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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b Dylan (밥 딜런) - 30th Anniversary Concert Celebration (Deluxe Edi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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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D

Bob Dylan (밥 딜런) - 30th Anniversary Concert Celebration (Deluxe Edition)

[ 2CD / 전곡 디지털 리마스터링 ]
Bob Dylan, Eddie Vedder, Roger McGuinn, Richie Havens, Willie Nelson 노래 외 15명 정보 더 보기/감추기 | SonyMusic / Columbia | 2014년 03월 19일 첫번째 구매리뷰를 남겨주세요. | 판매지수 12 판매지수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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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b Dylan (밥 딜런) - 30th Anniversary Concert Celebration (Deluxe Edition)

품목정보

품목정보
발매일 2014년 03월 19일
제조국 미국

관련분류

카테고리 분류

음반소개

디스크

CD 1
  • 01 Like a Rolling Stone (Remastered) - John Mellencamp
  • 02 Leopard-Skin Pill-Box Hat (Remastered) - John Mellencamp
  • 03 Show Introduction (Remastered) - Kris Kristofferson
  • 04 Blowin' in the Wind (Remastered) - Stevie Wonder
  • 05 Foot of Pride (Remastered) - Lou Reed
  • 06 Masters of War (Remastered) - Eddie Vedder and Mike McCready
  • 07 The Times They Are a-Changin' (Remastered) - Tracy Chapman
  • 08 Introduction by Kris Kristofferson (Remastered) - Kris Kristofferson
  • 09 It Ain't Me, Babe (Remastered) - June Carter Cash & Johnny Cash
  • 10 What Was It You Wanted (Remastered) - Willie Nelson
  • 11 I'll Be Your Baby Tonight (Remastered) - Kris Kristofferson
  • 12 Highway 61 Revisited (Remastered) - Johnny Winter
  • 13 Seven Days (Remastered) - Ron Wood
  • 14 Just Like a Woman (Remastered) - Richie Havens
  • 15 When the Ship Comes In (Remastered) - The Clancy Brothers and Robbie O'Connell with special guest Tommy Makem
  • 16 Introduction by Johnny Cash (Remastered) - Johnny Cash
  • 17 You Ain't Goin' Nowhere (Remastered) - Mary-Chapin Carpenter, Rosanne Cash and Shawn Colvin
  • 18 Don't Think Twice, It's All Right (Rehearsal) (Bonus Track) - Eric Clapton
CD 2
  • 01 Just Like Tom Thumb's Blues (Remastered) - Neil Young
  • 02 All Along the Watchtower (Remastered) - Neil Young
  • 03 I Shall Be Released (Remastered) - Chrissie Hynde
  • 04 Don't Think Twice, It's All Right (Remastered) - Eric Clapton
  • 05 Emotionally Yours (Remastered) - The O'Jays
  • 06 When I Paint My Masterpiece (Remastered) - The Band
  • 07 Absolutely Sweet Marie (Remastered) - George Harrison
  • 08 License to Kill (Remastered) - Tom Petty
  • 09 Rainy Day Women #12 & 35 (Remastered) - Tom Petty
  • 10 Mr. Tambourine Man (Remastered) - Roger McGuinn
  • 11 It's Alright, Ma (I'm Only Bleeding) (Remastered) - Bob Dylan
  • 12 My Back Pages (Remastered) - Bob Dylan, Roger Mcguinn, Tom Petty, Neil Young, Eric Clapton & George Harrison
  • 13 Knockin' on Heaven's Door (Remastered) - Ensemble
  • 14 Girl from the North Country (Remastered) - Bob Dylan
  • 15 I Believe in You (Afternoon Rehearsal) (Bonus Track) - Sinead O'Connor

아티스트 소개 (20명)

노래 : Bob Dylan (밥 딜런 ,Robert Allen Zimmerman)
밥 딜런의 발자취는 거대하다. 그 이름은 마치 선대의 성인(聖人)처럼 하나의 위엄으로 우리를 억누른다. 딜런과 그의 음악을 피해 가는 것은 ‘록 역사에 대한 접근’을 포기하는 것과 같다. 그를 아는 것은 납세와 같은 신성한 의무에 다름 아니다. 미국의 음악계와 학계에서 ‘딜런 읽기’는 실제로 교양필수 과정으로 인식되어 있다. 그는 록의 40년 역사에서 엘비스 프레슬리(Elvis Presley), 비틀스(The B... 밥 딜런의 발자취는 거대하다. 그 이름은 마치 선대의 성인(聖人)처럼 하나의 위엄으로 우리를 억누른다. 딜런과 그의 음악을 피해 가는 것은 ‘록 역사에 대한 접근’을 포기하는 것과 같다. 그를 아는 것은 납세와 같은 신성한 의무에 다름 아니다. 미국의 음악계와 학계에서 ‘딜런 읽기’는 실제로 교양필수 과정으로 인식되어 있다. 그는 록의 40년 역사에서 엘비스 프레슬리(Elvis Presley), 비틀스(The Beatles) 그리고 롤링 스톤즈(Rolling Stones)와 함께 최정상의 위치를 점한다. 그러나 이들 ‘전설의 빅 4’ 가운데에서도 딜런이 남긴 궤적은 차별화 아닌 특화(特化)되어 역사를 장식한다.

얼핏 그의 위상은 ‘실적주의’로 따질 때 매우 허약해 보인다. 엘비스, 비틀스, 롤링 스톤즈는 그 화려한 전설에 걸맞게 무수한 히트곡을 쏟아냈다. 넘버 원 히트곡만 치더라도 엘비스는 18곡(통산 2위), 비틀스는 20곡(1위), 스톤즈는 8곡(11위)이나 된다. 하지만 딜런은 그 흔한 차트 1위곡 하나가 없다. ‘Like a rolling stone’과 ‘Rainy day woman #12 & 35’ 등 두 곡이 2위에 오른 것이 고작이다. 차트 톱 10을 기록한 곡을 다 합쳐봐야 4곡에 불과할 뿐이다. 그에게 대중성이란 어휘는 어울리지 않는다. 상업적이란 말과는 아예 인연이 없다. 이렇듯 실적이 미미한 데도 록의 역사는 마치 신주 모시듯 그를 전설적 존재로 떠받드는 이유는 무엇일까? 비틀스, 스톤즈, 엘비스는 차트 정복 외에도 또 다른 공통점이 있다. 비록 그 가지는 다를지언정 ‘록의 스타일 확립’ 이라는 몸체는 유사하다는 것이다.

비틀스는 록의 예술적 지반을 확대했고, 스톤즈는 록에 헌신하며 형식미를 완성했고, 엘비스는 록의 정체성을 부여했다고들 한다. 분명히 딜런도 몸체에 자리한다. 깃털은 결코 아니다. 그러나 타(他) 3인의 몸체가 외양이라면 그는 ‘내면’ 이라고 할 수 있다. 바로 노랫말이요, 메시지다. 왜 이것이 중요한가? 음악은 사운드와 형식만으로 이미 메시지가 아닌가? 하지만 그것은 그렇게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로큰롤이 폭발하여 확산되던 시점인 1950년대, 즉 엘비스가 활약하던 당시에 로큰롤은 메시지가 없었다. 1960년대 들어서 비틀스가 미국을 급습해 록의 르네상스를 일궈내고 있던 때까지도 록은 의미있는 가사와 격리된 상태였다. 그래서 의식계층으로부터 멸시를 당했다. 그 때 밥 딜런이 있었다. 비틀스는 누구보다 먼저 딜런의 위력을 절감했다. 그의 포크 사운드와 메시지를 귀담아 듣고 그것을 자신들의 음악에 적극 수용한다. 1965년말 < Rubber Soul > 앨범의 수록곡인 ‘In my life’, ‘Girl’, ‘Norwegian wood’ 등에서 ‘톤 다운’ 을 드러내며 메시지를 잠복시킨 것은 전적으로 딜런의 영향 때문이었다.

밥 딜런은 실로 대중 음악의 지성사(知性史)를 이룬다. 타임(Time)지의 제이 칵스는 1989년 기사에서 다음과 같이 묻는다. “존 업다이크의 소설과 밥 딜런의 앨범 가운데 어느 것이 미국인들의 삶에 보다 자극을 주었는가? 존 업다이크 쪽에 표를 던진 사람이라면 이 기사를 여기까지 읽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의 가사는 그러나 때론 메시지의 파악이 어려운 ‘난해한 현대시’ 와 같다. 밑줄 긋고 열심히 분석해도 도대체 명쾌하지가 않다. 1960년대 중반 < Another side of Bob Dylan >, < Bring it all black home >, < Highway 61 revisited >가 연속 발표되었을 때, 미국 각 대학의 영문과에 ‘밥 딜런 시분석’ 강좌 개설이 유행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우리의 팝팬들에게 딜런이 상대적으로 소원한 이유가 여기에 있을 것이다. 미국인들에게도 이 정도인데 영어의 벽에 막혀 있는 우리가 어찌 그를 쉽게 수용할 수 있었겠는가. 때문인지 음반마저 제대로 소개되지 않았다. 초기곡으로 알려진 것은 그나마 메시지가 확연한 ‘Blowin’ in the wind’정도였다. 하지만 그것도 1970년대 중반의 금지곡 태풍으로 반전(反戰) 노래라는 낙인이 찍히면서 방송과 판매가 금지되었다. 그 외 우리 팝 인구에 회자된 노래로 ‘One more cup of coffee’나 ‘Knockin’ on heaven’s door’가 있다. 그러나 그의 대표곡 반열에도 오르지 못하는 ‘One more cup of coffee’가 통한 것은 단지 낭만적 제목과 함께 친숙한 선율 때문이었을 뿐, 딜런의 음악 세계에 대한 천착의 결과물은 전혀 아니었다. ‘Knockin’ on heaven’s door’ 인기의 영예도 실은 건스 앤 로지스가 더 누렸다.

극소수의 곡을 제외하고 밥 딜런은 우리에게 인기가 없었다. 비틀스, 스톤즈, 엘비스에 비한다면 엄청난 ‘부당 대우’였다. 언어 장벽과 무관한 음악 스타일 측면에서도 우리의 ‘홀대’ 는 마찬가지였다. 멜로디가 그럴싸한 곡이 있더라도 풍기는 내음이 지극히 ‘미국적’ 이었기에 우리의 청취 감성은 딜런을 꺼리곤 했다. 그의 음악 세계라 할 포크, 컨트리, 블루스는 미국 전통과 긴밀한 함수 관계를 지닌다. 선율과 사운드의 영국적인 맛에 길들여진 우리로서는 그의 음악에 잠기기가 쉽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 사이에 우린 어느덧 딜런과 크게 멀어져버렸다. 록의 흐름을 거슬러 올라가다가 꼭 딜런에서 막힌다. 신세대 가운데 더러는 우리의 팝 수용 문화에서 딜런 공백이 가져온 취약성을 맹렬히 질타하기도 한다. 우리 기준에서의 ‘팝 음악 여과’는 바람직하고 필요하다. 그러나 의역은 정확한 직역이 기초돼야 올바르다. 미국의 해석을 전제한 뒤라야 우리식 필터링의 의의가 배가된다.

그 직역의 첫 번째 대상이 바로 밥 딜런이다. 밥 딜런이 미국의 현대 음악사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이유는 그의 음악몸체가 곧 시대와 세대의 흐름을 떠안고 있기 때문이다. 딜런의 음악이 변화하는 과정과 그것을 있게 한 배경, 또한 그것을 주도해간 그의 자세는 ‘음악외적 환경’과 긴밀한 관계가 있다. 먼저 포크 록(Folk-Rock)이다. 그가 1960년대 초반 저항적인 모던 포크로 베이비 붐 세대를 견인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없다. 통기타만으로 연주되는 단순한 구조이지만 그것의 포획력은 비틀스가 사정권에 들어올 만큼 대단한 것이었다. 비틀스가 베이비 붐 세대를 발현시켰다면 그는 그들의 의식화를 유도했다. 그러나 딜런은 케네디의 피살에 자극받으면서 스스로 ‘위기감’ 을 불어넣는다. 이미 비틀스가 세대의 청취 볼륨을 증폭시킨 마당에 포크의 음량 가지고 과연 세대를 관통할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1971년 그는 이렇게 술회한 바 있다. “그들(비틀스)은 아무도 하지 않은 것을 하고 있었다. 그들의 코드는 정말 도에 지나친 것이었지만 하모니가 그것을 타당하게끔 했다. 그러나 맹세하건데 난 정말 그들에게 빠졌다. 모두들 그들이 어린 10대를 위한 광대이며 곧 사라질 것이라고들 했다. 그러나 내겐 명확했다. 그들이 지속력을 갖고 있다는 사실이. 난 그들이 음악이 가야할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내 머리 속에는 비틀스가 전부였다.” 그는 일렉트릭 기타를 잡아야 했다. 그것이 포크 록이었다. 포크의 순정파들로부터 배신자라는 질타는 불 보듯 뻔했다. 그가 뉴포트 포크 페스티벌에서 알 쿠퍼(Al Kooper), 마이크 블룸필드(Mike Boomfield)가 참여한 버터필드 블루스 밴드(Butterfield Blues Band)와 함께 전기 기타 연주를 했을 때 관중들은 “이건 포크 공연이야 나가!”라고 야유하며 돌과 계란 세례를 퍼부었다. 무대에서 내쫓긴 그는 통기타를 들고 되돌아왔지만 의미심장한 ‘It’s all over now’, ‘Baby blue’를 부르며 포크 관객들에게 아듀를 고했다. 껄끄러운 통과의례를 거친 뒤 밥 딜런의 포크 록은 ’Like a rolling stone’의 빅히트와 함께 만개했다. 이젠 막을 자도 없어졌다. 포크 록은 당시에 막대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존 레논과 밥 딜런을 결합해야 한다’는 것을 인식한 그룹 버즈(Byrds)는 ‘Mr. Tambourine man’으로 인기 가도를 질주했다. 그러나 그 곡은 딜런의 작품이었다.

