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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바로티와 친구들 4집 - 전쟁고아들을 위하여 (Pavarotti & Friends - for War Chi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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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D

파바로티와 친구들 4집 - 전쟁고아들을 위하여 (Pavarotti & Friends - for War Child)

Luciano Pavarotti, Eric Clapton, Sheryl Crow, Lord Choc Ice, Liza Minnelli 노래 외 9명 정보 더 보기/감추기 | Universal / DECCA | 1999년 04월 07일 첫번째 구매리뷰를 남겨주세요. | 판매지수 12 판매지수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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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바로티와 친구들 4집 - 전쟁고아들을 위하여 (Pavarotti & Friends - for War Child)

이 상품의 시리즈 (4개)

완결된 상품입니다.

품목정보

품목정보
발매일 1999년 04월 07일
시간, 무게, 크기 100g

관련분류

디스크

Disc
  • 01 Eric Clapton, Luciano Pavarotti, East London Gospel Choir - Holy Mother
  • 02 Joan Osborne - Saint Teresa
  • 03 Elton John - I Guess That's Why They Call It The Blues
  • 04 Liza Minnelli, Luciano Pavarotti - New York, New York
  • 05 Zucchero - My Love (Il Volo)
  • 06 Sheryl Crow, Eric Clapton - Run, Baby, Run
  • 07 Ligabue, Luciano Pavarotti - Certe Notti
  • 08 Jon Secada - Angel
  • 09 The Kelly Family, Luciano Pavarotti - Ave Maria
  • 10 Litfiba - Spirito
  • 11 Eric Clapton - Third Degree
  • 12 Sheryl Crow, Luciano Pavarotti - La Ci Darem La Mano (Don Giovanni)
  • 13 Edoardo Bennato, Solis String Quartet - Le Regazze Fanno Grandi Sogni
  • 14 Jon Secada, Luciano Pavarotti - Grenada
  • 15 Paco De Lucia, Al Di Meola, John McLaughlin - Mediterranean Sundance
  • 16 Joan Osborne, Luciano Pavarotti, East London Gospel ChoirGesu Bambino
  • 17 Elton John, Luciano PavarottiLive Like Horses

아티스트 소개 (14명)

노래 : Luciano Pavarotti (루치아노 파바로티 )
성악가 (테너) 성악가 (테너)
# 살아있는 음악 전설 에릭 클랩튼은 그 이름 자체로 하나의 거대한 ‘음악 전설’이다. 40여 년의 음악 여정 동안 그가 쌓아올린 메리트는 가히 대단하다. 야드버즈(Yardbirds)와 존 메이올스 블루스브레이커(John Mayall`s Bluesbreakers) 시절 블루스의 부흥을 주도했으며, 크림(Cream)의 활동기간 동안 헤비메탈의 원형을 제공했고, 재즈와 블루스의 크로스오버를 시도했다. 솔로로 독립하고... # 살아있는 음악 전설 에릭 클랩튼은 그 이름 자체로 하나의 거대한 ‘음악 전설’이다. 40여 년의 음악 여정 동안 그가 쌓아올린 메리트는 가히 대단하다. 야드버즈(Yardbirds)와 존 메이올스 블루스브레이커(John Mayall`s Bluesbreakers) 시절 블루스의 부흥을 주도했으며, 크림(Cream)의 활동기간 동안 헤비메탈의 원형을 제공했고, 재즈와 블루스의 크로스오버를 시도했다. 솔로로 독립하고부터는 ‘진짜 블루스’에 접속불가를 외치는 대중들에게 팝 지향적인 ‘달콤 쌉싸름한 블루스’를 패스워드로 내놓아 블루스의 대중화를 선도했다. 그래미 트로피를 13번이나 받았으며,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1992년 야드버즈, 1993년 크림, 그리고 지난해 개인 자격으로 헌액된 것에서도 클랩튼의 공로를 짐작할 수 있다. 또한 그는 지난해 ‘블루스의 제왕’ B.B 킹(B.B King)과 협연한 작품〔Riding With The King〕으로 이번 그래미 시상식 ‘최고의 트래디셔널 블루스 앨범(Best Traditional Blues album)’부문에 노미네이트되었다. 클랩튼은 ‘기타의 신’, ‘슬로우 핸드(Slowhand)’라는 닉네임이 말해주듯 기타 테크닉에 있어서도 대가(大家)의 경지에 올랐다. 감정을 질펀하게 쏟아내면서도 정확하고 절제된 테크닉을 구사하는 벤딩 주법(일명 쵸킹)과 비브라토는 다른 연주자들이 흉내조차 힘들 정도다. 그의 기타 연주와 관련하여 유명 기타리스트들의 칭찬 코멘트를 들어보자. “에릭은 정말 재주가 많다. 그는 자신이 원하는 플레이는 뭐든지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감정과 함께 블루스를 연주한다. 그가 연주할 때 당신은 그것이 블루스라는 것을 알 것이다.” -B.B 킹- “그는 나보다 훨씬 더 블루스 연주가 뛰어나다. 왜냐하면 그는 블루스를 공부했고, 그것에 대해 당당하기 때문이다.” -제프 벡(Jeff Beck)- “내가 처음 그를 보았을 때 나는 그의 연주를 믿을 수가 없었다. 그는 바로 하늘에서 치는 천둥번개 같았다.” -존 이써리지(John Etheridge) 하지만 이런 융숭한 대접에 대해 클랩튼은 “나에 대해 다른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나는 악평을 받았을 때 그 사실을 소화하기가 무척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다. 호평도 마찬가지다.”며 자신을 향한 관심을 무척 꺼려했다. 그를 추종하는 후배 뮤지션에 대해서도 한마디했다. “사람들이 저마다 다른 목소리가 있는 것처럼 나같이 연주하는 것은 아마 무리일 것이다. 자기 스타일로 연주해야 한다.” 