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크스의 『자본』 이후 자본주의에 대한 가장 광대하고 독창적인 사유
‘전설’로만 떠돌던 발터 벤야민의 『아케이드 프로젝트』가 드디어 출간되었다. 벤야민이 1927년에 시작해 1940년 급하게 망명을 떠나며 조르주 바타이유에게 맡길 때까지 13년 동안 전념해온 필생의 역작이다. 1980년 조르지오 아감벤의 주장으로 파리 국립도서관의 바타이유 문서고에서 발굴되어 출판되기까지 기이한 운명을 가진 이 책은 발터 벤야민 본인의 말에 따르면 “나의 투쟁, 나의 모든 사상의 무대이다.” 그리고 몇몇 서평에 따르면 이 책은 “20세기에 쓰여진 가장 위대한 서사시”, “역사를 이해하기 위해 20세기에 감행된 가장 위대한 시도”이다. 게다가 “프루스트, 조이스, 무질이 대도시를 대상으로 펼쳐 보인 것을 고급 에세이를 통해 펼쳐 보이고 있는 책”이다.
벤야민 하면 우리는 통상 정치적 망명처를 구하다가 스페인 국경에서 자살로 생을 마감한 비극적인 지식인의 운명과 함께 ‘아우라’, ‘기술 복제’ 그리고 파울 클레의 그림을 화두로 삼은 새로운 천사 등을 떠올린다. 하지만 이러한 관습적 사유에 비추어 볼 때 최근 데리다의 상세한 주해와 함께 출간된 벤야민의 ?폭력 비판을 위하여?라는 글은 생뚱맞기 짝이 없을 것이다. 이처럼 벤야민은 그 동안 우리에게 주로 ‘문화 이론가’로 소개되었지만 최근 서구에서 불고 있는 벤야민 르네상스에서의 벤야민은 정치 이론가에 가깝다. 그 동안 벤야민은 단편적인 글을 통해 극히 일부의 모습만이 소개되어온 셈이다.
13년간에 걸친 벤야민의 이론적 고투의 흔적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이 책은 우리에게 알려진 몇 가지 단편적인 개념들을 포함해 벤야민의 전체적인 사유의 작업장으로서 마르크스의 『자본』 이후 자본주의에 대한 가장 광대하고도 독창적인 사유를 담고 있다. 아케이드, 신유행품점, 패션, 권태, 오스만, 바리케이드전, 박람회, 광고, 수집, 실내, 보들레르, 꿈의 집, 미래의 꿈, 산책자, 매춘, 도박, 거리들, 영화, 사진 등 이 책에서 다루는 주제들만 보아도 이를 쉽게 알 수 있다. 즉 자본주의를 사는 우리 현실에서는 매 분초마다 우리 눈앞에 나타나지만 막상 어느 누구도 본격적으로 분석해보지 않은 현상들을 벤야민은 벌써 60년 전에, 그것도 19세의 파리로, 자본주의의 탄생지로, 자본주의의 뿌리로 거슬러 올라가 근원적으로 사유하고 있는 것이다.
왜 벤야민 르네상스인가
그런데 포스트모더니즘 논의까지도 다 끝난 듯한 이 시점에 모더니즘의 탄생(지)을 탐구하고 있는 이 책은 어떤 의미를 가질까? 벤야민의 사유가 서구 사상계에서 되돌아오고 있는 이유를 최근 우리나라에서 유행한 몇 가지 조류와 비교해보면 어떨까? 예컨대 들뢰즈와 가타리는 ‘자본주의’라는 국가 장치 밖으로, 자본주의라는 몸체 밖으로 ‘탈주’할 것을 꿈꾸지만 벤야민의 ‘산책자’는 자본주의라는 환(등)상에 매료된 자로, 자본주의의 아우라에 도취되는 동시에 고독과 우울로 그러한 미혹에서 벗어나는 이중적 시선을 가진 자이다. 들뢰즈와 가타리의 유목(론)은 너무나 매혹적인 이론처럼 보이겠지만 우리의 현실은 벤야민의 산책자나 댄디의 눈에 비치는 것에 오히려 가깝지 않을까? 예를 들어 ‘스팸-메일’이라는 형용모순적인 용어야말로 현대 최첨단 자본주의의 실상을 가장 정확하게 표현하는 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핸드폰의 경우에도 ‘최신식’이 며칠 만에 ‘구형’이 되어버리는 기이한 법칙이 자본주의의 정상적인 법칙이라는 것을 벤야민보다 일찍 파악한 이론가는 아마 드물 것이다. 이미 19세기 초에 ‘아케이드’가 그러한 운명을 겪었으며, 그것이야말로 자본주의가 실상은 최신과 쓰레기를 동시에 양산하는 체제라는 것을 정확하게 말해준다는 것이다. 즉 자본주의는 끊임없이 욕망과 꿈을 양산하는 체제이지만 동시에 그것을 쓰레기와 폐물로 만들어버려야 하는 아슬아슬한 균형 위에 서 있다는 것이다. 아마 이메일이나 음식, 휴대폰, 노트북 등 우리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온갖 ‘최첨단’의 비밀을 이만큼 정확하게 파악하기는 힘들지 않을까?
