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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이브 할 때 듣기 좋은 팝 음악 (Ultimate Drive: 4CDs Of Great Driving Mus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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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이브 할 때 듣기 좋은 팝 음악 (Ultimate Drive: 4CDs Of Great Driving Music)

[ 4CD / 오리지널 음원 ]
Meat Loaf, Bonnie Tyler, Cyndi Lauper, Billy Ocean, Buster Poindexter (David Johansen) 노래 외 73명 정보 더 보기/감추기 | SonyMusic | 2015년 10월 20일 첫번째 구매리뷰를 남겨주세요. | 판매지수 114 판매지수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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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이브 할 때 듣기 좋은 팝 음악 (Ultimate Drive: 4CDs Of Great Driving Music)

품목정보

품목정보
발매일 2015년 10월 20일
제조국 EU

관련분류

음반소개

디스크

Disc 1
  • 01 Bat Out Of Hell - Meat Loaf
  • 02 Holding Out For A Hero - Bonnie Tyler
  • 03 I Drove All Night - Cyndi Lauper
  • 04 Get Outta My Dreams, Get Into My Car - Billy Ocean
  • 05 Hit The Road Jack - Buster Poindexter
  • 06 Budapest - George Ezra
  • 07 Drive By - Train
  • 08 The Boy In The Bubble - Paul Simon
  • 09 The Stars (Are Out Tonight) - David Bowie
  • 10 You Drive, I'll Steer - Cheap Trick
  • 11 On The Road Again - Willie Nelson
  • 12 Take Me Home Country Roads - John Denver
  • 13 Brown Eyed Girl - Van Morrison
  • 14 Lido Shuffle - Boz Scaggs
  • 15 Turbo Lover - Judas Priest
  • 16 Race With The Devil - The Gun
  • 17 Long Train Runnin' (Live) - The Doobie Brothers
  • 18 Free Fallin' (Live) - John Mayer
  • 19 Ventura Highway (Live) - America
Disc 2
  • 01 Homeward Bound - Simon & Garfunkel
  • 02 Dust In The Wind - Kansas
  • 03 Livin' Thing - Electric Light Orchestra
  • 04 Club Foot - Kasabian
  • 05 Dashboard - Modest Mouse
  • 06 Change - Lightning Seeds
  • 07 Cars And Girls - Prefab Sprout
  • 08 Walk On The Wild Side - Lou Reed
  • 09 Two Princes - Spin Doctors
  • 10 Wake Up Boo! - Boo Radleys
  • 11 Motorcycle Emptiness - Manic Street Preachers
  • 12 Wherever You Will Go - The Calling
  • 13 Mmm Mmm Mmm Mmm - Crash Test Dummies
  • 14 Runaway Train - Soul Asylum
  • 15 Eye Of The Tiger - Survivor
  • 16 Somebody To Love - Jefferson Airplane
  • 17 Evil Ways - Santana
  • 18 Wheels On My Heels - Elvis Presley
  • 19 Highway 61 Revisited - Bob Dylan
  • 20 Mercedes Benz - Janis Joplin
Disc 3
  • 01 Freeway Of Love - Aretha Franklin
  • 02 (I've Had) The Time Of My Life - Bill Medley & Jennifer Warnes
  • 03 Danger Zone - Kenny Loggins
  • 04 Because The Night - Patti Smith Group
  • 05 Fire - The Pointer Sisters
  • 06 500 Miles - The Hooters
  • 07 The Way It Is - Bruce Hornsby & The Range
  • 08 Superheroes - The Script
  • 09 Rude - Magic!
  • 10 Up, Up And Away - The Fifth Dimension
  • 11 Green Light - John Legend
  • 12 Can You Feel It - The Jacksons
  • 13 Love Train - The O'jays
  • 14 Midnight Train To Georgia - Gladys Knight & The Pips
  • 15 Back Up Train - Al Green
  • 16 Lovely Day - Bill Withers
  • 17 I See You Baby (Fatboy Slim Radio Edit) - Groove Armada Featuring Gram'ma Funk
  • 18 Ain't Got No/I Got Life - Nina Simone
  • 19 Don't Stop Believin' - Journey
Disc 4
  • 01 Hit The Road And Go - Johnny Cash
  • 02 Theme From The Dukes Of Hazzard (Good Ole Boys) - Waylon Jennings
  • 03 Drive (For Daddy Gene) - Alan Jackson
  • 04 Roll On (Eighteen Wheeler) - Alabama
  • 05 Jolene - Dolly Parton
  • 06 The Devil Went Down To Georgia - The Charlie Daniels Band
  • 07 Everybody's Talkin' (From "Midnight Cowboy") - Harry Nilsson
  • 08 Ballad Of Easy Rider - The Byrds
  • 09 Hold Your Head Up - Argent
  • 10 Play That Funky Music - Wild Cherry
  • 11 Six Days On The Road - Taj Mahal
  • 12 Pride And Joy - Stevie Ray Vaughan
  • 13 Rollin' Man - Fleetwood Mac
  • 14 Free Ride - The Edgar Winter Group
  • 15 No One To Run With - The Allman Brothers Band
  • 16 Hard Rock Road - Steppenwolf
  • 17 Freeway Jam - Jeff Beck
  • 18 Race With The Devil On Spanish Highway - Al Dimeola
  • 19 Take Five - Dave Brubeck

아티스트 소개 (78명)