자신에 대한 무조건적인 경외보다는 그들만의 길을 개척할 것을 충고한다. 그의 음악과 인생 여로(旅路)가 굴곡이 심했기에 그 말은 더욱 절실히 다가온다. # 전설의 시작 에릭 클랩튼은 1945년 3월 30일 영국 서레이(Surrey)주의 리플리(Ripley)에서 태어났다. 그는 14살 생일에 할아버지와 할머니로부터 기타를 선물 받고 블루스에 빠져들었다. 그는 어렸을 때 부모님이 이혼하여 할머니 품에서 자라며 외로운 시절을 보냈다고 전해진다. 때문에 흑인들의 비참함과 슬픔을 노래한 블루스가 그에게 찾아간 것은 운명이었는지도 모른다. 클랩튼은 머디 워터스(Muddy Waters), 빅 빌 블룬지(Big Bill Broonzy), 블라인드 윌리 존슨(Blind Willie Johnson) 등 초기 블루스 아티스트들의 음악을 연주하며 성장했다. 특히 ‘델타 블루스의 왕’이라 불리는 로버트 존슨(Robert Johnson)의 영향은 결정적이었다. “로버트 존슨의 앨범들은 내가 음악적으로 원하는 모든 것을 갖추고 있었다.” 에릭 클랩튼의 기타 연주가 빛을 발하기 시작한 것은 1963년 야드버즈에 가입하면서부터였다. 그의 뛰어난 블루스 기타 테크닉은 단숨에 그룹의 사운드를 특징지었고, 매니저 지오지오 고멜스키(Giorgio Gomelsky)는 그에게 ‘슬로우 핸드’라는 애칭을 붙여주었다. 하지만 클랩튼은 그룹의 음악이 상업적으로 물들어 가고 있다며 1965년 3월 팀을 떠나 존 메이올이 이끌었던 블루스브레이커스로 자리를 옮겼다. 야드버즈를 탈퇴한 직후 그가 연주했던 ‘For Your Love’는 영국 차트 3위를 기록했다. 이후 야드버즈는 제프 벡과 지미 페이지(Jimmy Page)가 가세하며 전성시대를 누렸다. 바로 록음악계의 ‘3대 기타리스트’가 야즈버즈를 통해 모두 비상했다. # 나, 블루스로 돌아갈래! 이 당시 에릭 클랩튼의 블루스에 대한 열정은 대단했다. 이와 관계된 에피소드 한가지. 그는 블루스브레이커스의 휴지기 동안에 다른 뮤지션들과 전세계를 돌며 블루스 전도를 하기로 마음먹었다. 클랩튼은 그리스의 아테네에서 몇몇 멤버들이 영국으로 돌아갔음에도 불구하고, 한 클럽에서 계속 머물며 공연을 계속했다. 그는 그러나 강도로 돌변한 클럽 주인의 협박으로 옷과 새로 산 마샬 앰프를 놔둔 채 영국으로 도망쳐야했다. 음악 외에는 모든 일에 문외한이었던 ‘순수한’ 그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클랩튼은 블루스브레이커스에서 존 메이올의 독단적 행동에 불만을 품고 자신만의 그룹을 결성하기로 계획했다. 그는 1966년 존 메이올 몰래 드러머 진저 베이커(Ginger Baker), 베이시스트 잭 브루스(Jack Bruce)와 함께 크림을 조직하고 합주를 시작했다. 하지만 얼마 후 음악 전문지 < 멜로디 메이커(Melody Maker) >의 폭로로 인해 클랩튼은 블루스브레이커스에서 해고를 당해야만 했다. 이때 런던의 한 빌딩 벽에는 ‘클랜튼은 신이다(Clapton is god)’라는 문구가 새겨져 많은 화제를 몰고 왔다. 에릭 클랩튼은 크림을 통해 ‘악기 예술의 미학’을 획득했다. 블루스와 재즈가 절묘하게 어울러진 그들의 사운드는 즉흥적이고 빠르며 굉음을 발산했다. 멤버들의 정교하고 뛰어난 연주 실력은 타 밴드와의 간격 차를 크게 벌려놓았고, 음악계에 상당한 충격파를 던졌다. 그들의 앨범들인 1966년의 < Fresh Cream >, 1967년의 < Disraeli Gears >, 그리고 이듬해의 < Wheels Of Fire > 모두 명반으로 손꼽히며 파죽지세의 인기몰이를 했다. 특히 스튜디오 녹음과 라이브를 한자리에 모은 더블 앨범 < Wheels Of Fire >는 미국에서 4주간 정상을 차지하며 멤버들을 세계적인 스타로 만들었다. 바로 이 작품에 명곡 ‘White room’이 수록되어 있다. 그룹은 그러나 서로간의 음악적 견해차를 이유로 1968년 11월 해산했다. 클랩튼의 음악 이력 중 최고의 절정기가 막을 내린 것이다. 이후 트리오는 1993년 1월 명예의 전당 헌액 기념으로 재결합 공연을 가져 많은 박수를 받기도 했다. 크림의 해체 이듬해 클랩튼은 진저 베이커와 함께 트래픽(Traffic) 출신의 스티브 윈우드(Steve Winwood), 페밀리(Family)의 베이스 주자였던 릭 그레치(Rick Grech)를 영입하여 ‘슈퍼 그룹’ 블라인드 페이스(Blind Faith)를 탄생시켰다. 언론에서는 ‘인스턴트 슈퍼 그룹’이라고 비아냥거렸지만, 그들은 공연 때 ‘최후의 슈퍼 그룹’이라는 슬로건을 내세워 대조를 이뤘다. 하지만 언론의 지적대로 그들은 1969년 데뷔 앨범 < Blind Faith >를 내놓고 각자의 길로 떠났다. # ‘레일라’의 비극 에릭 클랩튼의 1970년대는 한 여인과의 슬픈 사랑 얘기로부터 시작된다. 그녀는 다름 아닌 비틀스의 멤버 조지 해리슨의 아내 패티 보이드(Patti Boyd)였다. 클랩튼은 1968년 비틀즈의 화이트 앨범에 수록된 조지의 곡 ‘While my guitar gently weeps’와 같은 해 공개된 솔로 음반 < Wonderwall Music >에서 기타를 맡을 정도로 조지 해리슨과는 절친한 사이였다. 조지와 음악적 교류를 하면서 패티를 본 후 사랑에 빠진 것이다. 당시 종교에 심취해 있던 남편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패티 보이드는 클랩튼에게 의도적으로 눈길을 주었다. 음악 밖에 모르던 에릭은 그만 사랑의 포로가 되고 말았다. 하지만 그녀는 조지와의 행복한 일상으로 돌아갔고, 실의에 빠진 에릭 클랩튼은 술과 마약의 구렁텅이로 빠져들었다. 이런 사랑에 대한 좌절감과 패배감은 1970년 11월에 발표된 데릭 앤 더 도미노스(Derek And The Dominos)의 마스터피스 < Layla & Other Assorted Lovesongs >에 고스란히 담겨졌다. ‘남편이 당신을 슬프게 만들었을 때/ 나는 당신을 위로하려고 노력했어요/ 바보처럼 나는 당신과 사랑에 빠져버렸죠/레일라 당신은 나를 무릎꿇게 만들었어요/ 레일라, 당신께 애원합니다/ 제발...’. 수록곡 ‘Layla’의 구구 절절한 가사처럼 에릭 클랩튼의 상처받은 마음은 노래 전체에 용광로처럼 녹아들었다. 고통스런 자신의 내면을 스스로 바닥까지 긁어내어, 그 고통을 음악으로 걸러냈다. ‘처절한 내면의 사생화’다. 클랩튼의 이러한 마음에 하늘도 감동했던지 얼마 후 패티 보이드는 조지 해리슨과 이혼했고, 둘은 1979년 결혼식을 올리게 된다. 이 음반은 비록 상업적으로는 성공하지 못했지만 블루스와 삶을 완벽하게 조화시키며 걸작의 반열로 들어섰다. # 극적인 재기 드라마 1부 실연의 파장은 매우 컸다. 에릭 클랩튼은 감정적으로 매우 불안정한 상태였으며, 알코올과 약물 중독으로 인하여 병원과 요양원을 들락거려야만 했다. 기타조차 잡을 수 없을 정도로 쇠약해졌다. 이때부터 드라마틱한 재기 스토리가 전개된다. 절망의 늪에서 허우적대고 있던 그에게 구세주가 찾아왔다. 그룹 후(The Who)의 ‘피트 타운센드’(Pete Townshend)였다. 