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어 있던 걸작, 10년 만에 다시 빛을 보다.
1993년 《타임》지 <올해의 책>으로 선정, 33개국에 번역된 획기적인 추리소설
숨어 있던 걸작이 10년 만에 다시 빛을 보게 됐다. 『스밀라의 눈에 대한 감각』은 1992년 덴마크어로 출간된 이래 전 세계 33개국에 번역되어 세계적인 반향을 불러일으킨 작품이다. <덴마크 올해의 작가상> (1992), <덴마크 비평가상> (1993), <전국 서점 협회 황금면류관상>(1993), <전영 추리작가 협회 실버대거상> (1994), <독일 추리 협회상> (1995), <이탈리아 방카렐라상> (1995) 등을 수상했으며 1993년에는 《타임》의 <올해의 책>으로 선정되었다. 또한 1997년에는 빌 어거스트 감독에 의해 라는 제목으로 영화화되기도 했다.
국내에서는 1996년 ‘까치글방’에서 번역, 소개되었으나 안타깝게도 책의 진가가 충분히 알려지기 전에 절판됐다. 하지만 이후에도 추리소설 마니아들 사이에서는 꾸준한 입소문을 타는 가운데, ‘복간 희망 리스트 1순위’로 손꼽혀 왔다. 결국, 『스밀라의 눈에 대한 감각』은 뛰어난 작품성, 독자들의 오랜 염원, 그리고 <마음산책> 출판사의 의지가 함께 작용하여 10년 만에 다시 국내 독자들과 만나게 되었다. 번역은 필립 말로 시리즈를 완역한 박현주 씨가 맡았으며, Delta사의 『Smilla's Sense of Snow』영역본을 기반으로 Rosinante사의 『Frøkens Smillas Fornemmelse for Snow』덴마크본을 교차 참조하였으며, 교정시 The Harvill Press사의 『Miss Smilla's Felling for Snow』영역본까지 참조하여 세 권을 비교 ? 대조하였다.
우리가 소설에서 기대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담고 있다
『스밀라의 눈에 대한 감각』은 “찾아서 발견한다(seek & find)"라는 전통적인 추리소설의 플롯을 따르고 있다. 이 소설은 차가운 미지의 땅을 배경으로 얼음과 숫자, 눈에 대한 통찰력을 가진 주인공과 함께 어린 소년의 죽음에 얽힌 미스터리를 풀어나가는 즐거움을 안겨준다.
하지만 ‘추리소설’로만 규정하는 것은 이 소설이 기반으로 삼고 있는 풍성한 컨텍스트를 충분히 드러내지 못한다. 딱히 어떤 장르로 분류하기 힘들 정도로 미스터리와 로맨스, 스릴러, 문명 비판, 철학적 통찰 등 각 장르의 요소들을 적재적소에 구현하고 있다. 소설은 기본적으로 혼성성을 내포하고 있는 장르이지만, 굳이 ‘하이브리드 소설’이라는 표현을 달아줘야 할 정도로 다채로운 작품이다. “우리가 소설에서 기대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담고 있다”는 평가야말로 이 작품에 대한 가장 적절하고도 정당한 발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작가 페터 회는 이 한 권의 책에서 한 아이의 죽음에서 시작된 추리 퍼즐, 문명과 자연에 대한 통찰, 해양 스릴러, 사랑과 관계에 대한 깊은 사유, 도덕적 문제의식을 보여준다. 그리하여 이 책은 많은 서평자들이 평했듯이 존 르 카레와 그레이엄 그린의 전통을 따른 스릴러면서도 읽는 이의 마음에 도덕적이고도 사회적인 삶에 대한 깨달음을 던져주는 문학작품으로 남게 되었다.” (- ‘옮긴이의 말’ 중에서)
추리소설사상 가장 매력적인 여성 캐릭터
『스밀라의 눈에 대한 감각』에 많은 독자들이 열광하는 커다란 이유는 ‘스밀라’ 캐릭터가 지닌 통쾌한 매력 때문이다.
우선 ‘스밀라’는 ‘여성’이면서 ‘아마추어’ 탐정이라는 점에서 추리소설의 계보에서 희귀한 위치를 차지한다. 소위 ‘회색 뇌세포’를 사용하여 사건을 풀어가는 명탐정 또는 유능한 사설 탐정과 가장 먼 거리에 놓이는 한편, 냉소적이지만 인간에 대한 온정을 놓치지 않는다는 점에서 대표적인 하드보일드 추리소설의 캐릭터인 ‘필립 말로’와 비교되기도 한다.