‘고깃덩어리’라는 뜻의 예명처럼 거구의 몸집과 풍부한 성량을 자랑하는 미트 로프는 우리에게 1977년의 앨범 < Bat Out Of Hell >, 그리고 그 속편격인 1993년의 < Bat Out Of Hell Ⅱ: Back Into Hell >로 널리 알려진 팝 록 뮤지션이다. 곡은 1993년 앨범에서 발표되어 전미 차트 정상에 오른 싱글 ‘I’d do anything for love(but I won’t do... ‘고깃덩어리’라는 뜻의 예명처럼 거구의 몸집과 풍부한 성량을 자랑하는 미트 로프는 우리에게 1977년의 앨범 < Bat Out Of Hell >, 그리고 그 속편격인 1993년의 < Bat Out Of Hell Ⅱ: Back Into Hell >로 널리 알려진 팝 록 뮤지션이다. 곡은 1993년 앨범에서 발표되어 전미 차트 정상에 오른 싱글 ‘I’d do anything for love(but I won’t do that)’가 유명하다. 1946년 1월22일 미국 텍사스 달라스 태생으로 미식축구 선수로 활약하다가 음악의 길을 선택, 1967년 로스앤젤레스에서 ‘팝콘 비자드’라는 이름의 밴드로 쇼 비즈니스계에 발을 내디뎠다. 본명은 마빈 리 어데이(Marvin Lee Aday)이고 1984년 마이클 어데이로 개명했지만 우량아였던 탓에 아버지가 불렀던 애칭 미트 로프로 예명을 취했다. 밴드가 해산한 뒤 브로드웨이에서 뮤지컬을 시작으로 영화, TV의 배우로 활동을 넓히게 된 그는 브로드웨이 데뷔작 < 헤어 >에 출연하며 순회공연을 하던 중 스토니(Stoney)라는 이름의 뮤지션을 만났다. 그와 두 번째 밴드 ‘스토니 앤 미트 로프’를 결성해 데뷔 앨범을 1971년 선보였고, 거기서의 싱글 ‘What you see is what you get’은 첫 차트진출 곡이 되었다(싱글 차트 71위) 이후 일련의 뮤지컬에 출연한 것이 전환이 되어 그의 음악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인 짐 스타인먼(Jim Steinman)을 뮤지컬 < More Than You Deserve > 때 만나게 된다. 그가 곡을 쓴 미트 로프의 앨범 < Bat Out Of hell >은 1977년에 발표되어 그를 최고 스타의 자리로 올려놓았다. 여기서는 빌보드 싱글 11위를 차지한 ‘Two out of three ain’t bad’을 비롯해 ‘Paradise by dashboard light’(39위) ‘You took the words right out of my mouth’(39위) 등의 히트곡이 나왔고 앨범은 미국에서만 1400만장이 팔리는 기염을 토했다. 영국에서는 15년이 넘게 앨범차트에 머물러 가장 오랫동안 차트에 머문 앨범으로 기네스북에 오르기도 했다. 하지만 이 앨범의 스매시 히트는 부담으로 작용, 이후의 작품들은 부진을 면치 못했다. 1981년의 앨범 < Dead Ringer >, 1985년의 < Bad Attitude >, 1986년의 < Blind Before I Stop >, 1987년의 라이브 < Meat Loaf Live >는 별반 호응을 이끌어내지 못했고 미트 로프는 영화 쪽에 더 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가 다시 음악계에서 두각을 나타낸 때는 전성기로부터 15년 정도가 흐른 1993년에 앨범 < Bat Out Of Hell Ⅱ: Back Into Hell >을 발표하면서부터였다. 싱글 ‘I’d do anything for love(but I won’t do that)’이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며 그에게 생애 첫 싱글 차트 정상의 영광을 안겨주었으며 앨범도 차트 정상을 호령하며 500만장의 판매고를 수립했다. 그와 짐 스타인먼이 모두 존경해마지 않는 바그너(Wagner) 식의 웅장하고 드라마틱한 음악요소들과 < 미녀와 야수 > < 엘리펀트 맨 > < 터미네이터 > 등의 영화에 기초한 싱글의 뮤직비디오 역시 화제를 불러 모았다. 후속 싱글 ‘Rock and roll dream come through’(13위), 긴 제목의 ‘Objects in the rear view mirror may appear closer than they are(백미러의 물체는 실제보다 가까이 보인다)’(38위)도 호응을 얻는 화려한 재기였다. 재기 여파를 타고 2년 뒤인 1995년에 다시 앨범 < Welcome To The Neighborhood >를 내놓았다. 여성 작곡가 다이안 워렌(Dianne Warren)이 쓴, 전작과 유사한 느낌을 준 록발라드 ‘I’d lie for you’(13위)로 저력을 발휘했지만 그것으로 다시 도래한 스타덤은 끝이었다. 2003년, 8년 만의 스튜디오 앨범인 < Couldn’t Have Said It Better >을 내놓고 다시 한번의 영광을 꿈꾸었지만 세인의 관심에서 이미 멀어진 상태였다. 그는 1994년과 1996년 내한한 바 있다. < Discography > 1971 Stoney & Meat Loaf 1977 Bat out of Hell 1981 Dead Ringer 1985 Bad Attitude 1986 Blind Before I Stop 1987 Live 1993 Bat out of Hell II: Back Into Hell 1995 Welcome to the Neighborhood 2003 Couldn’t Have Said It Better
모든 사람들은 기나긴 인생을 항해하면서 좋든 싫든 호사다마(好事多魔)와 전화위복(轉禍爲福)의 순간을 맞는다. 어떤 이들은 자신의 뜻대로 일이 진행되지 못해 좋지 않은 결과를 초래하기도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이것을 슬기롭고 현명하게 대처해 자신의 운명을 바꾸는 절호의 기회로 탈바꿈시키기도 한다. ’It’s a heartache’와 ’Total eclipse of the heart’, ’Holding out for... 모든 사람들은 기나긴 인생을 항해하면서 좋든 싫든 호사다마(好事多魔)와 전화위복(轉禍爲福)의 순간을 맞는다. 어떤 이들은 자신의 뜻대로 일이 진행되지 못해 좋지 않은 결과를 초래하기도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이것을 슬기롭고 현명하게 대처해 자신의 운명을 바꾸는 절호의 기회로 탈바꿈시키기도 한다. ’It’s a heartache’와 ’Total eclipse of the heart’, ’Holding out for a hero’ 등으로 우리나라에서 꾸준한 리퀘스트를 받는 보니 타일러(Bonnie Tyler)는 자신에게 주어진 불리한 여건을 자신만의 장점으로 승화시킨 불사조 같은 인물이다. 1970년대 중반 목에 생긴 혹을 제거하는 수술을 받은 이후 허스키한 음색을 소유하게 된 보니 타일러는 197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 중반까지 ’Bette Davis eyes’로 유명한 킴 칸스(Kim Carnes)와 함께 대표적인 ’여성판 로드 스튜어트’로서 당대를 풍미했다. 1953년 6월 8일 영국 연방인 웨일즈에서 게이너 홉킨스(Gaynor Hopkins)라는 본명으로 태어난 그녀의 음악은 1970년대와 1980년대가 확연하게 구별된다. ’It’s a heartache’로 대표되는 어쿠스틱 스타일이 두드러진 성인 취향의 팝이 그녀의 1970년대를 정의했다면, 미트 로프(Meat Loaf)의 음반 제작으로 유명한 작곡자 겸 제작자인 짐 스타인만(Jim Steinman)과 손잡은 1980년대 이후부터는 오페라 형식의 웅장하고 화려한 곡들이 그녀의 후반기를 책임졌다. 1978년, 빌보드 싱글 차트 3위를 기록한 타일러의 ’It’s a heartache’는 국내에서도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1980년대 보니 타일러의 음악과는 달리 경쾌한 전형적 어덜트 컨템포러리 스타일인 이 곡은 그녀의 두 번째 정규 앨범의 타이틀 트랙이었다. 이후 전자 음원이 없는 포크와 컨트리 성향의 음반을 공개했지만 만족할 만한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1980년대 초반에 음반사를 RCA에서 콜롬비아로 옮겨 회심의 역작을 구상하면서 제2의 도약을 준비한다. 1983년 세상에 공개된 < Faster Than The Speed Of Night >은 보니 타일러에게 새로운 음악 인생을 열어 준 걸작 앨범이다. 그녀를 대표하는 ’Total eclipse of the heart’는 1983년 10월 무려 4주 동안이나 빌보드 싱글 차트 정상의 자리를 지켰다. 뒤이어 후속곡 ’Take me back’도 46위를 기록하면서 1984년에 거행된 그래미상 시상식에서 가장 유력한 여자 가수상 후보로 예견되었으나 그녀는 ’Flashdance.....what a feeling’의 주인공 아이린 카라(Irene Cara)에게 영광의 트로피를 양보(?)했다. ’Total eclipse of the heart’가 한 달 동안 싱글 차트 1위를 지키고 있을 때 바로 그 밑에서 3주간이나 2위를 지킨 노래도 짐 스타인만이 작곡하고 프로듀싱 한 에어 서플라이(Air Supply)의 ’Making love out of nothing at all’이었다. 그 정도로 당시 짐 스타인만의 명성은 하늘을 찌를 만큼 기세가 등등했다. 강산이 변한다는 10년에 2년이 더 지난 1995년에는 여성 댄스 팝 가수 니키 프렌치(Nicki French)가 ’Total eclipse of the heart’를 댄스 스타일로 커버해 다시 한번 싱글 차트 2위의 자리에 올려놓음으로써 이 곡이 전천후 명곡임을 재확인시켰다. 1984년, 미 전역을 춤바다의 물결로 침몰시킨 영화 < 푸트루스 >의 사운드트랙에는 강력한 보컬과 드럼 연주가 휘몰아치는 ’Holding out for a hero(34위)’가 수록되어 그녀의 지속적인 인기를 유지시켜 주었고, 1920년대 SF 영화를 복원해 1984년에 재개봉한 < 메트로폴리스 >에 삽입된 ’Here she comes(76위)’ 같은 영화 수록곡들을 취입하면서 비교적 여유 있는 한 해를 보냈다. 1986년에는 < Secret Dreams & Forbidden Fire >로 다시 한번 도약을 시도했지만 3년 전과 같은 센세이셔널한 결과를 재현하는데는 실패했다. 이전의 앨범 < Faster Than The Speed Of Night >처럼 짐 스타인만 식의 장대한 스케일이 반복되었으며 대부분 곡들의 길이도 5분대를 훌쩍 뛰어 넘었기 때문에 싱글로 커트 하기엔 약간 무리가 따랐다. 팝 메탈의 기폭제 역할을 한 본 조비(Bon Jovi)의 ’You give love a bad name’(1986년 11월 1위)과 비슷한 멜로디를 가진 ’If you were a woman (And I was a man)’만이 1986년 77위를 끝으로 추락하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하지만 이 곡은 1990년대 초반에 국내 자동차 광고의 배경 음악으로 쓰인바 있어 우리 귀에 그다지 낯설지 않다. 1970년대 후반 ’It’s a heartache’의 대대적인 인기로 우리나라에서 개최된 국제 가요제에도 참가해 그 특유의 거친 허스키 음색을 직접 들려준 이 금발의 미녀는 천재 아티스트 마이크 올드필드(Mike Oldfield)의 1987년 음반 < Islands >에 게스트 보컬로 초청되어 그녀만의 보컬 전율을 다시 한번 과시하기도 했다. 보니 타일러는 1990년대 후반까지 꾸준하게 신보를 발표했지만 그 작품들은 제대로 조명을 받지 못한 채 금새 잊혀졌다. 하지만 ‘It’s a heartache’와 ‘Total eclipse of the heart’의 메아리는 아직까지 우리의 뇌리에 남아 그녀의 노래들처럼 격정적인 환희와 감동을 전한다.
1983년 후반, 두 백인 여성 가수의 데뷔곡이 2개월의 짧은 간격을 두고 빌보드 싱글 차트에 나란히 등장했다. 본의 아니게 시작부터 라이벌 관계를 형성하게 된 두 여가수의 경합은 1980년대 동안 가장 흥미롭고(본인들에게는 피 말리는 싸움이었겠지만) 긴장감 넘치는 팝의 핫 이슈였다. 두 여인은 1983년 10월에 데뷔 싱글을 차트에 등록시킨 이후 현재까지 20년이 달하도록 사그라지지 않는 창작력을 과시하는, 매... 1983년 후반, 두 백인 여성 가수의 데뷔곡이 2개월의 짧은 간격을 두고 빌보드 싱글 차트에 나란히 등장했다. 본의 아니게 시작부터 라이벌 관계를 형성하게 된 두 여가수의 경합은 1980년대 동안 가장 흥미롭고(본인들에게는 피 말리는 싸움이었겠지만) 긴장감 넘치는 팝의 핫 이슈였다. 두 여인은 1983년 10월에 데뷔 싱글을 차트에 등록시킨 이후 현재까지 20년이 달하도록 사그라지지 않는 창작력을 과시하는, 매브릭 음반사의 CEO 마돈나(Madonna)와 2개월 늦게 인기차트에 합류했지만 고지를 선점하고 나선 끝내 마돈나에게 밀려버린 ‘귀여운 악녀’ 신디 로퍼(Cyndi Lauper)다. 마돈나의 ‘Holiday’와 신디 로퍼의 ‘Girls just want to have fun’은 아직까지 그들을 정의하는 대표 곡으로 남아 있다. 선의의 경쟁이 시작된 지 20여 년이 흐른 현재, 레이스의 최후 승자는 알다시피 마돈나다. 그것도 판정승 아닌 분명한 KO승이다. 그러나 그들이 풋풋했던 데뷔 시절, 둘의 위치는 지금과 정반대였다. 애초 평단에서 마돈나는 ‘아니 벌써’의 반짝 스타로, 신디 로퍼는 ‘장수 만세’의 아티스트로 전망되었다. 평론가들이 신디 로퍼를 높이 산 이유는 페미니즘을 남근의 음악인 록과 포스트 펑크가 어우러진 ‘뉴 웨이브’로 설파했다는 점과, 마돈나처럼 섹시한 외모나 춤으로 판단되지 않기 위해 일부러 약간은 덜 섹시한 이미지를 고집하면서 음악으로 당당하게 자신의 가치를 인정받길 원했기 때문이다. 그녀의 이러한 독립적인 태도는 고등학교 중퇴, 소규모 클럽에서의 노래 시작, 자신이 결성한 밴드 블루 엔젤(Blue Angel)의 상업적인 실패와 파산, 그리고 남자 친구와의 불화 등 온갖 산전수전을 겪으면서 터득한 그녀의 인생관이 배양했다. 30살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의연하게 망가질(?) 수 있는 자신감은 바로 이 굴곡의 삶을 극복한 인간승리의 드라마에서 비롯된 떳떳함이 원천이다. 그녀의 성공을 가져온 많은 요인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시대적인 요구에 정확히 부응했다는 점이다. 소녀적 감성을 읊은 신디의 밝고 통통 튀는 가사는 그 시대 정서의 흐름을 타고 대중들을 심각하고 무거운 주제로 괴롭히지 않았으며, 당대의 뉴 미디어인 MTV의 지원사격을 받은 것이었다. 10대 소녀들을 정신 없으면서도 쾌활하게 묘사한 뮤직비디오 덕분에 데뷔 싱글 ‘Girls just want to have fun’은 차트 2위라는 스매시 히트를 치면서 이 신인 여가수의 시대가 화려하게 개막했음을 알렸다. 이 곡이 수록된 솔로 데뷔 앨범 < She’s So Unusual >에서는 발라드인 ‘Time after time(1위)’과 ‘She bop(3위)’, ‘All through the night(5위)’, 그리고 ‘Money changes everything(27위)’를 포함해 5곡이 빌보드 싱글 차트를 유린하면서 그 무렵 완벽하게 재기에 성공한 티나 터너(Tina Turner)와 함께 1984년 팝 음악계를 가장 화려하게 수놓은 인물이 되었다. 그래미상도 펄펄 난 그녀를 응대해 신인상 트로피를 안겼다. 그 해 마돈나는 그래미상 후보에도 오르지 못한 것을 비교하면 당시 마돈나와 신디 로퍼의 위상이 어땠는지를 알 수 있다. 1985년에는 어린이들을 위한 영화 < 구니스 >의 주제가 ‘The goonies ‘r’ good enough(10위)’로 기세를 유지했지만 이듬해 1986년 가을에는 두 번째 대결인, 이른바 ‘True 경쟁’을 통해 신디는 마침내 마돈나에게 추월을 당했다. 록, 팝, 펑크, 뉴웨이브, 펑크(funk), 레게 등 젊은층에 어필할 수 있는 색조의 음악을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재구성해 큰 성공을 낚은 < She’s So Unusual >에 비해 두 번째 앨범 < True Colors >는 그녀 특유의 톡 쏘는 감각이 많이 희석된 대중적 팝으로 약간 빛깔을 달리했다. 앨범의 타이틀 트랙 ‘True colors’로 두 번째 차트정상의 영광을 안고, ‘Change of heart(3위)’와 ‘What’s going on?(12위)’, ‘Boy blue(71위)’가 연속으로 차트를 밟았지만 기존 팬들은 성인 취향의 팝으로 전향한 신보에 적지 않게 실망했고, 이 LP를 기점으로 그녀는 하향 곡선을 그리기 시작했다. 앨범 판매량도 전작 600만장에서 200만장(현재)으로 격감했다. 반면 경쟁자 마돈나의 < True Blue >는 700만장이나 팔려나갔다. 1989년에 공개된 세 번째 음반 < A Night To Remember >에서는 싱글 ‘I drove all night(6위)’와 ‘My first night without you(62위)’가 차트에 등장하긴 했지만 어느덧 음악적인 매력은 뚝 떨어져있었다. 반면 마돈나는 역작 < Like A Prayer >를 발표해 음악적인 면과 대중적인 면 모두를 포유(包有)하면서 5년간의 라이벌 대결은 마돈나의 완승으로 결판이 났다.(신디 로퍼는 그러나 새 앨범의 홍보 차원으로 내한공연을 가져 국내 팬들에게 시원스런 무대를 선사했고 공연실황이 TV로도 방송되어 열기를 현장에서 맛보지 못한 많은 사람들을 달래주었다). 1993년과 1998년에는 < A Hat Full Of Stars >와 < Sisters Of Avalon >을 발표해 재기를 노렸지만 결과는 참패였다. 1994년에는 < 12 Deadly Cyns And Then Some >이라는 제목의 베스트 음반을 공개해 ‘Girls just want to have fun’을 리믹스한 ‘Hey now(87위)’로 마지막 희미한 불꽃을 태웠다. 이 곡은 또한 1970년대 팝 그룹 레드본(Redbone)의 히트곡 ‘Come and get your love(댄스 팝 그룹 리얼 맥코이가 커버해 1995년 19위)’를 샘플링했으며 1995년 웨슬리 스나입스(Wesley Snipes)와 패트릭 스웨이즈(Patrick Swayze)가 주연한 영화 < 투 웡 푸 >(To Wong Foo)에 삽입되었다. 흑인 싱어송라이터 루더 밴드로스(Luther Vandross)는 신디 로퍼의 노래 실력을 두고 “팝의 디바 휘트니 휴스턴에 견주어도 전혀 뒤지지 않는다”고 밝힌 바 있다. 데뷔 싱글 ‘Girls just want to have fun’과 1960년대 틴 아이돌 팝 가수 진 피트니(Gene Pitney)의 오리지널을 재해석한 ‘I’m gonna be strong’, 그리고 ‘My first night without you’, ‘True colors’ 등은 그녀의 뛰어난 곡 소화력을 가감 없이 보여준다. 하지만 데뷔 초기의 우스꽝스러운 외모와 펑크적인 스타일에 의해 굳어진 ‘왈패’ 이미지로 인해 그녀의 음악적 진가는 과소평가 받기 일쑤였으며, 성인 취향의 팝 록으로 변신하자 많은 팬들은 그녀에게서 등을 돌렸던 것이다. 이제는 많이 잊혀졌지만 신디 로퍼의 이미지는 여전히 많은 팬들의 뇌리에 박혀있다. 깜직한 소녀(계집애?) 목소리, 중고품 할인가게 풍의 패션, 레슬링을 즐기는 여성 그리고 MTV 시대. 하지만 무엇보다 팬들은 그녀를 통해 그 시절에 ‘여자들은 단지 재미를 원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런 의미에서 신디 로퍼야말로 ‘1980년대 팝의 바로미터’라고 할 것이다. 그 시대를 그녀만큼 ‘비범하게’ 산 사람도 없다.
옆모습을 보면 코보다 입이 더 돌출되어 있어 그다지 호감 가는 외모를 갖고 있지 않은 빌리 오션(Billy Ocean)은 그 반대급부인 풍부하고 찰진 중저음의 진한 음색으로 1980년대 중반에 대중적인 인기를 얻은 흑인 남성 가수다. 1950년 1월 21일, 서인도제도에 있는 섬나라 트리니다드에서 레슬리 세바스찬 찰스라는 이름으로 태어난 빌리 오션은 8살 때 영국으로 이민가 낮에는 자동차 공장에서 일하고 밤에는 ... 옆모습을 보면 코보다 입이 더 돌출되어 있어 그다지 호감 가는 외모를 갖고 있지 않은 빌리 오션(Billy Ocean)은 그 반대급부인 풍부하고 찰진 중저음의 진한 음색으로 1980년대 중반에 대중적인 인기를 얻은 흑인 남성 가수다. 1950년 1월 21일, 서인도제도에 있는 섬나라 트리니다드에서 레슬리 세바스찬 찰스라는 이름으로 태어난 빌리 오션은 8살 때 영국으로 이민가 낮에는 자동차 공장에서 일하고 밤에는 작은 클럽에서 노래하며 인지도를 획득해 1975년에는 셀프타이틀 데뷔앨범을 발표했다. 여기서 모타운 풍의 경쾌한 싱글 ‘Love really hurts without you’가 미국 차트 22위와 영국 차트 2위에 오르며 성공적인 상견례를 가졌지만 이건 워밍업에 불과했다. 1970년대 후반에 미국에 정착한 빌리 오션은 1980년에 < City Limit >와 1981년에 < Nights (Feel Like Getting Down) >, 1982년에 < Inner Feelings >까지 3장의 음반을 더 발매했지만 미국에서는 댄스 차트와 흑인음악 차트에서만 두각을 나타냈다. 그리고 1984년에 탄생한 다섯 번째 작품 < Suddenly >는 빌리 오션을 전 세계에 메모리시킨 결정타였다. ‘Caribbean queen’은 마이클 잭슨(Michael Jackson)의 ‘Billie Jean’과 베이스 리듬이 유사해 표절의혹을 받았지만 2주 동안 넘버원을 차지해 지금까지 그의 시그니처 송으로 남아있으며 빌로 오션이 명 프로듀서이자 작곡가인 로버트 존 ‘머트’ 랭(샤니아 트웨인의 전 남편)과 공동으로 작곡한 후속 싱글인 ‘Loverboy’는 2위, 당시 국내 나이트클럽에서 소위 ‘부루스 타임’의 단골이었던 음반타이틀 ‘Suddenly’는 4위, ‘Mystery lady’는 24위에 랭크되어 한 앨범에서 4곡이나 40위권 내에 오르는 대박 히트를 기록했다. 특히 ‘Caribbean queen’으로 빌리 오션은 그해 그래미에서 최우수 리듬 앤 블루스 남성 가수상을 수상했다. 앨범 < Suddenly >의 성공은 1985년까지 이어졌고 1986년에는 그 여세를 몰아 6집 < Love Zone >을 공개했다. 여기서도 히트 싱글이 쏟아졌는데 캐서린 터너와 마이클 더글라스가 주연한 영화 < 나일강의 보석 >에 삽입된 흥겨운 ‘When the going gets tough, the tough gets going’이 2위를 차지했고 고품격 리듬 앤 블루스 ‘There'll be sad songs’가 그의 두 번째 넘버원이 되었다. 그리고 ‘Love zone’이 10위, ‘Love is forever’는 16위에 올라 모두 4곡이 밀리언셀러를 기록했다. 2년 후인 1988년에 발표한 앨범 < Tear Down These Walls >에서도 다시 한번 1위곡을 배출하는데 국내에서도 큰 인기를 얻은 댄스곡 ‘Get outta my dreams, get in to my car’이다. ‘Loverboy’와 ‘When the going gets tough, the tough gets going’에 이어 로버트 존 ‘머트’ 랭과 합작한 이 노래 외에도 발라드 ‘Colour of love’와 ‘Licence to chill’이 각각 17위와 32위를 차지하며 3연타석 홈런을 쳤다. 또한 이 음반에는 ‘Because of you’라는 곡이 있는데 나중에 푸른하늘이 1990년에 발표한 ‘이 밤이 지나도록’에서 이 노래를 표절해 우리나라에서 조용히 화제가 되었다.
노래 : Buster Poindexter (David Johansen) (버스터 포인 덱스터 (데이비드 로저 요한센))
가수, 영화배우 가수, 영화배우
1994년 샌프란시스코(San Francisco)에서 결성된 트레인(Train)은 1990년대 초반 블랙 크로우즈(Black Crowes)로부터 발흥된 복고 성향의 아메리칸 하드록을 구사하는 그룹이다. 미국의 전통 음악인 컨트리(country)와 포크(folk)를 기저로 강력한 하드록 사운드를 덧입혔던 이 흐름의 최선봉에 위치한 밴드로 평가받고 있다. 트레인은 패트릭 모나한(Patrick Monahan, 보컬, ... 1994년 샌프란시스코(San Francisco)에서 결성된 트레인(Train)은 1990년대 초반 블랙 크로우즈(Black Crowes)로부터 발흥된 복고 성향의 아메리칸 하드록을 구사하는 그룹이다. 미국의 전통 음악인 컨트리(country)와 포크(folk)를 기저로 강력한 하드록 사운드를 덧입혔던 이 흐름의 최선봉에 위치한 밴드로 평가받고 있다. 트레인은 패트릭 모나한(Patrick Monahan, 보컬, 퍼커션), 롭 호치키스(Rob Hotchkiss, 기타, 보컬), 지미 스태포드(Jimmy Stafford, 기타), 찰리 콜린(Charlie Colin, 베이스), 스콧 언더우드(Scott Underwood, 드럼)의 5인조로 구성되었다. 결성 직후, 다섯은 꾸준한 라이브 공연을 지속하며 팬층을 확보하였고, 이것은 마이너 레이블인 < Aware >와 컨택트되는 동력이 되었다. 그리하여 등장한 데뷔작 < Train >은 진득한 미국 전통 록 사운드를 가감 없이 펼쳐 보임으로서 인상적인 신고식을 치러냈다. 1997년부터 밴드는 블루스 트래블러(Blues Traveler), 카운팅 크로우즈(Counting Crows)등의 오프닝을 맡으며 제 2의 도약의 기회를 모색했다. 메이저 음반사들로부터 구애의 손길이 뻗친 때가 바로 이즈음이었다. 멤버들은 컬럼비아(Columbia)와 손잡은 뒤, 1집을 재발매하며 본격적인 음악 활동의 시작점을 찍었다. ’Meet Virginia’가 당시 라디오 전파를 수시로 타며 많은 사랑을 받았다. 4년 뒤, 두 번째 음반 < Drops of Jupiter >(2001)를 발표한 트레인은 그래미상 3개 부문의 후보에 오르는 등의(비록 수상하지는 못했지만) 절정기를 맞이하였다. 앨범은 현재까지 200만장 이상이 팔리는 대성공을 거두었다.
노래 : David Bowie (데이비드 보위)
무차별 변신으로 일관해온 록의 순례자 1947년 영국 런던의 브릭스턴 태생인 데이비드 보위는 애청곡이 많은 뮤지션은 아니다. 이름도 꽤 알려졌고 차트 활동도 부진한 편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정감에 맞는 음악을 하지 않았던 탓인지 인기곡 하나 남겨 놓지 못했다. 그러나 영미 록 역사에서, 특히 1970년대를 논할 때, 빠질 수 없는 인물로 기록된다. 이른바 ‘살아 있는 전설’이다. 그는 1969년 미국에서... 무차별 변신으로 일관해온 록의 순례자 1947년 영국 런던의 브릭스턴 태생인 데이비드 보위는 애청곡이 많은 뮤지션은 아니다. 이름도 꽤 알려졌고 차트 활동도 부진한 편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정감에 맞는 음악을 하지 않았던 탓인지 인기곡 하나 남겨 놓지 못했다. 그러나 영미 록 역사에서, 특히 1970년대를 논할 때, 빠질 수 없는 인물로 기록된다. 이른바 ‘살아 있는 전설’이다. 그는 1969년 미국에서 아폴로 11호가 사상 최초로 달에 착륙했을 때에 맞춰 공상 과학(SF)의 환상을 실은 ‘우주의 괴짜(Space oddity)’를 발표해 주목을 받았다. 그리고는 불세출의 걸작 앨범 < 지기 스타더스트와 화성에서 온 거미들의 흥망(The Rise And Fall Of Ziggy Stardust And Spiders From Mars) >을 통해 남녀 일체의 파격을 선보이며 진보적인 록 뮤지션으로 떠올랐다. 그는 스스로 동성이자 초월자인 ‘지기’로 분해 무대의 시각적 충격을 강조했으며 현상을 거부하는 반란을 일상화했다. 흔히 ‘자극의 시대’로 일컬어지는 1970년대와 맞물린 이러한 퍼스낼리티 설정은 즉각 록의 새로운 규범으로 확립되었다. 그것이 ‘글램 록’ 또는 ‘글리터 록’이란 것이었다. 그는 가수가 노래하는 사람, 무대가 노래하는 장소라는 등식과 관념을 넘어섰다. 화려하고 원색적인 화장에 반짝거리는 의상을 하고 나와 무대에서 노래할 뿐만 아니라 ‘연기’를 했다. 그것은 자극적인 퍼포먼스였다. 그는 1972년 “지금 충격을 줄 수 있는 유일한 것은 극단으로 가는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는 팬들이 지기의 이미지를 오용하여 반사회적인 폭력을 일삼게 되자 곧바로 지기의 탈을 벗어버렸다. 이 시점부터 그는 어느 것 하나에 정착하는 법이 없었다. ‘다이아몬드의 개(Diamond dogs)’로 예언자가 되는 듯 하더니 ‘로우(Low)’에서는 은둔자로 변신했으며 나중에는 ‘야윈 백인공작(Thin white duke)’으로 탈바꿈했다. 음악도 이곳 저곳을 넘나들었다. 하드한 기타록을 하다가 소울 음악을 시도하기도 했으며 전자 음악도 했고 심지어 디스코 댄스 음악 세계에 빠지기도 했다. 긍정적으로 볼 때 그는 새로운 것에 과감히 가슴을 열어 끊임없는 혁신을 이룩한 음악인이었다. 데카당적인 틀은 유지했지만 그 속에서는 종잡을 수 없는 ‘예술적 보헤미안’임을 의도적으로 나타냈다. 하지만 ‘한 우물 파기’에 의미를 두는 사람들은 그를 ‘뿌리 없는 실험 병자’로 ‘음악적 곡예사’로 배격했다. 그가 펼쳐 놓은 무수한 장르의 파편들과 끝없는 변신의 행적을 보면 카멜레온이요, 기회주의자였음은 누구도 부인하기 어렵다. 과연 이같은 무차별 변신을 두둔해야 하는가. 그러나 록계에서는 그의 음악이 언제나 예측 불허였으며 누구도 흉내낼 수 없을 만큼 독창적이라는 점을 높게 평가한다. 30년간 록계에 몸담으면서 오로지 실험 정신으로 일관해 온 순례자로 떠받드는 것이다. 그는 1993년 AP통신과의 회견에서 자신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난 내가 한 것을 동료들과 비교할 때 나를 모험적인 작가로 생각한다. 난 한 곳에 머무는 것이 체질적으로 싫다. 그래서 악평이 나오기도 한다... 난 스튜디오에 들어가 머릿속에 담은 구체화된 아이디어가 내 자신을 놀라게 하는지를 본다. 밖에서 누군가 그것을 좋아할 사람이 있을 테지만 그러나 나는 기본적으로 나 자신을 위해 곡을 쓴다.” 그의 곡예는 대중의 기호를 쫓은 상술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예술성을 자극하는 것, 바로 그 점에 봉사했다. 즉 ‘예술적 동기’로 자신의 음악 세계를 형상화해 온 셈이다. 이처럼 록예술에 집착한, 그리고 진보적인 뮤지션의 음악은 대중의 폭넓은 사랑과는 대부분 무관하다. 음악적으로 볼 때도 곡조나 편곡에 있어서 일반적인 패턴을 따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그는 빌보드 차트 1위곡을 두 곡이나 보유하고 있다. 예술의 개가로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사실은 그가 때로 ‘대중적인 접근’을 시도하기도 했다는 반증이다. 때문에 1위곡들인 ‘명성(Fame)’이나 ‘춤을 춥시다(Let’s dance)’는 그다지 호평을 받는 편이 아니다. 특히 디스코 리듬에 전자 댄스 음악적 요소가 전면화된 ‘춤을 춥시다’는 노골적으로 상업성을 겨냥, 보위의 골수 팬들을 실망시켰다. 1977년 < 로우 >앨범 발표 당시 “되도록 이 앨범이 팔리지 않기를 바란다”는 요지의 말을 했던 그를 전제할 때 그것은 명백한 일탈이었다. 그는 ‘춤을 춥시다’의 성공이 너무 거대했던지 이후 그 그림자에 가려 주류에서 급격히 멀어졌다. 줄기차게 앨범을 내놓았지만 상업적 성과도 내리막길을 달렸고 평자들의 호의도 식었다. 세월이 많이 흐른 뒤 그 자신도 그때의 성공을 부끄러워했다. 그는 1995년 < 뉴욕 타임스 >지에 “‘춤을 춥시다’로 빅히트를 한 것은 최악의 상황이었다. 난 대중적인 인기를 누른 적이 없었는데 갑자기 내가 풍선껌 포장지와 같은 처지에 서게 된 느낌이었다.” 라고 술회했다(가끔 목격할 수 있는 일이지만 서구 록스타들은 반성도 참 잘한다!). 그는 이때 2년만에 이색적인 앨범 < 아웃사이드(Outside) >와 함께 컴백했다. 이색적이라고 표현한 것은 한편의 심리적인 추리소설을 사운드트랙화 했기 때문이다. ‘나단 애들러의 일기’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이 앨범은 기괴한 10대 소년의 살인 사건을 수사하는 사립 탐정과 그 주변 용의자들에 관해 노래하고 있다. 이 ‘예술적 추리 사건’의 진상은 1999년 발매될 마지막 앨범에서 규명된다고 한다. 그러니까 이번 < 아웃사이드 >앨범은 시리즈의 첫편인 셈이다. 데이비드 보위는 이 앨범을 제작하기 위해 한 때 명콤비였던 걸출한 프로듀서 브라이언 이노(Brian Eno)와 다시 손을 잡았다. 그것은 1980년대의 부끄러운 상업적 성공을 기억에서 지우려는 몸부림처럼 보인다. ‘비상업적’인 과거의 면모를 회복하기 위한 의지의 산물이라고나 할까? 즉흥성이 중시된 연주나 몽환적 부유(浮遊)의 분위기가 그것을 설명해 준다. 마치 ‘안 팔려도 그만’이라는 당당함이 배어 있는 음반이다. 그는 인기의 억압으로부터 탈출하려는 자세를 되찾음으로써 ‘영원한 로커’임을 재확인시키고 있다. 록이란 게 원래 그런 음악이다.
노래 : Willie Nelson (윌리 넬슨,Willie Hugh Nelson)
컨트리, 락 기타 연주자, 싱어송 라이터 컨트리, 락 기타 연주자, 싱어송 라이터
1970년대 복고적인 ‘미국의 소리’ ‘32세의 그는 미국의 가장 대중적인 가수’라고 < 뉴스 위크 >지가 1976년 공언한 대로 존 덴버는 전성기 시절 내내 ‘미국의 목소리’(The voice of America)로 통했다. 그의 청량제 같은 노래들과 수더분한 ‘촌놈’ 외모는 곧 1970년대 중반의 ‘미국 그 자체’였다. 그 무렵 미국은 존 덴버와 같은 존재를 필요로 했다. 1974년과 1975년 미국인들은 워... 1970년대 복고적인 ‘미국의 소리’ ‘32세의 그는 미국의 가장 대중적인 가수’라고 < 뉴스 위크 >지가 1976년 공언한 대로 존 덴버는 전성기 시절 내내 ‘미국의 목소리’(The voice of America)로 통했다. 그의 청량제 같은 노래들과 수더분한 ‘촌놈’ 외모는 곧 1970년대 중반의 ‘미국 그 자체’였다. 그 무렵 미국은 존 덴버와 같은 존재를 필요로 했다. 1974년과 1975년 미국인들은 워터게이트와 월남전 패색이라는 최대의 국가적 위기를 맞고 있었다. 워싱턴 정가는 갈피를 못 잡고 휘청거렸고 국론은 ‘고도의 민주주의 나라’라는 위상을 무색케 할만큼 완전 분열되었다. 미국인들은 허탈했고 피곤했으며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누군가가 나서서 정체성의 위기에 시달리고 있는 그들에게 ‘건강한 미국’을 얘기해 주고 공허한 그들의 마음을 위무해 주어야 했다. 그가 가수라면 좋았고 나아가 ‘쉽고 깨끗한’ 노래를 들려준다면 더 좋았다. 거기에 존 덴버는 딱 알맞은 구세주와 같은 인물이었다. 명반 < 궤적의 피(Blood On The Tracks) >를 내놓은 밥 딜런이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실의에 빠진 미국인들을 달래 주기란 힘들었다. 그는 이름만 들어도 격동의 1960년대가 떠오르는, 골치 아픈 존재였다. 그러나 존 덴버는 편했다. 그에게 근심거리란 없어 보였고, 다시 세상은 살 만한 곳인 듯 했다. 그 자신도 1970년대 중반의 상황이 자신을 수면 위로 부상 시켜준 원천임을 알았다. 그는 < 세븐틴 >지와의 인터뷰에서 “사람들이여, 내가 세상이 왜 행복한 곳인가를 노래할 때 내게 그대의 귀를 주오”라고 말했다. “난 미국에 대해, 가족에 대해, 삶의 축복에 대해 노래한다. 난 내가 알고 있는 것에 대해 노래부른다.” 당시 미국인들은 그의 노래 제목만 들어도 즐거워했다. ‘내 어깨 위의 햇살이 나를 행복하게해(Sunshine on my shoulder)’ ‘나를 고향으로, 시골길로 보내주오(Take me home, country roads)’ ‘나의 달콤한 여인(My sweet lady)’ ‘내가 촌놈인 것을 신께 감사드려요(Thank god I’m a country boy)’ 등.. 참으로 낙천적이고 전원적이며 명랑했다. 이 곡들은 모두 싱글 차트에서 1, 2위를 기록했다. ‘차라리 카우보이가 되고 싶다(I’d rather be a cowboy)’고 하고 ‘집에 다시 돌아온(Back home again)’ 것을 찬양하고 산과 바다, 시골이 무대인 그의 노래가 거부감을 줄 리 없었다. 그는 실제로 산을 사랑한 컨트리 보이였다. 공군 조종사의 아들로(1943년생) 존 헨리 듀센도르프가 본명인 그는 로스앤젤레스에 가서 산이 많은 도시 덴버의 이름을 따 개명했다. 또 유랑과 속세의 삶을 살다가 27세에 로키산에 올라가 새로운 인생을 발견한 사람이었다. 그는 아무리 바빠도 매년 시간을 내 콜로라도의 전원에 있는 아스펜 집에 묵곤 했다. 그는 ‘콜로라도의 정신’이었다. 주지사 존 밴더후프는 그에게 ‘콜로라도의 계관 시인’이란 칭호를 부여했다. 그는 1970년대 중반 닉슨과 포드 대통령 교체 이후 미국 사회에 자리 잡은 전통적이고 복고적인 가치를 대변했다. 해맑은 컨트리 음악을 들고 나온 그가 환영받은 것은 당시의 보수 바람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그가 미국인이었고 미국의 정서를 견인한 주역이었기에 1974년과 1975년에 그의 인기는 경쟁자인 영국 로커 엘튼 존을 추월했다. 팝적인 컨트리 록은 강렬한 하드 록과 복잡한 프로그레시브 록이 대세였다. 그러나 워터게이트와 월남전 패망으로 시끄럽고 혼잡스런 사람들에게 이러한 음악들은 귀에 들려 오지 않았다. 존 덴버는 정반대의 ‘컨트리 팝’으로 록의 퇴각을 강제했다. 록 진영은 갑작스런 그의 인기 행진에 놀랐다. 록 비평가들이 볼 때 덴버 노래의 낙천적 분위기는 건강한 정서의 반영이 아니라 단순한 ‘도피적 심리’에 불과했다. 혼탁한 세상을 잊고 편하게 살자는 심산이 아니냐는 것이었다. 그를 악평하는 사람들은 때문에 그를 ‘팝음악의 극단적 낙천주의자’라고 일컫는가 하면 ‘록의 미키 마우스’라고 내리깔곤 했다. 그러나 이러한 그의 노래가 대중들을 사로잡은 ‘어처구니없는’ 실상에 록 언론의 주도층은 궁지에 빠진 것이 사실이었다. 1974년 여름 전미 차트 정상에 오른 ‘애니의 노래(Annie’s song)’만 해도 그렇다. 삶의 축복을 노래하는 그의 지향을 축약한 이 노래는 이후 수년간 결혼식 때 축가로 가장 많이 연주되었다. 이 곡은 영국 차트에서도 1위를 차지했으며 4년 뒤에는 아일랜드 플루트 주자 제임스 골웨이(James Galway)가 연주곡으로 리메이크해 3위에 랭크 시켰다. 널리 알려졌다시피 이 곡은 그가 캠퍼스 커플로 1967년 결혼한 아내 앤 마텔(Ann Martell)을 위해 쓴 곡이었다. 스키 리프트에서 10분만에 썼다는 이 곡은 노랫말 가운데 애니(앤의 애칭)라는 말을 집어넣지 않은 것이 오히려 이 노래가 애송되는 이점으로 작용했다. 이 곡은 < 피플 >지로부터 그가 쓴 가장 훌륭한 러브 발라드라는 평판을 얻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1980년대 들어서 존 덴버는 이 축복의 찬가를 부를 수 없게 되었다. 영원할 것만 같던 아내 앤 마텔과의 관계가 삐꺽거리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두 사람의 관계는 1979년에 이미 궤도를 이탈했다. 잉꼬나 다름없던 둘은 덴버의 엄청난 성공에 불안과 위기를 느낀 앤이 남편과 ‘의사 소통이 중단됨을 느끼면서’ 악화되었다. 이혼 수속을 밟은 두 사람은 마침내 1983년 갈라서고 말았다. 존은 이 무렵을 이렇게 회고한다. “애니와의 이혼은 내 생애 가장 뼈아픈 순간 중의 하나였다. 우리는 16년간 부부였다. 결혼 15주년 기념일에 우리는 조용히 앉아 ‘우리 잘 안되고 있어’라고 얘기했다. 난 그녀에게 ‘당신이 내게 원하는 것을 난 당신에게 줄 수가 없어. 그러니 다른데 눈을 돌리는게 나을 거야’라고 말했다” 이혼을 맞아 그는 자신의 미래에 대해서도 슬쩍 입장을 내비쳤다. “난 다시 사랑에 빠지고 싶지만 그렇게 될 거라고 확신하지 않는다. 난 너무도 바빠 한 여인을 내 인생에서 가질 수 없다. 내 마음속의 마지막 일은 관계를 지속할 여인을 찾는 것이다. 그러니 하여튼 그리 쉽지 않을 것 같다. 여성에 대해 정말 배워야 할 것이 많다” 당시 언론은 잉꼬 부부였던 존과 애니의 이혼에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한결같이 ‘아니 존 덴버가 이혼이라니...’라는 반응이었다. 아마도 그가 ‘애니의 노래’만 부르지 않았어도 충격은 훨씬 덜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충격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더욱 커다란 쇼크가 대기하고 있었다. 그는 1988년 8월 ‘너무 바빠서 여자를 사귈 수 없다’는 말과 달리 호주 출신의 늘씬한 가수 겸 배우인 카산드라 델라니(Cassandra Delaney)와 재혼해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당시 28살인 델라니는 45세였던 존 덴버보다 무려 17살 연하였다. 그는 지난 1990년 한국을 찾아 힐튼호텔에서 공연을 가진 바 있다. 콘서트에 앞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그는 “‘애니의 노래’의 주인공인 애니와 왜 헤어지게 됐는가”라는 한 기자의 질문에 당혹스런 표정을 지으며 “사람은 좋아질 때도 싫어질 때도 있다”고 말끝을 흐렸다. 휴식도 없이 내리 10곡 이상을 부르는 등 환상적인 호흡과 성량을 자랑한 이 내한 무대에서 그는 끝내 최고의 레퍼토리인 ‘애니의 노래’는 부르지 않았다. 하지만 두 번째 아내인 델라니와의 부부 생활도 순탄하진 못했다. 4년간의 짧은 인연을 끝내고 두 사람은 1992년 이혼 법정에 들어서야 했다. 이 과정에서 불미스런 일이 발생, 그는 다시 언론의 도마 위에 올랐다. ‘환경운동가’ 또 ‘마음씨 좋은 컨트리 보이’라는 명성에 어울리지 않게 그가 음주 운전 사고를 일으켜 구속된 것이었다. 1993년 8월의 일이었다. 그는 델라니와 이혼을 확정짓고 난 뒤 축하하는 뜻에서(아니 이런!) 과음하게 됐다고 진술했다. 50만 달러의 벌금과 자선 콘서트를 개최하라는 징계를 받고 풀려나긴 했지만 이 사건은 그의 이미지에 단단히 먹칠을 했다. 일이 안되다 보니 그가 1976년에 설립한 윈드스타 파운데이션(Windstar Foundation)도 갈수록 재정이 악화돼 규모와 인원을 줄이는 조치를 취해야만 했다. 그러나 존의 고행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그는 음주 운전 사건 1년 뒤인 1994년 8월 21일 자정, 다시 만취상태에서 1963년형 포르셰가 가로수를 들이받는 사고를 일으켰다. 이날 사고도 델라니와 이혼 별거 수당을 협의하는 과정에서 ‘뜻대로 잘 안 풀려’ 그만 홧김에 음주한 것 때문이었다. 존 덴버는 ‘캐시(카산드라)가 나의 인생을 지옥으로 만들었다’고 불평했다. 음주 운전 사고 재범으로 그는 유죄판결이 날 경우 2년 간 옥살이를 하게 될 위기에 몰렸지만 명성에 힘입어 다행히 그 같은 화는 면했다. 하지만 이는 ‘만능 연예인’으로서의 그의 제기를 불능으로 만드는 치명타 역할을 했다. 환경 운동에 나서고 기아 문제와 복지 부문, 그리고 반전 활동에 아낌없이 자신을 바쳤던, 모든 찬란한 순간이 빛을 잃어 가는 순간이었다. 1976년 이후 그가 인기 차트 톱 10에 랭크시킨 곡은 없었다. 1982년 플라시도 도밍고와 ‘아마도 사랑은(Perhaps love)’을 함께 부르며 건재를 과시했지만 주류에서는 이미 떨어져 있었다. 그는 1984년 < 로스앤젤레스 타임스 >지의 테니스 헌트와의 인터뷰에서 “난 노력을 계속할 것이다. 난 요즘 젊은이들이 살 레코드를 만들 수 있다”고 장담했다. 그러나 그의 신념은 실현되지 않았다. 그의 가수로서의 시대는 소실점을 향했고 4년 연속 그래미상 시상식 사회를 본 엔터테이너로서의 시대도 거의 마침표를 찍었다. 그는 1970년대 중반 미국 상황이 불러낸 가수일 뿐이었다. 사회기류가 바뀌면서 그에 대한 ‘효용가치’는 뚝 떨어졌다. 그가 가수보다 ‘예능인’에 비중을 둔 것도 외부 환경 변화에 따른 적응의 방편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는 우리나라에서도 엄청난 인기를 누렸다. 위에 나열한 곡 외에도 ‘오늘(Today)’ ‘정크(Junk)’를 비롯해 무수한 곡들이 라디오 전파를 탔다. 그러나 그의 노래가 지금은 나오지 않는다. 아마도 그는 우리의 1970년대 팝송 청취가 압도적으로 ‘백인 팝(White Pop)’에 젖어 있음을 상징하는 인물일 것이다. 그는 언젠가 ‘내가 낙천적인 이유는 내가 할 때마다 모든 것이 새롭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제 전혀 그럴 것 같지 않다.
노래 : Van Morrison (밴 모리슨,George Ivan Morrison)
30년 이상의 장구한 세월에 걸쳐 거의 매년 앨범을 발표하는 밴 모리슨(Van Morrison)은 상업성에 구애받지 않고 외로운 음악항해를 펼치며 독보적 음악 소우주를 구축한 록 음악계의 거장이다. 비록 인기차트를 주름잡은 바 없었지만 ‘아일랜드 음악의 대부’라는 명성과 함께 모든 아일랜드 출신 음악인들의 정신적 지주로 떠받들어지며 밥 딜런, 브루스 스프링스틴, 엘비스 코스텔로 등 당대와 후대를 막론한 무수한 아... 30년 이상의 장구한 세월에 걸쳐 거의 매년 앨범을 발표하는 밴 모리슨(Van Morrison)은 상업성에 구애받지 않고 외로운 음악항해를 펼치며 독보적 음악 소우주를 구축한 록 음악계의 거장이다. 비록 인기차트를 주름잡은 바 없었지만 ‘아일랜드 음악의 대부’라는 명성과 함께 모든 아일랜드 출신 음악인들의 정신적 지주로 떠받들어지며 밥 딜런, 브루스 스프링스틴, 엘비스 코스텔로 등 당대와 후대를 막론한 무수한 아티스트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헌정앨범이 드물던 시절인 1992년에 누구보다 먼저 트리뷰트 앨범이 바쳐질 정도였다. 도어스의 짐 모리슨(Jim Morrison)도 밴의 무대행위를 모방한 것은 물론, 그의 명곡 ‘Gloria’를 라이브 레퍼토리로 채택했으며 ‘Have I told you lately’(로드 스튜어트) ‘Wild night’(존 멜렌캠프와 미셀 엔드제오첼로) ‘Jackie Wilson said’(덱시스 미드나이트 러너스) ‘Carrying a torch’(톰 존스) ‘Crazy love’(브라이언 맥나이트, 애론 네빌) 등 많은 곡들이 리메이크 히트된 것도 그의 드높은 음악성을 방증한다. 1945년 북아일랜드의 벨파스트에서 조지 이반 모리슨(George Ivan Morrison)이란 이름으로 태어난 그는 재즈, 블루스 음반 수집가였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어린 시절부터 많은 음악을 접한다. 10대의 나이에 그룹 활동을 시작한 그는 1963년 자신이 주도한 브리티스 인베이전시기의 주요 그룹 가운데 하나인 뎀(Them)에서 보컬, 색소폰, 하모니카를 맡으며 홀연히 비상한다. 뎀은 아일랜드 출신으로는 이색적으로 미국음악인 R&B와 블루스를 연주하며 1965년 ‘Baby please don’t go’와 ‘Here comes the night’을 히트차트에 올려놓으며 명성을 얻는다. 1967년 밴 모리슨은 밴드를 떠나 솔로 활동을 시작한다. 밴드 활동을 통해 지명도를 확보한 그는 솔로앨범 < Blowin’ Your Mind >에서 ‘Brown eyed girl’(영화 < 적과의 동침 >에 삽입되어 국내 팬들에게도 친숙한 곡이다)을 전미차트 10위에 올리며 성공적으로 데뷔한다. 이듬해 미국의 ‘워너브라더스’와 계약을 체결하고 꿈꾸어왔던 미국 시장에 진출하며 기념비적인 앨범 < Astral Weeks >를 발표한다. 1968년 발표된 이 앨범은 현재까지 세계적으로 30만장이 채 팔리지 않은 형편없는 실적을 거두었지만 지금도 록 역사에서 빠지지 않는 명반으로 찬란한 빛을 발하고있다. < Astral Weeks >는 60년대 후반의 히피즘 속에서 내면 탐구에 몰두했으며 이데올로기의 난립 속에서 예술 그 자체에 주목한 탁이(卓異)한 앨범으로 유명한 재즈 세션 맨들과의 연주로 이틀만에 완성되었다. 자신의 감정을 녹음실에서 혼자 소화해 낸 그의 녹음 과정과 앨범에 담긴 모습은 록음악에서 표현된 최초의 ‘의식의 흐름’(Stream of consciousness)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대중에게 외면당한 전작과 달리 1970년에 발표된 < Moondance >는 싱글 ‘Come running’과 ‘Into the mystic’, ‘Moondance’, ‘Crazy love’가 애청되면서 그에게 상업적 성공을 안겨주었다. 재즈, 블루스, 소울, R&B, 클래식 등 다양한 스타일을 록의 테두리 안에서 소화해내는 그의 탁월한 음악적 시도는 이후 30년 넘도록 줄기차게 이어진다. 1970년 < His Band And The Street Choir >, 1971년 < Tupelo Honey >, 1972년 < St. Dominic’s Preview >를 연이어 발표했고, 이 가운데 < St. Dominic’s Preview >는 다양한 보컬, 악기의 시도가 담겨 있는 이해하기 어려운 예술적 극치를 선보인 역작으로 평가받는다. 73년 발표된 < Hard Nose The Highway >는 포크송과 세사미 스트리트(Sesame Street) 음악을 수록하는 색다른 면모를 보여주었지만 일관성이 결여되었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이후 잠시 공백기에도 라이브 활동과 더욱 다양한 예술적 탐미를 통해 음악세계를 견고히 한 그는 1977년 < A Period Of Transition >, 1978년 < Wavelength >, 1979년 < Into The Music >(국내 최초로 라이센스 앨범이 나왔다), 1980년 < Common One >을 잇따라 발표하며 건재함을 과시한다. < Common One >에 수록된 곡 ‘Somewhere in England’에선 영국의 대표적 낭만주의 시인들인 워즈워드, 코울리지를 언급하며 자연을 통해 얻을 수 있는 내적 탐닉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1980년대에도 고삐를 늦추지 않고 < Beautiful Vision >(1982년) < Inarticulate Speech Of Heart >(1983년) < A Sense Of Wonder >(1984년) < No Guru, No Method, No Teacher >(1986년) < Poetic Champions Compose >(1987년)을 발표했다. 1988년에는 아일랜드의 민속그룹 치프턴스(Chieftains)와 함께 < Irish Heartbeat >를 발표, 자신의 뿌리인 아일랜드의 켈트족에게 그 관심을 돌린다. 이즈음 영국으로 돌아가 1989년 < Avalon Sunset >을 발표, 싱글 ‘Whenever god shines his light on me’로 영국차트 20위권에 처음으로 진입한다. 그 수많은 앨범들과 오랜 음악생활 속에서 영국 차트 첫 20위권 진출 또한 믿기 힘든 사실이었다. 이 앨범에 로드 스튜어트(Rod Stewart)가 언플러그드로 커버하여 국내 팬들에게도 친숙한 곡 ‘Have I told you lately’가 수록되어 있다. 1990년대에도 왕성한 활동을 전개해 1990년 < Enlightenment >, 1991년 < Hymns To The Silence >, 1993년 < Too Long In Exile >를 연속 발표한다. 늘 그랬듯 뚜렷한 히트 싱글 하나 없었지만 1994년 브릿 어워드(Brit Award)에서 공로상이란 예우를 받는다. 1995년 이후 베스트 음반과 쟁쟁한 후배 아티스트들의 헌정앨범이 이어졌으며 50살이 넘은 나이에도 매년 꾸준하게 정규 앨범을 발표하고 있다. 1998년 미발표곡 모음집인 < The Philosopher’s Stone >에 이어 이듬해엔 신작 < Back On Top >으로 골드를 기록했고, 2000년에도 제리 리 루이스(Jerry Lee Lewis)의 형제인 린다 게일 루이스(Linda Gail Lewis)와의 듀엣 앨범 < You Win Again >으로 다시금 그의 음악에 대한 탈속(脫俗)적 열정과 천착을 알렸다.
노래 : Boz Scaggs (보즈 스칵스)
보즈 스캑스(Boz Scaggs)는 1970년대에 빌리 조엘(Billy Joel)과 함께 쓸쓸하고 고독한 도시의 삶을 음악으로 표현한 소위 ‘시티 뮤직’이란 스타일을 정의한 남성 송라이터로 국내에선 리타 쿨리지(Rita Coolidge)의 리메이크 버전으로 유명한 ‘We’re all alone’의 오리지널 가수다. 그의 음악은 고가의 양복을 입은 남성이 벽난로가 있는 고층 아파트에서 와인을 마시며 화려한 야경을 ... 보즈 스캑스(Boz Scaggs)는 1970년대에 빌리 조엘(Billy Joel)과 함께 쓸쓸하고 고독한 도시의 삶을 음악으로 표현한 소위 ‘시티 뮤직’이란 스타일을 정의한 남성 송라이터로 국내에선 리타 쿨리지(Rita Coolidge)의 리메이크 버전으로 유명한 ‘We’re all alone’의 오리지널 가수다. 그의 음악은 고가의 양복을 입은 남성이 벽난로가 있는 고층 아파트에서 와인을 마시며 화려한 야경을 감상하듯 세련되고 멋지지만 그 속에는 그런 인생을 영위하기 위해 포기해야만 했던 가치를 잃고 외로움에 지친 우리들의 삶을 노래한다. 그래서 더 사무치는 감정의 과잉이 느껴진다. 1944년 6월 8일 오하이오 주에서 윌리암 조이스 스캑스(William Joyce Scaggs)로 태어난 보즈 스캑스는 텍사스 주, 댈러스에서 청소년 시절을 보냈는데 바로 여기서 스티브 밀러(Steve Miller)를 만난다. 음악으로 통한 그는 스티브 밀러와 함께 마스크맨(Maskmen)이란 블루스 스타일의 음악을 추구하는 그룹에서 기타리스트 겸 보컬리스트로 활동하다가 1960년대 후반부터 본격적인 개인 활동에 전념하기 시작했다. 이전까지 다섯 장의 음반이 실패해 오랫동안 마음을 졸인 보즈 스캑스는 토토(Toto)를 결성하게 되는 초일류 세션맨들이 참여한 여섯 번째 솔로앨범 < Silk Degrees >로 드디어 금광을 캤다. 38위까지 오른 첫 싱글 ‘It’s over’를 비롯해 ‘What can I say(42위)’, ‘Lido shuffle(11위)’ 그리고 그의 이름을 한 단계 격상시킨 디스코 명곡 ‘Lowdown’까지 모두 네 곡이 인기 차트에 입성해 대중들과의 접촉에 성공했다. 몇 년 후에 토토의 드러머가 될 제프 포카로(Jeff Porcaro)의 연주와 건반의 데이비드 페이치와 보즈 스캑스가 공동으로 작곡한 ‘Lowdown(3위)’은 그래미에서 최우수 리듬 앤 블루스 노래로 선정되어 그 진가를 인정받았다. 특히 이 음반에는 지금까지 국내에서 꾸준히 애청되는 ‘We’re all alone’이 수록되어 있지만 싱글로 발표하지 않았다가 여가수 리타 쿨리지(Rita Coolidge)가 리메이크해서 싱글 차트 7위를 차지하는 히트를 기록했다. 인지도가 상승한 보즈 스캑스는 ‘Ghostbusters’로 유명한 흑인 기타리스트 겸 싱어 송라이터인 레이 파커 주니어(Ray Parker Jr.)가 참여한 흥겨운 넘버 ‘Jojo(17위)’와 존 트라볼타와 데보라 윙어가 주연한 영화 < 어반 카우보이 >에 삽입된 발라드 ‘Look what you’ve done to me(14위)’ 그리고 ‘Miss sun(14위)’ 같은 노래들로 1980년대 초반까지 그 인기 곡선을 탔지만 1980년대 후반까지는 자신의 나이트클럽 사업 때문에 음악활동을 접었다. 8년만인 1988년에 정규앨범 < Other Roads >를 발표해 발라드 싱글 ‘Heart of mine(35위)’을 차트에 올린 후 지금까지 아무런 히트 곡을 생산하지 못하고 있지만 4장의 정규앨범과 무대 활동을 통해 어덜트 컨템포러리 팬들과 함께 자신들의 향수를 공유하고 있다.
노래 : Judas Priest (주다스 프리스트)