피트는 이미 1960년대 후반 미국에서 찬밥취급을 받던 지미 헨드릭스를 영국으로 데려와 음악계에 데뷔시키는 등 ‘선행’을 벌여왔다. 피트는 클랩튼에게 마약에서 벗어날 것을 권유했고, 1973년 에렉 클랩튼의 레인보우 콘서트를 주최해 재기의 무대를 마련해줬다. 클랩튼은 데릭 앤 도미노스 이후 3년 만에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당시 피트는 에릭 클랩튼이 정신을 못 차리자 하와이안 기타로 머리를 때리기까지 했다고 한다. 기력을 회복한 에릭 클랩튼은 1년 뒤 재기 작품 < 461 Ocean Boulevard >를 내놓았다. 앨범이 출시되기까지는 피트 타운센드와 함께 RSO 레이블의 사장인 로버트 스틱우드(Robert Stigwood)의 도움이 컸다. 그는 폐인이 된 클랩튼을 위해 요양장소로 플로리다에 있는 자신의 별장을 선뜻 내주며 재기의 기틀을 마련케 했다. 클랩튼도 스틱우드의 호의에 고개 숙여 감사하며 다시 기타를 집어들었다. 스틱우드의 별장주소가 바로 이 앨범의 타이틀이다. 스틱우드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인 것이다. 밥 말리(Bob Marley)의 곡을 리메이크한 ‘I shot the sheriff’는 정상을 차지했고, ‘Let it grow’, ‘Give me strength’ 등이 인기가도를 달리며 ‘기타의 신’으로 부활했다. 이후 연이어 내놓은 앨범들도 좋은 성적을 거두었고, 특히 ‘Wonderful tonight’이 실려있는 1977년 작품 < Slowhand >는 300만장이상의 높은 판매고를 기록했다. 에릭 클랩튼은 약물 중독으로 고생하던 이 시기를 잊지 못하고, 1999년 마약 중독자 치료기금을 위해 자신의 기타 100대를 경매에 내놓은바 있다. # 극적인 재기 드라마 2부 에릭 클랩튼은 1980년대에 접어들면서도 꾸준하게 앨범을 발표하지만 별다른 활약상을 보이지 못했다. 물론 1989년 작품 < Journeyman >같은 수작을 낚아 올리기도 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그룹시절과 달리 음악적 측면에서 많은 비판을 받았다. 평론가들은 ‘에너지가 없어지고 느슨해진 팝 블루스’라며 평가 절하했다. 하지만 그는 1991년 아들의 죽음이라는 ‘비극’과 함께 현실무대로 화려하게 컴백했다. ‘운명의 여인’ 패티 보이드와 헤어지고 이탈리아 투어 도중 만난 젊은 사진작가이자 배우였던 로리 델 산토(Lori Del Santo)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코너(Corner)가 뉴욕 맨하탄의 아파트에서 실족사한 것이다. 나중에 에릭 클랩튼은 “내가 아파트에 도착했을 때는 온통 경찰관과 의료진들로 가득 차 있었다. 나는 그것이 나와 관계가 없는 것처럼 보였다. 나와는 상관없는 다른 사람의 일처럼 느껴졌다.”며 망연자실했던 당시의 심정을 묘사했다. 클랩튼은 그러나 ‘예전처럼’ 기타를 놓지 않았다. 오히려 기타와 노래에 더욱 몰두했다. 음악만이 유일한 치료제라는 것을 이전 경험으로 깨달았다. 그는 1992년 영화 < 러쉬(Rush) >의 사운드 트랙에 삽입된 ‘Tears in heaven’에 죽은 아들을 향한 아버지의 마음을 실었다. MTV의 제안으로 그 해 녹음된 앨범 < Unplugged >에서의 백미도 단연 이 곡이었다. 어쿠스틱 기타에 실린 애절한 멜로디와 노랫말은 많은 이들의 심금을 울렸다. 이듬해 그래미는 그에게 ‘올해의 앨범(Album Of The Year)’, ‘올해의 레코드(Record Of The Year)’, ‘올해의 노래(Song Of The Year)’ 등 알짜배기를 포함하여 6개의 트로피를 ‘위로 선물’로 전달했다. ‘추억’에서 ‘현재진행형’으로 재진입하는 극적인 순간이었다. 에릭 클랩튼의 상승세는 계속됐다. 1994년 발매한 < From The Cradle >은 흥행과 평단 양편에서 세계적인 지위를 얻었다. 미국과 영국 앨범차트를 동시 석권하였고, 블루스의 성찬을 담아낸 작품으로 격찬 받았다. 4년 뒤에 내놓은 앨범 < Pilgrim > 또한 플래티넘을 기록하며 좋은 반응을 얻었다. # 전설은 영원하다 에릭 클랩튼은 작품마다 자신의 인생을 투영시켰다. 혼을 불어넣었다. 올해 발표한 앨범 < Reptile >에도 그의 숨결을 살아 숨쉰다. 신작의 기저에 흐르는 물줄기는 그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삼촌의 죽음’이다. 삼촌에 대한 존경심을 작품 전체에 고스란히 옮겼다. “‘Reptile(사전적 의미로는 비열한 인간이라는 뜻)’은 삼촌과 관련이 있는 모든 것을 말한다. 내가 태어난 곳에서 ‘Reptile’이란 단어는 사랑스러운 말이다.” 이 음반은 프로듀서 사이먼 클리미에(Simon Climie)를 포함하여 전작 < Riding With The King >의 세션팀이 그대로 참여했다. 또한 시카고 소울의 거장 커티스 메이필드(Cutis Mayfield)의 빈자리를 남겨둔 채 임프레션스(The Impressions)가 부드러운 화음을 더하고 있다. 블루스뿐만 아니라 레게, 컨트리, 테크노 등 다양한 장르로 음악 지류를 넓히고 있는 클랩튼은 새 앨범에서도 그 폭을 확대했다. 퓨전 재즈풍의 기타 연주가 도입됐으며, 라틴 음악의 요소도 엿보인다. 보사 노바의 흥취가 물씬 풍기는 첫 곡 ‘Reptile’을 비롯해, ‘Modern girl’, ‘Son & sylvia’ 등에서 알 수 있다. ‘리듬’에 대한 클랩튼의 지속적인 실험이다. 선배들을 향한 오마쥬도 계속된다. 에릭 클랩튼의 음악적 스승 중 한 명인 기타리스트 J.J. 케일(J.J. Cale)의 ‘Travelin` light’, 1985년에 세상을 떠난 ‘점프 블루스의 대가’ 빅 조 터너(Big Joe Turner)의 고전 ‘Got you on my mind’ 등이 그것이다. 또한 스티비 원더(Stevie Wonder)의 1980년대 히트넘버 ‘I ain`t gonna stand for it’, 레이 찰스(Ray Charles)의 ‘Come back baby’를 새롭게 재해석하며 두 명의 맹인 거장에 대해 경의를 표하고 있다. 그는 그러나 ‘향수’를 풍기지 않는다. 애절하면서도 포근하게 감싸안는 음색과 선율로 그만의 분위기를 낸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곡조에 맞게 ‘톤’을 찾아내는, 바로 ‘기타의 신’만이 할 수 있는 특허품이다. 음악을 만들고 듣는 이가 인간이지만 ‘비인간적’인 음악이 판치는 요즘이다. 그러나 에릭 클랩튼의 음악과 인생은 접점이 없는 평행선을 달리지 않는다. 합일점을 찾아 예술로 승화시킨다. 그래서 그의 음악에는 희노애락이 담겨져 있다. 특히 역경 속에서 소중한 음악의 싹을 틔우고 키워냈다. 내면의 고통과 이별의 슬픔을 블루스로 쏟아냈다. ‘인간의 음악’이다. 당연하다. 허나 바로 이 점 때문에 클랩튼은 전설로 추앙 받는다.
