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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루노트 레이블 75주년 기념 음반 (The Best Of Blue Note Jaz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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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D

블루노트 레이블 75주년 기념 음반 (The Best Of Blue Note Jazz)

[ 2CD ]
Cassandra Wilson, Norah Jones, Erykah Badu, Gregory Porter 노래/Thelonious Monk 연주 외 20명 정보 더 보기/감추기 | Universal / Blue Note | 2014년 04월 24일 첫번째 구매리뷰를 남겨주세요. | 판매지수 1986 판매지수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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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루노트 레이블 75주년 기념 음반 (The Best Of Blue Note Jazz)

품목정보

품목정보
발매일 2014년 04월 24일
시간, 무게, 크기 220g

관련분류

이 상품의 이벤트 (1개)

음반소개

디스크

CD 1
  • 01 Summertime - Sidney Bechet Quintet
  • 02 ’Round About Midnight - Thelonious Monk
  • 03 A Night In Tunisia - Bud Powell
  • 04 Brownie Eyes - Clifford Brown
  • 05 Blue Train - John Coltrane
  • 06 Tune Up - Sonny Rollins
  • 07 Moanin’ - Art Blakey & The Jazz Messengers
  • 08 Cool Struttin’ - Sonny Clark
  • 09 Blues Walk - Lou Donaldson
  • 10 Somethin’ Else - Cannonball Adderley(feat. Miles Davis)
  • 11 ack At The Chicken Shack - Jimmy Smith
  • 12 Chitlins Con Carne - Kenny Burrell
CD 2
  • 01 The Sidewinder - Lee Morgan
  • 02 Speak No Evil - Wayne Shorter
  • 03 Maiden Voyage - Herbie Hancock
  • 04 Song For My Father - Horace Silver
  • 05 Black Byrd - Donald Byrd
  • 06 Cantaloop (Flip Fantasia) - US3
  • 07 Come On In My Kitchen - Cassandra Wilson
  • 08 Cold Cold Heart - Norah Jones
  • 09 Afro Blue - Robert Glasper(feat. Erykah Badu)
  • 10 Liquid Spirit - Gregory Porter

아티스트 소개 (25명)

노라 존스(Norah Jones)는 2003년 ‘올해의 앨범’을 비롯한 그래미의 본상 4개 부문 트로피를 모두 품에 안으며 21세기 재즈 보컬계의 뉴 프린세스로서 부동의 위치를 선점한 아티스트이다. 특유의 편안하면서도 관능적인 보이스와 탁월한 피아노 솜씨를 앞세워 재즈라는 마니아적 장르에 대중적 돌파구를 마련해 준 점으로 특히 평가 받는다. 또한 이미 주지하다시피그녀의 아버지가 비틀스의 시타 스승 라비 샹커(Ra... 노라 존스(Norah Jones)는 2003년 ‘올해의 앨범’을 비롯한 그래미의 본상 4개 부문 트로피를 모두 품에 안으며 21세기 재즈 보컬계의 뉴 프린세스로서 부동의 위치를 선점한 아티스트이다. 특유의 편안하면서도 관능적인 보이스와 탁월한 피아노 솜씨를 앞세워 재즈라는 마니아적 장르에 대중적 돌파구를 마련해 준 점으로 특히 평가 받는다. 또한 이미 주지하다시피그녀의 아버지가 비틀스의 시타 스승 라비 샹커(Ravi Shankar)라는 점도 지명도를 획득하는데 큰 힘이 됐다. 1979년 3월 30일 뉴욕에서 첫 울음보를 터뜨린 노라 존스는 어린 시절부터 빌리 홀리데이(Billie Holiday), 빌 에반스(Bill Evans) 등의 음악 세계에 심취하며 내공을 쌓아나갔다. 그가 재즈에 본격적으로 빨려 들어간 시기는 댈러스(Dallas)의 부커 티. 워싱톤 고등학교(Booker T. Washington High School)에 다니면서부터였다. 이 미래의 재즈 슈퍼 스타는 당시 고등 학생 신분으로 미국의 재즈 잡지 [다운 비트(Down Beat)]가 주관하는 시상식에서 ‘최우수 재즈 보컬리스트 상’을 1996년과 1997년에 2년 연속 제패하는 등, 천부적인 소질을 일찍부터 뽐냈다. 이후 피아노 전공으로 노스 텍사스 대학(North Texas University)에 진학, 음악의 기초 체력과 전문성을 함께 다져나갔던 그는 제시 해리스(Jesse Harris), 리 알렉산더(Lee Alexander), 댄 라이저(Dan Rieser) 등과 함께 자신의 그룹 왁스 포에틱(Wax Poetic)을 발족, 라이브 무대에 첫 발을 들여놓았다. 이렇듯 꾸준히 메이저 입성의 길을 닦아나갔던 노라 존스에게 절호의 찬스가 온 때는 2001년이었다. 2000년 제작했던 데모 테이프로 [블루 노트 레코즈(Blue Note Records)]로부터 오케이 사인을 받아내는데 성공했던 것. 동시에 그는 찰리 헌터(Charlie Hunter)의 앨범인 [Songs From The Analog Playground]에 참여하는 등, 다방면에서 음악적 경험치를 상승시켰다. 그리고 2002년 초, 노라 존스는 아레사 프랭클린(Aretha Franklin), 더스티 스프링필드(Dusty Springfield), 비지스(The Bee Gees) 등과 작업했던 전설적 프로듀서 아리프 마딘(Arif Mardin)의 주관 하에 완성한 처녀작 [Come Away With Me](2002)로 재즈의 글로벌리제이션을 일궈냈다. 작품은 오랜 기간 빌보드 차트에 머무르며 기어이 넘버 원을 따내는 등, 작년 한해 최고의 스테디셀러로 명성의 깃발을 휘날렸다. 현재까지 무려 400만장의 실적을 올렸고 그 여파는 그래미 제패 덕에 날이 갈수록 커지는 중이다. 모두 9.11 테러 이후 흉흉해진 미국인의 마음을 위무해준 따스한 톤의 목소리가 위력을 발휘한 때문이었다.
노래 : Erykah Badu (에리카 바두,Erica Abi Wright)
음악에 어떤 지배적 경향이 있으면 반드시 거기에 반(反)하는 이른바 대안의 흐름이 출현하게 된다. 음악가라면 절대로 주류의 히트 패턴에 맹목적으로 봉사하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이러한 ‘작용과 반작용’의 순환구조가 확립되어있지 않다면 그 곳에서 음악의 다양성을 기대하기란 불가능하다. 우리 음악의 파시즘적 획일화는 그만큼 어떤 주류의 작용을 거스르려고 하는 음악가와 수요층이 형성되지 못하는데서 비롯된다. 흑인음악으... 음악에 어떤 지배적 경향이 있으면 반드시 거기에 반(反)하는 이른바 대안의 흐름이 출현하게 된다. 음악가라면 절대로 주류의 히트 패턴에 맹목적으로 봉사하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이러한 ‘작용과 반작용’의 순환구조가 확립되어있지 않다면 그 곳에서 음악의 다양성을 기대하기란 불가능하다. 우리 음악의 파시즘적 획일화는 그만큼 어떤 주류의 작용을 거스르려고 하는 음악가와 수요층이 형성되지 못하는데서 비롯된다. 흑인음악으로 얘기하자면 지금의, 아니 지난 10년 동안의 메인스트림 음악 추세는 엄연히 랩과 힙합이다. 고전적 의미의 소울과 R&B가 보이즈 투 멘을 비롯한 보컬 그룹들, 휘트니 휴스턴을 위시한 디바들이 주도해 시장에서 신흥 힙합보다 더 높은 매출 그래프를 기록했는지는 몰라도 음악의 중심세력인 젊은이들은 힙합으로 쏠려갔다. 물론 두 진영은 흑인 형제들이라는 대명제 아래 충돌하지는 않았지만(반목은 익히 알려진 대로 오히려 힙합 내부에서 발발했다) 수요층은 ‘기성세대 대 청춘’이라는 세대 중심의 대치노선을 그었다. 큰 눈으로 보면 확실히 두 진영은 분리되어있다. 이 상황을 잘 읽어낸 아티스트라면 두 스타일 음악의 퓨전을 기하려는 욕구가 생겨날 수밖에 없다. 한쪽으로 쏠려버리면 본의 아니게 복고(復古) 아니면 추세에의 맹종, 둘 중 하나로 소속이 결정되어버리기 때문이다. 에리카 바두(Erykah Badu)의 음악의 지향과 핵심은 바로 여기서 출발한다. 음악종사자들과 평론가들은 에리카 바두를 거의 동시다발로 등장한 디안젤로(D''Angelo) 맥스웰(Maxwell) 토니 리치(Tony Rich) 등 흑인 솔로가수들과 묶어 ‘새로운 소울 동아리’(new soul clan) 아니면 ‘네오-소울 진영’으로 규정한다. 사실 1972년 미국 텍사스 달라스 태생인 바두는 디안젤로의 매니저인 케다르 메센버그가 픽업했고 디안젤로의 1996년 히트싱글 ‘Lady''의 여성 보컬도 바로 바두이다. 개성적 표현주의자들이라는 공유점이 초래한 이 집단화 덕분에 이들의 음악은 하나의 새 경향, 그러니까 사회적 의미의 흐름으로 무게가 얹혀지면서 해석되어 한동안 커다란 관심거리로 돌출했다. 사람들은 그러나 이 트렌드를 ‘힙합에 대한 대안’으로 간주해버린 감이 없지 않았다. 단지 전통적이고 기성세대 친화적인 소울의 연장선에서 조금 새로울 뿐이지 결과적으로 그 동맥은 ‘안티-힙합’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정확을 기한다면 뉴 소울은 힙합의 연장선상에서 소울의 필을 수용한 흐름이다. 결코 힙합을 배격하거나 역행하려는 것이 아니다. 에리카 바두는 말한다. “난 힙합문화라고 하는 문화 속에 있다. 사람들은 우-탱 클랜(Wu -Tang Clan)을 들으면 동시에 머리를 흔들어댄다. 우리도 같은 분위기다. 뭐랄까. 우린 우드스탁이다.” 그녀는 일각에서 자신을 ‘복고여왕’으로 치부하는 것에 대해 쌍심지를 켜면서 자신의 음악적 토대는 어디까지나 랩이라고 역설한다. 그녀의 1997년 충격적 데뷔작 < Baduizm >은 분명 전통 소울의 복고가 아닌 ‘소울의 재창조’에 의해 잉태된 산물이다. 음악을 들어보면 소울이기도 하지만 다름 아닌 힙합 분위기에서 소울이 진하게 전개된다. 말하자면 구(舊)소울과 신(新)힙합의 화학적 결합물이요, 생산적 절충이다. 결코 과거로의 퇴행이 아닌 노스탤지어를 수단으로 한 미래에의 전진, 이를테면 온고지신(溫故知新)인 셈이다. 새로움에 갈증을 느끼던 팬들과 평론가들은 앨범을 듣자마자 그 고감도 퓨전음악에 일대 쇼크를 받았다. < 롤링스톤 >은 심지어 “앨범 < Baduizm >은 슈퍼프로듀서 테디 라일리(Teddy Riley)가 거의 10년 전쯤에 뉴 잭 스윙을 창조한 이래 R&B 음악계에서 만들어진 가장 우수한 작품”이라고 극찬해마지 않았다. 