헤비메탈 팬들에게 주다스 프리스트라는 이름은 웅장한 성채와도 같다. 지난 30여 년 동안 발표했던 14장이라는 방대한 디스코그래피(라이브 앨범 제외)는 그들의 커리어를 말해주는 증거다. 그들은 헤비메탈 사운드를 창시했고 헤비메탈을 융성하게 했으며 씬을 리드했다. 차갑게 내뱉는 금속성의 보컬과 예리한 트윈 기타 시스템은 헤비메탈의 원형(原形)이었으며 수많은 후배들의 모델이 되었다. 주다스 프리스트는 단순히 NWOB... 헤비메탈 팬들에게 주다스 프리스트라는 이름은 웅장한 성채와도 같다. 지난 30여 년 동안 발표했던 14장이라는 방대한 디스코그래피(라이브 앨범 제외)는 그들의 커리어를 말해주는 증거다. 그들은 헤비메탈 사운드를 창시했고 헤비메탈을 융성하게 했으며 씬을 리드했다. 차갑게 내뱉는 금속성의 보컬과 예리한 트윈 기타 시스템은 헤비메탈의 원형(原形)이었으며 수많은 후배들의 모델이 되었다. 주다스 프리스트는 단순히 NWOBHM(New Wave Of British Heavy Metal)에만 한정되는’어떤 밴드’가 아니었다. 그들의 영역은 스래시 메탈, 데스 메탈은 물론이고 멜로딕 메탈을 넘어 블랙 메탈에까지 뻗어있다. 그 거대한 영향력은 머시풀 페이트(Mercyful Fate), 앙그라(Angra), 오버킬(Overkill), 감마 레이(Gamma Ray), 테스타먼트(Testament), 크리에이터(Kreator)등 메탈 계의 중견 그룹들이 대거 참여한 헌정 앨범 < A Tribute To Judas Priest >에서 이미 확인된 바 있다. 아이언 메이든(Iron Maiden), 색슨(Saxon)과 함께 브리티시 헤비메탈의 명성을 만방에 떨쳤던 주다스 프리스트는 1971년 블랙 사바스(Black Sabbath)를 배출한 영국의 공업도시 버밍햄에서 결성됐다. 기타리스트 케이 케이 다우닝(K.K. Downing)과 베이시스트 이안 힐(Ian Hill)을 중심으로 닻을 올린 그룹은 곧 보컬리스트 앨런 앳킨스(Alan Atkins)와 드러머 존 엘리스(John Ellis)를 식구로 맞이하고 앨범 작업에 착수한다. 하지만 무대 위로 막 나아가려던 그룹은 잦은 멤버 교체의 진통으로 데뷔에 난항을 겪어야 했다. 몇 번의 시행 착오 끝에 그들은 그룹의 상징이 되는 롭 핼포드(Rob Halford)와 다우닝의 파트너 글렌 팁톤(Glenn Tipton)을 영입해 1974년 대망의 1집 < Rocka Rolla >를 내놓았다. 헤비메탈보다는 다분히 하드 록적인 성향을 띤 이 음반은 히트를 기록하지는 못했지만 그들의 비범함을 알리는 데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그들의 이름을 국제적인 것으로 만들어 버린 앨범은 1976년 작 < Sad Wings Of Destiny >이다. 보다 강력해진 기타음과 서정적인 건반 연주가 공존하는 이 작품은 헤비메탈의 폭발력과 아트 록의 아름다움을 절묘하게 조화시킨 음반으로 평가받으며 팬들에게 그룹을 깊게 각인시켰다. ’Epitaph’, ’Victim of changes’, ’The Ripper’등이 큰 인기를 끌었다. 이 앨범의 성공으로 메이저 레이블 < CBS >와의 계약을 체결한 주다스 프리스트는 < Sin Afet Sin >과 < Stained Class >를 잇따라 발표해 호평 받으며 화려한 시기를 예고했다. 상승 기류를 탄 그룹을 정점으로 도약하게 만든 양대 앨범은 < Hell Bent For Leather > (영국에서는 < Killing Machine >이라는 제목으로 발매)와 < British Steel >로 특히 후자는 AC/DC의 < Back In Black >, 마이클 셍커 그룹(Michael Schenker Group)의 < Michael Schenker Group >과 함께 헤비메탈을 정의해 준 명반으로 손꼽힌다. 이후 창작력이 극대화된 그룹은 < Point Of Entry >, < Screaming For Vengeance >, < Defenders Of The Faith >등의 수작들을 양산해내며 황금기를 맞았다. ’Delivering the goods’, ’Before the dawn’, ’Breaking the law’, ’Metal gods’, ’Steeler’, ’Riding on the wind’, ’You’ve got another thing comin’, ’Freewheel Burning’, ’The Sentinel’등 주다스 프리스트의 베스트 트랙들이 이 기간에 압축된다. 자국에서 뿐 만 아니라 미국에서도 놀라운 성과를 올리며 그칠 줄 몰랐던 그룹은 < Ram It Down > 발표 후 드러머 데이브 홀랜드(Dave Holland)가 탈퇴하면서 잠시 주춤했다. 그러나 레이서 엑스(Racer X) 출신의 테크니션 스코트 트래비스(Scott Travis)가 가세해 만든 작품 < Painkiller >를 공개하면서 다시 한 번 영광의 시간을 갖는다. 트래비스의 현란한 드러밍과 나이를 잊은 듯한 핼포드의 보컬이 진동하는 이 음반은 그룹 후반기의 최고작으로 손꼽힌다. ’Painkiller’, ’Metal meltdown’,’Night crawler’등이 애청되었다. 1990년대에 접어들어 주다스 프리스트는 모던 록의 대대적인 공세에 흔들리는 모습을 노출했다. 나날이 하락하는 인기는 멤버들 스스로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 롭 핼포드는 그룹을 떠나 파이트(Fight)라는 새로운 팀을 결성했고, 이에 그룹은 실력파 보컬리스트 팀 ‘리퍼’ 오웬스(Tim ‘Ripper’ Owens)가 탑승한 7년만의 신보 < Jugulator >를 발표하며 우려를 얼마간 잠재웠다. 2001년 이들은 다시 < Demolition >을 공개해 열혈 팬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핼포드의 복귀를 바라는 이들에게 오웬스가 자리를 굳혔다는 사실은 아쉬움을 안겼지만, 한층 힘이 붙은 그의 보이스는 그룹 제 2의 전성기를 고대하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고 있다.
1970년대 마리화나를 밴드 이름으로 정한 용감한(혹은 무대뽀?) 팀이 있었다. ‘Listen to the music’, ‘What a fool believes’로 유명한 두비 브라더스(Doobie Brothers)다. 두비는 속어로 대마초를 의미하지만 이들의 음악은 듣는 사람에게 향정신성 문제를 야기하지 않는다. 오히려 밝고 신나는 로큰롤 사운드로 머리를 맑게했는데 그것은 그들의 출생지와 깊은 관련이 있다. 1... 1970년대 마리화나를 밴드 이름으로 정한 용감한(혹은 무대뽀?) 팀이 있었다. ‘Listen to the music’, ‘What a fool believes’로 유명한 두비 브라더스(Doobie Brothers)다. 두비는 속어로 대마초를 의미하지만 이들의 음악은 듣는 사람에게 향정신성 문제를 야기하지 않는다. 오히려 밝고 신나는 로큰롤 사운드로 머리를 맑게했는데 그것은 그들의 출생지와 깊은 관련이 있다. 1970년 캘리포니아에서 결성된 두비 브라더스는 로큰롤, 포크, 컨트리, 리듬 앤 블루스, 재즈 등을 알맞게 조율해 밝고 흥겨운 웨스트코스트 음악을 연주했다. 1970년대 중반에 흰 피부, 검은 목소리의 마이클 맥도날드(Michael McDonald)가 보컬을 맡으면서 이들의 음악은 변했지만 성공은 지속되었다. 이들이 계속해서 출세가도를 달릴 수 있었던 것은 장르의 핵분열과 그것으로 인한 크로스오버의 수혜를 받았기 때문이다. 좋은 의미로는 다양화, 나쁜 의미로는 유행에 민감한 해바라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비 브라더스는 음악의 무한경쟁 시대인 1970년대에 미국의 라디오를 점령한 중요한 밴드 중 하나다. ‘대마초 형제’의 역사는 존 하트맨(John Hartman/드럼), 톰 존스튼(Tom Johnston/기타), 패트릭 시몬스(Patrick Simmons/기타), 존 쇼그렌(John Shogren/베이스)이 1969년에 만나 뿌리를 내리고 가지를 뻗고 꽃을 피웠다. 이들의 이름을 알린 곡은 시그니처 곡인 ‘Listen to the music(11위)’과 ‘Jesus is just alright(35위)’, ‘Rockin’ down the highway’가 수록된 2집 < Toulouse Street >이었다. 이 노래들은 미국 대중들에게 크게 어필하면서 두비 브라더스를 확실하게 각인시켰다. 세 번째 앨범 < The Captain And Me >에서도 드라이브감 넘치는 ‘China groove(15위)’와 여성 3인조 보컬 그룹 바나나라마(Bananarama)가 1991년에 커버했던 ‘Long train runnin’(8위)’이 음반의 판매고를 높였다. 1974년에는 < What Were Once Vices Are Now Habits >를 발표해 싱글 차트 1위 곡인 ‘Black water’와 ‘Eyes of silver(52위)’, ‘Another park, another sunday(32위)’ 등으로 식을 줄 모르는 인기를 누렸다. 1975년 두비 형제들에게 변화가 생겼다. 블루 아이드 소울 싱어 겸 키보드 연주자인 마이클 맥도날드(Michael McDonald)와 나중에 재즈 록 밴드 스틸리 댄(Steely Dan)에 가입하는 기타리스트 제프 백스터(Jeff Baxter)가 가세하면서 음악은 리듬 앤 블루스와 재즈를 진하게 풍기기 시작했다. 음악 색깔이 밝은 녹색에서 밀크 초콜렛 색으로 바뀐 것이다. ‘It keeps you runnin’(37위)과 ‘Little darling(48위)’, ‘You belong to me(79위)’, ‘Minute by minute(14위)’, ‘Takin’ it to the streets(13위)’, ‘Real love(5위)’ 그리고 케니 로긴스(Kenny Loggins)와 마이클 맥도날드가 공동 작곡해 1979년에 차트 정상을 차지한 ‘What a fool believes’ 등1970년대 중반부터 팀이 해산하는 1980년대 초반까지 두비의 음악은 포크, 컨트리와는 거리를 두고 리듬 앤 블루스에 많이 기울었다. 두비 브라더스는 ‘What a fool believes’로 1979년도 그래미에서 올해의 레코드와 올해의 노래, 그리고 올해의 그룹 상, 편곡상 등 모두 4개의 트로피를 두비 브라더스에게 안겨주어 최고의 순간을 선사했다. 하지만 이러한 성공에도 밴드는 1982년에 해산을 결정했고 1983년에는 전 미국을 순회하는 고별 공연을 가졌다. 그리고 마이클 맥도날드와 패트릭 시몬스는 곧바로 솔로 활동을 개시했지만 마이클 맥도날드만이 성공적인 결과를 거두었다. 제임스 인그램(James Ingram)과 함께 그래미 최우수 리듬 앤 블루스 그룹을 수상한 ‘Yah mo B there(19위)’와 패티 라벨(Patti LaBelle)과 입을 맞춘 발라드 ‘On my own(1위)’ 등으로 마이클 맥도날드는 싱어 송라이터로서 자리를 굳혔다. 다시 오리지날 라인업이 뭉쳐 내놓은 1989년도 재결성 음반 < Cycles >에는 초기 웨스트코스트의 향취를 풍기는 ‘The doctor(9위)’와 ‘Need a little taste of love(45위)’가 올드 팬들의 환영을 받았다. 이들은 현재까지 순회 공연을 중심으로 활동하면서 노병이 죽지 않았다는 것을 행동으로 보여주고 있다.
버클리 음악 학교에 입학하며 뮤지션으로서의 꿈을 키워가던 한 젊은이. 얼마지 않아 그는 아버지가 주신 돈을 몽땅 써버려 위기(?)에 봉착한다. 궁해진 아들에게 돈을 주며 아버지가 던졌던 한마디. “네 음반이 플래티넘을 따내거든, 결코 날 잊어선 안돼.” 그리고 정확히 5년 뒤 그는 소포모어 앨범으로 플래티넘 고지를 정복하며 부모의 기대에 완벽히 부응한다. 바로 ’아름다운 청년’ 존 마이어(John Mayer)다.... 버클리 음악 학교에 입학하며 뮤지션으로서의 꿈을 키워가던 한 젊은이. 얼마지 않아 그는 아버지가 주신 돈을 몽땅 써버려 위기(?)에 봉착한다. 궁해진 아들에게 돈을 주며 아버지가 던졌던 한마디. “네 음반이 플래티넘을 따내거든, 결코 날 잊어선 안돼.” 그리고 정확히 5년 뒤 그는 소포모어 앨범으로 플래티넘 고지를 정복하며 부모의 기대에 완벽히 부응한다. 바로 ’아름다운 청년’ 존 마이어(John Mayer)다. 존 마이어는 미국 커네티컷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열 세 살에 이웃이 건네 준 스티비 레이 본(Stevie Ray Vaughan)의 음악에 심취, 블루스 기타리스트로써 인생의 미래를 설계했다. 이후 오직 연습에만 매진한 결과 지방의 조그마한 바에서 출중한 연주 실력으로 좌중을 사로잡았다. 기타를 손에 잡은 지 불과 2년만의 일이었다. 허나 그는 곧 음악 항로를 새로이 수정했다. 기타 플레이어가 아닌 ’좋은 곡을 쓸 줄 아는 뮤지션’이 그 해답이었다. 기타 테크닉보다 멜로디와 리듬의 전체적인 어울림을 높이는데 필요한 송 라이팅 능력을 길러나갔던 것이다. 열 아홉 살이 되자 존 마이어는 버클리 음악 학교에 입학하며 진로를 본격 모색했다. 그러나 얼마지 않아 이내 학교를 그만두었다. 음악을 ’공부’하기보다 그것을 ’연주’하기 원하는 자신의 내적 욕망을 절감한 때문이었다. 친구의 권유로 아틀랜타로 남행한 이 전도유망한 싱어 송라이터는 에디의 애틱(Eddie’s Attic)등의 나이트클럽에서 공연을 펼치며 기회를 엿봤다. 1999년에는 인디 레이블에서 을 발매하며 지역 언론의 집중 조명을 받았다. 2000년, 드디어 그에게 도약의 때가 찾아왔다. 당해 거행된 에서의 인상적인 퍼포먼스로 메이저 레이블 스카우터들의 레이다에 포착된 것. 결국 컬럼비아 산하의 와 계약을 체결한 존 마이어는 2001년 데뷔작 (1963년 행크 모블리의 작품 에서 따왔다.)를 내놓으며 주류 무대로 입성했다. ’No such thing’, ’Your body is wonderland’ 등의 싱글들이 히트 퍼레이드를 펼치며 최고 차트 15위까지 음반을 견인했다. 현재 무려 200만장을 세일즈하며 50주 이상 빌보드 차트에 머무는 중이다. 무엇보다 데이비드 그레이(David Gray), 데이브 매튜스(Dave Matthews) 등을 연상케 하는 편안한 보이스와 탁월한 선율 감각, 오랜 수련으로 다져진 기타 실력 등이 성공의 주동인(動因)이었다.
1970년대 초반부터 중반까지 아름다운 노래들로 팝음악사에 빼놓을 수 없는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소프트록 밴드 아메리카(America)는 본국인 미국은 물론 유럽과 우리나라에서도 꽤 높은 인지도를 얻었던 팀이었다. 1970년대 빌보드 싱글 차트 정상을 차지한 ‘A horse with no name’과 ‘Sister golden hair’를 비롯해 1982년의 ‘You can do magic’까지 이들이 발표한 곡... 1970년대 초반부터 중반까지 아름다운 노래들로 팝음악사에 빼놓을 수 없는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소프트록 밴드 아메리카(America)는 본국인 미국은 물론 유럽과 우리나라에서도 꽤 높은 인지도를 얻었던 팀이었다. 1970년대 빌보드 싱글 차트 정상을 차지한 ‘A horse with no name’과 ‘Sister golden hair’를 비롯해 1982년의 ‘You can do magic’까지 이들이 발표한 곡들은 폭발적이진 않았지만 자신들의 노래 스타일처럼 은은한 인기를 누렸다. 영국에 주둔하고 있던 미군의 아들들이었던 제리 벡클리(Gerry Beckley), 댄 픽(Dan Peek)과 영국인 듀이 버넬(Dewey Bunnell)은 1960년대 후반 런던에서 ‘데이즈 인 런던(Daze In London)’이란 포크 밴드를 결성했는데 이것이 그룹 아메리카의 전신이었다. 이름을 ‘아메리카’로 개명하고 1971년 말에 발표한 첫 싱글이 그 유명한 코러스를 소유하고 있는 ‘A horse with no name’인데 영국에서 먼저 공개된 이 노래의 인기는 곧 대서양을 종단해 모국인 미국에서도 인기 차트 1위를 차지하면서 곧 시작되는 인기 가도에 시동을 걸었다. 아름답기 그지없는 ‘I need you(9위)’, 크로스비 스틸스 내쉬 & 영(Crosby Stills Nash & Young)의 그림자가 깊게 드리워진 ‘Sandman’ 등이 수록된 1집 는 댄 포겔버그(Dan Fogelberg), 제임스 테일러(James Taylor) 실스 & 크로프츠(Seals & Crofts) 등과 함께 당시 꽃피기 시작한 포크 성향의 소프트록의 부흥기에 일조했다. 이렇듯 승승장구한 활동으로 그래미 신인상을 거머쥔 아메리카는 두 번째 음반 을 영국을 떠나 해맑은 햇살이 비치는 캘리포니아에서 제작했기 때문에 전작보다 훨씬 깨끗하고 밝은 사운드로 채색되었다. 이 LP에서는 영롱하고 리드미컬한 통기타 전주가 인상적인 ‘Ventura highway(8위)’, 닐 영(Neil Young)의 컨트리 노래를 떠올리는 ‘Don’’t cross the river(53위)’와 ‘Only in your heart(62위)’같은 대표적인 트랙들로 연이어 높은 평가를 받았다. 특히 ‘Ventura highway’의 기타 연주는 자넷 잭슨의 ‘Someone to call my lover’에 샘플링되어 우리의 귀를 빨아들이는 생기발랄함을 제공했다. 비틀즈의 프로듀서였던 조지 마틴(George Martin)이 만든 4집 에서는 ‘Tin man(4위)’과 ‘Lonely people(5위)’로 차트의 단골 손님임을 공인 받았고, 1975년에 공개된 에선 우리에게 가장 널리 알려진 ‘Sister golden hair’로 싱글 차트 재집권에 성공했다. 이들 특유의 하모니는 여전하면서도 스틸 기타와 빠른 박자의 곡 구조 때문에 이전의 노래들보다는 좀 더 컨트리록적으로 들렸으며, 쓸쓸한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는 ‘Daisy Jane(20위)’도 놓칠 수 없는 트랙이다. 그러나 이러한 성공을 개의치 않는다는 듯 댄 픽은 1977년 를 발표하고는 기독교 음악을 하기 위해 아메리카를 듀엣으로 축소시켰고 제리와 듀웨이는 트리오가 아닌 듀오 체제에 맞게 팀을 운영해야 했다. 이때부터 이들의 인기는 하락세를 면치 못했고 설상가상으로 조지 마틴과의 연합 전선도 1979년의 앨범 를 마지막으로 정리했다. 데뷔 한지 10여 년이 되는 이 단짝은 씁쓸한 마음으로 음악 분위기가 바뀐 1980년대를 맞이했지만 그렇게 나쁜 출발은 아니었다. 무겁고 입체적인 현악기가 시종일관 분위기를 이끌어 가는 심각한 ‘Border(33위)’와 예전의 아메리카라고 생각하기 힘들 정도로 신시사이저가 과도하게 사용된 ‘You can do magic(8위)’이 등록되어 있는 를 1982년에 선보임으로서 다시 일어섰다. 당시의 음악 트렌드에 맞게 전자 음원을 수용한 것이다. 비록 음악을 표현하는 악기나 방법적인 하드웨어는 변했을지 모르지만 소프트웨어라 할 수 있는 아메리카만의 하모니와 잊혀지지 않는 멜로디는 여전했다. 1970년대 초반 그래미 신인상을 수상했던 아메리카는 30여년이 흐른 21세기에는 추억의 밴드가 되어 꾸준한 공연 활동을 펼치는 한편 1998년에는 라는 신작을 발표하면서 식지 않은 음악 열정을 과시했다. 역대 최고의 밴드 비틀즈, 그 비틀즈의 음악을 더 빛나게 가공했던 제5의 멤버 조지 마틴. 그가 크로스비 스틸스 내쉬 & 영, 제임스 테일러, 닐 영과 같은 포크 선배들의 영향을 받은 아메리카에 주목했던 이유는 단순 명료하다. 이들이 훌륭한 노래들을 만들 수 있다는 가능성을 간파했기 때문이다. 1972년, ‘A horse with no name’은 그들이 존경했던 닐 영의 유일한 탑 텐 히트곡이자 차트 정상곡인 ‘Heart of gold’를 야박하게 밀어내고 3주간 1위를 고수했다. 인생의 아이러니다.
노래 : Simon & Garfunkel (사이먼 앤 가펑클)
멤버 : 폴 사이먼(Paul Simon, 보컬), 아트 가펑클(Art Garfunkel, 기타, 보컬) 멤버 : 폴 사이먼(Paul Simon, 보컬), 아트 가펑클(Art Garfunkel, 기타, 보컬)
노래 : Modest Mouse (모디스트 마우스)
노래 : Prefab Sprout (프리팹 스프라우트 )
뉴웨이브 밴드 뉴웨이브 밴드
세계적으로 루 리드만큼 불우시대를 오랫동안 겪은 록가수도 없을 것이다. 영화 < 트레인스포팅 >에 삽입된 곡 ’완벽한 날(Perfect day)’이 없었다면 팝 음악팬들이라도 그의 존재를 모르고 넘어갔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곡을 계기로 갑작스레 루 리드의 음악은 주목받기 시작했다. 지난해 히트한 우리 영화 < 접속 >에 ’창백한 푸른 눈동자(Pale blue eyes)’라는 곡이 깔리면서 그에 대한 관심은 폭발... 세계적으로 루 리드만큼 불우시대를 오랫동안 겪은 록가수도 없을 것이다. 영화 < 트레인스포팅 >에 삽입된 곡 ’완벽한 날(Perfect day)’이 없었다면 팝 음악팬들이라도 그의 존재를 모르고 넘어갔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곡을 계기로 갑작스레 루 리드의 음악은 주목받기 시작했다. 지난해 히트한 우리 영화 < 접속 >에 ’창백한 푸른 눈동자(Pale blue eyes)’라는 곡이 깔리면서 그에 대한 관심은 폭발적으로 변했다. 이 곡은 그가 이끌던 1960년대 전설적인 그룹 벨벳 언더그라운드 시절에 부른 노래다. 발표된 지 자그마치 30년만에 비로소 팬들의 귀에 ‘접속’된 셈이다. 솔로로 독립해 내놓은 곡 ’완벽한 날’도 출반 시점은 1972년. 잔잔한 반주나 힘을 빼고 읊조리듯 부르는 것도 매력적이고 특히 곡의 무드가 만점이다. 그러면 왜 과거 팝팬들은 이 곡의 진가를 몰랐는지 궁금해진다. 지금 봐선 이해가 가지 않겠지만 각 시대의 정서 토대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커다란 편차를 드러낸다. 이를테면 1970년대 인기곡과 1990년대 히트곡은 느낌이 다르다는 얘기다. 올드 팝팬들은 밝고 약간은 건조한 노래를 즐겨 들었다. 그런 기조에서 볼 때 루 리드의 음악은 다분히 어둡고 습한 분위기였다. 느낌부터 너무 시대를 앞서 갔다고 할 수 있다. 그와 벨벳 언더그라운드에 늘 따라붙었던 수식어가 이른바 ‘아방가르드(전위)’ 였다. 이 말은 역으로 다수의 음악대중들과는 크게 유리되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사실 루 리드의 음악은 역사적 기록과 록평론가들 사이에서 제대로 평가를 받았다. 그가 그룹과 솔로 시절에 발표한 1960, 1970년대 앨범들 가운데 적어도 서너장은 어김없이 록역사의 명반 리스트에 오른다. 록음악 잡지 < 롤링스톤 >은 ‘데이비드 보위, 브라이언 이노, 패티 스미스를 비롯한 뉴욕 펑커들, 카스, 크리시 하인드, 뉴 오더, U2, REM 그리고 소닉 유스 등이 벨벳 언더그라운드의 점호를 받아야 할 아티스트들’이라고 했다. 모두가 근래의 모던 록에 심취한 팬들로부터 환영받는 인물들이다. 때문에 벨벳 언더그라운드와 루 리드는 ‘모던 록의 시조’로까지 추앙된다. 강산이 두세번 바뀌고서야 인정받을 때까지 그는 말도 못할 고생을 했다. 벨벳 언더그라운드가 깨지고 나서는 레코드사의 외면으로 음반조차 내지 못한 채 방황을 거듭했다. 평소 루 리드의 팬이었다는 데이비드 보위가 적극적으로 도움을 펼치면서 가까스로 재기에 성공할 수 있었다. 그 앨범이 ’완벽한 날’이 수록된 걸작 < 트랜스포머(Transformer) >. ’완벽한 날’은 지난해 엘튼 존, 보노 등 30명의 록스타들이 부른 새 노래로 재탄생했다. 음반의 수익금은 세계의 영세가정 어린이를 위한 자선단체에 기부되었다. 이 곡을 동료들과 취입하던 날 루 리드의 기분은 어떠했을까. 아마 ‘완벽한 날’이 따로 없었을 것이다. 그를 보면서 좋은 음악은 언젠가는 통한다는 사실을 다시금 확인한다.
노래 : Soul Asylum (소울 어사일럼 (락 밴드))
얼터너티브 록 역사의 한 페이지를 당당히 차지하고 있는 소울 어사일럼은 다양한 음악 성향과 의식 있는 태도를 지녔던 밴드이다. 이미 너바나가 등장하기 전부터 펑크와 하드 록의 절묘한 결합을 통해 록의 대안을 제시했던 이들은 1990년대 얼터너티브 록의 시그널이 울림과 동시에 음지에서 양지로 뛰쳐나왔다. 비록 다른 얼터너티브 밴드들에 비해 대중적인 지명도를 획득하지는 못했지만, 자신들만의 정체성을 확고히 하며 소중... 얼터너티브 록 역사의 한 페이지를 당당히 차지하고 있는 소울 어사일럼은 다양한 음악 성향과 의식 있는 태도를 지녔던 밴드이다. 이미 너바나가 등장하기 전부터 펑크와 하드 록의 절묘한 결합을 통해 록의 대안을 제시했던 이들은 1990년대 얼터너티브 록의 시그널이 울림과 동시에 음지에서 양지로 뛰쳐나왔다. 비록 다른 얼터너티브 밴드들에 비해 대중적인 지명도를 획득하지는 못했지만, 자신들만의 정체성을 확고히 하며 소중한 존재로 남아있다. 소울 어사일럼의 출발점은 1981년 미국 미네아폴리스에서 데이빗 퍼너(David Pirner, 보컬/기타), 칼 뮬러(Karl Mueller, 베이스), 댄 머피(Dan Murphy, 기타)의 라인업으로 결성했던 라우드 패스트 룰스(Loud Fast Rules). 2년 뒤인 1983년 드러머 팻 몰리(Pat Morley)를 영입한 후 소울 어사일럼으로 그룹명을 바꾼 이들은 지역의 인디 레이블인 < 트윈/톤(Twin/Tone) >과 음반 계약을 체결하고, 1년 뒤인 1984년 데뷔 앨범 < Say What You Will, Clarence...Karl Sold the Truck >을 발표했다. 얼터너티브의 선구자로 일컬어지는 허스커 두(Husker Du)의 밥 몰드(Bob Mould)가 프로듀싱한 음반은 스피드하고 파워풀한 펑크 사운드를 선보였다. 1986년 드러머를 다시 그랜트 영(Grant Young)으로 교체한 이후 소울 어사일럼은 < 트윈/톤 >을 통해 정규 앨범 < Made to Be Broken >(1986), < While You Were Out >(1986), 모음집 형식의 < Time’s Incinerator >(1986), 2년 후인 1988년 미니 음반 < Clam Dip & Other Delights >를 연이어 내놓았고, 이 때 보여준 음악적 완성도는 밴드를 메이저 음반사 < A&M >로 영전하게 만들었다. < A&M >에서 발표한 두 장의 음반 < Hang Time >(1988)과 < And the Horse They Rode in On >(1990)은 초기 얼터너티브, 즉 펑크적 성향에 하드록의 요소들이 많이 담긴 무거운 사운드를 담아냈다. < 콜롬비아 > 레코드사로 이적하여 1992년 발표한 정규 6집 앨범 < Grave Dancer’s Union >은 10여 년의 캐리어에 맞는 다양한 스타일의 곡들이 가득 채워져 있었다. 다듬어지지 않은 듯한 펑크에서부터 하드록, 편안한 포크적 성향의 곡들에 이르기까지 축적된 음악성은 빛을 발했고, 자연스레 ’Somebody to shove’, ’Black gold’, ’Runaway train’ 등의 히트곡이 쏟아져 나왔다. 특히 차트 5위까지 오른 ’Runaway train’은 사회적 문제를 다루며 이들의 의식 있는 태도를 잘 보여주었다. 음반은 전 세계적으로 400만장의 판매고를 기록했다. < Grave Dancer’s Union >의 발매 직후 드러머를 다시 스터링 캠벨(Sterling Campbell)로 교체한 이들은 1995년 7집 < Let Your Dim Light Shine >을 다시 한 번 히트시키며 정상급 밴드로서의 위상을 재확인했다. 앨범은 ‘Misery’의 Top20 진입의 선전에 힘입어 음반 차트 6위까지 올랐다. < Let Your Dim Light Shine >의 성공 이후 결속력이 약화되고 해체의 위기를 맞기도 했지만 주변의 우려를 불식시키려는 듯 1998년 8집 음반 < Candy From A Stranger >를 공개했다. 하지만 얼터너티브 록 역시 더 이상의 대안이 될 수 없는 시대 흐름 때문에 이들의 인기는 급강하했다. 현재 소울 어사일럼은 드러머 스터링 캠벨이 탈퇴하여 삼인조 라인업으로 근근히 명맥을 유지해나가고 있다.
영화 < 록키 3 >도 1편을 능가하는 속편은 없다는 속설을 다시 한번 입증한 보통의 영웅담이었다. 뻔한 스토리에 인간 복제 한 듯 똑같은 주인공, 그리고 틀에 박힌 결말. 그러나 이 평범한 권투 영화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킨 것은 서바이버(Survivor)가 부른 주제가 ''Eye of the tiger''다. 이 곡은 스크린의 긴장감을 200% 살리면서 성공적인 흥행을 일궈내는데 견인차 역할을 했다. 1977... 영화 < 록키 3 >도 1편을 능가하는 속편은 없다는 속설을 다시 한번 입증한 보통의 영웅담이었다. 뻔한 스토리에 인간 복제 한 듯 똑같은 주인공, 그리고 틀에 박힌 결말. 그러나 이 평범한 권투 영화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킨 것은 서바이버(Survivor)가 부른 주제가 ''Eye of the tiger''다. 이 곡은 스크린의 긴장감을 200% 살리면서 성공적인 흥행을 일궈내는데 견인차 역할을 했다. 1977년, 추운 날씨로 유명한 시카고에서 살아남은 서바이버는 주축 멤버인 키보디스트 짐 페테릭(Jim Peterik)과 기타리스트 프랭키 설리반(Frankie Sullivan)이 거의 모든 노래들을 작곡하는 성인 취향의 팝록 밴드였다. 1980년의 데뷔 앨범 < Survivor >와 2집 < Premonition >에서 ''Somewhere in America(70위)''와 ''Poor man''s son(33위)''으로 어느 정도의 인기 기반을 닦은 그들은 < 록키 3 >의 제작을 기획하던 실베스터 스탤론의 눈에 띄어 영화 오프닝에 수록될 주제곡을 의뢰받는다. "우리는 리듬과 비트를 구상해 놓고 있었지만 정작 그 영화를 보고 난 후에 멜로디 훅을 만들었다"라고 짐 페테릭은 말했다. 긴박한 기타 연주와 박력있는 데이브 빅클러(Dave Bickler)의 보컬이 앙상블을 이뤄 멜로딕하면서도 호전적인 분위기를 제공한 ''Eye of the tiger''는 빌보드 싱글 차트 6주간 정상을 차지한 것을 비롯해 그래미 록부문 최우수 그룹상 수상, 피플스 초이스 어워드 최우수 신곡상 수상, 아카데미 주제가상 후보에 오르는 등 이 한 곡으로 거의 모든 영광을 차지했다. 한편 국내에서는 이 곡이 들어있는 음반 < Eye Of The Tiger >에 수록된 ''Ever since the world began''라는 발라드 곡이 팝팬들의 많은 사랑을 받았다. ''Eye of the tiger'' 이후 이들은 1984년의 영화 < 베스트 키드 >의 주제가 ''Moment of truth(63위)''와 1986년 다시 한번 실베스터 스탤론과 손잡은 < 록키 4 >의 주제가 ''Burning heart(2위)''를 취입하기도 했지만 더 이상의 영화 주제가를 만들지 않았다. 통산 4집 < Caught In The Game >의 좌절 이후 보컬리스트 데이브 빅클러는 건강상의 이유로 밴드를 탈퇴했고 그 후임으로 데이브와 비슷한 음색을 소유한 짐 제이미슨(Jim Jamison)을 맞이하면서 전열을 정비한 서바이버는 3곡의 히트곡을 배출한 < Vital Signs >를 1984년에 발표해 ''I can''t hold back(13위)'', 경쾌한 ''High on you(8위)'', 국내 취향의 록발라드 ''The search is over(4위)''가 모두 히트 차트에 오르면서 다시 한번 황금기를 누렸다. 다시 3년의 기다림 후에 공개된 1987년의 음반 < When Seconds Count >에선 싱글 커트된 ''Is this love(9위)''와 ''How much love(51위)''는 이들의 마지막 싱글 히트곡이 되었고 1988년에 공개한 < Too Hot To Sleep >을 마지막으로 1989년 밴드의 공식 해산을 발표했다. 그러나 1990년대 중반 초창기 보컬리스트 데이브가 짐, 프랭키와 다시 팀을 재 결성해 현재까지 공연 위주의 활동을 하고 있다. 197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 중반까지 무수히 많은 아레나록 밴드들이 등장했다가 사라져갔다. 그 중의 하나인 서바이버는 훠리너(Foreigner)나 스틱스(Styx), 나이트 레인저(Night Ranger)처럼 정교한 연주를 들려준 팀도 아니었고, 사회적 메시지를 던지는 심각한 밴드도 아니었지만 서바이버의 음악을 듣는데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다. 록음악계의 ''생존자''가 되길 원했던 서바이버의 제 2 라운드가 시작되었다. ''Eye of the tiger''가 한창 인기있던 1983년에 필자의 친척형은 서바이버의 앨범 속지에 나온 보컬리스트 데이브 빅클러의 사진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얘 눈이 진짜 호랑이 눈 같지 않냐?"
노래 : Jefferson Airplane (제퍼슨 에어플레인)
우린 기존 가치의 총체적 전환을 요구한다.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는 1967년 봄 미국의 샌프란시스코 지역을 둘러보고 거기서 어떤 새로운 흐름이 조성되고 있음을 간파했다. 그는 “이곳의 사람들은 부의 축적이 목표인 풍요로운 생활방식을 부정한다. 그들은 성(聖) 프란체스코가 의류상이었던 부유한 아버지의 생활방식을 거부했던 것처럼 부모의 생활방식을 거부하고 있다”며 방문 인상을 밝혔다. 토인비가 말하는 ‘이곳’이란 ... 우린 기존 가치의 총체적 전환을 요구한다.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는 1967년 봄 미국의 샌프란시스코 지역을 둘러보고 거기서 어떤 새로운 흐름이 조성되고 있음을 간파했다. 그는 “이곳의 사람들은 부의 축적이 목표인 풍요로운 생활방식을 부정한다. 그들은 성(聖) 프란체스코가 의류상이었던 부유한 아버지의 생활방식을 거부했던 것처럼 부모의 생활방식을 거부하고 있다”며 방문 인상을 밝혔다. 토인비가 말하는 ‘이곳’이란 정확하게 샌프란시스코의 헤이트-애시베리 구역이었다. 그곳에는 히피들에 의한 새로운 문화 조류가 무르익고 있었다. 5만여 명에 달했던 그곳의 히피들은 기존의 모든 가치를 부정하는 ‘카운터 문화’를 주창했고, 이상 사회 건설을 위해 몸부림을 쳤다. 히피들은 노동계급이 아닌 중산층 자녀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대학을 다니거나 졸업한 이른바 ‘배운’ 사람들이었고, 백인이었고, 경제적으로 넉넉한 생활을 영위하고 있던 젊은이들이었다. 2차대전과 대공황을 겪는 부모 세대와 다르게 상대적 풍요 속에 자라난 그들은 기성 세대가 확립해놓은 가치의 절반을 철저히 거부했다. 히피들은 경쟁보다는 화합을, 개인주의보다는 공동체적 생활을 강조했으며, 억압되고 있는 성(性)의 자유와 ‘의식의 해방’을 소망했다. 그들은 사랑, 평등, 공생, 자유가 충만한 사회를 ‘대안의 사회’로 여겼고, 그곳을 향해 치열하게 달려갔다. 그들의 헤어와 복장은 제멋대로였고, 공공연히 프리섹스를 펼쳤으며, ‘군집’ 생활을 전개해 잇따라 기성 사회와 충돌했지만, 제도권과 부모 세대가 볼 때 가장 문제가 된 부분은 ‘의식 해방’과 관련된 것이었다. 의식해방의 수단이 마리화나와 LSD 등 다름아닌 마약이었던 까닭이었다. LSD의 교사로 통했던 전(前)하버드대학 교수 토마스 리어리의 “환각상태에 도달하여(Turn On) 깨달음을 얻고(Tune In) 기존으로부터 빠져나오라(Drop Out)"는 어드바이스는 히피들을 환각의 세계로 내몰았다. 그는 LSD를 복용하게 되면 음악을 들을 수 있을 뿐 아니라 음악이 춤추는 입자처럼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오는 것이 ‘보인다’고 했다. 이것이 히피의 세계요, 문화였다. 당시 헤이트-애시베리 지역의 1천5백여 록 밴드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거의가 히피 그룹이었으며 LSD 밴드이기도 했다. 록 평론가들은 그들의 장르를 환각제와 관련지어 ‘사이키델릭록’ 혹은 ‘애시드록’(Acid Rock)이라고 일컬었다. 무수한 샌프란시스코의 사이키델릭록 그룹 가운데 단연 돋보이는 존재는 제퍼슨 에어플레인(Jefferson Airplane)이었다. 록 역사에 있어서의 위상이나 후대에의 영향을 고려하면 ‘그레이트풀 데드’를 더 높이 평가할 수는 있지만, 지명도는 제퍼슨 에어플레인이 단연 앞섰다. 밥 딜런의 음악을 동경해온 마티 볼란이 주축이 되어 폴 캔트너, 요머 카우코네, 스킵 스펜스 등과 함께 조직한 이 그룹은 1965년 8월 13일 매트릭스라는 클럽에서 첫 비행에 들어갔다. 1년 뒤 ‘그레이트 소사이어티’란 그룹에서 활동하던 여걸 그레이스 슬릭과 드러머 스펜서 드라이덴이 가세, 진용이 확립되었고 이듬해인 1967년 ‘누군가 사랑할 사람(Somebody to Love)’, ‘화이트 래빗(White Rabbit)’ 등 빅 히트곡을 내어 단숨에 샌프란시스코 사운드의 기수로 부상했다. 제퍼슨 에어플레인의 음악, 장외 발언, 무대 행위에는 그 시대 ‘히피의 정서’가 고스란히 농축되어 스며나왔다. 그들은 ‘히피, 샌프란시스코, 헤이트-애시베리, 사랑의 여름, 사이키델릭 사운드, 록 혁명’의 전형이자 리딩 그룹이었다. “우리는 기존 가치들의 총체적 전환을 요구한다.”그것이 그룹을 가입한 후에 그레이스 슬릭의 첫 일성이었다. 그들은 무엇을 변화시키려했는가. 첫째는 중산층과 전세대가 강요하는 외설에 대한 인식타파였다. 그들은 육체 표현과 섹스의 자유를 설파했고 ‘사랑’을 제1의 가치로 귀결시켰다. 빼어난 미인 그레이스 슬릭은 공연중 웃옷을 벗어 토플리스를 관객 앞에 연출하기도 했다. 그녀는 그룹의 출세작 ‘누군가를 사랑할 사람’을 두고 “가사가 무슨 뜻인가는 중요치 않다. ‘자유로워져라. 사랑에 자유롭고 섹스에 자유롭도록 하라.’ 그것이 전부다”라고 설명했다. 그룹의 실세인 마티 볼란은 한술 더 떠 “스테이지는 침대고 관중은 여자다. 우린 공연하는 게 아니다. 우린 섹스하는 것이다”라고 강조했다. 둘째, 제퍼슨 에어플레인은 부의 축적을 배격하고 ‘분배’를 중시했다. 음악하는 사람이 돈을 배격한다는 것은 우선 기존 레코드 회사로부터 음반 발매를 거부했다는 얘기와 같다. 그룹 초기부터 히피 그룹의 대표로 관심을 모았던 이들에게 메이저 레코드사의 스카웃 제의가 집중되었으나, 이들은 상당기간 ‘제도권’과의 거리를 유지했다. 팬터지 레코드사의 간부인 막스 와이스는 제퍼슨 에어플레인과 같은 샌프란시스코 밴드들에 대해 “그들은 우수하긴 하지만 좀 미친 사람들이다. 그들은 너무 반(反)상업적이다”라며 투덜거렸다. 그들은 제도권 진입을 꺼리고, 잇따라 ‘무료 콘서트’를 하고 다녔다. 극단적인 반(反)상업성의 표현이었다. 무료 콘서트와 관련해서는 그들보다 그레이트풀 데드가 더 적극적이었는데, 데드의 매니저 록 스컬리에 따르면 “우리는 제도권이 원하는 것 - 싱글 히트를 내고 공연을 해서 돈을 챙기는 것 -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무료 공연을 고집할 수 있었으되 레코드사 소속 거부는 곧 한계를 드러냈다. 많은 대중들에게 우리의 사이키델릭록과 메시지를 어떻게 전달해야 하는가. ‘명분상’ 메이저 레코드사라는 제도권 음악계를 뿌리쳐야겠지만,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상업적으로 가장 성공한 그룹 도어즈의 매니저 빌 시돈은 그와 같은 난처한 입장을 솔직히 털어놓았다. “무대에서 그룹들은 혁명적 메시지를 전파했다. 그러나 그걸 대중들에게 알리기 위해서는 제도적 방식을 채택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웃기는 일 아닌가.” 1965년 출범한 제퍼슨 에어플레인은 결국 2년 후인 1967년 RCA사와 음반 계약을 체결, 메이저레이블에 소속된 최초의 헤이트-애시베리 밴드가 되면서 ‘비제도권에의 수절’은 종말을 고했다. 그것은 분명 샌프란시스코록을 세계 팝계에 널리 알린 분기점이 되기도 했지만, 애초의 그룹취지에는 크게 궤도이탈한 것이어서 희비의 쌍곡선을 그렸다. 셋째는 공동체로의 지향이었다. 제퍼슨 에어플레인은 그레이트풀 데드, 빅 브라더 앤 홀딩 컴퍼니, 퀵 실버 메신저 서비스 등 샌프란시스코지역 그룹들과 긴밀한 유대 관계를 견지했다. 그들은 결코 인기 경쟁을 벌이지 않았고, 화합과 공유를 몸소 실천했다. 내부적으로는 어느 특정인들과 자매 그룹처럼 상호 선린 관계를 구축했다. 서로 지척에 거주하여 자주 왕래했고 하루종일 맞대고 살았으며, 공연을 나가서도 누가 오프닝을 하든, 누가 휘날레를 장식하든 신경쓰지 않았다. 그룹의 파수꾼인 폴 캔트너는 자랑스레 회고한다. “매우 기분좋은 광경이었지요. 그룹들은 서로를 격려해주었습니다. 라디오 방송국에서 우리는 그레이트풀 데드나 퀵 실버 메신저 서비스, 아니 만나는 사람 누구에게든 테입을 얻고 했습니다. 거기에는 ‘더불어 함께 사는 것’이라는 의미가 존재했어요.” 그들은 1967년 1월 14일 골든게이트 공연에서 거행된 역사적인 ‘부락집단의 모임’(히피공동체의 상징이 됐다)에서 ‘함께 갑시다(Let`s Get Together)’를 열창했다. 1969년에 발표된 음반 < 지원자들(Volunteers) >의 수록곡 가운데 베스트는 ‘우린 함께 할 수 있어요(We can be Together)’라는 노래였다. 샌프란시스코 밴드들의 모토는 바로 ‘함께’ 또는 ‘더불어’였다. ‘우린 함께 할 수 있어요’는 그룹 최초로 사회혁명을 주창한 노래로서 제퍼슨 곡은 정치성이 약하다는 일반의 인식에 쐐기를 박는 역할을 했다. 제퍼슨 에어플레인이나 그 비행선의 탑승자들 모두가 이러한 카운터적 성격으로 말미암아 제도권에게 이단자들로 찍혀가고 있었다. 활동 내역보다 약물이 그들을 결정적으로 찍히게 한 빌미가 됐다. 새로운 질서를 이해하는 수단으로서 의식 확장의 역할을 했던 마약은 제퍼슨 에어플레인 음악을 특징지웠다. ‘사이키델릭 환각제’, 이를테면 마리화나와 LSD에의 예찬이 노래에 출현했다. ‘알약 하나는 너를 커지게 하고 알약 하나는 또 너를 작게 하지. 어머니가 네게 주는 약은 아무것도 안돼. 앨리스가 10피트일 때 그녀에게 가서 물어봐. 식탁 위의 사람들이 일어나 네게 어디로 갈 거냐고 물을 때 너는 버섯을 먹으면 마음이 부드럽게 움직이게 되지... 논리와 균형감각을 상실하고 백의의 기사가 소곤거리고 붉은 빛 여왕이 정신을 잃을 때 쥐가 한말을 기억해. 네 머리를 채우라. 네 머리를 채우라.’ ‘화이트 래빗’ 제퍼슨 에어플레인의 비행연료는 이처럼 LSD였다. 그 연료로 비행선은 앨리스가 경험한 ‘이상한 나라’로 팬들을 안내했다. 그 연료는 제퍼슨 에어플레인의 고공 비행을 가능케 해주어 한동안 그들의 레코드는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그러나 그 비행선은 곧바로 안전벨트가 없고 이륙용 기어가 없음이 판명되었다. 마약 제창이 처음엔 힘으로 작용했지만 후에는 ‘감정 중독’을 초래하는 걸림돌로 변했다. 시나브로 메시지의 신념은 상실되어 갔다. 히피 종식을 벼르고 있던 제도권에게 이 마약 부분은 반격의 미끼를 제공해주어 1970년 스피로 애그뉴 부통령은 “상당수의 록 뮤직이 마약 사용을 찬양하고 있다”며 올가미 씌우기를 공식 선언했다(도어스의 짐 모리슨, 컨츄리 조 등이 그 희생자들이었다). 절정기였던 1969년 우드스탁 이후 제퍼슨 에어플레인은 급격히 팬들로부터 멀어져 갔다. 히피즘과 샌프란시스코 록도 함게 기력을 잃어갔다. 1970년대 들어서 스펜서 드라이덴, 리더인 마티 볼란, 요머 카우코넨이 잇따라 그룹을 떠났다. 그렇게 히피의 기수 제퍼슨 에어플레인 시대는 막을 내렸다. 그들은 분명 사회의 거대 자본 폭격기에 대항하는 전투기였다. 그들은 한 나라의 가치를 변화시키려고 시도했고, 미국이라는 성곽의 이데올로기장벽을 부수려고 했다. 그러나 그들은 거대 자본의 유혹에 빨려들어가고 말았다. 팬들은 “3장의 골드 레코드가 우리의 영웅을 납치했다”고 불평했고, 일련의 탐탁치 않은 행각을 목격하고 ‘우상의 죽음’에 실망했다. 돈을 번 그들은 7만 5천 달러짜리 호화판 빅토리아식 맨션을 구입, 풍족하게 살았고 캐딜락과 같은 고급승용차를 몰았다. 레코딩세션을 하러가면서 전세 비행기를 이용했다. RCA로부터 자회사인 그런트사를 헌납받아 레코드 회사를 ‘경영’했다. 중산층의 무대인 휘트니 뮤지엄과 왈도프 호텔에서 크리스마스 이브 공연을 갖기도 했다. 이 모든 행위를 그룹이 초기에 보여주었던 행태와 비교해보라! 시대는 변했다. 시대의 반영인 대중음악도 바뀌게 마련이고 그래서 그들도 히피 밴드에서 ‘기업’ 밴드로 변질되었다. 그룹은 시대의 흐름을 타고 세월의 풍파를 헤쳐가면서 지금도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1974년 ‘제퍼슨 스타십’으로, 1985년 다시 ‘스타십’으로 이름이 바뀌고 멤버의 몇몇 열굴만 교체되었을 뿐이었다. 생명력을 과시한 정도가 아니라 포스트 에어플레인의 이 그룹들은 에어플레인 시절보다 더욱 상업적 성공을 거두었고 ‘나를 믿어요(Count On Me)’, ‘우리가 이 도시를 건설했다(We Built this City)’, ‘사라(Sara)’, ‘아무것도 우릴 멈추게 할 수 없어(Nothings Gonna Stop us now)’ 등 불멸의 히트곡을 남겼다. 세월이 가면 에어플레인은 역사헤 묻히고 제퍼슨 스타십 혹은 스타십이 더욱 기억에 자리잡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레이스 슬릭은 에어플레인 시절을 이렇게 평가하고 있다. “그건 낙관적인 관념들이었습니다. 나이가 들게 되면 불행히도 많은 것이 변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절감하게 되죠. 아마 자그마한 충격을 줄 수는 있겠지만 거대함에 자그마한 충격이란 결코 아무것도 아닙니다.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생각들 하지만 그렇게 되지는 않아요. 내가 바꿀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오직 나 자신일 뿐입니다.” 글쎄. 물론 그처럼 음악으로 세상을 바꿀 수 없다는 데 많은 사람이 동의할 것이다. 그렇지만 제퍼슨 에어플레인의 무덤에 비석을 꽂고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묘비명을 새겨넣으려는 데는 선뜻 동의할 수가 없다.
노래 : Elvis Presley (엘비스 프레슬리)
얼마 전 폴 매카트니가 50년대 초기 로큰롤 역사에 헌정한 앨범 < Run Devil Run > 속지에는 이런 글이 들어있다. ‘로큰롤이 첫 반세기로 차츰 다가가고 있다. 멤피스의 선(Sun) 스튜디오로 한 트럭 운전사가 어슬렁거리며 들어가 혁명의 끈을 풀어놓은 지 거의 50년이다. 스타에 정신이 팔린 수만의 10대들처럼 그가 처음 엘비스를 들었을 때 기회는 리버풀시 알레톤의 제임스 폴 매카트니에게도 던져졌다.’... 얼마 전 폴 매카트니가 50년대 초기 로큰롤 역사에 헌정한 앨범 < Run Devil Run > 속지에는 이런 글이 들어있다. ‘로큰롤이 첫 반세기로 차츰 다가가고 있다. 멤피스의 선(Sun) 스튜디오로 한 트럭 운전사가 어슬렁거리며 들어가 혁명의 끈을 풀어놓은 지 거의 50년이다. 스타에 정신이 팔린 수만의 10대들처럼 그가 처음 엘비스를 들었을 때 기회는 리버풀시 알레톤의 제임스 폴 매카트니에게도 던져졌다.’ 오늘날 폴과 비틀스를 있게 한, 단 한사람의 영향을 꼽는다면 위 해설처럼 단연 트럭운전사출신 엘비스 프레슬리다. 존 레논은 이를 결정적 한마디로 축약한다. “엘비스가 나타날 때까지 내게 영향을 끼친 것은 아무 것도 없다(Nothing affects me until Elvis)." 존과 폴이 만나서 처음 마음먹은 것은 사실 엘비스의 음악을 더 강하게 표출해내는 것일 뿐이었다. 그들을 통해서 로큰롤의 진정한 역사는 ‘시대의 풍운아’ 엘비스 프레슬리와 함께 개막되었다는 사실이 다시금 확인된다. 물론 역사가에 따라 로큰롤의 효시를 행크 발라드(Hank Ballard)나 빌 헤일리(Bill Haley) 또는 척 베리(Chuck Berry)로 꼽기도 한다. ‘Work with me, Annie’ ‘Crazy man crazy’ ‘Maybellene’ 등과 같은 이들의 대표곡들이 시기적으로 먼저 구동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때 다수 대중들은 여전히 로큰롤의 존재를 알지 못했고 엘비스가 나와서야 비로소 그것을 인식하기 시작했다. 빌보드지의 결론. ‘1953년 록음악이 시작되었다고 하나 정작 차트나 방송에서 그 시대를 풍미하기 시작한 것은 1956년 엘비스 프레슬리의 싱글 ‘Heartbreak hotel’이 연속 8주 넘버원에 머물면서부터였다.’ 초기 로큰롤은 척 베리나 버디 할리와 같은 탁월한 ‘작가’를 소유했다. 리틀 리처드나 제리 리 루이스라는 출중한 ‘배우’ 그리고 조 터너, 보 디들리와 같은 ‘음악감독’들도 있었다. 그러나 당시 로큰롤은 강풍을 휘몰아칠 역동적 ‘스타’가 필요했다. 그가 엘비스였다. 그 시대는 흑인의 리듬 앤 블루스를 소화해줄 백인가수를 요구했고 엘비스는 백인대중들로부터 ‘저 친구는 백인이면서 왜 검둥이노래를 부르는 거야?’라는 의아함을 일으킬 만큼 탁월한 흑인감성의 보유자였다. 이러한 시의성은 그러나 일반의 인식처럼 56년 RCA 소속의 엘비스로부터 비롯된 것은 아니었고 이미 54년 선 레코드사의 엘비스로서 확립된 것이었다. 샘 필립스 사장의 전설적인 선 시절에 엘비스는 ‘That`s all right’, ‘Blue moon of Kentucky’ 와 ‘Mystery train’ 등을 부르면서 컨트리와 R&B를 크로스오버화한 신종의 로커빌리를 선보이면서 벌써 ‘웨스턴 밥의 왕’으로 불렸다. 이 때 이미 순회공연에서 팝 음악사상 초유의 센세이션을 일으키고 있었다. 『뉴스위크』는 ‘금세기 백년간의 스타’ 특집기사를 다루며 그의 등장을 ‘20세기의 사건’ 가운데 하나로 꼽았다. 당시 엘비스 백업 밴드에서 드럼을 쳤던 D.J. 폰타나는 54년 상황을 다음처럼 술회한다. “엘비스 무대가 끝나고 나면 노래를 따라해 줄 관객들은 다 빠져버려 아무도 없었지요. 애들은 백 스테이지에서 그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곤 했습니다. 내 생각에 그 애들은 아마 우리 연주는 듣지도 않았을 겁니다. 그들이 원한 것은 오로지 ‘처음으로 흔드는 가수’ 엘비스를 보고자 하는 것이었죠.” 로컬 무대에서 전국 네트워크 TV로 진출하면서 마침내 ‘엘비스마니아’는 폭발했다. 미국의 3대 전국 공중파 방송 ABC CBS NBC의 체제가 정립된 것도 바로 이 때였다. 그는 텔레비전시대의 영웅으로서 ‘라디오스타를 죽이는’ 새로운 미디어의 문화적 아이콘으로 떠올랐다. (타미와 지미) 도시 브라더스의 CBS < 스테이지 쇼 >, NBC의 < 밀턴 벌 쇼 >와 < 스티브 알렌 쇼 > 그리고 저 유명한 CBS의 < 에드 셜리번 쇼 >에 잇따라 출연하면서 벌써 음악의 영상시대를 주도했다. 음악이 음반으로만 소구하던 시대는 ‘섹시 가이’ 엘비스의 출현으로 끝났다. ‘보는 음악’ 시대를 주도한 최초의 인물은 다른 누구도 아닌 엘비스였다. 스탠다드 팝의 파수꾼 프랭크 시내트라도 자기 TV 쇼의 떨어지는 시청률을 참다못해 ‘음악의 공적(公敵)’이라고 성토해마지 않았던 엘비스를 출연시켜야 했다. TV 뿐만 아니라 영화 최초의 로큰롤 스타도 엘비스 프레슬리였다. < 러브 미 텐더 > < 러빙 유 > < G.I. 블루스 > < 블루 하와이 > 등 31편의 영화에 출연하면서 그는 관객들에게 로큰롤의 열정과 록 가수가 부르는 발라드의 호소력을 제공했다. 음반 텔레비전 그리고 영화라는 ‘삼국통일’에 성공하며 천하를 제패한 것이다. 그는 모든 것이 아래로 보일 정도의 막강한 부와 명예를 거머쥐었다. 77년 사망하면서 그의 캐리어가 마침표를 찍을 때까지 그는 무려 2억5천만장의 앨범을 팔았다. 이 기록에 가장 접근한 인물은 비틀스가 아닌 2억장의 빙 크로스비(캐롤 ‘White Christmas’가 결정적이다)며 프랭크 시내트라는 겨우 4천만장에 불과했다. ‘1인 기업’ 엘비스는 막대한 돈으로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색깔인 핑크를 포함한 갖가지 칼라의 자동차 캐딜락을 구입했고 멤피스에 4만 달러 짜리 목장 그리고 10만 달러로 저택 그레이스랜드를 샀다. 전용 비행기는 물론 텔레비전 세트 그리고 첨단기계들도 마련했다. 물론 지금이야 흔해 빠진 것들이지만 당시에는 특히 엘비스와 같은 하층계급 청년들은 감히 꿈도 꿀 수 없는 부의 상징들이었다. 동시대 그리고 후배가수들이 일개가수에서 기업으로 융기한 엘비스를 통해 신분상승과 스타덤 획득 욕구를 품는 것은 당연했다. 그들은 엘비스처럼 슈퍼스타이면서 동시에 부자가 되고 싶어했다. 버디 할리는 엘비스를 빅 스타로서 존경했고 밥 딜런의 음악동기는 엘비스보다 큰(bigger than Elvis) 가수가 되는 것이었다. 톰 존스는 아예 영국의 제록스판 엘비스였다. 엘비스처럼 구레나룻을 길렀던 브루스 스프링스틴은 직접 그를 만나기 위해 그레이스랜드 담을 넘다가 제지당했고 그룹 퀸은 엘비스를 안중에 두고 50년대 로큰롤풍의 ‘Crazy little thing called love’를 만들었다(로저 테일러의 증언 “처음으로 텔레캐스터와 부기 앰프를 쓴 다소 빈약한 사운드였다. 분명 엘비스를 염두에 두고 만든 곡이었다.”). 마크 알몬드(Mark Almond)의 명쾌한 한마디를 들어보자. “그는 왕이다. 그밖에 다른 코멘트는 일체 필요없다!” 하지만 60년 전역 이후 엘비스는 달라졌다. 매니저였던 톰 파커 퇴역대령의 입김이 강해지면서 음악방향이 빗나간 것이었다. 예의 로큰롤 넘버와는 거리가 먼 It`s now or never나 Surrender와 같은 감상적인 이탈리아 민요를 영역해 불렀다. 변화(아니면 변신?)의 징조는 프랭크 시내트라 쇼에 출연했을 때 뚜렷이 나타났다. 이 쇼에서 엘비스는 스탠다드 가수의 상징인 턱시도 정장을 했으며 호스트 프랭크 시내트라와 서로의 대표적 히트곡인 ‘Witchcraft’와 ‘Love me tender’를 바꿔 불렀다. 이 시점을 계기로 엘비스가 로큰롤을 버리고 스탠더드 팝 가수로 돌아서 청춘진영을 배신했다는 주장이 고개를 비집는다. 명백한 훼절이라고 단정해도 선뜻 반대논리를 펴기 어렵다. 그러나 친(親)엘비스 측은 그로써 그가 로큰롤 가수에서 ‘국민가수’로 승격하는 의미 있는 업적을 남기게 됐다고 반박한다. 로큰롤만의 논리로 음악을 풀고 엘비스를 규정하지 말자는 것이다. 어떻게 가치판단을 하느냐는 것은 관련자의 이데올로기나 각 시대의 성격에 따를 수밖에 없다. 변절이든 성숙이든 이 점만은 분명하다. 엘비스의 보컬이 초기의 로큰롤가수로 한정되었을 때 과연 후대에의 보컬 영향력을 소지할 수 있었겠느냐는 것이다. 그의 가창력은 음역, 에너지, 통제력, 피치 등 모든 면에서 압권으로 평가되어왔다. 상대적으로 덜 조명되었지만 ‘멀티칼라’인 그의 보이스에는 자니 레이의 급격한 변색, 두왑 그룹인 잉크스파츠(Inkspots) 빌 케니의 테너, 딘 마틴의 솜사탕 그리고 마리오 란자의 풍미가 동거했다. 그러면서도 로이 오비슨과 같은 유니크한 개성을 놓치지 않았다. 그가 스탠더드 발라드를 소화함으로 해서 우리들은 ‘Are you lonesome tonight’, ‘Suspicion’, ‘In the ghetto’, ‘The wonder of you’, ‘Fool’, ‘My boy’ 등의 팝 고전을 들을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은 명백한 역사의 유산이다. 그가 없었다면 성악가나 스탠더드 가수가 부르는 발라드만을 접했을 것이고 로큰롤 싱어가 선사하는 발라드의 진미(珍味)를 영원히 맛보지 못했을 것이다. 이와 함께 로큰롤과 스탠더드의 공존공영 가능성을 그처럼 실감나게 시범한 가수도 없다는 사실을 간과해선 안 될 것이다. 이미 흑인감성의 전달로 로큰롤이 ‘흑백의 퓨전’임을 목소리 하나로 입증한 그는 이어서 역시 매직 보컬로 로큰롤과 스탠더드의 제휴를 일궈내는 업적을 남겼다. 어쩌면 우리가 70년대 록과 메탈 분야에서 형식을 확립한 이른바 ‘록발라드’라는 것도 그 원조는 엘비스일지도 모른다. 엘비스는 목소리를 통해 대중의 공감대를 전달한 몇 안 되는 가수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건조한 보이스와는 거리가 먼, ‘이끼가 잔뜩 낀’ 풍부한 목소리였다. 아마 신나는 로큰롤 ‘Burning love’ 한 곡으로도 충분히 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이것이 후대 음악팬들이 그의 노래를 듣고 더러 ‘느끼하다’는 느낌을 받는 이유일 것이다. 후반기의 노래 가운데는 그런 요소를 풍기는 곡이 있었다. 하지만 엘비스와 동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은 거기서 느끼함이 아닌 되레 ‘풍성한 감성’을 수혈 받곤 한다. 미트 로프(Meat Loaf)는 말한다. “엘비스는 노래하는 것 무엇이든지 감정적으로 가사로 스피릿을 감상자들에게 전할 수 있었던 사람이다.” 그는 스스로 희구했던 명성과 부를 얻고 난 뒤 아쉽게도 그것들의 노예가 되는 비극적인 위인이기도 했다. 아무 데도 나갈 수가 없었고 편안히 사람을 만나 대화를 나누는 것도 불가능했다. 60년대나 70년대 로커였다면 이런 사실상의 ‘수감생활’을 극복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런 ‘생래적 반항아’가 아니었다. 스타덤의 고독과 소외에 차츰 무너져간 그의 말년을 잘 나타내주는 일화는 무수히 많다. 70년대 들어서 조울증이 불거진 그는 때로 격렬해져 텔레비전 세트나 당구대, 주크박스, 자동차 등 가장집기를 부수는 발작증세를 보이기도 했다. 언젠가 D.J. 폰타나와 그의 아내 앞에서 엘비스는 자신의 감정상태를 이렇게 토로했다. “당신들은 운이 좋은 겁니다. 난 엘비스인게 너무 지겨워요! 뭘 해야될 지를 모르겠어요. 뭔가 딴 일을 했으면 제발 한이 없겠어요.” 고고음악의 대명사인 자니 리버스의 해석. “엘비스는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었지요. 그래야만 했을 겁니다. 그가 할 수 있는 그 밖의 다른 일이란 없었지요.” 엘비스만큼 화려한 명성과 처절한 고독이라는 양극단을 겪은(아니면 겪기로 강제된) 인물도 없을 것이다. 그야말로 영욕의 교차요, 희비의 쌍곡선이다. 그래서 그를 통해 우리는 슈퍼스타덤의 빛 외에 냉혹함과 잔인성이라는 그림자를 동시 확인한다. 그의 사인은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공식적으로는 심장마비로 발표되었지만 사후 마약중독 비만증 그리고 자살 등 정황에 근거한 갖가지 설들이 난무했다. 이는 그의 후반기 삶이 얼마나 철저히 비공개로 갇혀 있었는지를 반증한다. 스스로 창조한 혁명에 쓰러진 순종파 가수일 수 있지만 그렇다고 그런 비평에 의해 그의 역사적 위상이 훼손되는 일은 없다. 여전히 그는 만인이 공감하는 ‘킹 오브 로큰롤’이며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금세기 최고 가수’다. 비틀스가 그 없이는 불가능했다는 한마디로 모든 엘비스의 가치는 입증된다. 세월이 흐르면서 오류로 더러 지적되지만 비평가 고(故) 레스터 뱅스(Lester Bangs)의 엘비스 예찬은 되새길 가치가 있다. “우리는 엘비스에게 해준 것과 같은 동의를 앞으로 어떤 누구에게도 해주지 않을 것이다!”
노래 : Bob Dylan (밥 딜런 ,Robert Allen Zimmerman)
밥 딜런의 발자취는 거대하다. 그 이름은 마치 선대의 성인(聖人)처럼 하나의 위엄으로 우리를 억누른다. 딜런과 그의 음악을 피해 가는 것은 ‘록 역사에 대한 접근’을 포기하는 것과 같다. 그를 아는 것은 납세와 같은 신성한 의무에 다름 아니다. 미국의 음악계와 학계에서 ‘딜런 읽기’는 실제로 교양필수 과정으로 인식되어 있다. 그는 록의 40년 역사에서 엘비스 프레슬리(Elvis Presley), 비틀스(The B... 밥 딜런의 발자취는 거대하다. 그 이름은 마치 선대의 성인(聖人)처럼 하나의 위엄으로 우리를 억누른다. 딜런과 그의 음악을 피해 가는 것은 ‘록 역사에 대한 접근’을 포기하는 것과 같다. 그를 아는 것은 납세와 같은 신성한 의무에 다름 아니다. 미국의 음악계와 학계에서 ‘딜런 읽기’는 실제로 교양필수 과정으로 인식되어 있다. 그는 록의 40년 역사에서 엘비스 프레슬리(Elvis Presley), 비틀스(The Beatles) 그리고 롤링 스톤즈(Rolling Stones)와 함께 최정상의 위치를 점한다. 그러나 이들 ‘전설의 빅 4’ 가운데에서도 딜런이 남긴 궤적은 차별화 아닌 특화(特化)되어 역사를 장식한다.