1993년 서른살의 늦은 나이로 데뷔한 여성 로커 셰릴 크로우는 미국의 정통 록 사운드를 들려주는 뮤지션이다. 블루스와 컨트리가 섞인-국내에는 이상하게도 인기가 없는- ‘루츠(roots) 록’ 계열의 음악을 한다. 복고적인 음악에다 경쾌한 록 사운드와 여성 특유의 세밀한 감성이 합쳐져서 듣기 좋은 셰릴 크로우의 음악이 된다. 백업 싱어 출신인 그녀는 일상적 삶에 대해 때론 격정적으로 때론 담담하게 노래한다. 발랄... 1993년 서른살의 늦은 나이로 데뷔한 여성 로커 셰릴 크로우는 미국의 정통 록 사운드를 들려주는 뮤지션이다. 블루스와 컨트리가 섞인-국내에는 이상하게도 인기가 없는- ‘루츠(roots) 록’ 계열의 음악을 한다. 복고적인 음악에다 경쾌한 록 사운드와 여성 특유의 세밀한 감성이 합쳐져서 듣기 좋은 셰릴 크로우의 음악이 된다. 백업 싱어 출신인 그녀는 일상적 삶에 대해 때론 격정적으로 때론 담담하게 노래한다. 발랄한 귀염성이 느껴지는 음색에서는 선배 여가수 리키 리 존스(Rickie Lee Jones)의 영향이 느껴진다. 미국적인 루츠 록을 반기지 않는 정서 탓에 국내에서는 그 지명도가 낮은 편이지만 본고장 미국에서는 상황이 다르다. 나오는 앨범마다 격찬을 받았고 대형 팝 스타들이 자청해서 그녀를 돕는 등 상당한 영향력을 지닌 가수다. 뒤늦게 빛을 본 ‘늦깎이 신인’의 전형인 셰릴 크로우는 1996년 이후 그래미상을 4년 연속 수상하며 두드러진 활약을 보였다. 그녀는 특히 남성중심의 록음악계에서 여성 뮤지션의 활동영역을 확장시킨 주역이다. 여성 싱어 송 라이터의 붐을 일으키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으며, 사라 맥라클란과 함께 여성 뮤지션들의 축제인 를 주도하기도 했다. 1963년 2월 11일 태어난 셰릴 크로우는 아마추어 빅 밴드에서 활동했던 부모 덕에 어려서부터 음악과 친해졌다. 6살 때 이미 피아노 연주를 배우기 시작했고, 13살 때 처음으로 작곡을 하며 음악경력을 쌓기 시작했다. 대학에서 클래식 음악 학위를 땄던 그녀는 잠시 음악교사 생활을 하기도 했지만 곧 작곡과 노래에 전념한다. 1987년부터는 백업 가수로서의 화려한 경력이 시작된다. 셰릴 크로우는 그 해 8월부터 18개월 간 마이클 잭슨의 월드투어에 백업 보컬로 따라 나섰다. 이후 돈 헨리, 로드 스튜어트, 조 카커, 조지 해리슨 등 쟁쟁한 슈퍼스타들의 공연에 참여하며 가수로서의 가능성을 키워갔다. 다양한 세션 활동으로 주가를 올린 셰릴 크로우는 1991년 < A&M > 레코드와 솔로 앨범을 내기로 계약한다. 이후 ‘튜스데이 나이트 뮤직 클럽(Tuesday Night Music Club)’이라는 이름으로 밴드생활을 하던 그녀는 1993년 밴드의 동료들이 작곡, 세션에 대거 참여한 데뷔앨범 을 발표했다. 그 앨범은 발표 당시엔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다. 하지만 이듬해부터 대단한 저력을 발휘하며 7백만 장이라는 놀라운 판매고를 기록했다. 역시 밀리언셀러가 된 싱글 ‘All I wanna do’는 13주간 정상을 지켰던 보이즈 투 멘의 ‘I make love to you’에 이어 차트 2위에 올랐다. 그 곡으로 셰릴 크로우는 1995년 그래미 시상식에서 ‘올해의 레코드’, ‘최우수 신인’ 등 4개 부문을 수상했다. 음악 전문지 이 1994년 선정한 ‘차세대 록의 주역’으로 뽑히기도 했다. ‘Leaving Las Vegas’, ‘Strong enough’ 등이 연속히트하며 성공적 솔로 가수가 된 그녀는 더 이상 백업 보컬이 아니었다. 밥 딜런, 롤링 스톤스, 이글스 같은 거장들의 공연에 오프닝 가수로서 당당히 노래를 불렀다. 1996년 10월에는 셀프타이틀의 두 번째 앨범이 발표되었다. 그녀 자신의 역할이 훨씬 커진 2집은 전작과 달리 즉각적인 반응을 일으켰다. 차트 상위권에 올랐던 ‘If it makes you happy’, ‘Everyday is a winding road’ 같은 곡은 그녀의 훌륭한 작곡능력을 재확인시켰다. 1997년 8월 그녀는 사라 맥라클란, 숀 콜빈(Shawn Calvin), 주얼(Jewel) 등과 연계해서 를 주최했다. 이 여성들만의 축전은 ‘남성과 경쟁하는 여성이 아니라 개별적 존재로서의 여성’이라는 슬로건을 내걸어서 수많은 지지를 이끌어냈다. 1998년 9월 그녀는 세 번째 앨범 를 출시해서 ‘My favorite mistake’를 히트시켰다. 1998년 뉴욕 센트럴 파크에서 열렸던 공연실황은 음반 에 담겨 출시되었다. 이 앨범은 에릭 클랩튼, 롤링 스톤스의 키스 리처드, 프리텐더스의 크리시 하인드, 플릿우드 맥의 스티브 닉스, 사라 맥라클란 등 쟁쟁한 진용이 참여해 그녀의 높아진 위상을 실감케 했다. 건스 앤 로지스의 히트곡을 리메이크해 영화 에 삽입되었던 ‘Sweet child o` mine’는 그녀의 곡으로는 드물게 국내에서 히트를 기록했다. 셰릴 크로우의 음악은 뒤늦게 꽃피운 그녀의 인생과도 상통한다. 폭발적이지도 화려하지도 않지만 자연스럽게 사람의 마음을 끄는 미묘한 힘이 있다. 담배연기 자욱한 클럽에 홀로 앉아서 일상적 삶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관조적 자세가 그녀에게 느껴진다. 그래서 더욱 그녀가 미덥다. 자극적인 첫맛보다는 은은한 뒷맛이 깊게 남는 가수다.
