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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Very Special Christmas: The Story And The Mus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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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Very Special Christmas: The Story And The Music

[ CD+DVD ]
Pointer Sisters, Eurythmics, Whitney Houston, Stevie Nicks, Alison Moyet 노래 외 11명 정보 더 보기/감추기 | Universal / A&M Records | 2014년 12월 12일 첫번째 구매리뷰를 남겨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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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Very Special Christmas: The Story And The Music

품목정보

품목정보
발매일 2014년 12월 12일
제조국 미국

관련분류

음반소개

디스크

CD
  • 01 Santa Claus Is Coming To Town - By The Pointer Sisters
  • 02 Winter Wonderland - By Eurythmics
  • 03 Do You Hear What I Hear? - By Whitney Houston
  • 04 Merry Christmas Baby - By Bruce Springsteen And The E Street Band
  • 05 Have Yourself A Merry Little Christmas - By The Pretenders
  • 06 I Saw Mommy Kissing Santa Claus - By John Cougar Mellencamp
  • 07 Gabriel's Message - By Sting
  • 08 Christmas In Hollis - By Run-D.M.C.
  • 09 Christmas (Baby Please Come Home) - By U2
  • 10 Santa Baby - By Madonna
  • 11 The Little Drummer Boy - By Bob Seger & The Silver Bullet Band
  • 12 Run Rudolph Run - By Bryan Adams
  • 13 I Wish Everyday Could Be Like Christmas - By Jon Bon Jovi
  • 14 The Coventry Carol - By Alison Moyet
  • 15 Silent Night - By Stevie Nicks
DVD
  • 01 A Very Special Christmas: 25 Years Of Bringing Joy To The World - Documerntary & Performances (DVD)

아티스트 소개 (16명)

노래 : Pointer Sisters (포인터 시스터즈)
멤버 : 애니 레녹스(Annie Lennox), 데이빗 스튜어트(David Stewart) 지금이야 모든 음악(심지어 리얼 뮤직까지도)이 컴퓨터 프로그래밍의 도움을 받지만, 1980년대 초반에 형성된 뉴 웨이브씬의 뮤지션들은 전자 악기를 사용한다는 이유로 수준이나 태도 등에서 비평적으로 낮은 평가를 받았고, 그것이 마치 1980년대 미 보수물결의 원인인 것처럼 치부되었다. 그래서 인지는 몰라도, 1970년대... 멤버 : 애니 레녹스(Annie Lennox), 데이빗 스튜어트(David Stewart)

지금이야 모든 음악(심지어 리얼 뮤직까지도)이 컴퓨터 프로그래밍의 도움을 받지만, 1980년대 초반에 형성된 뉴 웨이브씬의 뮤지션들은 전자 악기를 사용한다는 이유로 수준이나 태도 등에서 비평적으로 낮은 평가를 받았고, 그것이 마치 1980년대 미 보수물결의 원인인 것처럼 치부되었다. 그래서 인지는 몰라도, 1970년대의 음악에 대한 향수를 느끼고 있는 사람들은 1980년대의 음악을 별로 인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 혁명적 전환기는 포크기타에서 일렉트릭기타로의 변환만큼이나 범 세계적으로 현 음악계를 지배하고 있다. 이 당시 등장한 여러 그룹들 중에서(비록 중간에 해체하긴 했었지만), 현재까지도 활동을 하고 있는 유일한 혼성그룹 유리스믹스는 중성적인 외모와 목소리를 소유한 짧은 머리의 애니 레녹스와 그녀의 뒤에서 모든 음악을 조율하는 감독 데이브 스튜어트로 이루어져 있다. 이 둘의 첫 만남은 애니가 웨이트리스로 일하던 레스토랑에서 이루어졌다. 자신의 밴드 롱댄서(Longdancer)로 전세계를 돌던 데이브는 독일에서 교통사고를 당해 영국으로 돌아왔고, 폐 수술을 받은 후 동료 피트 쿰(Peet Coombes)과 식사를 하며 새 밴드에 대한 구상을 하던 중이었다. 주문을 받던 애니에게 데이브가 건넨 첫 마디는''나랑 결혼할래요?''라는 말이었다. 애니는 데이브의 정신상태를 의심했지만 이 한 마디는 둘의 미래를 결정지어 버렸다. 데이브, 애니, 피트는 투어리스트(The Tourist)란 그룹을 만들어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가고 이들은 영국 차트에도 몇 곡을 올리며 괜찮은 성적을 올린다. 하지만 로얄티 문제로 소속사와 송사를 벌이기도 했던 이 팀은 방콕 공연 중에 해산을 하고 만다. 밴드의 해산은 연인관계였던 두 사람도 서먹서먹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둘은 새 팀을 만들기로 의기투합했고 1981년 < In The Garden >을 내놓는다. 그리고 1983년 발매된 < Sweet Dreams >로 드디어 정상을 정복한다. 8트랙으로 녹음한 이 앨범에서 ''Sweet dreams''는 영국뿐 아니라 미국의 차트에서도 정상을 밟았고 뮤직비디오는 화제를 모았다. 언론은 애니 레녹스의 양성적 이미지를 집중적으로 보도했으며, 애니의 알토 소프라노와 어우러진 데이브의 무거운 펑크, 정교한 사운드는 비평적 찬사를 얻어냈다. 1983년 < Touch >에서 ''Here comes the rain again''을 히트시킨 이들은 1984년에는 조지 오웰(George Orwell)의 소설 < 1984 >를 마이클 레드포드(Michael Radford) 감독이 동명의 타이틀로 영화화한 작품에서 음악을 맡아 ''Sex crime''으로 인기를 얻는다. 1985년에는 미국 차트 4위까지 오른 ''Would lie to you?''를 비롯해 여러 곡의 히트곡을 쏟아 낸 < Be Yourself Tonight >으로 막대한 성공을 거둔다. 앨범의 제목으로 알 수 있듯이 개인의 주체성을 강조한 이 앨범에서는 일종의 페미니즘을 역설한 아레사 프랭클린(Aretha Franklin)과의 듀엣곡 ''Sisters are doin'' it for themselves''가 영국 차트 9위까지 올랐고, 스티비 원더(Stevie Wonder)의 하모니카를 들을 수 있는 ''There must be an Angel'', 엘비스 코스텔로(Elvis Costello)와 함께 한 ''Adrian''이 수록되어 있다. 특히 전에 없던 블루지(bluesy)한 창법으로 전자적이고 차거운 느낌보다는 감성에 호소하려는 노력을 기울인, 애니의 소프라노적 발성이 돋보이는 ''There must be an Angel''은 영국 차트를 13주간 지배했다. 이 앨범 이후로 유리스믹스는 비평적으로나 대중적으로 큰사랑을 얻지는 못한다. 해체하기 전까지 미국 차트와 영국 차트에 꾸준히 히트곡을 올리며 팬들의 꾸준한 사랑을 받긴 했지만, 저물어 가는 뉴웨이브의 시대와 더불어 이들의 존재도 데이브 자신의 표현대로 자신의 감수성과 맞지 않는 ''90년대 음악 속으로 잊혀져갔다. 각자의 가정에 충실하며 애니는 솔로 앨범 < Diva >, < Medusa > 등으로 여전히 건재함을 과시했지만 데이브는 나탈리 임브루글리아(Natalie Imbruglia)의 성공에서 보여주듯이 프로듀서로서의 역량은 여전했지만, 그가 조직한 데이브와 고상한 카우보이들(Dave Stewart & the Spiritual Cowboys)의 앨범들은 모두 실패하고 말았다. 데이브와 애니는 자신들이 유리스믹스란 이름으로 속해 있던 음반사(RCA) 사장의 은퇴 기념 회장에서 옛날을 떠올리며 함께 노래를 불렀다. 그리고 감회에 젖은 이들은 1989년 당시 해체의 소문을 일축하기 위해 만들었던 < We Are Too One > 앨범 이후 10년만에 재결성식을 가졌다. 1999년에 나온 < Peace > 앨범은 힙합이 지배하는 세상을 따라가지 않고 자신들이 주조할 수 있는 음악으로 돌아온 음반이다. 여기에 대해 팬들이나 본인들은 여러 가지 의견을 가지고 있고, 애니의 경우는 힙합에 대한 긍정적인 흡수를 얘기하고 있지만, 욾직까지 이들이 음악으로 감동을 줄 수 있는 장르는 과거에 비해 많이 따뜻해진 뉴웨이브 라는 것이 모두가 내린 공통적인 결론이다.
휘트니 휴스턴(Whitney Houston)은 1980, 1990년대 남성들에 의해 주도되던 메탈의 포화를 뚫고 스탠다드 팝 시장을 개척해 낸 대표적인 ’디바’ 뮤지션이다. 휘트니 휴스턴은 1963년 미국 뉴저지에서 태어났다. 알앤비 가수 씨시 휴스턴(Cissy Houston)의 딸이었으며 시대를 풍미한 여가수 디온 워윅(Dionne Warwick)이 친척이었던 그녀는 어려서부터 대형 가수들을 옆에서 지켜볼 수 ... 휘트니 휴스턴(Whitney Houston)은 1980, 1990년대 남성들에 의해 주도되던 메탈의 포화를 뚫고 스탠다드 팝 시장을 개척해 낸 대표적인 ’디바’ 뮤지션이다. 휘트니 휴스턴은 1963년 미국 뉴저지에서 태어났다. 알앤비 가수 씨시 휴스턴(Cissy Houston)의 딸이었으며 시대를 풍미한 여가수 디온 워윅(Dionne Warwick)이 친척이었던 그녀는 어려서부터 대형 가수들을 옆에서 지켜볼 수 있었고, 어머니의 재능을 이어받아 어려서부터 성가대에서 노래하며 그 실력을 뽐냈다. 수려한 외모까지 겸비한 휘트니는 10대의 나이에 이미 모델, 배우, 가수의 세 가지 활동을 병행하고 있었다. 샤카 칸(Chaka Khan) 등의 백업보컬로 또 클럽에서 가수로 활동하던 그녀는 1982년 19살의 어린 나이에 폴 자바라(Paul Zabara)의 ’Eternal love’라는 곡에 보조 보컬로 참여하며 처음으로 정식 음반 녹음에 참여한다. 이듬해 아리스타(Arista)와 계약을 체결했고, 그녀의 능력을 높이 평가한 레코드사는 데뷔 앨범에 27만 달러의 제작비를 투자하며 전폭적으로 지원했다. 1985년 데뷔앨범 < Whitney Houston >은 흑인 디바 시대의 새로운 시작을 알린다. 앨범은 14주간 빌보드 차트 정상에 오르며 솔로 아티스트의 데뷔 앨범 중 가장 오랜 기간 1위에 머무른 앨범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세계적으로 2,300만장이라는 경이적인 앨범 판매를 이루어내며 데뷔 앨범 하나로 팝계 최고의 여가수로 자리하게 된다. 앨범 내에서는 ’Saving all my love for you’, ’How will I know’, ’Greatest love of all’(조지 벤슨의 곡 리메이크)의 세 곡이 연속해서 차트 정상에 오르고, 앨범의 경이적인 성공으로 86년 그래미와, 86,87년 아메리칸 뮤직 어워드를 차지한다. 1987년 그녀는 두 번째 앨범 < Whitney >를 통해 전작의 인기를 이어간다. 전작보다 비트감을 더한 이 앨범 역시 대단한 성공을 일구어 낸다. 발매 첫 주에 미국과 영국차트에서 동시에 1위에 오르는데 팝 역사상 처음으로 이룩한 기록이었다. 앨범은 차트 정상에 11주간 머물렀으며 세계적으로 2,000만장이 팔려나갔다. 싱글들의 인기도 대단해서 ’Wanna dance with somebody(Who loves me)’, ’Didn’t we almost have it all’, ’So emotional’, ’Where do broken hearts go’ 네 곡이 연속해서 차트 정상을 밟으며 이전 앨범부터 7개의 싱글이 연속해서 정상을 밟는 대 기록을 세우게 된다. 이 앨범으로 또다시 1988년 그래미를 거머쥐었고, 역시 88년, 89년의 아메리칸 뮤직어워드를 수상한다. 아레사 프랭클린(Aretha Franklin) 같은 정통 소울 아티스트들로부터 음악적 영감을 얻었던 그녀이지만 1,2집에서 보여준 음악은 대중성이 지나치게 강조된 흑, 백의 사운드가 뒤섞인 음악이었다. 자신도 그런 자신의 음악에 만족하지 못했는지 1990년 발표한 세 번째 앨범 < I’m Your Baby Tonight >에서는 대중성을 신경 쓰지 않고 정통 소울 음악으로 변신을 시도한다. 스티비 원더(Stevie Wonder), 루떠 반데로스(Luther Vandross)등과 함께 작업하는 등 흑인 아티스트로서의 정체성에 집착했던 이 앨범은 역시 이전 앨범들만큼의 성공을 이끌어내지는 못한다. 하지만 ’I’m your baby tonight’, ’All the man that I need’가 1위에 올랐고, 앨범은 전 세계 1,200만장의 판매를 기록하는 등 여전히 그 인기는 대단했다. 세 장의 정규 앨범 이후 그녀는 영화 배우로의 변신을 시도하며 세 장의 사운드 트랙을 연속 발표한다. 시작은 < 보디가드 >였다. 1992년 케빈 코스트너와 함께 출연한 ’보디가드’의 사운드 트랙에서 6곡을 노래했고, 이는 팝 역사에 길이 남을 경이적인 상업적 성공을 이끌어낸다. 첫 싱글 ’I will always love you’(돌리 파튼의 곡을 리메이크)는 차트 정상에 14주간 머물렀으며, 앨범은 20주간 1위를 지켰고, 세계적으로 3,500만장이라는 어마어마한 판매고를 기록한다. 1994년 그녀는 다시 한 번 그래미를 거머쥐었고, 아메리칸 뮤직 어워드에서는 8개 부문 수상이라는 대 기록을 세우게 된다. 1995년 휘트니 휴스턴은 다시 한 번 사운드 트랙에 참여한다. 자신이 주연한 < Waiting for Exhale >의 사운드 트랙에 3곡을 수록하면서 영화와 앨범의 성공에 기여한다. 이 앨범은 노장 흑인 여가수들과 신예 흑인 여가수들이 총 동원되어 만들어졌으며, 프로듀서로 참여한 베이비페이스(Babyface)는 그래미 12개 부문 후보에 오르는 영예를 누리게 된다. 1996년 그녀는 영화 < The Preacher’s Wife >에서 주연을 맡으며 다시 한 번 사운드 트랙에 참여한다. 14곡을 자신이 직접 맡은 이 앨범은 가스펠 위주의 곡들로 채워져 있으며 대중성보다는 종교적 방향성을 보여주고 있어 앨범판매에 있어서는 그다지 큰 성공을 이끌어내지 못하였다. 정규 앨범을 발표하지 않고 영화와 사운드 트랙에만 전념해왔던 그녀는 98년 8년 만에 정규앨범 < My Love Is Your Love >을 발표한다. 흑인 아티스트로서의 음악에 충실함을 기했던 이 앨범은 1,000만장의 앨범 판매를 기록하며 그녀의 앨범 중 가장 저조한 성적을 거두게 된다. 앨범 내에는 영화 ’이집트의 왕자’ 주제곡인 머라이어 캐리(Mariah Carey)와의 듀엣 곡 ’When you believe’가 수록되어 있다. 2000년 그녀는 자신의 15년 음악생활을 결산하는 베스트 앨범 < The Greatest Hits >를 발표한다. 조지 마이클, 엔리케 이글레시아스와의 듀엣 곡 등 네 곡의 신곡도 포함하고 있는 이 앨범은 발라드 곡들만을 모은 < Cool Down >과 댄스곡 및 댄스 리믹스 곡들을 모은 < Throw Down > 두 장으로 구성되어져 있다.