얼핏 그의 위상은 ‘실적주의’로 따질 때 매우 허약해 보인다. 엘비스, 비틀스, 롤링 스톤즈는 그 화려한 전설에 걸맞게 무수한 히트곡을 쏟아냈다. 넘버 원 히트곡만 치더라도 엘비스는 18곡(통산 2위), 비틀스는 20곡(1위), 스톤즈는 8곡(11위)이나 된다. 하지만 딜런은 그 흔한 차트 1위곡 하나가 없다. ‘Like a rolling stone’과 ‘Rainy day woman #12 & 35’ 등 두 곡이 2위에 오른 것이 고작이다. 차트 톱 10을 기록한 곡을 다 합쳐봐야 4곡에 불과할 뿐이다. 그에게 대중성이란 어휘는 어울리지 않는다. 상업적이란 말과는 아예 인연이 없다. 이렇듯 실적이 미미한 데도 록의 역사는 마치 신주 모시듯 그를 전설적 존재로 떠받드는 이유는 무엇일까? 비틀스, 스톤즈, 엘비스는 차트 정복 외에도 또 다른 공통점이 있다. 비록 그 가지는 다를지언정 ‘록의 스타일 확립’ 이라는 몸체는 유사하다는 것이다.

비틀스는 록의 예술적 지반을 확대했고, 스톤즈는 록에 헌신하며 형식미를 완성했고, 엘비스는 록의 정체성을 부여했다고들 한다. 분명히 딜런도 몸체에 자리한다. 깃털은 결코 아니다. 그러나 타(他) 3인의 몸체가 외양이라면 그는 ‘내면’ 이라고 할 수 있다. 바로 노랫말이요, 메시지다. 왜 이것이 중요한가? 음악은 사운드와 형식만으로 이미 메시지가 아닌가? 하지만 그것은 그렇게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로큰롤이 폭발하여 확산되던 시점인 1950년대, 즉 엘비스가 활약하던 당시에 로큰롤은 메시지가 없었다. 1960년대 들어서 비틀스가 미국을 급습해 록의 르네상스를 일궈내고 있던 때까지도 록은 의미있는 가사와 격리된 상태였다. 그래서 의식계층으로부터 멸시를 당했다. 그 때 밥 딜런이 있었다. 비틀스는 누구보다 먼저 딜런의 위력을 절감했다. 그의 포크 사운드와 메시지를 귀담아 듣고 그것을 자신들의 음악에 적극 수용한다. 1965년말 < Rubber Soul > 앨범의 수록곡인 ‘In my life’, ‘Girl’, ‘Norwegian wood’ 등에서 ‘톤 다운’ 을 드러내며 메시지를 잠복시킨 것은 전적으로 딜런의 영향 때문이었다.

밥 딜런은 실로 대중 음악의 지성사(知性史)를 이룬다. 타임(Time)지의 제이 칵스는 1989년 기사에서 다음과 같이 묻는다. “존 업다이크의 소설과 밥 딜런의 앨범 가운데 어느 것이 미국인들의 삶에 보다 자극을 주었는가? 존 업다이크 쪽에 표를 던진 사람이라면 이 기사를 여기까지 읽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의 가사는 그러나 때론 메시지의 파악이 어려운 ‘난해한 현대시’ 와 같다. 밑줄 긋고 열심히 분석해도 도대체 명쾌하지가 않다. 1960년대 중반 < Another side of Bob Dylan >, < Bring it all black home >, < Highway 61 revisited >가 연속 발표되었을 때, 미국 각 대학의 영문과에 ‘밥 딜런 시분석’ 강좌 개설이 유행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우리의 팝팬들에게 딜런이 상대적으로 소원한 이유가 여기에 있을 것이다. 미국인들에게도 이 정도인데 영어의 벽에 막혀 있는 우리가 어찌 그를 쉽게 수용할 수 있었겠는가. 때문인지 음반마저 제대로 소개되지 않았다. 초기곡으로 알려진 것은 그나마 메시지가 확연한 ‘Blowin’ in the wind’정도였다. 하지만 그것도 1970년대 중반의 금지곡 태풍으로 반전(反戰) 노래라는 낙인이 찍히면서 방송과 판매가 금지되었다. 그 외 우리 팝 인구에 회자된 노래로 ‘One more cup of coffee’나 ‘Knockin’ on heaven’s door’가 있다. 그러나 그의 대표곡 반열에도 오르지 못하는 ‘One more cup of coffee’가 통한 것은 단지 낭만적 제목과 함께 친숙한 선율 때문이었을 뿐, 딜런의 음악 세계에 대한 천착의 결과물은 전혀 아니었다. ‘Knockin’ on heaven’s door’ 인기의 영예도 실은 건스 앤 로지스가 더 누렸다.

극소수의 곡을 제외하고 밥 딜런은 우리에게 인기가 없었다. 비틀스, 스톤즈, 엘비스에 비한다면 엄청난 ‘부당 대우’였다. 언어 장벽과 무관한 음악 스타일 측면에서도 우리의 ‘홀대’ 는 마찬가지였다. 멜로디가 그럴싸한 곡이 있더라도 풍기는 내음이 지극히 ‘미국적’ 이었기에 우리의 청취 감성은 딜런을 꺼리곤 했다. 그의 음악 세계라 할 포크, 컨트리, 블루스는 미국 전통과 긴밀한 함수 관계를 지닌다. 선율과 사운드의 영국적인 맛에 길들여진 우리로서는 그의 음악에 잠기기가 쉽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 사이에 우린 어느덧 딜런과 크게 멀어져버렸다. 록의 흐름을 거슬러 올라가다가 꼭 딜런에서 막힌다. 신세대 가운데 더러는 우리의 팝 수용 문화에서 딜런 공백이 가져온 취약성을 맹렬히 질타하기도 한다. 우리 기준에서의 ‘팝 음악 여과’는 바람직하고 필요하다. 그러나 의역은 정확한 직역이 기초돼야 올바르다. 미국의 해석을 전제한 뒤라야 우리식 필터링의 의의가 배가된다.

그 직역의 첫 번째 대상이 바로 밥 딜런이다. 밥 딜런이 미국의 현대 음악사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이유는 그의 음악몸체가 곧 시대와 세대의 흐름을 떠안고 있기 때문이다. 딜런의 음악이 변화하는 과정과 그것을 있게 한 배경, 또한 그것을 주도해간 그의 자세는 ‘음악외적 환경’과 긴밀한 관계가 있다. 먼저 포크 록(Folk-Rock)이다. 그가 1960년대 초반 저항적인 모던 포크로 베이비 붐 세대를 견인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없다. 통기타만으로 연주되는 단순한 구조이지만 그것의 포획력은 비틀스가 사정권에 들어올 만큼 대단한 것이었다. 비틀스가 베이비 붐 세대를 발현시켰다면 그는 그들의 의식화를 유도했다. 그러나 딜런은 케네디의 피살에 자극받으면서 스스로 ‘위기감’ 을 불어넣는다. 이미 비틀스가 세대의 청취 볼륨을 증폭시킨 마당에 포크의 음량 가지고 과연 세대를 관통할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1971년 그는 이렇게 술회한 바 있다. “그들(비틀스)은 아무도 하지 않은 것을 하고 있었다. 그들의 코드는 정말 도에 지나친 것이었지만 하모니가 그것을 타당하게끔 했다. 그러나 맹세하건데 난 정말 그들에게 빠졌다. 모두들 그들이 어린 10대를 위한 광대이며 곧 사라질 것이라고들 했다. 그러나 내겐 명확했다. 그들이 지속력을 갖고 있다는 사실이. 난 그들이 음악이 가야할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내 머리 속에는 비틀스가 전부였다.” 그는 일렉트릭 기타를 잡아야 했다. 그것이 포크 록이었다. 포크의 순정파들로부터 배신자라는 질타는 불 보듯 뻔했다. 그가 뉴포트 포크 페스티벌에서 알 쿠퍼(Al Kooper), 마이크 블룸필드(Mike Boomfield)가 참여한 버터필드 블루스 밴드(Butterfield Blues Band)와 함께 전기 기타 연주를 했을 때 관중들은 “이건 포크 공연이야 나가!”라고 야유하며 돌과 계란 세례를 퍼부었다. 무대에서 내쫓긴 그는 통기타를 들고 되돌아왔지만 의미심장한 ‘It’s all over now’, ‘Baby blue’를 부르며 포크 관객들에게 아듀를 고했다. 껄끄러운 통과의례를 거친 뒤 밥 딜런의 포크 록은 ’Like a rolling stone’의 빅히트와 함께 만개했다. 이젠 막을 자도 없어졌다. 포크 록은 당시에 막대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존 레논과 밥 딜런을 결합해야 한다’는 것을 인식한 그룹 버즈(Byrds)는 ‘Mr. Tambourine man’으로 인기 가도를 질주했다. 그러나 그 곡은 딜런의 작품이었다.