버즈 뿐만 아니라 당시 포크 록계열 뮤지션치고 딜런의 곡을 손대보지 않은 사람은 없었다. 단숨에 포크 록은 1960년대 록의 주류로 부상했다. 1960년대 중.후반을 강타한 싸이키델릭 록(제퍼슨 에어플레인, 그레이트풀 데드)도 실상 포크 록에 영향받은 흐름이었다. 그럼 어째서 포크 록은 1960년대 청춘들을 사로잡아 그들의 의식을 대변할 수 있었을까? 비틀스가 딜런에게 배우고, 딜런이 비틀스로부터 영감을 얻은 ‘포크와 록의 결합’ 은 시대성 견인을 가능케 한 절묘한 무브먼트였다. 록은 생태적으로 거리의 청춘에 의해 확립된 ‘하위문화적 표현’이다. 따라서 하이 클래스나 인텔리겐차와는 일정한 거리를 둔다. 또한 포크는 저항성을 견지하는 민중 음악이지만 음악의 주체나 주소비자층은 학생과 지식인 세력이다. 성질상 엇비슷하면서도 걸어온 길이나 ‘계급성’은 엄연히 다른 것이다. 밥 딜런이 포크 오리지널로부터 급격히 퇴각하여 록으로 전향한 것은 단지 추세의 편승이 아닌 완전함을 향한 ‘하층문화의 긴급 수혈’로 보인다. 이를테면 ‘위’의 고매한 문제의식과 ‘아래’의 근원적 반항을 한고리로 엮는 것이다. 그러면서 저항 영역의 지반 확대와 수요자의 확충을 기할 가능성은 올라가게 된다.

지식인만이 아닌 1960년대 젊은이들의 ‘계층포괄적 무브먼트’ 는 포크 록과 이 점에 있어 밀접한 관계를 맺는다. 1960년대 중후반을 물들인 ‘히피보헤미안’ 물결도 딜런과 떼어낼 수 없는 흐름. 1960년대 록 역사에서 두 번째로 중요한 부분이다. ‘Like a rolling stone’은 포크 지식인의 소리라기보다 보헤미안적 정서의 노출로 파악해야 한다. 당시 딜런은 가치의 상대성을 신뢰하고 제도에 흡수되기룰 거부하는 이른바 비트(Beat) 사상에 빠져 있었다. 그가 진보적 시인인 알렌 긴스버그(Allen Ginsberg)와 교류하며 ‘개인 혁명’에 골똘해 있을 때가 바로 이 무렵이다. 비트는 이후 히피의 융기에 주요 인자가 되는데, 1960년대 중반 딜런의 음악을 가로지르는 것이 바로 이 ‘히피 보헤미안 정서’라 할 수 있다. 스스로 록 세계로 옮아가고 방랑적 지향을 설파한 것은 기존과 기성의 틀 깨기에 목말라 있던 베이비 붐 세대들에게 영도자가 제공한 ‘산교육’과 다름없었다. 따라서 밥 딜런은 그에게 등을 돌린 포크 근본주의자들의 수보다 휠씬 더 많은 록팬을 거뜬히 확보하게 된다. 음악적으로 딜런의 창작성이 이 때만큼 가공의 위력을 떨친 적도 없다. < Highway 61 Revisited >와 < Blonde On Blonde > 앨범은 포크의 엄숙주의에서 해방되어 록과의 결합으로 자유분방한 이미지를 포획한 결과였다. 그리고 그 음악은 ‘남을 위해’ 이데올로기에 봉사한 결과가 아니라 자신의 즐거움이 가져온 산물이기도 했다. 그가 포크의 프로테스트로부터 이탈한 것은 바로 ‘자유’와 등식화되는 ‘예술성’을 찾기 위한 노력이었다.

그는 저항성 대신 예술성을 얻었다. 개인적 경사도 겹쳤다. 사적으로 사라 로운즈와의 결혼은 그의 창작력 한층 북돋아주었으며 그 충만한 행복감은 그대로 < Blonde On Blonde > 앨범에 나타났다. 이 앨범의 탁월한 질감은 상당부분 사라와의 결혼이 낳은 것이라는 게 평자들의 일치된 시각이다. 나중 사라와의 파경 또한 그에게 또 하나의 명반 < Blood On The Tracks >를 안겨준다. 히피의 낭만적인 집단주의와 곧바로 이어진 이피(Yippie)의 전투성이 극에 달할 무렵 그가 뉴욕의 외곽 빅 핑크(Big Pink) 지하실에서 한가로이 더 밴드(The Band)의 멤버들과 자유 세션을 즐기고 있었다는 사실은 아이러니컬하다. 불의의 오토바이 사고가 가져온 행보이기도 했지만 그가 의도적으로 은둔을 택한 것은 분명했다. 세상이 소란함으로 가득할 때 그는 정반대로 정적을 취한 것이다, 그는 자신이 물꼬를 터준 미국 사회의 격랑이 결국 아무런 소득도 없을 것으로 예측했는지도 모른다. 세대의 공동체 지향은 지극히 ‘비이성적’으로 비춰졌을 테고 오히려 그는 그럴수록 자신에게 돌아와 근본을 탐구하는 것이 올바른 행위라고 여겼던 것 같다. 그러한 심저(心底)가 < John wesley Harding >과 < Nashiville Skyline >의 골간에 자리한다. 이 작품들에서 그는 ‘뜻밖에’ 재래식 컨트리 음악을 선보였다. 두 앨범은 모두 내쉬빌에서 녹음되었고 < Nashiville Skyline >의 경우 딜런은 컨트리 음악의 거성 자니 캐시(Johnny Cash)와 듀오로 ‘Girl from the north country’에서 다정히 호흡을 맞추기도 했다. 이 앨범에서 톱 10 히트곡 ‘Lay lady lay’가 나왔다. 이 곡을 비롯해 대부분의 수록곡에서 딜런의 보컬은 예의 날카로움이 거세된 채 한결 부드러워졌고 가사도 접근이 비교적 용이해지는 등 멜로딕한 무드가 전체를 지배했다. 다시 세상은 소용돌이에서 호수의 조용함으로 돌아왔다. 그것이 1970년대 초반의 분위기였다. 딜런이 씨앗을 뿌린 ‘컨트리 록’ 은 1970년대 내내 주요 장르 중 하나로 맹위를 떨쳤다.

딜런은 언제나 흐름의 주역이었다. 나중 음반화된 더 밴드와의 세션 앨범 < Basement Tapes >가 록 역사에서 ‘특혜’를 받는 것도 이러한 배경 속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1970년대 들어서 그는 ‘대중적’ 관점에서 뿌리에 대한 천착에 박차를 가했다. 예전에 그는 ‘좋은 사람만 따르면’ 된다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사람이 많이 따를수록 좋다’는 쪽으로 입장을 정리했다. 그가 1970년 < Self Portrait > 앨범에서 ‘Moon river’를 포함한 팝 스탠다드 넘버들을 노래한 것은 이러한 사고와 맥락이 닿아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대부분의 비평가들이 눈을 흘겼다. 레코드 월드(Record World)지는 이 앨범을 두고 “혁명은 끝났다. 밥 딜런이 ‘미스터 존스’에게 ‘Blue moon’을 불러주고 있다”며 혹평했다.(미스터 존스는 딜런이 < Highway 61 Revisited >의 ‘Ballad of thin man’에서 “여기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아, 존스 씨?”라고 했던 가공의 인물로 ‘제도권 인사’를 상징한다.) 빌보드 차트3위에 오르는 성공을 거두었지만 이처럼 평단의 이해를 구하는 데는 실패했다. 그러나 < Self Portrait >앨범을 상업적 표현으로 볼 수는 없다. 비판의 칼을 휘두르는 비평가들도 그렇게 생각하진 않는다. 근본을 탐구하는 방법론의 연장선에서 파악하는 것이 보다 정확하다. 딜런이 1970년대 후반부에 기독교에 귀의한 것도 비슷한 문맥으로 풀어야 할 것이다. 사실 신(神)에의 의지가 엿보인 < Show Train Coming >, < Saved >, < Shot Of Love > 등 3장의 종교풍 음반은 ‘사고의 깊이’가 두드러졌지만 ‘변신’이라는 부정적 의미에 가치가 함몰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1970년대 딜런을 ‘혼미의 거듭’으로 규정한다. 표면적으로는 그렇다. 그러나 그것을 뒤집어보면 그는 자신의 사고와 감정에 충실했다는 얘기가 된다. 이것이야말로 아티스트의 본령이다. 밥 딜런은 언제나 음악을 통해 세상과 삶의 근본 원리를 탐구하고자 했다.