전설적인 밴드 플리트우드 맥(Fleetwood Mac)의 보컬리스트이자 유능한 여성 싱어 송 라이터 스티비 닉스(Stevie Nicks)는 그룹 시절이나 솔로 때나 그 활동상이 크게 차이나지 않는 몇 안 되는 아티스트이다. 깐깐한 음색과 중세 마녀적인 이미지는 그녀를 가장 독특한 여성 록 싱어로 정착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현재 김병현의 활약상으로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애리조나에서 1948년 5월 26일에... 전설적인 밴드 플리트우드 맥(Fleetwood Mac)의 보컬리스트이자 유능한 여성 싱어 송 라이터 스티비 닉스(Stevie Nicks)는 그룹 시절이나 솔로 때나 그 활동상이 크게 차이나지 않는 몇 안 되는 아티스트이다. 깐깐한 음색과 중세 마녀적인 이미지는 그녀를 가장 독특한 여성 록 싱어로 정착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현재 김병현의 활약상으로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애리조나에서 1948년 5월 26일에 태어난 스티비 닉스는 고등학교 시절에 만난 평생의 음악 파트너이자 연인이었던 린지 버킹햄(Lindsey Buckingham)과 함께 1975년에 블루스 그룹이었던 플리트우드 맥에 가입해 그들의 음악 채질을 바꾸면서 ’Dreams(1위)’, ’Rhiannon(11위)’, ’Sara(7위)’, ’Seven wonders(19위)’, ’Landslide’, ’Gold dust woman’ 같은 명곡들을 작곡해 엄청난 성공을 이끌어낸 헤로인이다. 그러나 1975년부터 시작된 플리트우드 맥과의 음악 인생이 항상 그녀의 지향점과 합일되는 것은 아니었다. 게다가 린지 버킹햄과의 소원해진 애정전선은 그녀로 하여금 솔로 활동을 부추긴 결정타였다. 그녀는 1981년부터 시작된 독립활동과 밴드 멤버로서의 이중 생활을 통해 그룹 시절과는 다른 창작의 고통과 자유를 음미하기 시작했다. 1981년, 이 금발의 미녀 싱어 송 라이터는 자신의 첫 데뷔 음반 < Bella Donna >를 세상에 공개해 플리트우드 맥의 그늘에서 벗어나 좀 더 록 적인 자신만의 색깔로 음악을 채색하기 시작했다. 아메리칸 록의 스타 톰 페티(Tom Petty)가 작곡하고 함께 부른 루츠적인 ’Stop draggin’ my heart around’가 싱글 차트 3위, 이글스 출신의 돈 헨리(Don Henley)와 함께 한 포크 스타일의 ’Leather of lace’는 6위, 록적인 ’Edge of seventeen’은 11위, 그리고 ’After the glitter fades’가 32위를 기록하면서 스티비 닉스는 여성 싱어 송 라이터로서의 새로운 음악 인생의 문을 활짝 열었다. 1983년도 작품 < The Wild Heart >에서는 토토(TOTO)의 기타리스트 스티브 루카서(Steve Lukather)가 연주를 맡아준 댄서블한 록 트랙 ’Stand back(5위)’을 필두로 ’If anyone falls(14위)’, ’Nightbird(33위)’로 전작의 인기와 명성을 지속했고, 1985년 말에는 ’Talk to me(4위)’, 그녀의 곡 중에서 가장 하드한 트랙 ’I can’t wait(16위)’가 히트를 기록한 세 번째 음반 < Rock A Little >을 공개했다. 4년만의 신보 < The Other Side Of Mirror >에서는 ’Rooms of fire(16위)’와 ’Has anyone ever written anything for you(60위)’를 잉태했으며 1991년에는 존 본 조비(Jon Bon Jovi)가 작곡한 싱글 ’Sometimes it’s a bitch(56위)’로 다시 한번 싱글 차트와의 친밀감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불과 몇 년 전과 같은 전폭적인 지지는 없었고, 1993년에는 플리트우드 맥을 떠나 이중생활에 종지부를 찍었다. 이듬해인 1994년에는 다섯 번째 솔로 앨범 < Street Angel >을 발표했지만 분노한 후배들의 새로운 록 음악에 밀려 주목 끌기엔 실패했다. 플리트우드 맥의 명반 < Rumors >가 태어난 지 만 20년이 된 것을 기념하기 위해 1997년에 다시 모인 다섯 명의 역전의 용사들은 실황 음반 < The Dance >를 공개해 오랜만에 빌보드 앨범 차트 정상의 자리에 오르면서 노익장을 과시했으며 스티비 닉스는 2001년에도 솔로 앨범 < Trouble In Shangri-La >를 내놓고 쉽게 수그러들지 않는 음악 열정을 표했다.
‘80년대 최고의 인기를 누렸던 영국 일렉트릭 팝 듀오 야주(Yazoo) 출신 싱어송라이터 ‘80년대 최고의 인기를 누렸던 영국 일렉트릭 팝 듀오 야주(Yazoo) 출신 싱어송라이터
영국 출신의 팝 아티스트 스팅은 절대 현실의 삶에 안주하지 않는 인물이다. 20년 넘게 계속된 그의 음악세계는 ‘도전’과 ‘실험’이라는 두 단어로 압축된다. 그는 스타덤에 오르면서 겪는 매너리즘에 한번도 빠지지 않고 발표하는 앨범마다 팬들에게 신선함과 새로움을 선사했다. 그는 뉴 밀레니엄 특수(特需)에 발맞춰 1999년에 발표한 앨범 < Brand New Day >에서도 컨트리와 랩을 과감히 수용하여 젊은 피 못... 영국 출신의 팝 아티스트 스팅은 절대 현실의 삶에 안주하지 않는 인물이다. 20년 넘게 계속된 그의 음악세계는 ‘도전’과 ‘실험’이라는 두 단어로 압축된다. 그는 스타덤에 오르면서 겪는 매너리즘에 한번도 빠지지 않고 발표하는 앨범마다 팬들에게 신선함과 새로움을 선사했다. 그는 뉴 밀레니엄 특수(特需)에 발맞춰 1999년에 발표한 앨범 < Brand New Day >에서도 컨트리와 랩을 과감히 수용하여 젊은 피 못지 않은 독창력을 선보였다. 이 앨범으로 스팅은 올해 그래미 시상식에서 ‘최고의 팝 가수’와 ‘최고의 팝 앨범’ 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안기도 했다. 이처럼 음악에 녹아있는 스팅의 탐구적인 철학은 장외로까지 연결되어 그 강도가 더욱 강해졌다. 얼마 전 그는 6월 7일과 13일 오스트리아 비엔나와 버그에서 갖기로 예정되어 있던 콘서트를 전격 취소했다. 이유는 외르크 하이더 당수가 이끄는 극우 자유당이 오스트리아 새 연정에 참여하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의 음악관이 퇴보나 보수가 아닌 진보와 개혁임을 말해준다. 하지만 스팅의 음악색깔은 그의 외곬수적인 성격과는 달리 ‘다색(多色)’이다. 그의 음악 속에는 하나의 장르가 아니라 여러 개의 장르가 만나서 함께 살아가고 있다. "나는 순수하지 않은 혼합적인 음악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순수한 록, 순수한 재즈에는 흥미가 없다." 한 채널에 귀를 구속시키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채널 안에 귀를 열어놓고 있는 것이다. 스팅의 퓨전 지향은 아트록 그룹 커브드 에어 출신의 스튜어트 코플랜드, 애니멀스 출신의 앤디 서머스와 함께 했던 록그룹 폴리스 시절부터 이미 시작됐다. 그룹의 음악은 단순하게 몰아치는 펑크에 머물지 않고 레게, 재즈, 민속음악 등을 집어넣어서 감칠맛 나게 요리한 당시에는 보기 드문 유니크한 사운드였다. 스팅의 재즈 어프로치가 돋보이는 베이스라인, 레게 리듬을 완벽히 구사하는 코플랜드의 드럼 테크닉, 그리고 에코가 약간 가미된 서머스의 클린 톤의 기타는 폴리스 사운드의 결정체였다. 그들의 데뷔작 < Outlandos D’ Amour >와 2집 < Reggatta De Blanc >의 히트곡 ‘Can’t stand losing you’, ‘Walking on the moon’에서 시도된 이국적인 레게 뮤직이 그 한 예다. 영·미 음악 중심에서 벗어나 제3세계로 음악의 발판을 넓힌 것이다. 스팅은 1983년에 발표한 폴리스의 5집 앨범 < Synchronicity >의 수록곡 ‘Every breath you take’로 8주 동안 빌보드 차트 정상을 차지하며 인기정점에 섰을 때 그룹을 해산시켰다. 멤버간의 불화도 원인이었지만 가장 큰 해체이유는 자신의 음악적 영역을 확장시키기 위해서였다. "나는 처음 시작하는 나의 입장이 전혀 두렵지 않다. 나는 모든 상황 속에 내 자신을 던져버리고 싶다." 새로운 것에 도전하고자 하는 그의 확고한 의지의 표현이다. 솔로 활동과 함께 스팅은 월드 뮤직으로 한 단계 도약을 꾀했다. 그는 자메이카에서 녹음한 1985년 솔로 데뷔작 < The Dream Of The Blue Turtles >에서 색소폰 주자 브랜포드 마샬리스, 키보디스트 케니 커크랜드 등 젊은 재즈 뮤지션을 영입하여 고품격·고감도 재즈 음악을 선보였다. 하지만 단순히 재즈로만 끝나지 않았다. 그는 러시아 민속 음악을 차용한 ‘Russians’, 중동 풍의 리듬이 인상적인 ‘We work the black seam’ 등 전세계에 펼쳐져 있는 다채로운 음악 소재들을 자신의 앨범에 담았다. 모든 곡을 포르투갈어로 부른 1988년 EP < ...Nada Como El Sol >, 1996년 앨범 < Mercury Falling >의 ‘Valparaiso’에서 나타나는 아일랜드의 민족정서, 1997년 베스트 앨범 < The Very Best Of Sting & The Police >에서 퍼프 대디가 참여하여 힙합 버전으로 새롭게 탈바꿈된 < Roxanne ’97 > 역시 크로스오버를 위한 스팅의 실험정신이 담겨진 작품들이다. 스팅의 음악은 세련되고 고급스럽다. 그래서 선뜻 받아들이고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그의 음악은 대중적으로 커다란 성공을 거두었다. 특히 스팅에 대한 국내 여성 팬들의 사랑은 절대적이다. 여기에는 영화음악이 한몫을 했다. 그는 영화 < 레옹(Leon) >의 ‘Shape of my heart’, < 네 번의 결혼식과 한번의 장례식(Four Weddings & A Funeral) >의 ‘The secret marriage’, < 라스베가스를 떠나며(Leaving Las Vegas) >의 ‘Angel eyes’, ‘It’s a lonesome old town’ 등을 통해 팬들과의 거리를 좁혔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스팅은 아예 까메오가 아닌 배우로서 1979년 영화 < Quadrophenia >를 비롯 < Brimston & Treacle >, < Dune >, < The Bride >, < Plenty >, < Lock, Stock And Two Smoking Barrels > 등 많은 작품에서 열연을 했다. 그가 영화에 남다른 애정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스팅은 대중이 아닌 자기자신을 위해 음악을 한다. "나는 먼저 나 자신을 즐겁게 하기 위해 곡을 쓴다." 상업성에 포박 당하여 자아(自我)를 상실해버린 뮤지션들에 대한 따끔한 질책이다. 때문에 그의 음악에는 예술성이 베어있다. 50이 넘는 나이에도 다양한 변화를 모색하며 왕성한 창작력을 과시하는 자신감 또한 마찬가지다.