버즈 뿐만 아니라 당시 포크 록계열 뮤지션치고 딜런의 곡을 손대보지 않은 사람은 없었다. 단숨에 포크 록은 1960년대 록의 주류로 부상했다. 1960년대 중.후반을 강타한 싸이키델릭 록(제퍼슨 에어플레인, 그레이트풀 데드)도 실상 포크 록에 영향받은 흐름이었다. 그럼 어째서 포크 록은 1960년대 청춘들을 사로잡아 그들의 의식을 대변할 수 있었을까? 비틀스가 딜런에게 배우고, 딜런이 비틀스로부터 영감을 얻은 ‘포크와 록의 결합’ 은 시대성 견인을 가능케 한 절묘한 무브먼트였다. 록은 생태적으로 거리의 청춘에 의해 확립된 ‘하위문화적 표현’이다. 따라서 하이 클래스나 인텔리겐차와는 일정한 거리를 둔다. 또한 포크는 저항성을 견지하는 민중 음악이지만 음악의 주체나 주소비자층은 학생과 지식인 세력이다. 성질상 엇비슷하면서도 걸어온 길이나 ‘계급성’은 엄연히 다른 것이다. 밥 딜런이 포크 오리지널로부터 급격히 퇴각하여 록으로 전향한 것은 단지 추세의 편승이 아닌 완전함을 향한 ‘하층문화의 긴급 수혈’로 보인다. 이를테면 ‘위’의 고매한 문제의식과 ‘아래’의 근원적 반항을 한고리로 엮는 것이다. 그러면서 저항 영역의 지반 확대와 수요자의 확충을 기할 가능성은 올라가게 된다.

지식인만이 아닌 1960년대 젊은이들의 ‘계층포괄적 무브먼트’ 는 포크 록과 이 점에 있어 밀접한 관계를 맺는다. 1960년대 중후반을 물들인 ‘히피보헤미안’ 물결도 딜런과 떼어낼 수 없는 흐름. 1960년대 록 역사에서 두 번째로 중요한 부분이다. ‘Like a rolling stone’은 포크 지식인의 소리라기보다 보헤미안적 정서의 노출로 파악해야 한다. 당시 딜런은 가치의 상대성을 신뢰하고 제도에 흡수되기룰 거부하는 이른바 비트(Beat) 사상에 빠져 있었다. 그가 진보적 시인인 알렌 긴스버그(Allen Ginsberg)와 교류하며 ‘개인 혁명’에 골똘해 있을 때가 바로 이 무렵이다. 비트는 이후 히피의 융기에 주요 인자가 되는데, 1960년대 중반 딜런의 음악을 가로지르는 것이 바로 이 ‘히피 보헤미안 정서’라 할 수 있다. 스스로 록 세계로 옮아가고 방랑적 지향을 설파한 것은 기존과 기성의 틀 깨기에 목말라 있던 베이비 붐 세대들에게 영도자가 제공한 ‘산교육’과 다름없었다. 따라서 밥 딜런은 그에게 등을 돌린 포크 근본주의자들의 수보다 휠씬 더 많은 록팬을 거뜬히 확보하게 된다. 음악적으로 딜런의 창작성이 이 때만큼 가공의 위력을 떨친 적도 없다. < Highway 61 Revisited >와 < Blonde On Blonde > 앨범은 포크의 엄숙주의에서 해방되어 록과의 결합으로 자유분방한 이미지를 포획한 결과였다. 그리고 그 음악은 ‘남을 위해’ 이데올로기에 봉사한 결과가 아니라 자신의 즐거움이 가져온 산물이기도 했다. 그가 포크의 프로테스트로부터 이탈한 것은 바로 ‘자유’와 등식화되는 ‘예술성’을 찾기 위한 노력이었다.

그는 저항성 대신 예술성을 얻었다. 개인적 경사도 겹쳤다. 사적으로 사라 로운즈와의 결혼은 그의 창작력 한층 북돋아주었으며 그 충만한 행복감은 그대로 < Blonde On Blonde > 앨범에 나타났다. 이 앨범의 탁월한 질감은 상당부분 사라와의 결혼이 낳은 것이라는 게 평자들의 일치된 시각이다. 나중 사라와의 파경 또한 그에게 또 하나의 명반 < Blood On The Tracks >를 안겨준다. 히피의 낭만적인 집단주의와 곧바로 이어진 이피(Yippie)의 전투성이 극에 달할 무렵 그가 뉴욕의 외곽 빅 핑크(Big Pink) 지하실에서 한가로이 더 밴드(The Band)의 멤버들과 자유 세션을 즐기고 있었다는 사실은 아이러니컬하다. 불의의 오토바이 사고가 가져온 행보이기도 했지만 그가 의도적으로 은둔을 택한 것은 분명했다. 세상이 소란함으로 가득할 때 그는 정반대로 정적을 취한 것이다, 그는 자신이 물꼬를 터준 미국 사회의 격랑이 결국 아무런 소득도 없을 것으로 예측했는지도 모른다. 세대의 공동체 지향은 지극히 ‘비이성적’으로 비춰졌을 테고 오히려 그는 그럴수록 자신에게 돌아와 근본을 탐구하는 것이 올바른 행위라고 여겼던 것 같다. 그러한 심저(心底)가 < John wesley Harding >과 < Nashiville Skyline >의 골간에 자리한다. 이 작품들에서 그는 ‘뜻밖에’ 재래식 컨트리 음악을 선보였다. 두 앨범은 모두 내쉬빌에서 녹음되었고 < Nashiville Skyline >의 경우 딜런은 컨트리 음악의 거성 자니 캐시(Johnny Cash)와 듀오로 ‘Girl from the north country’에서 다정히 호흡을 맞추기도 했다. 이 앨범에서 톱 10 히트곡 ‘Lay lady lay’가 나왔다. 이 곡을 비롯해 대부분의 수록곡에서 딜런의 보컬은 예의 날카로움이 거세된 채 한결 부드러워졌고 가사도 접근이 비교적 용이해지는 등 멜로딕한 무드가 전체를 지배했다. 다시 세상은 소용돌이에서 호수의 조용함으로 돌아왔다. 그것이 1970년대 초반의 분위기였다. 딜런이 씨앗을 뿌린 ‘컨트리 록’ 은 1970년대 내내 주요 장르 중 하나로 맹위를 떨쳤다.

딜런은 언제나 흐름의 주역이었다. 나중 음반화된 더 밴드와의 세션 앨범 < Basement Tapes >가 록 역사에서 ‘특혜’를 받는 것도 이러한 배경 속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1970년대 들어서 그는 ‘대중적’ 관점에서 뿌리에 대한 천착에 박차를 가했다. 예전에 그는 ‘좋은 사람만 따르면’ 된다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사람이 많이 따를수록 좋다’는 쪽으로 입장을 정리했다. 그가 1970년 < Self Portrait > 앨범에서 ‘Moon river’를 포함한 팝 스탠다드 넘버들을 노래한 것은 이러한 사고와 맥락이 닿아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대부분의 비평가들이 눈을 흘겼다. 레코드 월드(Record World)지는 이 앨범을 두고 “혁명은 끝났다. 밥 딜런이 ‘미스터 존스’에게 ‘Blue moon’을 불러주고 있다”며 혹평했다.(미스터 존스는 딜런이 < Highway 61 Revisited >의 ‘Ballad of thin man’에서 “여기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아, 존스 씨?”라고 했던 가공의 인물로 ‘제도권 인사’를 상징한다.) 빌보드 차트3위에 오르는 성공을 거두었지만 이처럼 평단의 이해를 구하는 데는 실패했다. 그러나 < Self Portrait >앨범을 상업적 표현으로 볼 수는 없다. 비판의 칼을 휘두르는 비평가들도 그렇게 생각하진 않는다. 근본을 탐구하는 방법론의 연장선에서 파악하는 것이 보다 정확하다. 딜런이 1970년대 후반부에 기독교에 귀의한 것도 비슷한 문맥으로 풀어야 할 것이다. 사실 신(神)에의 의지가 엿보인 < Show Train Coming >, < Saved >, < Shot Of Love > 등 3장의 종교풍 음반은 ‘사고의 깊이’가 두드러졌지만 ‘변신’이라는 부정적 의미에 가치가 함몰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1970년대 딜런을 ‘혼미의 거듭’으로 규정한다. 표면적으로는 그렇다. 그러나 그것을 뒤집어보면 그는 자신의 사고와 감정에 충실했다는 얘기가 된다. 이것이야말로 아티스트의 본령이다. 밥 딜런은 언제나 음악을 통해 세상과 삶의 근본 원리를 탐구하고자 했다.