시사주간지 < 타임 >의 평가는 그 이상이었다. ‘바두의 네오소울은 소울 재즈 블루스 그리고 힙합에서 끌어온 것이지만 그렇다고 무질서한 나열이 아니라 이 모든 장르들을 한데 묶은 명상적이고 서서히 타오르는 음악이다. 바두의 목소리는 자연의 경이(natural wonder)로서 한편으로 샤프하고 금속성을 갖고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 상처받고 슬픈 색조를 지녀 한 곡에서는 감정에 호소하다가도 다른 곡에서는 불평등을 힐난한다. 그녀는 팝에서 가장 스릴 넘치는 새 목소리의 주인공이다.’ 이 주간지는 연말 바두의 앨범을 그 해 최고의 앨범으로 선정했다. < Baduizm >은 평자들의 아낌없는 칭송과 더불어 대중적 성공도 쾌척했다. 앨범은 신인의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2위로 데뷔했으며 싱글 ‘On & on''은 빌보드 R&B 차트 정상을 밟은 뒤 팝 싱글차트에도 12위에 올랐다. 역시 평가가 좋았던 영국에서는 이 곡 외에 ‘Next lifetime''과 ‘Apple tree''도 싱글로 발표되었다. 이 외에도 ‘Other side of the game''과 어틀랜틱 스타(Atlantic Starr)의 1983년 곡을 리메이크한 ‘Touch a 4-leaf clover''는 싱글은 아니었지만 발군의 역량을 녹아낸 수작으로 평가받았다. 성공이 한참 불타오르던 순간에 발표된 < Live > 앨범도 나오자마자 앨범 차트 4위에 올랐다. < Baduizm >의 곡들과 히트웨이브(Heatwave)의 ‘Boogie nights'' 등 리메이크 버전이 라이브로 수록된 이 앨범에서 소울풀한 프리 스타일 래핑이 돋보이는 ‘Apple tree''는 그 유려함으로 환상의 극치를 이룬다. 상복도 쏟아져 이듬해 1998년 40회 그래미상에서는 ‘최우수 R&B 여가수’와 ‘최우수 R&B 앨범’부문을 수상했고 12회 소울 트레인 뮤직 어워즈에서는 ‘R&B 소울 싱글’ 등 후보에 오른 4개 부문 상을 모조리 받는 기염을 토했다. 앨범 하나로 단숨에 ‘이 시대의 아티스트’ 반열에 들어선 그녀가 학수고대된 두 번째 앨범을 들고 돌아온다. 그런데 2집 앨범 신드롬에 감염된 탓이었을까. 디안젤로가 5년이 흘러서야 신작을 냈듯 바두도 3년 반이 흘러서야 신보 소식을 전한 것이다. 분명 전작의 격찬과 대중적 성공이 몰고 온 엄청난 압박이었을 것이다. 그 증거가 계속 신보의 출시날짜가 연기되었다는 점이다. 올해 수 차례 나온다는 소식이 전해졌으나 그때마다 바두 측은 미완성과 보완을 이유로 당장 출반이 어렵다고 했고 가깝게는 9월19일에 공개된다고 했으나 다시 11월21일로 연기되었다(그러니까 아직 일반에 공개되지 않은 상태). 앨범 타이틀도 가을쯤에는 언론에 < Mama''s Gun >으로 발표되었으나 이후에는 다시 < The New Du >로 바뀌었다. 얼마나 최종마무리를 위해 고심을 거듭하고있는가를 말해준다. 이에 앞서 싱글 < Bag Lady >가 나왔다. 미국 흑인음악 팬들이 얼마나 기다렸는지 이 곡은 곧바로 빌보드 R&B 힙합 차트 정상에 올랐고 10월 3째 주 현재도 1위 자리를 지키고 있다. 더욱이 그 파죽지세로 단숨에 팝 싱글차트마저 성공적으로 공략, 당당 6위까지 치솟았다. 바두는 전작에서 톱10싱글을 기록하지 못했다. 싱글 하나로 벌써 ‘마법의 데뷔’를 재현하는데 성공한 것이다. 현재로 그녀에게 소포모어 징크스는 없을 듯 보인다. 노래는 묵직한 베이스와 코러스를 강조한, 재즈와 힙합 분위기의 소울이다. 전작의 연장선상에 있지만 좀더 액센트가 가해진 느낌이다. 자신의 음악에 맞춰 촛불을 켜고 향을 피워 무드를 고조시키는 것으로 유명한 바두의 공연은 이번 신곡의 경우는 그 외에 연한 불꽃도 터뜨려야 할 것 같다. 블루스 필과 애시드 재즈의 내음도 퍼져있지만 딱히 어떤 특정 스타일로 규정하기는 어렵다. 그냥 ‘에리카 바두 음악’이다. 사람들을 은은하게 홀려 종국에는 마법의 성으로 유인하는 듯한 흡인력은 다시금 ‘빌리 홀리데이(Billie Holiday)의 1990년대 버전’이라는 말을 회자시킬 것으로 보인다. 정작 자신은 “어머니가 즐겨들었던 스티비 원더, 마빈 게이, 샤카 칸, 데니스 윌리암스의 음악을 자궁에서부터 듣고 소울풀한 베이비가 되어서 나왔다”고 하지만 사람들은 무조건 빌리 홀리데이와 연결짓는다. 바두는 이러한 비교에도 동의한다. “나와 빌리 홀리데이의 공통점은 호른(horn)에 있다. 아마도 마찬가지 이유로 난 마일스 데이비스나 존 콜트레인을 좋아한다. 난 언제나 나의 목소리가 빌리 홀리데이가 그랬듯 트럼펫 소리처럼 나오도록 노력한다.” 그녀의 이번 < The New Du >도 다시 한번 마치 트럼펫과 같은 보이스의 향연을 제공할 것이다. 그것에 취해 사람들이 ‘바두주의(主義)’를 섬기는 양상도 마찬가지일 테고...
노래 : Gregory Porter (그레고리 포터)
풍부하고 중후한 목소리를 통해 마음을 달래주는 그레고리 포터! 매력적인 목소리 덕분에 제이미 칼럼, 디스클로저 등 수많은 아티스트와 콜라보를 했으며 비틀스의 노래 ‘let it be’를 통해 기타리스트 밀로쉬와도 작업했다. 2014 Grammy Awards - Best Jazz Vocal Album (Artist) 풍부하고 중후한 목소리를 통해 마음을 달래주는 그레고리 포터!
매력적인 목소리 덕분에 제이미 칼럼, 디스클로저 등 수많은 아티스트와 콜라보를 했으며 비틀스의 노래 ‘let it be’를 통해 기타리스트 밀로쉬와도 작업했다.

2014 Grammy Awards - Best Jazz Vocal Album (Artist)
연주 : Thelonious Monk (델로니어스 몽크)
재즈에 입문하려는 사람들이라면 반드시 듣고 연주해봐야 하는 스탠다드 ‘Round midnight’(1944)를 작곡자인 셀로니어스 몽크(이하 몽크)의 연주는 독특하다. 세련됨하고는 거리가 먼 그의 전위적인 건반 터치는 감상용 음악과 차원을 달리하며 피아노 연주 새로운 전형을 확립했다. 몽크의 연주는 투박하고 거칠다. 물 흐르는 듯한 유려하고 기분 좋은 선율과는 거리가 먼 그의 피아노 주법은 청중들을 당혹스럽게까지... 재즈에 입문하려는 사람들이라면 반드시 듣고 연주해봐야 하는 스탠다드 ‘Round midnight’(1944)를 작곡자인 셀로니어스 몽크(이하 몽크)의 연주는 독특하다. 세련됨하고는 거리가 먼 그의 전위적인 건반 터치는 감상용 음악과 차원을 달리하며 피아노 연주 새로운 전형을 확립했다. 몽크의 연주는 투박하고 거칠다. 물 흐르는 듯한 유려하고 기분 좋은 선율과는 거리가 먼 그의 피아노 주법은 청중들을 당혹스럽게까지 한다. 버드와 디지가 40년대 소개한 그 전위적이고 난해하다고 소문난 비밥이지만, 몽크가 제시한 그 난해함엔 비할 바가 못된다. 그만큼 몽크의 음악 세계는 비밥에서도 변방에 위치했다. 몽크의 연주는 청중들에게 인내심을 요구한다. 그의 연주엔 자지러질 만한 고난이의 테크닉으로 점철된 연주가 아닌, 자기 나름의 공식에 기반해 한가지 연주 주제를 다양한 리듬 패턴과 화성으로 조합해내는 펼쳐내는 독창적인 것이었다. 이런 독특한 음악성 때문에 대중들은 말할 것도 없고 그의 독특한 음악세계를 몰라주던 당시 연주인들에게까지 그는 냉대를 당한다. 버드나 디지가 선보였던 화려한 기교와 초스피드로 무장한 비밥 연주에 흥분했던 청중들은 몽크의 음악을 이해하기 위해선 기다림을 필요로 했다. 난수표처럼 얽힌 그의 연주는 얼른 들어서 감이 오지 않지만, 씹을수록 맛이 우러나는 그의 음악성은 비밥의 또 다른 모델이다. 1947년 30세 나이에 발표한 < Genius Of Modern Music Vol.1,2 >을 통해 자신의 스타일을 제시한 몽크는 향후 25년 동안 데뷔 때 보여준 스타일을 견지하며 재즈 계에서 ‘가장 독창적인 연주 패턴’을 지닌 인물들 중 한 사람으로 기억된다. 절모가 잘 어울리는 몽크는 1917년 태어나 5살때부터 피아노를 치기 시작한다. 뉴욕에서 보낸 유년시절동안, 20년대 할렘 스트라이드(Harlem Stride) 주법의 일인자 제임스 P. 존슨(James P. Johnson)의 음악을 늘 끼고 살며(제임스 P. Johnson은 그의 이웃이었다) 이를 통해 자신의 독특한 주법을 확립해간다. 1940-1943년 비밥의 고향 민턴스 플레이 하우스에 입성, 연주의 내공을 다짐과 동시에 1942년 쿠티 윌리엄스 오케스트라에 합류하며 피아니스트로 활동한다. 평소 작곡에 재능 있던 그는 “Epistropy"(1942), 그리고 ” ‘Round midnight"(1944)를 밴드 멤버 자격으로 처음 녹음한다. 1945-54년까지 몽크에겐 ‘시련의 시간’이었다. 민턴스 플레이 하우스에서 알게 된 동료 버드와 디지와 함께 연주활동을 하지만 이상하리만큼 특이한 그의 피아노 주법에 다들 그를 ‘엉터리 피아니스트’로 여겼다. 비밥의 주역들에게까지 소위 ‘왕따’를 당한 그였지만 ‘끝내 이기리라’는 신념으로 블루노트와 프레스티지 레코드사를 통해 수많은 솔로 앨범을 발표했다. 화려한 프레이징 구사로 한층 주가를 올리고 있던 동료 버드 파웰(Bud Powell)과는 달리 그의 처음 10년은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고군분투 그 자체였다.(아이러니컬하게도 버드와 그는 둘도 없는 친구였다.) 1955년 리버사이드 레코드와 계약한 몽크는 새로운 도약을 준비한다. 듀크 엘링턴의 스탠다드를 연주한 < Plays Duke Ellington >을 시작으로 인지도를 모았고, 그 여세를 몰아 몽킅는 중기 걸작 < Brillant Corners >(1956)를 테너섹소폰에 소니 롤린스,드럼에 막스 로치가 참여해 발표한다. 이듬해 1957년 몽크는 마일스 데이비스 퀸텟에서 방출된 테너 섹소폰 주자 존 콜트레인(John Coltrane)과의 운명적인 만남을 갖는다. 몽크에게 ‘제2의 음악인생’을 열게 해준 둘의 만남은 비록 6개월의 짧은 기간이었지만 찰떡궁합으로 비견되는 둘의 독창적인 음악성은 그제서야 제대로 임자를 만난 셈이었다. 1957년 한 해 동안 몽크는 존과 함께 < John Coltrane& Thelonious Monk >, < Monk’s Mood >, < Thelonious Himself >와 같은 모던 재즈의 걸작들을 녹음한다. < Monk’s Mddd >의 수록곡 ’Monk’s mood’는 몽크를 음지에서의 재즈계의 주요 인사로 부상시켜줬고 존 콜트레인 역시 몽크와의 만남을 계기로 마약을 끊고 자신의 연주 스타일을 개발 해 나갈 수 있게 된다. 1962년 콜럼비아 레코드사와 계약하며 메이저로 진출, 1962-1968년 동안 자신의 쿼텟을 이끌며 재즈계의 유명인사로 군림하며 화려한 커리어를 일군다. 70년대 초엔 디지 길레스피가 조직한 프로젝트 재즈 자이언츠(Jazz Giants)의 멤버로도 활동하지만 1973년 갑작스러운 은퇴를 선언한다. 그리고 1982년 사망할 때까지 그는 철저히 은둔생활을 한다. ‘Round midnight’, ‘52nd street theme’, ‘Ruby my dear’ 등 그가 작곡한 수많은 재즈 스탠다드들은 지금까지도 젊은 재즈뮤지션들의 단골 연주 레퍼토리이다. 현역으로 활동하는 동안 자신의 스타일을 고집스럽게 지키며 이렇다할 슬럼프 없었던 올곧은 그의 음악여정은 후대에 갈수록 더욱 빛을 발한다. 데뷔 초기에는 비록 버드나 디지, 파웰이 누린 주목을 얻진 못했지만, ‘혁신과 실험’으로 대변되는 ‘비밥의 정신’에 그 만큼 부합되는 인물은 없을지도 모른다.