노래 : John Mellencamp (존 멜렌캠프,Johnny Cougar / John Cougar / John Cougar Mellencamp)
하트랜드 락 싱어송라이터 하트랜드 락 싱어송라이터
노래 : Madonna (마돈나,Madonna Louise Ciccone)
새 천년의 화제는 아직도(조금 너무하다는 생각도 든다) 비틀스인 것 같다. 그들의 베스트 앨범 은 전세계에서 판매 1위를 점령했고, 여기저기서 ‘비틀스 다시 세우기’ 작업이 한창이다. 해체한 지 30년이 지났건만 과연 ‘팹 포(The Fab Four)’의 힘은 대단하다. 그렇다면 마돈나는 어떨까? 2000년 9월 그녀는 새 앨범(베스트가 아니다) 을 발표했다. 이미 그 전에 발매되었던 싱글 ‘Music’은 4주만... 새 천년의 화제는 아직도(조금 너무하다는 생각도 든다) 비틀스인 것 같다. 그들의 베스트 앨범 은 전세계에서 판매 1위를 점령했고, 여기저기서 ‘비틀스 다시 세우기’ 작업이 한창이다. 해체한 지 30년이 지났건만 과연 ‘팹 포(The Fab Four)’의 힘은 대단하다. 그렇다면 마돈나는 어떨까? 2000년 9월 그녀는 새 앨범(베스트가 아니다) 을 발표했다. 이미 그 전에 발매되었던 싱글 ‘Music’은 4주만에 1위를 기록했으며, 그 ‘일렉트로니카’ 앨범도 가뿐히 차트 정상에 등극했다. 물론 예전의 마돈나로서는 당연한 결과겠지만 10대 여가수들과 보이밴드들이 휘어잡고(?) 있는 현 팝 음악계를 고려한다면 그녀도 상당히 분투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사실 폴 사이먼이나 유투 같은 거장들도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 1983년에 공식 데뷔했으니 18년간 쉬지 않고 달려온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찬반이 극명하게 갈리지만- 세월이 흐른 지금도 여전히 대중들의 주요 관심대상이다. 비틀스에 필적할 만한 여가수를 꼽는다면 단연 마돈나 아닐까? 최소한 그녀만큼 열심히 음악활동을 지속해오는 여가수는 없다. 그런 면에서 최근 그녀에게 지가 붙인 ‘The Music Woman’이란 호칭은 아주 적절하다. 그렇다면 ‘마돈나 다시 세우기’는 아닐지라도 ‘마돈나 바로 세우기’(?) 정도는 있어야 할 듯 싶다. 그녀는 우리에게 뭘 선사했을까 그리고 과연 그녀는 우리에게 무엇일까, 라는 궁금증 내지는 의심을 가지고 그녀의 세계로 들어가 보자. 이 글을 시작하는데 이런 의문이 든다. ‘그런데 마돈나와 동시대에 활약하던 그 많던 여가수들은 도대체 다 어디로 간 거야?’ 1. Like A Virgin ‘영화계의 악동’ 쿠엔틴 타란티노(Quentin Tarantino)가 감독한 데뷔작 (1992)의 첫 장면을 잠시 들여다보자. 검은 양복을 차려입은 8명의 등장인물들이 아침식사를 위해 카페에 모여 앉아있다. 이들은 모두 다이아몬드 강도를 위해 모인 건달들이다. 식사를 마친 그들은 커피를 마시며 길고도(무려 12분간 이어진다) 지루한(?) 잡담을 하기 시작한다. 마돈나의 ‘Like a virgin’이 바로 그 화제. 가장 방정맞은 캐릭터인 미스터 핑크가 먼저 운을 띄운다. "‘Like a virgin’은 말이야. 커다란 ‘성기’를 가진 남자와 관계를 갖는 여자에 대한 노래야. 곡 전체가 ‘크기’에 관한 은유인 셈이지." 좀더 나이 든 악당 미스터 블루가 이에 대해 반박한다. "그렇지 않아. 그것은 아주 상처받기 쉬운 여자에 관한 거야. 그리곤 정말로 섬세한 남자를 만나게 되지." 이후 등장인물들이 제각기 마돈나(또는 그녀의 노래)에 대해 한 마디씩 던진다. "난 마돈나가 싫어", "‘True blue’란 곡이 뭐지?", "난 그녀의 초기작이 좋아. ‘Lucky star’, ‘Borderline’ 같은 거 말야. 하지만 ‘Papa don`t preach’ 시절은 별로야." 동시에 음담패설 정도로 끝날 줄 알았던 잡담이 논쟁으로 과열되어 자못 심각해진다. 미스터 핑크의 일관된 주장은 계속된다. "그녀는 존 홈즈라는 남자를 만나게 되고 하룻밤을 보내지. 거기서 그녀는 그 크기에 고통을 느끼는 거야. 그걸 바로 ‘처음처럼, 처녀처럼’이라고 한 거야." 그러나 결국 그와 다른 이들의 상반된 견해는 화해되지 못한 채 그 에피소드는 끝난다. 이것은 픽션인 영화의 한 장면이고, 그것도 1992년에 제작된 것이다. 따라서 마돈나 전체의 모습을 조망하는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하지만 그들이 언급하는 가수와 노래는 분명 실재하는 것이고, 그들의 코멘트도 상당한 설득력을 지닌다. 이 에피소드는 그녀가 미국이라는 사회에서 어떤 식으로 소비되고 있는가를 살짝이나마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적어도 마돈나의 중요한 일면이 드러난다. 그것은 그때까지 마돈나의 음악적인 면보다는 섹슈얼리티 측면이 더욱 부각되고 또 소비되고 있었음을 증명하고 있다. 그녀가 댄스 팝의 디바로 평가받는 것이 아니라 뒷골목의 성적인 농담거리로 소통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지금도 여전히 그러한가, 라는 문제는 좀더 다양한 또는 심층적인 이야기가 필요할 듯 하다. 아무튼 세속적인 건달들의 세계를 그리는 데에 마돈나가 쓰였다는 것은 한 번 곰곰이 되새겨 볼만하다. 2. Material Girl 마돈나라는 가수를 생각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음악보다는 이미지다. 성(性)의 이미지다. 그 이미지는 그녀에 관한 한 모든 가치 판단에 있어서 가장 우위에 있다. 대중들이 모두 위의 건달들처럼 속물이라서 그런 게 아니다. 그녀는 바로 ‘스테레오타입’이 돼버린 것이다. 마돈나라는 한 인물이 섹시한 ‘가상의 이미지’로 전이되어, 우리는 그것에 우선 반응한다. 가령 밥 딜런 하면 포크 음악이 생각나지만 마돈나 하면 도발적인 몸짓이 떠오른다(물론 음악도 생각난다). 일종의 편견일 수 있지만 아직까지도 우리는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그 같은 이미지로 인해 어쩌면 뒷전으로 물러난 그녀의 음악적 미덕이 어느 정도 손해봤을 수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마돈나의 성적(性的) 이미지는 지금껏 그녀가 음악계에서 살아남아 있을 수 있었던 ‘존재이유’가 된다. 또한 그것은 마돈나의 시작부터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여기엔 여러 복잡한 커넥션이 얽혀있다. 그녀의 찬란한 섹슈얼리티는 성 상품화를 부추기는 자본주의의 검은 시대정신(?)과 이에 상응하는 마돈나의 고도의 전략 등이 맞물려서 탄생된 것이다. 그녀가 데뷔했던 1983년 당시 미국은 보수와 극우의 시대였다. 레이건 정부는 보수주의 이념을 바탕으로 물질만능주의라는 변질된 아메리칸 드림만을 장려했다. ‘물질적인 소녀’ 마돈나는 이를 놓치지 않았다. 고향을 등지고 뉴욕에 홀로 올라와 가진 건 ‘몸뚱이’ 하나와 음악적 재능뿐이었던 마돈나에게 그러한 사회 분위기는 절대적인 기회였다. 이미 그녀는 몇 년간 파트 타임 누드모델과 밴드의 백 보컬 등으로 힘겨운 뉴욕 생활을 보낸 바 있었다. 하지만 그 경험은 그녀에게 어느 정도 자신감을 심어 주었다. 때문에 그녀는 성을 거리낌없이 전면에 내세울 수 있었다. 섹슈얼리티로 중무장한 채 내놓은 데뷔앨범 (1983)는 이후 마돈나가 끊임없이 던지는 충격파 중 첫 번째가 되었다. 감각적이고 달콤한 댄스 팝 음악이 훌륭하기도 했지만 사람들의 이목을 끈 건 단연 마돈나의 육감적인 외모였다. 그녀는 친절하게도 자신의 탄탄한 몸매 중 일부를 스스럼없이 내보였다. 앨범 재킷 뒷면에서도 쉽게 확인되듯, 그녀는 그 충격적이던- 그러나 지금은 일반화되다 못해 촌스런 지경까지 이른- 배꼽티를 입고 흥겹게 ‘Holiday’, ‘Borderline’을 노래했다. 아마도 이 ‘불량한’ 모습은 순진하던 국내의 20·30대 음악팬들의 뇌리에 깊숙이 자리하고 있을 것이다. 하여간에 하루아침에 ‘Lucky Star’가 된 그녀는 이 정도에 만족하지 않았다. 음악적인 것 외에 마돈나는 ‘보이 토이’(Boy Toy)로 대변되는 그녀만의 패션을 선도하기 시작했다. 배꼽티는 물론 헤어밴드, 검은 고무 팔찌, 보이 토이 벨트 등을 전세계로 유행시키며 자신의 섹슈얼리티를 전파했다. 그 같은 마돈나의 이미지가 급속도로 전파될 수 있던 것은 뮤직비디오 즉, MTV의 영향이었다. 앨범만으로는 그녀의 이미지를 그렇게 효과적으로 팔 수는 없었을 것이다. 마돈나의 모습을 우리가 ‘감상’할 수 있었던 것도 역시 MTV 덕분이다. 마이클 잭슨과 마찬가지로 마돈나도 MTV의 덕을 톡톡히 본 셈이다. 그렇지만 엄밀히 말해서 마돈나만 이득을 본 건 아니다. MTV는 자신들을 홍보할만한 이미지 메이커, 즉 스타가 필요했고, 마돈나의 섹슈얼리티는 이들의 조건에 아주 적합한 것이었다. 결국 그들의 필요에 의해 그녀가 선택된 것뿐이고, 그녀 역시 그런 MTV를 자신의 스타성을 배출할 일종의 통로로 이용한 것이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이때부터 마돈나가 자신은 물론 외부의 것까지 통제할 능력을 갖추고 있다는 것이다. 그녀는 자신의 장점을 충분히 끌어올릴 줄 알았을 뿐 아니라 외부의 관심까지 자신의 것으로 끌어들였다. 따라서 그녀의 성공 요인이 섹슈얼리티 때문이다, 라고 한정하는 것은 적당하지 않다. 그것은 그렇게 쉽게 볼 문제가 아니다. 성적인 매력 하나만 가지고 10여 년을 버틸 만큼 마돈나는 단순한 인물이 아니다. 오히려 그녀는 상당히 똑똑하다. 하지만 우리에게 각인된 그녀의 성적 이미지는 더욱 위력을 더해간다. 그리고 그것이 결정적인 것이지만 마돈나 전체의 이미지는 아니었음을 우리는 세월이 지나면서 차츰 알게된다. 아직 마돈나의 진면목이 다 드러난 것은 아니다. 3. Express Yourself 데뷔작 에서는 ‘Holiday’, ‘Borderline’, ‘Lucky star’가 연이어 히트를 기록하며 상쾌한 출발을 보였다. 이듬해인 1984년 마돈나는 수잔 사이델먼(Susan Seidelman)감독의 영화 (Desperately Seeking Susan)에 조연으로 출연했다. 가수를 넘어서 배우로서, 또한 ‘멀티 플레이어’로서 첫 걸음을 내딛은 것이다(이후 그녀는 , 를 포함 16편의 영화에 출연하게 된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연극의 주역을 도맡았던 마돈나에게 이것은 전혀 어색하지 않다. 이어서 그녀는 ‘문제의’ 앨범 (1984)을 발표했다. 이 앨범은 미국차트에서 3주간 1위를 차지했고, 2년이 넘도록 차트에 머무는 등 그녀의 최대성공작이 되었다. 타이틀곡 ‘Like a virgin’은 그녀 최초의 넘버원 송으로 기록되었다. 이 앨범은 상업적인 성공 외에 다른 하나의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전작에서 외면상의 섹스 어필에 머물렀던 마돈나가 한 걸음 나아가 본격적으로 ‘성의 해방’을 외친 것이다. 이제 슬슬 본색을 드러내는 것일까? 여전히 화제성 있는 댄스 가수였지만 마돈나는 여기서부터는 이미지를 스스로 ‘만들어’간다. 지금까지 맛보기로 보여준 그녀의 성적 매력은 자연스럽게 ‘드러났다’고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Like a virgin’이나 ‘Material girl’에서 도발적인 발언은 수줍은 듯한 살랑댐에서 벗어나 있다. 자신의 적극적인 표현, 즉 성 해방의 의지천명이다. 