이언 아담스도 그녀에게는 역부족인 것으로 나타났다. 캐나다는 물론 특히 퀘벡과 같은 문화권인 프랑스도 셀린 디온을 ‘국민가수’ 또는 ‘국보급 가수’로 떠받든다. 프랑스 팬들에게 인기는 거의 절대적이어서 프랑스정부가 수여하는 문화훈장을 이미 두 차례나 받았다. 셀린 디온도 이를 의식해 정기적으로 불어음반을 발표하고 있다. 셀린 디온의 지난 94년 말 결혼은 특급화제였다. 1968년 생으로 스물 여섯이던 그 해 그녀는 정확히 나이가 배인 52세의 매니저 레니 안젤리와 몬트리올 노틀담 성당에서 웨딩 마치를 거행했다. 어렵던 시절 자기 집까지 저당 잡혀가며 셀린의 음반작업을 주선한 매니저와 결혼하자 사람들은 사랑의 결실임을 인정하면서도 요즘 가수치고는 드물게 ‘의리형’ 인물이라고 셀린 디온을 높이 평가했다. 너무도 바쁜 스케줄로 가정생활에 여유가 없는 관계로 아직 레니와의 사이에 자식 소식은 없다. 남편이 나이가 많은 탓인지 더욱이 사람들은 언제 그녀가 아기를 가질 것인가에 관심을 갖는다. 얼마 전 타블로이드 신문 ‘내셔녈 인콰이어러’는 “셀린이 체외수정을 통해 현재 쌍둥이를 임신했다”고 보도했지만 셀린 디온 측은 이를 완강히 부인하며 그 신문에 대해 2천만달러의 피해보상을 요구하는 소송을 제기했다. 이 모든 이야기들이 셀린이 이 시대를 대표하는 여가수임을 웅변하는 에피소드들이다. 지난 91년 ‘지금 내 심장이 어디서 두근거리나요(Where does my heart beat now)’를 차트 상위권에 올려놓은 이래 무수한 히트퍼레이드를 펼치며 그녀는 ‘90년대의 가수’로 영광의 나날들을 보냈다. 휴식 후 내후년에 신보가 나오게 되면 다시 광풍을 몰아칠 것이 확실시된다. 현재진형형이라 실감은 나지 않지만 분명 셀린 디온은 ‘살아있는 전설’이다.
지난 2002년 브릿 어워드(Brit Award)는 단 한 장의 앨범을 낸 신인 여가수 다이도(Dido)에게 최우수 여성 가수(Best British Female)상과 최우수 앨범(Best British Album)상을 넘겼다. 그만큼 다이도가 보여주는 매력은 다양하고 특별하다. 클래식의 격조, 포크의 친근함, 토속음악을 통한 신비감, 게다가 일렉트로니카의 중독성까지 그리고 밝고 귀여운 이미지 등등. 어울릴 것 ... 지난 2002년 브릿 어워드(Brit Award)는 단 한 장의 앨범을 낸 신인 여가수 다이도(Dido)에게 최우수 여성 가수(Best British Female)상과 최우수 앨범(Best British Album)상을 넘겼다. 그만큼 다이도가 보여주는 매력은 다양하고 특별하다. 클래식의 격조, 포크의 친근함, 토속음악을 통한 신비감, 게다가 일렉트로니카의 중독성까지 그리고 밝고 귀여운 이미지 등등.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많은 이미지들이 그녀 안에서는 하나가 된다. 다이도는 1971년 크리스마스에 영국 런던에서 태어났으며, 본명은 다이도 암스트롱(Dido Armstrong)이다. 5살 때 리코더를 훔친 것이 계기가 되어 음악을 시작하게 된 이색적인 경력을 갖고 있는 그녀는 클래식을 광적으로 좋아하는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영국의 줄리아드’로 알려진 길드홀(Guildhall) 음악학교에 들어가게 된다. 10대의 대부분을 클래식 음악에 파묻혀 살았던 그녀는 피아노, 바이올린, 리코더 연주에 능했고, 작곡 실력과 노래 실력 또한 늘려 나간다. 그녀는 어린 시절을 클래식에 묻혀 살았다. 18살이 되어서 대중음악을 처음 접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뒤늦게 접한 대중음악의 매력은 클래식에서 맛볼 수 없는 강한 것이었고, 결국 다이도는 클래식을 버리고 대중음악 뮤지션으로 음악적 방향을 바꾼다. 여기에는 친오빠 롤로(Rollo)의 도움이 컸다. 정상급 소울 테크노 그룹 페이스리스(Faithless)의 리더였던 롤로는 일렉트로니카와 클래식의 접목을 원했고, 클래식을 공부한 동생 다이도를 멤버로 맞아들인다. 페이스리스의 멤버로 투어를 펼치며 팝 뮤지션으로의 변신에 성공한 다이도는 ‘My lover’s gone’을 데모 앨범으로 제작하며 솔로전향을 선언했고, 아리스타(Arista) 레코드에서 데뷔 앨범 작업에 들어간다. 아카펠라나 기타, 피아노를 사용한 심플한 사운드를 생각하고 있었던 데뷔 앨범은 프로듀싱에 참여한 오빠 롤로 및 엔지니어의 요구에 따라 네오팝적인 사운드가 가미되었고, 그 과정에서 일렉트로닉 사운드와 포크 사운드가 결합된 독특한 매력을 지닌 앨범이 탄생하게 된다. 이리하여 탄생한 데뷔작 < No Angel >은 1999년 6월, 자국이 아닌 미국에서 먼저 발매되었다. 발매 직후 큰 인기를 얻지는 못했지만 음악은 시간이 흐르면서 차츰 대중들에게 알려진다. 시작은 ‘Here with me’였다. 미국 TV 시리즈인 < 로스웰 >(Roswell)에 이 곡이 테마음악으로 사용되었고, 이어 기네스 펠트로우 주연의 영화 < 슬라이딩 도어스 >(Sliding Doors)에 그녀의 곡 ‘Thank you’가 삽입된다. 별 반응 없이 사라져가던 < No Angel >은 다시 한번 대중들에게 어필했고, 그와 때맞추어 인기 래퍼 에미넴(Eminem)이 자신의 곡 ‘Stan’에 다이도의 곡 ‘Thank you’를 샘플링으로 사용한 덕분에 그녀의 음악과 이름은 뒤늦게 널리 퍼지게 됐다. (‘Stan’의 뮤직비디오에 등장하는 여주인공이 바로 다이도!). 이 곡은 2001년 빌보드 톱10에 오르는 빅히트를 기록했다. 다이도는 이 무렵 고국 영국에 돌아와 마침내 인기스타로 올라섰고 에미넴도 ‘Stan’으로 첫 영국차트 1위의 영예를 누리며 서로 도움을 교환했다. *Dido Interview http://nine4u.asiamusic.net/dj/program.asp?popstory+15
덴마크 출신의 4인조 혼성댄스그룹 아쿠아는 밝고 즐거운 유로 댄스의 전통 위에 상큼한 팝 사운드를 가미시킨 독특한 스타일로 각광받는 그룹이다. 이들은 반복되는 비트를 특징으로 하는 ‘유로 댄스’를 유지하되 서정적 멜로디의 팝 사운드를 곳곳에 배치시킴으로써 그 기계적 리듬의 지루함을 희석시켰다. 여기에 홍일점 르네 그로포드(Lene Grawford)의 섹시한 외모와 음색 덕분에 아쿠아의 매력이 한층 더 부각되었다.... 덴마크 출신의 4인조 혼성댄스그룹 아쿠아는 밝고 즐거운 유로 댄스의 전통 위에 상큼한 팝 사운드를 가미시킨 독특한 스타일로 각광받는 그룹이다. 이들은 반복되는 비트를 특징으로 하는 ‘유로 댄스’를 유지하되 서정적 멜로디의 팝 사운드를 곳곳에 배치시킴으로써 그 기계적 리듬의 지루함을 희석시켰다. 여기에 홍일점 르네 그로포드(Lene Grawford)의 섹시한 외모와 음색 덕분에 아쿠아의 매력이 한층 더 부각되었다. 그녀의 날카로운 보컬과 대비되는 남성멤버 르네 디프(Rene Dif)의 굵은 래핑도 특징이다. 그들의 싱글 ‘Barbie girl’은 그 이름처럼 ‘바비 인형’의 파급력과 비등할 정도로 전세계 음악계에 침투했다. 그 단 하나의 곡으로 아쿠아는 일약 북유럽의 희망으로 떠올랐다. 1988년 클라우스 노린(Claus Norreen)과 소렌 라스티드(Soeren Rasted)가 덴마크의 한 영화음악을 담당하기 위해 함께 일하면서 아쿠아가 태동했다. 그룹의 작곡을 전담하는 이 둘은 르네(Rene)를 만나 의기투합했고, 그는 나중에 노르웨이 여성가수 르네(Lene)를 소개했다. 그 네 명은 1992년 조이스피드(Joyspeed)라는 팀을 처음으로 결성했다. 조이스피드란 이름으로 발매한 싱글 ‘Itzy bitzy’가 시원찮은 반응을 얻자 이들은 한 수족관 포스터에서 따왔다는 ‘아쿠아’라는 이름으로 개명하고 활동을 새롭게 전개해나갔다. 얼마 후 이들은 < 유니버설 >(Universal)과 계약을 맺고 1996년 9월 싱글 ‘Roses are red’를 발표했다. 이 싱글은 덴마크 차트 정상에 올랐고, 후속싱글 ‘My oh my’ 역시 1위를 점령하며 아쿠아의 히트예감을 증폭시켰다. 1997년 덴마크 자국내의 스타를 넘어 드디어 국제적 인지도를 얻게되는 아쿠아의 첫 번째 정규앨범 < Aquarium >가 출시되었다. 발랄한 댄스 비트와 친근함으로 무장한 이 앨범은 미국에서 발매 2주만에 2백만장이 팔려나갔으며 전세계적으로 2천5백만장의 판매고를 올렸다. 메가히트 싱글 ‘Barbie girl’은 방송횟수만으로 빌보드차트 7위에 입성했으며, 영국에서는 발매 2주만에 ‘영국의 자존심’ 스파이스 걸스를 밀어내고 차트 정상을 차지했다. 이러한 흥행 여파는 한동안 계속되었다. 1998년 발매된 후속싱글 ‘Doctor Jones’, ‘Turn back time’은 영국차트에서 데뷔와 동시에 1위를 차지하는 기염을 토했다. 특히 기네스 팰트로 주연의 영화 < 슬라이딩 도어스 >에 삽입되기도 한 팝 발라드 ‘Turn back time’은 유로 댄스그룹이라곤 믿지 못할 정도로 뛰어난 서정성과 팝 감수성을 뽐내며 국내 팬들에게 큰사랑을 받았다. 2000년 5월에는 멤버 전원이 프로듀싱과 레코딩, 믹싱 등의 작업을 모두 도맡은 두 번째 앨범 < Aquarius >이 출시되었다. 아쿠아는 말 그대로 맑고 투명한 댄스음악으로 히트행진을 계속하고 있다. 한없이 흥겹고 경쾌한 사운드로도 이들은 충분히 가치가 있다. 하지만 음악적 변신을 시도하며 다양성을 얻고자한 2집으로 봐선 이들이 유로 댄스라는 한정된 범주 내에서 만족할 것 같지는 않다.
영화 < 코요테 어글리 >의 주제곡 ‘Can''t fight the moonlight’로 국내 팬들에게도 강렬한 인상을 남겼던 리앤 라임스는 일찍부터 ‘컨트리 신동’이라 불리던 여가수다. 1996년 14살의 어린 나이로 데뷔해 컨트리 음악계에 신선함을 불어넣었다. 하지만 최근 2001년에 발표한 [I Need You]을 통해서는 절정의 팝 감각을 과시하며 팝 가수로의 변신도 모색하고 있다. 리앤 라임스는 컨트리 ... 영화 < 코요테 어글리 >의 주제곡 ‘Can''t fight the moonlight’로 국내 팬들에게도 강렬한 인상을 남겼던 리앤 라임스는 일찍부터 ‘컨트리 신동’이라 불리던 여가수다. 1996년 14살의 어린 나이로 데뷔해 컨트리 음악계에 신선함을 불어넣었다. 하지만 최근 2001년에 발표한 [I Need You]을 통해서는 절정의 팝 감각을 과시하며 팝 가수로의 변신도 모색하고 있다. 리앤 라임스는 컨트리 가수 특유의 맑은 음색을 견지하면서도 파워 넘치는 가창력을 자랑한다. 그래서 미국에선 그녀를 1950-60년대 맹활약한 컨트리 가수 팻시 클라인(Patsy Cline)의 직계라 평가한다. 데뷔 싱글 ‘Blue’나 팝 차트 1위를 차지한 ‘How I live’ 같은 곡에서 그녀의 노래실력을 확인할 수 있다. 어린 나이도 강점으로 작용해 컨트리 특유의 카우보이 모자에 통기타 이미지는 희석되고 또래의 감수성에도 어필했다. 발표하는 앨범마다 상당한 호평을 얻어 [CMA(Country Music Association Awards)] 같은 각종 컨트리 시상식은 물론 < 빌보드 어워즈 >, < 그래미 > 시상식에서도 수상하며 차세대 컨트리 디바의 입지를 굳혔다. 사실 국내에서 가장 인기 없는 음악 중 하나가 컨트리 음악이다. 멜로디를 중시여기는 국내 정서상 미국 카우보이들의 버터냄새 진하게 풍기는 그 음악이 맞지 않는 건 당연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본토 미국(특히 남부지역)에서 그 음악의 인기는 가히 절대적이다. 특히 컨트리의 ‘지존’ 가스 브룩스의 경우, 앨범이 나왔다하면 컨트리 차트는 물론이고 팝 차트에서도 가뿐히 정상에 등극한다. 그 같은 현상은 확산되어 가스 브룩스 이후 컨트리 가수가 팝 차트를 점령하는 일은 다반사가 되었다. 여기에 샤니아 트웨인, 페이스 힐 같은 절충형 컨트리 가수들이 가세해 컨트리 음악계는 호황을 누리고 있다. 이처럼 컨트리 음악은 미국인들의 자존심이자 자랑이다. 그것이 컨트리 음악이 혹 신세대들의 음악은 아닐지라도 < 코요테 어글리 > 같은 감각적이고 ‘젊은’ 영화에 사용될 수 있는 이유다. 팝과의 크로스오버, 리앤 라임스의 컨트리 음악 컨트리 음악이 확고한 지지세력을 거느리고 있다지만 전통적인 패턴만을 고수한다면 결국 한정된 테두리 내에만 머물게 된다(물론 이것도 유의미하다). 샤니아 트웨인, 페이스 힐은 기존 컨트리 향수를 유지하면서 보다 친화력 있는 주류 팝과의 결합을 시도해 광범위한 호응을 끌어낸 가수들이다. 샤니아 트웨인의 앨범 [Come On Over]는 2천만장의 판매고라는 놀라운 상업적 성과를 얻기도 했다. 리앤 라임스의 음악도 이와 비슷한 맥락이다. 컨트리에 충실하면서도 팝 사운드를 거기에 융합시켰다. 차이라면 그들이 30살을 넘긴 나이에 뒤늦은 스타덤을 얻었다면 리앤 라임스는 겨우 14살에 해냈다는 것. 1982년에 태어난 그녀는 1996년 ‘Blue’라는 곡으로 처음 등장해 10대 가수 선풍을 일으킨 이래 지금껏 6장의 앨범을 발표하며 착실히 자신의 영역을 쌓아가고 있다. 데뷔 초반은 주로 컨트리 고전이나 올드 팝 넘버들을 리메이크하는 수준이었지만 곧 자신만의 색깔로 무장해갔다. 2001년 발표한 [I Need You]는 훌륭한 팝 앨범이다. 따라서 보다 많은 팬들이 앨범을 찾을 듯하다. 그렇다면 이 앨범을 기점으로 그녀는 자신을 키운 컨트리를 외면하고 팝으로 돌아설 것인가. 자신에게 더 어울리는 스타일을 찾아야할 과제가 그녀에겐 남아있다. 무한한 잠재력을 지닌 그녀의 ‘선택’을 지켜보는 것도 흥미롭다.
고품격의 팝 소울과 댄스 팝을 들려주는 영국의 4인조 걸 그룹 올 세인츠는 탄생 때부터 스파이스 걸스와 여러 모로 비교 대상이 되었던 그룹이다. 이 두 팀의 멤버 구성이나 음악 스타일이 상당히 비슷했기 때문이다. 멜라니(Melanie Blatt), 샤즈네이(Shaznay Lewis) 니콜(Nicole Appleton), 나탈리(Nathalie Appleton)로 구성된 올 세인츠는 1993년 멜라니와 샤즈네이의 ... 고품격의 팝 소울과 댄스 팝을 들려주는 영국의 4인조 걸 그룹 올 세인츠는 탄생 때부터 스파이스 걸스와 여러 모로 비교 대상이 되었던 그룹이다. 이 두 팀의 멤버 구성이나 음악 스타일이 상당히 비슷했기 때문이다. 멜라니(Melanie Blatt), 샤즈네이(Shaznay Lewis) 니콜(Nicole Appleton), 나탈리(Nathalie Appleton)로 구성된 올 세인츠는 1993년 멜라니와 샤즈네이의 듀오로 처음 출발했다. 이들은 런던의 ‘올 세인츠 가(All Saints Road)’에 위치한 스튜디오에서 녹음 작업을 시작했다. < ZTT > 레이블에서 ‘If you wanna party(I found lovin'')’을 발표한 그 듀오는 1995년 캐나다 출신의 니콜, 나탈리 자매를 영입해 라인업을 갖췄다. < 런던(London) > 레코드와 계약을 체결한 올 세인츠는 1997년 셀프 타이틀 데뷔앨범을 내놓으며 이미 슈퍼스타였던 스파이스 걸스와 피할 수 없는 한판승부를 벌였다. 첫 싱글 ‘I know where it''s at’은 데뷔하자마자 영국차트 1위에 올라 기세를 올렸고, 후속 싱글 ‘Never ever’ 역시 차트를 석권하며 < 브릿 어워즈 >에서 두 개 부문을 수상하는 영예도 얻었다. 하지만 당시 비교 우위는 스파이스 걸스였다. 올 세인츠보다 조금 먼저 등장한 그들은 걸 파워 선풍을 일으키며 걸 그룹 정상이라는 위치를 선점해 논 상태였다. 아쉽게도 올 세인츠는 그 간발의 시간차 때문에 ‘후발주자의 슬픔’을 고스란히 감내해야 했다. ‘제2의 스파이스 걸스’, ‘복제품’ 등과 같은 치명적인 오명(汚名)을 들어야 했으며, 자신들의 분투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조명이 스파이스 걸스에게 돌아갔다. 이들은 그러나 그 같은 외면적 평가에 개의치 않고 자신들만의 장점을 부각시키는 데 힘을 기울였다. 바로 음악적 내실 쌓기와 이미지 특화작업이었다. 이들은 스파이스 걸스에 비해 톡톡 튀는 개성은 부족하지만 무엇보다 가창력이 출중하며, 또한 멤버 전원이 작곡능력을 갖추고 있다. 비주얼 측면으로는 고풍스럽고 우아한 매력을 풍긴다. 이들이 들려주는 팝 소울은 비교적 미국 흑인 여성그룹의 힙합과 랩, R&B, 가스펠 전통에 충실하다. 그래서 이들의 음악에서 솔트 앤 페파(Salt ''N'' Pepa)나 엔 보그(En Vogue) 또는 TLC의 영향을 단번에 느낄 수 있다. 이러한 흑인음악에 영국 특유의 선율과 풍부한 하모니를 배합한 이들의 음악은 그래서 훨씬 더 고급스럽고 더 여성스런 느낌이 든다. 이들의 흑인 필에 최근에는 감각적 테크노가 얹혀졌다. 2000년 개봉작 < 비치(Beach >에 삽입된 ‘Pure shores’는 일렉트로니카 ‘스타일리스트’ 윌리엄 오비트(William Orbit)가 현란한 테크노 색감으로 터치해 논 곡이다. 이어 10월 발표한 2집 < Saint And Sinner > 역시 윌리엄 오비트가 제작에 참여해 이들의 예의 ‘커피 빛’ 음악에 나른한 전자 음이 어우러졌다. 싱글 발매된 ‘Black coffee’는 ‘Pure shores’에 이어 다시 한 번 싱글차트 정상에 오르는 쾌거를 거뒀다. 비슷한 시기에 신보를 내놓은 스파이스 걸스의 저조한 성적과는 대조적이다. 차트 성적만으로 우열을 가리기는 힘들지만 적어도 이들이 스파이스 걸스의 아류는 아니라는 사실이 입증된 것이다. 비록 출발은 미덥지 않았지만 2집 출시까지의 과정을 보면 올 세인츠는 나름대로 자신들만의 영역을 구축한 듯 보인다. 비슷비슷한 매력을 쫓기보다는 음악성에 보다 승부를 걸었기 때문에 이들은 스파이스 걸스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런데 최근 올 세인츠의 멤버들이 그룹을 떠나기 시작했다는 소식이 들려 온다. 안타깝지만 만들어진 그룹의 한계는 여기까지인 듯 싶다.