1980년대의 밥 딜런은 1970년대의 습기를 벗고 ‘열기’를 회복한다. 정치적 시각도 이입한 < Infidels >, < Empire Burlesque > 그리고 1989년에 나온 < Oh Mercy >는 이전의 앨범들과 명백한 분리선을 긋는다. 날카로운 보컬은 오히려 1960년대의 모습에 더 가깝다. 그는 1980년대 중반 라이브 에이드(Live Aid), 아파르트헤이트에 반대하는 아티스트의 모임(Sun City) 등 일련의 자선행사에 얼굴을 내밀어 저항 전선에 복귀했다. 한 무대에서 그는 U2의 보노(Bono)와 함께 ‘Blowin’ in the wind’를 부르기도 했다. 딜런의 1980년대 앨범들에는 당시의 보수적이고 위압적 풍토를 거부하는 저항성이 숨쉰다. 그는 시대의 주류 한복판에는 없었지만 ‘시대의 공기’와 늘 함께 호흡했다. 그 공기를 어떤 때는 앞장 서 조성하고 어떤 때는 그것을 피해갔다. 밥 딜런의 한 면만을 바라보게 되면 그의 진면목을 알 수 없다. 그가 서 있던 ‘양쪽’ 자리를 다 관찰해야만 그 ‘드라마틱한 록 역사의 굴곡’ 을 읽을 수 있다. 록의 역사는 실로 위와 아래, 진보와 보수, 주류와 비주류, 기존과 대안이 끊임없이 부침을 되풀이 해왔다. 밥 딜런이 밟아온 길은 그것의 축소판이었다. 그러나 어떤 시점에서라도 - 가령 프로테스트의 깃발을 울렸을 때나, 대중성에 기웃거렸을 때나 - 딜런이 주변의 압박에 수동적으로 임한 적은 없다. 남이 시켜서 일렉트릭의 세계로 떠밀려 간 것이 아니었고, 의도적으로 신비를 축적하기 위해 은둔했던 것도 아니다. 그의 터전은 언제나 자신의 의지가 지배하는 세계였다. 비평가들이 밥 딜런을 전설로 숭앙하는 것은 그가 대중 음악계에서는 보기 드문 ‘음악의 주체’이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이야말로 음악인의 최고 영예인 ‘아티스트’란 소리를 들어 마땅했다. 그는 록에 언어를 불어넣었다. 포크와 컨트리를 록의 영역으로 끌어들였다. 시대와 맞서기도 했고 자신의 예술성에 천착하기도 했다. 그러한 업적과 성과의 편린들이 모여 그의 ‘광활한 아티스트의 세계를 축조하고 있다. 밥 딜런은 역사의 수혜와 위협 속에서 ‘인간’을 살려냈다. 음악인으로서 인간의 몸체는 다름 아닌 자유일 것이다. 밥 딜런의 위대함이 바로 여기에 있다.
노래 : Willie Nelson (윌리 넬슨,Willie Hugh Nelson)
컨트리, 락 기타 연주자, 싱어송 라이터 컨트리, 락 기타 연주자, 싱어송 라이터
노래 : Tracy Chapman (트레이시 채프먼)
흑인 여가수 트레이시 채프먼의 최근작 < Telling Stories >를 들으면서 생각한다.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 신보에서 그녀가 세상을 바라보는 눈길은 한층 차분하고 따스하다. 혁명을 시사하던 예전의 격한 메시지 전사(戰士)의 모습은 분명 아니다. 1964년 오하이오주 클리블랜드의 가난한 노동자 집안에서 태어난 채프먼은 변혁의 노래로 대성공을 거둔 인물이다. ‘저항’이 대중들에게 크게 어필한다는... 흑인 여가수 트레이시 채프먼의 최근작 < Telling Stories >를 들으면서 생각한다.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 신보에서 그녀가 세상을 바라보는 눈길은 한층 차분하고 따스하다. 혁명을 시사하던 예전의 격한 메시지 전사(戰士)의 모습은 분명 아니다. 1964년 오하이오주 클리블랜드의 가난한 노동자 집안에서 태어난 채프먼은 변혁의 노래로 대성공을 거둔 인물이다. ‘저항’이 대중들에게 크게 어필한다는 사실을 그녀만큼 확실하게 입증한 사람도 없었다. 1988년 채프먼의 데뷔앨범은 바로 그 진보적인 성격 때문에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다. 이러한 사회 정치적 음반은 많이 팔리진 않는 게 통례. 허나 처녀작 < Tracy Chapman >은 놀랍게도 세계적으로 1300만장의 판매고를 올리는 대 이변을 연출했다. 채프먼 자신도 이 앨범으로 그래미 최우수신인상 등 3개 부문을 수상한 뒤 ‘믿을 수 없는 사실’이라고 말했다. 그 때 언론에선 ‘과연 이 음반이 왜 그토록 커다란 호응을 얻었는가’를 두고 여러 분석이 나오기도 했다. 당시 레이건 정부의 보수주의 통치에 많은 미국인들이 물리고 있었다는 점을 빼놓을 수 없다. 채프먼은 바로 이것을 지적했다. 그러나 저항의 세일이 아닌 어디까지나 순수한 비판이었다. 편의점에서 일하는 흑인처녀의 절박함을 묘사한 톱10 히트곡 ‘Fast car’를 비롯해 ‘Across the lines’, ‘Talkin’ bout a revolution’이 다 그랬다. 맨 뒤의 곡은 국내에서 방송과 출반이 금지되었다. 그 시절에 ‘혁명’이란 우리에게 용납된 용어가 아니었다. 그러한 진보에 대한 금기(禁忌)는 미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바로 그런 금기를 뚫는 용기가 미국인들의 뇌리를 헤집었다. 낭랑한 어쿠스틱 기타와 그녀의 중성적 저음에 실려 이 메시지는 미국 전역에 동심원처럼 빠르게 퍼져나갔다. 사람들은 메시지부재 시대에 ‘의식’을, 댄스리듬과 메탈소음 속에서 오염되지 않은 포크의 ‘아름다움’을 경험했다. 트레이시 채프먼의 항쟁은 1989년 2집 < Crossroads >에서 더욱 불타올랐다. 수록곡 ‘Born to fight’ 하나로 충분했다. ‘그들은 내가 가진 것과 자존심을 빼앗아 갔지/ 나는 싸우기 위해 태어났어….’ ‘Freedom now’의 경우는 투옥중인 남아공의 만델라를 위해 쓴 곡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채프먼의 투쟁성이 높아갈수록 이상하게 대중들은 그녀에게 고개를 돌리기 시작했다는 것이다(강 건너 불 구경!). 영국에서는 앨범차트 1위에 올랐지만 본국 미국에서는 반응이 냉담했다. 1992년 3집 < Matters Of The Heart >는 아예 소수를 위한 음악으로 전락했다. 사실 흑인형제들은 채프먼의 포크보다는 대신 랩과 힙합을 좋아했다. 포크가 ‘백인의 전유물’로 인식되어온 탓일까. 오히려 채프먼의 음악은 ‘속죄’에 시달리는 백인지성들의 것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직설적 발언이 재차 반복되자 싫증을 느낀 백인들은 곧 발을 뺐다. 아마도 팬들이 흑인들이었다면 상황은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그렇다고 ‘찻잔 속 태풍’으로 끝나진 않았다. 채프먼은 혁명성을 직선적이 아닌 ‘우회적’인 방식으로 드러내며 변화를 준 1996년 앨범 < New Beginning >으로 데뷔작 못지 않은 찬사와 호평을 받았다. 앨범은 흑인들의 한(恨)을 다독거리는 인간적 내용이었다. 블루스 느낌이 강한 < Give me one reason >은 차트 5위를 기록했고, 그래미상 ‘베스트 록 송’의 영예도 안았다. 수록곡 ‘New beginning’, ‘I’m ready’의 희망에 찬 가사와 앨범커버에서 처음 보는 그녀의 환한 미소(이전 작품들과의 재킷사진 비교는 필수!!). 그것은 사상 최고의 경제호황을 맞고있는 클린턴 집권기에 그녀가 체감한 변화의 조짐이었다. 트레이시 채프먼이 이제 다시 돌아왔다. 앨범 < Telling Stories >는 데뷔앨범에서 뛰어난 ‘포크 록’ 편곡을 과시한 명 프로듀서 데이빗 커센바움(David Kershenbaum)의 조력을 받아 만들었다. 신보의 초점이다. 커센바움을 다시 초빙하여 포크 록을 재활(再活)시키고자 하는 의욕이 넘친다. 음악의 폭도 넓어졌다. 팝 분위기가 강해졌는가 하면 어쿠스틱 기타 한 대만으로 노래한 곡도 있다. 노랫말은 사람들 사이의 단절을 그린 타이틀곡 ‘Telling stories’, 돈은 단지 잉크가 묻은 종이에 불과하다는 ‘Paper and ink’ 등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들이다. 흑인에서 세상과 보편적 우주로 대상이 확대되어있다. 앨범이 그래서 한층 여유 있다. 트레이시 채프먼은 흑인의 저항을 표출하는 통로가 랩이 아닌 다른 길도 있음을 보여주었다. "포크는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이슈를 다뤄온 역사와 전통을 갖고 있다. 그리고 미국 포크에는 흑인의 흐름이 있다." 지금이 또 앞으로 복잡한 사운드가 범람할 것이기에 그녀의 포크는 영원히 살아 숨쉴 것이다. 그녀에게 차트성적을 가지고 부진하다거나 힘이 다했다거나 하는 것은 포크음악의 본질과 채프먼의 아이덴티티를 무시하는 처사일 것이다.
1960년대 제임스 브라운과 더불어 흑인 대중음악의 산 증인으로 칭송되는 스티비 원더(Stevie Wonder)는 11살의 어린 나이에 흑인 팝 소울 음악의 전설 모타운 레코드(Motown)사에 소속되어 음악활동을 시작, 1970년대부터 셀프 프로듀싱(Self-producing)을 선언하며 앨범 제작 전 과정을 진두지휘하는 ’아티스트’의 천재(天才)를 부각시킨 팝 스타이다. 천부적인 작곡 감각과 각종 키보드를 비... 1960년대 제임스 브라운과 더불어 흑인 대중음악의 산 증인으로 칭송되는 스티비 원더(Stevie Wonder)는 11살의 어린 나이에 흑인 팝 소울 음악의 전설 모타운 레코드(Motown)사에 소속되어 음악활동을 시작, 1970년대부터 셀프 프로듀싱(Self-producing)을 선언하며 앨범 제작 전 과정을 진두지휘하는 ’아티스트’의 천재(天才)를 부각시킨 팝 스타이다. 천부적인 작곡 감각과 각종 키보드를 비롯, 앨범 녹음시 대부분의 악기를 혼자서 다 연주해 낼 정도의 다재(多才)를 유감 없이 발휘한 그는 도무지 시각 장애인이라고 믿을 수 없는 독창성을 자신에 음악에 담아낸다. 또한 마빈 게이(Marvin Gaye)와 함께 1970년대 미국 사회 내 흑인들의 비참한 삶과 애환을 표현한 ’게토 리얼리티’를 얘기한 음악인으로 기억되면서 흑인 인권 지도자 마틴 루터 킹(Martin luther King) 목사의 생일을 국경일로 정하자는 운동을 이끌었던 사회 운동가이기도 했다. 자신의 노래를 통해 스티비 원더는 지금껏 인종과 이념의 벽을 넘어선 절대불변의 숭고한 가치인 ’사랑의 전도사’임을 전 세계에 알려왔다. 그의 음악만큼이나 이런 그의 행적은 전 세계 음악인들로부터 존경의 대상으로 그를 기억하게 했다. 1950년 5월 13일 스티브 랜드 모리슨(Steveland Morrison)이라는 본명으로 미국 미조리주 출신인 그는 태어나자마자 인큐베이터의 과잉 산소 공급 사고로 맹인이 되었다. 디트로이트로 이주해 소년기를 보낸 그는 일찍부터 음악적으로 재능을 드러내 10살이 되기도 전에 대부분의 악기를 스스로 터득하는 천재성을 보인다. 1962년 11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그는 천재성을 인정받으며 베리 고디(Berry Gordy Jr.)가 이끄는 모타운 레코드사와 계약을 한다. 리틀 스티비 원더(Little Stevie Wonder)라는 아름으로 발표한 그의 첫 싱글인 라이브 버전 ’Fingerprints-part 2’(1963)가 발표 즉시 차트 1위에 오르며 순조롭게 출발한다. 1965년부터 이후 6년 간 ’Uptight’(1966), ’I was made to love her’(1967), ’For once in my life’(1969), ’My cherie amour’(1969), ’Yester-me, yester-you, yesterday’(1969), ’Signed, sealed, delivered’(1970)등 수많은 히트곡을 발표하며 그는 명실상부한 모타운 대표 인기스타로 떠오른다. 21살이 되던 1971년 모타운 측과 재계약을 앞두고는 ’앨범 제작에 관한 모든 통솔권을 자신에게 위임할 것’이라는 계약 조건을 내세운다. 당시까지 철저한 ’스타 시스템’으로 운영되던 모타운 사의 입장에선 매우 부담스러웠던 요구를 그는 끝내 관철시키며 셀프 프로듀싱으로 제작한 첫 앨범 < When I’m Coming From >(1971)을 발표한다. 