이 곡들에 대해 ‘보수파’들의 반발이 거셌던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여기서부터 그녀의 또 다른 수식어 ‘혁명전사’의 이미지가 구체화되기 시작한 셈이다. 그녀의 탁월한 ‘이미지 제조’ 능력은 뮤직비디오를 통해서도 확인된다. ‘Material girl’의 뮤직비디오는 명백히 마릴린 먼로를 훔친 것이다. 그녀는 단순히 먼로의 이미지만 차용한 것이 아니다. 먼로 향수(鄕愁)에 젖어 있는 다수의 미국인들을 자신의 것으로 끌어들였다. 뿐만 아니라 그 이미지마저 먼로에게서 앗아가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그 이미지는 현재까지 지속된다. 마돈나의 위대한 점 중 중요한 하나가 바로 이런 것이다. 그녀는 창조자가 아니다. 어딘가에 숨겨져 있는 혹은 아무 데나 널브러져 있는 평범함을 찾아내 그것을 이용할 뿐이다. 하지만 곧 그녀는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그것은 아주 독창적인 무언가가 된다. 즉, 마돈나만의 스타일이 된다. 이것은 그녀의 음악, 이미지, 기질이 모두 포함되는 것이다. 이때부터 마돈나는 끊임없이 크고 작은 일련의 사건들을 겪게 된다. 자신의 첫 순회공연이 있었던 1985년, 그녀는 약간의 위기상황을 맞이한다. 그해 7월, 성인잡지 와 가 무명시절(1977년)에 찍어뒀던 마돈나의 누드사진을 게재한 것이다. 그녀의 인기가 오르자 이를 노린 잡지사들의 추악한 폭로사건이었다(이젠 이런 것도 남의 나라 일이 아니다). 하지만 마돈나는 전혀 개의치 않았고, 같은 달 열린 난민구호 자선공연 에 당당히 출연 ‘Into the groove’, ‘Holiday’를 열창했다. 결국 그 사건은 공짜로 그녀를 홍보해준 것이 되었다. 그녀의 인기는 더욱 치솟았으니 말이다. 한편 그녀는 26번째 생일인 8월 16일 배우 숀 펜과 행복한 결혼식을 올렸다. 이후 마돈나는 세 번째 정규앨범 (1996), 사운드트랙 (1987), 댄스 리믹스 앨범 (1987)를 잇달아 발표하며 활발한 활동을 펼쳐 나간다. 그러나 대중들은 결코 비슷한 세기의 자극에는 반응하지 않는다. 마돈나는 역시 똑똑하다. 반복요법은 쓰지 않는다. 좀 더 적극적인 자기표현들을 이어나간다. 4. Justify My Love 1989년은 마돈나에게 있어 가장 논란이 되었던 한 해였다. 그 해 4월 그녀의 최고 명반으로 꼽히는 가 발매되었다. 이 앨범은 프린스가 프로듀서로 참여한 것만으로도 충분히 이슈가 될만했다. 음반이 발매되기 직전 마돈나는 펩시콜라와 5백만 달러의 TV 광고 계약을 맺었다. 바로 얼마 후 ‘Like a prayer’의 뮤직비디오가 공개되었다. 이 곡은 가스펠 분위기로 진행되는데, 엽기적이게도 그 뮤직비디오는 마돈나가 흑인성자와 키스하는 장면을 담고 있었다. 그녀는 한 술 더 떠서 불타는 십자가 앞에서 춤추기까지 했다. 이것은 미국내의 종교적 논란을 넘어서서 전세계 미디어들의 기사거리가 되었고, 급기야 바티칸 교황청에 의해 금지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불똥은 엉뚱한 곳에 튀었다. 마돈나와 광고계약을 맺은 펩시콜라 측은 그 덕에 소비자들의 엄청난 항의를 받았다. 결국 펩시는 그 광고를 제대로 방영도 못한 채 접어야 했다. 마돈나가 5백만 달러를 고스란히 챙긴 것은 물론이다. 이와 비슷한 일이 이듬해 발생한다. 마돈나의 베스트 (1990)에 수록된 신곡 ‘Justify my love’가 말썽이었다. 천재 록 뮤지션 레니 크라비츠가 작곡·제작을 맡은 그 곡은 처음부터 끝까지 마돈나의 에로틱한 목소리와 암시적인 신음소리가 흘러나온다. 이 정도만으로 범상치 않은 곡인데 그 뮤직비디오는 더욱 자극적이었다. 이에 MTV가 그 곡의 방영을 금지했다(따라서 국내에서도 볼 수 없었다). 이 조처는 그간 마돈나에게 호의적이었던 MTV로서는 이례적인 것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당당했다. 마돈나에 의하면, 그러한 모든 행위는 ‘예술적 풍자’일 뿐이다. 최고의 자유국가라 자처하는 미국이 보장해야 할 최소한의 표현의 자유인 것이다. 그녀는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시키며 오히려 MTV측을 궁지로 몰아넣었다. 정말 대단하다. 논란을 일으키는 능력만 뛰어난 게 아니라 그것을 종식시키는 능력도 뛰어나다. 이 정도 되면 ‘여성 운동가’라고 말해도 부족하지 않다. 상업성이 뻔히 보이는 가운데서도 그녀는 그것을 정당화시키는 힘을 가지고 있다. 그렇지만 이것은 자신 스스로에게 진실한 사람이 아니면 절대 가질 수 없는 신념에서 나온 것이다. 마돈나는 이제 그저 얼굴만 예쁘장한 얼치기 여가수가 아니다. 그저 자신의 외모만 믿고 성을 상품으로만 팔 줄 알았던 그녀의 데뷔 때 모습을 생각하면 실로 믿을 수 없을 정도다. 이러한 마돈나의 모습 하나 하나가 현재의 수많은 여가수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주었으리라는 것은 불 보듯 뻔한 사실이다(굳이 따져보자면, 앨러니스 모리셋, 스파이스 걸스가 직계후배일 듯. 아, 브리트니 스피어스도 있다). 그후에도 마돈나의 도발적인 모습은 화보집 와 앨범 (1992)로 이어지지만 1994년 드디어 그녀의 극적인 반전이 시작된다. 소녀적 감성에서 팜므 파탈(Femme Fatale)의 단계를 지나 성숙한 여인으로. 그리고 종착역인 음악으로. 5. Truth Or Dare 쉬어 가는 의미로 여기서 잠깐 마돈나의 영화 한 편을 소개한다. 마돈나는 1990년 다큐멘터리 필름 (Madonna: Truth Or Dare / In Bed With Madonna)에 출연했다. MTV에서 많은 뮤직 비디오를 만들었던 알렉 커시시언(Alek Keshishian)이 감독한 이 기록영화는 별다른 주관적 개입 없이 마돈나의 일상을 그려냈다. 마돈나의 세계 순회공연 장면과 무대 뒤의 사생활 장면이 여과 없이 포착되어있다. 전자와 후자를 각각 컬러와 흑백 톤, 다른 터치로 표현해낸 것이 신선하다. 지금으로 따지면 이나 ‘셀프 카메라’ 정도일텐데, 적어도 그런 것보다는 훨씬 진실하게 만들어졌다. 일단 장면 속으로 들어가 보자. 캐나다 토론토 공연장이다. 공연 전부터 경찰들이 몰려와서 매니저들에게 반 협박을 한다. 마돈나가 손을 하복부 아래로 내리는 이상한(?) 행위를 하면 체포하겠다고. 이 소식을 접한 그녀는 당황한다. 퍼포먼스를 수정하느니 아예 공연을 취소하겠다는 말까지 한다. 하지만 쇼 타임이 임박하고 약간 불안해진 마돈나는 댄서들과 기도를 한다. "오늘은 파쇼적인 토론토의 마지막날입니다. 저에게 이것을 이겨낼 힘을 주세요." 댄서들과 마돈나는 프로테스트 송 ‘We Shall Overcome’을 합창하며 무대에 올라선다. 그녀는 두 명의 남자 무희가 호위하고 있는 빨간 침대 위에서 ‘Like a virgin’을 노래하기 시작한다. 그녀는 그 곡을 아주 느리게 부르며(여기의 ‘Like a virgin’ 버전은 최고다) 에로틱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노래는 절정에 이르고 마침내 그녀는 ‘문제의’ 손동작을 감행한다. 마돈나는 승리했다. 다음은 그녀의 고향인 디트로이트 공연장이다. 그녀는 공연 전 언제나 댄서들과 손을 맞잡고 기도한다. "노래할 목소리를 허락해주세요. 내 인생의 진실을 보여줄 힘을 주세요." 이 날은 공연 중에 그녀의 아버지를 모시고 나온다. 바로 그의 생일이었다. 무대에 나온 아버지를 향해 마돈나는 절까지 하며 2만 여명의 관객과 함께 축하 노래를 부른다. 상당히 인상적인 장면이다. 하지만 공연 후 그녀는 내뱉는다. "오늘은 너무 힘들었어. 두 달이나 이걸 해야하다니. 너무 피곤해." 이런 장면도 있다. 스페인 공연 전 침울해진 마돈나는 매니저에게 푸념한다. "내겐 공연 뿐이야. 지겨워." 그런 그녀에게 매니저는 만나고 싶은 사람이 없는지 묻는다. "만나고 싶은 사람? 안토니오 반데라스." 결국 스페인 공연에서 안토니오를 만나지만 그는 마돈나를 거절한다. 1주일간 그를 만난다는 기대에 차 있었던 그녀는 욕실로 뛰쳐나간다. "욕실에 가서 내 슬픔을 식혀야겠어. 안토니오 나쁜 자식. 날 버렸어." 그녀는 이탈리아계 미국인이다. 그런데 이탈리아 공연 도중 일련의 공연이 취소된다. 교황청의 요청으로 금지된 것이다. 이에 마돈나는 담담히 기자회견을 한다. "나는 예술가고 내 공연은 내가 나 자신을 표현하는 방식이다. 내 공연은 빛과 어둠 같은 양면성을 보여준다. 판단은 청중이 한다. 이것이 언론 표현 사고의 자유다." 이 다큐멘터리에 주목해야할 것은 이 영화가 지금껏 마돈나에게 품고 있던 편견들을 해소시키는 데 아주 훌륭한 단서가 된다는 것이다. 영화를 보다보면 ‘성의 상품화’라든지 ‘섹스의 화신’ 따위의 말들은 어느새 잊혀진다. 그리고 가수로서의 그리고 인간으로서의 마돈나를 느낄 수 있다. 그녀는 관객들 앞에서 최선을 다하려는 프로 가수이며, 동료 댄서들의 따뜻한 어머니다. 그녀의 팬이든 팬이 아니든 이 영화를 보는 누구나 그녀에 대한 생각이 바뀔 것이다(비디오 출시되어 있는 국내판은 아쉽게도 30여분이 잘려나간 반쪽 짜리다. 하지만 그녀를 느끼기엔 충분하다). 6. Who`s That Girl 마돈나는 재능 있는 가수다, 라는 말에 이견을 달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가 아티스트다, 라는 말에는 다소 의견이 분분할 듯하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감히 단언하건대 그녀는 진정한 아티스트다. 그것은 지난 18년간을 지켜온 그녀의 음반이 증명한다. 그리고 여전히 음반을 내고, 무대에 서서 팬들 앞에서 노래하는 마돈나의 모습이 증명한다. 재능이라는 것은 고갈되기 마련이고, 중요한 것은 현재 그녀가 어디에 서 있느냐는 것이다. 그리고 누구나 알고있듯 마돈나는 지금 바로 우리 곁에 서있다. 마돈나가 변신에 가장 능한 연예인으로 꼽히는 데는 그 이미지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그녀의 음악 역시 변신을 거듭해왔다. 1977년 마돈나는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며 고향인 미시건을 떠나 뉴욕에 올라왔다. 그녀의 원래 꿈은 발레리나였다. 발레수업을 받던 1979년 그녀는 디스코 가수 패트릭 헤르난데즈(Patrick Hernadez)의 백 보컬 겸 댄서로 연예계에 입문했다. 이후 팝 댄스 그룹 브랙퍼스트 클럽(Breakfast Club)의 보컬을 거쳐, 1983년 꿈에 그리던 솔로앨범 을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따라서 그녀의 초기작들의 음악이 디스코나 댄스 팝인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Holiday’, ‘Material girl’, ‘Like a virgin’, ‘Papa don`t preach’로 대표되는 발랄한 댄스 경향은 , 시기까지 계속된다. 그 댄스 넘버들에서 그녀의 모습은 때론 수줍은 듯, 때론 대담하게 비춰졌다. 하지만 아직은 앳된 소녀적 감성이 더 많이 풍긴다. 1989년부터 마돈나의 음악적 성향이 서서히 바뀌어 간다. 그해 발표된 는 이제껏 볼 수 없었던 마돈나의 다른 모습이 담겨있다. 좀더 풍부해졌다고 할까. 댄스 지향에서 탈피해서 다양한 음악을 시도했다. 가스펠나 소울도 눈에 띄지만 무엇보다 록적인 접근이 두드러졌다. 똑같이 흥겹지만 거기엔 록 비트와 연주가 강화되었다. ‘Keep it together’ 같은 곡에서 확연히 알 수 있다. 외적으로는 앞서 말한 뮤직비디오 ‘Like a prayer’에서 보듯, 요부의 이미지로 자신을 한껏 드러냈다. 