노래 : Sixpence None The Richer (식스펜스 넌 더 리처)
1990년대 초반에 등장한 식스펜스 넌 더 리처는 소박한 팝 음악을 바탕으로 상큼한 모던 록을 들려주는 CCM 밴드다. 여성 보컬리스트 리 내시(Leigh Nash)의 맑은 음색과 기타리스트 매트 슬로컴(Matt Slocum)이 뽑아내는 잔잔한 멜로디가 그룹의 생명이다. 팝과 록이 조화된 사운드가 주를 이루지만 포크와 클래식 요소도 도입하고 있다. 기타, 베이스, 드럼이라는 기본편성에 트럼펫과 피아노 그리고 첼로... 1990년대 초반에 등장한 식스펜스 넌 더 리처는 소박한 팝 음악을 바탕으로 상큼한 모던 록을 들려주는 CCM 밴드다. 여성 보컬리스트 리 내시(Leigh Nash)의 맑은 음색과 기타리스트 매트 슬로컴(Matt Slocum)이 뽑아내는 잔잔한 멜로디가 그룹의 생명이다. 팝과 록이 조화된 사운드가 주를 이루지만 포크와 클래식 요소도 도입하고 있다. 기타, 베이스, 드럼이라는 기본편성에 트럼펫과 피아노 그리고 첼로가 이들의 음악에 중요하게 쓰인다. 이들은 1999년 여름을 강타한 이들의 스매시 히트곡 ‘Kiss me’로 국제적 지명도를 얻었다. 이 곡은 이정현, 조성모가 출연했던 모 이동통신 광고에 배경음악으로 쓰여 국내에서 더욱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기독교를 찬양하는 CCM 밴드답게 이들의 이름은 C. S. 루이스의 저서 < 순전한 기독교 >(Mere Christianity)의 한 구절에서 따왔다. 교회에서 만난 리 내시와 매트 슬러컴이 1990년 그룹을 처음 만들었다. 나탈리 임부르글리아의 앨범에 첼로 주자로 참여한 적이 있던 매트 슬로컴은 당시 교회에서 노래하던 리 내시에서 반해서 그룹활동을 제안했다. 3인조로 출발한 이들은 1993년 인디 레이블에서 데뷔앨범 < The Fatherless And The Widow >을 발표했다. 이 앨범은 빌보드 선정 ‘올해의 가장 중요한 앨범’ 10위안에 들 정도로 주목을 받았다. 이후 텐사우전드 매니악스(10,000 Manics)나 스미더린스(The Smithereens) 등의 투어에 참여했던 이들은 1995년에 2집 < This Beautiful Mess >을 내놓았다. 이들의 진정한 스타덤은 1999년 3집 < Sixpence None The Richer > 발표와 함께 찾아왔다. 수록곡 ‘Kiss me’가 영화 < She`s All That >와 TV 드라마 < 도슨의 청춘일기 >(Dawson`s Creek)에 삽입되면서 젊은 연인들의 송가가 되었다. 특히 그 뮤직비디오는 프랑소와 트뤼포의 영화 < 줄 앤 짐 >의 장면을 재현한 것이어서 더욱 인상적이었다. 같은 해 여성 뮤지션들의 축전 ‘릴리스 페어’에 참여하기도 한 이들은 현재 CCM 밴드로는 최고의 성공가도를 달리고 있다. 활동 내내 잦은 멤버교체로 트러블이 생겼지만 현재는 리와, 매트 외에 드러머 대일 베이커(Dale Baker)와 베이스시스트 저스틴 캐리(Justin Cary), 리듬 기타 션 켈리(Sean Kelly)의 라인업으로 활동하고 있다.
1965년 히피문화의 본거지인 미국 샌프란시스코 출신의 밴드 제퍼슨 에어플레인(Jefferson Airplane), 74년엔 제퍼슨 스타쉽(Jefferson Starship)으로 그리고 85년엔 다시 스타쉽(Starship)으로 태어나면서 30년 이상 건재함을 과시한 록의 전설이다. 그룹명이 바뀌는 동안 많은 라인업의 변동이 따랐지만 언제나 중심에는 항상 그레이스 슬릭(Grace Slick)이라는 여장부가 서있었... 1965년 히피문화의 본거지인 미국 샌프란시스코 출신의 밴드 제퍼슨 에어플레인(Jefferson Airplane), 74년엔 제퍼슨 스타쉽(Jefferson Starship)으로 그리고 85년엔 다시 스타쉽(Starship)으로 태어나면서 30년 이상 건재함을 과시한 록의 전설이다. 그룹명이 바뀌는 동안 많은 라인업의 변동이 따랐지만 언제나 중심에는 항상 그레이스 슬릭(Grace Slick)이라는 여장부가 서있었다. 그룹의 초창기 멤버 폴 켄트너(Paul Kantner)가 1984년 결별을 선언하고 그레이스가 다시 돌아오면서 그룹은 스타쉽(Starship)으로 새로운 역사를 시작하게 되는데, 더 이상의 소수 매니아들을 위한 음악이 아닌 성인 취향의 대중성이 강한 록 음악으로 승부를 걸게 된다. 1985년 첫 선을 보인 < Knee Deep In The Hoopla >에서 그들의 현대적인 감각에 대한 조율은 예상 밖의 큰 성공을 거두었다. ’We build this city’와 ’Sara’ 두 곡의 싱글이 연속해서 전미 차트 1위를 기록하는 선풍과 함께 1970년대 중후반 이후의 ’히트갈증’을 모처럼 푼 것이다. 앨범에선 또 하나의 히트곡 ’Tomorrow doesn’t matter tonight(26위)’가 나왔다. 이듬해 4월 영화 < 마네킨 >(Mannequin)의 삽입곡 ’Nothings gonna stop us now’와 함께 이들의 인기는 최고조에 달했다. 미국에서 2주간, 영국에서 4주간 정상 등극의 선풍을 일으켰다. 여세를 몰아 발표한 스타십의 두번째 앨범 < No Protection >은 ’Its not over(Til its over)(9위)’, ’Best patrol(46위)’등의 히트곡들을 쏟아냈고 후에 로버타 플랙(Roberta Flack)과 맥시 프리스트(Maxi Priest)에 의해 리메이크 되어 더 큰 인기를 얻었던 ’Set the night music’도 수록되어 있다. 3년 동안 넘버원 히트곡을 꾸준히 배출하며 확실한 전성기를 구가했던 밴드에게 1988년은 활동이 뜸했고 그레이스가 공식적으로 그룹을 떠난(제퍼슨 에어플레인의 재결성을 위해)해이기도 하다. 영화 < 칵테일 >(Cocktail) 사운드트랙의 ’Wild again(73위)’이 유일한 활동으로 기억된다. 이듬해 그레이스가 떠난 자리에 키보드 주자와 베이시스트를 보강하고 3집 앨범 < Love Among The Cannibals >을 출반하였는데 이 시기 그룹의 구심점은 미키 토마스(Micky Thomas)였고 앨범엔 다수의 명망 있는 작곡가들이 참여하였다. 버니 토핀(Bernie Taupin)과 마틴 페이지(Martin Page), 로버트 존 뮤트 랭(Robert John Mutt Lange)등이 주인공들이었고 ’Its not enough(12위)’, ’I didnt mean to stay all night(75위)’과 같은 싱글이 탄생했다. 1990년 스타쉽은 공식적으로 해산했다. 멤버들 각자의 솔로활동을 위해 내려진 결정이었고 발빠른 행보를 보인 RCA에선 이듬해 < Starship Greatest Hits (Ten Years and Change) >라는 히트곡 모음집을 발표하여 제퍼슨 스타쉽과 스타쉽의 음악이 공존하는 형태에 두 곡의 신곡도 포함시켰다. 1992년 미키와 브레트가 의기투합, 8인조로 거대해진 스타쉽을 재탄생 시켰으나 새 앨범 제작은 없었고 이듬해 스타십만의 베스트 앨범 < The Best Of Starship >이 발매되었지만 대표작 ’We build this city’가 빠져서 아쉬움을 주었다. 이후 간간이 소규모의 공을 통해 팬들을 만나면서 명맥을 유지해 가고 있다.
옆모습을 보면 코보다 입이 더 돌출되어 있어 그다지 호감 가는 외모를 갖고 있지 않은 빌리 오션(Billy Ocean)은 그 반대급부인 풍부하고 찰진 중저음의 진한 음색으로 1980년대 중반에 대중적인 인기를 얻은 흑인 남성 가수다. 1950년 1월 21일, 서인도제도에 있는 섬나라 트리니다드에서 레슬리 세바스찬 찰스라는 이름으로 태어난 빌리 오션은 8살 때 영국으로 이민가 낮에는 자동차 공장에서 일하고 밤에는 ... 옆모습을 보면 코보다 입이 더 돌출되어 있어 그다지 호감 가는 외모를 갖고 있지 않은 빌리 오션(Billy Ocean)은 그 반대급부인 풍부하고 찰진 중저음의 진한 음색으로 1980년대 중반에 대중적인 인기를 얻은 흑인 남성 가수다. 1950년 1월 21일, 서인도제도에 있는 섬나라 트리니다드에서 레슬리 세바스찬 찰스라는 이름으로 태어난 빌리 오션은 8살 때 영국으로 이민가 낮에는 자동차 공장에서 일하고 밤에는 작은 클럽에서 노래하며 인지도를 획득해 1975년에는 셀프타이틀 데뷔앨범을 발표했다. 여기서 모타운 풍의 경쾌한 싱글 ‘Love really hurts without you’가 미국 차트 22위와 영국 차트 2위에 오르며 성공적인 상견례를 가졌지만 이건 워밍업에 불과했다. 1970년대 후반에 미국에 정착한 빌리 오션은 1980년에 < City Limit >와 1981년에 < Nights (Feel Like Getting Down) >, 1982년에 < Inner Feelings >까지 3장의 음반을 더 발매했지만 미국에서는 댄스 차트와 흑인음악 차트에서만 두각을 나타냈다. 그리고 1984년에 탄생한 다섯 번째 작품 < Suddenly >는 빌리 오션을 전 세계에 메모리시킨 결정타였다. ‘Caribbean queen’은 마이클 잭슨(Michael Jackson)의 ‘Billie Jean’과 베이스 리듬이 유사해 표절의혹을 받았지만 2주 동안 넘버원을 차지해 지금까지 그의 시그니처 송으로 남아있으며 빌로 오션이 명 프로듀서이자 작곡가인 로버트 존 ‘머트’ 랭(샤니아 트웨인의 전 남편)과 공동으로 작곡한 후속 싱글인 ‘Loverboy’는 2위, 당시 국내 나이트클럽에서 소위 ‘부루스 타임’의 단골이었던 음반타이틀 ‘Suddenly’는 4위, ‘Mystery lady’는 24위에 랭크되어 한 앨범에서 4곡이나 40위권 내에 오르는 대박 히트를 기록했다. 특히 ‘Caribbean queen’으로 빌리 오션은 그해 그래미에서 최우수 리듬 앤 블루스 남성 가수상을 수상했다. 앨범 < Suddenly >의 성공은 1985년까지 이어졌고 1986년에는 그 여세를 몰아 6집 < Love Zone >을 공개했다. 여기서도 히트 싱글이 쏟아졌는데 캐서린 터너와 마이클 더글라스가 주연한 영화 < 나일강의 보석 >에 삽입된 흥겨운 ‘When the going gets tough, the tough gets going’이 2위를 차지했고 고품격 리듬 앤 블루스 ‘There'll be sad songs’가 그의 두 번째 넘버원이 되었다. 그리고 ‘Love zone’이 10위, ‘Love is forever’는 16위에 올라 모두 4곡이 밀리언셀러를 기록했다. 2년 후인 1988년에 발표한 앨범 < Tear Down These Walls >에서도 다시 한번 1위곡을 배출하는데 국내에서도 큰 인기를 얻은 댄스곡 ‘Get outta my dreams, get in to my car’이다. ‘Loverboy’와 ‘When the going gets tough, the tough gets going’에 이어 로버트 존 ‘머트’ 랭과 합작한 이 노래 외에도 발라드 ‘Colour of love’와 ‘Licence to chill’이 각각 17위와 32위를 차지하며 3연타석 홈런을 쳤다. 또한 이 음반에는 ‘Because of you’라는 곡이 있는데 나중에 푸른하늘이 1990년에 발표한 ‘이 밤이 지나도록’에서 이 노래를 표절해 우리나라에서 조용히 화제가 되었다.
모든 사람들은 기나긴 인생을 항해하면서 좋든 싫든 호사다마(好事多魔)와 전화위복(轉禍爲福)의 순간을 맞는다. 어떤 이들은 자신의 뜻대로 일이 진행되지 못해 좋지 않은 결과를 초래하기도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이것을 슬기롭고 현명하게 대처해 자신의 운명을 바꾸는 절호의 기회로 탈바꿈시키기도 한다. ’It’s a heartache’와 ’Total eclipse of the heart’, ’Holding out for... 모든 사람들은 기나긴 인생을 항해하면서 좋든 싫든 호사다마(好事多魔)와 전화위복(轉禍爲福)의 순간을 맞는다. 어떤 이들은 자신의 뜻대로 일이 진행되지 못해 좋지 않은 결과를 초래하기도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이것을 슬기롭고 현명하게 대처해 자신의 운명을 바꾸는 절호의 기회로 탈바꿈시키기도 한다. ’It’s a heartache’와 ’Total eclipse of the heart’, ’Holding out for a hero’ 등으로 우리나라에서 꾸준한 리퀘스트를 받는 보니 타일러(Bonnie Tyler)는 자신에게 주어진 불리한 여건을 자신만의 장점으로 승화시킨 불사조 같은 인물이다. 1970년대 중반 목에 생긴 혹을 제거하는 수술을 받은 이후 허스키한 음색을 소유하게 된 보니 타일러는 197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 중반까지 ’Bette Davis eyes’로 유명한 킴 칸스(Kim Carnes)와 함께 대표적인 ’여성판 로드 스튜어트’로서 당대를 풍미했다. 1953년 6월 8일 영국 연방인 웨일즈에서 게이너 홉킨스(Gaynor Hopkins)라는 본명으로 태어난 그녀의 음악은 1970년대와 1980년대가 확연하게 구별된다. ’It’s a heartache’로 대표되는 어쿠스틱 스타일이 두드러진 성인 취향의 팝이 그녀의 1970년대를 정의했다면, 미트 로프(Meat Loaf)의 음반 제작으로 유명한 작곡자 겸 제작자인 짐 스타인만(Jim Steinman)과 손잡은 1980년대 이후부터는 오페라 형식의 웅장하고 화려한 곡들이 그녀의 후반기를 책임졌다. 1978년, 빌보드 싱글 차트 3위를 기록한 타일러의 ’It’s a heartache’는 국내에서도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1980년대 보니 타일러의 음악과는 달리 경쾌한 전형적 어덜트 컨템포러리 스타일인 이 곡은 그녀의 두 번째 정규 앨범의 타이틀 트랙이었다. 이후 전자 음원이 없는 포크와 컨트리 성향의 음반을 공개했지만 만족할 만한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1980년대 초반에 음반사를 RCA에서 콜롬비아로 옮겨 회심의 역작을 구상하면서 제2의 도약을 준비한다. 1983년 세상에 공개된 < Faster Than The Speed Of Night >은 보니 타일러에게 새로운 음악 인생을 열어 준 걸작 앨범이다. 그녀를 대표하는 ’Total eclipse of the heart’는 1983년 10월 무려 4주 동안이나 빌보드 싱글 차트 정상의 자리를 지켰다. 뒤이어 후속곡 ’Take me back’도 46위를 기록하면서 1984년에 거행된 그래미상 시상식에서 가장 유력한 여자 가수상 후보로 예견되었으나 그녀는 ’Flashdance.....what a feeling’의 주인공 아이린 카라(Irene Cara)에게 영광의 트로피를 양보(?)했다. ’Total eclipse of the heart’가 한 달 동안 싱글 차트 1위를 지키고 있을 때 바로 그 밑에서 3주간이나 2위를 지킨 노래도 짐 스타인만이 작곡하고 프로듀싱 한 에어 서플라이(Air Supply)의 ’Making love out of nothing at all’이었다. 그 정도로 당시 짐 스타인만의 명성은 하늘을 찌를 만큼 기세가 등등했다. 강산이 변한다는 10년에 2년이 더 지난 1995년에는 여성 댄스 팝 가수 니키 프렌치(Nicki French)가 ’Total eclipse of the heart’를 댄스 스타일로 커버해 다시 한번 싱글 차트 2위의 자리에 올려놓음으로써 이 곡이 전천후 명곡임을 재확인시켰다. 1984년, 미 전역을 춤바다의 물결로 침몰시킨 영화 < 푸트루스 >의 사운드트랙에는 강력한 보컬과 드럼 연주가 휘몰아치는 ’Holding out for a hero(34위)’가 수록되어 그녀의 지속적인 인기를 유지시켜 주었고, 1920년대 SF 영화를 복원해 1984년에 재개봉한 < 메트로폴리스 >에 삽입된 ’Here she comes(76위)’ 같은 영화 수록곡들을 취입하면서 비교적 여유 있는 한 해를 보냈다. 1986년에는 < Secret Dreams & Forbidden Fire >로 다시 한번 도약을 시도했지만 3년 전과 같은 센세이셔널한 결과를 재현하는데는 실패했다. 이전의 앨범 < Faster Than The Speed Of Night >처럼 짐 스타인만 식의 장대한 스케일이 반복되었으며 대부분 곡들의 길이도 5분대를 훌쩍 뛰어 넘었기 때문에 싱글로 커트 하기엔 약간 무리가 따랐다. 팝 메탈의 기폭제 역할을 한 본 조비(Bon Jovi)의 ’You give love a bad name’(1986년 11월 1위)과 비슷한 멜로디를 가진 ’If you were a woman (And I was a man)’만이 1986년 77위를 끝으로 추락하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하지만 이 곡은 1990년대 초반에 국내 자동차 광고의 배경 음악으로 쓰인바 있어 우리 귀에 그다지 낯설지 않다. 1970년대 후반 ’It’s a heartache’의 대대적인 인기로 우리나라에서 개최된 국제 가요제에도 참가해 그 특유의 거친 허스키 음색을 직접 들려준 이 금발의 미녀는 천재 아티스트 마이크 올드필드(Mike Oldfield)의 1987년 음반 < Islands >에 게스트 보컬로 초청되어 그녀만의 보컬 전율을 다시 한번 과시하기도 했다. 보니 타일러는 1990년대 후반까지 꾸준하게 신보를 발표했지만 그 작품들은 제대로 조명을 받지 못한 채 금새 잊혀졌다. 하지만 ‘It’s a heartache’와 ‘Total eclipse of the heart’의 메아리는 아직까지 우리의 뇌리에 남아 그녀의 노래들처럼 격정적인 환희와 감동을 전한다.
