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묘하고 신비한 그림자의 판각들
한국 현대 시에서 ‘여성적 시 쓰기’ ‘여성-몸으로 시 쓰기’의 날카로운 징후를 보여준 시인이 있다. ‘여성적 상상의 모험’이라는 전선을 따라 이동한 한국 현대시의 전위 속에서 시적 육체 내부의 불온한 다성성을 폭발시키며, 이 시인은 ‘여성 혹은 소녀의 몸의 상상력’으로 ‘물의 담화’와 ‘물의 드라마’를 생성한다는 평을 들었다. 그리고 3년이 지난 지금, 시인은 초현실적이고 환영적 이미지를 실재로 만들어내며 그림자를 육체적으로 수행하는 두번째 시집을 내놓는다.
한국의 여성시의 새로운 지형을 형성하고 있는 젊은 시인 신영배가 첫 시집 『기억이동장치』에 이어 두번째 시집 『오후 여섯 시에 나는 가장 길어진다』를 문학과지성사에서 펴냈다. 파란색의 첫 시집이 물의 이야기였다면 저녁 어스름을 닮은 색의 이번 시집은 그림자 이야기다. 오후 여섯 시, 길어진 그녀의 그림자를 따라가는 여정에 독자들을 초대한다.
첫 시집에서 문학평론가 이광호는 시인의 언술은 여성이라는 질환의 증상이자 증후, 그것에 대한 주술이자 여성적 몸의 상상적 모험이 체험하는 ‘환상 통로’의 기록이라고 밝힌 바 있다. 그것을 가능하게 한 것이 바로 물의 이미지였다. 그녀의 시에서 물은 끝없이 흘러 다니며 편재했다. 투명한 물에서 검은 물로, 갇힌 물에서 넘쳐나는 물과 증발하는 물로, 끊임없이 움직이는 물은 단지 비유의 대상이 아니라 언술 방식 그 자체였다. 여성적 시 쓰기의 다른 몸을 열었던 주술로서의 신영배 시는 “사라지는 시” 혹은 “시만 남고 내가 사라지는 시”로 향했다. 물이 ‘증발’한 그 자리에 그림자가 드리운다. 오후 여섯 시에 가장 길어진 모습으로.
이번 시집에서 그녀는 그림자-몸으로 실존한다. 이번 시집의 해설을 쓴 문학평론가 강계숙은 이러한 기이하고 독특한 변이가 형태 변화의 자유와 지각 방식의 자유 낳는다고 설파한다. 크기, 부피, 길이, 넒이, 윤곽, 농도 등 형태를 가늠하는 규칙, 기준, 한정, 틀에서 벗어나는 그림자는 기고, 흐르고, 떠다니고, 흔들리고, 들러붙고, 수시로 옮겨 다닌다. 하여 그것은 영원한 변화의 다른 이름인 것이며, 고정된 형식화를 거부하는 이러한 몰형식의 자유가 사물의 형상과 눈앞의 풍경을 뒤바꾼다는 것이다. 신영배의 시에서 빌딩 속에서 나무가 일어서고, 지평선 위로 새가 흐르고, 강이 날고, 머리카락이 닿으며, 때로 얼굴이 지표면 가까이 떠다니고, 연인의 하체는 강물에 빠지고, 뱀의 꼬리는 하염없이 길어지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림자-몸으로 감득한 외부의 형상은 주지와 상식, 전형이나 관습과 무관한, 방금 새로 태어난 세계이며, 여기에는 이것과 저것의 경계가 없고, 분별도 없고, 동화나 합일도 없고, 앞뒤나 위아래 구분 없이 서로의 일부로 붙었다 떨어지고, 각자에게 속했다 분리되고, 물리적 시공간을 잊은 채 떠돌기 때문인 것이다.
그녀의 시는 그림자의 온갖 모험의 기록이자 자기 감각과 형태의 한계를 넘어가는 예술적 자유의 도정이다. 예술적 자유란 언제나 그렇듯, 전통과 권위, 객관적 가치와 규범에 대한 전면적 부인이며, 비록 이해받지 못하는 고독의 수인(囚人)이 된다 할지라도 개성의 미적 산출은 단지 자기 기준을 따를 뿐이며 대체될 수 없는 유일무이함을 생명으로 한다는 원리의 실현이다. 넘치는 자유의 길을 따라 신영배의 언어가 부조하는 미묘(美妙)하고 신비한 그림자의 판각들은 기존의 형상과 감정의 틀을 최대한 흩뜨리고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형식화함으로써 예술이, 시가 누릴 수 있는 자유의 한 정점에 선다. _강계숙, 해설 「그녀, 그림자 되다」에서
그녀의 시집 앞에서 독자들은 이전에 없던 언어가 일어서는 사태 앞에 놓이게 된다. 혼란과 낯섦은 당연하다. 그러나 그림자마저도 덜어내려는 절대적 비움, 적어놓은 이야기 전부를 바람에 날리려는 절망의 순도, 다 내려놓았으니 다 가져가라는 버림의 극치…… 또 다른 극단에 서 있는 신영배 시인의 자유를 받아들인다면 그래서, 치명적이고, 서늘하게 아름다운 그녀의 시가 한 걸음 다가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