『아케이드 프로젝트』 ― 『자본』 이후 자본 읽기의 새로운 가능성
긍정과 부정을 떠나, 자본주의를 실상 그 자체로 파악해야 한다는 데에는 이견의 여지가 있을 수 없다. 마르크스는 방대하고도 정치한 탐구로 자본의 본질에 대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점을 계시해주었다. 하지만 자본주의의 태동기에 활동한 그는 그것이 자체 내의 동력으로 인해 결국 소멸할 것이라고 예언 ― 그것이 그 자신이 예언이든 그를 종교적으로 신봉한 이들의 예언이든 ― 함으로써 20세기 후반에 들어 거짓 예언자로 전락해버리고 말았다. 이제 우리는 자본주의를 다른 방향에서, 전혀 다른 방식으로 바라보아야 할 필요를 느끼게 되었고 바로 그 지점에 발터 벤야민의 『아케이드 프로젝트』가 있다.
『아케이드 프로젝트』는 벤야민이 오랜 기간 구상하고 자료를 모으며 치밀하게 준비했으나 결국 ‘쓰여지지 못한 책’이다. 자살로 생을 마감한 벤야민 그 자신의 삶처럼 영원히 미완성으로 남게 된 책, 『아케이드 프로젝트』는 수많은 인용문과 그에 대한 벤야민의 논평, 그리고 촌철살인의 단상들로 이루어져 있다. 어쩌면 한 권의 책이라고 하기 어려울지도 모를 이 책은 무척 방대하다. 여기서 ‘방대함’이란 비단 분량만을 두고 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이 책에서 벤야민은 ‘해석’이나 ‘변혁’이 아니라 19세기의 자본주의 세계를 완전히 해체해서 다시 조립하려는, 거의 불가능해 보이는 야심 찬 작업을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독자들은 역사와 사회에 대한 벤야민의 거의 우주론적이랄 수 있는 사유를 접하게 된다.
아울러 자본주의의 실체를 파악하기 위한 벤야민의 방법은 ‘근원적’이라고 해야 할 그런 것이다. 20세기를 살다 간 벤야민이 눈을 돌리는 곳은 당대가 아니라 자본주의의 유아기인 19세기, 그중에서도 온갖 모순과 열기가 소용돌이쳤던 19세기의 파리이다. 말하자면 유아기의 역사, ‘근원의 역사’를 탐구하는 것이다. 19세기의 파리는, 언제 불을 뿜을지 모르는 베수비오 화산의 산등성이가 용암층 덕분에 과일나무로 뒤덮인 에덴동산으로 바뀌었듯, “혁명이라는 용암 위에서 다른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는 예술과 화려한 생활과 패션이 꽃을 피우고” 있는 도시였다. 그러한 난장 속에서 벤야민은 자본의 꿈과 욕망이 뒤얽힌 온갖 허섭스레기들을 뒤적이며 자본주의라는 신체의 내밀한 작동 메커니즘과 흐름을 미시적으로 추적한다. 즉 위로부터가 아니라 아래로부터, 밖으로부터가 아니라 안으로부터 자본주의를 탐구하는 것이다. 벤야민의 이 ‘아래로부터의 역사학’은 자본으로부터 배제되고 망각되고 억압된 것에 ‘구원’의 시선을 던짐으로써 아날학파나 민중사학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그것들을 사유할 수 있도록 해준다. 요컨대 ‘근원의 역사’를 통해 19세기를 ‘구원’함으로써 20세기 자본주의의 현재를 조명하는 것, 그것이 『아케이드 프로젝트』를 관류하는 중심 주제이다. 그리하여 어느 평자의 말 그대로 ‘20세기에 쓰여진 가장 위대한 서사시’라 할 수 있는 이 책을 통해 우리는 화장을 지운 자본주의의 맨얼굴을 대면하게 된다.
꿈의 나라, 환(등)상의 세계
자본주의는 꿈을 먹고 산다. ‘꿈의 공장’이라 불리는 할리우드 영화 산업, 이 물건만 사면, 이 아파트에서만 살면 행복은 보장될 것처럼 떠들어대는 수많은 광고들, 한번 제대로 걸리기만 하면 당장 이 보잘것없는 삶에서 벗어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이용해 사람들의 얇은 주머니를 더욱 얇게 만드는 복권, 카지노, 경마 들…… 이들은 모두 기성품으로 찍어낸 꿈을 내다팔아 스스로를 살찌워가고 있는 것이 아닐까? 일찍이 19세기 유럽 각국에서는 만국박람회가 속속 열려 급성장하고 있는 산업의 힘을 과시하는 것과 동시에 대중에게 매력 넘치는 환(등)상을 제공해주었다. 예컨대 1851년의 런던 박람회에서는 마치 요정의 나라에서라도 온 듯한 온갖 진기한 물건들, 그리고 그 자체가 유토피아와 꿈의 세계를 상징하는 듯한 수정궁이 등장했다. 벤야민이 지적하듯 노동자들은 이러한 산업박람회를 통해 상품의 소비자로 교육되며, 기분전환을 위한 오락 산업이 이를 계기로 본격적으로 활기를 띠기 시작한다. 이를테면 상품 자체만이 아니라 상품을 둘러싼 환상이 자본주의에 필수적인 요소라 할 것인데 벤야민의 다음과 같은 말은 이를 표현한 것으로 불 수 있을 것이다. “자본주의는 꿈을 수반한 새로운 잠이 유럽을 덮친 하나의 자연 현상으로, 이러한 잠 속에서 신화적 힘들이 재활성화되었다.”