알 켈리(R. Kelly)는 1990년대 베이비페이스(Babyface)와 더불어 흑인음악 최고의 프로듀서로 활약하며 어번 알앤비(Urban R&B), 뉴잭/질스윙(New Jack/Jill Swing)의 확립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뮤지션이다. 1969년 1월 8일 시카고 외각의 사우스 사이드(South Side)에서 태어난 알 켈리(본명: Robert Kelly)는 흑인 빈민가에서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낸다. 아버... 알 켈리(R. Kelly)는 1990년대 베이비페이스(Babyface)와 더불어 흑인음악 최고의 프로듀서로 활약하며 어번 알앤비(Urban R&B), 뉴잭/질스윙(New Jack/Jill Swing)의 확립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뮤지션이다. 1969년 1월 8일 시카고 외각의 사우스 사이드(South Side)에서 태어난 알 켈리(본명: Robert Kelly)는 흑인 빈민가에서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낸다. 아버지가 가정을 버리고 떠나 홀어머니와 살아야 했으며, 흑인 갱들과 어울리다 총상을 입는 등 그의 유년기는 저질 흑인 빈민의 삶이었다. 저급의 삶에서 벗어나기 위해 농구선수의 꿈을 키워나가던 그는 레나 맥린(Lena McLin)이라는 음악 선생님을 통해 자신의 음악적 재능을 발견하게 되고 어머니가 선물한 키보드를 가지고 뮤지션으로서의 도전을 시작한다. R&B 그룹 MGM을 결성한 그는 거리 공연을 통해 시카고 다운타운 최고의 뮤지션으로 성장해 간다. TV 음악 컨테스트인 < Big Break >에 출연하여 우승하는 등 지명도를 더해 나가던 알 켈리는 결국 자이브(Jive) 레코드의 웨인 윌리엄즈(Wayne Williams)의 눈에 들게 되었고, 1992년 데뷔 앨범 < Born Into The 90’s >를 발표했다. 데뷔는 성공적이었다. 첫 싱글 ’She’s got that vibe’가 R&B 차트에서 선전하며 눈길을 끌었고, 이어지는 ’Honey love’, ’Slow dance(Hey Mr. DJ)’가 연이어 R&B 차트 정상을 차지하며 초대형 R&B 뮤지션의 탄생을 알렸다. 데뷔 이듬해인 1993년 발표된 두 번째 앨범 < 12 Play >는 신인급 뮤지션 알 켈리를 R&B 정상의 인기 뮤지션으로 끌어올린다. 70년대 펑키(Funky)스타일과 90년대 힙합을 결합한 알켈리적 사운드가 위력을 발휘했고, 달콤하게 애원하는 발라드 곡 ’Bump n’ grind’가 싱글 차트에서 4주, R&B 차트에서 12주간 정상을 지키며 음악계를 강타했다. 솔로 뮤지션으로서 정상의 자리에 오른 알 켈리는 프로듀서로서의 또 다른 정상을 향해 순항을 시작한다. 1994년 알리야(Aaliyah)의 데뷔 앨범 < Age Ain’t Nothin’ But A Number >를 프로듀싱하며 15세 소녀 가수를 스타의 반열에 올려놓았고, 알리야를 통해 뉴잭/질 스윙의 선두주자로 부상한 알 켈리는 이후 자신의 앨범은 물론 다른 뮤지션들의 앨범에 참여하여 R&B 최고의 프로듀서로 자리하며 어번(Urban) R&B의 흐름을 주도한다. 1995년 ’You are not alone’을 프로듀싱하여 마이클 잭슨(Michael Jackson)에게 차트 정상의 기쁨을 선사하기도 했던 그는 토니 브랙스턴(Toni Braxton), 휘트니 휴스턴(Whitney Houston), 자넷 잭슨(Janet Jackson), 메리 제이 블라이지(Mary J. Blige), 보이즈 투 멘(Boyz II Men) 등 거의 모든 정상급 어번 R&B 뮤지션들의 앨범에 참여하며 프로듀서로서 맹활약했다. 1995년 발표한 3집 앨범 < R. Kelly >는 상업적으로 음악적으로 모두 성공을 거두며 알 켈리 최고의 앨범으로 자리했다. 4백만장 이상이 팔려 나갔고, 발표한 세 장의 싱글 ’You remind me of something’, ’Down low(Nobody has to know)’, ’I can’t sleep baby(If I)’가 모두 플래티넘을 기록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앨범은 노골적으로 성적 유혹에만 치중한 전작과 달리 기독교인으로서의 자세를 담았고, 고급스러움과 저속함을 동시에 담아내는 그 만의 독특한 매력이 빛을 발한다. 1996년 영화 < Space Jam > 수록 곡 ’I believe I can fly’가 차트 정상에 오르며 전 세계에 알 켈리의 이름을 다시 한 번 각인시켰고, 이 곡으로 그래미(Grammy) 3개 부문을 수상하는 영예를 누렸다. 영화 < Batman & Robin >의 사운드 트랙에 참여하여 ’Gotham city’를 연이어 히트시킨 알 켈리는 당시 최고의 인기 여가수였던 셀린 디욘(Celine Dion)과의 듀엣 곡 ’I’m your angel’을 발표하며 다시금 차트 정상을 밟는다. 싱글 ’I’m your angel’의 여세를 몰아 발표한 4집 < R. >(1998)은 더블 앨범에 30여 곡이 수록되었고, 퍼프 대디(Puff Daddy), 나스(Nas), 제이-지(Jay-Z) 등 화려한 게스트들이 힘을 보탰음에도 불구 평단으로부터 냉담한 반응을 얻었고, 이후 큰 히트 싱글 또한 만들어 내지 못했다. 유명 아티스트들의 참여가 알 켈리 특유의 매력을 감소시켰고, 자신의 이름에 대한 중압감 때문인지 대중성을 확보하는 데에도 실패했다. 전작에서의 흔들림을 감안한 듯 2000년 발표한 < TP-2.com >은 대중성 강했던 < 12 Play >로 회귀하며 달콤함으로 앨범을 채웠다. ’I wish’, ’The storm is over now’, ’Fiesta’ 등이 고루 인기를 얻었지만 이 앨범 역시 R&B 최고의 뮤지션 알 켈리에게 특별한 히트 싱글 하나 가져다 주지 못했다. 알 켈리는 2002년 < R. >앨범에서 함께 했던 제이-지(Jay-Z)와 다시 한 번 손을 잡고 < The Best Of Both Worlds >를 발표하는 등 슬럼프로 접어드는 힘겨운 시기를 이겨내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1990년대 후반 일기예보가 발표한 ‘좋아 좋아’의 클라이맥스 소절을 들었을 때 많은 음악 팬들은 팝록, 어덜트 컨템포러리 싱어 케니 로긴스(Kenny Loggins)가 1982년에 공개한 ‘The more we try’를 떠올렸다. 일기예보의 노래가 케니 로긴스의 발라드 스타일보다 업템포로 밝은 면을 강조했지만 클라이막스의 기본 멜로디는 같았다. ‘The more we try’는 ‘Forever’, ‘Footl... 1990년대 후반 일기예보가 발표한 ‘좋아 좋아’의 클라이맥스 소절을 들었을 때 많은 음악 팬들은 팝록, 어덜트 컨템포러리 싱어 케니 로긴스(Kenny Loggins)가 1982년에 공개한 ‘The more we try’를 떠올렸다. 일기예보의 노래가 케니 로긴스의 발라드 스타일보다 업템포로 밝은 면을 강조했지만 클라이막스의 기본 멜로디는 같았다. ‘The more we try’는 ‘Forever’, ‘Footloose’와 함께 우리나라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케니 로긴스의 베스트 트랙이다. 1948년 1월 7일 미국의 워싱턴 주에서 태어난 케니 로긴스는 1970년대 초반 짐 메시나(Jim Messina)와 함께 포크록 듀오 로긴스 & 메시나(Loggins & Messina)를 만들어 ‘Your Mama don''t dance(4위)’나 ‘Thinking of you(18위)’같은 히트곡을 배출했는데 특히 ‘Your mama don''t dance’는 1988년 팝메탈 밴드 포이즌(Poison)이 커버해 다시 한번 탑 텐에 올려놓아 다시 한번 명곡임을 입증했다. 케니는 성공적인 듀엣 활동을 접고 1977년부터 결별해 본격적으로 독립 활동을 시작해 멜리사 맨체스터(Melissa Manchester)와 공동으로 작곡한 ‘Whenever I call you friend(5위)’를 비롯해 ‘This is it(11위)’, 케니 로긴스의 오리지날을 두비 브라더스가 리메이크해 차트 정상은 물론 그래미 올해의 레코드를 수상한 ‘What a fool believes’ 등으로 1970년대를 마감했다. 그의 진정한 성공은 1980년대를 맞이하면서 화려하게 개화하기 시작했다. 1982년에 저니(Journey)의 보컬리스트 스티브 페리(Steve Perry)와 호흡을 맞춘 ‘Don''t fight it(17위)’와 ‘Heart to heart(15위)’, 그리고 유독 국내에서 사랑 받았던 ‘The more we try’가 들어 있는 그의 역작 < High Adventure >는 곧 다가올 성공에 대한 워밍업이었다. 1984년부터 쏟아지는 케니 로긴스의 히트곡들은 우연인지 필연인지 거의 모두가 영화에 삽입된 노래들이었다. 그의 대표곡 ‘Footloose(1위)’와 ‘I''m free(22위)’는 영화 < 풋루스 >의 사운드트랙에 수록된 노래들이었고, ‘Danger zone(2위)’은 < 탑 건 >에서, ‘Meet me half way(11위)’는 < 오버 더 탑 >으로부터, ‘Nobody''s fool(8위)’은 < 캐디섁Ⅱ >에서 배출된 히트 싱글들이다. 그러나 이 ‘Nobody''s fool’을 마지막으로 싱글 차트와의 친분을 정리한 케니 로긴스는 1990년대 중반을 기점으로 가족의 소중함과 어린이들을 위한 음반을 만드는데 열중했다. 1990년대 초반 아내와의 이혼이 그에겐 큰 충격이었던 셈이다. 그의 예민하고 가녀린 목소리는 ‘Danger zone’이나 ‘Don''t fight it’처럼 강한 음악보다 ‘The more we try’나 ‘Forever’, ‘Whenever I call you friend’와 같은 차분하고 부드러운 노래에 더 잘 어울린다. 그의 성공은 팝시대로 대표되는 1980년대 음악 풍토에 정확히 들어맞는 시대적 요청이었기에 가능했다.
노래 : Irene Cara (아이린 카라)
가정 폭력의 피해자에서 마음이 따뜻한 팝의 여왕으로! 티나 터너(Tina Turner)에게 있어 1958년부터 18년 동안 지속된 아이크 터너(Ike Turner)와의 결혼 생활은 영욕으로 점철된 세월이었다. 로큰롤 역사에서 한 획을 그은 부부 듀엣 아이크 & 티나 터너(Ike & Tina Turner)는 영광스런 부분으로 자리하지만 그동안 남편에게 당한 폭력은 쉽게 도려낼 수 없는 어두운 부분이다. 그녀의 그러... 가정 폭력의 피해자에서 마음이 따뜻한 팝의 여왕으로! 티나 터너(Tina Turner)에게 있어 1958년부터 18년 동안 지속된 아이크 터너(Ike Turner)와의 결혼 생활은 영욕으로 점철된 세월이었다. 로큰롤 역사에서 한 획을 그은 부부 듀엣 아이크 & 티나 터너(Ike & Tina Turner)는 영광스런 부분으로 자리하지만 그동안 남편에게 당한 폭력은 쉽게 도려낼 수 없는 어두운 부분이다. 그녀의 그러한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음악이라는 것을 옛 동료인 롤링 스톤스(Rolling Stones)의 ’입술’ 믹 재거(Mick Jagger)와 ’팝계의 카멜레온’ 데이비드 보위(David Bowie)는 알고 있었다. 그들의 도움으로 티나 터너는 팝 역사상 가장 멋진 ’컴백’에 성공하면서 자신의 인생을 스스로 디자인하기 시작했다. 45살이던 1984년, 티나 터너는 자신의 영원한 걸작으로 남게 된 < Private Dancer >를 세상에 공개했다. 알 그린(Al Green)의 원곡을 소울적인 록으로 해석한 ’Let’s stay together(26위)’로 첫 포문으로 연 이 LP는 그 유명한 ’What’s love got to do with it’가 3주 동안 싱글 차트 1위를 지켰고, 전남편 아이크 터너에게 전하는 록트랙 ’Better be good to me(5위)’와 ’Show some respect(37위)’, 그리고 다이어 스트레이츠(Dire Straits)의 리더 마크 노플러(Mark Knopfler)가 작곡한 ’Private dancer(7위)’까지 무려 5곡이 40위안에 랭크되면서 극적인 재기를 선호하는 그래미와 평론가들의 대대적인 환대를 받았다. 특히 그래미는 올해의 레코드, 올해의 여가수, 올해의 여성 록가수 부문을 사자 머리(?) 여가수에게 몰아주면서 쌍수를 들며 환영했다. 이제 본격적으로 그녀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티나 터너의 성공은 마이클 잭슨(Michael Jackson)과 프린스(Prince)부터 꽃을 피우기 시작한 록과 리듬 앤 블루스가 적극적으로 결합한 음악의 열매였다. 록 필(feel)이 충만한 그녀의 노래는 백인들에게도 비교적 쉽게 어필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브라이언 아담스(Bryan Adams)의 히트작 < Reckless >에 수록된 ’It’s only love(1985년 15위)’를 함께 불러 인기를 얻은 티나 터너는 1975년 영화 < 토미 >에 출연한 경력을 살려 1985년에 멜 깁슨(Mel Gibson) 주연의 액션 영화 < 매드 맥스 Ⅱ >에 조연으로 등장했으며 동시에 삽입곡 ’We don’t need another hero(2위)’와 ’One of the living(15위)’을 불러 히트시켰다. ’One of the living’으로 2년 연속 그래미 최우수 여성 록보컬을 수상한 이 흑인 록커는 그 여세를 몰아 1986년에 < Break Every Rule >을 공개했다. 필 콜린스(Phil Collins)가 드럼을 연주한 ’Typical male(2위)’을 비롯해 ’Two people(30위)’, ’What you get is what you see(13위)’, ’Break Every Rule(74위)’ 등으로 계속되는 인기를 누렸으며 다음 작품 < Foreign Affair >에서도 ’The Best(15위)’, ’Steamy windows(39위)’같은 싱글을 배출했다. 이렇듯 왕성한 활동으로 1986년과 1988년에도 그래미 최우수 여성 록 보컬리스트 상을 수상하면서 팻 베나타(Pat Benatar)와 같은 이 부문 4회 수상을 기록했다(그러나 연속 수상은 아님). 1993년에는 자서전 < I, Tina >를 바탕으로 한 영화 < 왓쓰 러브 갓 투 두 위드 잇 >이 개봉되었다. 티나와 아이크 역을 완벽하게 소화한 안젤라 바셋(Angela Bassett)과 로렌스 피시번(Lawrence Fishburne)을 오스카 남년 주연상 후보에 올려놓은 이 영화로 흑인 사회에서는 다시 한번 ’티나 터너 열풍’이 일었다. 1996년도 음반 < Wildest Dreams >에는 영화 < 007 골든아이 >의 주제가 ’Goldeneye(71위)’, 1984년에 자신의 ’What’s love got to do with it’을 밀어내고 정상을 차지한 존 웨이트(John Waite)의 ’Missing you(84위)’와 트립합의 선두주자 매시브 어택(Massive Attack)의 ’Unfinished sympathy’를 커버했다. 선배의 노래를 밀어냈다는 죄책감에 떨고 있을 후배 존 웨이트에겐 면죄부(?)를 주고 메시브 어택으로부터는 시대에 뒤쳐지지 않으려는 신(新) 감각을 이식하기 위함이었으리라. 환갑이 넘은 나이에도 가죽옷과 미니스커트를 즐겨 입는 ’팝계의 야생마’ 티나 터너의 앨범에는 항상 유명 뮤지션들의 눈부신 세션 참여가 우리의 눈을 잡아끈다. 그녀는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음악 재능뿐만이 아니라 주위 동료들로부터 받는 인정도 넘친다. 바로 이것들이 티나 터너가 장수할 수 있는 가장 근원적인 요소가 아닐까?