이듬해인 1972년 < Music of my Mind: 앨범 차트 21위 >를 시작으로 같은 해 가을 발표된 명반 < Talking Book:앨범 차트 3위 >(1972)을 연속으로 히트시키며 앨범 모든 수록 곡의 작곡은 물론 연주와 프로듀싱을 혼자서 해낸다. 또한 이 앨범은 A면의 첫 곡 ’You are the sunshine of My life’와 B면의 첫 곡 ’Superstition’을 모두 싱글차트 1위에 등극하는 놀라운 기록을 수립한다. 1972년 같은 해 발표된 두 장의 앨범을 통해 그는 기존 3분대의 모타운 식 히트 곡의 틀을 벗어나 ’Super woman’, ’Maybe your baby’와 같은 6-7분대의 대곡을 과감히 수록했고, 재 계약을 통해 받은 계약금으로 클라비넷, OBX, ARP, 폴리포닉, 무그와 같은 다양한 신시사이저 장비들을 도입, 사운드의 혁신을 일궈낸다. 이듬해 발표한 < Innervisions >(1973)는 그의 싱어 송 라이터로서의 위상을 한층 높여준 명반으로 흑인 빈민들의 비참한 생활상을 적나라하게 묘사한 ’Living in the city’와 재즈적인 접근을 강하게 드러낸 ’Too High’, ’Superstition’에 버금가는 펑키한 넘버 ’Higher Ground’, 절대자인 신에게 헌정하는 가스펠 곡 ’He’s Misstra know it all’을 담은 수작이었다. 전작에 이어 앨범 차트 1위를 기록하며 < Innervisions >는 이듬해인 1974년 그래미 상 ’올해의 앨범’ 부문을 비롯, 4개 부문을 휩쓰는 쾌거를 올린다. 1974년 교통사고로 심한 부상을 당하며 잠시 활동의 위기를 맞은 그는 이에 아랑곳없이 < Fulfillingness’ First Finale >(1974)를 발표하며 ’You Haven’t done nothing’, ’Boogie on Reggae woman’을 각각 팝 차트와 R&B 차트 1위에 올리며 앨범은 1975년 다시 한번 그래미 어워드 ’올해의 앨범’상을 비롯, 5개 부문을 석권한다.(올해의 앨범상을 연속으로 수상한 건 스티비 원더가 처음이었다.) 1975년 모타운 사와 1천 3백만 불의 재계약을 한(당시 팝 음악계에선 최고의 액수) 그는 2년여의 준비 끝에 더블 앨범< Songs in the key of life >(1976)을 발표한다. 전작들과 마찬가지로 히트곡이 쏟아진 앨범에서 ’Sir Duke’, ’I Wish’가 팝 차트 1위에 오르고, 팝 가수 조지 마이클이 1998년에 리메이크 하기도 한 7분이 넘는 대곡 ’As’(36위)와 재즈 기타리스트 조지 벤슨(George Benson)의 코러스와 재즈 플롯주자 바비 험프리(Bobby Humphrey)가 참여한 라틴 팝 ’Another star’(32위) 역시 좋은 반응을 얻는다. < Songs on the key of life >는 이듬해 1977년 다시 그에게 그래미 어워드 ’올해의 앨범’상을 안겨다 준다. 70년대 말, 스티비 원더는 흑인의 정신적 지주였던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생일을 국경일로 정하자는 운동을 펼치고 있었다. 음악 외에도 흑인의 권익신장 운동에 누구보다도 앞장섰던 그는 4년여의 공백 끝에 발표한 < Hotter than July >(1980)의 수록곡 ’Happy Birthday’를 통해 이런 그의 노력을 전 세계에 알린다.(결국 1985년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생일은 미국 국경일로 지정된다) 앨범에선 이 외에 레게의 시인 밥 말리(Bob marley)에게 헌정하는 레게 넘버 ’Master Blaster(jammin’)’와 지금껏 애청되는 그의 러브 발라드 ’Lately’를 차트에 진입시키는(각각 5위, 64위) 성과를 거둔다. 영화 음악 작곡에도 열심이었던 스티비 원더는 < Journey Through the secret life of Plant >(1979)를 시작으로, 그에게 오스카 주제가 상을 안겨준 영화 < Woman in Red >(1984)의 테마 곡 ’I just called to say I love you’를 팝 차트 1위에 올리며 전 세계를 스티비 원더 열풍 속으로 다시 한번 몰아넣는다. 그의 영화 음악 작업은 < Jungle Fever >(1991), < The adventure of Pinocchio >로 계속된다. 1983년엔 폴 메카트니와 함께 한 듀엣 곡 ’Ebony & Ivory’로, 1985년 ’Part time Lover’로 다시 팝 차트 1위에 오르며 그의 인기는 식을 줄 몰랐다. < Character >(1987)이후 8년이라는 긴 공백기에 들어간 그는 < Conversation Peace >(1995)로 다시 팝 무대에 복귀한다. 90년대 활동은 비록 예전만큼의 날카로운 창조력은 아니었지만 전 세계 수많은 팝 음악인들의 기대와 존경을 한 몸에 받으며 다시는 그 누구도 재현 못할 ’팝 음악의 대가’임을 다시 한번 전 세계에 알린다.
자니 캐쉬(Johnny Cash)는 2차 세계대전 직후 컨트리 음악계에서 가장 인상적이고 영향력 있는 활동을 펼친 뮤지션 중 한명이다. 깊고 낭랑한 중음역대의 보컬과 간결한 기타와 함께 그는 기본에 충실하면서도 자신만의 진보적이고 독특한 사운드를 추구했다. 컨트리뮤직의 고향인 내쉬빌사운드(Nashville), 홍키통크(Honky Tonk), 로큰롤(Rock’n’Roll), 그 어떤 것에도 치우치지 않은 자신만의 ... 자니 캐쉬(Johnny Cash)는 2차 세계대전 직후 컨트리 음악계에서 가장 인상적이고 영향력 있는 활동을 펼친 뮤지션 중 한명이다. 깊고 낭랑한 중음역대의 보컬과 간결한 기타와 함께 그는 기본에 충실하면서도 자신만의 진보적이고 독특한 사운드를 추구했다. 컨트리뮤직의 고향인 내쉬빌사운드(Nashville), 홍키통크(Honky Tonk), 로큰롤(Rock’n’Roll), 그 어떤 것에도 치우치지 않은 자신만의 서브장르를 만들고 구축했다. 감성적으로 무디고 정직한 포크(Folk)와 반항적인 로큰롤(Rock’N’Roll) 그리고 염세적인 컨트리(Country)뮤직 사이의 중간지점에서 캐쉬는 로큰롤의 탄생과 반항적 태도 그리고 다분히 록적인 간소함과 솔직한 음악적 발성법을 적절히 융화시켜냈다. 거기에는 깊은 역사적 공감대가 존재했다. 그는 음악적 사명을 다하는 그 날까지 100곡이 넘는 히트싱글을 내며 흑과 백 모두에게 인정받았고, 특히 록의 황제(King of Rock) 엘비스 프레슬리(Elvis Presley)를 비롯해 한 시대를 풍미한 당대의 거목들(칼 퍼킨스, 제리 리 루이스, 척 베리)과 함께, 1950년~60년대를 빛낸 로커빌리(Rockabilly)음악의 대표적 인물 중 하나였다. 아칸사스 출신인 자니 캐쉬는 세 살 때에 다이에스(Dyess)로 이주했다. 열둘 어린나이에 그는 이미 자신의 노래를 쓰기 시작했다. 라디오에서 들은 컨트리 송에 음악적 영감을 얻은 그는 고등학교시절 아칸사스 라디오 방송국(KLCN)에서 노래했다. 대학을 졸업한 1950년에는 자동차회사에 취직해 디트로이트로 거처를 옮겼다. 한국전쟁의 발발과 함께 그는 공군에 입대했다. 공군에 있는 동안 캐쉬는 기타를 구입해 스스로 연주를 익혔다. 그는 ‘Folsom prion blues’를 포함해 본격적으로 곡을 쓰기 시작했다. 캐쉬는 1954년 공군에서 예편해 텍스사 여성 비비안 리베르토(Vivian Leberto)와 결혼했다. 멤피스에서 신혼생활을 시작한 그는 라디오 아나운서과정을 밟았다. 밤에는 기타리스트 루더 퍼킨스와 베이시스트 마샬 그랜트로 구성된 트리오의 일원으로 컨트리음악을 연주했다. 지방라디오방송국(KWEM)에서 무료로 공연을 간간히 겸하면서 안정된 연주의 기틀을 마련하던 트리오는 선 레코드사에 오디션을 볼 기회를 잡게 된다. 마침내 1955년 샘 필립스가 설립한 선 레코드사(Sun Records)에 오디션을 치르게 된 캐쉬는 처음에 자신을 가스펠싱어로 소개했다. 필립스는 자니에게 좀 더 상업적인 것을 요구했고, 그는 ‘Hey Porter’로 곧 필립스를 매료시켰다. 이를 계기로 캐쉬는 자신의 데뷔싱글 ’Cry Cry Cry’/Hey Poter’를 발매하게 된다. 필립스는 싱글레코드에 캐쉬를 “자니”라고 기입했다. 레코드 프로듀서는 또한 퍼킨스와 그랜트를 테네시 투(Tennessee Two)라고 불렀다. 1955년에는 ‘Cry Cry Cry’가 인기를 얻으며 컨트리차트 14위에 올랐다. 그리고 루이지애나 헤이라이드(Louisiana Hayride) 지역에서 거의 1년간 머물렀다. 두 번째 싱글 ’Folsom prison blues’가 1956년 초 컨트리차트 4위의 쾌거를 올렸고, 연이어 ‘I walk the line’이 6주간 1위를 차지함과 더불어 팝 차트에도 탑20위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1957년에도 컨트리싱글차트 13위에 랭크된 ‘Give my love to rose’를 포함해 몇 곡의 히트곡을 내며 히트행진을 이어갔다. 캐쉬는 또한 화려한 장식으로 치장한 타 뮤지션들과 달리 완전히 검정복장으로 그해 그랜드 올 오프리(Grand Ole Opry debut)에 데뷔했다. 이로 인해 그는 ’맨 인 블랙‘이라는 별명을 얻게 된다. 그리고 1957년 11월에 그는 드디어 자신의 처녀작 < Johnny Cash with his hot and blue guitar >를 발매해 음반매장을 강타했다. 1958년에는 10주간 차트 정상을 지킨 ‘Ballad of a teenage queen’을 비롯해 또 다른 넘버원 싱글 ’Guess thing happen that way을 포함해 무려 8곡을 컨트리와 팝 차트 공히 상위권에 올리며 성공가도를 질주했다. 1958년에 그는 가스펠앨범을 녹음하고자 했으나 선(sun)에서는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선 레코드는 또한 캐쉬의 음반로열티 인상에도 반대했다. 두 가지 결정적 연유로 캐쉬는 결국 1958년 콜롬비아레코드사(Columbia Records)로 레이블을 옮겨 그해 말 싱글 ‘All over again’을 내놓았다. 이 곡은 컨트리차트 4위와 팝 차트 38위에 올랐다. 1959년 초에는 콜럼비아에서 발표한 두 번째 싱글 ‘Don’t take your guns to town’ 또한 컨트리차트 정상을 차지했다. 팝 차트에도 32위까지 올라 그의 최대히트곡 중 하나가 된 이 곡과 함께 그해 내내 발매된 싱글들이 앞 다퉈 차트 정상에 등극했다. 캐쉬는 가스펠앨범을 낼 기회도 맞았다. 자니 캐쉬의 찬송가는 1970년대까지 주제앨범연작으로 만들어졌다. 하지만 지칠 줄 모르는 히트행진을 지속하던 그의 쾌속질주에도 제동이 걸리기 시작했다. 1959년에, 그는 1년에 거의 300회가 넘는 공연일정을 소화하는 동안 암페타민(각성제)을 복용하기 시작했다. 1961년까지 그의 약물복용은 날로 증가했다. 그로인한 악영향은 히트 싱글과 앨범 수의 감소세로 나타났다. 1963년에 그는 가족을 떠나 뉴욕으로 이주하기에 이른다. 그러던 중 캐쉬는 술친구 칼 스미스(Carl Smith)의 아내 준 카터(June Carter)에게서 받은 ‘Ring of fire’로 컨트리차트 정상을 마크한다. 이 곡은 7주간 차트정상에 머무르며 팝 차트에도 20위에 올랐다. 1964년에는 ‘Understand your man’가 넘버원 히트를 기록했다. 그러나 약물중독의 어두운 그림자에 둘러싸여있던 캐쉬는 1965년 자신의 기타케이스로 엠페타민을 다량 밀수하다 엘 파소(El Paso)에서 체포되었다. 같은 해 그랜드 올 오프리(Grand Ole Opry)에서의 공연이 거절당했고, 그동안 각광받아온 커리어에도 치명적 타격을 입었다. 1966년에는 아내 비비안이 이혼을 제소했다. 이혼 후 캐쉬는 내쉬빌로 이주했다. 거기에서 그는 칼 스미스와 이혼한 준 카터와 친밀해졌다. 카터의 조력으로 그는 약물중독에서 서서히 벗어날 수 있었다. 