노래 : Liza Minnelli (라이자 미넬리)
이번 주 빌보드 싱글 차트 4위에 올라있는 곡 ‘우리 중 하나(One of us)’의 주인공 조안 오스본은 스타 자리를 예약한 유망신인이다. 가파른 상승곡선을 긋고 있는 그의 노래는 머라이어 캐리의 ‘어느 달콤한 날’을 깨고 1996년의 첫 번째 넘버원 신곡이 될 가능성이 크다. 최근 들어 그 만큼 칭송을 많이 받는 가수도 없을 것이다. < 뉴요커 >는 그를 ‘록 계의 가장 명료한 목소리를 가진 사람 가운데 한 ... 이번 주 빌보드 싱글 차트 4위에 올라있는 곡 ‘우리 중 하나(One of us)’의 주인공 조안 오스본은 스타 자리를 예약한 유망신인이다. 가파른 상승곡선을 긋고 있는 그의 노래는 머라이어 캐리의 ‘어느 달콤한 날’을 깨고 1996년의 첫 번째 넘버원 신곡이 될 가능성이 크다. 최근 들어 그 만큼 칭송을 많이 받는 가수도 없을 것이다. < 뉴요커 >는 그를 ‘록 계의 가장 명료한 목소리를 가진 사람 가운데 한 명’이라고 했고 < 엔터테인먼트 위클리 >는 ‘서민들의 고통과 즐거움을 표현할 줄 아는 브루스 스프링스턴의 재능을 지닌 인물’이라고 추켜세웠다. < 롤링스톤 >도 리뷰 코너에서 우수작이란 의미로 별표 네 개를 주었다. 이처럼 호평이 쏟아지는 이유는 여러 가지다. 첫째 노래를 썩 잘한다는 점이다. 허스키 하면서도 목소리가 탁하지 않은 데다, 미세한 감정 표현도 잘해낸다. 음악의 바탕이 중량감 있는 록이라는 것도 그가 지닌 장점이다. 그의 앨범 < 맛(Relish) >이 지난해의 걸작 록 앨범 중 하나라는 데 이의를 다는 사람은 거의 없다. 수록곡의 내용도 매우 광범위하면서 사실적이다. 약물에 찌든 매춘부나 자살하는 친구, 납부하지 않은 전화요금으로 인한 다툼 등을 소재로 했다. 제목이 ‘이제 벗읍시다(Let`s just get naked)’인 노래도 있다. 또 ‘거미줄(Spider web)’은 맹인가수 레이 찰스가 ‘볼 수는 없지만 노래 할 수 없는’ 처지가 되었을 때 일어날 상황을 노래로 묘사한 것이다. 그처럼 그의 노래는 상상의 극치를 보여준다. 그 자신도 “내가 이 레코드를 취입하게 됐을 때 스스로에게 한 약속은 가능한 한 나의 아이디어를 자유롭게 풀어헤치자는 것이었다”고 말한다. 때문에 그의 곡들은 지극히 자연스럽다. ‘뭔가 해야겠다’는 억지가 보이지 않는다. 그는 이 같은 결과를 ‘자유스런 곡 쓰기’를 통해 얻었다. 그는 이번 앨범을 만들기 전에 고(故) 독 퍼머스가 지도한 작곡 워크숍에 참여해, 그로부터 곡을 쓰려면 뭔가 머리 속에 떠오를 때 즉시 쓰라는 것을 배웠다. 그래서 저녁 식사 때도 노트북을 지참했고 종이가 없을 때는 팔뚝에 가사를 쓰기도 했다. 작위적으로 짜내듯 만들지 않은 만큼 그의 작품은 듣기에 자연스럽고 편안하다. 수작이 되는 것은 당연하다. 그의 앨범은 음악이 짜 맞추는 ‘과학의 소산’이 아니라 ‘상상의 산물’이어야 함을 웅변해 준다. 그는 미국 켄터키 주 앵커리지 출신으로 1962년생이다. 신인이지만 결코 신세대는 아니다. 전에 두 장의 앨범을 낸 바 있지만 이제야 비로소 주목을 받게 된 것이다. 그래서 < 빌보드 >기고가 래리 르블랑은 그의 뒤늦은 성공을 두고 ‘결국 재능은 승리한다는 증거’라고 묘사했다. 중고 신인으로 지각 성공한 주인공이라는 점에서 그는 지난해 그래미의 주인공인 셰릴 크로와 닮은꼴이다. 마침 조안 오스본도 올해 그래미 6개 부문 수상 후보에 올라 있다. 셰릴 크로에 이은 또 한 번의 스타탄생을 기다려 본다.