노래 : Roy Orbison (로이 오비슨 )
로이 오비슨(Roy "Kelton" Orbison)은 1936년 텍사스주 버논(Vernon)에서 태어났다. 6살 때부터 기타를 연주했던 그는 10대에 ’윙크 웨스터너스(Wink Westerners)’라는 밴드를 결성하여 인기를 얻는 등 어린 시절부터 천재로 두각을 나타냈다. 1956년 그룹명을 텐 킹스(The Ten Kings)로 바꾸고 버디 할리(Buddy Holly)의 프로듀서였던 노만 페티(Norman Pe... 로이 오비슨(Roy "Kelton" Orbison)은 1936년 텍사스주 버논(Vernon)에서 태어났다. 6살 때부터 기타를 연주했던 그는 10대에 ’윙크 웨스터너스(Wink Westerners)’라는 밴드를 결성하여 인기를 얻는 등 어린 시절부터 천재로 두각을 나타냈다. 1956년 그룹명을 텐 킹스(The Ten Kings)로 바꾸고 버디 할리(Buddy Holly)의 프로듀서였던 노만 페티(Norman Petty)와 함께 작업하며 첫 히트곡인 ‘Ooby dooby’를 발표한다. 하지만 1950년대 그의 주요 관심사는 작곡에 있었다. 싱어송라이터로서 인정받고 싶었던 그는 자작곡인 로크롤 넘버 ‘Only the lonely’를 당시 최고의 자리에 올라있었던 엘비스 프레슬리(Elvis Presley)와 에버리 브러더스(Everly Brothers)에게 권했지만 거절을 당하자 “내가 직접 노래하겠다”며 직접 이 곡을 녹음한다. 우수 가득하면서도 고음에서 불안한 듯한 독특한 목소리와 발군의 곡 제조로 록 역사에 길이 남게되는 로이 오비슨의 본격 가수인생은 이렇게 우연한 계기로 시작된다. 흥겨운 후렴 구를 가지고 있었던 ’Only the lonely’는 스피드와 파워가 특징이던 당시의 로큰롤과 분리 선을 그으며 인기를 누린다. 이 곡은 1960년 전미차트 2위에 올랐고 영국 차트에선 정상을 차지했다. 이후 그의 인기는 눈부셨다. 귀에 쏙쏙 들어오는 훌륭한 멜로디와 서정적인 보컬은 여타 음악과는 완전 차별되면서, 1960년대 중반까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히트행진을 이어간다. 1961년 ’Running scared’가 미국차트 정상을 밟았고 1964년에는 ‘Pretty woman’가 비틀매니아에 굴하지 않고 다시 차트정상에 올랐다. 1960년 ‘Blue angel’을 비롯해 1961년 ’Crying(2위)’, 1962년 ‘Dream baby’, 1963년 ‘In dreams’, ‘Mean woman blues’, 1964년 ‘It’s over(9위, 영국1위)’ 등은 모두 톱10에 진입했다. 하지만 그의 인기는 음악 외적인 면 때문에 제동이 걸려야 했다. 1966년 그의 아내 클라우데트(Claudette)가 자신의 오토바이 뒤에서 떨어져 죽는 어처구니없는 사고를 맞았고, 그 슬픔이 잊혀질 새도 없이 이듬해에는 집에 불이 나 두 아들이 화재로 죽게된다. 이 사건들이 일어난 이후 그에게는 ‘비운의 스타’라는 호칭이 계속해서 따라다니게 되다. 큰 슬픔을 여러 차례 겪은 후 활동은 암흑기에 접어들어 싱글 하나 제대로 히트하지 못했고, 라이브 공연도 가지지 않았다. 1960년대 초반을 풍미한 가수로 사라져가던 그였지만 전성기가 오로지 1960년대인 것만은 아니었다. 그의 우수한 곡들은 후대의 많은 아티스트들에 의해 다시 대중들에게 알려지게 되었다. 1976년 그의 컴필레이션 앨범이 영국 차트에서 두각을 나타내었고, 1977년 린다 론스태드(Linda Ronstadt)가 ‘Blue bayou’를 리메이크해 오리지널 뮤지션으로 재조명되는 순간을 맞았다. 결국 1980년대 시작과 함께 재기한다. 그 해 늦은 봄 에밀루 해리스(Emmylou Harris)와 함께 영화 주제곡인 ‘That lovin’ you feelin’ again(55위)’를 부르며 가수활동을 재개하게 됐고 옛 명성에 걸맞게 해리스와 함께 그래미상을 거머쥔다. 오랜 공백을 깨고 재기한 그에게 많은 사람들이 힘을 실어주는데, 1980년 수잔 잭스(Susan Jacks)가 그의 곡 ‘Evergreen’을 리메이크했으며, 1981년 돈 맥클린(Don McLean)이 그의 곡 ’Crying’(88년 K.D. Lang과 듀엣으로 다시 불러 영화 ’하이딩 아웃(Hiding out)’에 삽입되었다.)을 불러 빅히트를 기록했다. 1985년에 데이비드 린치 감독이 영화 < 블루 벨벳 >(Blue velvet)에 ‘In dreams’를 삽입한 것도 로이 오비슨 재림(再臨)을 도왔다.(’In dreams’는 국내에서도 영화 음악으로 사랑 받으며 친숙한 곡으로 자리해있다.) 후배들의 협조로 그는 1987년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추대되는 영광을 누리기에 이른다. 자신감을 회복한 그는 거물들의 프로젝트 그룹인 트래블링 윌베리스(Traveling Wilburys)에 가담하게 된다. 이 그룹의 멤버는 한 명만으로도 영광스러울만한 이름인 조지 해리슨(George Harrison), 밥 딜런(Bob Dylan), 톰 페티(Tom Petty) 그리고 이엘오(ELO)의 리더 제프 린(Jeff Lynne)으로 짜여졌고 데뷔 앨범 < Mystery Girl >에는 엘비스 코스텔로(Elvis Costello), 브루스 스프링스틴(Bruce Springsteen), 유투(U2)가 참여했다. 하지만 ‘비운의 스타’ 로이 오비슨은 자신의 별명대로(?) 이 역작의 완성을 보지 못하고 1988년 갑작스런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나게 된다. < Mystery Girl >은 1989년 그의 사후에 발매되었고, 비운의 스토리와 앨범 참여 면면들의 명성이 겹치면서 그의 앨범 중 가장 성공한 앨범이 된다. 이 가운데 싱글 ‘You got it’은 차트9위에 올라 정확히 25년 만에 톱10을 기록했다. 하지만 사후에도 그의 노래는 영화 삽입과 후배 아티스트들의 리메이크를 통해 부활을 계속했다. 1991년 넘버원 히트곡인 ’Pretty woman’이 동명영화에 삽입되어 오비슨 열풍을 야기했고, 같은 해 그와 함께 노래했던 동료, 후배 가수들이 그와 함께 불렀던 곡들을 모아 < A Black And White Night Live >라는 앨범을 발표했으며, 이 앨범으로 사후에 그래미상 최우수 남성 보컬상을 수상하는 이색적인 사건이 연출되기도 하였다. 또한 영화 보이즈 온더 사이드(Boys on the Side)에 ‘You got it’이 보니 레이트(Bonnie Raitt)에 의해 리메이크 되어 히트했다. 로이 오비슨은 최고의 전성기였던 1950년대 엘비스라는 거대한 존재로 인해 정상의 자리에 오르지 못했고, 1960년대 역시 비틀즈라는 거대한 존재 앞에 고개를 숙여야 했다. 날개를 펴야 할 1970년대는 자신 앞에 닥친 비극으로 좌절해야 했으며, 후배들의 도움으로 화려하게 일어선 1980년대는 어이없는 죽음으로 사라져야 했다. 비운으로 점철된 음악역정이었으나 팝 역사는 그 비운을 환대로 바꿔 기록했다. 끊임없는 역사적 재조명은 시공을 막론하고 그의 노래가 애청되는 길을 터 주었다.
가끔 천재 뮤지션의 자녀들이 불우하게 자라는 것을 본다. 그들의 명성이나 재능은 훌륭한 자양분이 되기도 하지만 종종 그 자식들에게 고스란히 부담과 억압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그 탓에 자녀들은 부모의 기에 억눌려 지내기 일쑤다. 하지만 그들에게 더욱 문제가 되는 건 부모들이 제대로 된 부모역할을 못 할 때다. 팝 역사를 보면, 소위 천재로 불리는 뮤지션들의 상당수가 가정불화로 이혼해 딴 살림을 차리거나 약물에 빠... 가끔 천재 뮤지션의 자녀들이 불우하게 자라는 것을 본다. 그들의 명성이나 재능은 훌륭한 자양분이 되기도 하지만 종종 그 자식들에게 고스란히 부담과 억압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그 탓에 자녀들은 부모의 기에 억눌려 지내기 일쑤다. 하지만 그들에게 더욱 문제가 되는 건 부모들이 제대로 된 부모역할을 못 할 때다. 팝 역사를 보면, 소위 천재로 불리는 뮤지션들의 상당수가 가정불화로 이혼해 딴 살림을 차리거나 약물에 빠졌음을 알 수 있다. 존 레논이 그랬고, 밥 딜런이 그랬다. 때문에 그 아들인 줄리앙 레논과 월플라워스의 제이콥 딜런은 가슴에 큰 상처를 안은 채 살아가야만 했다. ‘California dreaming’의 주인공 마마스 앤 파파스, 그리고 비치 보이스의 멤버들의 딸들도 마찬가지였다. 부모들이 모두 이혼한 이유로 딸들은 한쪽 부모를 등진 채 성장했다. 그렇게 쓸쓸히 자란 그 딸들이 모여 만든 그룹이 바로 여성 팝 트리오 윌슨 필립스다. 마마스 앤 파파스의 존과 미셸 필립스의 딸 차이나 필립스, 그리고 비치 보이스의 브라이언 윌슨의 두 딸 카니 윌슨, 웬디 윌슨으로 구성된 윌슨 필립스는 가녀린 팝 감수성과 부모들에게 물려받은 아름다운 하모니로 순식간에 팬들을 매료시켰다. 1990년 8월, 프로듀서 글렌 발라드(Glenn Ballard)와 이글스의 조 월시, 토토의 스티브 루카서 등 베테랑 뮤지션들을 초빙해 만든 데뷔앨범 < Wilson Phillips >는 무려 5백만 장이 팔려나갔다. 신인으로서는 놀랍게도, ‘Hold on’, ‘Release me’, ‘You’re in love’ 등 3곡의 싱글차트 1위곡을 비롯해 5곡의 히트곡을 배출했다. 분명 이들의 실력도 꽤 괜찮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정도로 성공할 수 있었던 데는 아무래도 이름난 부모들의 위력이 컸다. 부모의 직접적인 도움을 받지는 않았지만 그들의 유명세 덕에 데뷔 이전부터 화제를 모을 수 있었고, 데뷔하자마자 그처럼 폭발적인 반응을 불러올 수 있었다. 1992년 1월에는 엘튼 존과 버니 토핀의 기념앨범 < Two Rooms >에 참여해 ‘Daniel’을 녹음하기도 했다. 에릭 클랩튼, 로드 스튜어트, 티나 터너, 스팅, 조지 마이클 같은 최정상급 뮤지션들과 함께 앨범작업을 했다는 사실에서 윌슨 필립스가 꽤 평가받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대중들의 호응은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1992년 7월 발표한 두 번째 앨범 < Shadows & Light >는 ‘You won’t see me cry’ 같은 히트곡을 내며 초반에 반짝하더니 곤두박질치기 시작했다. 그것은 안타깝게도 윌슨 필립스의 끝을 의미했다. 실패의 아픔을 견딜 수는 없었는지, 이듬해 트리오는 곧바로 해산했다. 팀 해체 후 윌슨 자매는 1993년 < Hey Santa! >를 내놓았고, 1997년에는 아버지 브라이언 윌슨과 화해하고 윌슨스(The Wilsons)라는 그룹을 결성, 앨범을 발표했다. 미모가 가장 빛났던 차이나 필립스도 역시 1995년 솔로앨범 < Naked And Sacred >을 냈지만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다. 배우 윌리엄 볼드윈과 결혼한 필립스는 몇 편의 영화에 출연하기도 했다. ‘천재의 딸들’이라는 핸디캡(?)을 딛고 분연히 뭉쳤던 윌슨 필립스는 90년대 초반 가장 성공했던 여성 트리오였다. 하지만 그들은 결코 부모의 후광을 극복하지 못했다. 어쩌면 그들에게 보냈던 팬들의 사랑은 자신들의 옛 우상에 대한 잠시간의 예우가 아니었을까 싶다. 부모를 이겨내기란 역시 쉽지 않다.
노래 : Deniece Williams (데니스 윌리엄스)
노래 : James Brown (제임스 브라운,James Joseph Brown Jr.)
‘펑크(Funk)의 선구자’, 혹은 ‘소울의 대부’ 등의 화려한 수식어로 지금까지도 후배 뮤지션들에게 존경받고 있는 제임스 브라운(James Brown)은 1960, 70년대에 걸친 시기에 전성기를 구가하며 한 시대를 풍미했던 흑인 소울 싱어다. 가스펠에 뿌리를 둔 음악적 자양분을 바탕으로 그는 결국 소울에서 리듬 앤 블루스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장르 해석을 이끌며 ‘아메리칸 블랙 뮤직’의 혁명을 몰고 온 인물로... ‘펑크(Funk)의 선구자’, 혹은 ‘소울의 대부’ 등의 화려한 수식어로 지금까지도 후배 뮤지션들에게 존경받고 있는 제임스 브라운(James Brown)은 1960, 70년대에 걸친 시기에 전성기를 구가하며 한 시대를 풍미했던 흑인 소울 싱어다. 가스펠에 뿌리를 둔 음악적 자양분을 바탕으로 그는 결국 소울에서 리듬 앤 블루스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장르 해석을 이끌며 ‘아메리칸 블랙 뮤직’의 혁명을 몰고 온 인물로 평가받기도 했다. 소위 ‘Mr. 다이너마이트’라고 불려질 정도로 폭발적인 보이스를 지녔던 브라운은 자신의 매력이라 할만한 흡입력 강한 목소리를 바탕으로 펑키(Funky), 소울, R&B 같은 흑인장르를 토해내며 수많은 음반을 레코딩했고, 정열적인 무대매너를 앞세워 왕성한 음악활동을 보여줬다. 특히 라이브 공연에서 그의 재능은 개성 넘치는 플레이의 광분과 더불어 운동선수와도 흡사한 스태미나와 순간적인 타이밍에서 놀라운 기량을 선보였다. 게다가 그가 온몸으로 절규하듯 내지르는 울분과 광기에 가까운 몸짓은 그 당시 미국사회에서 굴욕적인 삶을 살아가던 흑인들에게는 커다란 위안이었고, 또한 백인들마저도 그 열정에 매료되어 감탄과 박수를 보낼 지경이었다. 흑인들의 핏속에 흐르고 있는 자유에 대한 갈망 역시 그의 음악에서 중요한 포인트가 되었다. 싱어 송 라이터와 프로듀서로서의 능력을 동시에 겸비할 정도로 뛰어난 음악성을 지녔던 그의 존재는 엇비슷한 시기에 등장한 레이 찰스(Ray Charles)나 샘 쿡(Sam Cooke)과 같은 소울 싱어들과 라이벌로 비견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비슷한 장르를 일궈냈던 슬라이 앤 더 패밀리 스톤(Sly & the Family Stone)이나 조지 클린턴(George Clinton)과도 비교 대상이었지만, 그 분야에서 일찌감치 여타 아티스트보다 펑크(Funk)를 먼저 시도했던 인물로 지금까지도 널리 팝 인구에 회자되고 있다. 1933년 미국 남부의 시골태생으로 어린 시절 빈민가에서 성장한 제임스 브라운은 파워풀하며 깊이 있는 자신의 목소리가 주위에 알려지면서 금새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브라운은 1940년대 중반 소울 싱어 바비 버드(Bobby Byrd)의 도움을 받아 그와 함께 가스펠 그룹에서 노래를 하면서 본격적인 음악의 길로 접어들었다. 이후 제임스 브라운은 1956년 ‘Please, please, please’(5위)를 발표하면서 공식적인 첫 데뷔를 장식했다. 이 싱글은 미국과 영국에서 호평을 얻어냈고, 1959년에 발매된 두 번째 싱글 ‘Try me’(48위)의 성공으로 브라운은 히트퍼레이드를 만들어가기 시작했다. 1960년대로 넘어오면서 브라운은 자신의 끼가 묻어난 개성 넘치는 스타일을 선보이며 싱글 ‘Think’(33위), ‘Night train’(35위), Prisoner of love(18위), ‘Out of sight’(24위), ‘I got you (I feel good)’(3위) 등을 히트시켰으며 공연 실황을 담아낸 < Live At The Apollo >(1963)을 통해서 브라운은 음악 인생의 획기적인 전환점을 마련했다. 지금까지도 그의 최고 작품으로 손꼽히는 이 라이브 앨범과 1965년에 발매된 < Papa’s Got A Brand New Bag >의 연이은 상업적 성공으로 브라운은 백인들에게도 자신의 존재를 깊이 각인시켜주는 계기를 만들었다. 계속해서 그는 1969년 < Say It Loud I’m Black I’m Proud >를 발표하며 일련의 기간동안 흑인 음악계 최고의 슈퍼스타덤에 올랐다. “나는 흑인이고, 흑인으로 태어난 것이 무척이나 자랑스럽다.” 이렇게 외쳐대는 이 작품에서 브라운은 연인을 떠나보내는 심경을 애절하게 표현한 ‘Goodbye my love’(9위)와 소울 필이 가득한 ‘Licking stick’(2위) 등 그만의 열정이 녹아든 곡들을 수록하며 소울 싱어로서의 명성을 이어나갔다. 1970년대에 접어들면서 브라운은 당시 라이브로 녹음한 더블 앨범 < Sex Machine >(1970)을 발표했고, 국내 CF에 쓰여지면서 너무나도 유명해진 ‘It’s a man’s man’s man’s world’ 같은 곡을 배출해냈다. 또한 이듬해부터 < Hot Pants >(1971), < Get on the Good Foot >(1972)등이 계속해서 히트했고, 골드를 기록한 음반 < The Payback >(1973), < Hell >(1974)을 발표하며 의욕적인 음악활동을 계속해나갔다. 하지만 1970년대 중반이후부터 브라운은 뮤지션으로서 퇴보의 길을 걷게된다. 그간 조금씩 쌓여갔던 개인적인 재정난과 마약문제로 결국 감옥투옥 선고를 받았던 것이다. 그 이후로 브라운은 별다른 왕성한 활동을 이어가지 못하다가 오랜만에 ‘Living in america’(4위)를 히트시킨 < Gravity >(1986)와 2년 뒤 < I’m Real >(1988)을 발표하며 1980년대 말까지 음악활동의 명맥을 이어갔다. 제임스 브라운의 음악은 후대에 와서 랩/힙합 뮤지션들의 앨범에 종종 샘플로 쓰여지면서 다시금 재평가 받기에 이르렀고, 현재 팝 계에서는 예전보다 훨씬 더 영향력 있는 뮤지션으로 남아있다. 비평가들 사이에서도 록음악과 흑인음악에 걸쳐서 꼭 집고 넘어가야 할 가장 중요한 뮤지션중의 한 명으로 손꼽을 만큼 음악을 통해서 분출하고자 했던 그의 혁명과도 같았던 메시지는 강렬했다. 1980년대 후반에 접어들면서 브라운은 이런저런 가정적 불화와 개인적 사생활의 비극까지 겹치면서 음악활동 또한 저조한 결과만을 가져왔다. 1990년대에는 힙합 비트를 시도한 < Universal James >(1992)를 발표했고, 새롭게 자신의 부활을 알리려고 시도했던 < I’m Back >(1998)같은 음반을 발표해 음악계에 다시 돌아왔음을 선언했지만 대중들에게 별다른 호응은 얻지 못했다. 하지만 음악으로 인생의 모든 것을 바쳤던 제임스 브라운. 이제 후배 뮤지션들에 의해서 그의 존재는 지금까지도 격상되고 있다.