이제 예전의 마돈나와는 작별한 것이다. 더 이상 수줍음은 사라지고 충만한 자신감이 넘쳐흘렀다. 말하자면 이 앨범을 기점으로 그녀는 음악적으로나 애티튜드(attitude)로나 아티스트로서의 본격적인 시동을 건 것이다. 1990년대 들어서는 더욱 달라진 면모를 보였다. 자신의 출연한 영화 에 쓰인 곡과 그로부터 영감 받은 몇 곡들을 모은 (1990)를 통해 뮤지컬 스타일의 또 다른 창법을 들려줬다. 1994년 작 와 이듬해 발표된 에서 마돈나는 완연한 여인의 향기를 내뿜었다. 멜로디는 한결 풍부해졌고, 곡의 진행은 부드럽고 여유 있어졌다. ‘Take a bow’ 같은 곡에서의 노래실력은 어느 발라드 가수에도 뒤지지 않는다. 마치 ‘이래도 내가 아직 율동만 하는 창부로 보이니?’ 라고 항변하는 듯 하다. 또한 1996년에는 뮤지컬영화 (Evita)에 출연하여 ‘진지한’ 역할을 소화해냈다. 비록 ‘율동 없는 그녀는 볼 게 없다’, ‘어울리지 않는다’ 등 혹평도 있었지만, 뛰어난 가창력과 영혼이 깃들은 열연으로 그녀에 대한 일반 인식을 바꿔놓았다. ‘섹스 중독증 환자’에서 ‘성녀’(聖女) 그리고 진정한 아티스트로 거듭나는 순간이다. 이것은 물론 그녀가 나이든 탓도 있겠지만 알을 깨고 나오기 위해 부단히 투쟁한 결과였다. 그리고 그의 투쟁은 여전히 끝나지 않았다. 그렇다면 아직 알을 깨지 못한 것인가? 7. Music 마돈나는 70년대 말에서 80년대 초까지 클럽 문화 속에서 가수의 꿈을 키워왔다. 물론 디스코, 댄스 클럽이었다. 그 자양분은 그녀의 초기 앨범들에 고스란히 반영되었다. 20년이라는 세월이 흐른 1998년, 여전히 클럽 문화는 지속되고 있었다. 하지만 클럽의 분위기나 음악은 많이 바뀌었다. 클럽에는 약물이 넘쳐흐르고, 이에 맞춰 어지러운 테크노, 일렉트로니카가 꿈틀댄다. ‘클럽 키드’ 마돈나는 바로 이것을 취했다. 어쩌면 그녀는 70년대 말의 클럽 시절로 되돌아가려고 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옛날의 클럽 시절을 회고하면서 현재의 클럽 심장부로 입성한 것이다. 의미심장한 귀환이다. 그해 발표된 는 마돈나의 그와 같은 음악적 전환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일렉트로니카 아티스트 윌리엄 오비트(William Orbit)가 영입된 이 앨범의 화두는 클럽 문화다. 더 정확히 말하면 그 매개물인 약물과 테크노 음악이다(그리고 이 둘의 관계는 서로를 보충해주는 일종의 상호보완물이다). 앨범 발표 후 마돈나는 패션잡지 (Elle)와의 인터뷰에서 그것의 약물관련성을 언급했다. "‘Ray of light’가 말하고 있는 것은 성적 모호함과 마약으로 인한 환각 체험이다." 아무래도 그것은 자신의 체험과도 어느 정도 관련이 있을 것이다. 아무튼 이 앨범은 정통 테크노 뮤지션이 아닌 테크노 앨범으로선 상당한 평가를 받았다. 대다수의 록 잡지에서 호평을 얻었고, 그때까지 한 번도 수상하지 못했던 그래미상도 4개나 획득하며 그간 그래미에 맺혔던 한을 풀었다. 여기서도 일반적인 것을 끌어다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마돈나의 미덕이 빛을 발한다. 확실히 마돈나의 그 ‘옛날 음악’은 시원한 매력을 주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2000년에 발표된 이다. 이 음반을 녹음할 당시 마돈나는 임신 중이었다. 나이도 벌써 우리나이로 마흔 셋이나 되었다. 국내로 따지면 아줌마 그것도 중년을 넘긴 아줌마 중의 아줌마인 것이다. 국내가 아닌 미국이라도 썩 유리한 조건은 아니다. 게다가 팝 음악계도 예전보다 상황이 많이 나빠져 있었다. ‘아이들 음악’이 음악판을 싹쓸이하고 있었던 것이다. 중년의 노장들은 점차 설자리를 잃어가고 있었다. 이런 가운데 마돈나가 분연히 일어섰다. ‘음악이 세상을 바꾼다’라는 굳은 신념을 가지고서. 그리곤 아주 심플한 제목을 달고 앨범을 냈다. 그 단순한 제목은 그러나 지금껏 마돈나가 걸어온 모든 과정을 함축하고 있다. 아무리 음악 외적인 것에 치중했더라도 자신의 중심은 늘 음악에 있었다는 것이다. 마돈나가 대단한 결의를 가지고 낸 그 음반은 전작 와 비슷한 음악성향을 담고 있다. 차이라면, 일렉트로니카 성향과 함께 좀더 ‘애시드 록’적이 되었다는 것이다. 즉, 전작이 차갑고 직선적이었다면 은 차갑지만 왠지 부드럽고 곡선적이다. 그리고 좀더 복고적이 되었다. ‘Music’의 가사 중 ‘음악은 사람들 모두를 모이게 한다’라는 부분은 가장 상투적이지만 가장 강력한 문구다. 비틀스의 ‘Come together’를 연상시키는 그 가사는 가장 진실하고 절실하게 느껴진다. 음악생활 20년만에 마돈나가 한 말이라 더욱 그렇다. 8. Something To Remember 마돈나는 1958년 6월 15일 미국의 미시건 주 베이 시티에서 태어났다. 1983년에 데뷔했으며, 2001년 현재까지도 여전히 현역가수다. 새로운 음악을 만들고, 계속해서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어간다. 예전 같지는 않지만 이슈를 만들어내는 힘 또한 유효하다. 지난 9월 의 발매와 함께 록 잡지 은 그녀를 커버인물로 다루었다. 이로써 그녀는 10번째로 지 커버를 장식했으며, 이는 전무(前無)한 기록이다. 성(城)에서 올린 그녀의 결혼식은 또 어떠했는가. 그녀가 썼던 다이아몬드 박힌 머리장식은 모나코 왕비 그레이스 켈리의 것이어서 대단한 관심을 끌었다. 게다가 웨딩드레스는 바로 폴 매카트니의 딸 스텔라 매카트니가 디자인한 것이었다. 언론이나 대중이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 없다. 사실 마돈나가 이렇게 오래 가리라고는 아무도 예상치 못했다. 마돈나 데뷔 당시 라이벌은 신디 로퍼였다. 그때는 마돈나보다는 신디 로퍼에 대한 평가가 훨씬 좋았고(그녀는 그래미 신인상도 차지했다), 신디 로퍼가 더 장수할 것이라는 게 중론이었다. 하지만 결과는 주지하다시피 마돈나의 절대적 승리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이것은 마돈나만이 갖고 있는 놀라운 힘의 결과다. 음악과 이미지 그리고 끊임없이 이슈를 만들어내는 능력. 이 셋의 완벽한 조화가 바로 마돈나 파워의 본질이다. 그녀는 현재 10년 연하의 남편 가이 리치와 함께 영국 런던에서 살고 있다. ‘영국의 타란티노’라고 불리는 영화감독 가이 리치와는 1999년부터 사귀었으며, 지난 12월 22일 스코틀랜드의 스키노 성에서 성대한 결혼식을 치렀다. 이제 그녀는 두 아이를 가진 자비로운 어머니이자 한 남자의 사랑스런 아내이다. 요즘 그녀의 관심은 자식들 밖에 없는 것 같다. 마돈나는 딸에 대해 "그 애는 꼭 옛날의 나를 보는 것 같아요. 그 애는 나예요. 나."라며 더없이 흐뭇해한다. 그녀의 생애 중에서 처음으로 안정을 찾은 듯 보인다. 수많은 이미지 중에서 이번엔 어머니란 이미지를 찾아낸 것이다. Material Girl, 섹스 중독증 환자, 혁명전사, 헐리우드 디바, 테크노 퀸, 클럽 키드, 살아있는 록의 전설. 지금까지 그녀에게 따라 붙었던 수식어들이다. 이중 진정한 마돈나의 모습은 무엇일까. 모든 것이 허상일 수도, 어쩌면 전부 다일 수도 있다. 하지만 분명한 건 그녀에게 있어 음악이 바로 삶이고, 삶이 바로 음악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여전히 매력적이라는 것이다. 자, 이제 그녀에게 다름 아닌 편안한 어머니의 모습을 그려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물론 ‘음악인’ 마돈나를 기억하면서 말이다.
노래 : Bryan Adams (브라이언 아담스)
20년이 넘는 오랜 세월 동안 꾸준한 활동을 펼쳐 큰 성공을 거둔 캐나다 출신의 로큰롤 싱어 송라이터 브라이언 아담스(Bryan Adams)는 팝 역사상 가장 소박하고 진솔한 가수 중 한 명이다. 출중한 외모도, 잘빠진 몸매(?)도, 부드럽고 감미로운 목소리도 타고나진 않았지만 그의 솔직 담백한 노래와 ‘이웃집 형’ 같은 친근한 이미지는 짧은 기간에 그를 1980년대 메인스트림에서 확고부동(確固不動)한 순수 로큰... 20년이 넘는 오랜 세월 동안 꾸준한 활동을 펼쳐 큰 성공을 거둔 캐나다 출신의 로큰롤 싱어 송라이터 브라이언 아담스(Bryan Adams)는 팝 역사상 가장 소박하고 진솔한 가수 중 한 명이다. 출중한 외모도, 잘빠진 몸매(?)도, 부드럽고 감미로운 목소리도 타고나진 않았지만 그의 솔직 담백한 노래와 ‘이웃집 형’ 같은 친근한 이미지는 짧은 기간에 그를 1980년대 메인스트림에서 확고부동(確固不動)한 순수 로큰롤의 영웅으로 끌어올렸다. 음악 자체보다는 화려한 뮤직 비디오와 요란한 의상처럼 음악 외적인 요소로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키던 1980년대, 브라이언 아담스의 등장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뉴 웨이브와 MTV 유행으로 일반 가수들이 신시사이저가 찍어내는 인공적인 음악과 화려한 비주얼로 팬들의 귀와 눈을 현혹시킬 때 그는 요란한 치장을 배제하고 기타를 중심으로 하는 로큰롤을 들고 나와 눈길을 끌었다. 청바지와 티셔츠를 입으면서 의상비를 절약(?)한 그가 자신만의 수수한 패션 스타일을 고집한 것은 당시 음악 외적인 것에 쏠려 가는 음악계의 트렌드에 대한 반발이었다. 1959년 11월5일 캐나다의 온타리오주(州) 킹스턴에서 태어나 요즈음 빌보드 싱글차트를 강타하고 있는 니클벡(Nickelback)의 고향인 서부 해안 도시 벤쿠버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이 개구쟁이 소년은 바로 그곳 벤쿠버에서 미래 로큰롤의 파수꾼으로 성장하는 꿈을 설계하기 시작했다. 그는 197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 초반까지 작곡가 짐 발란스(JimVallance)와 파트너십을 형성, 같은 국적의 러버보이(Loverboy)에게 ‘Jump’나 미국 하드록의 거물급 밴드 키스(Kiss)의 ‘Down on your knees’와 ‘Rock and Roll Hell’ 등을 제공하면서 나름의 탄탄한 입지를 구축했다. 1980년과 1981년, 연이어 처녀작과 소포모어 앨범을 공개했지만 팬들로부터 주목받는데 실패하고 만다. 두 번째 앨범에서 커트된 ‘Lonely nights’는 84위를 기록하곤 2주만에 차트 밖으로 밀려나는 참패를 경험했다. 그러나 그의 진가는 1983년에 발표된 3집 < Cuts Like A Knife >에서부터 마침내 그 빛을 발산하기 시작했다. 그의 첫 히트곡이 된 허스키 록 보컬의 발라드 ‘Straight from the heart(10위)’는 같은 해에 여성 로커 보니 타일러(Bonnie Tyler)에 의해 웅장한 스케일로 커버되었고, 팬들은 이 앨범의 ‘Cuts like a knife(15위)’와 ‘This time(24위)’도 애청했다. 특히 음반 타이틀곡 ‘Cuts like a knife’의 그 유명한 후반부 코러스는 이 곡을 로큰롤의 고전으로 만들었다. 성공의 만족감을 채 누릴 수 없을 정도로 1984년 연말에 발표된 4집 < Reckless >는 그에게 더 큰 성공을 안겼다. 그의 음반들 중에서 가장 많은 판매고를 기록한 이 앨범으로 브라이언 아담스는 북미 지역을 훌쩍 뛰어넘어 월드 슈퍼스타로 솟아올랐다. < Cuts Like A Knife >가 성공의 씨앗이었다면 < Reckless >는 성공의 열매였던 셈이다. 