비밥 피아니스트 버드 파웰은 재즈 피아노 연주의 새로운 패턴을 확립한 인물이다. 20-30년대까지 재즈 피아노 연주의 주류를 이루던 스트라이드 주법(랙타임에서 유래)은 그로 인해 왼손의 역할은 줄어들고 오른손이 연출하는 고난이의 연주 기교가 더욱 중시된다. 왼손으로 ‘움파-움파’하는 식으로 리듬을 만들어 주던 초기재즈-스윙 시대의 피아노 연주는 그의 새로운 시도로 인해 왼손은 코드의 변화만을 집어주고 대신 오른손... 비밥 피아니스트 버드 파웰은 재즈 피아노 연주의 새로운 패턴을 확립한 인물이다. 20-30년대까지 재즈 피아노 연주의 주류를 이루던 스트라이드 주법(랙타임에서 유래)은 그로 인해 왼손의 역할은 줄어들고 오른손이 연출하는 고난이의 연주 기교가 더욱 중시된다. 왼손으로 ‘움파-움파’하는 식으로 리듬을 만들어 주던 초기재즈-스윙 시대의 피아노 연주는 그의 새로운 시도로 인해 왼손은 코드의 변화만을 집어주고 대신 오른손으로 현란한 즉흥성을 강화시킨다. 비밥의 혁명을 주도했던 젊은 흑인 뮤지션들은 연주 전체를 누가 리드하느냐의 상관없이 밴드내 연주자 개개인이 동등하게 주목받길 원했고, 이를 위해선 악기 각자가 보다 강화된 솔로 연주를 필요로 했다. 버드 파웰은 스윙시대까지 색스폰과 트럼펫이 주 선율을 담당하고 리듬과 선율을 동시에 책임지던 피아노의 위상을 좀 더 ‘선율’에 비중을 두면서 피아노 연주는 색스폰과 트럼펫처럼 우렁차게 부각될 수 있었다. 한 마디로 그는 재즈 피아노 연주 주법을 한껏 풍성하게 해준 인물이다. 또한 그는 피아노 트리오의 전형을 제시했다. 막스 로치(또는 로이 헤인즈)의 드럼, 토미 포터(토는 컬리 러셀)의 베이스로 구성된 그의 초기 트리오는 이후 등장할 재즈 트리오 연주 대중화의 시조 격이었다. 다시 말해 그가 없었다면 빌 에반스, 오스카 피터슨의 트리오 연주는 물론이고, 전 세계적인 호응을 얻었던 80-90년대 칙 코리아와 키스 자렛의 트리오 연주 또한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의 전성기는 그러나 비밥의 출현이 있던 1945년부터 1950년대 중반까지로 다소 짧았다. 비밥 시대의 재즈 피아노 연주의 혁신자이자 동료였던 셀로니어스 몽크보다 초기엔 주목을 많이 받았지만, 상습적인 마약 복용과 정신병까지 겹쳐 이후 지속적인 활동을 펼쳐 보이지 못하고 40대 초에 세상을 등지고 만다. 1924년 뉴욕 태생인 파웰은 이미 10살 때 팻츠 월러와 아트 테이텀의 곡들을 연주할 수 있는 신동이었다. 열 여덟 살이 되던 해 선배였던 몽크의 주선으로 민턴스 플레이 하우스에서 찰리 파커, 찰리 크리스찬과 함께 연주 하게된다. 또한 당시 몽크가 몸담고 있었던 쿠티 윌리엄스 오케스트라에서도 참여하고, 찰리 파커와 디지 길레스피 콤비와 함께 1945-1947년까지 한솥밥을 먹는다. 당시 그의 독창적인 피아노 주법은 수많은 비밥 아티스트들이 ‘같이 연주하고 싶은 피아니스트 1순위’로 그를 격상시켰고, 일약 그는 비밥 피아노 연주의 대가로 자리를 굳힌다. 그러나 파웰은 당시 마약 중독자였고, 술과 마약으로 인해 온갖 트러블을 일으킨 탓에 경찰서를 자기 집 드나들듯이 했다. 여기에 정신병까지 도져 그는 이후에도 황금 같은 젊은 시절은 마약-정신병원으로 허비한다. 정신병원 퇴원 후인 1949년 그의 실질적인 첫 솔로 앨범 < The Amazing Bud Powell Vol.1.2 >와 이듬해 < The Genious Bud powell >을 각각 블루 노트사와 버브사에서 발표한다. 이 두 앨범은 그의 초기 연주 스타일을 잘 집약한 대표작들로서, 몽크와 ’Misty’의 주인공 에롤 가너(Eroll Garner)를 제외한 수많은 재즈 피아니스트들이 비껴갈 수 없는 ‘재즈 피아노 연주의 고전’으로 자리 매김 한다. ‘Bouncing with bud’, ’Hallucination’, 몽크의 역작이기도 한 ’52nd street theme’, ‘Un poco loco’와 같은 곡만 들어봐도 그가 왜 비밥 피아노 연주의 대표격인지 알 수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의 전성기는 1953년에 정점에 다다르다가, 이후 잦은 마약 복용과 정신병원 신세로 급속하게 건강이 악화되면서 하향세로 급락했다. 1966년 세상을 뜰 때까지 지속적으로 활동을 펼쳤지만 비밥 초기의 예리함은 점점 무뎌만 져갔고, 사람들 뇌리 속에서도 잊혀져만 갔다. 프리 재즈 피아니스트 세실 테일러(Cecil Taylor)가 등장하기 전까지 파웰의 연주는 독보적이었다. 오른손의 자유자재로운 연주를 통해 그는 재즈 피아노 선율의 흥취를 배가시키며 재즈 피아노 연주의 위상을 한층 높여 놓는다. 버드 파웰의 피아노 연주는 비밥 피아노 연주자라면 반드시 넘어야 할 산과도 같은 존재였다.
연주 : Clifford Brown (클리포드 브라운 )
재즈 트럼펫 연주자 재즈 트럼펫 연주자
100년이 조금 넘는 재즈 역사 속엔 ‘연주의 감동’을 창조한 대가들이 존재한다. 재즈 즉흥 연주를 창조한 루이 암스트롱, 스윙을 통해 재즈를 일약 미국 주류 대중음악 반열에 올려놓은 듀크 엘링턴, 비밥으로 재즈를 예술적인 경지로 부상시킨 찰리 파커와 디지 길레스피, 쿨에서 출발해 모드를 거쳐 퓨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연주 스타일을 확립시킨 마일스 데이비스가 그들이다. 앞에 언급된 대가들에 이어 다시 한번 재즈사... 100년이 조금 넘는 재즈 역사 속엔 ‘연주의 감동’을 창조한 대가들이 존재한다. 재즈 즉흥 연주를 창조한 루이 암스트롱, 스윙을 통해 재즈를 일약 미국 주류 대중음악 반열에 올려놓은 듀크 엘링턴, 비밥으로 재즈를 예술적인 경지로 부상시킨 찰리 파커와 디지 길레스피, 쿨에서 출발해 모드를 거쳐 퓨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연주 스타일을 확립시킨 마일스 데이비스가 그들이다. 앞에 언급된 대가들에 이어 다시 한번 재즈사에 한 획을 그은 연주자가 있다. 바로 색소폰 주자 존 콜트레인(John Coltrane)이다. 1955년부터 마일스 데이비스 퀸텟의 멤버로 활동하며 주류 재즈계에 등장한 그는 1967년 세상을 떠날기까지 10여년이란 짧은 기간동안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연주의 경지를 제시했다. 대표작 < Giant Step >(1959)을 통해 존은 ‘쉬트 오브 사운드’ 즉, ‘음의 덩어리’란 연주 방법을 창안해 재즈계를 경악케 했다. 순간적으로 4옥타브를 넘나드는 엄청난 기복의 연주와 16분음, 32분음과 같은 미분음을 연속해서 내는 ‘쉬트 오브 사운드’는 기존 비밥 즉흥 연주의 한계를 넘어서는 획기적인 시도였다 . 기타 하나만으로도 완벽한 록 오케스트라를 창조한 지미 헨드릭스처럼 존 콜트레인은 색소폰을 통해 재즈가 펼칠 수 있는 연주의 가능성을 무한대로 넓혀 놓은 셈이다. 하지만 ‘파괴의 정서’로 대변되는 이런 그의 연주가 이토록 지금까지 추앙받는 데엔 혁신적인 연주 그 이상의 무엇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음악이 시대의 산물이란 말이 있듯, 존의 연주는 그가 한창 활동했던 1950년대 중반에서 60년대의 혼란했던 미국 사회, 그리고 흑인이 처한 현실을 반영한 결과물이었다. 존 콜트레인은 자신의 음악이 흑인 민권 운동과 관련이 있다고 얘기한 적은 없었지만 사람들을 날려보내는 듯한 가슴 후련한 연주는 자유를 갈망하는 흑인들의 아우성을 연상시켰다. 1963년 9월 15일 미국 알라바마 버밍험에 소재한 교회 내에서 백인 인종차별주의자들이 설치한 폭발물이 터져 흑인 소녀 4명의 목숨을 앗아간다. 이들의 장례식엔 음울한 장송곡 대신 밥 딜런의 ‘Blowin’ in the wind’와 샘 쿡의 ‘A change is gonna come’, 그리고 존 콜트레인의 ‘Alabama’가 그의 색소폰으로 연주되고 있었다. 존 콜트레인의 음악이 예술적인 영역에만 머물지 않고 당시 사회적 분위기와 밀접히 관련돼 있다는 증거이다. ‘Alabama’는 존 콜트레인이 당시 흑인들을 울분을 대변하는 의식 있는 아티스트라는 인상을 심어줬다. 신께 헌정하는 앨범 < Love Supureme >(1964)으로 존은 ’가장 영향력 있는 흑인 아티스트’ 반열에 오르며 말콤 엑스, 마틴 루터 킹 목사와 함께 흑인 대통령 후보자로까지 거론된다. 존 콜트레인은 음악을 정치적인 수단으로 활용하진 않았지만 재즈를 연주하는 모든 흑인, 그리고 존 콜트레인의 무의식 속엔 ‘재즈는 곧 흑인의 자부심’이란 가치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하드밥에서 시작해 프리 재즈로 뿌리내린 짧고 굵었던 음악 인생동안 그는 흑인만이 할 수 있는 연주의 영역을 부단히 개척했고 그 중심엔 가스펠, 다시 말해 흑인의 영혼인 블루스(Blues)가 멤돌고 있었다. 60년대 흑인들이 소울과 더불어 존 콜트레인의 연주에 애착을 갖는 건 블랙,즉 검은것의 자존심을 드높였다는 데에 있다. 1926년 9월 23일 노스캐롤라이나 햄릿에서 태어난 존 콜트레인은 음악적인 가정환경에서 자랄 수 있었다. 청소년시절 밴드부 클라리넷 연주를 배우며 당시 인기 상종가를 누리던 빅 밴드 리더 아티 쇼의 연주를 카피하며 재즈에 눈을 뜬다. 프로 뮤지션이 되기 위해 필라델피아로 이주한 존은 1943년 지역 스윙 밴드 단원으로 일하며 프로 세계에 진출한다. 오른스타인 음악학교에 입학해 정규 음악교육을 받게 된 존은 1945년 해군에 징집돼 군복무중 해병대 군악대 ‘멜로디 마스터’에 배치되었고 군을 재대하면서 얻은 수입으로 존은 필라델피아에 소재한 그라노프 스튜디오에서 현대 클래식 작곡가들의 수준 높은 음악을 접할 수 있게 된다. 1947년 군 재대 후 막 피어오르기 시작한 비밥 열풍에 동참하고 싶었던 존은 이때부터 테너 색소폰을 손에 쥐게 된다. 훗날 자신을 세상에 알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 트럼펫 연주자 마일스 데이비스를 만난 것도 이 무렵의 일이다. 1949년 9월, 존은 비밥의 명인 디지 길레스피 빅밴드에 들어가게 된다. 주류 무대에 도약할 기회를 얻은 그는 다른 명연주자의 스타일을 습득하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한다. 특히 찰리 파커의 색소폰 연주는 그야말로 산 교과서였다. 존은 버드의 연주에 완전히 흡수돼 그처럼 연주할 수 있게 되는 것이 목표였던 셈이다. 50년대 들어 경기는 호황이었지만 비밥 연주를 하는 흑인 재즈 뮤지션들의 생활은 어려웠다. 대중들은 캡 칼로우 웨이나 빅 조 터너의 알 앤 비 사운드나 프랭크 시나트라와 딘 마틴의 스탠다드 팝에 경도돼 흑인 비밥 뮤지션들이 설 자리를 빼앗아 갔다. 