1990년대 초반 국내에서 컨트리 곡들의 인기는 대단했다.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100만장의 판매고를 보인 < 보디가드 > 사운드트랙에 수록된 휘트니 휴스턴(Whitney Houston)의 ‘I will always love you’를 비롯해 4인조 보컬 그룹 올 포 원(All 4 One)의 ‘I swear’, ‘I can love you like that’ 등의 원곡은 모두 컨트리 아티스트의 노래였다. ‘I wi... 1990년대 초반 국내에서 컨트리 곡들의 인기는 대단했다.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100만장의 판매고를 보인 < 보디가드 > 사운드트랙에 수록된 휘트니 휴스턴(Whitney Houston)의 ‘I will always love you’를 비롯해 4인조 보컬 그룹 올 포 원(All 4 One)의 ‘I swear’, ‘I can love you like that’ 등의 원곡은 모두 컨트리 아티스트의 노래였다. ‘I will always love you’는 ‘9 to 5''로 유명한 돌리 파튼(Dolly Parton)이 1974년에 발표한 노래이고, ‘I swear’와 ‘I can love you like that’은 남성 컨트리 싱어 존 마이클 몽고메리(John Michael Montgomery)의 원곡을 커버한 것이다. 1946년 1월 19일 컨트리 음악의 심장부 테네시 주에서 출생한 돌리 파튼은 작사, 작곡은 물론 영화 배우와 TV 프로그램 사회자로도 활동하는 컨트리 계의 만능 엔터테이너이자 실력자다. 1960년대 컨트리 싱어 포터 와고너(Porter Wagoner)와 결혼 반지를 주고받은 그녀는 1960년대 후반에 발표한 음반들을 통해 차세대 컨트리 음악의 기대주로 인정받기 시작했고, 30여 년이 지난 현재는 컨트리 음악계의 거목으로 대우 받고 있다. 그러나 이 은발의 컨트리 여성 싱어에 대한 국내 팬들의 관심은 1980년대 영화 < 나인 투 파이브 >가 개봉하면서 드높아졌다. 영화의 주연도 맡고 주제가도 불러 제작비를 절감하는데 혁혁한 공을 세운 그녀는 이 곡으로 컨트리 차트는 물론 생애 처음으로 싱글 차트에서도 정상을 차지하면서 미국을 넘어 전 세계적인 만능 연예인으로 급부상했다. 이후 영화 출연에 적극적이었던 돌리는 버트 레이놀즈(Burt Reynolds), 실베스터 스탤론(Sylvester Stallone) 등과 함께 스크린에 모습을 보였다. 그렇다고 그녀는 자신의 존재 가치를 부여하는 음악을 소홀히 하진 않았다. 거의 매년 새로운 음반을 발표했고, 1983년에는 비지스(Bee Gees)의 배리 깁(Barry Gibb)이 작곡한 ‘Islands in the stream’을 케니 로저스(Kenny Rogers)와 듀엣으로 취입해 다시 한번 싱글 차트를 탈환했다. 이 곡에서 케니 로저스가 돌리 파튼의 보컬에 눌린 듯한 인상을 지울 수 없을 정도로 그녀의 보컬이나 곡의 소화력은 압권이었다. 그러나 밀물로 들어왔으면 썰물로 나가는 것이 세상의 이치. 1980년대 초반 이렇듯 화려한 시절을 보냈지만 1980년대 중반에는 그녀의 음악 인생 중 가장 우울한 시기를 겪게 된다. 더 이상 컨트리 팝은 컨트리 팬들은 물론 팝 팬들에게도 어필하지 못했다. 그 타개책으로 이 영특한 가수가 선택한 것은 린다 론스태드(Linda Ronstadt), 에밀루 해리스(Emmylou Harris)와 함께 정통 컨트리로 회귀한 음반 < Trio >였다. 그 당시 랜디 트래비스(Randy Travis)를 중심으로 신 전통주의 컨트리가 개화하려던 시점을 정확히 포착한 이 앨범으로 그녀는 다시 한번 멋지게 부활했다. 돌리 레베카 파튼(Dolly Rebecca Parton-본명)은 현재까지 새로운 앨범을 제작하고 구상하면서 컨트리 음악계의 지존으로 남아 있다. Hello Dolly!
영화 < 록키 3 >도 1편을 능가하는 속편은 없다는 속설을 다시 한번 입증한 보통의 영웅담이었다. 뻔한 스토리에 인간 복제 한 듯 똑같은 주인공, 그리고 틀에 박힌 결말. 그러나 이 평범한 권투 영화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킨 것은 서바이버(Survivor)가 부른 주제가 ''Eye of the tiger''다. 이 곡은 스크린의 긴장감을 200% 살리면서 성공적인 흥행을 일궈내는데 견인차 역할을 했다. 1977... 영화 < 록키 3 >도 1편을 능가하는 속편은 없다는 속설을 다시 한번 입증한 보통의 영웅담이었다. 뻔한 스토리에 인간 복제 한 듯 똑같은 주인공, 그리고 틀에 박힌 결말. 그러나 이 평범한 권투 영화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킨 것은 서바이버(Survivor)가 부른 주제가 ''Eye of the tiger''다. 이 곡은 스크린의 긴장감을 200% 살리면서 성공적인 흥행을 일궈내는데 견인차 역할을 했다. 1977년, 추운 날씨로 유명한 시카고에서 살아남은 서바이버는 주축 멤버인 키보디스트 짐 페테릭(Jim Peterik)과 기타리스트 프랭키 설리반(Frankie Sullivan)이 거의 모든 노래들을 작곡하는 성인 취향의 팝록 밴드였다. 1980년의 데뷔 앨범 < Survivor >와 2집 < Premonition >에서 ''Somewhere in America(70위)''와 ''Poor man''s son(33위)''으로 어느 정도의 인기 기반을 닦은 그들은 < 록키 3 >의 제작을 기획하던 실베스터 스탤론의 눈에 띄어 영화 오프닝에 수록될 주제곡을 의뢰받는다. "우리는 리듬과 비트를 구상해 놓고 있었지만 정작 그 영화를 보고 난 후에 멜로디 훅을 만들었다"라고 짐 페테릭은 말했다. 긴박한 기타 연주와 박력있는 데이브 빅클러(Dave Bickler)의 보컬이 앙상블을 이뤄 멜로딕하면서도 호전적인 분위기를 제공한 ''Eye of the tiger''는 빌보드 싱글 차트 6주간 정상을 차지한 것을 비롯해 그래미 록부문 최우수 그룹상 수상, 피플스 초이스 어워드 최우수 신곡상 수상, 아카데미 주제가상 후보에 오르는 등 이 한 곡으로 거의 모든 영광을 차지했다. 한편 국내에서는 이 곡이 들어있는 음반 < Eye Of The Tiger >에 수록된 ''Ever since the world began''라는 발라드 곡이 팝팬들의 많은 사랑을 받았다. ''Eye of the tiger'' 이후 이들은 1984년의 영화 < 베스트 키드 >의 주제가 ''Moment of truth(63위)''와 1986년 다시 한번 실베스터 스탤론과 손잡은 < 록키 4 >의 주제가 ''Burning heart(2위)''를 취입하기도 했지만 더 이상의 영화 주제가를 만들지 않았다. 통산 4집 < Caught In The Game >의 좌절 이후 보컬리스트 데이브 빅클러는 건강상의 이유로 밴드를 탈퇴했고 그 후임으로 데이브와 비슷한 음색을 소유한 짐 제이미슨(Jim Jamison)을 맞이하면서 전열을 정비한 서바이버는 3곡의 히트곡을 배출한 < Vital Signs >를 1984년에 발표해 ''I can''t hold back(13위)'', 경쾌한 ''High on you(8위)'', 국내 취향의 록발라드 ''The search is over(4위)''가 모두 히트 차트에 오르면서 다시 한번 황금기를 누렸다. 다시 3년의 기다림 후에 공개된 1987년의 음반 < When Seconds Count >에선 싱글 커트된 ''Is this love(9위)''와 ''How much love(51위)''는 이들의 마지막 싱글 히트곡이 되었고 1988년에 공개한 < Too Hot To Sleep >을 마지막으로 1989년 밴드의 공식 해산을 발표했다. 그러나 1990년대 중반 초창기 보컬리스트 데이브가 짐, 프랭키와 다시 팀을 재 결성해 현재까지 공연 위주의 활동을 하고 있다. 197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 중반까지 무수히 많은 아레나록 밴드들이 등장했다가 사라져갔다. 그 중의 하나인 서바이버는 훠리너(Foreigner)나 스틱스(Styx), 나이트 레인저(Night Ranger)처럼 정교한 연주를 들려준 팀도 아니었고, 사회적 메시지를 던지는 심각한 밴드도 아니었지만 서바이버의 음악을 듣는데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다. 록음악계의 ''생존자''가 되길 원했던 서바이버의 제 2 라운드가 시작되었다. ''Eye of the tiger''가 한창 인기있던 1983년에 필자의 친척형은 서바이버의 앨범 속지에 나온 보컬리스트 데이브 빅클러의 사진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얘 눈이 진짜 호랑이 눈 같지 않냐?"
노래 : Ray Parker Jr. (레이 파커 주니어,Ray Erskine Parker Jr. )
R&B/팝 기타리스트, 싱어송라이터, 프로듀서, 배우 R&B/팝 기타리스트, 싱어송라이터, 프로듀서, 배우
모타운 초기의 남성 하모니 보컬그룹 포탑스(The Four Tops)는 한 명의 스타에 의해서 주도되지 않는 유기적 결속력으로 오랜 기간 정상의 인기를 누렸다. 미국 디트로이트(Detroit) 출신의 4명의 고등학생 레비 스텁스(Levi Stubbs, 1938년생), 르날도 오비 벤슨(Renaldo Obie Benson, 1937년생), 로렌스 페이튼(Lawrence Payton, 1938년생), 압둘 듀크 파커... 모타운 초기의 남성 하모니 보컬그룹 포탑스(The Four Tops)는 한 명의 스타에 의해서 주도되지 않는 유기적 결속력으로 오랜 기간 정상의 인기를 누렸다. 미국 디트로이트(Detroit) 출신의 4명의 고등학생 레비 스텁스(Levi Stubbs, 1938년생), 르날도 오비 벤슨(Renaldo Obie Benson, 1937년생), 로렌스 페이튼(Lawrence Payton, 1938년생), 압둘 듀크 파커(Abdul Duke Fakir, 1938년생)는 동네 파티에서 함께 노래한 것이 계기가 되어 1954년 포 에임스(The Four Aims)라는 이름으로 가수 활동을 시작한다. 클럽을 무대로 재즈 스탠다드 곡을 부르며 활동해 나가던 이들은 1956년 포 탑스로 개명하고 레코딩 작업에 나선다. 1956년부터 1963년까지 이들은 실패를 거듭해야 했다. 체스(Chess), 레드 탑(Red Top), 콜럼비아(Columbia), 리버사이드(Riverside) 등 여러 레이블을 옮겨 다녔지만 실패만을 거듭했다. 하지만 1963년 모타운(Motown) 레이블로 자리를 옮긴 후 이후 20여 년을 흑인 최고의 보컬 그룹으로 자리하게 된다. 모타운 사장인 베리 고디(Berry Gordy)의 권유로 명제작팀인 홀랜드/도지어/홀랜드(Holland/Dozier/Holland:Brian Holland, Lamont Dozier, Eddie Holland로 구성된 팀으로 이후 1967년까지 이들과 함께 하며 수많은 히트 곡들을 만들어 내게 된다.)에 의해 만들어진 곡들을 부르게 된다. 베리 고디가 이들을 뽑은 이유도 이들 자체의 능력을 키워주기 위함이기보다는 홀랜드/도지어/홀랜드팀과 함께 할 보컬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1964년 사실상의 데뷔 앨범 < Breaking Through >를 내놓은 이들은 같은 해 셀프 타이틀의 < Four Tops >를 발표하며 정식 데뷔한다. 이미 첫 싱글인 ’Baby, I need your lovin’을 차트 20위에 올리며 순조로운 출발을 보인 이들은 ’벤슨-페이튼-파커’의 화음과 리드 보컬인 스텁스의 감성 넘치는 R&B 보컬이 절묘하게 어우러지면서 발표하는 곡들마다 승승장구하게 된다. 이듬해 발표한 ’I can’t help myself’는 차트 정상을 밟았으며, ’Ask the lonely’(65년), ’It’s the same old song’(65년), ’Something about you’(65년), ’Shake me, wake me(When it’s over’(65년), ’Loving you is sweeter than ever’(66년)가 차트 40위 권 안팎의 꾸준한 성공을 거두었다. 1966년 ’Reach out, I’ll be there’를 다시 한 번 차트 정상에 올린 이들은 여세를 몰아 ’Standing in the shadows of love’(66년), ’Bernadette’(67년), ’7 rooms of gloom’(67년), ’You keep running away’(67년)을 연이어 히트시킨다. 모타운에서 초창기 이들만큼의 인기를 누린 보컬 그룹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슈프림스(The Supremes)나 미라클(The Miracles), 또 템테이션스(The Temptations)나 잭슨 파이브(Jackson Five)와 같은 그룹들도 이들과 마찬가지로 차트에서 좋은 성적을 거둔 정상급 보컬 그룹들이었다. 하지만 이들은 1997년 페이튼이 사망하기 전까지 단 한 차례의 멤버 교체도 거치지 않았다는 점에서 차이를 보이며 스텁스가 리드 보컬을 맡고 있기는 했지만 한 개인의 두드러진 능력이 아닌 멤버 전원의 조화로운 목소리를 중요시 여겨 스모키 로빈슨(Smokey Robinson), 다이아나 로스(Diana Ross)나 마이클 잭슨(Michael Jackson)처럼 두드러진 멤버로 인해 그룹 전체의 의미가 축소되거나 멤버의 솔로 활동으로 인해 그룹의 조직력이 약해지지 않았다는 점에서 차이를 보였다. 일견 크게 두드러지는 차이점으로 보이지는 않지만 이러한 이들의 모습은 모타운에서 컸지만 모타운의 흐름을 따르지 않은 채 독자적인 활동 영역을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주어 이들이 소울의 발전 과정 속에서 간과해서는 안 될 가치 있는 그룹임을 나타내어 준다고 할 수 있다. 물론 거부감 없는 보컬 하모니를 통해 흑인 팬들 뿐 아닌 팝 시장의 대중 전체에게 사랑 받을 수 있었던 이들의 음악 그 자체에 있어서의 가치 또한 빼놓아서는 안될 의미 있는 것이다. 승승 장구하던 이들에게도 위기는 찾아온다. 1967년 성공 뒤에 늘 함께 했었던 홀랜드/도지어/홀랜드 팀이 모타운을 나가게 된 것이었다. 오른 팔을 잃은 격인 이들의 활동은 주춤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 인기의 공백이 그리 길지 만은 않았다. 자신들에게 맞는 곡을 찾지 못해 팝 히트 곡들을 리메이크 하기도 했던 이들은 레프트 뱅크(Left Banke)의 ’Walk away renee’나 팀 하딘(Tim Hardin)의 ’If I were a carpenter’와 같은 곡들을 소울 풍으로 소화해 내며 좋은 반응을 얻기도 하였으며, 1970년대의 시작과 함께 프랭키 윌슨(Frank Wilson)이나 스모키 로빈슨(Smokey Robinson) 같은 모타운 최고의 제작자들과 호흡을 맞추며 멋지게 재기에 성공한다. 재기에 성공한 이후 토미 에드워즈(Tommy Edwards)의 1950년대 히트 곡을 리메이크 한 ’It’s all in the game’을 히트시켰고, 발라드 곡인 S’till water(Love)’, 슈프림스와 함께 부른 ’River deep mountain high’, ’Just seven numbers (Can straighten out my life)’, ’(It’s the way) Nature planned it’ 등의 곡을 연이어 히트시키게 된다. 한 편 르날도 벤슨은 마빈 게이(Marvin Gaye)의 대 히트 작인 ’What’s going on’을 공동 작곡하는 가수 외적인 면에서의 음악적인 기량을 뽐내기도 하였다. 이들은 1972년 ’Keeper of the castle’을 끝으로 모타운을 떠나 던힐(Dunhill) 레코드에서 활동을 이어간다. 던힐에서도 이들의 인기 행진은 계속되었다. ’Ain’t no woman (Like the one I got)(73년), ’Are you man enough’(73년), ’Sweet understanding love’(73년), ’One chain don’t make no prison’(74년), ’Midnight flower’(74년)가 꾸준한 성공을 거두었으며, 1976년 ’Catfish’로 차트 10위 권에 4년 만에 다시 복귀했다. 잠시 인기가 주춤하던 이들은 카사블랑카(Casablanca)로 소속을 옮기고 1981년 ’When she was my girl’을 R&B 차트 정상에 올려놓는다. 하지만 80년대에 들어선 즈음 이들의 인기는 점점 떨어지고 있었다. 보컬에만 의존하는 그룹으로서 이미 나이가 40대를 넘어서 있었으며 M-TV의 등장이라는 격변하는 음악계의 흐름 속에서 시대의 그룹으로 차츰 물러서야만 했다. 1983년 모타운으로 돌아온 이들은 < Back Where I Belong >을 발표하며 자신들 음악의 뿌리를 다시 한 번 돌아보게 된다. 이 앨범에서 이들은 1960년대 자신들과 히트 행진을 벌였던 홀랜드/도지어/홀랜드 팀과 재 만남을 갖기도 하였으며, 동시대의 인기 보컬 그룹이었던 템테이션스와 함께 ’Hang’이라는 곡을 선보이기도 하였다. 1988년 다시 모타운을 떠나 아리스타(Arista)와 계약을 체결한 이들은 ’Indestructible’과 ’Loco in Acapulco’를 히트시키며 나름대로 지속적인 활동을 이어 가지만 이후 별다른 히트 곡은 나오지 않았다. 4인 라인업의 굳건한 체제를 유지해 왔던 이들이었지만 1997년 페이튼의 사망으로 포탑스의 변함없는 모습을 더 이상 유지할 수 없게 되었고 현재 베스트 앨범의 출시 이외에 별다른 음반 활동을 보여주지는 않고 있다.
