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 하나의 시인이 써내려간 무의식의 자서전,
그 사랑 노래
1998년, 성기완의 첫 시집 『쇼핑 갔다 오십니까?』에서 그의 시를 보들레르에 빗대었던 김진하는 시집의 해설을 이렇게 시작한다.
“성기완의 시는 실험적이다.”
그 후 5년 뒤인 2003년, 두번째 시집 『유리 이야기』에서 이야기를 부정하기 위한 이야기로서의 시라고 그의 시집을 평한 문학평론가 김태환은 묻는다.
“시집이라는 장르로 출간된 이 책은 과연 시집인가?”
두 권의 시집을 통해 한국 현대시에서 예외적인 시적 에너지와 혼성적인 언어의 세계를 제출했던 성기완. 언어에 대한 끊임없는 실험, 형식에 대한 철저한 부정으로 그는 한국 현대시의 가능성과 그 자장을 넓혀왔다. 그것은 제도화된 시 언어에 대한 외부로부터의 테러였다. 그리고 2008년. 또 한번 성기완이 변이의 언술들을 쏟아낸다. 그런데 이 시적 테러리스트가 조준하고 있는 곳이 전과 사뭇 다르다. 외부로부터의 테러가 이제 내부로부터 시작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다시 5년 만에 찾아온, 성기완의 세번째 시집 『당신의 텍스트』에서 문학평론가 이광호는 말한다.
“그가 ‘사랑’이라니?”
사랑의 텍스트
“모든 시인은 하납니다.
모든 시는 무의식의 자서전입니다.”
이번 시집 뒤표지에 씌인 ‘시인의 산문’ 마지막 구절이다. 시를 쓰는 시인으로 성기완 역시, 당연히 ‘모든’에 속해 있다. 그렇다면 무의식은 어떻게 씌어지는가? 시인의 무의식엔 무엇이 자리하는가? 무의식의 시간은 무엇으로 기록되는가?
성기완이 이번 시집에서 끊임없이 말하고 있는바, 그것은 ‘사랑’이다. 이 시집의 해설에서 이광호가 의아해했던 바로 그 ‘사랑’은, 위와 같은 의미에서 성기완이 말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시인이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성기완의 ‘사랑’은 분명 다르다.
“그는 사랑과 연애를 둘러싼 담론들의 저 끔찍한 상투성을 뚫고, 또 하나의 이질적이고도 하드코어적인 사랑의 담화를 풀어놓는다”는 이광호의 해설을 빌려, 이번 시집에 드러난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면 이렇다.
그가 그리는 사랑은 때로는 가볍고(「이불솜 틀어드립니다」) 때로는 불가능해 보인다(「세상에! 보고픈 당신」). 그런가 하면 생리 중인 ‘너’와 함께하는 사랑의 칼부림 속에서 피범벅으로 좋아 죽기도(「해피 뉴 이어 2」) 한다. 또 한편으로는 노골적으로 드러낸 성적 욕망이 사랑의 균열로써 드러난다. 그러나 무엇보다 이 시집에 드러난 ‘사랑’의 특징은 그것이 텍스트의 사건이라는 것에 있다. 시에서 드러난 ‘당신’ 역시 하나의 텍스트이며, 이별 혹은 사랑은 다만 텍스트의 텍스트이다. 이 무한 텍스트의 세계에서 아무도 ‘당신’의 직접성, 사랑의 직접성에 가닿지 못한다. 다만 텍스트 안에서 사랑하고 욕망하고 이별한다. 그러나 이 텍스트의 사랑은 가능·불가능의 문제가 아니라, 사랑을 사는 것의 문제이다. 사랑이 텍스트의 텍스트라면 사랑을 사는 것은 사랑이라는 리듬을 사는 것. 이 피 흘리는 사랑의 텍스트는 이제 의미의 차원이 아니라, 날카로운 음악의 차원이 된다.
결국 시인의 무의식을 흐르는 시간의 기록은 하나의 끔찍하도록 아름다운 사랑의 텍스트를 완성했다. 그리고 그 텍스트는 사랑의 소리들을 재배치하는 음악의 차원으로 흐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