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체를 띤 세상 모든 것들에 가해지는
무한, 생생, 발랄 시적 상상의 힘!
언제까지고 떨림이 그치지 않는 “만개한 적막”의 세계
황인숙의 시세계로 들어가는 길목에서 마주치는 안내문구. 지난한 생의 절망과 비의를 곱씹되 가볍고 살가운 이른바 ‘황인숙풍 언어’로 슬쩍 띄워 품어줄 것. 지상 위 생명들에게 약동하는 상상력의 활기를 불어넣어줄 것. 줄어들지 않는 탄성으로 지표에 붙박인 의식을 팽팽히 조일 것. 대개 이런 자장 안에서 읽혀온 황인숙 시인이 여섯번째 시집 『리스본行 야간열차』(문학과지성사, 2007)를 출간했다. 직전의 시집 『자명한 산책』(2003) 이후 4년여 동안 발표한 시 가운데 총 57편을 가려 묶었다.
현실에 얽매이지 않는 전도적 상상력(오규원), 동적인 것과 정적인 것의 대립(김현), 독특한 탄력과 비상의 언어(정과리), 고통을 껴안음으로써 고통을 넘어서는 궁극적인 사랑의 방식(김진수)으로 설명돼온 황인숙의 시세계는 이번 시집에 이르러, 그 시적 ‘묘미와 깊이’가 큰 폭으로 확대되고 있다. 첫눈에 내용과 형식의 간결함이 도드라져 보이는 시집 『리스본行 야간열차』는 언어의 혼동, 목소리의 혼란 속 틈새의 발견이 사물이나 관계의 명징함을 깨우치는 것 이상으로 근사하고 의미 있는 작업임에 주목하게 한다. 이를테면 “이 세상 어디건/ 어느 쪽인가의 반대쪽”(「입장과 방향」)이란, 발설하기 무섭게 군내 나고 트림마저 비어져 나올 듯한 흔하디흔한 잠언 앞에서조차 부지불식간 고개를 끄덕이게 만드는 황인숙 시의 언어적 묘미와 정서적 깊이를 말하고 싶은 것이다. 이제 쉰 살 문턱을 넘는, 24년차 직업시인은 등딱지처럼 지고 가는 물리적 시간의 무게도 가뿐히 압축하고 지나쳐버리기 쉬운 순간의 기억을 올올히 새긴다. 단지 주어와 술어가 자리를 바꿔 앉거나 과감하게 생략되거나 건너뛴 그 자리에서 얄밉도록 짤막한 그러나 긴요한 시구를 뽑아내는 황인숙 시의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의 실체를 확인하는 찰나다.
이번 시집의 얼마쯤은 ‘오후 4시’의 몹시 피로한 시적화자가 차지한다. 또 얼마쯤은 구슬프고 서정적인 파두가, 고적함과 권태와 깊은 졸음이, 그리고 또 얼마쯤은 “세상의 모든 비탈”과 골목 어귀, 지붕 위를 거니는 사람과 고양이들이 제 목소리를 얻어 말한다. 이전 시집들에서 조연쯤에 그쳤던 이들은 시집 『리스본行 야간열차』에서 당당히 주연배우의 자리를 꿰차고 있다. 결국 겹겹이 쌓여가는 삶의 결을 읽어내는 작업일 텐데 여기서 시인은, 되돌리고, 되돌리고, 또 되돌려봐도(「repeat」) 구태의연하고 지리멸렬하게 계속되는 삶이란 것이 항의하듯, 신음하듯, 애소하듯, 혹은 누가 죽어가는 듯, 미치겠는 듯(「버지니아 울프」) 소리소리 지르다가도 이내 커다랗게 깔깔깔 웃어보이고(「웃음소리에 깨어나리라」), 대꾸하지 않아도 상심하지 않는 옹알거림으로, 투덜거림으로, 킬킬거림으로(「無言歌」) “그래, 이대로 이렇게 사는 거지, 뭐!” 하고(「여름 저녁」), “좋아, 이번이 아니라면 다음 생에는!”(「흐린 날」) 하고 ‘버럭’ 중얼거려보는 걸 거라고 얘기한다. “알 듯한 모르는 사람들과/ 모를 듯한 아는 사람들/ 그리고 전혀 모를 사람들”(「낮잠」). 세상은 어쩌면 딱 이만큼만 복잡할 뿐이다. 대단찮은 생이란 결국 이런 것이라고 말이다.
“속이 탁 트이도록/ 멍해지도록” 소리소리 지르며 달리고 난 후에 얻는 카타르시스 대신 왠지 모르게 가슴 한 편을 먹먹하게 하는 이번 시집이다. 그리고 “기억이 희미해진 뒤에도 오래도록/ […] 떠나지 못하고 서성인다/ 무언가 중요한 것을/ 잃어버린 듯한, 잊어버린 듯한”(「유령」) 그곳을 향해 시인의 마음이 낮게, 차분히 가라앉아 간다.
과거의 영화와 현재의 쇠락이 교묘하게 공존해 있는 대륙의 끝, 항구도시 리스본을 향해 달리는 야간열차에 실린 시인의 몸과 마음이 “눈 밑살에 주름이 쩌억” 가게 만든 “숙명이라는 말에는 기쁨이 없다”고 전하는 파두의 기타 선율을 타고 흐르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