비밥을 연주할 공간을 찾기가 어렵게 된 것이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재즈의 명인들이 헤로인으로 하나 둘 무너져가기 시작했다. 찰리 파커는 이미 마약 중독이 위험수위에 올랐고 ‘쿨의 탄생’으로 비밥의 새로운 스타일을 제시했던 마일스 데이비스도 기대 이하의 씁쓸한 반응을 삼키며 헤로인에 빠져 들고 있었다. 당시 인기를 누리던 알 앤 비 밴드였던 조니 호지스 밴드 투어에 합류해 비교적 탄탄대로를 걷고 있던 존 콜트레인도 결국 얼마 못가 헤로인에 유혹에 빠져들고 만다. 색소폰을 손에 들고 있는 것조차 힘들게 된 존 콜트레인은 결국 1952년 조니 호지스 밴드에서 해고당하고 만다. 다시 3여년의 긴 내공 끝에 존 콜트레인에게 재기의 기회를 가져다 준건 다름 아닌 마일스 데이비스였다. 8년 전의 인연으로 존은 마일스가 조직한 퀸텟의 테너 색소폰 주자로 발탁돼 1955년 메이저 레이블인 콜럼비아 레코드사에서 첫 앨범 < ’Round Midnight > 녹음에 참여한다. 마일스는 차분하고 부유하는 듯한 자신의 트럼펫 소리와 충돌해 긴장감을 조성해 줄 색소폰 연주를 찾았고 마침 활화산 같이 폭발적인 솔로를 구사하는 존 콜트레인 색소폰이 그 역할을 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1956년 한 해 동안 마일스 데이비스 퀸텟 멤버 자격으로 존 콜트레인은 < Workin’ >, < Steamin’ >, < Cookin’ >, < Relaxin’ > 과 같은 하드 밥 명반들을 프레스티지(Prestige)를 통해 연이어 발표한다. 마일스와 만나기 전까진 재즈계에서 무명이었던 존 콜트레인은 마일스 데이비스 퀸텟 멤버로 활동하며 명실상부 주류 음악 무대에 안착하는데 성공한다. 이런 성공에 반해 헤로인 중독은 여전히 먹구름처럼 그를 괴롭혔다. 거기다 단정하지 못한 옷차림과 툭하면 연주 시간에 늦는 그의 불규칙한 생활로 퀸텟의 팀웍에 금이 가기 일쑤였다. 결국 리더인 마일스와의 심한 다툼 끝에 1956년 말, 존은 퀸텟에서 해고당하고 만다. 졸지에 일자리를 잃어버린 존은 그러나 평소 그의 음악성을 높이 평가해오던 기인 피아니스트 델로니어스 몽크의 선처에 힘입어 그의 밴드 멤버로 활동할 수 있게 된다. 존은 몽크와의 협연으로 리버사이드 레이블을 통해 총 4장의 앨범을 발표하는데, < Thelonious Monk with John Coltrane >, < Thelonious himself >, < Monks Mood >, < Live at the five spot >이 그것들이다. 절제되고 명료한 톤의 연주를 선호했던 마일스와 달리 현란하고 다소 정돈되지 않은 듯한 스타일의 연주를 즐긴 몽크는 그야말로 존 콜트레인과 찰떡궁합이었다. 마일스와 존의 연주는 상극의 연주라면 몽크와 존의 연주는 상생하는 연주였던 셈이다. 몽크의 권유로 한번에 2-3개 음을 동시에 내는 연주기법도 이 때 등장한다. 둘의 협연은 6개월로 그쳤지만 몽크 덕분에 마일스는 자신의 스타일을 찾아갈 수 있게 된다. 재기의 의욕을 다진 존은 헤로인을 끊고 밴드를 결성해 독집 앨범을 준비해간다. 솔로 데뷔작인 < Coltrane >(1957)과 < Soul Trane >(1957)을 거쳐 초기 대표작으로 거론되는 < Blue Train >(1957)을 발표하며 존은 ‘하드밥의 새로운 거목’이란 기대를 한 몸에 받게 된다. 투박하고, 거칠지만 폭발적인 에너지가 넘치는 그의 연주는 청중들에게 강한 느낌을 심어주기 충분했다. 성공적인 솔로 데뷔에 있은 지 얼마 후 존은 다시 마일스로부터 밴드에 와 달라는 요청을 받게 된다. 존이 마일스에게 돌아왔을 땐 퀸텟이 아닌 섹스텟이 되어있었는데 알토 색소폰 주자 캐논볼 애덜리(Cannonball Adderly)가 함께 연주한다. 존이 섹스텟 멤버로 발표한 < Milestone >(1958)은 모달 재즈(Modal)의 원형을 제시하며 코드 중심의 연주가 아닌 스케일 중심의 연주, 다시 말해 화음이 중심이 아닌 선율이 중심이 되는 패턴으로 변화되는 과도기의 작품이었다. 전 재즈 역사에서 가장 빛나는 시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1959년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마일스 데이비스와 존 콜트레인이었다. 지금까지도 모던 재즈의 대표작으로 칭송되는 마일스 데이비스의 < Kind of Blue >와 존 콜트레인의 < Giant Step >이 탄생됐기 때문이다. < Kind of Blue >의 녹음의 참여한 존은 ‘So What’과 ’All Blues’에서 역사상 가장 빛나는 테너 색소폰 연주를 남긴다. < Kind of Blue >의 녹음이 끝난 직후 존은 어틀랜틱 레코드사에서 < Giant Step >을 녹음한다. 폴 체임버스, 토미 플라나간, 윈튼 켈리, 지미 콥, 아트 테일러가 참여한 앨범은 ‘소리의 신기원’을 제시했다. 테너 색소폰만 하나만으로 존은 한번에 여러 개의 음계를 넘나드는 초절기교를 선보인다. 당시 재즈 평론가 이안 기틀러는 이런 콜트레인의 사운드를 일컬어 ‘음의 덩어리’(Sheet of Sound)라 명명했다. 몽크와의 협연을 계기로 오랜 실험 끝에 빛을 본 존의 이 혁신적인 연주스타일은 재즈의 표현 영역을 한층 넓혔다는 평가와 함께 이후 등장할 많은 색소폰 연주자들이 넘어서야만 하는 절망(?)스런 과제를 남기게 된다. 이듬해 발표된 < My Favorite Thing >(1960)은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의 스코어를 담당하게 될 로저스와 해머스타인의 왈츠곡 ‘My favorite thing’을 비롯해 조지 거쉰의 ’summertime’등 좀더 대중적인 배려가 돋보인 앨범이다. 또한 존은 이때부터 묵직한 테너 색소폰 대신 부드러운 선율을 만드는 소프라노 색소폰을 사용한다. 존은 자신의 연주가 좀더 덜 서구적인 것으로 비쳐지길 원했고 아랍이나 동양권의 관악기(가령 우리나라의 태평소)와 흡사한 소리를 내는 소프라노 색소폰을 적극 연주에 포함시킨다. 1961년 마일스 데이비스 섹스텟을 나온 존 콜트레인은 자신의 정규 쿼텟을 조직한다. 이름하여 ‘존 콜트레인 클래식 쿼텟’으로 활동하게 되는 맥코이 타이너(피아노), 엘빈 존슨(드럼), 스티브 데이비스(베이스)는 이후 4년간 가장 왕성한 창작력을 과시하며 신생레이블이었던 임펄스!(Impulse!)를 통해 명연들을 남긴다. 콜트레인 쿼텟은 재즈에만 음악적 관심을 한정시키지 않고, 아프리카, 중동 등 3세계권 음악을 자신의 영향권에 뒀다. < Africa/brass >(1961)같은 앨범이 대표적인 예인데, 존은 당시 부상하고 있던 플릇/색소폰 연주자 에릭 돌피를 비롯해 11개의 브라스가 참여해 아프리카 토속리듬과 인도의 라가를 적극 도입했다. 이런 실험성 짙은 대작에 부담스러워 한 음반사는 존에게 좀 더 대중적인 재즈 연주 앨범을 만들어보길 권했고, 그 결과 나온 작품이 < Ballad >(1962)와 < Duke Ellington and John Coltrane >(1962)이다. < Ballad >에선 프랭크 시나트라가 노래로 유명한 ‘Nancy’가 < Duke Ellington with John Coltrane >에선 ‘In a sentimental mood’가 팬들의 사랑을 받았다. 혀를 내 두르게 하는 격정적인 색소폰 연주는 아니었지만 < Ballad >와 < Duke Ellington with John Coltrane >은 존 콜트레인의 다른 어떤 음반보다 인기를 얻었다. 당시 흑인 사회는 혼란 그 자체였다. 킹 목사가 주도한 흑인 민권운동은 1963년 극에 달했다. ‘버밍험의 전투’라고까지 인종차별 반대 시위는 그해 8월 킹 목사의 그 유명한 연설 ‘나에겐 꿈이 있습니다’가 나온 워싱턴 행진으로 이어졌다. 억압 속에 자유를 호소하는 노래였던 가스펠은 민권운동을 통해 감정 표현을 넘어서 흑인들의 유일한 무기가 되어 있었다. 우리나라에 아침 이슬과 6월 항쟁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 소울은 흑인 민중들의 강력한 저항 수단 이었다. 이런 분위기를 반영하듯 흑인 가수들이 목소리 높여 소울을 들고 나왔다. 존은 신께 경배하는 연주로 흑인 민중의 민심을 반영했다. < Love Supreme >(1964)은 존 콜트레인이 주류 재즈 뮤지션으론 처음 신께 헌정하는 연주였다. 총 4부의 구성으로 진행되는 연주는 흡사 흑인교회 대중 집회를 연상시키는 고양감으로 넘실거린다. 그의 정규 쿼텟 마지막 작품이기도 한 < Love Supreme >은 자유를 갈망하는 흑인들의 내면에 깊은 울림을 전해주며 소리 소문 없이 발매 1년 만에 50만장이란 판매고를 기록한다. 내면에서 부글거리는 존의 자유의지는 결국 프리 재즈로 향한다. 오넷 콜먼이란 젊은 색소폰 주자가 들고 나온 이 무형식의 전위 재즈는 재즈계 내에 상당한 파장을 일으켰고 존 콜트레인도 이에 관심을 갖게 된다. 이미 존 콜트레인은 오넷 콜먼과 함께 연주했던 트럼펫주자 돈 체리와 함께 앨범 < The Avant Garde >를 1959년에 녹음했지만 당시 존의 소속사였던 어틀랜틱 레코드사가 1966년이 돼서 발표하는 바람에 1년 앞선 < Ascension >(1965) 그의 첫 프리 신고식이 됐다. 무한자유로의 질주는 결국 프리 재즈의 광기로 이어졌다.소음과 흡사한 음을 한번도 쉬지 않고 40분 이상 해내는 연주자는 당시까진 존이 유일했다. < Giant Step >과 < Love Supreme >의 연주를 원했던 팬들은 이미 괴물이 돼 버린 존의 음악성에 실망하고 등을 돌렸다. 난해한 연주기교와 멜로디의 부재는 대중성을 외면한 결과가 된 셈이다. 이 당시 수시로 복통을 호소했던 존은 급기야 자신의 죽음을 예감했는지 더욱 창작에 열을 올렸고 1966년 녹음된 < Interstellar space >를 끝으로 존은 말기 간암판정을 받게 되고 급기야 1967년 7월 17일 4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다. 그의 죽음은 재즈계에 예기치 않은 공백을 가져온다. 모든 에너지를 연주에 쏟아 넣었던 탓에 그를 능가할 재즈 뮤지션은 찾아볼 수 없다는 게 주된 이유였다. 더 이상 도전적인 연주가 없다 생각한 재즈계는 심지어 존 콜트레인 사후 ‘재즈는 죽었다’ 란 소리가 나올 정도로 그의 공백은 재즈계에 엄청난 혼란을 야기했다. 이렇게 갈피를 못 잡던 재즈계는 한창 부상하던 록 음악 열풍에 밀려 자꾸만 청중을 잃어갔다. 이런 상황에 한 발짝 물러나 있던 마일스 데이비스는 재즈와 록의 이종교배로 탄생된‘재즈 록 퓨전(Jazz Rock Fusion)’ 을 들고 나와 잃었던 대중을 찾는데 성공했다. 이로서 재즈계는 존 콜트레인을 종점으로 하는 ‘메인스트림’과 마일스 데이비스를 선두로 하는 ‘퓨젼’으로 나뉜다.