1980년대의 밥 딜런은 1970년대의 습기를 벗고 ‘열기’를 회복한다. 정치적 시각도 이입한 < Infidels >, < Empire Burlesque > 그리고 1989년에 나온 < Oh Mercy >는 이전의 앨범들과 명백한 분리선을 긋는다. 날카로운 보컬은 오히려 1960년대의 모습에 더 가깝다. 그는 1980년대 중반 라이브 에이드(Live Aid), 아파르트헤이트에 반대하는 아티스트의 모임(Sun City) 등 일련의 자선행사에 얼굴을 내밀어 저항 전선에 복귀했다. 한 무대에서 그는 U2의 보노(Bono)와 함께 ‘Blowin’ in the wind’를 부르기도 했다. 딜런의 1980년대 앨범들에는 당시의 보수적이고 위압적 풍토를 거부하는 저항성이 숨쉰다. 그는 시대의 주류 한복판에는 없었지만 ‘시대의 공기’와 늘 함께 호흡했다. 그 공기를 어떤 때는 앞장 서 조성하고 어떤 때는 그것을 피해갔다. 밥 딜런의 한 면만을 바라보게 되면 그의 진면목을 알 수 없다. 그가 서 있던 ‘양쪽’ 자리를 다 관찰해야만 그 ‘드라마틱한 록 역사의 굴곡’ 을 읽을 수 있다. 록의 역사는 실로 위와 아래, 진보와 보수, 주류와 비주류, 기존과 대안이 끊임없이 부침을 되풀이 해왔다. 밥 딜런이 밟아온 길은 그것의 축소판이었다. 그러나 어떤 시점에서라도 - 가령 프로테스트의 깃발을 울렸을 때나, 대중성에 기웃거렸을 때나 - 딜런이 주변의 압박에 수동적으로 임한 적은 없다. 남이 시켜서 일렉트릭의 세계로 떠밀려 간 것이 아니었고, 의도적으로 신비를 축적하기 위해 은둔했던 것도 아니다. 그의 터전은 언제나 자신의 의지가 지배하는 세계였다. 비평가들이 밥 딜런을 전설로 숭앙하는 것은 그가 대중 음악계에서는 보기 드문 ‘음악의 주체’이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이야말로 음악인의 최고 영예인 ‘아티스트’란 소리를 들어 마땅했다. 그는 록에 언어를 불어넣었다. 포크와 컨트리를 록의 영역으로 끌어들였다. 시대와 맞서기도 했고 자신의 예술성에 천착하기도 했다. 그러한 업적과 성과의 편린들이 모여 그의 ‘광활한 아티스트의 세계를 축조하고 있다. 밥 딜런은 역사의 수혜와 위협 속에서 ‘인간’을 살려냈다. 음악인으로서 인간의 몸체는 다름 아닌 자유일 것이다. 밥 딜런의 위대함이 바로 여기에 있다.
노래 : Janis Joplin (제니스 조플린)
샌프란시스코 히피 시절을 수놓은 로큰롤의 화신이자 그 무렵의 ‘백인 블루스’ 열풍에 불을 댕긴 여걸이다. 1943년 텍사스 포트아더에서 출생해 히피 라이프스타일에 끌린 채 1966년에 홀연히 샌프란시스코로 올라왔다. 사이키델릭 록 밴드 빅 브라더 & 홀딩 컴퍼니(Big Brother & Holding Company)에 리드 싱어로 합류해 마치 무당 같은 광기로 무대를 평정, 관객들의 전율을 일으켰다. 한 인터뷰에... 샌프란시스코 히피 시절을 수놓은 로큰롤의 화신이자 그 무렵의 ‘백인 블루스’ 열풍에 불을 댕긴 여걸이다. 1943년 텍사스 포트아더에서 출생해 히피 라이프스타일에 끌린 채 1966년에 홀연히 샌프란시스코로 올라왔다. 사이키델릭 록 밴드 빅 브라더 & 홀딩 컴퍼니(Big Brother & Holding Company)에 리드 싱어로 합류해 마치 무당 같은 광기로 무대를 평정, 관객들의 전율을 일으켰다. 한 인터뷰에서 “언젠가 한 콘서트에서 2만5천명 관객과 섹스하고 그런 뒤 집에 홀로 가는 내용의 노래를 쓸 것”이라고 한 말은 소외와 폭발로 점철된 히피 세대정서를 축약한다. 1968년 그룹을 나온 뒤는 비교적 잔잔한 블루스로 전향했지만, 마약과용으로 27살의 꽃다운 나이인 1970년에 불운한 생을 마감했다. 사후 발표된 노래 ‘Me and Bobby McGee’는 추모열기로 빌보드 정상을 점했다. 하지만 대표작은 ‘어떻게 저런 노래가 나오나?’하는 경탄을 부르는 1967년 앨범의 ‘Ball and chain’과 ‘Summertime’.
노래 : Aretha Franklin (아레사 프랭클린)
20세기를 정리하는 작업이 러시를 이루는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궁금중이 있다.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가수는 누구였는가? 많은 음악팬들이 먼저 프랭크 시내트라 또는 앨비스 프레슬리를 떠올릴 것이다. 신세대 같으면 머라이어 캐리라고 답할 수도 있다. 하지만 서구 대중음악계는 거의 그 주인공을 흑인 여가수 아레사 프랭클린(Aretha Franklin)으로 낙점한 상황이다. 먼저 시사주간지 < 타임 >이 선정한 ‘2... 20세기를 정리하는 작업이 러시를 이루는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궁금중이 있다.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가수는 누구였는가? 많은 음악팬들이 먼저 프랭크 시내트라 또는 앨비스 프레슬리를 떠올릴 것이다. 신세대 같으면 머라이어 캐리라고 답할 수도 있다. 하지만 서구 대중음악계는 거의 그 주인공을 흑인 여가수 아레사 프랭클린(Aretha Franklin)으로 낙점한 상황이다. 먼저 시사주간지 < 타임 >이 선정한 ‘20세기 문화예술인 20인’을 보자. 여기에는 대중음악인 넷이 포함되었는데 그들은 프랭크 시내트라, 비틀즈, 밥 딜런 그리고 아레사 프랭클린이었다. # 20세기는 왜 아레사 프랭클린인가? 놀라운 사실은 로큰롤의 황제라는 엘비스 프레슬리와 자타가 공인하는 팝의 황제 마이클 잭슨이 빠졌다는 점이다. 두 대중음악사의 거인은 누가 봐도 아레사 프랭클린에 비해서는 대중적 지명도나 후대의 영향력 측면에서 앞선다. 만약 흑인 음악인 한 사람을 꼽았어야 했어도 그 주인공은 마이클 잭슨이 되어야 당연하다. 그런데 왜 아레사 프랭클린인가? 아레사 프랭클린이 명단에 오른 이유는 마이클 잭슨을 누른 ‘흑인의 대표성’ 때문으로만 볼 수 없다. 흑백을 떠나서 팝 음악계 전체를 진동시킨 ‘경이로운 가창력’ 때문이다. 아레사 프랭클린은 42년생 미국 멤피스에서 태어나 1960년대말 스타덤에 오른 왕년의 가수지만 지금도 노래하면 음악관계자들은 만장일치로 그녀를 거명한다. 얼마나 노래를 잘하길래 그런가. 몇가지 에피소드가 있다. 그녀가 1967년 프로듀서 제리 웩슬러의 지원 아래 어틀랜틱 음반사에서 처음 앨범을 취입했을 때 반주를 해준 사람들. 이른바 세션맨들은 아레사 프랭클린의 노래솜씨에 그만 넋을 잃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너도나도 ‘이런 환상적인 레코딩에 내가 참여한 것이 영광’이라며 어울려 춤을 췄다는 것이다. 지난해 미국의 유선방송국VH원이 주최한 ‘디바스 라이브’(음반으로도 나왔다) 공연에서는 관람객 중 한 사람이었던 여배우 사라 제시카 파커가 인상적인 소감을 남겼다. “아레사를 보기 전에 난 스타에 반한 적이 없다. 그런데 지금 난 홀린 기분이다. 아레사가 나한테 ‘옷이 멋져요’ 하길래 난 주저없이 ‘가지세요’라고 했다. 발가벗고 여기를 나가게 되더라도 상관없다. 그녀는 옷을 가질만하다!” 지난해 그래미상 시상식에서 아레사 프랭클린은 다시 한번 천부적인 가창력으로 사람들의 혼을 뺐다. 그녀는 시상식장에서 노래부르기로 돼있던 루치아노 파바로티가 병으로 불참하게 되자 갑작스럽게 대타로 뛰게 되었다. 뒷무대에서 불과 몇분 연습하고 나서 그녀는 거뜬하게 파바로티의 ‘네순 도르마’를 불렀다. 더욱이 72인조 오케스트라에 맞추기 위해 그 곡을 파바로티의 키로 노래했다. 주최측, 오케스트라 단원 그리고 객석 모두가 ‘경외’의 박수를 쳤다. 그녀에 대한 평자들의 찬사와 칭송은 끝이 없다. ‘형언하기 어렵다’(No other description will do)가 대부분이다. 음악평론가 벤 에드먼즈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지난 50년간 우리를 놀라게 하고 겁에 질리게 한 또다른 목소리를 들어본 적이 있는가?” 영국의 록잡지 < 모조 >는 지난해 ‘대중음악 역사상 가장 위대한 가수 100인’을 음악관계자 설문을 통해 선정한 바 있다. 여기서 1위는 말할 것도 없이 아레사 프랭클린이었다. < 모조 >측은 2위와 표차를 엄청나게 내고 그녀가 넘버 원 싱어가 된 것에 놀랐다. 다시금 아레사 프랭클린이 남녀, 흑백, 장르를 통틀어 ‘20세기의 최고 가수’라는 사실이 입증된 것이다. # 그녀는 소울의 영원한 여왕 그녀의 음악은 목소리와 창법의 미학뿐 아니라 시대성이 있다. < 타임 >지가 20세기의 위대한 문화예술인 중 한 사람으로 뽑은 진정한 이유다. 1960년대 후반 아레사 프랭클린이 불러 유명한 곡 ‘존경(Respect)’, ‘체인 오브 풀스(Chain of fools)’, ‘생각해요(Think)‘ 등에는 당시 흑인들의 당당한 의식이 배어 있다. 흑인 민권운동의 불길이 솟아오르던 그 무렵 흑인들은 백인 지배사회에서 결코 흑인들이 열등한 인종이 아니며, 따라서 자부심을 갖고 살아가자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것이 흑인의 영혼을 의미하는 소울(Soul)이었다. 소울 음악은 때문에 목청을 돋워 질러대는 ‘샤우트’를 특징으로 했다. 국내에서도 록의 비조로 불리는 신중현이 소울을 창조적으로 도입해 김추자, 박인수, 펄 시스터즈와 같은 소울 가수가 1970년대 초반 두각을 나타낸 바 있다. 1967년 미국의 디트로이트에 흑인 폭동이 발발했을 때 성난 흑인 민중들은 백인들에게 존경을 요구하는 의미에서 아레사 프랭클린의 그해 히트곡 ‘존경’을 시위대의 찬가로 불렀다. 이듬 해 디토로이트 시장 제롬 카바나는 ‘아레사 프랭클린의 날’을 선포하기도 했다. 미국사회가 이때부터 흑인의 음악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백인들도 흑인의 레코드를 구입하게 된 것이다. 아레사 프랭클린은 다시 말해 흑인 소울의 존재를 만천하에 고한 인물로 기억되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신(神)의 조리에 의한 거 같은 지존(至尊)의 가창력으로 그것을 전했으니 그 위력은 더할 나위가 없다. 또 지적하는 바이지만 ‘존경’을 듣고 동료가수 오티스 레딩은 혀를 내둘렀다. 이 곡은 그가 쓴 곡으로 직접 불러 발표한 바도 있는데, 아레사 프랭클린이 완전히 새롭게 그리고 완벽하게 소화한 것을 듣고 질려버린 것이었다. 오티스 레딩의 경탄. “난 내 노래를 잃어버렸어. 저 여자가 내 곡을 빼았아갔어!” 아레사는 조금도 변함없는 ‘소울의 여왕(Queen of soul)’으로 통한다. ‘여성 소울(Lady soul)’이란 별명도 있다. < 디바스 라이브 >에서 아레사 프랭클린과 호흡을 맞춘 머라이어 캐리도 그렇게 호칭하고 있지만 이 호칭들은 영원히 아무도 넘아다볼 수 없을 것 같다.
청아한 음색과 미인은 아니지만 이지적이고 고결한 모습으로 다른 가수들과는 확실한 차별성을 둔 제니퍼 원스(Jennifer Warnes)는 영화 < 사관과 신사 >와 < 더티 댄싱 >의 주제곡 'Up where we belong'과 '(I've had) The time of my life'로 1980년대에 알려졌지만 음악을 꼼꼼히 찾아 듣는 사람들에겐 그 이전인 1977년에 전미 차트 6위를 차지한 'Rig... 청아한 음색과 미인은 아니지만 이지적이고 고결한 모습으로 다른 가수들과는 확실한 차별성을 둔 제니퍼 원스(Jennifer Warnes)는 영화 < 사관과 신사 >와 < 더티 댄싱 >의 주제곡 'Up where we belong'과 '(I've had) The time of my life'로 1980년대에 알려졌지만 음악을 꼼꼼히 찾아 듣는 사람들에겐 그 이전인 1977년에 전미 차트 6위를 차지한 'Right time of the night'로 이미 익숙해진 여가수다. 우리나라에서는 이 두 곡 외에도 1987년에 공개한 'Famous Blue Raincoat'로 다운타운을 점령하며 국내 팬들과의 착상에 다시 한번 성공하기도 했다. 1947년 3월 3일, 시애틀에서 태어난 제니퍼 원스는 갓 20살이던 1967년에 텔레비전 쇼 프로그램에 고정으로 출연하면서 인지도를 쌓기 시작해 이듬해에 뮤지컬 < 헤어 >에 주연 급으로 출연하면서 가수로서의 워밍업을 시작했다. 뮤지컬에서 능력을 인정받은 그는 정치, 사회적으로 어수선하던 1968년에 차분한 포크 성향의 데뷔앨범 < I Can Remember Everything >으로 가멸찬 스타트를 했지만 블루스 리바이벌과 사이키델릭이 대세이던 당시의 음악 시장에 삼투하지 못했다. 1969년에는 더 후(The Who)의 노래 제목에서 힌트를 얻은 듯한 앨범 < See Me, Feel Me, Touch Me, Heal Me >로 기백 있는 두 번째 도전을 시도했지만 이 역시 철저히 가려졌다. 좌절한 제니퍼 원스는 3년 동안 신작을 발표하지 않은 채 자신의 정체성을 심각하게 고민한 후 벨벳 언더그라운드(Velvet Underground)의 멤버였던 존 케일(John Cale)이 프로듀서로 참여한 3집 < Jennifer >를 발표했지만 이 역시 성공하지 못하자 개인적인 좌절을 마음에 안고 캐나다 출신의 거물 싱어 송라이터 레너드 코헨(Leonard Cohen)의 백 보컬리스트가 되었다. 하지만 제니퍼 원스는 레너드 코헨으로부터 많은 것을 배우고, 공감하고, 느끼게 된다. 결국 레너드 코헨은 제니퍼 원스의 '멘토'와 같은 존재가 되었고 제니퍼는 레너드 코헨에 대한 존경의 뜻으로 1987년에 그의 노래들로만 채워진 명반 < Famous Blue Raincoat >를 내놓아 흠모의 정을 표했다. 이 앨범은 미국에서는 72위까지 밖에 오르지 못했지만 국내에서 이 타이틀곡만큼은 라디오 프로그램을 확실히 장악했고 지금도 비 오는 날이면 신청이 끊이지 않는 그의 시그니처 송이 되었다. 제니퍼 원스가 세인들의 주목을 받은 것은 1977년에 자신의 이름을 타이틀로 내세운 4집에서 컨트리 풍의 'Right time of the night'이 빌보드 싱글 차트 6위에 오르면서부터. 후속 곡 으로 낙점된 발라드 'I'm dreaming'이 50위에 랭크되는 성적을 거둔 그는 1979년에 다섯 번째 음반 < Shot Through The Heart >을 발표해 컨트리 팝 스타일의 'I know a heartache when I see one'이 19위를 차지하며 '원히트원더 가수'라는 꼬리표를 뗐다. 그로부터 8년 동안 제니퍼 원스는 정규앨범 제작에 착수하지 않았지만 그 사이 그는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화려하고 바쁜 시간을 보내는 아이러니를 맞이했다. 제니퍼 원스는 1982년에 리차드 기어와 데보라 윙어가 주연한 영화 < 사관과 신산 >의 주제곡 'Up where we belong'을 허스키 보이스로 유명한 블루 아이드 소울 가수 조 카커(Joe Cocker)와 듀엣으로 불러 그해 가장 큰 히트 곡이 되었다. 이 곡은 3주 동안 싱글 차트 정상을 지켰으며 그래미 최우수 듀엣 부문과 아카데미에서 주제가 부문도 수상하는 그랜드슬램을 달성했다. 이제 제니퍼 원스는 더 이상 '레너드 코헨'의 백 보컬리스트가 아니라 당대를 대표하는 여가수로 그 위치가 격상됐다. 하지만 이 노래의 스매시 히트는 그를 옭아맸다. 1983년에는 당시 신인이었던 탐 크루즈가 주연한 미식축구 영화 < All The Rights Moves/뜨거운 가슴으로 내일을 >의 동명 주제곡을 크리스 톰슨(Chris Thompson)과 함께 부르며 'Up where we belong'의 성공 공식을 그대로 따랐으나 영화와 주제곡 모두 참패하자 제니퍼 원스는 다시 자신 속으로 움츠려 들었다. 4년 후인 1987년, 이 지적인 여가수는 다시 남성 가수와 함께 영화 주제곡을 취입했다. 바로 'Unchained melody'로 유명한 라이처스 브라더스(Righteous Brothers)의 멤버였던 빌 메들리(Bill Medley)와 함께 그 유명한 댄스 무비 < 더티 댄싱 >의 주제가 '(I've had) The time of my life'를 부른 것. 이 곡으로 제니퍼 원스는 'Up where we belong'으로 달성한 그랜드슬램(싱글차트 1위, 그래미 수상, 아카데미 주제가 부문 수상)을 재현하며 다시 한번 영화 주제가 여왕으로서의 명성을 이어갔다. 1992년에 발표한 일곱 번째 앨범 < The Hunter >와 2001년에 공개한 8집 < The Well >은 빌보드 앨범차트 200위에 랭크되지도 못한 채 대중들과의 접점 찾기에 실패했지만 < The Well >에 수록된 빌리 조엘(Billy Joel)의 원곡을 재해석한 'And so it goes'는 국내에서 은은한 사랑을 받았다.
1990년대 후반 일기예보가 발표한 ‘좋아 좋아’의 클라이맥스 소절을 들었을 때 많은 음악 팬들은 팝록, 어덜트 컨템포러리 싱어 케니 로긴스(Kenny Loggins)가 1982년에 공개한 ‘The more we try’를 떠올렸다. 일기예보의 노래가 케니 로긴스의 발라드 스타일보다 업템포로 밝은 면을 강조했지만 클라이막스의 기본 멜로디는 같았다. ‘The more we try’는 ‘Forever’, ‘Footl... 1990년대 후반 일기예보가 발표한 ‘좋아 좋아’의 클라이맥스 소절을 들었을 때 많은 음악 팬들은 팝록, 어덜트 컨템포러리 싱어 케니 로긴스(Kenny Loggins)가 1982년에 공개한 ‘The more we try’를 떠올렸다. 일기예보의 노래가 케니 로긴스의 발라드 스타일보다 업템포로 밝은 면을 강조했지만 클라이막스의 기본 멜로디는 같았다. ‘The more we try’는 ‘Forever’, ‘Footloose’와 함께 우리나라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케니 로긴스의 베스트 트랙이다. 1948년 1월 7일 미국의 워싱턴 주에서 태어난 케니 로긴스는 1970년대 초반 짐 메시나(Jim Messina)와 함께 포크록 듀오 로긴스 & 메시나(Loggins & Messina)를 만들어 ‘Your Mama don''t dance(4위)’나 ‘Thinking of you(18위)’같은 히트곡을 배출했는데 특히 ‘Your mama don''t dance’는 1988년 팝메탈 밴드 포이즌(Poison)이 커버해 다시 한번 탑 텐에 올려놓아 다시 한번 명곡임을 입증했다. 케니는 성공적인 듀엣 활동을 접고 1977년부터 결별해 본격적으로 독립 활동을 시작해 멜리사 맨체스터(Melissa Manchester)와 공동으로 작곡한 ‘Whenever I call you friend(5위)’를 비롯해 ‘This is it(11위)’, 케니 로긴스의 오리지날을 두비 브라더스가 리메이크해 차트 정상은 물론 그래미 올해의 레코드를 수상한 ‘What a fool believes’ 등으로 1970년대를 마감했다. 그의 진정한 성공은 1980년대를 맞이하면서 화려하게 개화하기 시작했다. 1982년에 저니(Journey)의 보컬리스트 스티브 페리(Steve Perry)와 호흡을 맞춘 ‘Don''t fight it(17위)’와 ‘Heart to heart(15위)’, 그리고 유독 국내에서 사랑 받았던 ‘The more we try’가 들어 있는 그의 역작 < High Adventure >는 곧 다가올 성공에 대한 워밍업이었다. 1984년부터 쏟아지는 케니 로긴스의 히트곡들은 우연인지 필연인지 거의 모두가 영화에 삽입된 노래들이었다. 그의 대표곡 ‘Footloose(1위)’와 ‘I''m free(22위)’는 영화 < 풋루스 >의 사운드트랙에 수록된 노래들이었고, ‘Danger zone(2위)’은 < 탑 건 >에서, ‘Meet me half way(11위)’는 < 오버 더 탑 >으로부터, ‘Nobody''s fool(8위)’은 < 캐디섁Ⅱ >에서 배출된 히트 싱글들이다. 그러나 이 ‘Nobody''s fool’을 마지막으로 싱글 차트와의 친분을 정리한 케니 로긴스는 1990년대 중반을 기점으로 가족의 소중함과 어린이들을 위한 음반을 만드는데 열중했다. 1990년대 초반 아내와의 이혼이 그에겐 큰 충격이었던 셈이다. 그의 예민하고 가녀린 목소리는 ‘Danger zone’이나 ‘Don''t fight it’처럼 강한 음악보다 ‘The more we try’나 ‘Forever’, ‘Whenever I call you friend’와 같은 차분하고 부드러운 노래에 더 잘 어울린다. 그의 성공은 팝시대로 대표되는 1980년대 음악 풍토에 정확히 들어맞는 시대적 요청이었기에 가능했다.
노래 : Patti Smith Group (패티 스미스 그룹)
멤버 : Patti Smith, Ivan Kral 멤버 : Patti Smith, Ivan Kral
노래 : Pointer Sisters (포인터 시스터즈)
노래 : The Hooters (더 후터스 (팝락 밴드))
1980년대 중반 ‘And we dance’, ‘Day by day’같은 일련의 히트곡들로 미국 본토는 물론 우리나라에서도 상당량의 지분을 소유한 5인조 팝록 밴드 후터스(Hooters)는 1978년 필라델피아에서 결성되었다. 이들은 당시 팝음악의 큰 흐름이었던 뉴웨이브나 신스팝 위주의 대중 음악을 지양하고 기타 중심의 정통적인 팝록을 지향점으로 정했다. 롭 하이맨(Rob Hyman/보컬, 키보드), 에릭 바질리... 1980년대 중반 ‘And we dance’, ‘Day by day’같은 일련의 히트곡들로 미국 본토는 물론 우리나라에서도 상당량의 지분을 소유한 5인조 팝록 밴드 후터스(Hooters)는 1978년 필라델피아에서 결성되었다. 이들은 당시 팝음악의 큰 흐름이었던 뉴웨이브나 신스팝 위주의 대중 음악을 지양하고 기타 중심의 정통적인 팝록을 지향점으로 정했다. 롭 하이맨(Rob Hyman/보컬, 키보드), 에릭 바질리안(Eric Bazilian/보컬, 기타), 존 릴리(John Lilley/기타), 롭 밀러(Rob Miller/베이스), 데이비드 우오시키넨(David Uosikkinen/드럼) 이렇게 다섯 명중에서 팀의 버팀목 역할을 했던 하이맨과 바질리안은 1980년대 중반 밴드가 최상의 절정기를 맞이하기 전에는 작곡가와 세션 뮤지션으로 나름의 명성을 구가하던 인물들이었다. 하이맨의 대표작은 신디 로퍼(Cyndi Lauper)와 공동으로 작곡한 그녀의 명곡 ‘Time after time’이다. 이 자신감을 바탕으로 후터스는 1985년 2집 < Nervous Night >을 공개해 대박을 터뜨렸다. ‘And we dance(21위)’, ‘Day by day(18위)’, ‘Where do the children go?(38위)’가 40위안에 들면서 인기의 불꽃에 기름을 부으며 곧 골드 레코드를 획득했다. 유수의 음악 전문 잡지나 평론가들은 주저 없이 1985년을 빛낸 LP로 < Nervous Night >을 꼽았다. 전자 음악이 난무하던 시절, 그들은 록과 포크, 그리고 흥겨운 록이 어우러진 후터스의 음악으로부터 순수 록큰롤에 대한 진정성을 발견한 것이다. 이 음반에 대한 평가를 함축하는 키워드는 ‘신선함’이다. 3번째 작품 < One Way Home >은 전작만큼의 반향을 일으키지는 못했지만 ‘Satellite(61위)’, ‘Johnny B(61위)’같은 싱글들의 분투로 이 레코드에도 금띠를 둘렀다. 그러나1989년의 < Zig Zag >는 이전의 화려한 성공과 인기를 한꺼번에 말아먹는 결과를 초래했다. 1980년대 후반에 나타난 포크 무브먼트와 룻츠 사운드의 번창함으로 인해 이들의 음악은 더 이상 새롭게 들리지 않았다. 그리고는 우리의 기억에서 가물가물해졌다. 그러나 그들은 후터스의 이름이 아닌 작곡가의 신분으로 돌아왔다. 1990년대 여성 싱어 송라이터 소피 B. 호킨스(Sophie B. Hawkins)의 데뷔 앨범에서 에릭 바질리안의 이름을 발견할 수 있었고, 1995년에는 그래미에도 여러 부문 노미네이트 된 조안 오스본(Joan Osbourne)의 앨범 < Relish >을 위해 에릭 바질리안과 롭 하이맨이 많은 곡들을 작곡해 줌으로써 우리들에게 다시 한번 후터스의 기억을 상기시켰다. 현재까지도 꾸준하게 공연 활동을 하고 있지만 새로운 음반 제작 소식은 들리지 않고 있다.
멤버 : Bruce Hornsby, David Mansfield, John Molo, David Pack, Joe Puerta 멤버 : Bruce Hornsby, David Mansfield, John Molo, David Pack, Joe Puerta
노래 : The Script (더 스크립트)
멤버 : 마크 펠리저(Mark Pellizzer, 기타), 알렉스 타나스(Alex Tanas, 드럼), 나스리 앳웨(Nasri Atweh, 리드보컬), 벤 스피박(Ben Spivak, 베이스) 멤버 : 마크 펠리저(Mark Pellizzer, 기타), 알렉스 타나스(Alex Tanas, 드럼), 나스리 앳웨(Nasri Atweh, 리드보컬), 벤 스피박(Ben Spivak, 베이스)
노래 : 5th Dimension (피프스 디멘션,The Fifth Dimension)
미국의 보컬 그룹 미국의 보컬 그룹
R&B, 소울 가수 R&B, 소울 가수
노래 : Gladys Knight & The Pips (글래디스 나이트 앤 핍스)
레이 찰스, 샘 쿡, 아레사 프랭클린, 오티스 레딩, 제임스 브라운…. 이들의 공통점은(흑인인 것 빼고) 무엇일까? 바로 목소리 하나만으로 50- 60년대 대중 음악의 혁명을 일궈낸 흑인 보컬의 대가들이란 점이다. 소울로 대변되는 흑인 대중 음악은 ‘흑인의 정신’과 연결되며 한껏 우렁차고 독특한 울림을 창조하며 60년대 흑인들의 자존심을 한껏 높이는데 기여했다. 록의 역사에서 이들의 음반을 두고두고 명반으로 추대... 레이 찰스, 샘 쿡, 아레사 프랭클린, 오티스 레딩, 제임스 브라운…. 이들의 공통점은(흑인인 것 빼고) 무엇일까? 바로 목소리 하나만으로 50- 60년대 대중 음악의 혁명을 일궈낸 흑인 보컬의 대가들이란 점이다. 소울로 대변되는 흑인 대중 음악은 ‘흑인의 정신’과 연결되며 한껏 우렁차고 독특한 울림을 창조하며 60년대 흑인들의 자존심을 한껏 높이는데 기여했다. 록의 역사에서 이들의 음반을 두고두고 명반으로 추대하는 것 또한 목소리 하나만으로도 대중 음악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는 점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만큼 대중 음악의 고향 미국에서 흑인이 대중 앞에 서서 자신들의 정체성을 담아 노래를 해 지지를 받는 것이 어려웠다는 애기다. 70년대 들어서도 흑인 대중 음악은 보컬이 단연 강세였다. 지금 소개하는 알 그린 역시 70년대를 대표하는 흑인 보컬리스트 중 하나이다. 우리나라에선 그가 70년대 스티비 원더나 80년대 라이오넬 리치만큼의 지명도는 없지만 적어도 그가 활동한 미국에선 소위 보컬의 대가로 그를 알아 모신다. 그가 인기를 누리던 시기 마빈 게이와 스티비 원더, 배리 화이트가 ‘셀프 프로듀싱’을 감행하며 아티스트의 명예를 획득하는 동안 알 그린은 과거 선배들처럼 오로지 목소리로만 승부하며 흑인 대중음악계의 기린아로 떠오른다. 스모키 로빈슨, 마빈 게이와 같은 디트로이트의 모타운(motown) 보컬이 고급 와인처럼 잘 정제된 세련된 보컬이라면 그의 보컬은 잘 익은 곡주처럼 구수한 멤피스 지역의 어틀랜틱 레코드 산하 스택스(stax) 소울에 보컬 정체성을 두고 있다. 멤피스를 중심으로 미국 중남부를 주 활동무대로 한 그는 바로 멤피스 소울의 대가 오티스 레딩의 혼을 계승한 보컬리스트이다. 텁텁한 느낌에, 숨이 막히듯 조여 드는 듯한(오티스 레딩의 ‘Sitting on the dock of bay’를 들어보라!) 멤피스 소울 처럼 그의 보컬색은 대중들이 쉽게 다가가긴 힘든 성질이지만 익숙해지면 그만의 보컬 마력에 헤어나오지 못한다. 귀를 콕콕 찌르는 듯한 강한 훅을 날리는 그의 보컬은 그래서 쉽사리 잊혀지지 않는 감흥이 있다. 하지만 알 그린은 선배 오티스 레딩의 업적을 단순히 계승하는데 그치지 않았다. 1972년에 발표한 그의 명반 < I’m Still in Love with You >에선 로이 오비슨의 히트곡 ‘Oh pretty woman’ 과 크리스 크리스토퍼슨의 컨트리 곡 ’For the good times’과 이듬해 1973년 명반 < Call Me >에선 컨트리의 아버지 행크 윌리엄스의 ‘I’ m so lonesome I could cry’와 역시 컨트리 싱어 윌리 넬슨의 ‘Funny how times slips away’를 무리 없이 리메이크해 그의 보컬dl 단순히 정통 흑인 성향의 것을 넘어 백인들에게도 어필하며 보편성을 획득했다. 여기에 비지스를 연상시키는 유려한 팔세토(가성) 실력은 특유의 섹시(sexy)함을 과시하며 오빠부대를 양성하기도 했다. TV 출연도 많이 해 공연 시 관객석에 꽃을 건내며 대중들에게 친근한 이미지를 연출하는 그의 무대 매너 또한 시선을 집중시키는데 한 몫 했다. 그의 목소리를 돋보이게 해준 세련된 연주 편곡도 지나칠 수 없는 부분이다. 1971년부터 1976년까지 활동하면서 그의 든든한 오른팔이 되준 윌리 미첼(Willie Mitchell)은 알 그린의 명성을 가능케 해준 일등 공신이다. 음계의 8개 노트를 코드로 사용하는 재즈적인 화성전개와 스트링이 애잔하게 깔아주는 그의 편곡방식은 다소 거북하게 느껴지는 알의 목소리에 도회지적인 세련된 감수성을 더해줬다. 여기에 1960년대 대표적인 R&B 연주 밴드 부커 티 앤 엠지(Booker T. & Mg’s)의 드러머 알 잭슨(Al Jackson)을 모셔오면서 알 그린-윌리 미첼-알 잭슨의 3인 공조 체제를 유지하며 히트곡 양산에 나선다. 1946년 미국의 아칸소주 태생인 알 그린은 교회를 통해 자연스레 음악을 접했고, 재키 윌슨(Jackie Wilson)의 음악에 매료되면 차츰 소울 가수로의 꿈을 키우게 된다. 종교적인 분위기의 집안 환경 탓에 아버지의 반대가 심했지만 1967년 자신의 밴드 ‘소울 매이트’를 조직해 ‘Back up train’이라는 싱글을 발표해 빌보드 차트에 진입하지만 이렇다 할 성공을 거두진 못한다. 1969년 텍사스의 한 클럽에서 무명가수로 활동하던 알 그린은 그의 보컬에 매료 되 그의 프로듀서를 자청해 나선 윌리 미첼과 운명적 만남을 갖는다. 재즈 빅밴드의 리더였던 윌리는 원래 트럼펫 연주가였는데, 알 그린의 보컬을 접한 그는 가능성을 발견했다. 그를 멤피스로 데리고 가 하이(Hi) 레코드사를 설립, 이후 그와 뗄래야 뗄 수 없는 명콤비로 자리 메김 한다. 윌리와 알은 이후 6개의 골든 앨범과 8개의 골든 싱글을 양산하며 70년대를 그들의 시대 로 만들었다. ‘Tired of being alone’(1971), ‘Let’s stay together’(1971) , ‘Look what you have done for me’(1972), ‘You ought to be with me’(1972) , ‘Call me’(1973) , ‘Here I’m’(1973), ‘Livin’ for you’(1973) , ‘Sha-La-La(1974)를 모두 빌보드 차트 top 10에 올려놓는다. 골드를 기록한 앨범 < Let’s Stay Together >(1972), < I’m Still in Love with You >(1972), < Call Me >(1973)는 지금까지도 대표적인 소울 명반으로 빠짐없이 추대된다. 부와 명예를 획득한 알의 인생행로는 그러나 이후 순탄치 않았다. 위장과 척추에 이상이 오며 건강이 악화되고 자신이 보는 앞에서 그의 부인이 권총으로 자살을 하는 불상사가 생긴다. 정신이 극도로 황폐해진 그는 이후 ‘신의 경고’라는 생각에 1977년 윌리 미첼과 결별하며 대중 음악계를 떠난다. 그리고 교회를 사 들여 목사가 되기로 한 그는 이후 설교와 가스펠 가수 활동을 병행한다. 80년대 내내 그는 대표적인 가스펠 싱어로 등극하며 수많은 그래미 상을 획득하기도 한다. 영원히 결별인줄 알았던 윌리 미첼과 1985년에는 재결합하며 앨범 < He is the right >를 발표했지만 이미 알 그린만의 매혹적인 보컬마력은 거세 당한 후였다. 대중들은 차츰 70년대 섹시미를 날리던 왕년의 알 그린을 잊고 있었다. 70년대의 그의 보컬업적은 이후 섹시 록커 프린스 등 수많은 소울 가수들에게 영향을 주며 대중음악계에 끼친 그의 공로를 인정 받아 1995년엔 락 앤 롤 명예의 전당에 입성하는 영광을 얻는다. 그리고 올해 2003년, 그가 정확히 대중음악계를 은퇴한지 26년 만에 왕년의 알 그린식 소울을 들고 컴백했다. 그것도 그의 명 콤비 윌리 미첼이 프로듀싱과 편곡을 담당하며 그를 기억하던 팬들에게 반가운 소식을 전했다. 2003년 11월 26년만의 회심작 < I’ Can’t Stop >을 재즈 레이블 블루노트에서 발표하며 활동을 재개한 그는 20대 전성기의 느낌을 50대 중반의 노장 가수의 느낌으로 고스란히 담아냈다. 혼의 우렁찬 울림과 펑키한 느낌이 배가된 더욱 다채로워진 윌리 미첼의 편곡과 그의 농익은 보컬은 여전히 ‘노장은 살아있다’를 증명하고도 남는 반가운 컴백이다.
소울 펑크 가수 소울 펑크 가수
노래 : Groove Armada (그루브 아마다)
영국 런던 출신의 일렉트로니카 댄스 듀오 그루브 아마다(Groove Armada)는 베이스먼트 잭스(Basement Jaxx), 모치바(Morcheeba), 엠제이 콜(MJ Cole) 등과 함께 세기말 유행처럼 번진 일렉트로니카와 트립 합의 계보를 이어간 그룹이다. 이들은 레벨 42(Level 42), 스파이로 자이라(Spyro Gyra), 샤카탁(Shakatak) 같은 일련의 재즈펑크(Jazz-Funk) 퓨전 ... 영국 런던 출신의 일렉트로니카 댄스 듀오 그루브 아마다(Groove Armada)는 베이스먼트 잭스(Basement Jaxx), 모치바(Morcheeba), 엠제이 콜(MJ Cole) 등과 함께 세기말 유행처럼 번진 일렉트로니카와 트립 합의 계보를 이어간 그룹이다. 이들은 레벨 42(Level 42), 스파이로 자이라(Spyro Gyra), 샤카탁(Shakatak) 같은 일련의 재즈펑크(Jazz-Funk) 퓨전 그룹들처럼 언더그라운드 클럽가를 중심으로 출발해 이후 영국 실험주의 음악노선을 초토화시키는데 든든한 공을 세웠다. 톰 핀들레이(Tom Findlay)와 앤디 카토(Andy Cato)의 2인 체제로 구성된 그루브 아마다는 일렉트로니카, 앰비언트, 다운비트, 트립 합, 테크노 등의 다양한 장르를 한데 융합한다. 아울러 이들은 음반을 통해 몽환적이고 중독성 강한 일렉트로닉 연주 음악을 들려주는가 하면 객원싱어들을 초빙해 각 앨범마다 독특한 색깔을 주조해낸다. 1997년에 이르러 선보인 ‘4 tune cookie’, ‘At the river’ 등의 몇몇 싱글과 이듬해 발표한 데뷔음반 < Northern Star >(1998)부터 그러한 사운드 특징을 잘 증명한다. 그룹은 1999년 보다 범위가 폭넓어진 2집 음반 < Vertigo >을 발표해 영국차트 톱 20에 들어가는 성적표를 얻어냈다. ‘If everybody looked the same’, ‘At the river’, ‘I see you baby’(팻보이 슬림에 의해 리믹스) 같은 히트곡을 배출해내며 이들을 일렉트로티카 계열 그룹의 리스트에 당당히 올려놓았다. 이후 그룹은 엘튼 존(Elton John) 공연의 오프닝 밴드로 무대에 서며 조금씩 성공가도를 내달렸고, 2000년에 접어들어 2집 < Vertigo >를 미국에서 재 발매하며 대중적 인지도를 넓혀나갔다. 2000년 발표된 < The Remixes >에 뒤이어 선보인 < Back to Mine >(2000)은 알그린(Al Green), 베리 화이트(Barry White), 티어스 포 피어스(Tears for Fears), 어 트라이브 콜드 퀘스트(A Tribe Called Quest), 루츠 마누바(Roots Manuva) 등의 다양한 아티스트들이 참여해 앨범의 질을 드높였다. 나아가 그룹은 이듬해에 드디어 주류로 진입해 일렉트로닉 앨범차트 7위를 기록한 3집 음반 < Goodbye Country (Hello Nightclub) >에서 이스트코스트 래퍼 제루(Jeru)가 피처링한 ‘Suntoucher’와 싱글 ‘Superstylin’ 등이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며 자신들의 개성을 거침없이 표출했다. 2년 뒤인 2003년에 발표된 4집 < Lovebox >은 전작보다 진일보해 일렉트로닉 앨범차트 3위까지 오르는 성과를 거둔다. 특히 앨범은 이글 아이 체리(Eagle-Eye Cherry)의 누나인 네네 체리(Neneh Cherry), 랩 그룹 내피 루츠(Nappy Roots), R&B 여가수 선샤인 앤더슨(Sunshine Anderson), 포크 싱어 리치 헤이븐스(Richie Havens) 등과 함께 작업해 다양한 양질의 사운드를 구사하기도 했다.