노래 : Ben E. King (벤 이 킹,Benjamin Earl King)
노래 : Righteous Brothers (라이처스 브라더스)
노래 : Bruno Mars (브루노 마스)
노래 : Patrick Swayze (패트릭 스웨이지)
빅 마운틴(Big Mountain)의 태동은 1988년 즈음이었다. 순수 자메이카 레게를 목표로 하는 캘리포니아 출신 뮤지션의 모임, 실로(Shiloh)로 출범하여 데뷔 이래 지금까지 거의 동일한 포맷으로 음악적 루트를 연결하고 있다. 레게 뮤지션으로서의 의무를 답습하듯 그들 또한 밥 말리(Bob Marley)의 지대한 영향 아래 거류했는데, 팀의 리더 퀴노(Quino)는 “그는 빅 마운틴이 음악적 방향을 정할 ... 빅 마운틴(Big Mountain)의 태동은 1988년 즈음이었다. 순수 자메이카 레게를 목표로 하는 캘리포니아 출신 뮤지션의 모임, 실로(Shiloh)로 출범하여 데뷔 이래 지금까지 거의 동일한 포맷으로 음악적 루트를 연결하고 있다. 레게 뮤지션으로서의 의무를 답습하듯 그들 또한 밥 말리(Bob Marley)의 지대한 영향 아래 거류했는데, 팀의 리더 퀴노(Quino)는 “그는 빅 마운틴이 음악적 방향을 정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고 고백한 바 있다. 그러나 반역과 사회성으로 물든 밥 말리와는 달리 빅 마운틴은 신실하고 긍정적인 시각으로 음악을 대하길 원했다. 혁명이라는 부제를 안은 데뷔작 은 당시의 매니저, 브루스 캐플린(Bruce Caplin)이 발에 땀나도록 라디오 국을 뛰어 다닌 덕분에 하와이를 비롯한 인근 서해안 지역에서 썩 괜찮은 호응을 얻었다. 앨범은 이내 월드 뮤직 차트에서 넘버원의 자리를 탈환하더니, 입소문은 LA까지 퍼져 ‘Touch my light’가 지역 에어 플레이 5위에 오르는 영예를 누렸다. 그리고 워너뮤직 산하의 자이언트 레코드와 계약을 맺으며 빅 마운틴은 본격적인 성공 가도를 달리기 시작한다. 영화 (1994년)에 삽입된 ‘Baby, I love your way’가 빌보드 차트에 당당 6위로 랭크되면서 레게의 전성시대가 활짝 열렸다. 피터 프램튼(Peter Frampton)의 오리지널을 커버한 이 곡으로 지구촌을 사로잡은 빅 마운틴은 투어를 강행하는 동시에 신보 준비로 그 어느 때보다 바쁜 한 해를 보냈다. 로 200만장의 판매고를 가뿐히 올리고, 세 번째 앨범 의 작업에 착수할 무렵, 밴드는 뜻하지 않은 난관에 부딪친다. 무명시절부터 동고동락해온 브루스가 멤버들의 개런티를 조작 횡령한 사실이 밝혀지고, 엎친 데 덮치기로 소속사는 멤버 교체의 압력을 가했다. 라디오의 신보 광고마저 중단되자 팀원들은 를 단념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1997년의 유럽 투어를 끝으로 브루스와 결별을 선언하고, 빅 마운틴은 예정대로 소속사에서의 마지막 앨범 을 발표했다. 그러나 이미 골은 벌어질 대로 벌어진 상태여서 워너는 그들에게 단 한 장의 싱글도 내어 주지 않았다. 떠나간 친구도 많았다. 퀴노와 제임스(James), 케빈(Kevin), 제리(Jerry)만이 남은 빅 마운틴은 퀴노의 친구인 안젤리 라벨(Anjali Raval)을 매니저로 채용하고, 그녀는 당시 섀기(Shaggy)와 함께 작업하던 폴(Paul)을 팀원들에게 소개시켰다. 이후, 오랫동안 세션에 몸담고 있던 리처드(Richard)까지 정식 멤버로 받아들이며 라인업의 안정을 되찾는다. 포니캐년으로 레이블을 옮기고 빅 마운틴 최초의 셀프 프로듀스 음반 의 완성 직전, 또 다른 문제가 터졌다. 그룹명의 상표권을 가진 브루스 캐플린이 빅 마운틴이라는 이름의 사용 대가를 요구하고 나선 것이다. 앨범은 예정보다 두 달 늦게 발매되었고, 세기말을 빚 갚는데 온 힘을 쏟았다. 한편 그 와중에도 퀴노는 자신의 솔로 앨범 제작을 게을리 하지 않았는데, 빅 마운틴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의 어쿠스틱 앨범 (1999년)로 하와이에서 좋은 평가를 받았다. 새천년이 밝아 오면서 그룹의 신수는 다시 완만한 굴곡으로 그려진다. ‘Baby, I love your way’의 어쿠스틱 버전과 벤 이 킹(Ben E. King)의 ‘Stand by me’등을 재해석한 리메이크 모음집 로 재가동에 성공, 일본의 국민 그룹 서던 올 스타즈(Southern All Stars)의 ‘Tsunami’와 재즈 보사노바의 명곡인 안토니오 조빔(Antonio Jobim)의 ‘Girl from Ipanema’등 굵직한 커버 송을 수록한 여섯 번째 정규 앨범 로 잃어버린 페이스를 완연히 되찾는다. 같은 해 2001년, 빅 마운틴은 레게 밴드 최초로 중국 무대에 서는 영광을 안았다. 아프리카 토속 리듬의 혈기를 이어 받았어도, 그 내면에 울려 퍼지는 소리의 깊이는 지극히 미국식 팝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제 3세계 음악인 레게를 대중적으로 접근하고자 노력하는 그들에게 더 이상의 어깨를 견줄 수 있는 산맥은 없을 것이다.
자메이카 레게 뮤지션 자메이카 레게 뮤지션
노래 : Backstreet Boys (백스트리트 보이즈)
멤버 : A.J. McLean, Brian Littrell, Howie Dorough, Nick Carter 얼마 전 록 전문지 < 롤링스톤 >이 MTV와 공동으로 선정한 ‘팝 역사를 수놓은 명곡 100선’에 백스트리트 보이스(Backstreet Boys)의 ‘I want it that way’가 예상 밖으로 높은 순위인 10위에 올라 눈길을 끈 바 있다. 10대들을 주요 팬 층으로 하는 ‘버블 검 음악’이... 멤버 : A.J. McLean, Brian Littrell, Howie Dorough, Nick Carter

얼마 전 록 전문지 < 롤링스톤 >이 MTV와 공동으로 선정한 ‘팝 역사를 수놓은 명곡 100선’에 백스트리트 보이스(Backstreet Boys)의 ‘I want it that way’가 예상 밖으로 높은 순위인 10위에 올라 눈길을 끈 바 있다. 10대들을 주요 팬 층으로 하는 ‘버블 검 음악’이라 하여 여기저기서 비판을 받는 와중에 권위 있는 록 언론에 의해 이들의 노래가 평가를 받았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백스트리트 보이스는 분명 음반업계의 기획에 의해 ‘잘 만들어진 그룹’이다. 보통 이런 기획상품의 경우 아티스트의 자기 표현을 최고 덕목으로 치는 사람들은 여지없이 평가 절하해버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무시되지 않는 이유는 먼저 예상 밖으로 양질의 음악을 선사하고있기 때문이다. 곡도 좋고 멜로디를 타는 멤버들의 노래솜씨와 코러스도 우수하다. 애들 음악이라고 푸대접하지만 막상 들으면 모든 곡들이 귀를 감는다. 또 하나 백스트리트 보이스가 손꼽히는 것은 누가 뭐라고 해도 버블 검 음악이 1990년대 중반 이후의 팝 주요 경향이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그들이 요즘의 유행을 만들었고 또 주도하고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백스트리트 보이스가 성공을 거두자 팝 음악계에서는 우후죽순으로 10대 소녀들을 겨냥한 ‘보이 밴드’들이 출현하고 있다. 닉 카터, 하위 D, 케빈 리처슨, AJ 맥클린 그리고 브라이언 리트렐 등 다섯 남자로 이루어진 그룹이다. 케빈은 1972년 생이고 가장 어린 1980년 생 닉 카터도 나이 스물을 넘어섰다. 10대 음악을 하지만 멤버들 가운데 틴에이저는 없다. 1994년 결성될 때는 당시 음악이 얼터너티브 록과 갱스터 랩 판이어서 주목받지 못했지만 2집 < Backstreet''s back >부터 미국시장에서 성공을 거두었으며 1999년 초에 발표한 3집 < Millenium >에 와서는 세계적 열풍을 야기했다. 이 앨범은 지금까지 1300만장이 팔려 틴 음악 앨범 중에서는 최고 판매고를 보이고 있다. 잠시 공백을 갖는 사이 같은 소속사의 라이벌 N싱크한테 추월 당한 감이 없지 않지만 최근 새 앨범 < Black & blue >을 내놓고 왕관탈환에 나섰다. 그래서 과연 신작이 얼마만큼 팔려나갈 것인가가 관심이다. 관계자들은 이번 앨범이 그들의 장수 여부를 결정지을 것으로 내다본다.
조지 마이클이라는 걸출한 팝 스타를 배출한 팝 듀오 왬(Wham!)은 80년대 팝 역사에서 빼놓아서는 안 될 중요한 그룹이다. 소울 음악과 결합된 즐겁고 흥겨운 팝 댄스를 들려줬던 이들은 80년대 특유의 ‘가벼움’을 관통함으로써 80년대 팝의 중흥기를 이끌었으며, 수많은 여성 팬들의 인기를 한 몸에 받았다. 또한 이들은 사실상 90년대에 들어 맹위를 떨친 보이밴드의 효시였다. 잘 생긴 외모와 수준급 가창력, 거기... 조지 마이클이라는 걸출한 팝 스타를 배출한 팝 듀오 왬(Wham!)은 80년대 팝 역사에서 빼놓아서는 안 될 중요한 그룹이다. 소울 음악과 결합된 즐겁고 흥겨운 팝 댄스를 들려줬던 이들은 80년대 특유의 ‘가벼움’을 관통함으로써 80년대 팝의 중흥기를 이끌었으며, 수많은 여성 팬들의 인기를 한 몸에 받았다. 또한 이들은 사실상 90년대에 들어 맹위를 떨친 보이밴드의 효시였다. 잘 생긴 외모와 수준급 가창력, 거기에 경쾌한 댄스 팝과 매혹적인 발라드 등 현 보이밴드의 전형이랄 수 있는 특질을 이미 80년대 초반에 확립해, 전부 보여줬기 때문이다. 1981년, 왬은 ‘나이트클럽 광’이었던 조지 마이클과 그의 친구 앤드류 리즐리에 의해 탄생되었다. 조지 마이클이 작곡과 작사, 보컬, 제작 등 음악에 관한 한 모든 걸 담당했고, 앤드류 리즐리는 그룹의 스타일과 이미지, 비주얼 등 외적인 측면에만 힘을 기울였다. 그 때문에 팀 해산할 때까지 자주 앤드류 리즐리의 역할 부재론이 거론되기도 했다(그렇지만 그룹의 방향성은 앤드류 리즐리가 결정했던 만큼 역할이 아주 없었다고는 말할 수 없다). ‘꽝!’이란 의미의 그룹이름과 이미지는 앤디 워홀과 더불어 팝 아트를 대표하는 인물로서, 주로 미국의 대중적인 만화를 주제로 매스미디어를 묘사한 바 있는 로이 리히텐슈타인의 그림에서 따왔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우정을 쌓아온 이 둘은 1979년, 이그제큐티브(Executive)라는 스카 밴드활동을 하면서 음악여정을 시작했다. 하지만 곧 밴드가 해산되고 향후 약 2년간 작곡과 홈메이킹 데모 테이프를 녹음하는 등 수련과정에 들어간다. 당시 작곡한 곡 중에는 나중 메가히트를 기록하는 ‘Careless whisper’와 ‘Club tropicana’가 있었다. 몇 번의 오디션 끝에 1982년, 댄스 레이블 < 이너비전 >(Innervision)과 계약을 체결한 왬은 데뷔싱글 ‘Wham rap!’을 발표했지만 영국차트 100위권에도 못 오르는 실패를 맛봤다. 그러나 그 해 10월에 내놓은 두 번째 싱글 ‘Young guns(go for it)’은 BBC 방송국의 프로그램 < 탑 오브 더 팝스 >(TOTP)에서의 인상적인 댄스 공연으로 차트 3위로 도약했다. 1983년 6월 9일, 팝 댄스로 가득 찬 이들의 데뷔앨범 < Fantastic >이 발매되었고, 이 앨범은 곧장 영국차트 1위를 기록했다. 한편 조지 마이클은 이미 이때부터 독자적인 행보를 걷기 시작한다. 같은 해 8월 그는 미국의 머슬 쇼울스(Muscle Shoals) 스튜디오에서 전설적인 프로듀서 제리 웩슬러와 함께 ‘Careless whisper’를 녹음했다(하지만 별로 성공적이지 않았고 나중에 런던에서 재녹음되어 나중에 출시된다). 1984년부터 왬의 센세이션이 일어났고, 동시에 그들의 히트 퍼레이드가 시작된다. 침대 맡에 적어놓았던 앤드류 리즐리의 노트에서 영감을 얻어 조지 마이클이 만든 ‘Wake me up before you go go’는 영국차트는 물론 미국차트에서도 정상을 차지했다. 수년간 공력을 들인 발라드 ‘Careless whisper’도 3주간 영국차트 넘버원을 지켰다. 이듬해에는 미국차트에서도 역시 3주간 1위를 기록했다. 조지 마이클이 자신의 부모님께 바친 이 싱글의 미국판 크레딧에는 ‘조지 마이클이 피처링한 왬의 곡’이라고 명시되어 있었다. 앤드류 리즐리가 두 번째 앨범을 구상하는 동안, 조지 마이클은 다른 음악인들과도 활발한 교류를 했고, 엘튼 존과의 파트너십도 쌓기 시작했다. 12월에는 밴드 에이드의 난민 구호곡 ‘Do they know it''s christmas time?’ 녹음에도 참여했다. 아이러니한 것은 이 곡 때문에 그들의 크리스마스송 ‘Last christmas’가 차트 2위에 머물렀다는 사실이다. 이듬해인 1985년 3월에는 서포모어 앨범 < Make It Big >이 출시되었고, 그 앨범은 제목대로 미국에서만 5백만 장이 팔리는 ‘빅 히트’를 기록했다. 당해 4월 왬은 서구 팝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주인공이 되었다. 그들은 1만여명이 운집한 중국 베이징의 인민대회당에서 공연함으로써 ‘중국에서 공연한 최초의 서방 그룹’으로 기록되었다. 계속해서 조지 마이클은 라이브 에이드 행사에서 엘튼 존과 듀엣으로 ‘Don''t let the sun go down on me’를 불렀고, 또 엘튼 존의 싱글 ‘Nikita’에서 백업보컬을 담당하는 등 확실하게 솔로활동의 교두보를 마련했다. 결국 조지 마이클과 앤드류 리즐리는 여전히 친한 사이였지만 서로를 위해 1986년 왬을 해체하기로 결정했다. 1986년 4월 발매된 조지 마이클의 두 번째 솔로 싱글 ‘A different corner’는 공식적으로 밴드의 종말을 알리는 곡이었다. 같은 해 6월 윔블던 스타디움에 모인 7만2천명의 관객 앞에서 행한 마지막 콘서트 ‘The Final’을 끝으로 왬은 해산되었다. 왬 이후 조지 마이클은 < Faith >를 시작으로 솔로가수로서 놀랄만한 성공가도를 달리고 있다. 반면 앤드류 리즐리는 < Son Of Albert >를 발표했지만 ‘Shake’라는 희미한 히트곡만 남겼을 뿐 그다지 주목받지 못했다. 왬의 음악을 담당했던 조지 마이클이 성공을 거두고, 음악적으로는 아무런 역할도 못했던 앤드류 리즐리가 실패한 건 어쩌면 당연한 귀결이다. 그렇지만 추억 속에 남아있던 앤드류 리즐리의 아름다운 매력이 솔로활동의 참담한 실패로 그나마 퇴색해버린 것 같아 아쉽기만 하다. 어쨌거나 왬은 80년대를 살아왔던 음악팬들에게는 아련한 기억으로, 또 아쉬움으로 존재하는 그런 그룹이다.