그녀는 또한 캐쉬를 기독교신자로 바꿨다. 1968년 초 ’Jackson’과 ‘Rosanna’s going wild’가 탑 텐 히트 기록하면서 재비상의 날개를 펴기 시작한 자니는 공연 중 무대 위에서 운명의 여인 준 카터에게 드라마틱한 청혼을 했고, 1968년 봄 결혼식을 올렸다. 1968년에, 자니 캐쉬는 가장 큰 인기를 끈 앨범 < Johnny Cash at Folsom Prison >을 녹음 발표했다. 교도소 공연실황을 녹음한 이 앨범에서 싱글 커트된 ‘Folsom prison blues’가 팝 차트에 걸쳐 큰 인기를 얻으며 컨트리차트 정상을 재확인했다. 그리고 연말에 레코드는 골드를 기록했다. 이듬해, 그는 후속앨범 < Johnny Cash at San Quentin >을 발표했다. ’A boy named sue’는 컨트리차트 1위와 팝 차트 2위에 오르며 히트싱글이 되었다. 캐쉬는 1969년 밥 딜런(Bob Dylan)의 컨트리앨범 < Nashville Skyline >에 게스트로 참여했다. 딜런은 ABC 가수 텔레비전프로그램 ‘자니 캐쉬 쇼’에 출연해 그에 화답했다. 자니 캐쉬쇼는 1969년과 71년, 2년에 걸쳐 방영되었다. 캐쉬는 1970년대 들어 제2의 전성기를 누린다. 자신의 텔레비전쇼와 더불어, 그는 백악관에서 리차드 닉슨(Richard Nixon)을 위해 공연한 것을 비롯해, (Gunfight)에서는 명배우 커크 더글라스(Kirk Douglas)와 함께 공연했으며, 존 윌리엄스(John Williams)와 보스턴 팝스 오케스트라와 함께 공연했다. 다큐멘터리영화의 테마로도 주목받은 그는 ’Sunday morning coming down’과 ‘Flesh and blood’이 넘버 원 히트를 기록하며 변함없는 인기를 이어갔다. 1971년을 통해, 자니 캐쉬는 차트 3위를 기록한 ’Man in black’을 포함해 히트행진을 지속했다. 캐쉬와 카터 모두 1970년대 초 토착미국인과 죄수들의 시민권을 위한 캠페인에 참여하며 사회적 활동을 넓혀갔다. 가끔은 빌리 그래험(Billy Graham)과 함께 하기도 했다. 1970년대 중반, 캐쉬의 차트 등장횟수는 줄어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는 마이너히트를 이어갔다. 그리고 1976년 ‘One piece at a time’(컨트리차트1위)를 비롯해 웨일론 제닝스(Waylon Jennings)와 듀엣으로 노래한 ’There ain’t no good chain gang’(컨트리차트 2위)와 ‘(Ghost)riders in the sky’와 같은 빅 히트싱글을 간간이 냈다. 1975년 캐쉬는 자서전 < Man in black >을 출간했다. 1980년에 그는 가장 젊은 나이에 컨트리 명예의 전당에 올랐다. 그러나 1980년대에는 눈에 띄는 히트싱글을 내지 못하면서 고전했다. 콜럼비아 레코드사와도 마찰을 빚었다. 자니 캐쉬(Johnny Cash)는 1982년 선(Sun)출신의 로커빌리 명인 칼 퍼킨스(Carl Perkins), 제리 리 루이스(Jerry Lee Lewis)와 함께 팀을 이뤄 레코드 < The Survivors >를 발표했고 괜찮은 성과를 올렸다. 캐쉬, 웨일론 제닝스, 윌리 넬슨(Willie Nelson) 그리고 크리스 크리스토퍼슨(Kris Kristofferson)이 동참한 밴드 The highwaymen은 1985년 그들의 첫 앨범을 발표했다. 이 앨범 또한 적당한 성공을 거뒀다. 다음 해, 캐쉬와 콜럼비아사의 계약이 만료됐다. 그리고 그는 머큐리 내쉬빌(Mercury Nashville)과 계약했다. 새로운 레이블은 그러나 그의 성공을 입증해주지 못했고, 스타일의 방향을 둘러싼 논쟁을 해야 했다. 게다가 컨트리 라디오방송 프로는 더욱 현대적인 아티스트에게 호감을 가지기 시작했다. 캐쉬는 곧 자신이 차트에서 밀려날 것을 알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콘서트를 통해 대중들과의 소통을 계속해 나갔다. 하이웨이멘(Highwaymen)은 1992년 두 번째 앨범을 녹음했다. 그리고 머큐리에서 낸 캐쉬의 어떤 레코드보다 상업적으로 더 큰 성공을 거뒀다. 그 즈음 머큐리와의 계약기간이 끝난 그는 1993년에 아메리칸 레코드사(American Records)에 새 둥지를 틀었다. 새 레이블에서 낸 첫 앨범 < American Recordings >는 설립자 릭 루빈(Rick Rubin)이 프로듀싱을 맡았다. 이 앨범의 전 수록곡은 어쿠스틱한 노래들이었다. 이 앨범은 대박을 터뜨리지는 못했으나, 그의 커리어를 되살리는 기폭제가 됨과 동시에 그를 록 중심의 젊은 음악팬들과 호흡할 수 있게 했다. 1995년에 하이웨이멘은 그들의 세 번째 앨범 < The Road Goes on Forever >를 발표했다. 이듬해 캐쉬는 탐 페티& 하트브레이커스가 피처링으로 참여한 그의 두 번째 앨범 < Unchained >를 발표했다. 그리고 2000년 봄 캐쉬는 자신의 생애를 되돌아 본 회고조의 앨범을 사랑, 신, 살인 세장으로 묶어 선보였다. 그 다음해에는 새로운 스튜디오앨범 < American Ⅲ: Solitary Man >이 뒤이어 발매되었다. 1990년대와 2000년에 들어 자니 캐쉬는 건강문제로 힘든 나날을 보냈지만 루빈과의 레코드작업을 지속해나갔다. 그들은 네 번째 합작품 < American Ⅳ: The man comes around >을 2002년 후반에 발매했다. 이듬해에는 나인 인치 네일스(Nine Inch Nails)의 ‘Hurt’를 커버한 뮤직비디오가 기대이상의 갈채를 받으며 미디어의 주목을 받았다. 또한 MTV뮤직비디오시상식에서 ’올해의 비디오‘에 후보로 지명돼 그 인기는 절정에 달했다. 수많은 화제를 뿌리며 한창 분위기에 젖어있을 때, 운명적 음악인생의 동반자(아내) 준 카터 캐쉬가 심장수술 경과 악화로 2003년 5월 15일 그의 곁을 떠나갔다. 4개월 후 자니도 당뇨 합병증으로 테네시 내쉬빌에서 숨을 거뒀다. 그의 나이 71세였다.
노래 : John Mellencamp (존 멜렌캠프,Johnny Cougar / John Cougar / John Cougar Mellencamp)
하트랜드 락 싱어송라이터 하트랜드 락 싱어송라이터
역사상 가장 위대한 그룹 비틀스의 한 사람으로 파퓰러 뮤직에 지대한 공헌을 남긴 그는 그룹과 솔로활동에 걸쳐 휘황찬란한 영광과 쓰린 고난의 인생을 살았다. 2001년 11월29일 후두암으로 유명을 달리하면서 존 레논의 죽음과 함께 이제 비틀스는 역사의 장으로 넘어가게 됐다. 비틀스 시절 작곡 콤비 존 레논과 폴 매카트니에 눌려 자신의 음악세계 구현에 어려움을 겪던 그는 1970년 그룹 해산 전후에 창작의 힘찬 날... 역사상 가장 위대한 그룹 비틀스의 한 사람으로 파퓰러 뮤직에 지대한 공헌을 남긴 그는 그룹과 솔로활동에 걸쳐 휘황찬란한 영광과 쓰린 고난의 인생을 살았다. 2001년 11월29일 후두암으로 유명을 달리하면서 존 레논의 죽음과 함께 이제 비틀스는 역사의 장으로 넘어가게 됐다. 비틀스 시절 작곡 콤비 존 레논과 폴 매카트니에 눌려 자신의 음악세계 구현에 어려움을 겪던 그는 1970년 그룹 해산 전후에 창작의 힘찬 날개를 저으며 ‘While my guitar gently weeps’ ‘Something’ ‘Here comes the sun’ 그리고 비틀 최초의 솔로 1위 곡인 ‘My sweet lord’ 등 불멸의 팝송을 남겼다. 그는 이후에도 ‘What is life’ ‘You’ ‘Crackerbox palace’ ‘All those years ago’ 등의 히트곡으로 독자적인 히트행진을 계속했다. 영국 리버풀의 가난한 노동자의 아들로 1943년에 태어나, 열 세 살이던 1956년 레벨스(Rebels)를 결성한 그는 폴 매카트니의 소개로 만난 존 레논과 함께 비틀스를 만들어 팝 역사의 신기원을 창조했다. 그룹 시절 내성적인 성격으로 카리스마 강했던 존과 출중한 능력의 폴이나 사적(私的) 흡인력이 강했던 링고 스타에 비해 돋보이지 못했으나, 그 성실성과 겸손함으로 도리어 비틀 매니아들의 꾸준한 성원을 받았다. 비틀스 시절에 그가 심취한 것은 인도사상과 종교였다. 음악적으로도 인도에 경도되어 인도 벵갈리의 시타르(sitar)의 달인인 라비 샹카(Ravi Shankar)와 교분을 가졌으며 실제로 비틀스의 작품인 ‘Norwegian wood’에서 막 배운 시타르를 연주하기도 했다. <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 >의 수록곡으로 역시 시타르를 연주한 ‘Within you without you’는 인도냄새가 물씬했다. 비틀스가 공식적으로 해산한 1970년 그는 비틀스 멤버 중 최초로 차트 1위를 차지한 ‘My sweet lord’와 이 곡이 실린 3장 짜리 LP < All Thins Must Pass >로 화려한 솔로 활동을 개시했다. 하지만 그의 첫 솔로작품은 전자악기를 실험했고 인도 풍으로 채색된 1968년의 앨범 < Wonderwall Music >이었다. 훗날 브릿 팝 그룹 오아시스(Oasis)의 미국정복을 달성하게 한 곡 ‘Wonderwall’이 바로 이 앨범의 제목을 딴 것이었다. 조지 해리슨이 전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킨 것은 이듬해인 1971년 여름 미국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개최한 ‘방글라데시 자선 콘서트’였다. 그가 주관하여 CBS TV로 미 전역에 중계된 이 행사에는 밥 딜런, 레온 러셀, 에릭 클랩튼, 빌리 프레스톤 그리고 라비 샹카가 동참했고 그 실황은 역시 3장 짜리 LP인 < Concert For Bangla Desh >로 엮어냈다. 이 공연은 1980년대를 장식한 ‘라이브 에이드’ ‘넬슨 만델라 고희공연’ 등 자선공연의 패턴을 미리 제시했다는 평을 받는다. 이 앨범은 이듬해 그래미상의 ‘올해의 앨범’상을 수상했다. 이 앨범에서 싱글로 내놓은 ‘Bangla desh’는 차트 25위(영국 10위)에 올랐고 1973년 발표한 앨범 < Living In The Material World >에서는 다시 차트 정상을 밟은 곡 ’‘Give me love(give me peace on earth)’가 나왔다. 이 무렵 그는 존 레논과 더불어 세계평화 이념에 봉사했다. 잇단 성공에 고무된 그는 다크 호스(Dark horse)란 이름의 독자 레이블을 설립했고 동명의 앨범 < Dark Horse >를 선보여 ‘Dark horse’(15위) ‘Ding dong; ding dong’(36위)로 준(準)히트를 기록했으나 예상만큼의 호응을 거둔 것은 아니었다. 게다가 이 무렵은 아내 패티 보이드(Patti Boyd)와 결혼생활이 흔들리면서 파경상태에 접어들어 앨범에는 블루스의 비애로 가득한 ‘So sad’ 그리고 패티와의 이별을 암시한 에벌리 브라더스의 넘버 ‘Bye bye love’가 수록되었다. 결국 패티는 그의 곁을 떠나 자신에게 변함 없는 열애를 전한 에릭 클랩튼의 품에 안겼다. 설상가상으로 그는 1976년 자신의 대표작인 ‘My sweet lord’가 쉬퐁스(Chiffons)의 ‘He’s so fine’ 일부 멜로디를 무의식적으로 표절했다는 법정판결을 받아 배상금으로 58만7천 달러를 무는 불명예를 당했으며 A&M에 앨범 출반 시기를 어기는 바람에 우여곡절 끝에 음반배급사를 워너 브라더스로 옮기는 진통을 겪었다. 이어 1976년 말에 내놓은 새 앨범 < 33 ⅓ >의 첫 싱글 ‘This song’(25위) 역시 표절의혹에 휩싸이는 등 역경이 계속되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두 번째 싱글로 낸 ‘Crackerbox palace’는 조지 해리슨 특유의 리듬감과 독특한 음색을 전하면서 차트 19위로 분전했다. 1978년에는 올리비아 아리아스와 재혼하여 활기를 되찾았고 이듬해에는 자신의 이름을 내건 앨범과 히트곡 ‘Blow away’(16위)로 건재를 과시했다. 그의 이름이 다시 광채를 발했던 시점은 1981년 고 존 레논에 대한 트리뷰트 ‘All those years ago’가 차트 2위에 올랐을 때였지만 이듬해 낸 독집 < Gone Troppo >는 참패를 면치 못했다(앨범 차트 108위). 