세상일에 아무 관심없는 천재 작곡가 대중 음악인을 ‘음악 하는 자세’와 관련하여 분류한다면 크게 두 부류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하나는 그가 처해 있는 시대 상황을 면밀히 관찰하여 대중 정서의 현 위치를 찾으려는 사람들이며, 다른 한쪽은 주변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든 무관하게 자신의 음악만을 표출하는 데 심혈을 쏟는 사람들이다. 두 가지 스타일이 혼재되어 있는 음악인도 있을 테지만 대체로 전자의 무게 중심은 시각... 세상일에 아무 관심없는 천재 작곡가 대중 음악인을 ‘음악 하는 자세’와 관련하여 분류한다면 크게 두 부류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하나는 그가 처해 있는 시대 상황을 면밀히 관찰하여 대중 정서의 현 위치를 찾으려는 사람들이며, 다른 한쪽은 주변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든 무관하게 자신의 음악만을 표출하는 데 심혈을 쏟는 사람들이다. 두 가지 스타일이 혼재되어 있는 음악인도 있을 테지만 대체로 전자의 무게 중심은 시각(view)일 것이며 후자는 예술(art)이다. 엘튼 존은 바로 후자를 대표하는 금세기 최고 록 스타 가운데 한사람이다. 흔히 그는 1970년대를 대변하는 톱 가수로서 록 역사에 기록된다. 1970년대가 개막되면서 ‘보더 송(Border song)’을 빌보드 차트에 랭크시키며 등장한 그는 이후 당대 누구도 따를 수 없는 탁월한 선율로 인기 차트를 석권했다. 그의 멜로디를 뽑아내는 재주는 존 레논과 폴 매카트니의 쌍포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 경이적이었고 또 천재적이었다. 만약 1970년대에 그가 없었더라면 팝계의 ‘예술적 활기’는 기대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이와 관련, 록 평론가인 로버트 크리스트고(Robert Christgau)의 엘튼 존에 대한 서술은 참으로 맹쾌하다. “1960년대의 비치 보이스처럼 엘튼 존은 1970년대의 필수적인 시금석으로 남아 있다. 따라서 그가 해악의 진부성을 축약하고 있다고 믿는다면 그렇게 하라. 하지만 내 생각으로 그는 가장 유순하고 황량한 시절마저도 생기로 가득 채울 수 있다는 것을 입증한 인물이다.” 그런데 크리스트고도 인정하고 있듯이 1970년대는 사회성으로 특징지어진 1960년대 록 혁명의 정신이 함몰되어 버린 ‘록 예술성의 시대’로 정의된다. 크리스트고가 그때를 ‘해악’이니 ‘유순하고 황량한 시절’이니 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인식에 기초한 것이다. 엘튼 존 스스로도 ‘음악을 만들면서 정치적 이슈를 내거는 것은 넌센스다. 세상사를 개선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가서 음악하는 것뿐’ 이라며 자신의 비(非)참여적 음악관을 천명하곤 했다. 그는 “음악에 있어서 정치가 영향력을 발휘한다고 생각지 않는다. 말로 세상을 바꾸려 했던 1960년대 가수들을 보라. 삶은 여전히 똑같지 않은가”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가 록의 사회성에 얼마나 등을 돌렸는지는 곡 쓰기에서도 여실히 나타난다. 그는 다른 송라이터들과 달리 작사는 직접 하지 않고 남에게 맡겼는데 당시 그의 작사 파트너는 버니 토핀(Bernie Taupin)이었다. 버니가 쓴 노랫말은 지극히 개인적인 내용으로 가득 찼다. 버니는 사회를 떠난 신변잡기의 소재에 집착하면서 공상을 써내기에 급급했다. 그러나 엘튼은 그의 가사를 좀처럼 따지지 않았다. 그저 즐겁게 그의 공상을 팬들에게 전달할 뿐이었다. 그는 심지어 “난 정말 버니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른다. 어떤 사람에 대한 노래냐고 묻기는 하지만 의미를 캐내지는 않는다. 난 그의 가사 10편에 곡을 붙일 때까지 그를 만나지 않은 적도 있다”고 스스럼없이 밝히기도 했다. 자기 환상만을 늘어놓는 작사가, 그것을 검증도 없이 곡을 쓰고 즐겁게 노래하는 가수, 그들에게서 시각을 바랄 수 없다. 그런 음악은 본질적으로 예술 쪽으로 치우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엘튼 존이 1970년대의 특성을 떠 안은 인물임을 시사하는 또 하나의 중요한 단서가 있다. 1970년대는 1960년대 히피의 프리 섹스 여파로 성의 일반적 개념이 철저히 해체되어 독신, 동성애, 그룹 섹스, 배우자 바꾸기 등 새로운 섹스 스타일이 마구 고개를 들던 시기이기도 했다. 때문에 1970년대를 ‘자극의 시대’라고도 일컫는 것이다. 엘튼은 소문난 양성(兩性)주의자였다. 아니, 스스로 바이 섹슈얼(Bi-sexual)이라고 공언하고 다녔다. 그런 충격적 신상 공개는 데이비드 보위(David Bowie)를 뺀다면 록 스타들 중에서는 그에게서 최초로 나온 것이었다. 하지만 실상은 달랐다. 그는 양성주의자가 아니라 동성주의자, 즉 게이라는 사실이었다. 최근 < 디테일즈 >지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왜 그 때 호모라고 하지 않고 바이 섹슈얼이라고 했냐”하는 질문에 “아마 겁이 나서였기 때문일 거다. 진실 파기이지만 그 당시에는 가능한 한 ‘외교적’으로 말하려고 생각했다”고 답변했다. 이 부분에 관해서 그의 실체를 파악하기 위해 인터뷰 내용을 더 살펴보기로 하자. - 언제부터 여성 관계를 단계적으로 끝냈는가? :끝내다니? 어떠한 여성 관계도 결코 없었다. 그 누구도 나는 끝내고 자시고 하지 않았다. - 몇 살 때부터 자신이 게이임을 알았는가? :대략 23세쯤이었을 거다(그는 1947년생이므로 1970년쯤 된다). 그때가 나의 첫 실제 경험이었다. 아마 그 전부터 게이인지 알았을 텐데 23살에 실질적으로 그것을 맞이했다. - 그런데 결혼은 왜 했나? :잘못된 이유로 결혼했다. 난 결혼하면 내가 당하고 있는 모든 고통으로부터 벗어날 것이라고 생각했다. ‘난 게이야. 난 정말 불행해’라고 여기곤 했으니까. 동성연애자라는 여론의 화살을 피하려고 결혼했다는 얘기다. 그는 1984년 독일 출신의 레코딩 엔지니어인 레니트 블라우어(Renete Blauer)와 결혼식을 올렸다. 게이라고 공공연히 밝힌 사람이 여자에게 갔다는 이유로 화제를 모았던 이 관계는 당연히 오래가지 못했다. 둘은 3년을 채 넘기지 못하고 1987년 이혼했다. 게이 발언, 여성과 결혼, 그리고 이혼 등의 사건으로 이미 타블로이드 신문의 가십 단골이 된 그는 1988년 마침내 한 차례 커다란 홍역을 치러야 했다. 영국의 < 선 >지가 “엘튼이 10대 어린이들을 모아 놓고 입에 담을 수 없는 추잡한 섹스 파티를 벌였다”는 기사를 게재한 것이었다. 그 기사에 따르면 그는 게이를 초월하는 ‘성도착증 환자’이자 ‘성격 장애자’나 다름없었다. 인간 관계 전반에 영향을 미치고 어머니마저 창피해 스페인으로 떠나버리자 분기탱천한 그는 두주먹 불끈 쥐고 < 선 >지를 고소했고 이어 치열한 법정 공방을 벌이게 됐다. 그는 이 재판에서 승소해 명예를 회복했지만 이후 언론으로부터는 ‘흥미의 대사(Ambassador of Fun)’라는 불명예스런 타이틀을 얻었다. 애초부터 매스컴과 우호적인 관계는 아니었지만-언론의 등쌀이 마릴린 먼로를 죽이게 했다는 내용을 노래 ‘바람속의 촛불(Candle in the wind)’로 알 수 있다-그는 이 사건을 계기로 언론에 몸서리를 치게 되었다. 그는 영화 < 라이온 킹 >의 사운드 트랙은 ‘오늘밤 그대는 사랑을 느끼나요?(Can you feel the love tonight?)’으로 재기한 94년까지 근 7년 간 가능한 한 언론과의 인터뷰를 회피했다. 그의 기자 혐오증은 너무나 유명하다. 스스로도 “난 영국의 언론에 분노가 치민다. 정말로 그들이 싫다. 그들은 거짓말쟁이들이며 지구의 깡패들이다”라고 강도 높게 말하기도 했다. 