노래 : Van Morrison (밴 모리슨,George Ivan Morrison)
30년 이상의 장구한 세월에 걸쳐 거의 매년 앨범을 발표하는 밴 모리슨(Van Morrison)은 상업성에 구애받지 않고 외로운 음악항해를 펼치며 독보적 음악 소우주를 구축한 록 음악계의 거장이다. 비록 인기차트를 주름잡은 바 없었지만 ‘아일랜드 음악의 대부’라는 명성과 함께 모든 아일랜드 출신 음악인들의 정신적 지주로 떠받들어지며 밥 딜런, 브루스 스프링스틴, 엘비스 코스텔로 등 당대와 후대를 막론한 무수한 아... 30년 이상의 장구한 세월에 걸쳐 거의 매년 앨범을 발표하는 밴 모리슨(Van Morrison)은 상업성에 구애받지 않고 외로운 음악항해를 펼치며 독보적 음악 소우주를 구축한 록 음악계의 거장이다. 비록 인기차트를 주름잡은 바 없었지만 ‘아일랜드 음악의 대부’라는 명성과 함께 모든 아일랜드 출신 음악인들의 정신적 지주로 떠받들어지며 밥 딜런, 브루스 스프링스틴, 엘비스 코스텔로 등 당대와 후대를 막론한 무수한 아티스트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헌정앨범이 드물던 시절인 1992년에 누구보다 먼저 트리뷰트 앨범이 바쳐질 정도였다. 도어스의 짐 모리슨(Jim Morrison)도 밴의 무대행위를 모방한 것은 물론, 그의 명곡 ‘Gloria’를 라이브 레퍼토리로 채택했으며 ‘Have I told you lately’(로드 스튜어트) ‘Wild night’(존 멜렌캠프와 미셀 엔드제오첼로) ‘Jackie Wilson said’(덱시스 미드나이트 러너스) ‘Carrying a torch’(톰 존스) ‘Crazy love’(브라이언 맥나이트, 애론 네빌) 등 많은 곡들이 리메이크 히트된 것도 그의 드높은 음악성을 방증한다. 1945년 북아일랜드의 벨파스트에서 조지 이반 모리슨(George Ivan Morrison)이란 이름으로 태어난 그는 재즈, 블루스 음반 수집가였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어린 시절부터 많은 음악을 접한다. 10대의 나이에 그룹 활동을 시작한 그는 1963년 자신이 주도한 브리티스 인베이전시기의 주요 그룹 가운데 하나인 뎀(Them)에서 보컬, 색소폰, 하모니카를 맡으며 홀연히 비상한다. 뎀은 아일랜드 출신으로는 이색적으로 미국음악인 R&B와 블루스를 연주하며 1965년 ‘Baby please don’t go’와 ‘Here comes the night’을 히트차트에 올려놓으며 명성을 얻는다. 1967년 밴 모리슨은 밴드를 떠나 솔로 활동을 시작한다. 밴드 활동을 통해 지명도를 확보한 그는 솔로앨범 < Blowin’ Your Mind >에서 ‘Brown eyed girl’(영화 < 적과의 동침 >에 삽입되어 국내 팬들에게도 친숙한 곡이다)을 전미차트 10위에 올리며 성공적으로 데뷔한다. 이듬해 미국의 ‘워너브라더스’와 계약을 체결하고 꿈꾸어왔던 미국 시장에 진출하며 기념비적인 앨범 < Astral Weeks >를 발표한다. 1968년 발표된 이 앨범은 현재까지 세계적으로 30만장이 채 팔리지 않은 형편없는 실적을 거두었지만 지금도 록 역사에서 빠지지 않는 명반으로 찬란한 빛을 발하고있다. < Astral Weeks >는 60년대 후반의 히피즘 속에서 내면 탐구에 몰두했으며 이데올로기의 난립 속에서 예술 그 자체에 주목한 탁이(卓異)한 앨범으로 유명한 재즈 세션 맨들과의 연주로 이틀만에 완성되었다. 자신의 감정을 녹음실에서 혼자 소화해 낸 그의 녹음 과정과 앨범에 담긴 모습은 록음악에서 표현된 최초의 ‘의식의 흐름’(Stream of consciousness)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대중에게 외면당한 전작과 달리 1970년에 발표된 < Moondance >는 싱글 ‘Come running’과 ‘Into the mystic’, ‘Moondance’, ‘Crazy love’가 애청되면서 그에게 상업적 성공을 안겨주었다. 재즈, 블루스, 소울, R&B, 클래식 등 다양한 스타일을 록의 테두리 안에서 소화해내는 그의 탁월한 음악적 시도는 이후 30년 넘도록 줄기차게 이어진다. 1970년 < His Band And The Street Choir >, 1971년 < Tupelo Honey >, 1972년 < St. Dominic’s Preview >를 연이어 발표했고, 이 가운데 < St. Dominic’s Preview >는 다양한 보컬, 악기의 시도가 담겨 있는 이해하기 어려운 예술적 극치를 선보인 역작으로 평가받는다. 73년 발표된 < Hard Nose The Highway >는 포크송과 세사미 스트리트(Sesame Street) 음악을 수록하는 색다른 면모를 보여주었지만 일관성이 결여되었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이후 잠시 공백기에도 라이브 활동과 더욱 다양한 예술적 탐미를 통해 음악세계를 견고히 한 그는 1977년 < A Period Of Transition >, 1978년 < Wavelength >, 1979년 < Into The Music >(국내 최초로 라이센스 앨범이 나왔다), 1980년 < Common One >을 잇따라 발표하며 건재함을 과시한다. < Common One >에 수록된 곡 ‘Somewhere in England’에선 영국의 대표적 낭만주의 시인들인 워즈워드, 코울리지를 언급하며 자연을 통해 얻을 수 있는 내적 탐닉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1980년대에도 고삐를 늦추지 않고 < Beautiful Vision >(1982년) < Inarticulate Speech Of Heart >(1983년) < A Sense Of Wonder >(1984년) < No Guru, No Method, No Teacher >(1986년) < Poetic Champions Compose >(1987년)을 발표했다. 1988년에는 아일랜드의 민속그룹 치프턴스(Chieftains)와 함께 < Irish Heartbeat >를 발표, 자신의 뿌리인 아일랜드의 켈트족에게 그 관심을 돌린다. 이즈음 영국으로 돌아가 1989년 < Avalon Sunset >을 발표, 싱글 ‘Whenever god shines his light on me’로 영국차트 20위권에 처음으로 진입한다. 그 수많은 앨범들과 오랜 음악생활 속에서 영국 차트 첫 20위권 진출 또한 믿기 힘든 사실이었다. 이 앨범에 로드 스튜어트(Rod Stewart)가 언플러그드로 커버하여 국내 팬들에게도 친숙한 곡 ‘Have I told you lately’가 수록되어 있다. 1990년대에도 왕성한 활동을 전개해 1990년 < Enlightenment >, 1991년 < Hymns To The Silence >, 1993년 < Too Long In Exile >를 연속 발표한다. 늘 그랬듯 뚜렷한 히트 싱글 하나 없었지만 1994년 브릿 어워드(Brit Award)에서 공로상이란 예우를 받는다. 1995년 이후 베스트 음반과 쟁쟁한 후배 아티스트들의 헌정앨범이 이어졌으며 50살이 넘은 나이에도 매년 꾸준하게 정규 앨범을 발표하고 있다. 1998년 미발표곡 모음집인 < The Philosopher’s Stone >에 이어 이듬해엔 신작 < Back On Top >으로 골드를 기록했고, 2000년에도 제리 리 루이스(Jerry Lee Lewis)의 형제인 린다 게일 루이스(Linda Gail Lewis)와의 듀엣 앨범 < You Win Again >으로 다시금 그의 음악에 대한 탈속(脫俗)적 열정과 천착을 알렸다.
노래 : Christopher Cross (크리스토퍼 크로스)
아마도 크리스토퍼 크로스(Christopher Cross)만큼 팝 스타덤의 천당과 지옥을 ‘빠르게’ 가로지른 뮤지션도 없을 것이다. 그는 1980년부터 1983년까지 3년 간 음악천하를 전유(專有)했으나 이듬해 갑작스레 물먹은 솜처럼 영락(零落)했다. 이후 그 흔한 재기의 환희마저 누리지 못한 채 지금까지는 역사에 ‘반짝 별’로 기록될 처지에 놓여있다. 해마다 그래미상 시상식이 열릴 시점이면 즉각적으로 크리스토퍼... 아마도 크리스토퍼 크로스(Christopher Cross)만큼 팝 스타덤의 천당과 지옥을 ‘빠르게’ 가로지른 뮤지션도 없을 것이다. 그는 1980년부터 1983년까지 3년 간 음악천하를 전유(專有)했으나 이듬해 갑작스레 물먹은 솜처럼 영락(零落)했다. 이후 그 흔한 재기의 환희마저 누리지 못한 채 지금까지는 역사에 ‘반짝 별’로 기록될 처지에 놓여있다. 해마다 그래미상 시상식이 열릴 시점이면 즉각적으로 크리스토퍼 크로스란 이름이 떠오른다. 그래미상의 핵심이자 여간해서 싹쓸이하기 어려운 4개 종합시상 부문 ‘올해의 레코드’ ‘올해의 앨범’ ‘올해의 곡’ 그리고 ‘최우수 신인’을 그래미 역사상 유일하게 석권한 주인공이 크리스토퍼 크로스이기 때문이다. 그는 1980년 ‘Sailing’과 데뷔 앨범의 폭풍으로, 신인이면서 자작(自作)으로 선풍을 일으켜야 만이 가능한 이 과업을 거뜬히 수행해냈다. 그의 힘은 정교하게 다듬질한 ‘투명한 발라드’에 있었다. 물론 데뷔 히트싱글 ‘Ride like the wind’는 불안한 기운이 넘치는 소프트 록이었지만 그 다음을 잇는 곡들은 대부분 기성세대의 선율 선호를 매만진 것들이었다. 그러한 어덜트 컨템포라리, 라디오 지향 등과 결부된 과(過)대중성으로 인해 그는 인기의 불을 지피던 그 시점에도 평단의 찬물을 맞지 않으면 안되었다. 1951년 크리스토퍼 게퍼트(Christopher Geppert)란 본명으로 미 텍사스 샌안토니오에서 태어난 그는 애초 오스틴 지역에서 활동한 커버 밴드 플래시(Flash)의 활동으로 팝 무대에 등장했다. 1978년 가을 워너브라더스와 앨범계약을 체결했지만 그의 이름을 내건 정식 데뷔작은 2년이 흐른 1980년에 발표되었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 인기차트와 레코드매장은 그가 출발선 테이프를 끊자마자 갈채로 맞이했다. 두비 브라더스의 마이클 맥도날드(Michael McDonald)가 백업 보컬과 조화를 이룬 첫 싱글 ‘Ride like the wind’는 단숨에 빌보드 2위로 솟아올랐고 다음 싱글 ‘Sailing’은 한 발짝 더나가 차트 정상을 밟았다. 정말 순항하듯 매끄럽게 구성된 이 발라드는 국내 라디오에서도 단숨에 골든 리퀘스트 메뉴로 떠올라, 팝 팬들은 이제 로드 스튜어트(Rod Stewart)의 ‘Sailing’ 아닌 그의 것을 찾기에 이르렀다. 후속 싱글 ‘Never be the same(15위)’ ‘Say you’ll be mine(20위)’마저 호쾌한 성적을 거둬 그의 인기는 이듬해인 1981년까지 이어졌으며 그 사이 앨범은 400만장이나 팔려나갔다. 이듬해 그래미상에선 새 역사가 만들어졌다. 그가 그래미상의 중핵인 4개 부문을 휩쓸어버린 것이다(총 5개 부문). 이 포상으로 완전히 정상의 깃대를 꽂자마자 그는 1981년 여름 코미디 영화 < 아더 >(Arthur)의 주제곡 ‘Best you can do(Arthur’s theme)’으로 다시 차트1위 자리 공략에 성공, 영광의 깃발을 휘날렸다. 베테랑 작곡가 버트 바카라크, 캐롤 베이어 세이거 그리고 스티브 루카서(기타) 제프 포카로(드럼) 등 실력자가 총동원된 이 곡은 완벽한 팝 발라드로서 무난한 성공이 예견된 곡이기도 했다. 덤으로 이 곡은 그에게 아카데미상을 안겨주었다. 이 무렵 그의 기세를 따를 자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놀랍게도 인기 하강은 너무도 빨리 찾아왔다. 학수고대 끝에 나온 1983년의 2집 < Another Page >에서 발표된 싱글 ‘All right(12위)’ ‘No time to talk(33위)’는 첫 앨범에 훨씬 못미치는 실적을 기록했다. 그나마 3 번째 싱글 ‘Think of Laura(9위)’가 2집 징크스를 막는 듯 했으나 체면을 지키는 수준에 불과했다. 그것도 실은 TV드라마 < 종합병원 >(General Hospital)에 삽입되면서 얻은 분전이었다. 이 곡은 그의 마지막 톱40 히트송이 되었다. 인기가 완연히 퇴조한 가운데 발표한 < Every Turn Of The World >(1985년), < Back Of My Mind >(1988년)은 참패를 거듭했으며 특히 뒤 앨범은 아예 차트에조차 오르지 못했다. 그러자 소속사 워너브라더스에서 방출되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그럼에도 그는 불굴의 의지로 작품과 공연활동을 계속하는 끈기를 보였고, 레이블을 아리올라, 리듬 사파리, CMC 인터내셔널로 전전하며 < Rendezvous >(1993년), < Window >(1995년), < Walking In Avalon >(1998년)을 잇따라 발표했지만 과거의 팬들조차 그를 기억하기 꺼려했다. 2000년 봄에 나온 < The Red Room >에도 대중의 외면은 마찬가지였다.
노래 : Pointer Sisters (포인터 시스터즈)
노래 : Des'ree (데즈리 ,Desiree Annette Weeks)
소울, R&B 보컬 소울, R&B 보컬
1980년대 후반에 등장한 스웨덴 출신의 혼성 듀오 록시트는 자국인 스웨덴을 넘어 미국과 전지구촌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팝/록그룹이다. 1988년부터 몇 년간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던 이들은 그러나 90년대 중반이후 하향곡선을 긋기 시작했다. 급기야 1999년에는 활동을 잠정 중단해 영원히 팬들의 기억 저편으로 사라지는 듯 했다. 하지만 그로부터 2년이 채 안 된 2001년 록시트는 다시 뭉쳐 새 앨범 < R... 1980년대 후반에 등장한 스웨덴 출신의 혼성 듀오 록시트는 자국인 스웨덴을 넘어 미국과 전지구촌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팝/록그룹이다. 1988년부터 몇 년간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던 이들은 그러나 90년대 중반이후 하향곡선을 긋기 시작했다. 급기야 1999년에는 활동을 잠정 중단해 영원히 팬들의 기억 저편으로 사라지는 듯 했다. 하지만 그로부터 2년이 채 안 된 2001년 록시트는 다시 뭉쳐 새 앨범 < Room Service >를 발표하며 활동을 이어나가고 있다. 1986년 스웨덴에서 결성된 남녀 듀오 록시트는 기타리스트 페르 게슬(Per Gessle)과 보컬리스트 마리에 프레드릭슨(Marie Fredriksson)으로 구성되어 있다. 팝과 록이 결합된 크로스오버 사운드를 들려주는 이들의 음악에는 묘한 ‘이중성’이 있다. 우선 스웨덴 팝 특유의 후크를 갖고 있다. 그러면서도 이들의 사운드는 북구의 서늘한 맛이 난다. 차가우면서도 달콤한 멜로디랄까. 게슬과 프레드릭슨이 번갈아 담당하는 보컬(주로 마리에가 리드보컬을 맡긴 하지만)은 여타의 그룹들과는 상당히 다른 형식이다. 보컬 하모니도 있지만 개별적 느낌이 강하다. 음침한 톤을 지닌 게슬의 보이스와 프레드릭슨의 다소 격양된 보컬도 이채롭다. 여기에 ‘The look’ 같은 강한 록음악과 ‘Listen to your heart’ 같은 로맨틱 발라드가 공존한다. 이처럼 이질적이면서도 친숙한 이들의 매력은 팝 팬들로부터 상당한 반향을 일으켰다. 1988년부터 약 5-6년간 폭발했던 록시트의 활약은 선배그룹 아바에 비견할 만 했다. 특히 1990년 영화 < 귀여운 여인 >에 삽입되었던 발라드 ‘It must have been love’는 10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음악팬들의 애청 곡으로 남아있다. 미국 차트성적만 놓고 보자면 이들은 어쩌면 아바 이상이다. 아바가 세계를 평정했다지만 미국시장에서는 고전을 면치 못했었다. 록시트는 아바가 넘지 못했던 벽, 즉 미국차트를 가볍게 정복했다. 2장의 앨범과 4장의 싱글이 차트1위, 2장의 싱글이 차트2위에 올랐다. 물론 아바의 절대성에는 미치지 못하겠지만 이 놀라운 차트성적은 적어도 ‘포스트 아바 군단’에서는 록시트가 선두주자임을 입증한다. 록시트의 두 멤버는 한 팀으로 활약하지만 각자가 그전부터 쟁쟁한 뮤지션들이었다. 1979년부터 길렌 티더(Gyllene Tider)라는 록그룹을 성공적으로 이끌던 페르 게슬은 뛰어난 작곡능력을 인정받아 아바의 전 멤버 프리다에게 곡을 준 적도 있다. 마리에 프레드릭슨 역시 이미 3장의 솔로앨범을 발표했던 스웨덴에서 손꼽히는 가수였다. 그 때문에 작곡을 서로 분담하며 노래를 각자 따로 부르기도 한다(마치 비틀스의 레논과 매카트니처럼) 1988년 출시된 2집 < Look Sharp! >은 이들 ‘짧은 신화’의 신호탄이었다. 스웨덴에서 이들의 음악에 반한 미국 교환학생이 귀국하면서 그 테이프를 가져와 록시트가 미국에 알려졌다는 에피소드는 유명하다. 라디오 전파에 의해 저명인사가 된 이들은 곧바로 미국 레코드사와 계약하고 앨범을 발매한다. 그 앨범은 차트정상을 밟았고 이때부터 눈부신 히트행진이 이어진다. 발표순으로 ‘The look’이 1위, ‘Dressed for success’가 2위, ‘Listen to your heart’가 다시 1위, 이어 ‘It must have been love’가 또 1위를 기록했다. 이 흥행여파는 다음 앨범까지 이어져서 1991년 발표한 < Joyride > 역시 정상에 올랐다. "존 레논과 함께 곡을 쓰는 일은 ‘즐거운 여행’(joyride)을 하는 것 같았다"라는 폴 매카트니의 말에서 제목을 따왔다는 이 앨범에서는 ‘Joyride’, ‘Fading like a flower’, ‘Spending my time’ 등이 큰사랑을 받았다. 이후 계속 앨범을 냈지만 다소 주춤하던 이들은 1995년 중국 베이징에서 공연하며 건재함을 과시했다. 이는 1986년 조지 마이클의 왬이 공연한 이래 서구 록밴드로서는 최초였다. 한때 활동중단의 위기를 겪기도 했던 이들은 2001년에는 활동재개 앨범 < Room Service >를 발매하며 팬들 곁으로 돌아왔다. 한동안 ‘웅크린 호랑이와 숨은 용’이었던 록시트는 이제 막 잠행을 마쳤다. 비록 예전의 흡인력은 줄어들었을지 몰라도 당당히 팬들 앞에 선 이들, 음악을 놓지 않는 이들이 보기 좋다. 심기일전하여 새 출발하는 이들의 모습에 박수를 보낸다. 이들은 누가 뭐래도 여전히 스웨덴의 음악대사다.