이후 그는 음악활동을 중단하고 영화와 TV극 제작에 몰두했으며 1982년에는 자서전 < I Me Mine >(비틀스의 앨범 < Let It Be >에 수록된 조지의 곡명)을 내놓기도 했다. 1987년에는 5년의 공백을 뚫고 그룹 일렉트릭 라이트 오케스트라(ELO)의 제프 린(Jeff Lynne)이 프로듀스한 앨범 < Cloud Nine >으로 컴백, 싱글 ‘Got my mind set on you’으로 통산 3번째 차트 정상을 차지했다. 1962년 제임스 레이(James Ray)의 올드 넘버를 리메이크한 이 곡에 이어 비틀스 시절을 그린 ‘When we was fab’도 차트 23위에 올랐다. 이 곡은 그의 차트 마지막 히트곡이 됐다. 제프 린과의 작업을 계기로 그는 1988년 제프 린이 주도한 프로젝트 그룹 트래블링 윌베리스(Traveling Wilburys)에 참여, 다시 한번 존재를 각인시켰다. 여기에는 그와 제프 린 말고도 록의 초기 거장 로이 오비슨(Roy Orbison) 밥 딜런(Bob Dylan)과 탐 페티(Tom Petty) 등 팝의 거물들이 가세, 5인조 라이업을 취했다. 이들의 첫 앨범 < Taveling Wilburys Vol. 1 >은 차트 3위에 오를 만큼 화제와 성공을 창출했다. 이후에도 조지 해리슨은 1991년 일본공연, 이듬해 그가 따르던 인도사상가 마하리시 마헤시 요기의 내추럴 로우(Natural Law) 신당 출범 공연 등 잇따라 콘서트에 모습을 드러냈다. 1997년 그가 후두암 질환에 시달린다는 공식발표가 나왔고 2000년에는 살해협박과 피습을 당하는 역경도 있었으나 아픈 몸을 이끌고도 영국 자택의 스튜디오에서 음반작업은 지속했다(유작 발표예정). 2001년 11월29일 그는 병마를 이기지 못한 채 유명을 달리했다. 그의 사망소식을 전해들은 토니 블레어 영국총리는 “나는 비틀스와 함께 성장했다”고 애도했으며 미국의 팬들은 1980년 존 레논이 사망했을 때 추도 장소였던 뉴욕의 센트럴 파크로 돌아와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자기성찰과 신(神)에 대한 경배로 삶은 보낸 그에 대해 오랜 친구인 여배우 미아 패로는 이렇게 말했다. “그가 많은 사람들을 고무시킨 가운데 하나는 평생을 신의 존재 탐구에 바쳤다는 사실이었다. 만약 신이 존재한다면 나는 조지 해리슨이 신 옆자리에 있을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는다.”
롤링 스톤즈 멤버, 기타리스트 롤링 스톤즈 멤버, 기타리스트
닐 영이 1992년 < Harvest Moon >앨범을 발표했을 때 록 전문지 ‘복스(Vox)’의 평(물론 그가 신보를 공개할 때마다 어김없이 누리는 ‘특전’이 미디어 호평 가운데 하나다.). "음악은 지금까지 그가 만들어낸 것 중 ‘최우수’일 것이지만 그러나, 모른다. 그는 아직도 가야할 길이 멀다." 닐 영을 간단하지만 정확하게 짚어낸 표현이다. 그는 ‘뉴욕 타임스(New York Times)’의 묘사대로 ‘... 닐 영이 1992년 < Harvest Moon >앨범을 발표했을 때 록 전문지 ‘복스(Vox)’의 평(물론 그가 신보를 공개할 때마다 어김없이 누리는 ‘특전’이 미디어 호평 가운데 하나다.). "음악은 지금까지 그가 만들어낸 것 중 ‘최우수’일 것이지만 그러나, 모른다. 그는 아직도 가야할 길이 멀다." 닐 영을 간단하지만 정확하게 짚어낸 표현이다. 그는 ‘뉴욕 타임스(New York Times)’의 묘사대로 ‘예측불허라는 점만을 예측할 수 있는 사람’이다. 대부분 뮤지션들의 경우, 음악에 있어서나 장외의 행위에 있어서나 어느 정도 이렇다 할 ‘계산’이 선다. 이런저런 실험과 시도로써 수용자들에게 ‘다양성’을 내비치려 하지만 어느 정도의 판단은 가능하다는 말이다. 그러나 닐 영은 쉽게 재단이 되지 않는다. 감동어린 미디어의 찬사를 한 번 더 들어보자. 1993년 7월의 영국 공연에 대한 단행본 ‘버진 이어북(Virgin Yearbook)’의 리뷰다. 이것도 아주 적확하다. "닐 영은 정말 희귀한 상품이다. 나이먹은 록스타로서 그에 대한 불멸의 존경심은 점점 늘어만 간다. 그는 결코 사라지지 않기 때문에 컴백이란 것도 있을 수 없다. 닐 영은 항상 거기에, 어디엔가에 있다." 캐나다 토론토에서 1945년 11월12일 출생했으므로 지금 나이 56세. 20살이 갓 지난 66년부터 공식 음악 활동을 시작했고, 솔로 이전에 몸담았던 버팔로 스프링필드(Buffalo Springfield)나 솔로 활동과 병행했던 크로스비 스틸스 내시 앤 영(Crosby Still Nash & Young) 시절을 포함하면 지금까지 발표한 앨범만 해도 40장이 훨씬 넘는다. 일년에 한 장 이상을 낸 셈이다. 어찌 보면 다산(多産)이란 말이 기웃거릴 듯하지만 성실이란 표현 - 항상 거기에, 어디엔가에 있는 - 이 잘 어울린다. 그러나 이러한 장구한 역사의 축적 속에서도 닐 영은 딱히 전성기를 가진 적이 없다. 그러면 사람들은 1972년의 ‘Heart of gold’를 들이대며 반박할 테지만 그건 전성기가 아니라 엄연히 ‘반짝기’였을 뿐이다. 그가 70년대 내내 보여준 행적은 ‘Heart of gold’의 넘버 원 타이틀이 은연중에 강제한 ‘상업적 속성’의 인상을 말소하려는 듯한 움직임이었다. 그는 의도적으로 전성기를 ‘거부’했다. 그럼 도대체 닐 영에게 음악은 무엇인가. 기타를 치고 앨범을 내는 것은 분명 ‘축복’이다. 말할 것도 없이 음악은 그에게 최초의 그리고 가장 커다란 사랑일 것이다. 하지만 앨범 발매가 정례화되고 대중과 평단의 눈길이 쏠리게 되면 어느덧 음악은 ‘원죄’가 되고 만다. 축복이라는 양(陽)과 원죄라는 음(陰)의 배반을 주도하고 조화하는 주체는 결국 인간이 된다. 인간은 ‘인위’와 직결되곤 하지만 음악에 있어서만은 ‘자연’이다. 자연은 일정하면서도 끊임없는 불가지를 드러내곤 한다. 그렇지만 또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 자연(인간이면서 뮤지션)이다. 닐 영의 음악이 예측불허이며 자연스럽다함은 바로 음악이 인간의 행위일 뿐이라는 그의 인식에 기초한다. 이를테면 단지 인간이기 때문에 음악을 하는 것이다. 따라서 자연적이기에 그의 음악이 인위적 규정의 범위를 벗어나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런 뮤지션이 음악을 가지고 대중들을 바꾸려고 하고, 영달을 바라고, 때로 무슨 이유 때문에 음악을 포기해버리거나 할 턱이 없다. 닐 영은 정말 ‘음악을 할 수밖에 없는 인간’이라서 그냥 음악을 하는 인물이다. 과연 자연처럼 자연스럽게 또, 예측할 수 없게 음악을 해왔는지를 보자. ‘스핀 얼터너티브 레코드 가이드(Spin Alternative Record Guide)’는 닐 영의 음악을 ‘일관되게 몇몇 기본 영역으로 향하고 있다’는 전제 아래 4가지 기본 영역으로 나누었다. 첫째는 작곡가겸 가수로서의 어쿠스틱 음악이며, 다음은‘Free bird’와 ‘Marquee moon’학파로서의 일렉트릭 노병의 음악. 사운드의 성질로 볼 때는 상반되는 것들이 그의 음악 안에 공존하는 것이다. 셋째와 넷째는 60년대에 형성된 자유주의적 도덕주의자의 지향(카우보이를 떠올리면 된다)과 어지러운 딜런(Bob Dylan)식 장르의 언어들이라고 했다. ‘스핀’은 그러면서 "마지막 카테고리의 느슨함과 나머지 셋의 확실성을 결합했을 때 닐 영이 ‘최상’을 보이며, 그것에 대한 신뢰를 거부하기도 하지만 록 전통의 온힘을 휘두른다"고 묘사하고 있다. 네 카테고리가 서로 얽혀 있는 부분도 있지만 어쨌든 영역이 넷이나 된다는 건 좀 너무하다. 그만큼 그의 음악 스타일이 종잡을 수 없다는 얘기다. 1969년의 기념비작 < Everybody Knows This is Nowhere >와 바로 이어진 걸작 < After The Gold Rush >의 관계를 보라. 앞의 것은 일렉트릭 사운드 기조의 하드 록이며 전체적으로 ‘전압’이 높다. 그런데 뒤의 것은 무게를 벗긴 채 대체로 어쿠스틱이며 장르로 치자면 제임스 테일러(James Taylor), 캐롤 킹(Carole King) 류의 소프트 포크에 해당한다. 극단의 흐름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전작 뒤집기’는 닐 영의 음악 역사에서 무수히도 반복된다. 1985년의 < Old Ways >와 1986년의 < Landing On Water >, 그리고 2년 후의 < This One’s For You >와 89년에 발표한 명반 < Freedom >의 관계도 그렇다. 가깝게는 화제작 < Sleep With Angels >와 이듬해인 1995년의 앨범 < Mirror Ball >의 편차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일렉트릭과 어쿠스틱 ‘수시 교차’와 평행선 유지는 심지어 한 앨범에서까지 기승을 부린다. 일례로 그 유명한 < Rust Never Sleeps >의 경우 LP의 앞면은 어쿠스틱, 뒷면은 일렉트릭으로 되어 있다. 왜 그런지 알 길은 없지만, 그에게 물어보면 아마도 ‘나니까 그렇지’라고 퉁명스럽게 답할 것이다. 닐 영의 음악은 이런 기조로 볼 때 ‘컨트리와 포크의 벽리’(이른바 루츠Roots라는 것)와 그것의 대척점이라 해도 무방한 ‘피드백의 분노’로 양분이 가능해진다. 컨트리나 포크의 분위기는 ‘Heart of gold’의 빅 히트로 대중 일반에게 비교적 널리 알려진 이미지이지만, 피드백의 하이 볼륨 지향은 많은 앨범에 비해서는 꽤 낯설다. 하지만 이 일렉트릭의 하드 사운드 추구가 적어도 록 평단으로부터 인정을 획득하게 만든 밑거름이라고 생각된다. ‘닐 영=로커’라는 등식이 누구라도 저항함이 없이 구축된 것이다. 또한 닐 영의 록은 사운드의 질감으로 단번에 알 수 있듯 헤비 메탈의 정교함과는 거리가 멀다. 명기타리스트의 목록에는 그의 이름이 올라 있질 않다. 굳이 ‘그만의 맛깔’이라고 두둔할 수도 있겠으나, 소위 ‘잘치는 기타’로 말하기는 어렵다. 둔탁하고 때로 투박하기까지 하다. 그런 스트레이트한 측면이 라이브 앨범에선 여실히 나타난다. 공연에서 닐 영은 긴머리를 휘날리고 이리저리 허리를 구부리며 격렬하게 기타를 연주한다. 한마디로 ‘요동’을 친다. 그런데도 나오는 소리가 겨우 그 정도라면 가련한 느낌마저 든다. 결국 닐 영의 음악은 테크닉과 예술적 우수성이 아닌 ‘록의 자세’로 봐야 한다. 펑크, 개러지, 그런지와의 유관이 여기서 맺어진다. 자세를 살피기 전에 사운드만 들어도 닐 영의 하드 록은 헤비 메탈보다는 ‘지향이 앞서는’ 펑크에 가깝다. 평론가 돈 맥콜리스는 "닐 영의 동료들이 70년대말 펑크의 융기에 위협을 받았던 반면에 < Time Fades Away >와 같은 그의 음악은 이미 펑크의 무모함과 즉발성을 예고했었다"고 지적한다. 스스로 펑크 앨범이라 했던 < Rust Never Sleeps >의 ‘My my hey hey’에서는 기성 로커 최초의 펑크 뮤지션에 대한 우호적 언급이 나온다. 물론 충고조로 ‘서서히 사라지느니 불타 없어지는 것이 낫다’고, 그리고 ‘눈에 보이는 것보다 실제로 더 많은 것이 있다’고 자니 로튼(Johnny Rotten, 섹스 피스톨스)에게 말을 건넨다. 하지만 로드 스튜어트(Rod Stewart), 레드 제플린(Led Zeppelin), 에릭 클랩튼(Eric Clapton) 등 동시대 로커들이 철저히 펑크 키드들에게 유린당하고 있을 때 한가롭게 경의와 조언을 표하는 여유는 명백히 ‘자기과시’ 또는 ‘대열 구분’이다. 그는 정말 팝스타가 되어 거드름을 피우는 당시의 록 엘리트들과는 달랐다. 스스로 주장한 것이 아니라 ‘대열이 다른 선배’임을 후배가 또 역사가 입증해 주었다. 커트 코베인은 유서에서 지친 심경을 토로하고 ‘서서히 사라지느니 불타 없어지는 것이 낫다’는 그의 가사로 끝을 맺었다. 닐 영이 엽총 자살이란걸 염두에 두고 이 구절을 쓴 것은 물론 아니었다. 그런지 록의 후배들이 그에게서 발견한 것은 자세와 정신이었다. ‘My my hey hey’에 반복되는 ‘로큰롤은 결코 죽지 않는다’는 메시지를 신뢰한다. 진작부터 닐 영은 ‘그런지의 대부’로 숭배의 대상이 되게 돼있었다. 그와 까마득한 후배 에디 베더(Eddie Vedder, 펄 잼)는 록이 기능적 우월이 아닌 자세와 정신의 산물이라는 인식에서 일치했다. 