그의 언론에 대한 분노는 지금도 살아 끓어 넘친다. 올해 발표된 새 앨범의 타이틀 송 ‘메이드 인 잉글랜드(Made in England-8월 19일자 빌보드 싱글 차트 52위)’가 그것을 실증해 주는 곡이다. “난 영국에서 만들어졌어. 블루 코티나차처럼 말야... ...넌 스캔들의 냄새를 좇았지. 여기 내 가운데 손가락을 봐. 난 고통의 40년을 살았어. 아무것도 기댈 것이 없어... ...넌 아직도 호모라고 얘기하고 모든 사람이 웃지.” 그가 이처럼 투정을 부리는 것도 일리는 있다. 원래가 솔직하고 감성적인 성격으로 자신의 성(性)을 고백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언론을 거치면서 일반인들의 미움과 손가락질이 생겨난 것이라고 그는 믿기 때문이다. 그의 인기가 하향세로 접어든 것도 양성주의자임을 밝힌 1976년부터였다. 그는 1989년 < 파리 마치 >지와의 인터뷰에서 “지난번 앨범 < 레그 스트라이크스 백(Reg Strikes Back) >은 전세계적으로 판매 성적이 대단히 좋았는데 유독 영국에서만은 결과가 안 좋았다. 영국인들 대부분이 < 선 >지의 악의적인 기사를 믿고 있기 때문일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의 어떤 논리적인 응수에도 불구하고 그가 ‘예술과 자극’의 1970년대라는 보수 시대를 살아왔으며 보수 성향의 인물이라는 점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그는 또 명백한 ‘록 엘리트’다. 부자라는 점에서도 그렇거니와 음악 능력의 측면에서도 그렇다. 그는 “버니의 가사를 받아 기분이 좋을 때면 곡을 쓰는데 15분도 안걸린다”고 자랑했다. 그런 천부적 재능을 밑천 삼아 그는 지금까지 무려 32장의 앨범을 발표했다. 물론 이 왕성한 생산력을 아티스트의 성실성이라는 측면에서 극구 칭송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비틀어보면 그것은 음악 엘리트만이 할 수 있는 일 아닐까. 실제로 그는 비평계 일각으로부터 ‘음악의 과소비’를 행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으며 그가 1970년대 후반 ‘엘리트만이 아니라 누구나 음악할 수 있다’는 평등의 이데올로기를 내건 펑크 진영의 공격 대상이 된 것도 이 때문이었다. 아직도 그의 이름에는 ‘로커’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그러며 연상되는 과거의 거친 피아노 연주나 기행적 무대는 분명 폭발과 반란을 특질로 하는 록의 전형적 제스처였다. 그러나 지금 그에게서 그러한 ‘록의 반항적 미학’을 발견하기는 어렵다. ‘오늘밤 사랑을 느끼나요’가 말해주듯 중산층의 격조와 결탁한 ‘AOR(Adult Oriented Rock)’이나 스탠더드 팝으로 색깔을 바꾸어 안전지대에 정착해 있다. < 타임 >지는 얼마전 그의 새로운 전성기가 도래했음을 대서특필하는 순간에도 ‘그에게는 실재(實在)하는 록 스타의 고뇌와 거친 감정이 부족하다’는 지적을 빼놓지 않았다. 그가 ‘팝계의 불사조’라는 작위를 하사 받아야 함은 마땅하다. 정글과도 같은 팝계를 4반세기에 걸쳐 롱런한 ‘영광의 생존’만으로도 그는 위대하다. 1993년에 이미 엘비스 프레슬리의 벽을 넘어 24년간 한 해도 거르지 않고 매년 차트 40위권의 히트곡을 낸(올해로 그 햇수는 26년으로 늘어났다) 사실만으로도 그의 위력을 충분히 실감할 수 있다. 마흔여덟 살의 노장이 신인들 틈새에서 몇 백만 장의 음반 판매고를 올리는 것 또한 우리 입장에서는 부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사실 그 나이의 사람에게 록에 대한 충성을 요구하는 것도 무리일 것이다. 하지만 그에게는 시각이 없다. 그는 4반세기 동안 그의 관점을 개인으로부터 해방시킨 적이 없었다. 그렇기에 보수적인 시대에 환영을 받고 있는 것이다. 내내 부진하다가 미국 사회에 보수적인 기류가 소생한 지난해(1994년) 재기한 것을 보라. 그의 노래들 ‘굿바이 옐로 브릭 로드(Goodbye yellow brick road)’ ‘오늘밤(Tonight)’ ‘미안하다는 말은 정말 어려워(Sorry seems to be the hardest word)’ 등은 아직도 우리들에게 높은 인기를 누리고 있다. 그는 실로 우리의 팝송 청취와 수용이 예술적 가치에만 집중되어 있음을 상징하는 인물이라는 생각이 든다.
노래 : Zucchero (주케로,Zucchero Sugar Fornaciari)
걸쭉하고 목소리로 노래하는 주케로(Zucchero)는 이탈리아의 국보급 가수로 통하는 인물이다. 국내에도 히트곡 모음집을 비롯한 몇 장의 앨범이 공개된 바 있다. 비록 미국과 영국의 팝 스타처럼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것은 아니지만 1990년에 유럽에서 큰 반향을 일으킨 곡 ‘Senz una donna’(Without a woman)는 국내 팬들에게도 꽤 알려져 있다. 기타 영웅 에릭 클랩튼(Eric Clapto... 걸쭉하고 목소리로 노래하는 주케로(Zucchero)는 이탈리아의 국보급 가수로 통하는 인물이다. 국내에도 히트곡 모음집을 비롯한 몇 장의 앨범이 공개된 바 있다. 비록 미국과 영국의 팝 스타처럼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것은 아니지만 1990년에 유럽에서 큰 반향을 일으킨 곡 ‘Senz una donna’(Without a woman)는 국내 팬들에게도 꽤 알려져 있다. 기타 영웅 에릭 클랩튼(Eric Clapton)과 함께 유럽 투어에 나서기도 했으며, 위대한 테너 루치아노 파바로티의 연례 자선행사로 유명한 ‘파바로티와 친구들’에 자주 모습을 드러내 얼굴도 알려져 있다. 1956년 생이며 본명은 알델모 포르나치아리(Aldelmo Fornaciari). 70년대 말에 수의약품을 전공하면서 볼롱가에서 밴드를 결성했지만 지명도를 획득하지 못했고 결국 80년대 초반에는 노래부르기에서 작곡으로 전향했다. 하지만 86년 < Respetto > 앨범과 함께 비로소 자신의 이름을 새기기 시작해 이듬해 앨범 < Blues >가 본국 이탈리아에서 밀리언셀러를 기록하면서 비로소 톱스타로 부상했다. ‘Senz una donna’가 수록된 87년의 앨범 < Ora Incenso Birra >도 유럽에서 밀리언셀러를 기록했다. ‘Senz una donna’는 1991년 영국 소울 가수 폴 영(Paul Young)과 함께 영어와 이탈리아어를 뒤섞은 버전으로 다시 발표되어 영국차트 5위에 올랐다. 이 때가 이탈리아를 벗어 국제적 명성을 확보한 시점. 한편 이 싱글이 수록된 1990년의 앨범 < Zucchero Fornaciari >는 국제적 지향을 뚜렷이 반영, 영어 노래가 포함되었으며 에릭 클랩튼과 R&B 오르간주자인 지미 스미스(Jimmy Smith)가 게스트로 참여했다. 90년대 초반 그가 영국차트에 명함을 내민 또 다른 2곡은 모두 듀엣 곡으로 소울 여가수 랜디 크로포드(Randy Crawford)와 부른 ‘Diamante’와 루치아노 파바로티와 호흡을 맞춘 ‘Miserere’로 뒤 곡은 U2의 보노(Bono)가 만들어주었다. 그는 이로써 얻은 지명도로 1994년 우드스탁 페스티벌에도 출연하기도 했으며 같은 해 퀸(Queen)의 프레디 머큐리 트리뷰트 공연에 참여해 노래하기도 했다. 그의 음악은 영국가수로 비교한다면 조 카커(Joe Cocker)와 유사한 ‘블루스와 소울 성향의 록’이다. 앨범 제목으로 ‘블루스’로 내걸었다는 점이나, 폴 영 랜디 크로포드와 노래했다는 것이 말해준다. 열정적이고 혼에 넘친 창법이란 점에서 영미 소울 가수들과 유사하지만 그러면서도 결코 이탈리아적 요소를 놓치지 않는 것이 특징. 그는 2003년 프랑스 프로듀서 알랑 시몬(Alan Simon)이 주도한 환경 프로젝트 앨범 < Gaia >에 인도네시아 앙군(Anngun)과 함께 ‘World’란 곡으로 참여했다.