빌리 홀리데이(Billie Holiday), 엘라 핏제랄드(Ella Fitzgerald), 줄리 런던(Julie London), 사라 본(Sarah Vaughan), 디나 워싱턴(Dinah Washington)과 함께 최고의 여성재즈가수 중 한 사람으로 추앙받는 디바 니나 시몬(Nina Simone). 음지에 잔뜩 웅크린 자세로 바깥세상을 향해 차가운 시선을 보내는 요즘 젊은 세대들에게 그녀의 목소리는 마법의 주... 빌리 홀리데이(Billie Holiday), 엘라 핏제랄드(Ella Fitzgerald), 줄리 런던(Julie London), 사라 본(Sarah Vaughan), 디나 워싱턴(Dinah Washington)과 함께 최고의 여성재즈가수 중 한 사람으로 추앙받는 디바 니나 시몬(Nina Simone). 음지에 잔뜩 웅크린 자세로 바깥세상을 향해 차가운 시선을 보내는 요즘 젊은 세대들에게 그녀의 목소리는 마법의 주문과도 같다. 통한과 슬픔, 분노와 격정 그리고 발산하고 싶어도 마땅한 곳을 찾을 수 없어 떠도는 영혼들에게 그녀는 구원의 손짓을 보낸다. 어둡고 습한 곳에 자신을 숨기고 있지만 말고 잘못된 세상을 향해 분노를 터뜨리라고. 화를 내고, 하고 싶은 소리를 외치라고. 이제 너의 주장을 펴고 권리를 찾을 때라고. 속삭이듯 한탄하듯 때론 비단처럼 윤기 나게 때론 벨벳처럼 부드럽게 노래에 실어 전언한다. 본명은 유니스 웨이몬(Eunice Waymon), 가수 니나 시몬(Nina Siomone)으로 대중음악사에 거대한 발자취를 남긴 그는 사우스캐롤라이나 트라이온에서 가난한 집안의 여섯 자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4살 때 피아노를 치기 시작해 피아노신동으로 불린 그는 ‘유니스 웨이몬 기금’(Eunice Waymon Fund)을 설립하는 등 물심양면으로 지원을 아끼지 않은 음악선생님의 도움으로 음악교육을 계속 받을 수 있었고 뉴욕 소재 줄리아드 음악학교에서 학업을 이어갔다. 가정을 지탱하기위해, 그는 피아노반주자로 일을 시작해야만 했다. 1954년 여름 그는 뉴저지주 애틀랜틱시티에 있는 아일랜드 바의 연주자로 직업을 잡았는데, 바 주인은 그에게 노래도 잘하길 요구했다. 클래식 피아니스트가 되기 위해 끊임없는 연습을 해왔던 유니스 웨이몬은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아차릴 새도 없이 연예사업으로 들어섰다. 그는 이름을 니나(리틀 원)시몬으로 바꿨다.(1950년대 할리우드의 쟁쟁한 여배우들과 어깨를 겨룬 프랑스의 여배우 시몬 시뇨레(Simone Signoret)의 이름을 차용) 1950년대 후반, 니나 시몬은 베들레헴 레이블에서 최초의 트랙들을 녹음했다. 이 곡들에서 피아니스트, 가수, 편곡과 작곡가로서 그의 비범한 재능은 한층 더 빛을 발했다. ‘Plain gold ring’, ’Don’t smoke in bed’, ’Little girl blue’와 같은 노래들은 곧 그의 상연목록에서 스탠더드가 되었다. 오페라 (Porgy and Bess)의 곡 중 하나인 ‘I love you, Porgy’가 타운 홀, 카네기 홀 그리고 뉴포트 재즈 페스티벌에서 불리고 히트를 기록하면서 나이트클럽 가수였던 그는 스타로 발돋움했다. 재즈스탠더드, 가스펠, 흑인영가, 클래식음악, 유래가 다양한 포크음악, 블루스, 팝, 뮤지컬과 오페라 송, 아프리카의 영창 게다가 자신이 직접 작곡한 곡까지, 이미 음악활동의 시작부터 창대했던 그는 준비된 스타였다. 기회는 당연한 만찬이었다. 클래식의 대위법, 재즈의 즉흥연주, 블루스의 변조 등 다방면의 음악요소를 결합해내는 시몬의 재능은 더 이상 무시될 수 없는 발군의 실력이었다. 독자적인 타이밍, 고요함의 음악적 극대화, 몇몇 코드로만 곡을 진행시키는 피아노연주 등의 방식으로 절제미가 돋보이는 자신만의 공연분위기를 주조해내는 실력은 가히 범접을 불허할 정도로 특징적이었으며 그의 여러 작품들에 녹아들었다. 때로 그의 목소리는 어둡고 가공하지 않은 날것 그대로의 것에서부터 부드럽고 달콤한 것까지 변화무쌍한 스펙트럼을 과시했다. 잠시의 휴지와 반복 속에 그의 목소리는 외치고 속삭이고 또 한탄했다. 가끔은 피아노, 노래 소리, 몸짓이 따로 노는 것 같으면서도 하나의 결정체로 모아졌다. 다양한 방식으로 그는 청중들에게 주문을 걸었다. 여러 가지 주문 중 하나에만 걸려도 니나 시몬이 비교불허의 아티스트란 걸 인정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마력에 청중들은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었다. 1963년 버밍햄의 교회에서 터진 폭파사건으로 네 명의 흑인아이들이 사망하자, 니나는 미국에서 동족들이 처한 상황에 대해 비통함과 격노를 금치 못했고 곧 규탄의 의미를 담은 ‘Mississippi Goddam’(빌어먹을 미시시피)을 썼다. 이 노래의 강력한 호소력과 필립스 레코드에서 처음 녹음 발표한 < Nina Simone in Concert >에 실린 노래들은 그녀의 또 다른 예술적 지평을 보여주었다. 예술적 목표를 이뤄내기 위해 자신만의 음색과 세심한 피아노연주에 심혈을 기울인 그는 사랑, 증오, 슬픔, 기쁨, 외로움 등 인간의 모든 감정을 노래에 실어 분명하게 전해주었다. 한때 커트 웨일(Kurt Weill)과 베르톨트 브레히트(Bertold Brecht)가 작곡한 노래 ‘Pirate Jenny’를 부르며 여배우로서 대극장을 순회하기도 했던 그는 프랑스에서 자끄 브렐(Jacques Brel)의 연약한 사랑노래 ’날 떠나지 말아요’(Ne me quitte pas)를 부르기로 했다. 니나는 ‘소울의 여대사제’로 불리며 팬들과 비평가들에 의해 신비로운 인물로 존경받음과 동시에 거의 종교계인사로 종종 오해를 사기도 했다. 1966년 흑인들에 대한 사회적 편견과 시선을 네 명의 흑인여성들의 비애로 써낸 ‘네 여인들’(Four women)을 발표했는데, 이 노래는 흑인들에게 모욕적이라는 이유로 필라델피아와 뉴욕 라디오방송에서 금지되었다. 여대사제는 말씀전파에 적당한 음악을 찾기 위해 다른 길을 걸어갔다. RCA레이블로 옮겨 발표한 첫 앨범 < Nina Simone Sings The Blues >에 실린 ‘I want a little sugar in my bowl’, ’Do I move you?’, ’My man’s gone now’ 그리고 랭스톤 휴스(Langston Hughes)가 그녀를 위해 써준 시를 토대로 한 저항가요 ‘Backlash blues’를 포함해 더 많은 공민권운동가요를 불러 자신의 노선을 확증했다. 마틴 루터 킹 목사 암살의 비극을 노래한 ‘Why?(The King of Love is Dead)’을 위시해 ’Brown baby’, ’Images’(워링 쿠니의 시에 근거한), ‘Go limp’, ’Old Jim Crow’, ’To be Young, Gifted and Black’ 등의 노래들은 미국에서 흑인국민적인 찬가가 되었다. 그녀는 홀로 외롭게 노래하고 연주한 앨범 < Nina Simone and Piano ! >(1970)로 열성적인 팬들조차 놀라게 만들었다. 환생, 죽음, 고독 그리고 사랑에 대한 내성적인 노래들로 채운 모음집은 그녀의 녹음경력에 변함없는 하이라이트였다. 노래들에 새롭고 더 깊은 차원의 선물을 담아냈다. ‘Ain’t got no/I got life’(뮤지컬 “헤어”에서), 레너드 코헨(Leonard Cohen)의 ’Suzanne’, ‘To love somebody’와 같은 비지스의 노래들, 봉고연주로 두 배의 속도감을 붙인 클래식 ’My way’, ‘Just like Thumb’s blues’ 그리고 네 곡의 밥 딜런의 노래들의 주목할 만한 버전들에는 더 새롭고 깊은 차원의 재능을 담아냈다. < Emergency Ward >는 절정의 선물이었다. 그녀는 조지 해리슨이 쓴 두 곡 ’My sweet lord’와 ‘Isn’t it a pity’의 긴 버전을 연주하면서 환각과 도피성을 배제한 분위기로 꾸몄다. 니나는 그러나 어쨌든 자유로워지고자 했다. 그녀는 자신이 조종당해 왔다고 느꼈고, 음반회사, 연예사업, 인종차별주의에 넌더리가 났다. 1974년 미국을 떠나 바바도스(Barbados)로 향한 그녀는 이듬해 리베리아, 스위스, 파리, 네덜란드에서 살다가 마지막으로 프랑스의 남부에 안착했다. 1978년엔 주디 콜린스(Judy Collins)의 ‘My father’를 정확한 해석으로 다시 부른 버전과 최면술을 거는 ’Everything must change’가 실린 새 앨범 < Baltimore >을 오랜만에 내놓았다. 그리고 1982년 미국으로부터 자진 “망명”을 선언한 자신의 마음을 노래로 표시한 앨범 < Fodder On My Wings >을 파리에서 녹음했다. 자신의 음악에 대한 결연한 의지가 여느 때보다도 잘 담긴 앨범이었다. 니나는 곡을 쓰고 개작하고 편곡했다. 피아노 하프시코드를 연주하며 영어와 프랑스어로 노래했다. 이 앨범은 1988년 그녀의 아버지의 죽음을 회상(추억)하는 노래 ‘Alone again naturally’의 특별버전을 포함한 몇몇 보너스트랙이 더해져 CD로 재발매 되었다. 1984년, 런던의 로니 스콧(Ronnie Scott)에서 열린 그녀의 콘서트실황을 담은 필름이 매혹적인 비디오로 발매되었다. 드럼에 폴 로빈슨(Paul Robinson)이 찬조 출연한 이 비디오에는 그녀의 첫 레코드에서 발췌한 노래 ‘My baby just cares for me’가 포함돼 큰 인기를 누렸다. 다음 해 < Nina’s Back >(니나의 귀환)이란 제목의 새 앨범을 발표한 그녀는 전 세계를 누비는 콘서트에 나섰다. 1989년 그녀는 피트 타운젠트(Pete Townsend)의 뮤지컬 < The Iron Man >에 공헌한 것을 시작으로 1990년과 1991년 브라질 팝가수 마리아 베사니아(Maria Bethania)와 아프리카음악의 세계화에 앞장선 유명 여성보컬리스트 마리암 마케바(Mariam Makeba)와 함께 녹음했다. 1991년엔 또한 자서전 < I Put A Spell On You >가 출간되었다. 이 책은 프랑스, 독일 그리고 네덜란드어 번역본으로도 출판되었다. 1993년 스튜디오에서 만든 새 앨범 < A Single Woman >이 발매되었다. 이 앨범에는 로드 맥퀸(Rod McKuen)의 노래들, 자신의 노래 ‘Marry me’, 프랑스의 스탠더드를 자기버전으로 부른 ’Il n’y a pas d’amour heureux’, 매우 감동적인 ‘Papa, can you hear me?’가 수록되었다. 그녀의 노래는 영화음악으로도 사용되었다. 레퍼토리 중 5곡이 사운드트랙에 들어간 1993년 영화 (Point Of No Return, The Assassin, code name: Nina로도 불린다)를 위시해 (1996)에 사용된 ‘I wish I knew how it would feel to be free’, (1996)에 삽입된 ’My baby just cares for me’ 그리고 (1997)의 ‘Exactly like you’까지 그의 목소리는 영화와 함께 관객의 마음을 움직였다. 세월은 흘러도 그녀의 음악은 변함없이 새롭고 젊은 청취자들의 호기심을 끊임없이 자극했다. ‘Ain’t got no/I got life’는 1988년 네덜란드에서 대형히트를 기록했다. 그녀는 또한 자신의 뒤를 든든히 받쳐주는 절친한 반주자들, 퍼커션의 레폴도 플레밍(Lepoldo Fleming), 베이스의 토니 존스(Tony Jones), 드럼의 폴 로빈슨(Paul Robinson), 키보드의 하비에르 콜라도스(Xavier Collados) 그리고 기타리스트 겸 그녀의 음악 감독 알 섀크만(Al Schackman)과 함께 세계 순회공연을 펼치며 청중들과 함께 여전히 흥분의 순간을 맛봤다. 1997년 런던에 바비칸(Barbican) 극장에서 그는 공민권운동, 형제애를 위해 미국의 첫 번째이자 주요한 리더들 중 한사람에게 헌정하는 의미의 노래 ’Every Time I Feel The Spirit’을 불렀다. ‘Reached down and got my soul’, ’The blood done changed my name’, ’When I see the blood’와 같이 더욱 영가(Spiritual)적이고 생명과 같은 노래들이 뒤를 이었다. 니나는 1997년 프랑스에서 열린 니스 재즈 페스티벌(Nice Jazz Festival), 1998년 그리스의 의 데살로니가 재즈 페스티벌(Thessalonica Jazz Festival)의 하이라이트였다. 1999년 아일랜드의 더블린에 기네스 블루스 페스티벌에서는 그녀의 딸 리사 첼레스테(Lisa Celeste)와 함께 몇몇 곡을 듀엣으로 합창해 모녀의 다정한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시몬은 라틴 수퍼스타 라파엘(Rafael)과 함께 노래하고 두 번의 디즈니 연극 워크숍에 참여, 의 타이틀 역과 의 날라 역을 맡아 공연하면서 세계 투어를 했다. 1998년 7월 24일, 니나 시몬은 넬슨 만델라의 80회 생일파티에 특별손님으로 초대됐다. 1999년 10월 7일 그녀는 더블린에서 개최된 음악시상식에서 평생업적을 기리는 공로상을 품에 안았다. 2000년에 들어 그녀는 5월 26일 애틀랜타 명예 시민권을 수여받았다. 6월 9일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아프리카계 미국인 음악 협회로부터 다이아몬드 상을 수상한데 이어 8월 7일에는 프랑스에서 명예로운 총사상을 수상했다. 닥터. 시몬은 2003년 4월 21일 프랑스 남부 까리-르-루에에 그녀의 별장에서 오랜 투병 끝에 세상을 떠났다. 그녀의 소망대로 유해는 아프리카의 여러 곳에 뿌려졌다. 매사추세츠대학으로부터 음악과 인류애에 대한 명예박사학위를 받은 그는 바로 최후의 전승시인의 한 사람으로서 그 누구와도 견줄 수 없는 역사적 지위를 얻었다. 최고의 여류시인, 우리시대의 음악작가로 그는 영원히 우리의 기억 속에 살아 있을 것이다.
노래 : Journey (저니 (락 밴드))
1973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결성된 저니는 1980년대 초, 중반을 강타했던 록 그룹이다. 하드록, 재즈록 밴드로 출발했던 저니는 미성의 보컬리스트 스티브 페리(Steve Perry)를 영입하면서 팀컬러를 팝 록으로 완전히 전환한다. 비판도 많이 받았지만 어쨌든 대중들의 반응은 뜨거운 것이어서 그 변화가 처음으로 나타난 앨범인 < Evolution >부터 이들은 발표하는 작품마다 수백만장의 앨범을 팔아치우는 ... 1973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결성된 저니는 1980년대 초, 중반을 강타했던 록 그룹이다. 하드록, 재즈록 밴드로 출발했던 저니는 미성의 보컬리스트 스티브 페리(Steve Perry)를 영입하면서 팀컬러를 팝 록으로 완전히 전환한다. 비판도 많이 받았지만 어쨌든 대중들의 반응은 뜨거운 것이어서 그 변화가 처음으로 나타난 앨범인 < Evolution >부터 이들은 발표하는 작품마다 수백만장의 앨범을 팔아치우는 빅 스타로 떠오르게 된다. 특히 멤버들의 역량이 집대성된 1981년작 < Escape >는 빌보드 앨범 차트 정상에 등극하며 저니의 명성을 최고조로 끌어올린다. 이 음반에서만 ‘Open arms’(후에 머라이어 캐리가 리메이크), ‘Don''t stop believin''’, ‘Who''s crying now’등 톱 텐 싱글이 3개가 쏟아졌다. 이들은 곧 동시대의 포리너(Foreigner), REO 스피드웨건(REO Speedwagon)등과 함께 성인 취향의 록(AOR)과 발라드를 가장 잘 만드는 팀으로 인정받게 된다. 이처럼 세계인들을 열광시키며 연이은 히트 퍼레이드를 벌인 저니는 라틴 록의 거장 산타나(Santana)에서 활약하던 두 청년 닐 숀(Neal Schon)과 그렉 롤리(Greg Rolie)가 손을 잡으면서 출범했다. 여러 뮤지션들을 영입해 록 밴드의 모양을 갖춘 저니는 곧 메이저 레이블과 계약을 체결하며 단번에 씬의 실력파 그룹으로 각광받았다. 달콤한 멜로디보다 청자의 예측을 거부하는 굴곡이 심한 리듬과 재기 발랄한 솔로 파트를 강조한 저니의 초창기 작품들은 다분히 매니아 취향이었다. 따라서 일반인들이 마음 편하게 다가서기에는 다소 무리가 따랐던 것이 사실이다. 데뷔작 < Journey >에서 < Look Into The Future >, < Next >에 이르는 일련의 앨범들은 다소 거칠지만 록의 원시적 매력으로 똘똘 뭉친 곡들로 넘쳐 났다. 저니의 중, 후반기 사운드는 아련한 키보드를 축으로 선율미를 극대화한 것이 특징이다. 이 때가 대중들에게 가장 널리 어필한 시기였다. 기-승-전-결의 구도를 가지고 점층적으로 분위기를 고조시키는 극적인 구성이 밴드의 상징처럼 굳어졌다. 고혹적이고도 애절한 보이스를 지닌 스티브 페리는 그 구성에 꼭 맞는 보컬리스트였고 완벽한 시스템을 장비한 밴드는 힘차게 가속 페달을 밟을 수 있었다. 좋은 반응을 얻었던 싱글 ‘Wheel in the sky’가 수록된 앨범 < Infinity >는 첫 백만 장 이상의 음반 판매고를 기록했고, 이어 < Evolution >부터 < Frontiers >에 이르는 멈추지 않는 성공가도가 열리게 되었다. 저니의 포근한 록은 여러 세대로부터 지지를 받았고 그들의 이름은 전세계적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샘솟던 그들의 창작력도 이후 둔화되기 시작했고, 멤버들의 빈번한 과외 활동까지 겹치면서 저니는 결국 1986년 < Raised On Radio >를 마지막으로 해체를 맞이하게 됐다. 해산 이후 밴드 사운드의 핵이였던 닐 숀은 배드 잉글리시(Bad English)를 결성해 ‘When I see you smile’, ‘Price of love’라는 히트 싱글들을 제조해 냈고, 드러머 스티브 스미스(Steve Smith)는 자신의 전공인 재즈로 돌아갔다. 싱어 스티브 페리 역시 앨범들을 발표하며 솔로 아티스트로서의 캐리어를 다져 나갔다. 아쉬움이 남아서일까. 각자 개인 플레이에 열심이던 멤버들은 정확히 해체 10년이 되는 1996년 < Trial By Fire >로 다시 뭉쳤고, 차트에서도 괜찮은 성과를 올렸다. 그러나 두 스티브는 결국 투어 도중에 이별을 선언했고, 새롭게 정비된 저니는 2001년 통산 11번째 음반 < Arrival >을 내놓으며 건재함을 보여주었다. 저니는 팝 전성시대의 화사함 속에서 자신들의 기량을 마음껏 뽐냈던 그룹이다. 록에 이유모를 부담감을 느끼는 이들마저도 살며시 보듬어 안았던 이 매력적인 밴드는 앞으로도 ‘편안한 록’의 캐치프레이즈를 내걸고 아직 남아 있을 팬들을 향해 나아갈 것이다.
자니 캐쉬(Johnny Cash)는 2차 세계대전 직후 컨트리 음악계에서 가장 인상적이고 영향력 있는 활동을 펼친 뮤지션 중 한명이다. 깊고 낭랑한 중음역대의 보컬과 간결한 기타와 함께 그는 기본에 충실하면서도 자신만의 진보적이고 독특한 사운드를 추구했다. 컨트리뮤직의 고향인 내쉬빌사운드(Nashville), 홍키통크(Honky Tonk), 로큰롤(Rock’n’Roll), 그 어떤 것에도 치우치지 않은 자신만의 ... 자니 캐쉬(Johnny Cash)는 2차 세계대전 직후 컨트리 음악계에서 가장 인상적이고 영향력 있는 활동을 펼친 뮤지션 중 한명이다. 깊고 낭랑한 중음역대의 보컬과 간결한 기타와 함께 그는 기본에 충실하면서도 자신만의 진보적이고 독특한 사운드를 추구했다. 컨트리뮤직의 고향인 내쉬빌사운드(Nashville), 홍키통크(Honky Tonk), 로큰롤(Rock’n’Roll), 그 어떤 것에도 치우치지 않은 자신만의 서브장르를 만들고 구축했다. 감성적으로 무디고 정직한 포크(Folk)와 반항적인 로큰롤(Rock’N’Roll) 그리고 염세적인 컨트리(Country)뮤직 사이의 중간지점에서 캐쉬는 로큰롤의 탄생과 반항적 태도 그리고 다분히 록적인 간소함과 솔직한 음악적 발성법을 적절히 융화시켜냈다. 거기에는 깊은 역사적 공감대가 존재했다. 그는 음악적 사명을 다하는 그 날까지 100곡이 넘는 히트싱글을 내며 흑과 백 모두에게 인정받았고, 특히 록의 황제(King of Rock) 엘비스 프레슬리(Elvis Presley)를 비롯해 한 시대를 풍미한 당대의 거목들(칼 퍼킨스, 제리 리 루이스, 척 베리)과 함께, 1950년~60년대를 빛낸 로커빌리(Rockabilly)음악의 대표적 인물 중 하나였다. 아칸사스 출신인 자니 캐쉬는 세 살 때에 다이에스(Dyess)로 이주했다. 열둘 어린나이에 그는 이미 자신의 노래를 쓰기 시작했다. 라디오에서 들은 컨트리 송에 음악적 영감을 얻은 그는 고등학교시절 아칸사스 라디오 방송국(KLCN)에서 노래했다. 대학을 졸업한 1950년에는 자동차회사에 취직해 디트로이트로 거처를 옮겼다. 한국전쟁의 발발과 함께 그는 공군에 입대했다. 공군에 있는 동안 캐쉬는 기타를 구입해 스스로 연주를 익혔다. 그는 ‘Folsom prion blues’를 포함해 본격적으로 곡을 쓰기 시작했다. 캐쉬는 1954년 공군에서 예편해 텍스사 여성 비비안 리베르토(Vivian Leberto)와 결혼했다. 멤피스에서 신혼생활을 시작한 그는 라디오 아나운서과정을 밟았다. 밤에는 기타리스트 루더 퍼킨스와 베이시스트 마샬 그랜트로 구성된 트리오의 일원으로 컨트리음악을 연주했다. 지방라디오방송국(KWEM)에서 무료로 공연을 간간히 겸하면서 안정된 연주의 기틀을 마련하던 트리오는 선 레코드사에 오디션을 볼 기회를 잡게 된다. 마침내 1955년 샘 필립스가 설립한 선 레코드사(Sun Records)에 오디션을 치르게 된 캐쉬는 처음에 자신을 가스펠싱어로 소개했다. 필립스는 자니에게 좀 더 상업적인 것을 요구했고, 그는 ‘Hey Porter’로 곧 필립스를 매료시켰다. 이를 계기로 캐쉬는 자신의 데뷔싱글 ’Cry Cry Cry’/Hey Poter’를 발매하게 된다. 필립스는 싱글레코드에 캐쉬를 “자니”라고 기입했다. 레코드 프로듀서는 또한 퍼킨스와 그랜트를 테네시 투(Tennessee Two)라고 불렀다. 1955년에는 ‘Cry Cry Cry’가 인기를 얻으며 컨트리차트 14위에 올랐다. 그리고 루이지애나 헤이라이드(Louisiana Hayride) 지역에서 거의 1년간 머물렀다. 두 번째 싱글 ’Folsom prison blues’가 1956년 초 컨트리차트 4위의 쾌거를 올렸고, 연이어 ‘I walk the line’이 6주간 1위를 차지함과 더불어 팝 차트에도 탑20위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1957년에도 컨트리싱글차트 13위에 랭크된 ‘Give my love to rose’를 포함해 몇 곡의 히트곡을 내며 히트행진을 이어갔다. 캐쉬는 또한 화려한 장식으로 치장한 타 뮤지션들과 달리 완전히 검정복장으로 그해 그랜드 올 오프리(Grand Ole Opry debut)에 데뷔했다. 이로 인해 그는 ’맨 인 블랙‘이라는 별명을 얻게 된다. 그리고 1957년 11월에 그는 드디어 자신의 처녀작 < Johnny Cash with his hot and blue guitar >를 발매해 음반매장을 강타했다. 1958년에는 10주간 차트 정상을 지킨 ‘Ballad of a teenage queen’을 비롯해 또 다른 넘버원 싱글 ’Guess thing happen that way을 포함해 무려 8곡을 컨트리와 팝 차트 공히 상위권에 올리며 성공가도를 질주했다. 1958년에 그는 가스펠앨범을 녹음하고자 했으나 선(sun)에서는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선 레코드는 또한 캐쉬의 음반로열티 인상에도 반대했다. 두 가지 결정적 연유로 캐쉬는 결국 1958년 콜롬비아레코드사(Columbia Records)로 레이블을 옮겨 그해 말 싱글 ‘All over again’을 내놓았다. 이 곡은 컨트리차트 4위와 팝 차트 38위에 올랐다. 1959년 초에는 콜럼비아에서 발표한 두 번째 싱글 ‘Don’t take your guns to town’ 또한 컨트리차트 정상을 차지했다. 팝 차트에도 32위까지 올라 그의 최대히트곡 중 하나가 된 이 곡과 함께 그해 내내 발매된 싱글들이 앞 다퉈 차트 정상에 등극했다. 캐쉬는 가스펠앨범을 낼 기회도 맞았다. 자니 캐쉬의 찬송가는 1970년대까지 주제앨범연작으로 만들어졌다. 하지만 지칠 줄 모르는 히트행진을 지속하던 그의 쾌속질주에도 제동이 걸리기 시작했다. 1959년에, 그는 1년에 거의 300회가 넘는 공연일정을 소화하는 동안 암페타민(각성제)을 복용하기 시작했다. 1961년까지 그의 약물복용은 날로 증가했다. 그로인한 악영향은 히트 싱글과 앨범 수의 감소세로 나타났다. 1963년에 그는 가족을 떠나 뉴욕으로 이주하기에 이른다. 그러던 중 캐쉬는 술친구 칼 스미스(Carl Smith)의 아내 준 카터(June Carter)에게서 받은 ‘Ring of fire’로 컨트리차트 정상을 마크한다. 이 곡은 7주간 차트정상에 머무르며 팝 차트에도 20위에 올랐다. 1964년에는 ‘Understand your man’가 넘버원 히트를 기록했다. 그러나 약물중독의 어두운 그림자에 둘러싸여있던 캐쉬는 1965년 자신의 기타케이스로 엠페타민을 다량 밀수하다 엘 파소(El Paso)에서 체포되었다. 같은 해 그랜드 올 오프리(Grand Ole Opry)에서의 공연이 거절당했고, 그동안 각광받아온 커리어에도 치명적 타격을 입었다. 1966년에는 아내 비비안이 이혼을 제소했다. 이혼 후 캐쉬는 내쉬빌로 이주했다. 거기에서 그는 칼 스미스와 이혼한 준 카터와 친밀해졌다. 카터의 조력으로 그는 약물중독에서 서서히 벗어날 수 있었다. 그녀는 또한 캐쉬를 기독교신자로 바꿨다. 1968년 초 ’Jackson’과 ‘Rosanna’s going wild’가 탑 텐 히트 기록하면서 재비상의 날개를 펴기 시작한 자니는 공연 중 무대 위에서 운명의 여인 준 카터에게 드라마틱한 청혼을 했고, 1968년 봄 결혼식을 올렸다. 1968년에, 자니 캐쉬는 가장 큰 인기를 끈 앨범 < Johnny Cash at Folsom Prison >을 녹음 발표했다. 교도소 공연실황을 녹음한 이 앨범에서 싱글 커트된 ‘Folsom prison blues’가 팝 차트에 걸쳐 큰 인기를 얻으며 컨트리차트 정상을 재확인했다. 그리고 연말에 레코드는 골드를 기록했다. 이듬해, 그는 후속앨범 < Johnny Cash at San Quentin >을 발표했다. ’A boy named sue’는 컨트리차트 1위와 팝 차트 2위에 오르며 히트싱글이 되었다. 캐쉬는 1969년 밥 딜런(Bob Dylan)의 컨트리앨범 < Nashville Skyline >에 게스트로 참여했다. 딜런은 ABC 가수 텔레비전프로그램 ‘자니 캐쉬 쇼’에 출연해 그에 화답했다. 자니 캐쉬쇼는 1969년과 71년, 2년에 걸쳐 방영되었다. 캐쉬는 1970년대 들어 제2의 전성기를 누린다. 자신의 텔레비전쇼와 더불어, 그는 백악관에서 리차드 닉슨(Richard Nixon)을 위해 공연한 것을 비롯해, (Gunfight)에서는 명배우 커크 더글라스(Kirk Douglas)와 함께 공연했으며, 존 윌리엄스(John Williams)와 보스턴 팝스 오케스트라와 함께 공연했다. 다큐멘터리영화의 테마로도 주목받은 그는 ’Sunday morning coming down’과 ‘Flesh and blood’이 넘버 원 히트를 기록하며 변함없는 인기를 이어갔다. 1971년을 통해, 자니 캐쉬는 차트 3위를 기록한 ’Man in black’을 포함해 히트행진을 지속했다. 캐쉬와 카터 모두 1970년대 초 토착미국인과 죄수들의 시민권을 위한 캠페인에 참여하며 사회적 활동을 넓혀갔다. 가끔은 빌리 그래험(Billy Graham)과 함께 하기도 했다. 1970년대 중반, 캐쉬의 차트 등장횟수는 줄어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는 마이너히트를 이어갔다. 그리고 1976년 ‘One piece at a time’(컨트리차트1위)를 비롯해 웨일론 제닝스(Waylon Jennings)와 듀엣으로 노래한 ’There ain’t no good chain gang’(컨트리차트 2위)와 ‘(Ghost)riders in the sky’와 같은 빅 히트싱글을 간간이 냈다. 1975년 캐쉬는 자서전 < Man in black >을 출간했다. 1980년에 그는 가장 젊은 나이에 컨트리 명예의 전당에 올랐다. 그러나 1980년대에는 눈에 띄는 히트싱글을 내지 못하면서 고전했다. 콜럼비아 레코드사와도 마찰을 빚었다. 자니 캐쉬(Johnny Cash)는 1982년 선(Sun)출신의 로커빌리 명인 칼 퍼킨스(Carl Perkins), 제리 리 루이스(Jerry Lee Lewis)와 함께 팀을 이뤄 레코드 < The Survivors >를 발표했고 괜찮은 성과를 올렸다. 캐쉬, 웨일론 제닝스, 윌리 넬슨(Willie Nelson) 그리고 크리스 크리스토퍼슨(Kris Kristofferson)이 동참한 밴드 The highwaymen은 1985년 그들의 첫 앨범을 발표했다. 이 앨범 또한 적당한 성공을 거뒀다. 다음 해, 캐쉬와 콜럼비아사의 계약이 만료됐다. 그리고 그는 머큐리 내쉬빌(Mercury Nashville)과 계약했다. 새로운 레이블은 그러나 그의 성공을 입증해주지 못했고, 스타일의 방향을 둘러싼 논쟁을 해야 했다. 게다가 컨트리 라디오방송 프로는 더욱 현대적인 아티스트에게 호감을 가지기 시작했다. 캐쉬는 곧 자신이 차트에서 밀려날 것을 알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콘서트를 통해 대중들과의 소통을 계속해 나갔다. 하이웨이멘(Highwaymen)은 1992년 두 번째 앨범을 녹음했다. 그리고 머큐리에서 낸 캐쉬의 어떤 레코드보다 상업적으로 더 큰 성공을 거뒀다. 그 즈음 머큐리와의 계약기간이 끝난 그는 1993년에 아메리칸 레코드사(American Records)에 새 둥지를 틀었다. 새 레이블에서 낸 첫 앨범 < American Recordings >는 설립자 릭 루빈(Rick Rubin)이 프로듀싱을 맡았다. 이 앨범의 전 수록곡은 어쿠스틱한 노래들이었다. 이 앨범은 대박을 터뜨리지는 못했으나, 그의 커리어를 되살리는 기폭제가 됨과 동시에 그를 록 중심의 젊은 음악팬들과 호흡할 수 있게 했다. 1995년에 하이웨이멘은 그들의 세 번째 앨범 < The Road Goes on Forever >를 발표했다. 이듬해 캐쉬는 탐 페티& 하트브레이커스가 피처링으로 참여한 그의 두 번째 앨범 < Unchained >를 발표했다. 그리고 2000년 봄 캐쉬는 자신의 생애를 되돌아 본 회고조의 앨범을 사랑, 신, 살인 세장으로 묶어 선보였다. 그 다음해에는 새로운 스튜디오앨범 < American Ⅲ: Solitary Man >이 뒤이어 발매되었다. 1990년대와 2000년에 들어 자니 캐쉬는 건강문제로 힘든 나날을 보냈지만 루빈과의 레코드작업을 지속해나갔다. 그들은 네 번째 합작품 < American Ⅳ: The man comes around >을 2002년 후반에 발매했다. 이듬해에는 나인 인치 네일스(Nine Inch Nails)의 ‘Hurt’를 커버한 뮤직비디오가 기대이상의 갈채를 받으며 미디어의 주목을 받았다. 또한 MTV뮤직비디오시상식에서 ’올해의 비디오‘에 후보로 지명돼 그 인기는 절정에 달했다. 수많은 화제를 뿌리며 한창 분위기에 젖어있을 때, 운명적 음악인생의 동반자(아내) 준 카터 캐쉬가 심장수술 경과 악화로 2003년 5월 15일 그의 곁을 떠나갔다. 4개월 후 자니도 당뇨 합병증으로 테네시 내쉬빌에서 숨을 거뒀다. 그의 나이 71세였다.
1990년대 초반 국내에서 컨트리 곡들의 인기는 대단했다.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100만장의 판매고를 보인 < 보디가드 > 사운드트랙에 수록된 휘트니 휴스턴(Whitney Houston)의 ‘I will always love you’를 비롯해 4인조 보컬 그룹 올 포 원(All 4 One)의 ‘I swear’, ‘I can love you like that’ 등의 원곡은 모두 컨트리 아티스트의 노래였다. ‘I wi... 1990년대 초반 국내에서 컨트리 곡들의 인기는 대단했다.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100만장의 판매고를 보인 < 보디가드 > 사운드트랙에 수록된 휘트니 휴스턴(Whitney Houston)의 ‘I will always love you’를 비롯해 4인조 보컬 그룹 올 포 원(All 4 One)의 ‘I swear’, ‘I can love you like that’ 등의 원곡은 모두 컨트리 아티스트의 노래였다. ‘I will always love you’는 ‘9 to 5''로 유명한 돌리 파튼(Dolly Parton)이 1974년에 발표한 노래이고, ‘I swear’와 ‘I can love you like that’은 남성 컨트리 싱어 존 마이클 몽고메리(John Michael Montgomery)의 원곡을 커버한 것이다. 1946년 1월 19일 컨트리 음악의 심장부 테네시 주에서 출생한 돌리 파튼은 작사, 작곡은 물론 영화 배우와 TV 프로그램 사회자로도 활동하는 컨트리 계의 만능 엔터테이너이자 실력자다. 1960년대 컨트리 싱어 포터 와고너(Porter Wagoner)와 결혼 반지를 주고받은 그녀는 1960년대 후반에 발표한 음반들을 통해 차세대 컨트리 음악의 기대주로 인정받기 시작했고, 30여 년이 지난 현재는 컨트리 음악계의 거목으로 대우 받고 있다. 그러나 이 은발의 컨트리 여성 싱어에 대한 국내 팬들의 관심은 1980년대 영화 < 나인 투 파이브 >가 개봉하면서 드높아졌다. 영화의 주연도 맡고 주제가도 불러 제작비를 절감하는데 혁혁한 공을 세운 그녀는 이 곡으로 컨트리 차트는 물론 생애 처음으로 싱글 차트에서도 정상을 차지하면서 미국을 넘어 전 세계적인 만능 연예인으로 급부상했다. 이후 영화 출연에 적극적이었던 돌리는 버트 레이놀즈(Burt Reynolds), 실베스터 스탤론(Sylvester Stallone) 등과 함께 스크린에 모습을 보였다. 그렇다고 그녀는 자신의 존재 가치를 부여하는 음악을 소홀히 하진 않았다. 거의 매년 새로운 음반을 발표했고, 1983년에는 비지스(Bee Gees)의 배리 깁(Barry Gibb)이 작곡한 ‘Islands in the stream’을 케니 로저스(Kenny Rogers)와 듀엣으로 취입해 다시 한번 싱글 차트를 탈환했다. 이 곡에서 케니 로저스가 돌리 파튼의 보컬에 눌린 듯한 인상을 지울 수 없을 정도로 그녀의 보컬이나 곡의 소화력은 압권이었다. 그러나 밀물로 들어왔으면 썰물로 나가는 것이 세상의 이치. 1980년대 초반 이렇듯 화려한 시절을 보냈지만 1980년대 중반에는 그녀의 음악 인생 중 가장 우울한 시기를 겪게 된다. 더 이상 컨트리 팝은 컨트리 팬들은 물론 팝 팬들에게도 어필하지 못했다. 그 타개책으로 이 영특한 가수가 선택한 것은 린다 론스태드(Linda Ronstadt), 에밀루 해리스(Emmylou Harris)와 함께 정통 컨트리로 회귀한 음반 < Trio >였다. 그 당시 랜디 트래비스(Randy Travis)를 중심으로 신 전통주의 컨트리가 개화하려던 시점을 정확히 포착한 이 앨범으로 그녀는 다시 한번 멋지게 부활했다. 돌리 레베카 파튼(Dolly Rebecca Parton-본명)은 현재까지 새로운 앨범을 제작하고 구상하면서 컨트리 음악계의 지존으로 남아 있다. Hello Dolly!
노래 : Charlie Daniels Band (찰리 다니엘스 밴드)
록 밴드 록 밴드
블루스 락 기타 연주자, 가수 블루스 락 기타 연주자, 가수
노래 : Fleetwood Mac (플리트우드 맥)
플리트우드 맥(Fleetwood Mac)은 이글스(The Eagles), 비지스(Bee Gees)와 더불어 70년대 후반 음반 시장의 산업화에 결정적으로 기여한 밴드이다. 1977년작 < Rumours >는 70년대 단일 뮤지션 최다판매 앨범의 기록을 갖고 있을 만큼 상업적으로 성공했다. 1967년 영국에서 결성된 플리트우드 맥은 1970년대 후반 ‘팝화된 록’으로 절정의 인기를 누렸지만 실상 음악적 시작은 블루... 플리트우드 맥(Fleetwood Mac)은 이글스(The Eagles), 비지스(Bee Gees)와 더불어 70년대 후반 음반 시장의 산업화에 결정적으로 기여한 밴드이다. 1977년작 < Rumours >는 70년대 단일 뮤지션 최다판매 앨범의 기록을 갖고 있을 만큼 상업적으로 성공했다. 1967년 영국에서 결성된 플리트우드 맥은 1970년대 후반 ‘팝화된 록’으로 절정의 인기를 누렸지만 실상 음악적 시작은 블루스였다. 존 메이올의 블루스브레이커스(John Mayall’s Bluesbreakers) 출신의 두 아티스트 피터 그린(Peter Green, 기타), 믹 플리트우드(Mick Fleetwood, 드럼)가 제레미 스펜서(Jeremy Spencer, 세컨기타), 존 맥비(John McVie, 베이스)를 영입하여 출발했다. 밴드는 1968년 < Peter Green’s Fleetwood Mac >을 발표하여 영국차트 5위에 오르는 성공을 거둔다. 리듬 부분이 약하다는 판단 하에 세 번째 기타리스트로 대니 커완(Danny Kirwan)을 끌어들여 이후 그의 뛰어난 작곡에 힘입어 성공 행진에 가속을 더한다. 1960년대 말 블루스 붐을 타고 많은 싱글들이 영국차트 10위 권내에 진입했으며, 1970년대 중반까지 거침없는 인기가도를 질주한다. 하지만 밴드는 잦은 멤버 교체로 블루스 그룹으로서의 정체성을 차츰 상실해갔고 게다가 1970년 그룹의 간판인 피터 그린(Peter Green)이 그룹을 떠났고, 그린의 후임으로 크리스틴 퍼펙트(Christine Perfect)를 맞아들여 < Kiln House >를 발표하지만 곧 제레미 스펜서마저 밴드를 떠난다. 새 멤버 밥 웰치(Bob Welch)를 받아들인 후 음악은 변화의 모습을 보여주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 변화는 후에 있을 대성공을 예고하고 있었다. 이들은 블루스 음악에서 벗어나 선율을 보강한 팝 성향의 앨범을 연이어 발표한다. < Future Games >와 < Bare Trees >는 이전 블루스에 익숙해 있던 영국 팬들을 혼란 속에 빠지게 했지만 미국시장에서 선전하며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크리스틴 퍼펙트(존 맥비와 결혼하여 이후 Christine McVie로 활동한다.), 밥 웰치, 존 맥비, 믹 플리트우드의 라인업으로 활동하던 이들은 다시 한 번 멤버 교체를 겪는다. 웰치 대신 듀오로 활동하던 스티브 닉스(Stevie Nicks)와 린지 버킹햄(Lindsey Buckingham)을 맞아 들인 것이다. 바로 이 5명이 거대한 성공을 창출한 플리우드 맥 전성기의 주역들이다. 1975년 겨울 미국차트를 장식한 앨범 < Fleetwood Mac >은 500만장이 팔려나가는 스매시 히트를 기록했고 첫 싱글 ‘Over my head(20위)’에 이어 ‘Rhiannon(will you ever win)’과 ‘Say you love me’는 모두 11위에 올라 확실하게 성공의 발판을 다진다. 그리고 1977년 그 유명한 < Rumours >를 발표한다. 앨범은 2,500만장이 팔려나가 마이클 잭슨의 < Thriller >가 나오기 전까지 한 아티스트의 앨범으로서는 가장 많은 판매를 기록한 앨범으로 기네스북에 올랐으며, ‘Go your own way(10위)’에 이어 ‘Dreams(1위)’, ‘Don’t stop(3위)’, ‘You make loving fun(8위)’ 등 싱글 넷이 모조리 톱10을 차지하는 괴력을 발한다. 싱글과는 별도로 ‘Songbird’와 ‘The chains’도 널리 애청되었다. 하지만 이렇게 정상의 자리에 오른 순간에 그룹의 결속력은 눈에 띄게 후퇴했다. 부부였던 존 맥비(John McVie)와 크리스틴 맥비(Christine McVie)는 파경을 눈앞에 두고 있었고 연인 사이었던 스티브 닉스(Stevie Nicks)와 린지 버킹햄(Lindsey Buckingham) 역시 애정에 금이 가 있었다. 결국 파경 관련 루머는 사실이 되어 맥비 부부는 이혼하고 스티브와 린지도 갈라서고 만다. 하지만 이런 좋지 않은 결속력으로도 이들은 1980년대 후반까지 < Tusk >(79년), < Mirage >(82년), < Tango In The Night >(87년)에 이르는 히트를 일구어내며 ‘헤쳐 모여’로 성공하는 아이러니를 이어갔다(결속력이 약하다고 음악이 약하지는 않은 법!). 이 시절에도 < Mirage >의 ‘Gypsy(12위)’나 < Tango In The Night >의 ‘Big love(5위)’와 ‘Little lies(4위)’처럼 록이든 발라드 풍이든, 밝은 듯 우울한 이들의 독특한 매력의 곡들은 국내에서도 아낌없는 사랑을 받았다. 이들의 음악적 특성은 기타 톤에서 잘 드러난다. 맑은 톤에 울림을 주어 고음에서도 부드러운 느낌을 유지한다. 바로 이 점이 플리트우드 맥 음악이 록에 대한 거부감을 뚫고 대중을 스며들 수 있었던 주인(主因)으로 분석된다. 1988년 새로운 멤버들로 짜여진 플리트우드 맥은 1990년대 중반까지 라이브 활동으로 일관했고 1997년 < Rumours > 발매 20주년을 맞아 성공의 주역들이 다시 모여 < The Dance >를 발표, 500만장의 판매고를 올리는 저력을 발휘했다.
노래 : The Edgar Winter Group (에드가 윈터 그룹 )
1960년대 중반 대서양을 건너 미국을 침공한 영국 뮤지션들의 활약에서 자극 받은 미국 아티스트들은 그들의 뿌리인 블루스에 심취하기 시작했다. 당시의 롤링 스톤스나 야드버즈 같은 영국 팀들이 초기 로큰롤이나 그것을 낳은 블루스의 세례를 받았다는 것을 인지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검은 음악이라고 무시했던 태도를 지양하고 블루스를 배우고 연구하면서 자연스럽게 그 음악을 구현하게 되었다. 재니스 조플린(Janis Jop... 1960년대 중반 대서양을 건너 미국을 침공한 영국 뮤지션들의 활약에서 자극 받은 미국 아티스트들은 그들의 뿌리인 블루스에 심취하기 시작했다. 당시의 롤링 스톤스나 야드버즈 같은 영국 팀들이 초기 로큰롤이나 그것을 낳은 블루스의 세례를 받았다는 것을 인지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검은 음악이라고 무시했던 태도를 지양하고 블루스를 배우고 연구하면서 자연스럽게 그 음악을 구현하게 되었다. 재니스 조플린(Janis Joplin), 지미 헨드릭스(Jimi Hendrix), 텐 이어스 애프터(Ten Years After), 캐니드 히트(Canned Heat), 폴 버터필드(Paul Butterfield), 그리고 형제인 조니와 에드가 (Johnny & Edgar Winter) 등이 미 본토의 블루스 붐을 주도했다. 기타리스트인 형 자니 윈터와는 달리 키보드와 색소폰을 다루면서 다른 블루스맨들과 차별화를 기했던 동생 에드가는 1970년 자신의 데뷔 앨범과 이듬해 결성한 그룹 화이트 트래시(White Trash)를 통해 2장의 앨범 < Edgar Winter’s White Trash > < Roadwork >를 발표하며 콘서트활동으로 지평을 넓혀나갔다. 그러나 그는 그룹을 깨고 1972년 다시 유능한 뮤지션들을 규합해 자신의 이름을 내건 에드가 윈터 그룹(Edgar Winter Group)을 결성해 좀더 실험적인 록을 추구하기로 했다. 건반과 색소폰, 보컬을 맡은 에드가 윈터를 축으로 당시 촉망받는 기타리스트 로니 몬트로스, 베이스 겸 보컬 댄 하트먼 그리고 드럼과 퍼커션의 척 러프으로 라인업이 완성되었다. (1994년 사망한 댄 하트먼은 1984년 영화 < 스트리츠 오브 파이어 >에 수록되어 6위까지 올랐던 ’I can dream about you’를 불렀던 그 인물이다). 이외에 앨범의 프로듀서인 릭 데린저(Rick Derringer)가 기타와 백업 보컬에도 참여해 다섯 번째 멤버의 역할을 하기도 했다. 1972년에 공개된 이들의 처녀작 < They Only Come Out At Night >은 블루스와 로큰롤이 줄기를 이루고있지만 그 외에도 컨트리, 포크, 팝, 서던 록 같은 미국의 국가대표급 음악 장르들 그리고 재즈에서 영향을 받은 프로그레시브까지 형식을 망라하고있다. 여러 음악 스타일이 만개하던 1970년대의 분위기를 타고 자신들의 음악에 이 모든 것을 실험했던 것이다. 여기에 수록된’Frankenstein’은 연주곡임에도 불구하고 전미차트 정상을 차지하는 스매시 히트를 기록했으며, 앨범은 3위까지 오르며 200만장의 판매광풍을 야기했다. 이어 또 다른 싱글 ‘Free ride’마저 차트 상위권 14위를 기록했으며 국내에서는 감미로운 발라드 ‘Autumn’이 가을만 되면 단골 리퀘스트를 받으며 현재도 라디오전파를 수놓고있다. 이 무렵 프로듀서인 릭 데린저가 정식 멤버로 가입해 로니 몬트로즈를 이은 제리 윔스(Jerry Weems)를 대신해 앨범 < Shock Treatment >(13위)를 발표, 다시 한번 위용을 발휘하지만 웅대한 시작과 달리 이후의 활동은 레드 제플린의 하드록과 디스코의 광풍에 밀려 빛을 보지 못했다. 1975년 보다 록 성향이 강해진 < With Rick Derringer >를 끝으로 이 유능했던 밴드는 록 현장에서 용퇴(勇退)했다. 이후 에드가 윈터는 형 조니의 앨범 < Johnny Winter > < Second Winter >, 릭 데린저의 명 앨범 < All American Boy >, 댄 하트맨의 솔로 앨범 등에 참여하는 것을 비롯해 자신의 솔로 앨범 < Edgar Winter Group >(1979년) < Standing On Rock >(1981년)를 발표해 블루스연주와 록에 대한 꺼질 줄 모르는 애정을 과시했다. 1992년에도 그는 형 조니와 뉴욕의 유명한 리츠에서 공연, 박수갈채를 받았다. 음악 프리즘이 다양했던 1970년대에 에드가 윈터 그룹의 진보적인 시도는 결코 아트 록 매니아나 밴드 자신들만을 위한 만족은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더러 이들의 진취적이고 새로운 실험은 상업적으로 비추어질 수 있지만 그러한 주장은 명 연주곡 ’Frankenstein’ 앞에서는 무의미한 탁상공론(卓上空論)일 뿐이다.