연주 : Sonny Rollins (소니 롤린스,Walter Theodore Sonny Rollins)
재즈 테너 색소폰 연주자 재즈 테너 색소폰 연주자
연주 : Art Blakey (아트 블래키)
일평생 하드밥(Hard Bop)만을 고집한 재즈 드럼의 전설 가열찬 두드림으로 재즈의 혼을 전한 연주인 아트 블레이키는 영원한 하드밥 메신저였다. 아트 블레이키는 재즈에서 리듬 섹션의 역할을 한층 업그레이드 시키며 ‘재즈는 곧 리듬’임을 만방에 알렸다. 다양한 실험과 변신을 특징으로 하는 재즈계에서 아트 블레이키처럼 오로지 하드밥, 한 가지 스타일을 줄기차게 고집한 뮤지션도 드물다. 1954년 그의 퀸텟이 버드 ... 일평생 하드밥(Hard Bop)만을 고집한 재즈 드럼의 전설 가열찬 두드림으로 재즈의 혼을 전한 연주인 아트 블레이키는 영원한 하드밥 메신저였다. 아트 블레이키는 재즈에서 리듬 섹션의 역할을 한층 업그레이드 시키며 ‘재즈는 곧 리듬’임을 만방에 알렸다. 다양한 실험과 변신을 특징으로 하는 재즈계에서 아트 블레이키처럼 오로지 하드밥, 한 가지 스타일을 줄기차게 고집한 뮤지션도 드물다. 1954년 그의 퀸텟이 버드 랜드 클럽에서 녹음한 라이브 실황 앨범 < A night at birdland > 를 시작으로 1990년 사망 할 때까지 무려 36년 동안 재즈 메신저스의 수장자리를 지켜왔다. 찰리 파커가 들고 나온 비밥이 한층 다양한 리듬 패턴과 악기 편성으로 풍요롭게 발전된 하드 밥은 아트 블레이키의 남다른 뚝심에 힘입어 1950-60년대 화려하게 꽃 필수 있었다. 아트 블레이키에게 스윙은 재즈의 혼이고 그 스윙 리듬을 먹고 자라난 하드밥은 자신과 같은 흑인 재즈 뮤지션들의 자존심이었다. 비슷한 시기 자웅을 겨루었던 마일스 데이비스 사단과 함께 아트 블레이키는 자신의 밴드 재즈 메신저스를 통해 활동시기 내내 걸출한 하드밥뮤지션들을 배출해왔다. 피아노의 호레이스 실버와 키스 자렛, 트럼펫에 클리포드 브라운, 리 모건, 프레디 허바드, 색소폰에 베니 골슨, 행크 모블리, 웨인 쇼터, 그리고 현재까지도 최고의 재즈 뮤지션으로 각광받는 윈튼 마살리스, 브랜포드 마살리스, 척 맨지오니가 재즈 메신저스를 거쳐갔다. 그의 재즈 메신저스는 그야말로 재즈의 사관학교였던 셈이다. 1919년 미국 피츠버그에서 태어난 아트 블레이키는 처음엔 피아니스트가 되겠다고 마음을 먹었지만 지역 클럽에서 피아니스트로 활동 중 클럽 사장의 압박(?)으로 드럼으로 자신의 파트가 바뀌게 된다. 그가 연주 초년병 시절이던 1930-40년대, 스윙의 인기는 하늘을 찌르고 있었고 만인의 주목을 받았던 밴드 리더가 피아니스트나 클라리넷 주자였던 것에 비해 드럼은 비인기 파트 중 하나였다. 1943년 플레처 헨더슨 악단, 1944년 빌리 엑스타인 밴드에서 스윙 리듬을 연주한 아트는 엘라 핏 제럴드, 사라 본, 디지 길레스피, 찰리 파커와 같은 신세대 재즈 뮤지션들과 교류한다. 그리고 얼마 후 비밥이라는 신종 문법은 그에게 미지의 신대륙처럼 다가온다. 빌리 엑스타인 밴드가 해산되자 아트는 1946년, 17인조 리허설 밴드를 창단한다. 이듬해 밴드는 8인조의 그룹으로 재편되는데, 그의 밴드 이름인 ‘메신저스’는 바로 이때부터 사용된다. 해산과 재편을 거듭한 그의 밴드는 이렇다할 성과 없이 정체됐고 이내 이슬람교를 통해 정신적 위안을 얻으려 했던 아트는 이슬람 문화를 배우기 위해 1년간 아프리카엘 가게 되고 이름도 이슬람식 이름인 ‘압둘라 이븐 부하이나’로 개명한다. 비밥 스타들의 그늘에 가려 빛을 못 보고 있던 아트 블레이키에게 전환점이 온건 1950년대 초 피아니스트 호레이스 실버를 만나면서였다. 펑키 리듬과 가스펠 음악에 관심있던 호레이스 실버는 평소 아트 블레이키가 찾던 리듬에 강한 연주인이었다. 둘은 이내 의기투합하며 루 도날드슨의 알토 색소폰, 클리포드 블라운의 트럼펫, 컬리 러셀의 베이스가 참여하며 아트 블레이키 첫 정규 퀸텟으로 출범된다. 블루 노트레이블에서 발표된 앨범 < A night at birdland > (1954)는 이내 재즈계의 촉각을 건드렸다. 재즈의 명소 버드랜드에서 녹음된 앨범에선 오랫동안 다져온 아트 블레이키의 역동적인 드럼 연주를 선보이고 있다. 몸을 들썩이는 펑키 리듬과 블루스의 기운이 감지되는 호레이스 실버 피아노 연주, 강렬한 울림을 선사하며 다크호스로 떠오른 트럼펫터 클리포드 브라운의 연주는 신선했고 앨범은 한층 업그레이드 된 비밥, 이름 하여 하드 밥의 효시 작으로 평가받기에 이른다. 같은 해 아트 블레이키 퀸텟은 피아니스트 호레이스 실버의 블루노트 첫 리더작 < Horace Silver & Jazz Messenger > 로 다시 모인다. Doodlin’ 이라는 명연을 담고 있는 지금까지도 호레이스 실버의 최고작으로 평가받으며 그의 확고한 입지를 확보해준다. 자신감을 얻은 호레이스 실버는 색소폰주자 행크 모블리, 트럼펫터 케니 도햄을 만나 자신의 밴드를 결성을 논의했고 결국 호레이스는 아트 블레이키를 떠나 자신의 퀸텟을 결성한다. 다만 호레이스가 사용했던 재즈 메신저스란 팀 이름은 아트 블레이키에게 넘겨졌다. 다소의 혼선을 겪은 그는 ‘아트 블레이키 & 재즈 메신저스’ 로 새 출발하며 팀을 재정비한다. 클리포드 브라운의 안타까운 요절로 그를 대신할 18살의 천재 트럼펫터 리 모건과, 테너 색소폰주자 베니 골슨, 바비 티몬스의 피아노, 지미 메리트의 베이스로 구성된 그의 2기 퀸텟이 출범한다. 이전 1기 때처럼 창창한 신인 뮤지션들로 구성된 그의 메신저스는 여러 레이블은 전전하던 끝에 1958년, 자신의 첫 출사표를 내준 블루 노트에서 또 한번의 명연을 들려주는데 그것이 바로 지금까지도 재즈사의 대표적인 명반으로 기록되는 < Moanin’ > 이다. 피아노와 혼 섹션의 경쾌한 콜 앤 리스펀스가 인상적인 타이틀 곡 ‘Moanin’은 흑인의 원초적 가락인 블루스와 재즈 본연의 리듬인 ‘스윙’이 가장 이상적으로 배합된 명연이다. 앨범은 퀸텟 멤버인 베니 골슨의 뛰어난 작곡 실력을 선보이는 ‘Are you real’ , 아트 블레이키의 폭발하는 드러밍이 솔로를 만끽할 수 있는 ’Blues march’ 등 하드밥연주의 진수를 담아내고 있다. 아트 블레이키와 그의 밴드는 < Moanin’ > 으로 최고의 전성기를 맞이한다. 모달,프리 재즈의 격변에 아랑곳없이 아트 블레이키는 1960년-70년대 내내 하드밥의 지존으로 군림하며 재즈 메신저스를 통해 수많은 신인 스타들을 양산해 낸다. < A night at Tunisia > (1960)에 참여했던 테너 색소폰의 웨인 쇼터, 하드밥트럼펫 연주에 새 전기를 마련한 프레디 허바드가 참여한 < Mosaic >(1961), < Indestructibale > (1964)에서 여전히 기세등등한 연주를 들려줬다. 70-80년대 최고의 찬사를 받게 되는 푸르겔 혼의 척 맨지오니와 피아니스트 키스 자렛 역시 60년대 후반 재즈 메신저스의 멤버였다는 사실은 주목할 사안이다. 영원히 꺼지지 않을 것 같던 재즈 메신저스의 열기는 하지만 1970년대 접어들며 재즈 록의 위세에 떠밀려 차츰 식어가고 있었다. 실력 있는 젊은 뮤지션은 재즈 록과 퓨전 재즈 쪽으로 흘러갔고 아트 블레이키는 팀 운영에 난항을 겪는다. 뚝심 있게 밀어붙이는 그의 하드밥 열정은 이런 재즈계의 분위기에선 유지하기 힘든 일이었다. 그렇게 1980년대가 왔고, 존폐위기에 몰린 그의 재즈 메신저스는 다시 한번 세계가 주목한 천재 트럼펫터를 맞이한다. 정통 재즈의 부활을 외치며 신정통주의의 기수로 떠오른 19살의 윈튼 마살리스가 그 주인공이었다. 한살 위인 그의 형 브랜포드 마살리스의 색소폰까지 들어오며 아트 블레이키 재즈 메신저는 1981년 < Straight Ahead > 로 화려하게 부활한다. 마살리스 형제는 1983년까지 재즈 메신저스에 몸담았고, 이듬해 1984년 신예 트럼펫터 테렌스 블랜차드가 참여한 < New York Scene > 으로 이어지며 재즈 메신저스는 건재함을 과시했다. 1985년엔 블루 노트 레이블 재건기념 수퍼 콘서트 < A night with Blue Note > 에 참여했고 이후 1990년 세상을 떠나기 직전까지 그는 무대에서 줄기차게 하드밥의 열기를 이어갔다. 죽기 바로 1달 전 개최된 도쿄 돔에서의 라이브 실황을 끝나자마자 아트는 쓰러져 병원에 실려 갔고 1990년 10월 16일 하드밥 메신저의 옹골찬 연주 인생은 막을 내린다. 하드밥과 결혼한, 아니 하드밥에 인생을 건 아트 블레이키는 그가 연주했던 드럼 솔로만으로 평가될 수 없는 인물이다. 수많은 분파가 생기고 다양한 실험과 변화가 진행되는 현 재즈계에서 어느 순간 2% 부족하다고 느낄 때 필요한 건 바로 블루스와 스윙이 황금 비율로 만나 만개한 하드밥의 충격요법이다. 시류에 아랑곳없이 하드밥 외고집으로 완성된 아트 블레이키의 유산은 지금도 재즈가 연주되는 곳곳에서 발견되고 있다.