따라서 그는 명기타리스트 명부에는 명함도 못내밀지만 록 역사에서는 계보의 중심 인물로 천연히 빛을 발한다. 그러나 여기서 또 실수를 저질러선 안된다. 그를 ‘펑크 스피릿(Punk Spirit)’이란 반항의 이데올로기에 서있는 아티스트로 단정하는 것 말이다. 그랬다가는 닐 영의 행위 궤적이 맞질 않아서 진땀을 흘리게 된다. ‘종잡을 수 없음’이 또 도진다. 그는 이념에 얽매인 뮤지션이 아니라 변화하는 상황에 자신을 편하게 조정하는 ‘편의주의적 기질’을 소유하고 있다. 조금은 ‘제멋대로’이다(이것을 ‘D.I.Y. -Do It Yourself’로 보지 말기를!). 닐 영의 사고를 제공하는 버팀목은 바로 ‘인간의 감정’이다. 앞서 지적한 자연스런 감정이다. 그가 얼마나 감정적인가를 보자. 1982년 리프라이즈(Reprise)에서 게펜(Geffen)으로 이적한 그는< Trans >앨범을 통해 뜻밖에 컴퓨터와 신서사이저의 전자 음악을 선보인다. 좋게 말해서 ‘음악적 정체성의 위기’였고 나쁘게 말해선 ‘록에 대한 훼절’이요 ‘기회주의적 시대부응’이었다. 게펜 시절의 음반들에는 도에 지나질 만큼 감정을 따른, 어쩌면 마구 만들어낸 음악들이 많다. 그는 70년대초 반(反)닉슨주의자로, 그리고 반기성세대적 인물로 이미지를 정착시켰다. 그가 유달리 진보적인 베이비 붐 세대의 팬(대부분 닐 영의 동시대 음악팬들)이 많은 것이 이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그가 1980년 ‘카터와 레이건의 대선전(大選戰)’에 내놓은, 제목부터 야릇한 < Hawks And Cloves >앨범으로는 당시 불기 시작한 정치적 보수주의를 내비친 것이었다. 심지어 미-소(美-蘇) 간의 ‘스타 워즈’를 향한 레이건 대통령의 국방증강계획에 동조하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히피 최후의 카우보이’란 마지노선은 무너졌다. 그러나 보수적 상업적 풍조에 안전착륙하려는 록의 풍토에 반발한 < This Note’s For You >앨범을 기점으로 레이건 공화당에 대한 애정은 작별을 고한다. 1989년의 < Freedom >은 부시의 공화당을 향한 반감이 고개를 든 앨범이었다. 1991년말 시애틀 그런지의 폭발은 그로 하여금 하위 저항의 본령을 지휘하는 ‘베테랑 감독’으로 위치 지워주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으로 레이건 옹호주의자가 ‘그런지의 전사’가 될 순 없다. 이러한 ‘곡예’는 무엇의 결과물인가. 닐 영은 그래도 당당하다. 조금도 흔들림이 없이 떳떳하게 ‘인간 감정에 충실히 살아왔다’고 강변한다. "나에게 변명이란 없다. 나는 그때마다 내가 믿는 것을 말할 뿐이다. 4년이 지나면 같지 않을 수도 있다." 달리 예측불허인가. 그는 결코 하나의 주의(主義)에 인간을 종속시키는 충성형의 존재가 아니다. ‘변절’이라는 폄하적 규정은 결국 ‘인간의 의사가 이데올로기 위에 있다‘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다. 시대에 불변하는 주의는 있겠지만 시대에 불변하는 인간은 존재치 않는다(또는 그것이 매우 불편하다)고 닐 영은 사고하는 것이다. 닐 영에게 있어 음악은 엄연히 닐 영이라는 인간의 밑에 있다. 음악에 지배당하는 인간이란 있을 수 없다. 이를 토대로 그의 음악과 지향의 ‘이쪽저쪽과 들쑥날쑥’을 해석해야 옳다. 1983년 게펜사는 그가 ‘닐 영적인 음악’을 만들지 않고 있다는 이유로 대법원에 기소하면서 3백만 달러의 배상을 요구했다. 게펜측은 왜 어리석게도 그의 앨범이 ‘닐 영의 음악’이 아니라 ‘닐 영이 하는 음악’이라는 대명제를 몰랐을까? 90년대 중반 이후의 앨범들이 비평적 찬사를 획득하는 것을 두고 그는 이렇게 말한다. "사람들이 그 앨범들을 좋아하겠지만 난 ‘정상과 계곡’을 함께 가지려 한다. 딴 레코드를 내면 그들은 그것을 쓰레기라고도 할 것이다. 불가피하다. 올라가면 내려오는 법이고 꼭대기가 반드시 바닥보다 좋은 것은 아니다. 우리가 계속 움직이는 한 말이다." 불규칙 바운드로 일관돼온 듯한 앨범들에 대한 본인의 평. "얼핏 레코드들이 전부 다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전혀 그렇지 않다. 30년간 똑같은 노래였다. 다만 그것을 때에 따라 다르게 불렀을 따름이다." 그에 대한 단선적 재단이 얼마나 위험하고 몰이해의 결과인지 알려주는 또 하나의 사례. 그는 < Mirror Ball >의 수록곡 ‘Downtown’에서 레드 제플린을 따뜻하게 언급해 주변인들을 놀라게 했다. 펄 잼의 시각에서 닐 영과 제플린은 ‘적과 동지’의 양극이다. "제플린과 나! 우린 별로 다를 게 없다. 제플린과 맞아 돌아가 그 밴드의 멤버가 될 수도 있다. 단지 시각이 다를 뿐이다." 그는 트렌드나 패션을 좇지 않고 자신의 감정을 따른다. "난 그저 내가 연주하고 싶은 것을 한다. 그러나 때때로 깨어나 딴 것을 연주하고 싶어진다." 록 뮤지션으로서 그의 유일한 룰은 ‘룰이란 없다(There is No Rules)’이다. 그것을 통해 닐 영은 음악을 지배한다. ‘인간하의 음악’을 믿는다면 닐 영을 이해할 것이고 ‘음악하의 인간’이라는 음악지고주의를 신뢰한다면 그는 닐 영을 택할 이유가 없다.
세계적으로 루 리드만큼 불우시대를 오랫동안 겪은 록가수도 없을 것이다. 영화 < 트레인스포팅 >에 삽입된 곡 ’완벽한 날(Perfect day)’이 없었다면 팝 음악팬들이라도 그의 존재를 모르고 넘어갔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곡을 계기로 갑작스레 루 리드의 음악은 주목받기 시작했다. 지난해 히트한 우리 영화 < 접속 >에 ’창백한 푸른 눈동자(Pale blue eyes)’라는 곡이 깔리면서 그에 대한 관심은 폭발... 세계적으로 루 리드만큼 불우시대를 오랫동안 겪은 록가수도 없을 것이다. 영화 < 트레인스포팅 >에 삽입된 곡 ’완벽한 날(Perfect day)’이 없었다면 팝 음악팬들이라도 그의 존재를 모르고 넘어갔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곡을 계기로 갑작스레 루 리드의 음악은 주목받기 시작했다. 지난해 히트한 우리 영화 < 접속 >에 ’창백한 푸른 눈동자(Pale blue eyes)’라는 곡이 깔리면서 그에 대한 관심은 폭발적으로 변했다. 이 곡은 그가 이끌던 1960년대 전설적인 그룹 벨벳 언더그라운드 시절에 부른 노래다. 발표된 지 자그마치 30년만에 비로소 팬들의 귀에 ‘접속’된 셈이다. 솔로로 독립해 내놓은 곡 ’완벽한 날’도 출반 시점은 1972년. 잔잔한 반주나 힘을 빼고 읊조리듯 부르는 것도 매력적이고 특히 곡의 무드가 만점이다. 그러면 왜 과거 팝팬들은 이 곡의 진가를 몰랐는지 궁금해진다. 지금 봐선 이해가 가지 않겠지만 각 시대의 정서 토대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커다란 편차를 드러낸다. 이를테면 1970년대 인기곡과 1990년대 히트곡은 느낌이 다르다는 얘기다. 올드 팝팬들은 밝고 약간은 건조한 노래를 즐겨 들었다. 그런 기조에서 볼 때 루 리드의 음악은 다분히 어둡고 습한 분위기였다. 느낌부터 너무 시대를 앞서 갔다고 할 수 있다. 그와 벨벳 언더그라운드에 늘 따라붙었던 수식어가 이른바 ‘아방가르드(전위)’ 였다. 이 말은 역으로 다수의 음악대중들과는 크게 유리되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사실 루 리드의 음악은 역사적 기록과 록평론가들 사이에서 제대로 평가를 받았다. 그가 그룹과 솔로 시절에 발표한 1960, 1970년대 앨범들 가운데 적어도 서너장은 어김없이 록역사의 명반 리스트에 오른다. 록음악 잡지 < 롤링스톤 >은 ‘데이비드 보위, 브라이언 이노, 패티 스미스를 비롯한 뉴욕 펑커들, 카스, 크리시 하인드, 뉴 오더, U2, REM 그리고 소닉 유스 등이 벨벳 언더그라운드의 점호를 받아야 할 아티스트들’이라고 했다. 모두가 근래의 모던 록에 심취한 팬들로부터 환영받는 인물들이다. 때문에 벨벳 언더그라운드와 루 리드는 ‘모던 록의 시조’로까지 추앙된다. 강산이 두세번 바뀌고서야 인정받을 때까지 그는 말도 못할 고생을 했다. 벨벳 언더그라운드가 깨지고 나서는 레코드사의 외면으로 음반조차 내지 못한 채 방황을 거듭했다. 평소 루 리드의 팬이었다는 데이비드 보위가 적극적으로 도움을 펼치면서 가까스로 재기에 성공할 수 있었다. 그 앨범이 ’완벽한 날’이 수록된 걸작 < 트랜스포머(Transformer) >. ’완벽한 날’은 지난해 엘튼 존, 보노 등 30명의 록스타들이 부른 새 노래로 재탄생했다. 음반의 수익금은 세계의 영세가정 어린이를 위한 자선단체에 기부되었다. 이 곡을 동료들과 취입하던 날 루 리드의 기분은 어떠했을까. 아마 ‘완벽한 날’이 따로 없었을 것이다. 그를 보면서 좋은 음악은 언젠가는 통한다는 사실을 다시금 확인한다.
노래 : Kris Kristofferson (크리스 크리스토퍼슨)
노래 : June Carter (준 카터 캐쉬,June Carter Cash)
노래 : The Clancy Brothers (클랜시 브라더스)
# 살아있는 음악 전설 에릭 클랩튼은 그 이름 자체로 하나의 거대한 ‘음악 전설’이다. 40여 년의 음악 여정 동안 그가 쌓아올린 메리트는 가히 대단하다. 야드버즈(Yardbirds)와 존 메이올스 블루스브레이커(John Mayall`s Bluesbreakers) 시절 블루스의 부흥을 주도했으며, 크림(Cream)의 활동기간 동안 헤비메탈의 원형을 제공했고, 재즈와 블루스의 크로스오버를 시도했다. 솔로로 독립하고... # 살아있는 음악 전설 에릭 클랩튼은 그 이름 자체로 하나의 거대한 ‘음악 전설’이다. 40여 년의 음악 여정 동안 그가 쌓아올린 메리트는 가히 대단하다. 야드버즈(Yardbirds)와 존 메이올스 블루스브레이커(John Mayall`s Bluesbreakers) 시절 블루스의 부흥을 주도했으며, 크림(Cream)의 활동기간 동안 헤비메탈의 원형을 제공했고, 재즈와 블루스의 크로스오버를 시도했다. 솔로로 독립하고부터는 ‘진짜 블루스’에 접속불가를 외치는 대중들에게 팝 지향적인 ‘달콤 쌉싸름한 블루스’를 패스워드로 내놓아 블루스의 대중화를 선도했다. 그래미 트로피를 13번이나 받았으며,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1992년 야드버즈, 1993년 크림, 그리고 지난해 개인 자격으로 헌액된 것에서도 클랩튼의 공로를 짐작할 수 있다. 또한 그는 지난해 ‘블루스의 제왕’ B.B 킹(B.B King)과 협연한 작품〔Riding With The King〕으로 이번 그래미 시상식 ‘최고의 트래디셔널 블루스 앨범(Best Traditional Blues album)’부문에 노미네이트되었다. 클랩튼은 ‘기타의 신’, ‘슬로우 핸드(Slowhand)’라는 닉네임이 말해주듯 기타 테크닉에 있어서도 대가(大家)의 경지에 올랐다. 감정을 질펀하게 쏟아내면서도 정확하고 절제된 테크닉을 구사하는 벤딩 주법(일명 쵸킹)과 비브라토는 다른 연주자들이 흉내조차 힘들 정도다. 그의 기타 연주와 관련하여 유명 기타리스트들의 칭찬 코멘트를 들어보자. “에릭은 정말 재주가 많다. 그는 자신이 원하는 플레이는 뭐든지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감정과 함께 블루스를 연주한다. 그가 연주할 때 당신은 그것이 블루스라는 것을 알 것이다.” -B.B 킹- “그는 나보다 훨씬 더 블루스 연주가 뛰어나다. 왜냐하면 그는 블루스를 공부했고, 그것에 대해 당당하기 때문이다.” -제프 벡(Jeff Beck)- “내가 처음 그를 보았을 때 나는 그의 연주를 믿을 수가 없었다. 그는 바로 하늘에서 치는 천둥번개 같았다.” -존 이써리지(John Etheridge) 하지만 이런 융숭한 대접에 대해 클랩튼은 “나에 대해 다른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나는 악평을 받았을 때 그 사실을 소화하기가 무척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다. 