그렇다면 벤야민의 시대나 21세기로 들어선 오늘날에나 필요한 것은 환(등)상-꿈에서 깨어나는 것이 아닐까? 앞에서 말한 상품을 둘러싼 환상만이 아니라 끝없는 진보라는 환상, 상품이든 문화든 ‘가장 새로운 것’이 ‘더욱 가치 있는 것’이라는 환상, 다른 사람의 것과 똑같은 최신 유행품을 몸에 걸치고 다니면서 그것으로 ‘개성’을 표현한다고 여기는 환상 등등에서 말이다. 여기서 우리는 벤야민의 사유를 통해 역사적 각성에 다다를 수 있을 것이다. 이를테면 ‘최신의 것=쓰레기’라는 역설적 등식이야말로 자본주의의 내밀한 비밀인 동시에 ‘정상적인’ 역사적 경로라는 벤야민의 진단을 통해, 또 진보에 대한 낙관적인 믿음은 (‘영겁회귀’ 사상과 마찬가지로) 신화적 사고방식에 속한다는 엄정한 명제를 통해.
통속적 진보 이론과도 또 ‘쇠망의 시대’라는 비관적 인식과도 결별한 벤야민은 좌파, 우파를 나누는 도식적인 사고망으로는 그 어느 쪽에도 걸려들지 않는다. ‘사유의 닻을 정확하게 올리되 그것이 세계사의 풍향을 맞이하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그 자신의 말처럼 벤야민에게는 엄밀한 현실 인식 그 자체가 중요할 뿐이다. 여기서는 환상이나 신화적 사고가 자리할 곳이 없어진다. 그리하여 20세기의 모든 인식론과 역사철학을 물구나무 세워 새로운 인식의 성좌를 제시하려는 벤야민의 시도는 ‘자본주의의 꿈’ 어쩌면 ‘자본주의라는 꿈’에서 깨어나려는 이들에게 어둔 밤하늘 위에서 나아갈 방향을 가리켜주는 빛 밝은 별자리가 되어준다.
정보의 바다 ― 텍스트 사이에서 여행하기
앞에서 언급했듯이 『아케이드 프로젝트』는 벤야민이 공들여 노트해둔 수많은 인용문과 벤야민 자신의 단상들이 어우러져 있는 거대한 책이다. 하지만 독자는 그 거대함 앞에서 압도당하거나 주눅 들 필요가 없다. 각각의 인용문을 선택한 벤야민의 의도까지도 추측해보면서 텍스트 전체를 꼼꼼히 읽어가는 것도 물론 하나의(아마도 가장 바람직한) 독서 방법일 테지만 마음이 가는 장들부터 혹은 이 단락 저 단락 건너 뛰어가며 읽는 것 또한 가능하다. 마치 웹서핑하듯이 말이다. 그러고 보면 벤야민의 『아케이드 프로젝트』는 정보의 바다www를 닮아 있기도 하다. 수많은 인용문과 단상들은 마치 인터넷상에서 접속을 기다리는 펌글과 댓글처럼 보이지 않는가. 그 텍스트들 사이를 독자는 속도를 내어 단걸음에 내달을 수도 있고, 이것저것을 생각해보며 여유롭게 거닐 수도 있다. 천 개의 입구와 출구를 동시에 가진 거대한 개미굴과도 같은 형태의 이 책에서 독자는 누구나 멀티유저가 되어 각자의 입장과 위치에서 얼마든지 자유롭게 접속해도 좋은 것이다. 어쩌면 그러는 사이 독자는 이 ‘완성된 미완성의 책’을 스스로 완성해보고 싶은 욕구를 느끼게 될지도 모르겠다. 19세기의 파리가 아니라 20세기의 서울을, 보들레르 대신 서정주나 김수영을 분석하면서 오늘날의 세계를 ‘완전히 분해하여 다시 조립’해보고 싶은 유혹을 받게 될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우리 시대의 환(등)상을 인식하고 거기서 깨어날 방법을 모색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결국 아무도 『아케이드 프로젝트』를 완성시키지는 못하리라. 그것은 벤야민이라는 고독한 단독자가 만들어놓은 너무나도 독특한 세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 앞에 하나의 고원처럼 우뚝 솟아 있을 것이며 그 고원으로부터 천 개의 물줄기가 흘러내려 우리의 삶과 사유를 적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