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위의 사람 김기석 목사의 묵상
빛바랜 일상의 길에서 순례자의 여정을 시작하자
길 위의 사람 김기석 목사는 ‘일상 속에 깃든 영원의 흔적을 발견하는 데 작은 창문의 구실을 하면 좋겠다’고 말한다. 길을 찾으려 책 속으로 저벅저벅 걸어갔다가, 도리어 길을 잃고 헤매는 현대인들에게 이 책은 저자의 말처럼 ‘작은 창문’이 되기에 충분하다. 동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라면 한번쯤 멈춰 들여다보아야 할 일상의 장면들을 통해 저자는 삶의 빛 되시는 근원으로 다가가게 한다. 신학과 문학을 오가며 자기만의 색채로 어우러진 수십 편의 글들에는 절로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흡인력이 있다. 책을 읽는 내내, 엠마오 길을 가던 제자들처럼 저자와 일상 순례의 길을 걸으며 글로 못다 한 믿음의 이야기들을 더 듣고 싶어진다. 다큐 사진작가 이요셉의 따뜻하고 깊이 있는 사진이 더해져 순례의 길은 더욱 풍성하고 의미 있는 여정이 될 것이다.
[이 책은]
지성의 사치와 향방 없는 교양이 기승을 부리는 이즈음, 저자의 글에는 머리가 아닌 삶에서 배운우리의 투박한 일상이 있고, 순례자로 걸어가려 애쓰는 결연한 믿음이 보인다. 그 애씀과 질박함은 때로 사회 문제를 향한 뜨거운 청춘으로, 불의를 향해 노하셨던 예수님 닮으려는 성직자의 모습으로, 어린아이를 보며 기쁨을 맘껏 느끼는 피조물의 얼굴로 다가온다. 무엇보다 저자의 글이 울림으로 남는 건, 하늘 아래 고개 숙이며 걷는 순례자의 자각을 잃지 않고 시종일관 유지한다는 사실이다.
고단하고 울퉁불퉁한 일상의 날들이 어떻게 순례의 길이 되는지 저자와 함께 책 속으로 걸어가 보라. 거기 어디쯤 당신을 기다리는 신의 손길을 만날 것이다. 일상의 먼지 털어내고 신발끈 고쳐매며 당신도 어느새 순례의 길을 걷고 있을 것이다.
[타깃 독자 & 독자의 유익]
- 생존과 생업 등 고단한 일상에서 점점 신앙을 잃고 내적 공황을 맞는 현대인.
- 삶과 신앙의 괴리로 고민하며 해답을 찾기 원하는 평신도.
- 정치, 사회적, 종교적 현안에서 어떻게 성경적 가치관을 적용해야 하는지 모르는 청년
- 교회와 복음에 대해 관심은 있으나 전도가 되지 않는 비신자에게 부담 없는 선물용.
- 인문학적 소양과 복음적 가치관을 바탕으로 교회와 신, 종교 등에 대해 다룬 교양 도서.
[서문] 순례의 길을 시작하며
추녀 끝에서 떨어지는 물방울로 인해 생긴 댓돌의 구멍을 바라보며, 시간의 신비에 대해 생각하던 어린 시절이 있었다. 시간은 그 댓돌에 상처로 새겨져 있었다. 눈에 보이지도 않고, 냄새를 맡을 수도 없는 시간은 어디에나 흔적을 남긴다. 우중충한 벽에 생기를 불어넣으려고 화가들이 그린 벽화를 본다. 뚜렷하던 색채와 형태는 시간이 흐르면서 흐릿해지기 시작하고, 그 흐릿해진 형상들로 인해 삶의 무상함이 더 도드라지게 부각되기도 한다.
마을 한켠에 있는 공터에 의자를 내다 놓고 앉아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우두커니 바라보고 있는 노인을 본다.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얼굴, 무표정에 가까운 그 얼굴 속에 깃든 시간을 가늠해 본다. 얼마나 많은 기쁨과 슬픔이 저 얼굴을 스쳐 지나갔을까? 속에 있는 기운을 주체하지 못해 연신 겅중거리는 아이 옆으로 지팡이에 의지해 걷는 노인이 보인다. 시간의 보폭은 일정하지 않은 듯 보인다. 엉뚱하게도, 바닷물이 짠 까닭은 수많은 사람들의 눈물이 흘러 들어갔기 때문이라는 말을 떠올리며 한숨을 짓는다.
