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과 피를 동시에 철철 흘리는 ‘온몸의 마임’
내가 말할 수 없는 것을 끝내 내가 말하지 못할 때까지…
규정되지 않고 불확정적인 것들을 노래하는 시인. 다양한 상황의 시적 재현에 공들이는, 철저하게 개별화된 시적 담론을 추구하며 시단의 한 그룹을 형성한 시인 김이듬. “육체의 감각 밑에서 시를 발굴”했던 첫 시집과 “도저하고 명랑한 자의식의 세계”를 보여주었던 두번째 시집을 거쳐, 그녀의 세번째 시집 『말할 수 없는 애인』이 독자들을 찾아왔다.
2007년 말 출간된 전작 『명랑하라 팜 파탈』에서 김이듬 시인이 들려주었던 세이렌의 노래를 독자들은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이리 따라와 넘어와 봐”(「세이렌의 노래」, 『명랑하라 팜 파탈』)라는 표현처럼 치명적인 월경으로 유혹했던 시인은 이 세상에 없던 불길한 세이렌의 시간 속으로 듣는 자를 인도했었다. 그리고 이 ‘팜 파탈-세이렌’의 ‘명랑’은 고통을 다른 쾌락으로 만드는 시적 체위로써, 시인이 가진 시적 에너지를 여실히 드러내었다. 그리하여 당시 문학평론가 이광호 씨가 쓴 해설은 이렇게 끝을 맺었다. “세이렌이여, 그 한없는 몽유, 혼몽의 시간 속에서 명랑하라. 영원히 유령처럼 놀아라.”
“마음껏 메마르고 신나게 어두워지리라. 흥청망청 삶을 다 사용할 테다”(시인의 산문, 『명랑하라 팜 파탈』). 김이듬 시인의 ‘명랑’, ‘유령처럼’ 노는 방식은 어쩌면 이런 것인지도 모른다. “마음껏 메마르고 신나게 어두워”진 그 자리에서, 시인은 “삐걱거리는 책상, 치고받는 부모와 우는 계집애, 그치지 않는 빗소리, 무기가 된 내 걸상과 찢어진 얼굴, 내가 죽인 애인들의 빛나는 얼굴, 쓰레기와 오물, 면사무소와 읍사무소와 포도청을 향하는 진흙길, 떡이 된 고양이, 도주하는 자와 사로잡힌 자와 도피하려는 자와 친구 없는 친구들의 막다른 골목. 입구에서부터 달려와 내 몸을 푹 쑤시고 마구 애무하다 사라진 이 모든 것들의 뿔, 얼핏 번쩍했던 순간 뒤의 칠흑, 진흙처럼 흘러내리던 시간”(시인의 산문, 『말할 수 없는 애인』)을 만났으리라. 그리고 이것들은 오롯이 시가 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시인이 한 말이 아니라고 이번 시집 『말할 수 없는 애인』은 이야기하는 듯하다.
“그럴듯하고 좀더 감동시키고 슬프게 하는 말”을 찾는 시인에게 애인이 말한다. “이제 내가 네 몸에 뭐라 쓰는지/숨을 몰아쉬고 받아 적어”(「지방의 대필 작가」). 이처럼, 『말할 수 없는 애인』에서 독자들은 ‘말’이 아니라 ‘몸짓’을 목격하게 된다. 그렇다면 시인은 왜 “말할 수 없는” 것들을 ‘몸짓(마임)’으로 시연하는 것일까. 『명랑하라 팜 파탈』의 해설에서 이광호는 김이듬의 시에서 상징질서 내부의 주체화를 거부하는 혼종적 주체인 화자와, 온갖 대립적 경계가 갖는 상징적 권위를 혼란으로 몰아가는 언어에 주목했다. 이것은 시인의 시에서 여전히 현재진행형이지만, 『말할 수 없는 애인』은 거기서 더 나아가 “타고난 발성 우리의 언어”를 살고자 한다. 그렇기에 구렁텅이 삶조차 구원일 수 있다고 시인은 열연하고 있는 것이다.
“언제나 자격 미달 함량 초과 안전도가 미심쩍은 우리”이기에 “타고난 발성”(「삼월은 붉은 구렁을」)은 우리를 규정짓는 이들에 의해 언제 입이 봉해지고 목청이 제거될지 알 수 없다. 그녀가 온몸으로 ‘마임’을 펼쳐 보이는 이유가 그것이다.
“최선을 다해 빛나지 않으려고 애쓰는 빛나는 것들의 심정”(시인의 산문, 『명랑하라 팜파탈』)을 더듬어보았던 시인은 이제, 몸부림을 치며, 온몸으로 쓰고 또 쓸 것이다. 여전히 빛나지 않는 것들과 함께. 그들의 말할 수 없는 빛남에 대하여. 그것을 끝내 말하지 못할 때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