미국 뉴웨이브 밴드 미국 뉴웨이브 밴드
밴드 : Huey Lewis And The News (휴이 루이스 앤 더 뉴스)
휴이 루이스 & 더 뉴스(Huey Lewis & The News)가 1980년대에 성공할 수 있었던 요인은 당시 음악 팬들이 좋아할 보편적인 록 음악의 부재였다. 하얗게 변색된 흑인음악의 득세, 뉴웨이브와 팝으로 점철된 시기에 미국인들이 살갑게 느끼는 친숙하고 대중친화적인 로큰롤로 북미 지역을 평정한 휴이 루이스 & 더 뉴스는 그랬기 때문에 우리나라에선 본국의 명성만큼 전성기를 누리지 못했다. 아니, 전성기가 거... 휴이 루이스 & 더 뉴스(Huey Lewis & The News)가 1980년대에 성공할 수 있었던 요인은 당시 음악 팬들이 좋아할 보편적인 록 음악의 부재였다. 하얗게 변색된 흑인음악의 득세, 뉴웨이브와 팝으로 점철된 시기에 미국인들이 살갑게 느끼는 친숙하고 대중친화적인 로큰롤로 북미 지역을 평정한 휴이 루이스 & 더 뉴스는 그랬기 때문에 우리나라에선 본국의 명성만큼 전성기를 누리지 못했다. 아니, 전성기가 거의 없었다. 1970년대 초반, 휴이 루이스와 키보디스트 숀 하퍼(Sean Hopper)가 결성한 컨트리 록 밴드 클로버(Clover)가 시초인 휴이 루이스 & 더 뉴스는 1980년에 정식으로 음반을 발표할 때까지 여러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자신들의 음악적 프레임을 구상했다. 1970년대 중반 영국에 머물면서 엘비스 코스텔로(Elvis Costello), 닉 로우(Nick Lowe) 등과 음악 작업에 열중한 휴이 루이스는 1979년에 다시 로스앤젤레스로 돌아와 휴이 루이스 & 더 뉴스의 실질적인 밑그림인 아메리칸 익스프레스(American Express)를 조직했지만 음악 팬들의 관심에서 소외되었다. 1980년에 기타리스트 크리스 헤이스(Chris Hayse)가 가입하면서 밴드 이름을 휴이 루이스 & 더 뉴스로 개명하면서 인기그룹으로 성장하는 가능성의 씨앗을 발아했다. 이들은 1982년에 발표한 소포모어 앨범 < Picture This >에서 커트된 ‘Do you believe in love?(7위)’와 ‘Hope you love me like you say you do(36위)’, ‘Workin’ for a livin’(41위)’이 싱글 차트에 랭크되면서 대중들과의 거리를 좁혔다. 샤니아 트웨인(Shania Twain)의 남편이자 명 프로듀서인 존 ‘머트’ 랭(John ’Mutt’ Lange)이 작곡한 ‘Do you believe in love?’는 휴이 루이스 & 더 뉴스의 차트 데뷔곡. 다음 해에 공개한 세 번째 음반 < Sports >로 휴이 루이스 & 더 뉴스는 미국 서민들의 마음을 이해하는 가장 친근한 밴드로 급부상했다. 명 작곡 콤비 니키 친(Nicky Chinn)과 마이크 채프만(Mike Chapman)이 작곡해 컨트리 록 그룹 엑사일(Exile)에게 준 ‘Heart & soul’을 리메이크 해 8위에 랭크시켰으며 그 밖에 ‘I want a new drug((6위)’, ‘The heart of rock & roll(6위)’, ‘If this is it(6위)’, ‘Walking on a thin line(18위)’까지 모두 5곡이 싱글 차트에서 비상(飛上)했다. 이들의 노래가 이렇게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뮤직비디오였다. 세련되진 못했지만 미국 보통 사람들을 주인공으로 한 부담 없고 코믹한 뮤직비디오는 서민들의 대리만족을 채워주며 쾌감의 폭을 전달한 것이 휴이 루이스 & 더 뉴스의 인기 비결이었다(뮤직비디오를 통해 카메라에 익숙해진 휴이 루이스는 나중에 여러 편의 영화에 출연하기도 했다). 한편 1984년, 레이 파커 주니어(Ray Parker Jr.)가 부른 영화 < 고스트버스터스 >의 주제가가 ‘I want a new drug’을 표절했다고 시끄러웠지만 이 사건은 법정 밖에서 조용히 해결되어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지금까지 미국에서만 700만장 이상이 팔린 이 음반의 성공으로 휴이 루이스 & 더 뉴스는 1985년에 흥행대박을 터뜨린 < 백 투 더 퓨처 >의 사운드트랙에서 ‘Power of love(1위)’와 ‘Back in time’을 취입해 자신들의 인기가 거품이 아님을 시위했고 휴이 루이스는 이 영화에 카메오로도 출연했다(마이클 제이 폭스가 학교에서 오디션을 볼 때 커다란 확성기로 “그만”을 외치던 바로 그 선생님!!). 1986년에 공개한 4집 < Fore! >에서도 무려 다섯 곡을 탑 텐 안에 올려놓으며 자신들이 미국 최고의 그룹임을 당당하게 말했다. ‘Stuck with you’와 휴이 루이스의 친구인 브루스 혼스비(Bruce Hornsby)가 작곡해 준 ‘Jacob’s ladder’가 정상을 차지했고 ‘Hip to be square(3위)’, ‘I know what I like(9위)’, ‘Doing it all for my baby(6위)’ 모두 미국인들로부터 재신임을 받았다. 하지만 1988년도 앨범 < Small World >에서는 첫 싱글 ‘Perfect world’만이 3위에 오르는 상대적 실패를 경험했다. 물오른 팝 메탈에 밀려난 < Small World >부터 휴이 루이스 & 더 뉴스는 포물선을 그리며 인기가 하락하기 시작했고 휴이 루이스는 같은 해에 탐 행크스가 주연한 < 빅 >에 단역으로 출연하기도 했다. 1990년대 이후에도 < Hard At Play >와 < Four Chords & Several Years Ago >를 발표했지만 1980년대와 전혀 다른 음악적 토양을 배양하고 있는 1990년대 음악 씬에서 휴이 루이스 & 더 뉴스는 더 이상 힘을 쓰지 못했다. 토속적인 사운드를 담고 있는 룻츠 록이 부각되던 1990년대 중반에도 미국의 정서를 담은 휴이 루이스 & 더 뉴스의 음악은 10년 전처럼 ‘발표하는 대로 히트’라는 공식에서 한참 벗어났다. 그것은 가사 때문이었다. 삐딱함을 정도(正道)로 받아들인 1990년대의 신세대들에게 1980년대 보수적인 가치관을 담았던 휴이 루이스 & 더 뉴스의 노랫말은 일종의 ‘건전 가요’였고 유치한 ‘도덕 교과서’였다. 1993년에는 존경받는 흑인 아티스트 커티스 메이필드(Curtis Mayfield)의 트리뷰트 앨범 < People Get Ready >에 ‘It’s alright’으로 참여했으며 휴이 루이스는 1990년대에 들어 로버트 알트만 감독의 < 쇼트 컷츠 >와 기네스 팰트로우와 함께 출연한 < 듀엣츠 > 같은 영화에 출연해 멀티 연예인으로서의 가능성을 타진했다.
1996년 당시, 박스오피스를 점령하던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와 클레어 데인즈 주연의 < 로미오와 줄리엣 >의 흥행 파장은 사운드 트랙으로까지 번져갔다. 이 음반에서 싱그러운 보컬과 미니 오케스트라를 연상시키는 ‘Lovefool’은 얼터너티브와 하드코어의 ‘내지르기 경쟁’에서 도피하고 싶은 음악 팬들의 지친 청감을 어루만지며 평안과 휴전을 제시했다. 스칸디나비아 산맥에서 희미하게 반짝이던 작은 별 카디건스(The ... 1996년 당시, 박스오피스를 점령하던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와 클레어 데인즈 주연의 < 로미오와 줄리엣 >의 흥행 파장은 사운드 트랙으로까지 번져갔다. 이 음반에서 싱그러운 보컬과 미니 오케스트라를 연상시키는 ‘Lovefool’은 얼터너티브와 하드코어의 ‘내지르기 경쟁’에서 도피하고 싶은 음악 팬들의 지친 청감을 어루만지며 평안과 휴전을 제시했다. 스칸디나비아 산맥에서 희미하게 반짝이던 작은 별 카디건스(The Cardigans)가 대지를 비추는 샛별로 떠오르는 순간이었다. 카디건스의 성공을 냉철하게 분석한다면 ‘Lovefool’을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사실이지만 결코 그런 야들야들한 팝/록만이 이들의 전부는 아니다. 초창기 시절의 상큼하고 발랄한 분위기의 노래는 밴드의 정체성 확립을 위한 지반 쌓기에 불과했다. 기존의 노선을 탈피한 < First Band On The Moon >에서도 ‘Lovefool’을 제외하곤 전체적으로 무겁고 어둡게 채색되었다. 뿐만 아니라 헤비메탈 그룹 블랙 사바스(Black Sabbath)의 ‘Sabbath bloody Sabbath’와 ‘Iron man’을 귀엽게(?) 부활시킨 것도 ‘슈거 팝 밴드’의 이미지에는 어색한 이력이다. 이렇듯 특이한 경험은 팀의 사운드 메이커인 피터 스벤손(Peter Svensson, 기타)과 마그너스 스베닝손(Magnus Sveningsson, 베이스)이 과거 헤비메탈 밴드에 몸담았었다는 전과가 있다는 것이 그 의혹을 푸는 열쇠이다. 피터와 마그너스를 기둥으로 벤 라거베르크(Bengt Lagerberg, 드럼/플루트)와 라스 요한손(Lars Johansson, 키보드/기타), 그리고 오디션을 통해 선발된 니나 페르손(Nina Persson, 보컬)이 가입하면서 카디건스는 밴드로서의 모양새를 갖추었다. 인디 레이블을 통해 빛을 본 첫 싱글 ‘Rise & shine’이 명 프로듀서 토르 요한손(Tore Johansson)의 손에 들어가면서 밴드는 결성 2년 만에 메이저 레코드사인 < 스톡홀름 >과의 계약서에 사인할 수 있었다. 보컬리스트 니나 페르손의 목소리는 플루트 연주가 빈번한 록 밴드라는 특징마저도 삼키는 거대한 화제의 공감대를 형성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여느 밴드와의 구분법에 뚜렷한 경계선을 그으며 카디건스의 상징으로 정착했다. 가성과 진성을 넘나드는 부드러운 음색은 부서질 듯 강한 생명력으로 호흡했고, 이러한 매력을 가진 카디건스는 곧바로 대중 친화의 이펙트를 가져왔다. 그러나 1998년에 내놓은 앨범 < Gran Turismo >가 지나친 록 사운드로의 진입으로 인해 상업적인 실패를 겪으며 최초의 실패를 경험했다. 더구나 니나 페르손이 자신의 진솔한 내면적 감성을 음악으로 표현하기 위해 솔로 프로젝트를 선언하면서 팀은 좌초의 위기를 느꼈다. 그러나 2001년에 발표한 니나의 솔로 데뷔앨범 < A Camp >는 아이러니컬하게도 카디건스의 다른 멤버들에게 새로운 지향점을 밝혀주었다. 그것은 니나가 시도했던 사색과 내면의 예술적 승화였다. 금발의 보컬리스트는 다시 팀으로 돌아왔고, 이 열망을 담아 공개한 음반 < Long Gone Before Daylight >은 스웨디시 그래미 어워드에서 ‘올해의 앨범 부문’을 수상했다. 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도전이 틀리지 않았다는 믿음을 확인하는 가장 큰 성과도 건졌다. 스웨덴 중부의 소도시에서 결성되어 올해로 데뷔 10년을 맞이한 카디건스. 이제 그들은 스위디시 팝의 ‘고유명사’가 되었다.
밴드 : Calling (콜링 (락 밴드))
미국 캘리포니아(California)에서 결성된 록 밴드 콜링(The Calling)은 크리드(Creed)로 대표되는 포스트 그런지(Post-Grunge) 사운드를 표방하며 등장한 무서운 신예이다. 이들은 라디오 친화적인 멜로디와 기타 노이즈를 절묘하게 결합시킨 스타일로 인기 가도에 진입했다. 멤버 전원이 걸출한 외모의 소유자라는 점 또한 플러스 요인 중에 하나이다. 기타 키드였던 아론 카민(Aaron Kamin... 미국 캘리포니아(California)에서 결성된 록 밴드 콜링(The Calling)은 크리드(Creed)로 대표되는 포스트 그런지(Post-Grunge) 사운드를 표방하며 등장한 무서운 신예이다. 이들은 라디오 친화적인 멜로디와 기타 노이즈를 절묘하게 결합시킨 스타일로 인기 가도에 진입했다. 멤버 전원이 걸출한 외모의 소유자라는 점 또한 플러스 요인 중에 하나이다. 기타 키드였던 아론 카민(Aaron Kamin)은 어느 날 그의 여자친구의 동생인 알렉스 밴드(Alex Band)를 소개받았고 둘은 의기투합, 제너레이션 갭(Generation Gap)을 결성하며 활동을 시작했다. 이윽고 이들은 리사이클러(Recycler) 출신의 나머지 멤버들과 함께 콜링으로 밴드명을 바꾼 후, 데뷔작 를 발표했다. 앨범에서 밴드는 매치박스 트웬티(Matchbox Twenty)와 크리드를 결합시킨 듯한 사운드를 들려주며 훌륭한 신고식을 치러냈다. 2001년 3월 현재, 첫 싱글 ‘Wherever you’ll go’ 는 빌보드 싱글 차트에서 10위권에 진입하며 고속 승진의 기쁨을 맛보는 중이다.
멤버 : 브랜단 비브라운(Brendan B. Brown, 보컬, 기타), 케빈 가르시아(Kevin Garcia, 드럼), 리즈 브라운(Liz Brown, 보컬), 매트 밀리건(Matt Milligan, 베이스), 제라드 호프만(Gerard Hoffmann, 키보드), 미시 헤셀튼(Missy Heselton, 보컬) 멤버 : 브랜단 비브라운(Brendan B. Brown, 보컬, 기타), 케빈 가르시아(Kevin Garcia, 드럼), 리즈 브라운(Liz Brown, 보컬), 매트 밀리건(Matt Milligan, 베이스), 제라드 호프만(Gerard Hoffmann, 키보드), 미시 헤셀튼(Missy Heselton, 보컬)
‘카우보이’ 제이 케이(Jay Kay)가 이끌고 있는 영국 밴드 자미로콰이는 고품격 댄스 음악으로 1990년대 전세계 클럽 신을 뒤흔든 팀이다. 펑크(Funk), 소울, 재즈, 리듬 앤 블루스, 하우스, 힙 합, 팝, 테크노 등 다양한 장르의 곳간을 넘나들며 일궈낸 그들의 올드 앤 와이즈(Old And Wise) 퓨전 사운드는 새로운 트렌드를 갈구하던 클러버들에게 이상적인 음악이었다. 그들은 다채로운 색깔의 소리... ‘카우보이’ 제이 케이(Jay Kay)가 이끌고 있는 영국 밴드 자미로콰이는 고품격 댄스 음악으로 1990년대 전세계 클럽 신을 뒤흔든 팀이다. 펑크(Funk), 소울, 재즈, 리듬 앤 블루스, 하우스, 힙 합, 팝, 테크노 등 다양한 장르의 곳간을 넘나들며 일궈낸 그들의 올드 앤 와이즈(Old And Wise) 퓨전 사운드는 새로운 트렌드를 갈구하던 클러버들에게 이상적인 음악이었다. 그들은 다채로운 색깔의 소리들을 끌어다 쓰면서도 단 한차례의 난잡함과 엉성함을 내비치지 않는다. 각각의 장르가 가진 특성들을 정확히 해독하여 일정한 통일성과 화려함이 번뜩이는 댄스 음악으로 완벽하게 주조해낸다. 그 안에는 보통의 댄스 음악에 주어지는 천박스러움이 없다. 그렇다고 일반 대중들이 듣기에 어려운 것도 아니다. 대중 친화적이며, 고급스럽다. 이처럼 남녀노소 누구나 신나는 펑크(Funk) 음악에 맞춰 춤을 출 수 있게 만드는 것은 자미로콰이, 특히 제이 케이가 어릴 적부터 꿈꿔온 소망이었다. 랭크셔 지방에서 태어난 제이 케이(1969년 생)는 1970년대 나이트클럽 재즈 싱어로 활약했던 어머니 카렌 케이(Karen Kay)로부터 영향을 받아 스티비 원더(Stevie Wonder), 로이 에이어스(Roy Ayers), 슬라이 스톤(Sly Stone)의 음악을 들으며 리듬 앤 블루스, 재즈, 소울 등에 대한 감각을 키웠다. 1980년대 런던으로 이주한 그는 어렵게 구입한 신디사이저로 곡을 만들며 여러 개의 데모 테이프를 제작했다. 그 중 한 트랙이었던 ‘When you gonna learn?’이 런던의 리듬 앤 블루스 라디오 방송 < Kiss FM >에 소개되면서 그는 서서히 지명도를 확보했고, 인디 레이블 < 애시드 재즈(Acid Jazz) >-이후 자미로콰이의 음악은 애시드 재즈라는 장르로 정의되며 오해 아닌 오해를 받게 됐다-에서 정식 싱글로 발매되는 영광을 누렸다. 이를 계기로 그는 1992년 메이저 레코드사 < 소니(Sony) >와 8장의 음반 계약이라는 파격을 연출하며 단번에 주목받는 신인으로 급부상 했다. 본격적인 음악 활동을 위해 제이 케이는 키보디스트 토비 스미스(Toby Smith), 비브라폰 연주자 월리스 부캐넌(Wallis Buchanan), 드러머 닉 밴 겔더(Nick Van Gelder), 베이시스트 스튜어트 젠더(Stuart Zender) 등을 영입하여 자미로콰이를 결성하고 1년 뒤인 1993년 데뷔작 < Emergency On Planet Earth >를 발표했다. 이미 공식 음반을 공개하기 전부터 타올랐던 자미로콰이의 열기는 데뷔 앨범의 영국 차트 1위라는 결과로 정점에 달했고, 곧장 플래티넘으로 직행했다. 도발적인 펑키 리듬과 관능적인 그루브, 경쾌한 록 필, 진한 소울의 향기가 한 몸으로 용해된 ‘Emergency on planet earth’(32위), ‘Too young to die’(10위), ‘Blow your mind’(12위), ‘When You Gonna Learn?’(28위) 등의 히트곡들을 터트리며 밴드는 영국 클럽 신에 메가톤급 폭풍우를 일으켰다. 이때부터 음반 재킷에 등장하는 버팔로 모자를 눌러쓴 제이 케이의 모습은 자미로콰이를 상징하는 로고로 자리잡았다. 1년 뒤인 1994년 데릭 매켄지(Derrick McKenzie)로 드럼 주자를 교체한 그룹은 재즈적 색채가 강화된 소포모어 작품 < Return Of The Space Cowboy >를 내놓았다. 이 음반 역시 차트 2위에 오르며 전작의 흥분을 그대로 이어나갔고, ‘Space cowboy’(17위), ‘Half the man’(15위), ‘Stillness in time’(9위) 등의 인기 곡들을 영국 전역으로 쏘아 올렸다. 앞선 두 장의 앨범을 통해 영국에서 가장 잘 나가는 밴드 중 하나로 성장한 자미로콰이는 1996년 3집 < Travelling Without Moving >과 1999년 4집 < Synchronized >로 세계적인 그룹의 반열에 도달했다. 친근한 멜로디와 리듬을 앞세운 스매시 히트곡 ‘Virtual insanity’(3집)와 세련된 디스코와 테크노로 무장한 ‘Canned heat’(4집)의 폭발력은 영국과 미국뿐만 아니라 우리 나라를 포함한 지구촌 전역을 들썩거리게 했다. 천 백 만장이라는 두 음반의 판매 합계 역시 그룹의 뜨거운 인기도를 잘 나타내는 증거이다. 자미로콰이는 오는 9월 초 다섯 번째 정규 음반 < A Funk Odyssey >를 공개할 예정이다. 신보는 첫 싱글로 커트된 ‘Little l’을 비롯하여, ‘Feels so good’, ‘Black crow’, ‘Twenty zero one’ 등 그들의 음악 주요소인 펑크(Funk)에 대한 찬가로 가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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