재즈 피아노 연주자 재즈 피아노 연주자
재즈 색소폰 연주자 재즈 색소폰 연주자
연주 : Cannonball Adderley (캐넌볼 애덜리 ,Julian 'Cannonball' Adderley)
재즈 색소폰 연주자 재즈 색소폰 연주자
연주 : Miles Davis (마일즈 데이비스)
재즈 트럼펫 주자이자 작곡가, 밴드 리더인 마일스 데이비스(MIles Davis)는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음악인들 가운데 한 사람이다. < 롤링스톤 >는 록전문지임에도 불구하고 지난 100년 간의 톱10 뮤지션(8위) 가운데 한사람으로 그를 선정했다. 인상적인 선율로 마음 한 가운데를 울리는 우수 어린 트럼펫 소리는 분명 ‘마일스’만의 것이다. 그러나 마일스 데이비스는 출중한 연주실력을 지닌 재즈 음악인이기 전... 재즈 트럼펫 주자이자 작곡가, 밴드 리더인 마일스 데이비스(MIles Davis)는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음악인들 가운데 한 사람이다. < 롤링스톤 >는 록전문지임에도 불구하고 지난 100년 간의 톱10 뮤지션(8위) 가운데 한사람으로 그를 선정했다. 인상적인 선율로 마음 한 가운데를 울리는 우수 어린 트럼펫 소리는 분명 ‘마일스’만의 것이다. 그러나 마일스 데이비스는 출중한 연주실력을 지닌 재즈 음악인이기 전에 재즈의 다양한 장르를 창조해 낸 ‘스타일리스트’이다. 1940년대부터 90년대에 이르기까지 마일스는 정체되어 있지 않고 끊임없이 나가는 창조의 면모를 보여준다. 쿨, 모드, 휴전에 이르기까지 그는 재즈 음악의 새로운 경향을 제시하고 리드해 갔다. 마일스는 현재에 유행하는 음악에 민감했고 시대 상황에 예의 주시할 줄 아는 아티스트였다. 단지 뛰어난 기량을 지닌 일반 뮤지션의 범주에서 논할 수 없는 가히 ‘대가’였다. 본명 마일스 듀이 데이비스 주니어인 그는 1926년 5월 25일 일리노이주 알턴에서 태어났다. 치과의사인 아버지를 둔 중산층의 유복한 가정환경에 자라나 이스트 세인트루이스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으며 13세가 되던 생일 아버지가 사주신 트럼펫이 계기가 되어 본격적으로 트럼펫 훈련을 받게 된다. 16세때 부터 바(Bar)에서 주말마다 연주를 한 마일스는 지역 밴드인 ‘에디 랜들스 블루 데빌스’의 멤버로 활동하다 17살이었던 1944년 비밥(Bebop)의 혁명을 몰고 온 디지 길레스피와 찰리 파커가 활동하던 ‘빌리 엑스타인 빅 밴드’가 그가 살던 이스트 세인트 루이스에 순회공연을 오게 됐고, 마일스는 우연한 기회에 그들과 한 무대에 설 기회를 얻게 된다. 이 때의 경험은 그가 길레스피와 파커의 추종자가 됨을 물론 비밥의 스타일을 스스로 터득할 수 있었던 계기가 되었다. 스피디한 연주, 두드러진 즉흥 솔로, 복잡한 리듬감으로 어우러진 비밥은 40년대 재즈계를 강타한 ‘재즈혁명의 전주곡’이었다. 젊은 재즈 연주자들은 모두 비밥에 심취해 있었고 마일스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단지 비밥을 추종하는 트렌드의 수혜로 그치지 않으려고 했고, 그 해 이스트 세인트루이스를 떠나 뉴욕에 있는 줄리어드음대에 입학한다. 줄리어드음대를 다니면서 그가 대부분의 시간을 보낸 곳은 바로 뉴욕 52번가의 ‘민턴스 플레이 하우스’라는 재즈 클럽이었다. 매일 밤 이곳에 나가 음악을 듣고 또 그곳의 전통에 따라 무대에 돌아가며 올라가고 하면서 재즈 트럼펫 연주의 정체를 깨닫는다. 1947-48년 동안 찰리 파커의 밴드에서 활동하게된 마일스는 이를 통해 비밥의 문법을 완전히 자기의 것으로 익힌다. 1948년 여름 마침내 마일스는 당시로서는 생소한 9인조 빅 밴드를 조직한다. 뉴욕에서 만난 캐나다 출신의 작곡가 길 에반스(Gil Evans)를 비롯한 미국 서부 출신 백인 재즈 연주자들을 기용, 이듬해인 1949년 캐피톨(Capitol)을 통해 발표된 앨범 < Birth Of Cool >은 재즈의 바탕에 백인적 감수성을 가미시킨 걸작이었다. 이 앨범은 ‘쿨의 탄생’이란 제목이 입증하듯 이후 당시 앨범에 참여했던 리 코니츠, 제리 멀리건과 같은 뮤지션들이 중심이 되어 미국 웨스트 코스트를 중심으로 한 ‘쿨’이라는 음악 스타일을 개척하는 데 씨앗을 뿌린 재즈사(史)의 명반이었다. 이 음반이 녹음된 당시엔 재즈계의 촉각이 비밥에 쏠려 있던 시기라 아무도 마일스의 시도에 주목하지 않았다가 1957년 2월 캐피톨사가 이 앨범을 재발매하면서 마침내 그의 진가가 인정받기에 이른다. 1950년대 초반 잠시 헤로인에 중독된 마일스는 위기를 맞지만 이후 프레스티지(Prestige) 레이블을 통해 수많은 음반을 발표한다. 테너 색스폰 주자 존 콜트레인과의 협연으로 유명한 ‘마일스 데이비스 퀸텟(Miles Davis Quintet)의 시작을 알렸던 시기인 프레스티지의 내공축적 시절 동안, 마일스는 비평가들로부터 호평을 받는다. 그의 대표작으로 반드시 입에 오르는 ‘Round midnight’를 1955년 7월 뉴 포트 재즈페스티벌서 연주하게 되었고 이를 도화선으로 메이저 레이블인 콜럼비아 레코드사와 계약한다. 트럼펫의 마일스 데이비스를 비롯하여 테너 색스폰의 존 콜트레인, 피아노에 레드 갈런드, 베이스에 폴 챔임버, 드럼에 필리 조 존슨으로 구성된 마일스 데이비스 퀸텟은 같은 해 10월 콜롬비아 레코드 데뷔작 < Round Midnight >를 발표, 그의 음악은 대중적인 인지도를 획득하기 시작했다. 콜롬비아에서 첫 앨범을 내놓았지만 아직 프레스티지 레코드와 5장의 음반에 대한 계약 분이 남아있었기에 마일스는 잔여 분을 해결하기 위해 단 이틀만의 전대미문 세션을 통해 녹음 작업을 마치는데 성공한다. 그 결과 나온 작품이 < Relaxin > < Cookin’ > < Workin > 그리고 < Steamin’ >이었으며 이 음반들 모두 마일스 데이비스 퀸텟의 전작 < Round Midnight > 이상의 호평을 받는다. 1957년 < Birth Of Cool >의 재발매와 동시에 그는 이전 음악 동료인 길 에반스와 다시 만난다. ‘쿨의 탄생’에서 보여준 빅 밴드 편성을 다시 도입, 길 에반스의 클래시컬한 편곡으로 ‘쿨의 탄생’에서 진일보한 연주를 선보이기 위해서였다. 1956년의 < Miles Ahead >와 이듬해 < Porgy & Bess > 그리고 1960년의 < Sketches of Spain >이 모두 마일스와 길 에반스와의 공동의 땀으로 결실을 맺은 명작들이었다. 1957년 12월에는 파리를 방문, 프랑스 ‘누벨 바그’ 영화의 거장 루이 말 감독의 < 사형대의 엘리베이터 >(L’Ascenseur pour l’Echafaud )의 스코어를 맡았으며 이 영화음악으로 1960년 그래미상 베스트 재즈 퍼포먼스부문 후보에 오르는 성과도 거둔다. 1958년에는 존 콜트레인과 함께 했던 그의 퀸텟에 알토 색스폰 주자인 캐논볼 애덜리를 영입, 6인조 섹스텟으로 새로 출발하여 < Milestone >을 녹음한다. 재즈에 모드(mode: 각 스케일, 노트에서 일곱음을 모두 사용하는 연주 방식) 주법을 처음 도입한 이 앨범을 끝으로 밴드 내의 피아노 주자 레드 갈란드가 떠나고 모드에 정통한 피아노 주자 빌 에반스(Bill Evans)가 들어오면서 그의 섹스텟의 색깔은 더욱 ‘모드’로 진행되었다. 모드 주법의 본격적인 시도를 알렸던 그의 대표작 < Kind of Blue >(1959)는 ‘드림팀’이라고 할 만한 쟁쟁한 멤버들로 구성된 그의 섹스텟 연주의 정점이었다. 이 앨범은 코드 변화와 즉흥연주 중심의 기존 재즈음악 스타일을 과감히 벗은 ‘모던 재즈’(modern jazz)의 시작을 알렸으며 지금까지 200만장 판매라는 상업적 성공도 포획했다. 1960년대 초반 솔로 활동을 위해 존 콜트레인과 빌 에반스가 마일스의 섹스텟을 떠나고 이들을 대신할 피아노 주자 윈튼 켈리와 색스폰 주자 행크 모빌이 들어온다. < Kind Of Blue > 때와 같은 창조성은 아니었지만 이전보다 대중들과의 친화력을 더 높아졌으며 < Someday My Prince Will Come >(1961)과 같은 수작 생산을 거르지 않는다. 