존 세카다는 호소력 있는 목소리로 라틴 R&B의 진수를 보여주었던 인물이다. 그는 탁월한 보컬 테크닉은 물론이고, 뛰어난 작곡, 프로듀싱 능력까지 겸비하며 1990년대 라틴 팝을 대표했다. 1962년 쿠바의 하바나에서 태어난 존 세카다는 아홉 살 때 서구 문화와 라틴 문화가 공존하는 미국 남부의 마이애미로 이주하여, 라틴 음악을 비롯해 흑인 R&B, 펑키, 디스코 등 다양한 음악적 경험을 쌓아 나갔다. 열한 살 ... 존 세카다는 호소력 있는 목소리로 라틴 R&B의 진수를 보여주었던 인물이다. 그는 탁월한 보컬 테크닉은 물론이고, 뛰어난 작곡, 프로듀싱 능력까지 겸비하며 1990년대 라틴 팝을 대표했다. 1962년 쿠바의 하바나에서 태어난 존 세카다는 아홉 살 때 서구 문화와 라틴 문화가 공존하는 미국 남부의 마이애미로 이주하여, 라틴 음악을 비롯해 흑인 R&B, 펑키, 디스코 등 다양한 음악적 경험을 쌓아 나갔다. 열한 살 때부터는 뮤지컬 < Scrooge >의 보컬을 맡으며 본격적인 뮤지션의 길에 들어섰다. 가수로 자신의 길을 확고히 정한 그는 마이애미 대학에서 보컬 분야를 전문적으로 수학했고, ‘Jazz Vocal Performance’ 석사 학위를 받은 뒤 대학에서 강사로 일하는 등 탄탄한 백그라운드를 다져나갔다. 이후 그는 라틴 팝계의 거물 마이애미 사운드 머신(Miami Sound Machine)의 간판 에스테판(Estefan) 부부를 만나면서 월드 스타로 발돋움할 기회를 얻게 된다. 존 세카다의 음악 감성에 흠뻑 취한 에밀리오 에스테판 주니어(Emilio Estefan Jr.)가 자신의 부인이자 라틴 팝 최고의 여성 스타 글로리아 에스테판(Gloria Estefan)의 앨범에 그를 참여시킨 것이다. 결국 작곡과 백 보컬로 참여한 글로리아 에스테판의 1991년 작 < Into the Right >이 큰 성공을 거두면서 존 세카다는 표면위로 떠올랐다. 1992년 존 세카다는 영어 음반 < Jon Secada >, 라틴어 음반 < Otro Dia Mas Sin Verte >를 함께 발표하며 솔로 아티스트로서 화려한 출발을 알렸고 기대만큼이나 그 결과는 화려했다. 라틴어 앨범이 빌보드 라틴 팝 차트 정상에 오르며 글로리아 에스테판의 전유물로 여겨졌던 그래미 최우수 라틴 팝 앨범의 영예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으며, 영어 앨범 또한 ‘Just another day(차트 5위)’의 성공을 필두로, ‘Angel’, ‘I’m free’, ‘Do you believe in us’를 연이어 히트시켰다. 그의 세계적 인기는 후속작 < Heart, Soul & a Voice >에서도 계속됐다. 첫 싱글 ‘If you go’는 미국은 물론 국내에서도 큰 사랑을 받았고, 싱글로 크게 히트하지는 못했지만 ‘Take me’, ‘Mental picture’, ‘Eyes of a fool’과 같은 곡들도 인기를 누렸다. 1995년 흑인 R&B 여가수 샤니스(Shanice)와 함께 영화 < Pocahontas >의 러브 테마 ‘If I never knew you’를 부르고 같은 해 < Amor >로 다시 한 번 그래미에서 최우수 라틴팝 퍼포먼스 상을 수상하는 등 인기를 이어가던 그였지만 1990년대 후반에 접어들면서 하락세로 돌아섰다. 1997년 발표한 라틴어 음반 < Secada >, 3년간의 공백 후에 발표한 2000년도 야심작 < Better Part Of Me > 모두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저조한 결과를 보였고, 리키 마틴(Ricky Martin), 엔리께 이글레시아스(Enrique Iglesias) 등 젊음과 열정으로 똘똘 뭉쳐진 후배 뮤지션들에게 라틴 팝의 왕좌를 내어주고 말았다. 하지만 이후에도 그는 크리스마스 음반 < The Gift >(2001년)를 발표하고, 라틴어 음반 < Amanecer >(2002년)을 내놓으며 꾸준하게 활동을 하고 있다. 한편으로는 가수로서의 인기에 급급하기 보다는 의미 있는 일에 자신의 열정을 할애하는 모범을 보여주고 있기도 하다. 대학 강사를 지낸 자신의 경력을 십분 발휘하여 비영리 단체를 조직, 후배 뮤지션 양성에 힘을 기울이고 있으며, 에이즈와 유니세프 기금 마련 자선 공연을 펼치는 등 음악 외적인 면에서도 아름다운 모습을 내보이고 있다.
연주 : Edoardo Bennato (엘도라도 베나토)
이탈리아 가수 이탈리아 가수
연주 : Paco De Lucia (파코 데 루치아,Paco De Algeciras)
기타 연주자, 작곡가 기타 연주자, 작곡가
연주 : Al Di Meola (알 디 메올라)
퓨전 재즈 기타 연주자 퓨전 재즈 기타 연주자
재즈 기타 연주자 재즈 기타 연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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