우리나라에서 그의 이름을 널리 알린 ‘Heaven’으로 그는 최초로 차트1위에 올랐으며 ‘Run to you(6위)’, 어린 시절 친구들과 함께 밴드를 조직했던 경험을 노래한 ‘Summer of 69(5위)’, ‘Somebody(11위)’, ‘One night love affair(13위)’, 그리고 1984년에 인상적으로 재기한 흑인 여성싱어 티나 터너(Tina Turner)와 함께 로큰롤의 열기를 발산한 ‘It’s only love(15위)’ 등이 줄줄이 히트차트를 도배했다. 여섯 싱글 모두 Top20을 기록한 대수확이었다. 상업적으로 성공한 것은 물론, 수록곡들은 기타주자 키스 스코트(Keith Scott)가 이끄는 백업 밴드의 견고한 연주로 사운드 측면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았다. 일례로 오픈 코드를 구사한 ‘Summer of 69’는 기타지망생들의 연습교본이 되었다. 싱글들 덕에 앨범 역시 1985년 빌보드 앨범 차트 정상에 등극했고 500만장의 판매고를 올렸다. 항상 미국의 그림자에 눌려 있던 캐나다가 조니 미첼, 닐 영 등에 이은 또 하나의 팝 거목을 배출하는 순간이었다. < Reckless >의 성공으로 브라이언 아담스는 바빠졌다. 1985년에는 아프리카의 기아를 돕기 위한 음반 < We Are The World >에서 캐나다 아티스트들이 모여 부른 ‘Tears are not enough’를 작곡하는 것은 물론 ‘라이브 에이드’에도 기꺼이 동참하면서 뜨거운 인간애를 나누었다. 이렇게 타이트한 스케줄을 뒤로하고 1987년에 공개한 < Into The Fire >로부터는 싱글 ‘Heat of the night(6위)’과 ‘Hearts on fire(26위)’, ‘Victim of love(32위)’가 나왔지만 전작의 인기에는 미치지 못했다. 다음 앨범 < Waking Up The Neighbours >가 세상에 공개된 것은 다시 4년의 시간이 흐른 1991년이었다. 이 음반에 수록된 영화 < 로빈후드 >의 주제가 ‘(Everything I do) I do it for you’는 팝 싱글차트 정상을 7주간이나 호령했고, 아름다운 선율과 서정적인 분위기를 선호하는 국내 음악 팬들에게도 크게 어필했다. 이 곡으로 그는 생애 처음으로 그래미상 트로피를 손에 쥐었고 아카데미 후보에도 오르면서 1990년대에 제2의 전성기를 맞이했다. 이 빅히트 곡 외에도 ‘Can’t stop this thing we started(2위)’, ‘There will never be another tonight(31위)’, ‘Though I’d died and gone to heaven(13위)’, ‘Do I have to say the words?(11위)’ 등으로 인기를 이어갔으며, 이듬해에는 지난 10년 동안 자신의 음악 인생을 되돌아보는 베스트 음반 < So Far So Good >을 발표했고 여기서 다시 신작 싱글 ‘Please forgive me’를 7위에 올려놓으면서 절정의 분위기를 이어갔다. 전형적인 브라이언 아담스표 발라드인 이 곡도 국내에선 오랫동안 애청되었다. 하지만 이 시기부터 브라이언 아담스의 음악은 거친 혈기와 패기 속에서 낭만을 전하는 로큰롤보다는, 멜로디를 내건 성인 취향의 미드템포와 발라드 노래들이 주류를 이루었고 그는 이 때문에 음악 향방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 Waking Up The Neighbours >는 아담스 특유의 직선적이고 흥겨운 로큰롤 사운드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마지막 정규 음반이 되었다. 성공 퍼레이드는 여전해 1994년에는 로드 스튜어트(Rod Stewart), 스팅(Sting)과 함께 ‘허스키 삼총사’를 이뤄 영화 < 삼총사 >의 주제곡 ‘All for love’로 또 다시 차트 정상을 수복했고, 1995년에는 영화 < 돈주앙 >에 삽입된 ‘Have you ever really loved a woman?’으로 빌보드 정상을 5주간이나 접수했다. 이 곡의 인트로 어쿠스틱 기타 연주부분은 팝 연주의 결정판으로 인정받았다. 이듬해에도 여장부 바브라 스트라이샌드(Barbra Streisand)와 함께 영화 < 미러 해스 투 페이시스 >의 주제가 ‘I finally found someone(8위)’을 불러 히트 레퍼토리를 추가했다. 나이 30대 중반을 넘어선 시점과 맞물린 1990년대의 두 번째 전성기는 이전의 로큰롤 스타일보다는 영화 주제곡이나 공연실황 음반을 발표하는 등 다소간 정체성을 조정한 듯한 인상이 투영되었지만 상기한 히트곡들은 예외 없이 차분한 발라드로 나타나 여전히 히트가수 이미지에 끌려가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히트곡 모음집 < So Far So Good >은 500만장이 팔려나갔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팬들은 냉담한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브라이언의 추억과 낭만이 긷든 로큰롤에서 자신들의 어렸을 적 꿈을 반추하길 원하는 팬들과 나이에 어울리는 음악을 추구하고 싶은 아담스 자신간에 불가피한 괴리가 생겨났다. 양쪽 모두를 만족시키기 위해 뉴욕 해머스타인 볼룸에서 거행된 1997년의 프로젝트 < MTV Unplugged >는 일렉트릭 기타 위주의 예전 히트곡들을 어쿠스틱 음원으로 재생하는 절충적 방법을 취한 동시에 앞으로 그의 음악이 예전과 달라질 것임을 시사했지만 실적은 저조했다. 여기서 싱글 커트한 ‘Back to you(42위)’는 마지막 싱글 히트곡이 되었다. 1998년에 발표된 다음 앨범 < On A Day Like Today >는 팬들의 사정권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었다. 1994년 2월 내한 공연을 가져 국내의 팝 팬들에게 벅찬 감동을 안겨준 브라이언 아담스는 관객들 중에서 한 남학생을 무대 위로 초청해 함께 ‘Heaven’을 부르기도 했고, 관중석 중간에 간이 무대를 마련해 뒤쪽에 위치한 팬들과도 거리감을 좁히는 등 수수하고 친절한 이미지를 실천, 큰 박수를 받았다. 그 이미지는 아직도 캐나다를 대표하는 가수로서 그를 기억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밴드 : Bob Seger & The Silver Bullet Band (밥 시거 앤 더 실버 불릿 밴드)
멤버 : 밥 시거(Bob Seger, 보컬), 드류 아보트(Drew Abbott, 기타), 찰리 알렌 마틴(Charlie Allen Martin, 드럼), 크리스 캠벨(Chris Campbell, 베이스), 릭 만나싸(Rick Mannassa, 키보드), 알토 리드(Alto Reed, 섹소폰, 플루트) 멤버 : 밥 시거(Bob Seger, 보컬), 드류 아보트(Drew Abbott, 기타), 찰리 알렌 마틴(Charlie Allen Martin, 드럼), 크리스 캠벨(Chris Campbell, 베이스), 릭 만나싸(Rick Mannassa, 키보드), 알토 리드(Alto Reed, 섹소폰, 플루트)
펑크 락, 뉴웨이브 밴드. 펑크 락, 뉴웨이브 밴드.
< 롤링 스톤 >지은 84년 이 그룹을 ‘올해의 밴드’로 선정하고 대서특필했다. 미국의 대중주간지 < US >는 85년 “아일랜드에서 온 성난 십자군들이 미국을 산산조각내고 있다”며 그들의 미순회공연을 충격적으로 보도했다. < 타임 >지는 87년 관계자의 말을 인용. 이 그룹이 비틀즈 다음에 랭크되어야 한다고 썼다. 언론의 지적처럼 이 그룹은 실로 ‘80년대 최고의 록 밴드’였다. 음악전문가들 사이에서뿐 아니라 ... < 롤링 스톤 >지은 84년 이 그룹을 ‘올해의 밴드’로 선정하고 대서특필했다. 미국의 대중주간지 < US >는 85년 “아일랜드에서 온 성난 십자군들이 미국을 산산조각내고 있다”며 그들의 미순회공연을 충격적으로 보도했다. < 타임 >지는 87년 관계자의 말을 인용. 이 그룹이 비틀즈 다음에 랭크되어야 한다고 썼다. 언론의 지적처럼 이 그룹은 실로 ‘80년대 최고의 록 밴드’였다. 음악전문가들 사이에서뿐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일반 팬들에게 당대 록 그룹 인기서열 1위는 언제나 이들 차지였다. 심지어 “지진이 일어날 만큼 수많은 관객이 운집해 열광하는 그들의 공연을 누가 능가할 수 있겠는가? 아마도 교황만이 가능할 것이다.”라는 얘기도 나왔다. 아일랜드 더블린 출신의 4인조 그룹 유투(U2). 그룹명을 고공첩보기의 이름을 따서 지었다는 이들은 이런 인기 외에 가수의 울타리를 뛰어넘은 영향력까지 누리고 있다. 아일랜드의 수상 가렛 피처랄드가 이 그룹 리더에게 정부의 실업 비상대책위원회에 참여해달라고 요청한 것이 그 일례에 속한다. 리드 싱어 보노(Bono)의 원시적 야수성이 번득이는 보컬, 에지(Edge)의 자극적인 기타 연주(그룹 후의 피트 타운센트는 “그의 연주를 들었을 때 기타 연주를 포기하고 싶었다”고 실토한 바 있다). 아담 클레이튼(Adam Clayton)의 베이스, 래리 뮬렌 주니어(Larry Mullen Jr.)의 드럼이 융합되어 토해내는 ‘스트레이트 록큰롤’은 가히 일품이다. 발라드나 댄스곡 일색인 이 시대에 유투의 광포한 록 사운드처럼 팬들 가슴에 불을 당긴 밴드는 없었다. 록 뮤직의 본질인 폭발성과 열정 그리고 현장성의 부재에 갈증난 팬들에게 이들은 ‘가뭄 속의 단비’였다. 그렇다고 유투가 이같은 록큰롤에 대한 투신만으로 명성을 구가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들이 평가받게 된 보다 정확한 이유는 사회현실을 주시하고 세상의 부조리를 파헤쳐 고발하는 ‘매서운 감시 기능’에 자리한다. 워싱턴 대학의 부총장이자 록 역사가인 데이비드 P. 차트메리 씨는 91년 펴낸 『록킹 인 타임』이란 저서에서 “유투는 록 음악이 60년대에 보여준 ‘비판정신’이 복원되고 있음을 가장 잘 드러내주는 실체”라면서 그들의 음악을 저항적이라고 기록했다. 유투 본인들도 자신들이 거둔 성공의 주된 이유는 “좋은 노래, 즉 현실적(real)인 노래를 쓴다는 데 있다”고 인정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리드 싱어이면서 모든 가사를 쓰고 있는 그룹의 실세 보노(본명 폴 휴즌)는 더 구체적으로 “80년대 사람들은 칵테일 감성을 원하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엘리베이터에서 들려나오는 소위 ‘무드음악’을 만드는 것에 관심을 갖고 있지 않다. 우리는 우리가 반대하는 것들에 정면으로 충돌하는 자세로 음악을 한다.”고 그룹 이념을 밝혔다. 바로 이런 태도가 그들에게 인기 외에 존경을 더해준 것이다. 지난 76년에 결성된 유투는 78년 기네스 맥주회사가 주최한 가요제에서 우승하면서 팝 무대에 공식 진출했다. 상당기간 충전을 거듭한 뒤 80년 첫 앨범 < 소년(Boy) >과 81년 < 10월(October) >을 연이어 출반했으나 비평가들의 찬사만 들었을 뿐 판매는 부진했다. 여기까지 그들은 평범한(물론 나중의 음반과 비교해서) 소재를 다루었으나 이후에는 음악에 정치적 메시지를 집어넣기 시작했다. 입장 정리를 끝내고 나자 유투는 < 전쟁(War) >, < 잊혀지지 않을 불꽃(The Unforgettable fire) >, < 여호수와 나무(Joshua Tree) >, < 분노의 소리(Rattle and Hum) > 등 걸작을 터뜨리면서 한 번도 현실과 등진, 공허한 상업성의 메아리를 울리지 않았다. 전환점은 82년 10월 북아일랜드의 항구도시 벨파스트에서 가진 공연이었다. 여기서 유투는 역사적인 아일랜드 문제를 정면으로 다룬 ‘일요일, 피에 젖은 일요일(Sunday, Bloody Sunday)’을 관객들에게 선보여 일대 주목을 받았다. 