섹스텟을 떠난 빌 에반스와의 작업을 이후에도 지속하여 같은 해 내놓은 앨범 < Live At Carnegie Hall >도 빼놓을 수 없는 작품이었다. 오넷 콜먼(Ornette Coleman)이라는 젊은 색스폰 주자가 ‘프리 재즈’를 선보이면서 재즈 음악계는 어느덧 ‘프리 재즈’ 쪽으로 말을 갈아 타고있었다. 마일스는 이런 오넷 콜먼의 시도를 그다지 반기지 않았고 마일스의 섹스텟의 활동이 다소간 시들해진 60년대 중반, 다시 퀸텟으로 밴드를 재편했다. 이 때의 명분은 반(反)프리재즈에 입각한 듯한 ‘재즈-스탠더드 풍의 전통에 입각한 새로운 시도’였다. 베이시스트 론 카터, 피아니스트 허비 행콕, 드러머 토니 윌리엄스, 테너 색스폰에 웨인 쇼더와 같은 젊은 피를 수혈받으며 마일스의 쿼텟은 < Kind Of Blue > 이후 최고의 창작력을 다시 불태운다. 1965년 < E.S.P >를 시작으로 < Miles Smiles >(1966), < Sorcerer >(1967), < Nefertiti >(1967), < Miles In The Sky >(1968), < Fills De Kilimanjaro >(1968)까지 줄기차게 이어진다. 이중 < Miles Smiles >는 1967년 그래미상 7개 부문에 노미네이트되는 성과를 거뒀고, 기타리스트 조지 벤슨이 참여한 < Miles In The Sky >와 칙 코리아의 일렉트릭 피아노가 참여한 < Filles De Kilimanjaro >는 얼마 후 마일스의 또 한차례 혁명인 ‘재즈-록 휴전’으로의 이동을 암시하는 작품이었다. 1968년 마일스는 제임스 브라운, 슬라이 & 더 훼밀리 스톤, 지미 헨드릭스 등 당시 대중들을 휘어잡은 R&B와 펑키 음악에 관심을 갖는다. 얼마 후 지미 헨드릭스를 만나게 되었고, 둘은 함께 작업할 것을 약속한다(물론 이 약속은 지미 헨드릭스의 요절로 이뤄지지 못했다.)마일스는 당시 유행하던 록 음악의 열풍을 예의 주시했고, 일렉트릭 기타와 키보드가 재즈의 진보를 이끌어낼 것으로 판단한다. 콜트레인의 죽음 후 재즈는 기존 프리 재즈에서 더 진행하지 못하고 있었고, 수요층 측면에서 어느덧 백인 지식인이나 상류층들이 즐기는 음악으로 변모해가고 있었다. 1968년 말 그의 두 번째 퀸텟은 해산을 맞아 색스폰 주자 웨인 쇼더를 제외하고 모두 솔로로 독립한 상황이었지만 마일스는 또 다시 새로운 시도를 감행함으로써 존재를 부각한다. 토니 윌리엄스를 대신 할 잭 드자넷, 론 카터를 대신할 데이브 홀란드, 일렉트릭 건반주자 칙 코리아, 조 자위눌이 마일스와 함께 연주를 하게 되고, 영국 출신의 일렉트릭 기타리스트 존 맥러플린도 그의 밴드에 합류한다. 이들과 함께 1969년 2월에 녹음한 < In A Silent Way >는 코드 없이 부유하는 듯한 멜로디로만 진행된 방식으로서, 거기에 일렉트릭 기타사운드를 집어넣어 ‘록’적인 요소를 재즈에 본격적으로 가미한 것이었다. 같은 해 8월 재즈계의 최대 문제작인 < Bitches Brew >이 녹음되어 1970년 3월 세상에 나왔다. 오케스트라 편곡으로 도저히 옮겨 놓을 수 없을 정도로 즉흥성에 토대를 둔 이 앨범에서 마일스의 트럼펫은 전기 코드를 꽂은 듯 우렁찼으며 일렉트릭 피아노와 일렉트릭 기타의 펑키(funky)감과 드럼의 강한 비트는 바야흐로 재즈-록 휴전(Jazz Rock Fusion)의 출현을 선언하는 것이었다. 이미 길이 갈라선 록과 재즈의 융합을 꾀한 이 기념비적 가치의 앨범은 발매되자 마자 골드를 기록했고 빌보드 Top40에 오르는 인기를 누려 대중들에게 다가가려는 취지를 충분히 달성했다. 마일스의 재즈-록으로의 실험은 이후 5년 간 계속된다. 라이브 실황을 담은 < Miles Davis In Filmore East >(1970), < Live-Evil >(1970)를 비롯하여 흑인 권투선수 잭 존슨에게 헌정하는 < Tribute to Jack Johnson >(1970), 슬라이 스톤과 제임스 브라운으로부터 영향 받은 게 명백한 펑키 리듬의 < On the Corner >(1972)와 같은 ‘재즈-록 휴전’의 명반을 잇달아 발표한다. 그가 시도한 재즈-퓨전은 잇단 재즈 슈퍼그룹의 출현을 몰고 왔다. 칙 코리아는 1970년 말 마일스를 떠나 써클(Circle)을 거쳐 1971년 리턴 투 포에버(Return To Forever)를 결성했으며 기타주자 존 맥러플린도 같은 해 마하비시누 오케스트라(Mahavishnu Orchestra)를 만들었다. 마일스에게 일렉트릭 피아노를 소개했던 조 자위눌과 색스폰 주자 웨인 쇼터는 그들 보다 더 빠른 1970년 웨더 리포트(Weather Report)를 결성하면서 1970년대 재즈의 대세를 재즈-록 퓨전으로 돌려놓았다. 건강상의 이유로 1975년 마일스는 은퇴를 선언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정확히 6년 후인 1981년, 일렉트릭 베이스에 마커스 밀러, 일렉 기타에 마이크 스턴, 색스폰에 빌 에반스 등 젊은 재즈 뮤지션들로 완비된 밴드와 함께 재기해 < The Man With The Horn >을 발표한다. 이어 기타리스트 존 스코필드를 가입시키고 자신이 직접 표지그림까지 완성한 < Star People >(1982), < Decoy >(1983), < You’re Under Arrest >(1985)를 연달아 내놓으며 에너지를 과시했다. 30년 동안의 콜롬비아에서의 활동을 마감하고 1986년 워너로 이적하여 < TuTu >를 선보인다. 노벨 평화상 수상자인 투투 주교의 이름을 따온 이 앨범은 토미 리푸마, 마커스 밀러, 조지 듀크 등 3인 프로듀서의 지휘 아래 만들어졌고, 마일스의 전폭적인 신뢰를 얻고 있던 마커스 밀러가 작곡과 편곡을 맡았다. 일렉트릭-펑키 풍의 편곡은 당시 선풍적인 인기를 얻고 있던 흑인 로커 프린스(Prince)의 영향을 느끼게 했다. 이듬해 1987년 워너 브라더스에서 두 번째로 내놓은 < Siesta >는 엘렌 바킨, 줄리앙 샌즈 주연의 동명 영화 음악으로 작품 전체가 예전 길 에반스와의 작업 < Sketches Of Spain > 때와 같이 스페니시한 연주로 가득 차있다. 마일스는 사망하기 직전인 1991년 7월 스웨덴에서 열린 몬트럭스 재즈 페스티벌서 연주자로 참여, 그의 음악적 동반자로 1988년 세상을 떠난 길 에반스와 녹음했던 많은 곳들을 재즈팬과 평론가들 앞에서 재현하며 엄청난 환호의 박수를 받았다. 꿈꾸던 재즈의 진보를 평생동안 실현해온 마일스는 1991년 9월28일 미국 캘리포니아 산타모니카 소재의 세인트 존스 호스피탈 앤 헬스 센터에서 폐렴에 의한 호흡곤란과 뇌졸중으로 숨을 모았다. 사망 후 완성된 2개의 트랙이 포함된 스튜디오 앨범 < Doo-Bop >이 1992년 공개되면서 위대한 재즈맨을 잃은 상실감에 젖은 팬들의 아쉬움을 달래줬다. 마일스는 ‘모든 음악적 요소’를 그에 트럼펫에 담아 내려했고, 인종과 국경을 초월한 뮤지션이 되길 원했다. 비밥의 출현 때부터 재즈의 중심에 있어오면서 기존의 전통을 답습하기보다는, 재즈-스탠더드를 바탕으로 현재의 음악흐름을 늘 주시했고 거기에서 항상 새롭고 실험적인 것을 추구하면서 ‘앞으로’ 나아가길 원했다. 마일스에게 ‘재즈의 거장’이라는 칭호를 붙임에 있어선 논란의 여지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길 에반스와의 작업과 재즈-록 퓨전을 시도할 당시 일각의 재즈평론가들로부터 ‘백인에게 아부하는 재즈 뮤지션’ 혹은 ‘재즈를 팔아먹었다’는 식의 혹평을 감수해야 했다. 하지만 이런 식의 근거 없는 비판은 이미 루이 암스트롱이나 듀크 엘링턴과 같은 대가들도 경험했던 얘기들이었다. 마일스의 시도는 그의 음악을 통해 대중에게 더 접근하고 싶어 한 그 만의 것이었다. 마일스는 자신의 공연을 할 때 젊은 흑인관객과 눈이 마주치길 원했고, 그런 흑인 청중들에게 반가운 미소를 보내었다.(하지만 물론 지금까지 그의 음악을 추종하는 사람들은 거의 백인들이다.) 그의 유산은 오늘날에 음악 곳곳에서 확인된다. “이념과 인종으로 갈라진 세상에서 음악만큼이라도 퓨전되어야 한다”는 그의 지론과 명언은 어느덧 재즈는 물론이고 현대의 대중음악을 가로지르는 음악트렌드가 되었다.