가끔 묻는다. ‘나는 왜 없지 않고 있는가?’ 모든 것은 ‘있음’에서 비롯되었다. ‘누군가로부터 보냄을 받은 것’으로 인식하든 ‘세상에 내동댕이쳐진 것’으로 인식하든 삶은 여전히 낯설다. 살아온 햇수가 많다고 하여 시간이 더 익숙해지는 것은 아니다. 무심한 듯 여울져 흐르는 시간은 우리의 몸과 마음에 무늬를 만든다. 기억과 망각이 양화와 음화처럼 뒤섞인 기묘한 무늬. 사람들은 그 무늬에 이름을 붙인다. 기쁨, 슬픔, 행운, 불행, 달콤함, 쓰라림, 희망, 절망…. 시간은 그 무늬 가운데 어떤 것은 돋을새김으로 더 뚜렷하게, 어떤 것은 스러지게 만든다.
글을 쓰는 것은 시간이 우리 속에 새겨 놓은 무늬를 글로 번역하는 과정이다. 장르에 관계없이 글 쓰는 모든 행위는 망각에 대한 저항이다. 소멸이 예정된 무늬를 굳이 되살리는 게 허영처럼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허영조차 없었다면 문명도 없었을 것이다. 지도조차 없이 걸어가야 하는 인생길에서 가끔 누군가의 글이 길잡이 구실을 해 줄 때도 있다. 시간이 새겨 놓은 무늬는 개인에게 속한 것이지만, 시간의 무늬를 기록하는 일은 공적인 직무에 속한다. 그 무늬는 그 시대의 총체상을 구성하는 데 필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꽤 오랫동안 이런저런 신문과 잡지에 글을 써 왔다. 글을 쓸 때마다 무시간적인 진리를 드러내려 한 적은 한 번도 없다. 그럴 능력도, 그럴 필요도 없었다. 누구를 가르치거나 교화시키려는 목표는 애당초에 없었다. 당시의 상황이 내 영혼에 어떤 공명을 일으켰는지를 기록하고 싶었을 뿐이다. 글쓰기는 시간 여행자인 내가 잠시 머물고 있는 그 시대와 어떻게 만났는지를 돌아보려는 시도였다. 삶을 순례로 이해하는 내게 일상의 모든 순간은 벗어나야 할 질곡이 아니라, 나를 하나의 중심으로 이끄는 계기이다.
젊은 시절, 리처드 바크의 《갈매기의 꿈》을 읽으며 하구에 몰려들어 썩은 생선을 다투는 갈매기 떼를 마음속으로 경멸했었다. 높이 빨리 나는 일에만 몰두하던 갈매기 조나단 리빙스턴의 고독한 모습에 나 자신을 투사하곤 했다. 지금도 나는 여전히 그에게 끌리지만, 더 이상 하구에 몰려드는 갈매기 떼를 경멸하지 않는다. 아니, 감히 경멸할 수 없다. 먹고 사는 일과 주어진 시간을 살아 내는 일의 엄정함을 조금은 이해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하여 현실에 투항한 채 되는 대로 살고 싶지는 않다. 창문을 열어 환기를 하듯, 후텁지근한 일상 속에 영원을 모셔들일 수는 없을까? 오직 그 꿈 하나이다.
《일상 순례자》는 몇 해 전에 이미 출간되었던 적이 있다. 출판사가 모기업의 구조조정 여파 속에서 문을 닫는 바람에 이 책도 절판의 운명을 맞았었다. 아쉬워하는 이들이 있었지만 굳이 되살릴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것도 이 책의 운명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두란노에서 이 책을 다시 내고 싶다는 제안을 해 왔다. 망설였지만 결국 그 제안을 받아들인 것은 이 또한 이 책의 운명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책의 구성과 함께, 책 속에 들어갔던 그림을 사진으로 바꾸고 디자인도 바꾸지만 제목을 ‘일상 순례자’로 유지한 것은 독자들에게 혼돈을 주지 않기 위해서이다. 책을 새롭게 꾸며준 편집진과 사진의 사용을 허락해 준 이요셉 선생께 감사드린다.
글을 가리켜 편지를 병에 담아 바다에 띄우는 행위에 빗대 설명한 이가 있다. 이 책에 담긴 이야기가 누구를 향해 흘러갈지 모르겠다. 이 남루한 글이 일상 속에 깃든 영원의 흔적을 발견하는 데 작은 창문의 구실을 할 수 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