왜곡된 현실의 제문제들을 취급하기로 마음먹은 그들이었지만 그 가운데 가장 먼저 유투의 눈에 걸려든 것은 자신들의 조국 아일랜드의 분단과 전쟁이었다. ‘아이들 발 아래 깔린 깨진 병들, 막다른 골목길에 널린 시체들, 투쟁이 막 시작됐어. 많은 사람이 죽어가지만 승리한 자는 누구인가. 참호가 패이는 것은 우리들 가슴 속이지. 어머니의 자식 형제들 누이들이 찢어지고 ...’ 아일랜드 상황을 그린 존 레논의 72년도 노래와 제목이 같은 이 곡에서 유투는 종교의 차이 때문에 나라가 남북으로 갈려 끝없이 다투는 것을 두고 언제까지 우리가 레논의 노래를 불러야 하겠느냐며 ‘오늘밤에라도 우린 하나가 될 수 있다’고 강조한다. 유투의 소원은 고국 아일랜드의 통일이다. 보노는 “하나의 섬인 나라를 남북으로 갈라놓은 경계선은 완전한 허위”라고 주장한다. 유투의 눈에 세상은 투쟁과 분열로 혼탁하며 반민주적 상황이 도처에 산재하고 있는 ‘문제의 세상’이었다. 이 노래가 수록된 83년의 음반 < 전쟁 >이 시사하듯 세계적 현실은 여러 가지 레벨의 전쟁 상황이나 다름없다. 당연히 국제간의 정치 분쟁, 핵 지대화, 민권 침해 등 주요 문제들이 이 고공첩보기의 감시를 받는다. ‘서에서 동까지 당신들은 하지 않으면 죽는다는 식이야. 야밤의 도둑처럼 당신들은 촛불로 세상을 보고 있는 거야. .. 매일 매일이 혁명인 거야. 소련, 동독, 런던, 뉴욕, 북경! 배후를 조종하는 앞잡이들이야. 안녕, 안녕, 안녕하는 데는 1초밖에 걸리지 않아. 버튼을 누르고 플러그를 당겨. 안녕이야.’ ‘초(Seconds)’ 역시 < 전쟁 >에 실려 있는 이 곡은 핵무기에 대한 엄중한 경고이다. ‘부서진 등은 천장에 걸리고 깨어진 코는 바닥에 닿아 있지. 난 문 뒤에서 웅얼거리는 침묵에 비명을 지르지. 간수는 말하는 거야. 비상구는 열려 있으니 나가려면 은과 금이 있어야 한다고. .. 이 사슬은 더 이상 날 묶지 못해. 발에 있는 족쇄도 마찬가지야. 죄수는 밖으로, 안에는 자유를! 그들을 풀어주라.’ ‘은과 금(Silver and Gold)’ 요하네스버그 남부에 사는 어느 흑인을 소재로 했다는 이 곡은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서슬퍼런 흑인 차별정책인 아파르트헤이트에 대한 신랄할 비판이 담겨 있다. 이 노래는 리틀 스티븐의 제창으로 아파르트헤이트의 반대를 호소한 음반 < 선 시티(Sun City) >에 보태기 위해 만든 곡이다. 유투는 특히 인권 탄압에 예민하다. 세계 도처에 행해지고 있는 인권 침해의 현실을 문책하는 국제사면위원회(Amnesty International)에 깊이 관여하면서 85년, 86년 이를 위한 공연에 잇따라 참여했다. 유투의 팬들은 < 선전 >이라는 잡지를 발행, 독자들로 하여금 국제사면위원회를 대신해 인권을 탄압하는 각국의 정부에 편지를 띄우도록 하고 있기도 하다. 유투의 노래 방향은 한마디로 ‘민주주의’라고 결론지을 수 있다. 자본주의든 사회주의든 그 어느 정치 체제나 경제 이데올로기의 입장에는 서있지 않다. 이들의 관심은 어떤 이념의 체제이든 그 국가가 현실정치에서 저지르고 있는 반민주적 요소와 왜곡을 규탄하고 전면적 반성을 촉구하는 데 집중된다. 따라서 60년대와 70년대 록 스타에게서 가끔 나타나던 반체제, 무정부주의, 반종교의 기색은 발견되지 않고 이념과 체제는 절대 건드리지 않는 가운데서 운동성이 출발한다. 이들의 음악이 우리의 귀에 다소 시끄럽게 들리는 것은 그 속에 70년대 중반 영국을 휘몰아쳤던 펑크 사운드가 살아 있는 까닭이다. 유투는 펑크의 소리만 되살린 데 그치지 않고 펑크의 ‘저항 정신’을 함께 복원시켜 저항을 자신들의 슬로건으로 내세웠지만 반체제적이고 무정부주의적인(다시 말해 ‘부정적인’) 옛 펑크와는 저항의 본질을 완전히 차별화했다. 기타주자 에지는 말한다. “펑크는 죽었다. 그것이 과연 존재하기나 했던 것인지 의심스러울 정도다. 그래서 현재 밀어닥치는 새로운 팝의 소용돌이 속에 펑크는 버팀목으로서 음반 < 전쟁 >이 기획되었다. 우리는 클래시의 초기 주장과 리차드 헬, 그리고 섹스 피스톨즈를 좋아해왔다. 그러나 우린 분노와 사랑을 동시에 원한다. 우린 프로테스트(저항) 음반을 원하지만 분명히 ‘긍정적인’ 프로테스트 음반을 원한다.” 반종교 또는 반그리스도 주장 또한 이들에게는 ‘큰일날’ 소리다. 이들은 파문을 일으켰던 존 레논의 “우린 예수보다 위대하다”는 발언을 끔찍한 것으로 여긴다. 레논의 음악과 저항 자세는 존경할 만하지만 그가 무종교주의자라는 점은 배격한다. 영국과 아일랜드 출신, 특히 아일랜드산 가수 중에는 반미감정의 소유자가 적지 않은 편인데, 유투의 경우 미국을 바라보는 시각이 ‘탄력적’인 것은 이와 같은 ‘긍정적 비판’ 혹은 ‘비판적 지지’의 자세에서 연유한다. 이들은 < 여호수와 나무 >에 수록된 ‘푸른 하늘에 총탄을(Bullet the Blue Sky)’을 통해 80년대 중미 국가에 행사된 미국의 압력적 개입에 분노를 터뜨리고 있다. ‘악마의 씨를 뿌리고 화염을 일으킨다. 그들이 십자가를 불태우는 것을, 높이 높이 솟구치는 불꽃을 보라. .. 가시덤불의 장미처럼, 로열 플래시의 모든 색깔처럼 그리고 그는 달러 지폐를 낙하시키고 있다. 난 전투기가 아기가 잠든 진흙 오두막집을 가로지르고 조용한 도시의 거리를 지나는 것을 본다. .. 벽을 통해 우린 도시의 신음소리를 듣는다. 미국이 밖에 있다. 미국이 밖에 있다.’ 그러나 결코 원색적 반미의 기조는 없다. 유투에게 미국은 ‘신의 나라’이며 ‘마음의 땅’이기도 하다. 보노는 87년 < LA 타임즈 >와의 인터뷰에서 이 부분에 대한 입장을 분명하게 개진한 바 있다. “미국이 특히 중미지역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악몽인 것은 틀림없다. 미국은 농부와 인민의 황폐화를 자행하고 있다. 그러나 난 미국 시민에 대한 증오에서가 아니라 진정한 존경심에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난 미국이 ‘악몽이면서 꿈’이라는 생각이 머리에 박혀 있다." 상당수는 이러한 유투의 ‘체제 인정, 현실 지적’의 노선(부연하자면 혁명을 통한 체제변화의 방식이 아닌 개혁에 의한 체제의 수정, 발전을 모색하는 방식)을 현실적으로 가장 좋은 ‘방법론’이라고 판단하고 이들에게 지지를 보내주는 것 같다. 87년에 발표된 < 여호수와 나무 >는 영국에서 1백50만 장, 미국에서 4백만 장, 전세계적으로 1천5백만 장이 팔려나가 팬들의 성원이 압도적임을 여실히 증명했다. 이들이 일반 소비자뿐 아니라 미국의 제도권으로부터도 환영받는 것(언론의 그 호의적인 반응을 보라)은 이같은 노선에 힘입은 바 크다. 따라서 일부로부터는 - 당연히 급진적 좌파가 되겠지만 - 이들이 일정한 한계에 머물러, 앞서 지적한 영국의 클래시나 섹스 피스톨즈 같은 펑크 그룹이 보여준 진보성에는 훨씬 못미친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유투는 60년대의 혁명정신을 계승했다는 얘기를 듣는다. 그러나 그들의 혁명은 ‘체제의 혁명’이 아니라 ‘사랑의 혁명’이다. 그들이 87년 < 뮤지션 >지에 밝힌 내용을 통해 유투의 혁명관을 분석할 수 있다. “황량하기만 한 시대인 현 80년대에서 우린 60년대를 돌아본다. 그 시대는 정말 ‘재능’과 ‘드높은 이상’ 그리고 ‘무언가를 변화시키려는 의지와 욕구’의 저장탱크였다. 나는 그때의 아티스트들처럼 사랑의 혁명에 관심을 갖는다. 물론 그들의 일부는 사회혁명을 외쳤지만 우리는 사랑의 정신을 이어받고자 한다. 혁명을 하고 싶다면 자신의 가정에서부터 주변사람들과의 인간 관계에서부터 혁명을 시작해야 할 것이라고 믿는다.” 이들의 모든 노래는 결국 ‘사랑을 통한 화합’으로 귀결된다. 기독교적 박애의 분위기다. 이런 탓에 급진성의 함량 미달이라는 혹평 말고도 너무 잘난 척만 일삼고 성직자연한다는 비아냥을 받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투는 60년대 히피처럼 사랑만이 모든 질곡으로부터 해방시켜줄 수 있는 유일한 구세주임을 확신하고 있다. ‘한 사람이 사랑의 이름으로 왔다네. .. 4월 4일 이른 아침 멤피스의 하늘에 총성이 울렸지. 마침내 자유다! 그들이 당신의 목숨은 앗아갔지. 그러나 당신의 자부심은 빼앗지 못했지. 사랑이라는 이름에 대한 자부심은. 사랑의 이름 이상의 그 무엇이 있으랴.’ ‘프라이드(Pride in the Name of Love)’ 여기에 등장하는 한 사람은 비폭력 민권운동 지도자였던 마르틴 루터 킹 목사. 유투는 이 곡을 그의 영전에 바쳤다. ‘나는 나의 과거를 정복했지. 마침내 미래가 여기 있지. 난 새로운 세상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서 있다네. 내 바로 앞에 있는 파멸들은 곧 나를 놓치게 될 것이야. 사랑은 나를 구조한다네.’ ‘사랑이 나를 구조하네(Love Rescue Me)’ 유투는 래리 뮬렌이 열네 살 때 마운트템플 고교 게시판에 공고를 내 조직한 그룹. 보노나 뮬렌 둘다 모친을 병 또는 사고로 잃어 그 동병상련을 깊은 연대감으로 승화시킨 그룹. 처음에는 악기 하나 소리 하나 제대로 못내다가 절차탁마를 거듭해 이럴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뛰어난 실력을 갖추게 된 ‘노력지향’의 그룹(보노는 노래에 별다른 소질이 보이지 않아 매니저가 되라는 권유를 받기도 했으나 지금은 천부적 노래꾼이라는 찬사를 받고 있다). 가사는 보노가 쓰지만 작곡은 모든 멤버가 임해 스스로를 ‘네발 달린 테이블’이라고 하는 공동체적 민주주의 그룹. 이들에게 단단한 팀웍이 구축되고 있는 것은 어쩌면 필연적 결과인지도 모른다. 네 명의 유투 멤버만 그런 것이 아니다. 유투의 관계자들 대부분이 그들과 같은 공동체 의식의 소유자들이다. 그들의 매니저인 폴 맥기니스와 관련한 소식 하나. 맥기니스는 평소 솔직한 발언을 잘 하기로 이름이 나있는데, 90년 더블린에서 가진 한 세미나에서 슈퍼스타 폴 매카트니와 피트 타운센트를 크게 꾸짖었다. 이유는 그들이 돈많은 갑부인데도 불구하고 염치없이 떼돈을 챙기고 있다는 것이었다. “폴 매카트니가 순회 공연을 하면서 비자카드의 후원을 잡아 수백만 달러를 챙기고 티켓을 살 때 그 카드만 사용하도록 한 것을 보면 그는 정말 탐욕스러운 사람이다. 공연할 때 후원이 없으면 남지 않는다고 그가 주장한다는 것은 정말 ‘개똥’ 같은 얘기다. 그처럼 돈많은 사람이 말이다. 마찬가지로 지난해 그룹 ‘후’가 맥주회사를 공연 후원업체로 잡았을 때 난 무지 당황했다. 피트 타운센트는 회복기의 알콜중독자 아닌가. 이러한 이율배반을 그가 몰랐던 게 아니라 무시했다고 생각한다.” 맥기니스는 심지어 그들의 공연 후원잡기 행태를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먹는다는 뜻에서 ‘파우스트적 거래’라고 맹공했다. 매니저부터가 실로 유투적이다! 유투는 88년 < 분노의 소리 >이후 4년간 공백을 갖다가 92년 < 액퉁 베이비(Achtung Baby) >라는 제목의 새 앨범을 내놓았다. 슈퍼스타답게 역시 이 음반은 크게 히트했고 기독교적 사랑을 전체 수록곡을 통해 제창하고 있다. 앞으로 또 음반을 내도 유투는 계속해서 기독교적 사랑을 노래하고 사회현실을 지적할 것이다. 이 작업은 87년의 빅 히트곡 ‘난 아직 찾고 있는 것을 발견하지 못했지(I Still Haven`t Found What I`m Looking for)’의 가사처럼 아마도 끝없는 여로일 터이다. ‘난 가장 높은 산을 올라갔지. 난 들판을 가로질러 달렸지. 난 뛰었고 기었지. 이 도시의 벽을 기어오르기도 했지. 오로지 그대와 함께 하기 위하여. 그러나 난 아직 찾고 있는 것을 발견하지 못했지.’