연주 : Jimmy Smith (지미 스미스 )
재즈 피아노, 오르간 연주자 재즈 피아노, 오르간 연주자
재즈 기타 연주자 재즈 기타 연주자
재즈 트럼펫 연주자 재즈 트럼펫 연주자
재즈 색소폰 연주자 재즈 색소폰 연주자
재즈 피아니스트 허비 핸콕은 40년이 넘는 활동기간 동안 정통 재즈에서부터 최첨단 일렉트로닉 악기를 내세운 재즈 퓨전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음악 세계를 선보여왔다. 재즈 피아니스트 빌 에반스의 영향이 느껴지는 강한 서정성의 < Maiden Voyage >(1965)에서 슬라이 & 패밀리 스톤 풍의 펑키 리듬이 압도적인 < Headhunters >(1973)에 이르기까지 그의 음악은 특정 스타일로 규정될 수 없다. ... 재즈 피아니스트 허비 핸콕은 40년이 넘는 활동기간 동안 정통 재즈에서부터 최첨단 일렉트로닉 악기를 내세운 재즈 퓨전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음악 세계를 선보여왔다. 재즈 피아니스트 빌 에반스의 영향이 느껴지는 강한 서정성의 < Maiden Voyage >(1965)에서 슬라이 & 패밀리 스톤 풍의 펑키 리듬이 압도적인 < Headhunters >(1973)에 이르기까지 그의 음악은 특정 스타일로 규정될 수 없다. 정통 재즈에서부터, R&B, 일렉트로닉 뮤직, 펑키 등 다채로운 음악지형도를 펼쳐온 그는 한마디로 ‘변신’을 즐기는 재즈맨이다. 1940년 4월12일 미국 시카고의 사우스사이스에서 허버트 제프리 핸콕(Herbert Jeffery Hancock)이라는 본명으로 태어난 그는 7살부터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 일찍 두각을 나타내 11살에 이미 시카고 심포니 오케스트라와의 협연으로 모차르트 협주곡 D장조를 연주하는 천재성을 보였다. 기계 다루는데도 재능을 보여 나중에는 재즈 뮤지션으로서는 특이하게 대학서 전자공학을 전공한다. 이런 경력은 그가 1960년대 일렉트릭 피아노인 펜더 로즈(Fender Rhodes)나 클라비넷(Clavinet)과 같은 키보드 사운드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되었다. 대학서 만난 색스폰 주자 행크 모블리, 트럼펫 주자 리 모건과 연주 활동을 하면서 도날드 버드의 권유로 1961년 뉴욕으로 진출해 그의 밴드에 가입하면서 본격적인 재즈맨의 길을 걷게 된다. 잠시 후 재즈 레이블 블루 노트(Blue Note)사가 그에게 계약을 요청, 이듬해인 1962년 데뷔작 < Takin’ off >(1962)를 내놓는다. 호레이스 실버(Horace Silver) 풍의 펑키한 피아노 주법이 인상적인 이 앨범의 수록곡 ‘Watermelon man’은 라틴 재즈 퍼커션 주자인 몽고 산타마리아(Mongo Santamaria)의 노래 버전으로 더 유명하다. 총 7장의 앨범을 블루 노트를 통해 발표하는 동안, 1993년 애시드 재즈그룹 US3가 커버해 유명해진 ‘Cantaloupe island’가 수록된 < Empyrean Isle >(1964)를 비롯하여 < Maiden Voyage >(1965), < Speak Like A Child >(1968)과 같은 명반을 통해 빌 에반스 풍의 서정성과 호레이스 실버의 펑키한 감각을 합쳐놓은 듯한 개성 어린 피아노 연주를 들려줌은 물론, 그의 탁월한 곡 쓰기 실력을 유감 없이 발휘한다. 재즈 솔리스트로서 1960년대 내내 왕성한 활동을 보였지만, 재즈의 대가 마일스 데이비스 퀸텟에서의 활동은 그가 보다 진취적인 재즈뮤지션으로 나아갈 수 있는 발판이 되었다. 토니 윌리암스(Tony Williams), 론 카터(Ron Carter), 웨인 쇼터(Wayne Shorter), 마일스 데이비스(Miles Davis) 그리고 허비 핸콕(Herbie Hancock)으로 이루어진 제2기 마일스 데이비스 퀸텟은 < E. S. P >, < Miles In The Sky >, < Socerrer >, < Nefertiti >, < Filles De Killimanjaro >와 같은 명반을 잇달아 발표한다. 당시 “Miles In The Sky”(1968)를 작업하던 중 마일스 데이비스의 권유로 일렉트릭 피아노를 연주하게 된 허비 핸콕은 칙 코리아(Chick Corea)와 함께 키보드 사운드를 바탕으로 70년대 재즈-록 퓨전의 선두주자로 군림하는 초석을 다진다. 마일스와의 활동이 그가 ‘음악에 다양한 시도를 할 줄 아는 뮤지션’으로 비상하는데 상당한 영향을 미쳤던 것이다. 마일스 데이비스가 ‘재즈-퓨전’으로의 음악성을 표방했던 1969년 허비 핸콕은 마일스를 벗어나 독립, 므완디시(Mwandish)라는 이름의 7인조 밴드를 결성한다. < Mwandish >(1970), < Crossing >(1971), < Sextant >(1973)에서 실험적인 ‘일렉트로닉-펑키’ 뮤직을 선보인 허비 핸콕은 다양한 종류의 키보드 사운드를 재료로 한 진보적인 재즈-록 퓨전을 선보이며 비평적 찬사를 얻는다. 이런 므완디시 밴드에서 보여준 허비 핸콕의 새로운 시도는 주목할 만했지만, 대중들의 반응은 냉담했다. 실험적 사운드에 천착한 음악이 대중들이 수용하기엔 어려웠던 것이다. 허비 핸콕은 자신의 밴드에 쏟은 열정만큼 대중적 성과가 나오지 않자, 당시 유행하던 R&B의 문법을 자신의 음악에 대거 도입한다. 슬라이 앤 더 패밀리 스톤을 통해 경험한 ‘펑키 사운드’에 자신의 지향을 정했고 그 결과 나온 < Headhunters >(1973)는 엄청난 파장을 몰고 온다. 빌보드 앨범 차트 13위까지 오른 이 앨범은 명료한 백 비트를 바탕으로 펑키 사운드가 전면에 부각된 ‘파티용 댄스뮤직’이었다. 200만장 판매라는 상업적 성공을 거두며 자신감을 회복한 그는 연이어 발표한 < Thrust >(1974), < Man-Child >(1975), < Secret >(1976)를 계속 히트시키며 재즈 펑크(Jazz- Funk)의 전도사로서 1970년대 내내 대중적 인기를 얻었다. 재즈 퓨전을 이 시기에 표방하면서도 그는 1977년 V.S.O.P.라는 팀을 결성, 1960년대 마일스 데이비스 퀸텟에서 연주를 같이 했던 멤버들과 같이 ‘정통 재즈로의 외도(?)’를 즐기기도 한다. 재즈-퓨전에 이어 1980년대 윈턴 마샬리스(Wynton Marshallis)등에 의해 꽃 피운 포스트 밥(Post-bop) 혹은 신(新)전통주의라 불리는 새로운 경향을 그는 이미 V.S.O.P.를 통해 그 도화선을 제시했던 것이다. 1980년대 들어 허비 핸콕은 또 한번의 변신을 감행한다. 1983년 발표한 < Future Shock >에 수록된 ‘Rockit’은 힙합 뮤직에 퍼져있던 스크래치(scratch) 사운드를 도입, 독특한 리듬감이 느껴지는, 이른바 디스코-텍(Disco-Teque) 뮤직을 선보인다. < Head Hunters >에 이어 이번에는 컴퓨터로 찍어 낸 듯한 테크노 음악을 선보이며 다시 한번 음악 관계자들을 어리둥절하게 했다. < Future Shock >에 이은 1984년 작 < Sound System >으로 연속 그래미상을 거머쥔 허비 핸콕은 재즈 뮤지션의 한계를 뛰어 넘는 폭넓은 활동을 전개한다. 덱스터 고든이 주연했던 1986년 영화 < Round Midnight >에 참여, 이번엔 그래미상이 아닌 아카데미에서 오리지날 스코어 상을 수상한다. 1988년 테크노 팝 앨범 < Perfect Machine >을 끝으로 콜롬비아 레코드사를 떠난 허비 핸콕은 마일스의 추모앨범, TV 쇼 프로그램 진행자, 윈튼 마샬리스와의 협연 등 왕성한 활동을 벌인다. 1994년 버브 레코드를 통해 < Dis Is Da Drum >을 발표하여 비평적 찬사를 받는 동시에 < Future Shock >에 이은 테크노 팝 열풍을 재현한다. 1995년엔 커트 코베인, 프린스, 토킹 헤즈, 비틀즈, 사이먼 & 가펑클 등의 록과 팝을 그만의 재즈 연주로 리메이크한 < The New Standard >를 발표했고 1998년엔 조지 거슈인(George Gershwin)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여 발표한 < Gershwin’s World >를 통해 그의 명성을 공고히 했다. 21세기를 맡아 예순을 넘기면서도 그 특유의 변신은 멈추지 않아 올 9월에 발표한 신작앨범 < Future 2 Future >를 통해서는 일렉트로닉과 다양한 장르의 혼합을 꾀하기도 했다.
연주 : Horace Silver (호레이스 실버)
재즈 피아노 연주자 재즈 피아노 연주자
연주 : Donald Byrd (도널드 버드,Donaldson Toussaint L'Ouverture Byrd II)
재즈 트럼펫 연주자 재즈 트럼펫 연주자
연주 : US3 (어스쓰리)
1990년대 초, 재즈 힙합(Jazz Hiphop)의 분수령을 일궈낸 어스쓰리(Us3)는 재즈 피아니스트 허비 핸콕의 펑키 재즈 고전 ’Cantaloupe island’(1964)에 힙합의 랩과 스크래치, 샘플링을 가미시켜 전 세계의 댄스클럽을 열광케 했다. 우리나라에도 모 의류 회사 옷 광고 CF의 배경음악으로 사용되면서 애시드 재즈(Acid Jazz)’의 전도사로 추앙된 US3는 펑키한 비트와 넘실대는 그루브... 1990년대 초, 재즈 힙합(Jazz Hiphop)의 분수령을 일궈낸 어스쓰리(Us3)는 재즈 피아니스트 허비 핸콕의 펑키 재즈 고전 ’Cantaloupe island’(1964)에 힙합의 랩과 스크래치, 샘플링을 가미시켜 전 세계의 댄스클럽을 열광케 했다. 우리나라에도 모 의류 회사 옷 광고 CF의 배경음악으로 사용되면서 애시드 재즈(Acid Jazz)’의 전도사로 추앙된 US3는 펑키한 비트와 넘실대는 그루브가 매력인 전형적인 댄스뮤직을 연주한다. 1960년대 하몬드 B-3 올갠의 몽환적인 사운드가 떠오르는 소울 재즈(펑키 재즈라고도 한다)가 80년대 힙합 문화와 조우하며 탄생된 에이시드 재즈는 힙합의 본령인 미국 뉴욕이 아닌 영국의 런던 언더그라운드 댄스 클럽 중심으로 1980년대 말부터 싹트기 시작한다. 재즈와 힙합은 물론 아프로 큐반, 하우스, 레게 리듬이 복잡하게 얽힌 이 ’별종 댄스 음악’은 90년대 초 미국으로 역수출되며 Us3는 콜럼비아 레코드 소속의 자미로콰이(Jamiroquai)와 함께 에이시드 재즈의 전성을 예고했다다. 1991년 콘서트 프로모터이자 재즈 작가인 제오프 윌킨슨(Jeoff Wilkins)이 키보드 연주자 멜 심슨(Mel Simpson)을 만나며 런던에서 결성된 US3는 1992년 런던 소재 인디 레이블에서 발표한 첫 싱글 ’Where will we be in the 21st century’를 발표하지만 별다른 호응을 얻지 못한다. 이후 두 번째 싱글 ’The band played the boogie’(1992)가 댄스 클럽에서 좋은 반응을 얻게 되고, 곧 재즈 레이블 블루 노트(Blue Note)를 소유했던 캐피톨(Capitol) 레코드사로부터 블루 노트에 소속된 재즈 아티스트들의 음원을 샘플로 사용해도 좋다는 러브콜을 받는다. 이에 심슨과 윌킨슨은 코비 파우웰, 라산 윌키, 투카 윳과 같은 랩퍼들을 고용해 한층 힙합의 분위기를 돋우며 이들의 최고 히트작 ’Cantaloupe island’(1993)를 발표한다. 아트 블레이키(Art Blakey) 재즈 메신저의 앨범< A Night At Birdland >(1954)의 인트로를 장식한 카랑카랑한 인사말과 펑키한 느낌이 압권인 허비 핸콕(Herbie Hancock)의 명반< Empyrean Isles >(1964)에서 샘플을 따온 히트곡 ’Cantaloupe island’는 재즈-힙합의 전형을 제시했다는 평가를 받으며 영국에서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다. 이 곡은 같은 해 발표된 밴드의 첫 앨범 < Hand on the Torch >에도 실리며 Us3는 미국을 비롯, 유럽 전역과 일본에까지 그 이름을 떨친다. < Hand On The Torch >의 성공과 함께 국제적인 재즈 행사에 참가하게된 US3는 라이브 연주에서도 발군의 실력을 발휘하며 생 연주가 아닌 샘플링 사용에 회의적이었던 재즈 관계자들에게 호평을 얻는다. 일본의 재즈전문지 < 스윙저널 >은 1993년 이들의 데뷔 앨범을 ’올해의 앨범’으로 선정했고, 영국의 < 인디펜던트 >지는 그 해의 재즈 뮤지션으로 선정했다. 이렇다 할 앨범 발표 소식이 없던 차에 내놓은 두 번째 앨범 < Broadway & 52nd >(1997)는 데뷔작에 준하는 좋은 평가를 얻었지만 대중적으로는 첫 앨범만큼의 성과를 거두지는 못한다.
연주 : Robert Glasper (로버트 글래스퍼 )
피아니스트, 프로듀서 피아니스트, 프로듀서
Johnny Williams (베이스), Meade "Lux" Lewis (피아노), Sidney Bechet (클라리넷), Sidney Catlett (드럼), Teddy Bunn (기타) 로 구성된 재즈 퀸텟 Johnny Williams (베이스), Meade "Lux" Lewis (피아노), Sidney Bechet (클라리넷), Sidney Catlett (드럼), Teddy Bunn (기타) 로 구성된 재즈 퀸텟
밴드 : The Jazz Messengers (더 재즈 메신저스)
하드 밥 그룹 하드 밥 그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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