“나는 완벽하지 않다. 나는 눈이나 얼음을 사랑보다 더 중하게 여긴다. 동족 인류에게 애정을 갖기보다는 수학에 흥미를 가지는 편이 내게는 더 쉽다” (68p) 는 발언을 통해 단적으로 드러나듯이 스밀라는 눈과 얼음에 대해 특별한 감각을 지니고 있으며, 합리적인 표현력을 지닌 냉철한 성격의 소유자다. 사람들이 흔히 ‘정상’이라고 부르는 삶에 편입해서 살아가지 않는 이 서른일곱 살의 독신녀는 세상이 브레이크를 걸어올 때면 냉소적인 유머와 독설도 마다하지 않는다. 또한, 권력자 앞에서는 비열한 사람으로 돌변하고 패배자들 앞에서는 한없이 마음이 약해지는 아웃사이더적 정의감도 가지고 있다.
160센티미터, 50킬로그램의 작은 체구의 스밀라는 스크루드라이버 하나에 의지하여 물리적 폭력과 대면하고, 몇 번이나 죽음의 고비를 넘기면서도 주저 없이 사건의 핵심으로 걸어들어 간다. 정보를 입수하기 위해 회계사와 의사, 해운회사 사장 등 주변의 전문가들을 적극적으로 이용하고, 때로는 스스로 사우나 직원이나 꽃집 배달원으로 가장하기도 한다. 능청스러움과 임기응변으로 장애물을 넘어가는 태도는 긴박한 가운데서도 슬그머니 웃음을 자아내게 한다.
죽은 이웃집 아이에 대한 우정, 약한 것을 보듬는 모성, 불의에 대한 분노는 여성 캐릭터이기에 더 큰 공감을 자아낸다. 한없이 차가우면서도 또한 한없이 뜨거운 이중적 면모는 캐릭터의 매력을 한층 더 강화해주고 있다. 적어도 현재까지는 스밀라를 추리소설사상 가장 매력적인 캐릭터로 손꼽는 데 누구도 쉽게 이의를 달 수 없을 것 같다.
살인 스릴러물이면서 철학적 치유를 끌어내는 소설
이 책을 쓴 페터 회는 문단에 데뷔하기 전, 전문 무용수, 펜싱 선수, 등산가, 항해가 등 다양한 분야에서 경험을 쌓았다. 또한 아프리카를 오랫동안 여행했고, 무용수 출신인 케냐 여성과 결혼하는 등, 다양한 문화와 정체성들을 통과해왔다. 이런 이력을 바탕으로 작가는 문명과 자연이라는 서로 다른 두 세계를 조망하는 가운데 문명 비판을 시도한다.
스밀라가 이누이트 사냥꾼인 어머니와 부유한 덴마크 의사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복잡한 정체성을 지닌 인물로 그려지는 것도 이를 위한 장치로 읽을 수 있다. 그린란드에서 어린시절을 보낸 스밀라가 덴마크에 도착한 후 경험했던 술래잡기 놀이는 유럽 시스템의 단면도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재빨리 약자를 제거해버리고, 이어서 자연적 위계 질서에 따라서 나머지 모든 사람들을 제거해버리는 게임의 규칙”(530p). 전화기나 자동차 등 문명의 이기에 대한 혐오, 덴마크 내 그린란드인에 대한 차별에 대한 비판도 곳곳에서 눈에 띈다.
반면 그린란드는 광활하고 열린 풍경이며, 완벽한 무한의 세계로 그려진다. 스밀라가 ‘수학’에 매달리는 것도 숫자 체계가 ‘무한’과 ‘영원’의 세계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결코 삶에서 일정한 시작점이나, 초기 체계, 혹은 고정점을 찾기란 불가능하다고 주장하는 뉴튼의 이론, 칸토르의 무한 개념, 유클리드의 원론, 데데킨트의 수학 대선형에 관한 공리 등 이러한 세계관을 대변해주는 이론들이 소설 곳곳에 소개되고 있다. 살인 스릴러물이면서도 철학적 치유를 끌어내는 균형감각은 이 소설의 여러 미덕 중 하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