밴드 : The E Street Band (더 이 스트릿 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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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혹(不惑)은 나이 사십을 일컫는다. 주위의 어떠한 상황에도 미혹(迷惑)됨이 없이 앞으로 정진한다는 뜻으로 공자가 < 논어 > ‘위정편(爲政篇)’에서 언급한 말이다. 예쁘장한 뉴저지 소년들 본 조비가 어느새 우리네 나이로 불혹이 됐다. ‘그룹의 존재 이유’ 존 본 조비(John Bon Jovi, 1962년 생)와 키보디스트 데이비드 브라이언(David Bryan, 1962년 생)이 올해로 마흔 줄에 접어들었다. ... 불혹(不惑)은 나이 사십을 일컫는다. 주위의 어떠한 상황에도 미혹(迷惑)됨이 없이 앞으로 정진한다는 뜻으로 공자가 < 논어 > ‘위정편(爲政篇)’에서 언급한 말이다. 예쁘장한 뉴저지 소년들 본 조비가 어느새 우리네 나이로 불혹이 됐다. ‘그룹의 존재 이유’ 존 본 조비(John Bon Jovi, 1962년 생)와 키보디스트 데이비드 브라이언(David Bryan, 1962년 생)이 올해로 마흔 줄에 접어들었다. 리치 샘보라(Richie Sambora, 1959년 생)와 티고 토레스(Tico Torres, 1953년 생)는 과거에 이미 안착했다. 그들은 1980년대부터 자신들의 특허품 ‘뉴저지 사운드’를 들고 나와 현재까지 변함없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음악성이 떨어진다, 이젠 변해야 산다, 제발 음악 인테리어 좀 다시 해라 등의 주변의 입방아와 시선에도 그들은 ‘Keep the faith’와 ‘It’s my life’를 부르며 현혹되지 않았다. 불혹은 그러한 밴드의 신념을 더욱 확고히 해주는 격려의 나이테이다. 바로 이번에 발표되는 본 조비 최초의 라이브 앨범 < One Wild Night >는 ‘앞으로도 유혹에 흔들리지 않겠다’는 그들의 굳건한 의지가 담긴 뜨거운 열기의 현장이다. # Always 본 조비는 1980년대 거대 자본을 바탕으로 음반 산업이 빚어낸 ‘의도적’ 결과물인 팝 메탈의 르네상스를 주도한 그룹이다. 하지만 그들은 머틀리 크루(Motley), 래트(Ratt), 포이즌(Poison), L.A. 건스(L.A. Guns), 워런트(Warrant), 슬로터(Slaughter), 도켄(Dokken), 스키드 로우(Skid Row) 등 대부분의 동료 헤어 메탈 밴드들이 1990년대 들어 얼터너티브 열풍에 밀려 강제 퇴출 당하는 수모를 겪는 와중에도 불구하고, 차트를 점령하며 세계에서 가장 성공적인(또는 상업적인) 록 그룹으로 자리잡았다. 본 조비의 성공 요인은 ‘건강함’에 있다. 그들은 퇴폐 미를 부각시키기 위해 자극적이고 쾌락적인 사운드를 구사하는 LA 출신 그룹들과 달리, 아메리칸 하드록의 전통을 흡수하여 밝고 경쾌한 음악 세계를 펼쳐냈다. 한때의 유행을 지배하는 충격 요법보다 은근하지만 뿌리가 깊은 정공법을 택하여 꾸준한 인기를 얻었다. 존 본 조비의 루츠적인 목소리와 리치 샘보라의 블루스에 기반을 둔 기타 스타일이 대변한다. 가사 또한 대부분 건강미를 한껏 뽐낸다. 술과 마약, 걸(Girl)들을 찬양했던 타 밴드와 갈라서게 되는 두 번째 지점이다. ‘우리는 이제 겨우 반쯤 왔어요/ 기도로 살아요/ 내 손을 잡으세요/ 단언컨대 우린 그것을 해낼 수 있어요’ -1986년 앨범 < Slippery When Wet >의 수록곡 ‘Livin’ on a prayer’ 중에서- ‘누구나 힘들기 마련이에요/ 만족할 수 없으니까요/ 의지할 누군가가 아무도 없을 때 버텨내기란 힘이 들어요/ 신념, 당신은 빗속을 헤쳐나갈 수 있어요/ 신념을 지키세요’ -1992년 앨범 < Keep The Faith >의 수록곡 ‘Keep the faith’ 중에서- 그들은 결코 실패와 절망을 노래하지 않는다. 고통 속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용기와 믿음을 준다. 때문에 남녀 노소 들어도 부담이 없다. 본 조비를 얘기하면서 동향 출신의 로큰롤러 브루스 스프링스틴(Bruce Springsteen)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팝 메탈과 노동자 록이라는 다른 노선을 걷고 있지만 그 사이에는 ‘트래디셔널’이라고 하는 공통분모가 있다. 미국의 전통 록 사운드를 둘 다 품고 있다. 본 조비는 바로 ‘보스(Boss)’로부터 그것을 물려받았다. 1984년 셀프 타이틀 데뷔작에 실린 ‘Runaway’가 대표적이다. 서로는 또한 뉴저지를 위해 일하고 봉사한다. 각종 자선 단체의 기금 모금 공연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으며, 1998년에는 탈주 범에게 살해된 뉴저지 경찰관 패트릭 킹 가족들의 생계비 마련을 위해 함께 합동 공연을 열기도 하는 등 뉴저지의 음악 일꾼으로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아마도 본 조비의 건강함은 브루스 스프링스틴에게서 파생되지 않았나 여겨진다. # New Jersey 본 조비는 1983년 고등학교 친구사이였던 존 본 조비와 키보디스트 데이비드 브라이언이 뉴저지주의 세이레빌(Sayreville)에서 만든 밴드. 곧이어 리치 샘보라와 베이시스트 알렉 존 서치(Alec John Such), 드러머 티코 토레스가 가세하여 완벽한 짜임새를 갖췄다. 그들은 1984년 데뷔 음반 < Bon Jovi >, 1985년 2집 < 7800 Fahrenheit > 등을 발표하며 음악의 바다로 힘차게 닻을 올렸다. 각각 앨범 차트 43위와 37위를 기록하며 선전했지만, 사운드 측면에서는 불안함이 엿보였다. 키보드에 주안점을 둔 경쾌한 하드록은 별다른 특징이 없었다. 밴드는 변화가 필요했다. 결국 그들은 에어로스미스(Aerosmith), 엘리스 쿠퍼(Alice Cooper), 마이클 볼튼(Michael Bolton), 그리고 요즘의 리키 마틴(Ricky Martin) 등에게 굵직한 히트곡들을 제공한 명 작곡가 데스몬드 차일드(Desmond child)와 전격 제휴하였다. 데스몬드의 입김에 의해 팝 적인 감각을 대폭 받아들인 그들은 팝 메탈로 그룹의 음악 방향을 확정했다. 그래서 완성된 결과물이 바로 1986년의 < Slippery When Wet >이였다. 귀를 단숨에 자극하는 훅(Hook)과 신나고 흥겨운 그들의 메탈 사운드는 미국 전역을 강타했다. 앨범 차트 정상에 오른 것은 물론이고, ‘Livin’ on a prayer’, ‘You give love a bad name’, ‘Wanted dead or alive’, ‘Never say goodbye’ 등의 인기 곡들을 쏘아 올렸다. 음반은 현재까지 미국에서만 천 만장이 훨씬 넘게 팔려나갔다. 본 조비의 가장 빛나는 마스터피스이자 팝 메탈의 위대한 명반으로 남아있다. 그들은 이것을 계기로 데스몬드 차일드와 끈끈한 파트너십을 유지하며 오늘날까지 좋은 노래들을 만들어내고 있다. 한번 점화된 본 조비 열기는 식을 줄 몰랐다. 1988년에 발매된 작품 < New Jersey >는 미국과 영국에서 동시에 정상을 밟았고, ‘Bad medicine’, ‘Born to be my baby’, ‘I’ll be there for you’, ‘Lay your hands on me’ 등이 히트 퍼레이드를 이어 나갔다. 한편 그들은 1989년에 열린 MTV 뮤직 비디오 시상식에서 강한 하드록 ‘Wanted dead or alive’를 어쿠스틱 버전으로 불러 많은 화제를 불러모았는데, 이는 1990년대 들어 MTV에 의해 기획된 언플러그드 공연에 핵심적인 단초를 제공했다. 이후 휴지기에 돌입하여 각자의 솔로 활동에 전념하는 것으로 미국에서의 찬란했던 1980년대를 마감한 본 조비는 1990년대의 개막과 함께 영국에서 더욱 많은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1992년 컴백 앨범 < Keep The Faith >, 1994년 베스트 앨범 < Crossroad >, 1995년 정규 6집 앨범 < These Days >(1994년 알렉 존 서치가 견해차로 탈퇴하여 후임 베이스 주자로 휴 맥도널드(Hugh Mcdonald)가 가세했다) 모두 영국 차트 넘버원을 차지했다. 미국에서 각각 5위, 8위, 9위에 올라선 것과 대조적이다. 이는 당시 너바나가 주도한 얼터너티브 록이 미국을 휩쓸고 있었기에, 조금은 피해가 덜한 영국에서 비상(飛上)할 수 있었던 것으로 풀이된다. ‘Keep the faith’, ‘Bed of roses’, ‘I’ll sleep when i’m dead’, ‘I believe’, ‘Always’, ‘Someday i’ll be saturday night’, ‘This ain’t a love song’, ‘Something for the pain’, ‘Lie to me’, ‘These days’ 등의 무수한 히트곡들이 이 기간동안 쏟아져 나왔다. 본 조비는 얼마 후 개인 플레이와 음악적 충전을 위해 또다시 장기간의 칩거에 들어가며 1990년대를 보냈고, 멀티 플래티넘을 따낸 재기 작품 < Crush >와 함께 뉴 밀레니엄을 맞았다. # One Wild Night 우선 수록곡의 질적인 면이나, 사운드의 완성도를 떠나 본 조비의 이번 라이브 앨범 < One Wild Night >는 중요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17년 동안의 음악 이력서에 처음으로 올리는 실황 음반이라는 것이다. 그들의 라이브는 흥겹기로 정평이 나있다(국내에서도 이미 1995년 내한공연으로 확인했다). 한해 공연을 통해 벌어들이는 수익만 2천 8백 4십만 달러, 매진 사태로 인해 무조건 공연장으로 들어가려는 막무가내 팬들의 잦은 부상 등은 그들의 공연이 얼마나 인기가 높은지를 단적으로 설명해 준다. 그리고 밴드는 1987년 몬스터 록 페스티발, 1989년 모스크바 뮤직 피스(Peace) 페스티발, 앨범 발표 후 가지는 월드 투어 등을 통해 스타디움 록 밴드로서 확실한 발판을 마련한 지 오래다. 하지만 지금까지 단 한 장의 라이브 앨범도 없었다는 것은 정말 의외의 일이다. 팬들이 타는 목마름으로 기다린 것은 당연지사. 이에 대해 존 본 조비는 "이 음반은 팬들이 오랫동안 리퀘스트 해왔던 것이다. 우리를 위해서는 라이브 앨범이 필요하지 않다. 그러나 우리는 구세대와 신세대 그들을 위해 이것을 만들었다"고 말했다. 팬들의 사랑에 대한 보답으로 현장(現場) 사운드가 세상에 공개됐음을 알 수 있다. 음반은 1985년부터 올해까지 미국,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일본, 스위스, 영국, 남아프리카 등을 돌며 녹음한 곡들 중에서 최고의 소스만을 뽑아낸 14곡과 < Crush >의 수록곡 ‘One Wild Night’의 리믹스 버전을 담고 있다. 본 조비의 음악 여정을 가늠할 수 있는 다큐멘터리이다. 데뷔작의 ‘Runaway’, < 7800 Fahrenheit >의 ‘In and out of love’, < Slippery When Wet >의 ‘Livin’ on a prayer’, < New Jersey >의 ‘Bad medicine’, < Keep The Faith >의 ‘Keep the faith’, < These Days >의 ‘Something for the pain’, < Crush >의 ‘It’s my life’ 등 지금까지 발표한 앨범들에서 알짜배기만을 엄선했다. 또한 닐 영(Neil Young)의 ‘Rockin’ in the free world’와 밥 겔도프(Bob Geldof)의 ‘I don’t like mondays’를 리메이크한 것은 거장들에 대한 존경의 표시다. 특히 ‘I don’t like mondays’는 밥 겔도프가 직접 참여하여 존 본 조비와 번갈아 부르는 흐뭇한 광경을 연출하고 있다. 몇 년 전에 존 본 조비는 영국의 헤비메탈 전문지 < 케랑 >과 인터뷰를 한 적이 있다. 그는 시대의 음악 조류를 왜 받아들이지 않느냐는 기자의 가시 돋친 질문에 "나는 아직 뉴저지에 살고 있다"는 말로 답변을 대신했다. 그것은 자신들의 삶과 음악의 고향 뉴저지를 계속 고집하겠다는 뜻이다. 때론 변화가 필요하다. 분위기를 바꾸어 활력을 되찾고 새로운 감각을 받아들이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적절한 시점이 요구된다. 아무 때나 하면 위험스런 탈주의 모험밖에 안 된다. 본 조비 스스로도 지금은 그 때가 아니라고 믿고 있다. 그러기에 오직 한 길만을 걸어간다. 주위의 비판에 아랑곳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래서 그들은 아직 뉴저지에 살고 있다. 하지만 때가 되면 그들은 스스로 뉴저지를 떠날 것이다. 불혹이 아닌가. 팬들의 환호와 함께 메아리치던 ‘It’s my life’의 노랫말이 아직도 귓가를 뒤흔든다. ‘이게 나의 삶이에요/ 지금이 아니면 결코 있을 수 없는 겁니다/ 난 영원히 살수 없어요/ 나는 단지 내가 살아있는 동안의 삶을 원해요/ 나의 마음은 훤히 트인 고속도로 같아요/ 프랭크가 나의 길을 갔다고 말한 것처럼/ 나는 단지 내가 살아있는 동안의 삶을 원해요/ 이게 나의 삶이에요’
1958년 미국 펜실베이나 주 레딩 시에서 태어난 키스 헤링은 어린 나이에 이미 자신의 남다른 미술적 재능을 자각한다. 1978년 뉴욕으로 올라와 School of Visual Arts에 다니던 그는 디즈니 만화들, 그리고 피에르 알레친스키나 쟝 드뷔페같은 원초주의 작가들로부터 영향을 받아 단순한 외곽선으로 표현하는 자신의 스타일을 형성해 갔다. 당시 펑크와 뉴웨이브가 주도하던 도시문화에 경도된 그는 그래피티 아... 1958년 미국 펜실베이나 주 레딩 시에서 태어난 키스 헤링은 어린 나이에 이미 자신의 남다른 미술적 재능을 자각한다. 1978년 뉴욕으로 올라와 School of Visual Arts에 다니던 그는 디즈니 만화들, 그리고 피에르 알레친스키나 쟝 드뷔페같은 원초주의 작가들로부터 영향을 받아 단순한 외곽선으로 표현하는 자신의 스타일을 형성해 갔다. 당시 펑크와 뉴웨이브가 주도하던 도시문화에 경도된 그는 그래피티 아티스트들과 브레이크 댄서로 이루어진 힙합씬에 합류했고, 이후 자신의 작품에 뉴욕의 거리문화를 담아낸다.

열정이 가득한 뉴욕을 누구보다 사랑했고, 뉴욕의 거리와 슬럼가에서 창작활동을 했다. 이탈리아 기호학자이자 철학자인 움베르토 에코의 영향을 받아 언어의 해석과 의미 사이의 관계를 작품 속에 풀어 내고자 했으며, 이것은 그만의 구상적인 언어 기호인 하트, 아기, 개 등의 다양한 실루엣의 조합으로 구상화 됐다.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는 해링의 매혹적인 작품들은 1980년대 뉴욕을 풍미했던 펑크나 힙합, 브레이크 댄스 등과 같은 대중예술과 그 맥락을 같이 한다. 해링은 대중 계몽을 위한 예술적 신념을 지키기 위해 경찰의 감시를 피해 지하철에서까지 그림을 그렸다. 해링의 작품 속에는 생과 사, 사랑과 전쟁 등 인간사의 필수적인 주제들과 현대인의 삶 속 고통과 비극적 사건들을 아이들의 그림 같이 밝은 색채와 깜찍한 형체로 그렸다.

음반 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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