락 기타 연주자, 보컬 락 기타 연주자, 보컬
연주 : Al Di Meola (알 디 메올라)
퓨전 재즈 기타 연주자 퓨전 재즈 기타 연주자
연주 : Dave Brubeck (데이브 브루벡)
재즈 피아노 연주자, 작곡가 재즈 피아노 연주자, 작곡가
지난 1979년 소녀들의 비명 소리에 가까운 환호성으로 시작하는 ‘I want you to want me’의 라이브 버전은 그룹 창단 여섯 돌을 맞이하는 칩 트릭(Cheap Trick)에겐 고대하던 성공의 축포였다. 1973년의 공식적인 결성 이후 6년 동안 년(年) 200회 이상의 초인적인 공연을 강행했지만 성과를 거두지 못한 이들에게 당시 전미차트 7위에 오르는 이 곡의 차트정복은 가뭄 속의 단비였다. 칩 트... 지난 1979년 소녀들의 비명 소리에 가까운 환호성으로 시작하는 ‘I want you to want me’의 라이브 버전은 그룹 창단 여섯 돌을 맞이하는 칩 트릭(Cheap Trick)에겐 고대하던 성공의 축포였다. 1973년의 공식적인 결성 이후 6년 동안 년(年) 200회 이상의 초인적인 공연을 강행했지만 성과를 거두지 못한 이들에게 당시 전미차트 7위에 오르는 이 곡의 차트정복은 가뭄 속의 단비였다. 칩 트릭의 신화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1973년 미국의 일리노이즈에서 결성된 4인조 팝 록 밴드 칩 트릭의 뿌리는 기타리스트 릭 닐슨(Rick Nielsen)과 베이시스트 톰 피터슨(Tom Petersson)이 1960년대 후반에 결성한 퓨즈(Fuse)로 거슬러 올라간다. 1970년대 초반 현재의 이름 칩 트릭으로 개명하고 번 E. 카를로스(Bun E. Carlos)와 랜디 호건(Randy Hogan)을 각각 드러머와 보컬리스트로 받아들였지만 이들의 상황은 개선되지 않았다. 그러자 공동 리더인 릭과 톰은 팀의 프론트를 랜디 호건에서 미소년의 외모를 소유한 전직 포크 싱어 로빈 잰더(Robin Zander)로 전격 교체하고 비상을 준비한다. 1977년에 공개된 역사적인 데뷔 앨범 < Cheap Trick >은 비록 싱글 히트곡은 없었지만 비틀스에게서 물려받은 확실한 선율 감각과 더 후(The Who)로부터 전수 받은 듯한 파워풀한 연주가 유머러스한 가사와 앙상블을 이뤄 이들의 재능이 꿈틀대고 있음을 내비친 작품이었다. 같은 해에 나온 < In Color >에서는 2년 뒤 공연 실황 버전으로 차트를 강타하게 될 ‘I want you to want me’가 온전한 스튜디오 버전으로 수록되어 있다. 1978년에 발표된 < Heaven Tonight >도 가능성을 재확인하면서 이들에게 첫 번째 싱글 히트곡 ‘Surrender’(62위)’를 제공했다. 펑크적인 기타 백킹 연주와 팝적인 멜로디가 찰떡 궁합을 과시한 이 곡은 전형적인 칩 트릭 사운드를 구현한 대표적인 노래 중 하나이다. 그동안 이들은 자신들의 조국인 미국보단 태평양 건너에 있는 일본에서 엄청난 인기를 구가하고 있었다. 로빈 잰더의 잘생긴 외모와 귀를 슬슬 잡아당기는 자연스런 멜로디의 매력에 빠진 일본 소녀들은 칩 트릭의 진가를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1978년 4월, 이들은 일본의 그 유명한 공연장인 무도관에서 대대적인 공연을 가졌고, 그 열기를 고스란히 담은 음반이 바로 록 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는 < Live At Budokan >이다. 실은 이 앨범도 일본음반자본이 지원해 탄생되었다. 이전의 어떤 음반 못지 않게 화끈한 연주와 후끈 달아오른 현장의 분위기를 실감나게 전달한 이 앨범에서 ‘I want you to want me’와 1950년대 흑인 로큰롤 스타 팻츠 도미노(Fats Domino)의 원곡을 리메이크한 ‘Ain’t that a shame’은 싱글로 커트되어 각각 7위와 35위를 기록하면서 일본, 미국, 유럽은 물론 우리나라에서도 팬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1970년대 초반을 풍미한 버블검 사운드를 표현한 ‘I want you to want me’는 그 앙증맞은 후렴구 때문에 지금까지도 칩 트릭을 정의하는 노래로 남아 있다. 이 LP는 라이브 실황임에도 불구하고 빌보드 앨범 차트 4위까지 올랐고, 300만장의 판매고를 기록함으로써 상업적인 면과 음악적인 면 모두를 달성하는 성과를 올렸다. 같은 해인 1979년, 싱글 ‘Voices(32위)’와 ‘Dream police(26위)’가 들어 있는 다음 앨범 < Dream Police >로 확실하게 스타급 밴드의 반열에 올랐지만 비틀스와 아메리카(America)의 프로듀서였던 조지 마틴(George Martin)을 초빙해 제작한 1980년 < All Shook Up >은 과욕 탓인지 제1의 프로듀서와 최고 인기 밴드의 상봉은 융화되지 못한 채 어색한 만남으로 끝나고 말았다. 이 앨범 후 톰 피터슨은 그룹을 떠났고, 그 후임으로 존 브랜트(Jon Brant)를 영입해 ‘If you want my love(45위)’와 ‘She’s tight(65위)’가 싱글 차트에 입적한 < One On One >을 발표하면서 팝의 시대인 1980년대를 맞이했다. 그러나 이 무렵 톰이 없는 칩 트릭은 예전과 같은 음악을 뽑아 내지 못한 채 힘겨움을 드러냈다. 상생(相生)의 필요성을 절감한 칩 트릭과 피터슨이 재회한 것은 1988년에 공개한 < Lap Of Luxury > 때였다. 최초로 빌보드 싱글 차트 정상의 영광을 안겨 준 발라드 ‘The Flame’과 엘비스 프레슬리(Elvis Presley)의 원곡을 커버한 ‘Don’t be cruel(4위)’, ‘Ghost town(33위), ’Never had a lot to lose(75위) 등을 4장의 싱글을 토해낸 이 음반으로 칩 트릭은 1980년대의 부진을 걷어내고 재기에 성공했다. 특히 국내에서는 경쾌한 분위기의 ‘Don’t be cruel’이 애청되면서 다시 일어선 칩 트릭의 인기를 주도했다. 1988년 말에는 로빈 잰더가 하트(Heart)의 보컬리스트 앤 윌슨(Ann Wilson)과 함께 멜 깁슨과 미셸 파이퍼가 주연한 영화 < 데킬라 선라이스 >의 주제곡 ‘Surrender to me’를 불러 6위에 랭크 시키기도 했다. 곡은 우리에게 ‘Now and forever’와 ‘Right here waiting’, ‘Endless summer night’ 등으로 널리 알려진 리차드 막스(Richard Marx)가 썼다. 이들의 음악은 1980년대에 등장한 헤비메탈 밴드와 1990년대의 얼터너티브 그룹에게 막대한 영향력을 전수했다. 후배 뮤지션들은 인터뷰를 통해 “칩 트릭의 힘이 넘치는 기타 리프와 사운드에서 음악적인 영감을 받았다”며 무한한 존경과 신임을 밝힌 바 있다. 특히 스매싱 펌킨스(Smashing Pumpkins)는 자신들의 오프닝 무대를 칩 트릭에게 부탁하기도 했으며, 1980년대 팝 시대의 아들들임에도 불구하고 포르노 포 파이러스(Porno for Pyros)의 리더인 페리 파렐(Perry Farrell)이 주창한 1990년대 얼터너티브 록 페스티벌의 대명사 롤라팔루자에 참여한 바 있다. 1990년대가 되면서 다시 한번 음악적 침체기를 맞이한 칩 트릭은 현재까지 새로운 음반 제작보다는 데뷔 초기처럼 ‘최고의 라이브 밴드’라는 명성에 걸맞은 줄기찬 공연 활동을 전개하고있다. 칩 트릭의 노래들은 이름처럼 결코 값싸지도 않으며 속임수 또한 아니다. 저항성과 함께 록의 양 날개 중 다른 날개인 ‘대중성’으로 따진다면 이들은 극점에 위치하는 그룹이다. 앞으로도 이들만큼 ‘완벽한 기타 주도의 팝 록 사운드’를 구현한 그룹을 만나기는 쉽지 않다.
멤버 : Adrian Gurvitz, Paul Gurvitz, Louie Farrell 멤버 : Adrian Gurvitz, Paul Gurvitz, Louie Farrell
밴드 : Kansas (캔사스 (프로그레시브 락, 하드락 밴드))
영국, 이탈리아 등 유럽에서 록의 예술성에 대한 기치가 드높던 1970년대에 프로그레시브의 불모지 미국에서도 예술성을 향한 몸짓은 작지만 분명 존재했다. 불후의 발라드 곡 ‘Dust in the wind’로 기억되어지는 캔사스는 심포닉 록에 아메리칸 록의 역동성을 더하며 이른바 ‘아메리칸 프로그레시브 록’의 독자성을 확립한 그룹이다. 캔사스는 1970년 미국 캔사스 주의 토페카(Topeka)에서 고등학교 동창생이... 영국, 이탈리아 등 유럽에서 록의 예술성에 대한 기치가 드높던 1970년대에 프로그레시브의 불모지 미국에서도 예술성을 향한 몸짓은 작지만 분명 존재했다. 불후의 발라드 곡 ‘Dust in the wind’로 기억되어지는 캔사스는 심포닉 록에 아메리칸 록의 역동성을 더하며 이른바 ‘아메리칸 프로그레시브 록’의 독자성을 확립한 그룹이다. 캔사스는 1970년 미국 캔사스 주의 토페카(Topeka)에서 고등학교 동창생이었던 케리 리브그렌(Kerry Livgren, 기타, 키보드), 베이브 호프(Dave Hope, 베이스), 필 이허트(Phil Ehart, 드럼)에 의해 결성된 밴드. 다른 남부 록 밴드들이 서던 록의 전통을 만들어가고 있을 당시 이들이 추구한 음악은 그것과는 사뭇 다른 것이었다. 1971년 클래식 음악을 전공한 로비 스타인하트(Robby Steinhardt)를 바이올린 주자로 영입하면서 미국에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었던 프로그레시브 록을 시도했던 것이다. 로비를 영입하면서 잠시 밴드 이름을 ‘화이트 클로버(White Clover)’로 바꾸기도 했던 이들은 1972년 스티브 월쉬(Steve Walsh, 보컬, 키보드), 리차드 윌리엄스(Richard Wiliams, 기타)를 연이어 맞이하며 프로그레시브 밴드의 기본 틀을 완성하고 다시 캔사스를 이름으로 내걸었다. 클럽 활동을 통해 인지도를 높인 이들은 1974년 셀프 타이틀의 데뷔 앨범 < Kansas >를 발표했다. 하지만 1970년대 초반 이들의 음악은 미국 대중에게 어필하기에는 너무나 생소한 사운드였다. 프로그레시브 록은 영국 밴드들의 전유물이라는 뿌리깊은 생각이 미국적인 사운드와 프로그레시브를 결합하며 나름대로 독자적인 음악성을 만들어 나간 캔사스에게 딴지를 걸고 넘어 졌다. 같은 해 발표한 < Song For America >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캔사스는 1970년대 중반 핑크 플로이드를 위시한 프로그레시브 록 밴드들의 위풍당당이 진행되면서 그 흐름에 전격 편입했다. 1975년 음반 < Masque >는 수록곡인 ‘Icarus borne on wings of steel’이 심오한 가사와 함께 주목을 받으며 20만장이 넘는 판매를 기록했고, 이에 힘입어 전작 < Song For America > 역시 골드를 따내는 기염을 토했다. 한 번 불붙은 상승세는 1976년 블록버스트 앨범 < Leftoverture >로 이어지며 캔사스를 세계적인 밴드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수록곡 ‘Carry on wayward son’이 차트 5위 권 진입에 성공했으며, 앨범은 300만장 이상의 판매고를 올렸다. 미국적 프로그레시브 가능성의 확인이었다. 캔사스의 프로그레시브 록은 영국 밴드들과 분명한 차이가 있었다. 부기(Boogie)를 프로그레시브에 도입했다는 것 외에도, 이들이 표현하는 대상, 서정성, 서사적인 전개는 이들만의 특화된 강점이었다. 미국 남부 특유의 심오한 가사를 다루면서도 현실을 벗어나지 않았고, 심포닉 록을 구사했지만 동시에 미국 록이 가진 역동성과 파워가 공존하고 있었다. 이런 점에서 캔사스는 아트 록 매니아들로부터 부정적인 평을 듣기도 하지만 이 점 때문에 먼저 이 분야를 개척한 영국 밴드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었다. 밴드는 성공의 여세를 몰아 1977년에는 음반 < Point of Know Return >을 선보였다. 지구 끝에 매달린 범선을 그리고 있는 앨범 재킷으로도 유명한 이 앨범은‘Dust in the wind’ 덕분에 국내 팬들에게서도 잊혀지지 않는 추억의 앨범이다. 자신들의 음악적 형태와 일치하는 곡은 아니지만 발라드 넘버 ‘Dust in the wind’는 캔사스의 대표곡이 되었고, 이 곡의 카리스마 덕분에 이들이 프로그레시브 밴드임을 모르는 팬들도 상당수 있었다.‘Dust in the wind’가 스매시 히트를 기록했지만 이들의 정체성은 여전히 프로그레시브 록에 있었고, 1979년 밴드가 처음으로 프로듀싱한 프로그레시브 록 앨범 < Monolith >를 톱 텐에 올리며 화려하게 미 디케이드(Me- Decade)를 마감했다. 하지만 1980년 작품 < Audio-Visions > 이후 캔사스의 행보는 뿌연 안개 정국 속으로 휘말렸다. 데이브 호프와 케리 립그렌이 종교적인 문제로 멤버들과 갈등을 일으켰고, 그룹의 상업적 성공에 불만을 느끼고 있던 스티브 월시는 탈퇴해 ‘스트리트(Street)’라는 자신의 밴드를 조직하는 등 팀의 내분 사태는 걷잡을 수가 없을 정도였다. 존 엘르판테(John Elefante, 보컬)로 스티브의 빈자리를 채우며 1982년 < Vinyl Confessions >, 1983년 < Drastic Measures >를 발표하지만 밴드는 결국 이별의 수순을 밟았다. 해체 3년 후 캔사스는 필 이허트, 리차드 윌리엄스, 스티브 월시 세 명의 오리지널 멤버에 의해 부활했다. 이후 스티브 모스(Steve Morse, 기타), 빌리 그리어(Billy Greer, 베이스) 두 명의 멤버를 보강하여 오 인조 라인업으로 활동을 시작한 이들은 심포닉 록보다는 하드 록적인 면을 살리며 1986년 < Power >를 통해 재기의 의지를 불태운다. 그러나 < Power >가 잠시 주목을 끌었을 뿐 < In the Spirit of the Things >(88), < Freaks of Nature >(95), < Always Never the Same >(98)로 이어지는 음반 모두 신통한 성적을 거두지 못했다. 앨범의 부진한 성적에도 불구 꾸준한 활동을 보여온 이들은 2001년에 1980년도 작품 < Audio-Visions > 이후 20년 만에 오리지널 멤버들이 한자리에 모두 모여 < Somewhere To Elsewhere >를 발표했다. 음반에는 대 그룹의 부활을 알리듯 1975년 자신들의 히트곡 ‘Icarus…’의 속편 격인 ‘Icarus II’가 수록되어 있으며, 전성기에 가졌던 매력이 그대로 살아있다.
밴드 : Electric Light Orchestra (일렉트릭 라이트 오케스트라,E.L.O.)
밴드 : Manic Street Preachers (매닉 스트리트 프리처스 [매닉스],The Manics)
1991년 영국 웨일스(Wales)에서 결성된 매닉 스트리트 프리처스(이하 매닉스)는 근래에 보기 힘든 음악계의 이단아들이다. 섹스 피스톨스, 클래시 같은 펑크 그룹들의 직계라 할 수 있는 이들은 데뷔 초 ‘막시스트’라 불릴 정도의 과격한 메시지를 쏟아내며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다. 이 ‘미친 거리의 전도사’들에게 미제국주의는 응당 ‘베어버리고, 불태워야 할’ 것이었으며, 뿐만 아니라 영국왕실 역시 극도의 혐오대... 1991년 영국 웨일스(Wales)에서 결성된 매닉 스트리트 프리처스(이하 매닉스)는 근래에 보기 힘든 음악계의 이단아들이다. 섹스 피스톨스, 클래시 같은 펑크 그룹들의 직계라 할 수 있는 이들은 데뷔 초 ‘막시스트’라 불릴 정도의 과격한 메시지를 쏟아내며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다. 이 ‘미친 거리의 전도사’들에게 미제국주의는 응당 ‘베어버리고, 불태워야 할’ 것이었으며, 뿐만 아니라 영국왕실 역시 극도의 혐오대상이었다. 이러한 정치적 메시지들은 초강력 펑크 사운드에 실려 이들의 지지자들을 선동했다. 하지만 이들의 강성 이미지와는 달리 감성적인 멜로디라인을 지닌 이들의 음악은 팝 팬들마저도 흡수시킬 수 있었다. 작사를 전담한 기타리스트 리치 제임스(Richey James), 보컬 겸 기타리스트 제임스 딘 브래드필드(James Dean Bradfield), 드러머 션 무어(Sean Moore), 베이스 주자 니키 와이어(Nicky Wire), 이 4인조로 매닉스는 출발했다. 이들이 처음 활동하던 무렵 영국에는 ‘24시간 신나게 놀자’는 애시드 하우스와 신발만 바라보고 연주하는 ‘슈게이징’이 붐을 타고 있었고, 브릿팝 진영이 막 태동하고 있었다. 매닉스는 그러나 그러한 경향과는 전혀 차원이 다른 ‘리얼리즘’이라는 절대적 사명감을 표방하고 나섰다. 당시 만연했던 자포자기 식의 향락주의나 소극적 사운드를 쫓는 것이 아니라 대외적인 힘을 발휘하는 ‘강하고 적극적인 음악’을 설파한 것이다. 글램 록을 연상시키는 진한 메이크업을 한 외모로도 유명했던 이들은 한때 이들의 음악이 가짜, 즉 창조성이 결여된 것이 아니냐는 의심을 받기도 했다. 단지 선배들의 고전을 무작정 추종하기만 한다는 ‘오리지널리티’의 문제였다. 1991년 영국 록 잡지 < NME > 기자에게 그 같은 질문을 받은 기타리스트 리치 제임스는 즉석에서 그렇지 않음을 보여줬다. 답변으로 그는 말없이 칼로 팔에 ‘4 REAL(우린 진짜다)’라는 글자를 새겼다. 이 무시무시한 자해소동으로 그러한 의심은 어느 정도 불식되었으며 매닉스의 ‘광적인’ 면모는 더욱 부각되었다. 1992년 데뷔앨범 < Generation Terrorists >을 발표하며 이들은 비로소 자신들의 진지한 설교를 전도해나가기 시작했다. 2집 < Gold Against The Soul >과 3집 < The Holy Bible >에 이르면서 이들의 무정부주의적 좌파 성향은 극에 달했다. 한편 극심한 신경쇠약 증세로 요양과 투어를 병행하던 ‘문제의’ 리치 제임스는 3집 발매 전날 런던의 호텔을 떠나 실종되는 비극의 주인공이 되었다. 리치의 부재로 3인조가 된 매닉스는 친구 잃은 슬픔으로 과격함을 잠시 접고 내면으로 침잠했다. 1995년 출시된 4집 < Everything Must Go >는 전작들에서 보인 투박하고 거친 사운드와 정치적 태도 등을 다소 누그러뜨리고 주류 브릿팝 사운드로 화해를 시도한 걸작앨범이다. ‘모든 것은 사라져야만 한다’는 의미심장한 문구를 내건 이 앨범이 엄청난 성공을 거두며 매닉스는 일약 영국음악계의 희망으로 떠올랐다. 2년 뒤 발표된 5집 < This Is My True Tell Me Yours > 역시 이들의 진지함이 돋보이는 수작이며, 1999년 말에 초창기의 강성 모습이 담긴 싱글 ‘The masses against the class’가 발표되었다. 2001년 3월에는 역시 데뷔 초의 ‘열혈 펑크 순수주의자’로 되돌아간 여섯 번째 앨범 < Know Your Enemy >가 발표되었다. 매닉스는 직선적이고 단순한 사운드로 좌파적 메시지를 더욱 각인시켰다. 자주 들리는 이들의 반복구는 무모할 정도다. 이러한 이들의 단순함은 같은 영국그룹 라디오헤드의 복잡함과 흥미로운 비교거리다. 라디오헤드의 분열적 변종 미학과 매닉스의 단순 명료함은 분명 서로 ‘극과 극’이다. 음악적 지향도 극명한 차이를 보인다. 하지만 극과 극은 서로 통한다고 할까. 이 두 밴드는 위력을 잃고 있는 현 영국 음악계가 나아가야 할 방향성을 제시하고 있으며 누구보다도 독보적인 존재라는 점에서 서로 통한다고 볼 수 있다. 최근 쿠바의 아바나에서 공연한 이들은 쿠바에서 공연한 최초의 록 그룹이라는 기록을 남겼다. 북한과 더불어 사회주의의 최후의 보루인 쿠바도 매닉스의 혁명성을 인정한 셈이다. 앞으로도 그 같은 정치적 메시지는 이들의 존재가치로 의미를 더할 전망이다.
밴드 : Calling (콜링 (락 밴드))
미국 캘리포니아(California)에서 결성된 록 밴드 콜링(The Calling)은 크리드(Creed)로 대표되는 포스트 그런지(Post-Grunge) 사운드를 표방하며 등장한 무서운 신예이다. 이들은 라디오 친화적인 멜로디와 기타 노이즈를 절묘하게 결합시킨 스타일로 인기 가도에 진입했다. 멤버 전원이 걸출한 외모의 소유자라는 점 또한 플러스 요인 중에 하나이다. 기타 키드였던 아론 카민(Aaron Kamin... 미국 캘리포니아(California)에서 결성된 록 밴드 콜링(The Calling)은 크리드(Creed)로 대표되는 포스트 그런지(Post-Grunge) 사운드를 표방하며 등장한 무서운 신예이다. 이들은 라디오 친화적인 멜로디와 기타 노이즈를 절묘하게 결합시킨 스타일로 인기 가도에 진입했다. 멤버 전원이 걸출한 외모의 소유자라는 점 또한 플러스 요인 중에 하나이다. 기타 키드였던 아론 카민(Aaron Kamin)은 어느 날 그의 여자친구의 동생인 알렉스 밴드(Alex Band)를 소개받았고 둘은 의기투합, 제너레이션 갭(Generation Gap)을 결성하며 활동을 시작했다. 이윽고 이들은 리사이클러(Recycler) 출신의 나머지 멤버들과 함께 콜링으로 밴드명을 바꾼 후, 데뷔작 를 발표했다. 앨범에서 밴드는 매치박스 트웬티(Matchbox Twenty)와 크리드를 결합시킨 듯한 사운드를 들려주며 훌륭한 신고식을 치러냈다. 2001년 3월 현재, 첫 싱글 ‘Wherever you’ll go’ 는 빌보드 싱글 차트에서 10위권에 진입하며 고속 승진의 기쁨을 맛보는 중이다.
밴드 : Santana (산타나 (라틴 락 밴드))
20세기 마지막 팝 음악의 유행은 음반산업이 주조했든 아니든 정열의 라틴음악이 장악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최근에 발표된 제42회 그래미상 후보자 명단이 웅변한다. ‘Livin’ la vida loca’의 주인공 리키 마틴(Ricky Martin)을 비롯 제니퍼 로페즈(Jenifer Lopez), 마크 앤소니(Marc Anthony), 루 베가(Lou Bega) 등 지난해 라틴 열풍을 주도했던 신성(新星)들이 그... 20세기 마지막 팝 음악의 유행은 음반산업이 주조했든 아니든 정열의 라틴음악이 장악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최근에 발표된 제42회 그래미상 후보자 명단이 웅변한다. ‘Livin’ la vida loca’의 주인공 리키 마틴(Ricky Martin)을 비롯 제니퍼 로페즈(Jenifer Lopez), 마크 앤소니(Marc Anthony), 루 베가(Lou Bega) 등 지난해 라틴 열풍을 주도했던 신성(新星)들이 그래미상의 주요 부문에 공천을 받았다. 하지만 이들의 당선 가능성은 희박하다. 다름 아닌 ‘라틴 록의 거장’ 카를로스 산타나가 버티고 있어서다. 올해로 52세인 그는 1999년에 발표한 앨범 < Supernatural >로 그래미 최고의 영예인 ‘올해의 앨범’, ‘올해의 노래’, ‘올해의 레코드’ 부문을 포함, 무려 11개 부문의 후보로 지명되는 기염을 토했다. < 뉴스위크 >는 최신호에서 1998년 밥 딜런에 이어 이번 그래미 시상식은 산타나의 컴백 무대가 될 것이라며 그의 압승을 예견했다. 뉴 밀레니엄을 전후로 빌보드 차트를 장기간 점령한 빅히트 싱글 < Smooth >와 500만장이라는 가공할 음반판매량이 화려한 재기를 견인했다. 음악팬들은 10대 틴 음악의 싹쓸이 판에서 모처럼 대가의 위용을 체험하고 있다. 멕시코 태생의 기타리스트 산타나는 1966년 히피 문화의 본고장 샌프란시스코에서 ‘산타나 블루스 밴드’란 이름으로 음악 여정을 시작했다. 그는 1969년 우드스탁 페스티벌에 출연, 전설적인 연주곡 ‘Soul sacrifice’를 들려주어 일대 주목을 받았다. 산타나로 그룹명을 바꾼 그는 같은 해 셀프 타이틀 앨범에서 당시의 주도적 경향인 사이키델릭에 라틴 비트, 아프리카 리듬, 그리고 블루스를 이입한 음악을 연주했다. 산타나는 그러나 1970년대가 열리면서 1960년대 말을 어지러이 수놓았던 사이키델릭과 블루스가 퇴조하자 라틴 리듬과 정통 로큰롤을 뒤섞은 이른바 ‘라틴 록’으로 조정을 꾀했다. 1970년에 발표되어 지금도 명반으로 남아있는 2집 < Abraxas >가 바로 처음 라틴 록의 정체를 천하에 고한 작품이었다. 이 음반의 수록곡 ‘Black magic woman/Gypsy queen’과 ‘맘보의 왕’ 티토 푸엔테(Tito Puente)의 곡을 재해석한 ‘Oye como va’는 각각 차트 4위, 13위에 랭크되며 히트했다. 특히 그가 이 음반 수록곡 ‘Samba pa ti’에서 구사한 애절한 기타연주는 국내에서 그의 명성을 한층 드높인 계기를 마련했다. 발라드 선호의 우리 정서와 심금을 울리는 그의 라틴기타가 절묘한 조화를 이룬 것이다. 이 같은 어울림은 기타에 멜로디를 집어넣은 카를로스의 연주기법 때문에 가능했다. "나의 음악 키워드는 음(音)으로 이야기하듯 말하는 것이다. 기타를 통해 나는 노래하고 있다" 라틴 록 보석 ‘Europa’가 담겨있는 1976년 앨범 < Amigos >도 앨범차트 10위에 올랐고, 그해 일본 평론가협회 제정 최우수 앨범 상을 받았다. 지금도 기타지망생들은 ‘Europa’와 산타나의 이름을 등식화한다. 이듬해 발표한 작품 < Moonflower >에서도 좀비스(Zombies)의 명곡을 라틴 사운드로 새 단장한 ‘She’s not there’로 사랑을 받았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카를로스 산타나의 ‘절충주의’ 음악은 한계를 드러냈다. 그의 맛깔스런 기타 연주는 계속해서 위용을 과시했지만, 순하게 들리는 태생적 한계를 드러내면서 뒷심은 뚝 떨어졌다. 새로운 세대의 변화무쌍한 감성을 파고드는 필살(必殺)의 포인트를 상실했던 것이다. 결국 그는 시대분위기에 편승하여 팝 성향이 강화된 1979년 앨범 < Marathon >을 발표한 데 이어 1980년 재즈 록 앨범 < Swing Of Delight >, 1987년 명상 앨범 < Blues For Salvador > 등 장르를 따지지 않는 합종연횡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비록 장기외유였지만 ‘록의 경계선을 허문’ 고유업적이 빛이 바랜 건 아니었다. 1980년대 이후의 활동도 사실 ‘퓨전’이란 그의 평생 과업의 선상에 있었다. 1998년 할리우드 명예의 거리에 당당히 들어섰고, 같은 해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도 입적되었다. 마침내 그의 ‘장르 뒤섞기’ 실험이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게 되었다. 그러나 산타나는 지난해 < Supernatural >로 역사에 안치되기를 거부하고 현실무대로 화려히 컴백했다. 아리스타 레코드사의 파워 맨 클라이브 데이비스(Clive Davis)가 직접 지휘봉을 잡고 만든 이 앨범에는 데이브 매튜스, 로린 힐, 와이클레프 진 그리고 매치박스 20의 롭 토마스 등 신세대 뮤지션들이 대거 참여했다. 산타나는 평소 자신을 존경해온 이들의 도움으로 상기한 신진 라틴스타들에 못지 않은 활기를 내뿜었다. ‘신구세대의 통합’을 목표로 산타나와 데이비스 사장이 제휴하여 치밀히 계획한 전략의 결과였다. 이 작품이 구현한 절충과 타협의 미학은 젊은 층과 기성세대를 막론했다. 올해 그래미상은 그를 위한 잔치가 될 게 거의 확실해지고 있다. 그러나 정작 산타나 본인은 성공에 별 관심이 없어 보인다. 그는 앨범 < Supernatural >이 자신의 계획 중 일부분이라고만 했다. 원대한 포부를 시사한다. 하지만 그의 마스터플랜은 인기나 성공이 아니라 ‘음악의 완성’이다. 사람 좋아 보이는 얼굴에서 이미 진실함을 읽을 수 있다.
4인조 밴드 알라바마(Alabama)는 ‘컨트리 계의 비틀즈’였다. 1980년대 개막과 함께 시작된 이들의 성공은 컨트리 음악계에서 가장 눈부신 ‘성공 시대’를 의미한다. 1980년대에만 27곡의 컨트리 차트 1위 곡을 쏟아 냈으며, 아메리칸 뮤직 어워드나 그래미, 컨트리 뮤직 어워드 등은 알라바마를 위한 시상식이었다. 발표하는 앨범마다 수 백만 장의 판매고를 올렸으며, 순회 공연은 인산인해를 이뤘다. 1980년... 4인조 밴드 알라바마(Alabama)는 ‘컨트리 계의 비틀즈’였다. 1980년대 개막과 함께 시작된 이들의 성공은 컨트리 음악계에서 가장 눈부신 ‘성공 시대’를 의미한다. 1980년대에만 27곡의 컨트리 차트 1위 곡을 쏟아 냈으며, 아메리칸 뮤직 어워드나 그래미, 컨트리 뮤직 어워드 등은 알라바마를 위한 시상식이었다. 발표하는 앨범마다 수 백만 장의 판매고를 올렸으며, 순회 공연은 인산인해를 이뤘다. 1980년대는 알라바마를 위한 10년이었다. 최소한 컨트리 음악에 한해서는 그랬다. 이 4인조가 이렇게 크나큰 인기와 명성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이글스(Eagle) 이후 그들의 대를 이을 만한 컨트리록 밴드의 부재가 가장 큰 이유였으며, 또한 당시의 대세였던 컨트리팝에 대한 카운터 펀치였다. 이들은 정통 록밴드의 형식을 따랐지만 작곡 문법이나 보컬 하모니 등은 컨트리에서 따왔다. 랜디 오웬(Randy Owen-보컬, 기타)과 테디 젠트리(Teddy Gentry-베이스), 그리고 제프 쿡(Jeff Cook-키보드, 기타, 피들)이 서로 친척 사이인 이들은 1977년 알라바마가 공식적으로 출발하기 이전인 1960년대부터 함께 모여 지역 밴드 생활을 했다. 마지막에 합류한 드러머 마크 헌든(Mark Herndon)은 영입파였는데 이들의 음악이 록적으로 들리는 것은 그가 ‘알라바마’에 오기 전엔 록밴드에서 드럼 스틱을 쥐고 있었기 때문이다. 1982년에 발표된 3번째 정규 앨범 < Mountain Music >의 타이틀곡은 자국인 미국은 말할 것도 없고 정통 컨트리의 불모지인 우리나라의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들릴 정도로 컨트리의 영역을 넓힌 최상의 앨범이었으며 1년 후에 공개된 < The Closer You Get >에서 당시의 대세였던 신시사이저를 사용해 음악적 표현력을 넓히기도 했다. 가스 브룩스(Garth Brooks)나 샤니아 트웨인(Shania Twain)처럼 알라바마의 인기에 견줄 만한 솔로 가수들은 있지만 아직까지 이들의 명성에 버금가는 밴드는 출현하지 못하고 있다. 앞으로도 힘들 것이다.
멤버 : 로날드 비틀(Ronald Beitle, 드럼, 퍼커션), 마크 애브섹(Mark Avsec, 키보드), 도니 아이리스(Donnie Iris, 기타, 보컬), 쿡 미찰칙(Cooke Michalchick, 베이스), 랍 파리씨(Rob Parissi, 기타, 보컬) 멤버 : 로날드 비틀(Ronald Beitle, 드럼, 퍼커션), 마크 애브섹(Mark Avsec, 키보드), 도니 아이리스(Donnie Iris, 기타, 보컬), 쿡 미찰칙(Cooke Michalchick, 베이스), 랍 파리씨(Rob Parissi, 기타, 보컬)
밴드 : The Allman Brothers Band (올맨 브라더스 밴드)
1960년대 중반부터 집중 호우 식으로 등장한 영국 뮤지션들은 한동안 미국인들이 등한시했던 자신들의 음악인 초기 로큰롤과 블루스를 가지고 팝음악계를 평정했다. 이러한 역전 상황에 자극을 받은 미국 아티스트들은 뒤늦게 음악 창고에서 끄집어 낸 포크, 블루스, 재즈 등을 록과 융합해 포크록, 재즈록, 블루스록으로 새로운 가지치기를 했고 이 신종 장르들이 1960년대 후반부터 사운드 볼륨이 증폭되기 시작한 하드록과 만... 1960년대 중반부터 집중 호우 식으로 등장한 영국 뮤지션들은 한동안 미국인들이 등한시했던 자신들의 음악인 초기 로큰롤과 블루스를 가지고 팝음악계를 평정했다. 이러한 역전 상황에 자극을 받은 미국 아티스트들은 뒤늦게 음악 창고에서 끄집어 낸 포크, 블루스, 재즈 등을 록과 융합해 포크록, 재즈록, 블루스록으로 새로운 가지치기를 했고 이 신종 장르들이 1960년대 후반부터 사운드 볼륨이 증폭되기 시작한 하드록과 만나면서 또 다시 새로운 스타일을 잉태했다. 이 갓 태어난 음악에는 하드록, 초기 로큰롤, 블루스, 컨트리, 재즈 등 가장 미국적인 음악 요소를 포괄하고 있었다. 이러한 형식을 처음 시도한 밴드가 미국 동남부에 위치한 조지아주 출신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남부의 록음악, 즉 서던록(Southern Rock)이라 명명했다. 바로 그 발화점이 된 그룹이 올맨 브라더스 밴드(Allman Brothers Band - 이하 ABB)다. 투박한 뚝배기 안에서 펄펄 끓는 된장찌개처럼 진한 서던록을 창조한 올맨 브라더스 밴드는 1970년대 초반, 절정의 순간에 주축 멤버들의 갑작스런 사망 때문에 전성기는 짧았지만 록음악 사에서는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위치를 점한 그룹이다. 왜냐하면 서던록은 1970년대 하드록 씬에서도 상당한 지분을 차지했던 음악 장르일 뿐만 아니라 레너드 스키너드(Lynyrd Skynyrd), 지지 탑(ZZ Top), 마샬 터커 밴드(Marshall Tucker Band), 아틀란타 리듬 섹션(Atlanta Rhythm Section), 38 스페셜(38 Special)을 거쳐 현재의 블랙 크로우스(Black Crowes)와 데이브 매튜스 밴드(Dave Matthews Band)까지 그 명맥이 이어지기 때문이다. 이 모든 음악 계보가 바로 ABB로부터 시작되었다. 이 조지아 출신의 6인조 밴드는 1960년대 후반 로큰롤과 부기우기가 결합한 음악을 구사했던 ‘아우어 글래스(Hour Glass)’라는 밴드에서 기타를 담당했던 형 듀안 올맨(Duane Allman)과 키보드를 맡았던 아우 그렉 올맨(Gregg Allman)이 남부 출신의 새로운 친구들인 딕키 벳츠(Dickie Betts/기타, 보컬), 베리 오클리(Berry Oakley/베이스), 그리고 부치 트럭스(Butch Trucks/드럼)와 자이 조하니 조한슨(Jai Johanny Johanson/드럼)을 규합해 프레임을 갖춤으로써 ABB의 위대한 역사가 시작되었다. 대평원을 달리는 카우보이 후예들의 트윈 드럼 시스템은 훗날 같은 계열의 서던록 밴드인 레너드 스키너드(Lynyrd Skynyrd)와 38 스페셜(38 Special)에게 입김이 작용했고, 트윈 기타 체제는 쥬다스 프리스트(Judas Priest)나 슬레이어(Slayer)같은 헤비메탈 그룹들에게까지도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레너드 스키너드는 무려 3명의 리드 기타리스트를 두어 올맨 브라더스의 벽을 넘고자 했다). 이 섹스텟(sextet-6인조)이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전부터 듀안 올맨은 아레사 프랭클린(Aretha Franklin)이나 윌슨 피켓(Wilson Pickett)같은 대가들의 음반에서 기타를 연주해 음악계에선 그 명성이 대단했다. 그의 이러한 활동 반경은 에릭 클랩튼(Eric Clapton)이 조직했던 데렉 & 더 도미노스(Derek & The Dominoes)가 1971년에 발표한 의 협연으로 이어진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싱글 ‘Layla’의 후반부에서 피아노와 앙상블을 이룬 명 슬라이드 기타 연주의 영광은 듀안 올맨에게 돌아간다. 1969년, 음악팬들은 블루스와 컨트리, 재즈 그리고 하드록이 멋지게 조화를 이룬 이 ABB의 데뷔 앨범 를 통해 새로운 음악 세계를 경험했다. 그것은 블루스 하드록과 컨트리, 재즈가 사이좋게 어깨동무 한 서던록의 힘찬 첫출발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이후에 공개된 실황 음반 와 정규 앨범 , 그리고 를 통해 가장 미국적인 록음악의 전형을 제시했다. 그러나 그 정점의 시기에 그룹의 버팀목이던 듀안 올맨이 1971년 10월 29일 오토바이 사고로 세상을 떠났고 베이스 주자 베리 오클리도 이듬해인 1972년 같은 장소에서 자동차 사고로 사망하는 기막힌 비극을 연출했다. 음악적으로나 연주 면에 있어 가장 물오른 시점을 맞이하고 있던 ABB에게 두 멤버의 죽음은 상당한 치명타였지만 몸과 마음을 추스른 나머지 ‘생존자’들은 그렉 올맨과 딕키 벳츠를 중심으로 뭉쳐 신보를 제작했다. 이 아픔을 딛고 일어선 음반이 최대 히트곡 ‘Ramblin’man(2위)’과 명 연주곡 ‘Jessica(65위)’가 수록된 1973년 작품 다. 이전의 LP보다 대중적이면서도 컨트리 쪽으로 궤도를 대폭 수정한 이 작품으로 빌보드 앨범 차트 정상의 고지를 점령했고, 올맨 브라더스 밴드에겐 금전적인 여유를 가져다 주었다. 하지만 이후에 발표한 음반들은 이전 만큼의 음악적 재능과 창작력을 보여주지 못했다. 이것은 듀안 올맨과 베리 오클리가 올맨 브라더스 밴드의 음악적 심장부였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이후 셰어(Cher) 아주머니와 결혼했던 그렉 올맨은 밴드와 솔로 활동을 병행하면서 1987년에는 ‘I’m no angel(49위)’이란 히트곡을 생산했고, 지금까지 올맨 브라더스 밴드의 이름으로 라이브 활동을 해 오고 있다. 듀안 올맨이 음악팬들의 곁을 떠난 지 정확히 30년이 지난 현재, 그의 이름은 그리움과 아쉬움을 상징하는 고유 명사가 되었다. 특히 에 수록된 ‘In memory of Elizabeth Reed’에서 그렉 올맨의 영롱한 기타 연주는 30년 이상이 흐른 지금까지 한 시대를 풍미했던 올맨 브라더스 밴드와 서던록의 흥망성쇠를 표현하고 있다.
멤버 : 사이스(Sice, 보컬, 기타), 마틴 카(Martin Carr, 기타), 티모시 브라운(Timothy Brown, 베이스), 스티브 휴이트(Steve Hewitt, 드럼) 멤버 : 사이스(Sice, 보컬, 기타), 마틴 카(Martin Carr, 기타), 티모시 브라운(Timothy Brown, 베이스), 스티브 휴이트(Steve Hewitt, 드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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