호평도 마찬가지다.”며 자신을 향한 관심을 무척 꺼려했다. 그를 추종하는 후배 뮤지션에 대해서도 한마디했다. “사람들이 저마다 다른 목소리가 있는 것처럼 나같이 연주하는 것은 아마 무리일 것이다. 자기 스타일로 연주해야 한다.” 자신에 대한 무조건적인 경외보다는 그들만의 길을 개척할 것을 충고한다. 그의 음악과 인생 여로(旅路)가 굴곡이 심했기에 그 말은 더욱 절실히 다가온다. # 전설의 시작 에릭 클랩튼은 1945년 3월 30일 영국 서레이(Surrey)주의 리플리(Ripley)에서 태어났다. 그는 14살 생일에 할아버지와 할머니로부터 기타를 선물 받고 블루스에 빠져들었다. 그는 어렸을 때 부모님이 이혼하여 할머니 품에서 자라며 외로운 시절을 보냈다고 전해진다. 때문에 흑인들의 비참함과 슬픔을 노래한 블루스가 그에게 찾아간 것은 운명이었는지도 모른다. 클랩튼은 머디 워터스(Muddy Waters), 빅 빌 블룬지(Big Bill Broonzy), 블라인드 윌리 존슨(Blind Willie Johnson) 등 초기 블루스 아티스트들의 음악을 연주하며 성장했다. 특히 ‘델타 블루스의 왕’이라 불리는 로버트 존슨(Robert Johnson)의 영향은 결정적이었다. “로버트 존슨의 앨범들은 내가 음악적으로 원하는 모든 것을 갖추고 있었다.” 에릭 클랩튼의 기타 연주가 빛을 발하기 시작한 것은 1963년 야드버즈에 가입하면서부터였다. 그의 뛰어난 블루스 기타 테크닉은 단숨에 그룹의 사운드를 특징지었고, 매니저 지오지오 고멜스키(Giorgio Gomelsky)는 그에게 ‘슬로우 핸드’라는 애칭을 붙여주었다. 하지만 클랩튼은 그룹의 음악이 상업적으로 물들어 가고 있다며 1965년 3월 팀을 떠나 존 메이올이 이끌었던 블루스브레이커스로 자리를 옮겼다. 야드버즈를 탈퇴한 직후 그가 연주했던 ‘For Your Love’는 영국 차트 3위를 기록했다. 이후 야드버즈는 제프 벡과 지미 페이지(Jimmy Page)가 가세하며 전성시대를 누렸다. 바로 록음악계의 ‘3대 기타리스트’가 야즈버즈를 통해 모두 비상했다. # 나, 블루스로 돌아갈래! 이 당시 에릭 클랩튼의 블루스에 대한 열정은 대단했다. 이와 관계된 에피소드 한가지. 그는 블루스브레이커스의 휴지기 동안에 다른 뮤지션들과 전세계를 돌며 블루스 전도를 하기로 마음먹었다. 클랩튼은 그리스의 아테네에서 몇몇 멤버들이 영국으로 돌아갔음에도 불구하고, 한 클럽에서 계속 머물며 공연을 계속했다. 그는 그러나 강도로 돌변한 클럽 주인의 협박으로 옷과 새로 산 마샬 앰프를 놔둔 채 영국으로 도망쳐야했다. 음악 외에는 모든 일에 문외한이었던 ‘순수한’ 그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클랩튼은 블루스브레이커스에서 존 메이올의 독단적 행동에 불만을 품고 자신만의 그룹을 결성하기로 계획했다. 그는 1966년 존 메이올 몰래 드러머 진저 베이커(Ginger Baker), 베이시스트 잭 브루스(Jack Bruce)와 함께 크림을 조직하고 합주를 시작했다. 하지만 얼마 후 음악 전문지 < 멜로디 메이커(Melody Maker) >의 폭로로 인해 클랩튼은 블루스브레이커스에서 해고를 당해야만 했다. 이때 런던의 한 빌딩 벽에는 ‘클랜튼은 신이다(Clapton is god)’라는 문구가 새겨져 많은 화제를 몰고 왔다. 에릭 클랩튼은 크림을 통해 ‘악기 예술의 미학’을 획득했다. 블루스와 재즈가 절묘하게 어울러진 그들의 사운드는 즉흥적이고 빠르며 굉음을 발산했다. 멤버들의 정교하고 뛰어난 연주 실력은 타 밴드와의 간격 차를 크게 벌려놓았고, 음악계에 상당한 충격파를 던졌다. 그들의 앨범들인 1966년의 < Fresh Cream >, 1967년의 < Disraeli Gears >, 그리고 이듬해의 < Wheels Of Fire > 모두 명반으로 손꼽히며 파죽지세의 인기몰이를 했다. 특히 스튜디오 녹음과 라이브를 한자리에 모은 더블 앨범 < Wheels Of Fire >는 미국에서 4주간 정상을 차지하며 멤버들을 세계적인 스타로 만들었다. 바로 이 작품에 명곡 ‘White room’이 수록되어 있다. 그룹은 그러나 서로간의 음악적 견해차를 이유로 1968년 11월 해산했다. 클랩튼의 음악 이력 중 최고의 절정기가 막을 내린 것이다. 이후 트리오는 1993년 1월 명예의 전당 헌액 기념으로 재결합 공연을 가져 많은 박수를 받기도 했다. 크림의 해체 이듬해 클랩튼은 진저 베이커와 함께 트래픽(Traffic) 출신의 스티브 윈우드(Steve Winwood), 페밀리(Family)의 베이스 주자였던 릭 그레치(Rick Grech)를 영입하여 ‘슈퍼 그룹’ 블라인드 페이스(Blind Faith)를 탄생시켰다. 언론에서는 ‘인스턴트 슈퍼 그룹’이라고 비아냥거렸지만, 그들은 공연 때 ‘최후의 슈퍼 그룹’이라는 슬로건을 내세워 대조를 이뤘다. 하지만 언론의 지적대로 그들은 1969년 데뷔 앨범 < Blind Faith >를 내놓고 각자의 길로 떠났다. # ‘레일라’의 비극 에릭 클랩튼의 1970년대는 한 여인과의 슬픈 사랑 얘기로부터 시작된다. 그녀는 다름 아닌 비틀스의 멤버 조지 해리슨의 아내 패티 보이드(Patti Boyd)였다. 클랩튼은 1968년 비틀즈의 화이트 앨범에 수록된 조지의 곡 ‘While my guitar gently weeps’와 같은 해 공개된 솔로 음반 < Wonderwall Music >에서 기타를 맡을 정도로 조지 해리슨과는 절친한 사이였다. 조지와 음악적 교류를 하면서 패티를 본 후 사랑에 빠진 것이다. 당시 종교에 심취해 있던 남편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패티 보이드는 클랩튼에게 의도적으로 눈길을 주었다. 음악 밖에 모르던 에릭은 그만 사랑의 포로가 되고 말았다. 하지만 그녀는 조지와의 행복한 일상으로 돌아갔고, 실의에 빠진 에릭 클랩튼은 술과 마약의 구렁텅이로 빠져들었다. 이런 사랑에 대한 좌절감과 패배감은 1970년 11월에 발표된 데릭 앤 더 도미노스(Derek And The Dominos)의 마스터피스 < Layla & Other Assorted Lovesongs >에 고스란히 담겨졌다. ‘남편이 당신을 슬프게 만들었을 때/ 나는 당신을 위로하려고 노력했어요/ 바보처럼 나는 당신과 사랑에 빠져버렸죠/레일라 당신은 나를 무릎꿇게 만들었어요/ 레일라, 당신께 애원합니다/ 제발...’. 수록곡 ‘Layla’의 구구 절절한 가사처럼 에릭 클랩튼의 상처받은 마음은 노래 전체에 용광로처럼 녹아들었다. 고통스런 자신의 내면을 스스로 바닥까지 긁어내어, 그 고통을 음악으로 걸러냈다. ‘처절한 내면의 사생화’다. 클랩튼의 이러한 마음에 하늘도 감동했던지 얼마 후 패티 보이드는 조지 해리슨과 이혼했고, 둘은 1979년 결혼식을 올리게 된다. 이 음반은 비록 상업적으로는 성공하지 못했지만 블루스와 삶을 완벽하게 조화시키며 걸작의 반열로 들어섰다. # 극적인 재기 드라마 1부 실연의 파장은 매우 컸다. 에릭 클랩튼은 감정적으로 매우 불안정한 상태였으며, 알코올과 약물 중독으로 인하여 병원과 요양원을 들락거려야만 했다. 기타조차 잡을 수 없을 정도로 쇠약해졌다. 이때부터 드라마틱한 재기 스토리가 전개된다. 절망의 늪에서 허우적대고 있던 그에게 구세주가 찾아왔다. 그룹 후(The Who)의 ‘피트 타운센드’(Pete Townshend)였다. 피트는 이미 1960년대 후반 미국에서 찬밥취급을 받던 지미 헨드릭스를 영국으로 데려와 음악계에 데뷔시키는 등 ‘선행’을 벌여왔다. 피트는 클랩튼에게 마약에서 벗어날 것을 권유했고, 1973년 에렉 클랩튼의 레인보우 콘서트를 주최해 재기의 무대를 마련해줬다. 클랩튼은 데릭 앤 도미노스 이후 3년 만에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당시 피트는 에릭 클랩튼이 정신을 못 차리자 하와이안 기타로 머리를 때리기까지 했다고 한다. 기력을 회복한 에릭 클랩튼은 1년 뒤 재기 작품 < 461 Ocean Boulevard >를 내놓았다. 앨범이 출시되기까지는 피트 타운센드와 함께 RSO 레이블의 사장인 로버트 스틱우드(Robert Stigwood)의 도움이 컸다. 그는 폐인이 된 클랩튼을 위해 요양장소로 플로리다에 있는 자신의 별장을 선뜻 내주며 재기의 기틀을 마련케 했다. 클랩튼도 스틱우드의 호의에 고개 숙여 감사하며 다시 기타를 집어들었다. 스틱우드의 별장주소가 바로 이 앨범의 타이틀이다. 스틱우드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인 것이다. 밥 말리(Bob Marley)의 곡을 리메이크한 ‘I shot the sheriff’는 정상을 차지했고, ‘Let it grow’, ‘Give me strength’ 등이 인기가도를 달리며 ‘기타의 신’으로 부활했다. 이후 연이어 내놓은 앨범들도 좋은 성적을 거두었고, 특히 ‘Wonderful tonight’이 실려있는 1977년 작품 < Slowhand >는 300만장이상의 높은 판매고를 기록했다. 에릭 클랩튼은 약물 중독으로 고생하던 이 시기를 잊지 못하고, 1999년 마약 중독자 치료기금을 위해 자신의 기타 100대를 경매에 내놓은바 있다. # 극적인 재기 드라마 2부 에릭 클랩튼은 1980년대에 접어들면서도 꾸준하게 앨범을 발표하지만 별다른 활약상을 보이지 못했다. 물론 1989년 작품 < Journeyman >같은 수작을 낚아 올리기도 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그룹시절과 달리 음악적 측면에서 많은 비판을 받았다. 평론가들은 ‘에너지가 없어지고 느슨해진 팝 블루스’라며 평가 절하했다. 하지만 그는 1991년 아들의 죽음이라는 ‘비극’과 함께 현실무대로 화려하게 컴백했다. ‘운명의 여인’ 패티 보이드와 헤어지고 이탈리아 투어 도중 만난 젊은 사진작가이자 배우였던 로리 델 산토(Lori Del Santo)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코너(Corner)가 뉴욕 맨하탄의 아파트에서 실족사한 것이다. 나중에 에릭 클랩튼은 “내가 아파트에 도착했을 때는 온통 경찰관과 의료진들로 가득 차 있었다. 나는 그것이 나와 관계가 없는 것처럼 보였다. 나와는 상관없는 다른 사람의 일처럼 느껴졌다.”며 망연자실했던 당시의 심정을 묘사했다. 클랩튼은 그러나 ‘예전처럼’ 기타를 놓지 않았다. 오히려 기타와 노래에 더욱 몰두했다. 음악만이 유일한 치료제라는 것을 이전 경험으로 깨달았다. 그는 1992년 영화 < 러쉬(Rush) >의 사운드 트랙에 삽입된 ‘Tears in heaven’에 죽은 아들을 향한 아버지의 마음을 실었다. MTV의 제안으로 그 해 녹음된 앨범 < Unplugged >에서의 백미도 단연 이 곡이었다. 어쿠스틱 기타에 실린 애절한 멜로디와 노랫말은 많은 이들의 심금을 울렸다. 이듬해 그래미는 그에게 ‘올해의 앨범(Album Of The Year)’, ‘올해의 레코드(Record Of The Year)’, ‘올해의 노래(Song Of The Year)’ 등 알짜배기를 포함하여 6개의 트로피를 ‘위로 선물’로 전달했다. ‘추억’에서 ‘현재진행형’으로 재진입하는 극적인 순간이었다. 에릭 클랩튼의 상승세는 계속됐다. 1994년 발매한 < From The Cradle >은 흥행과 평단 양편에서 세계적인 지위를 얻었다. 미국과 영국 앨범차트를 동시 석권하였고, 블루스의 성찬을 담아낸 작품으로 격찬 받았다. 4년 뒤에 내놓은 앨범 < Pilgrim > 또한 플래티넘을 기록하며 좋은 반응을 얻었다. # 전설은 영원하다 에릭 클랩튼은 작품마다 자신의 인생을 투영시켰다. 혼을 불어넣었다. 올해 발표한 앨범 < Reptile >에도 그의 숨결을 살아 숨쉰다. 신작의 기저에 흐르는 물줄기는 그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삼촌의 죽음’이다. 삼촌에 대한 존경심을 작품 전체에 고스란히 옮겼다. “‘Reptile(사전적 의미로는 비열한 인간이라는 뜻)’은 삼촌과 관련이 있는 모든 것을 말한다. 내가 태어난 곳에서 ‘Reptile’이란 단어는 사랑스러운 말이다.” 이 음반은 프로듀서 사이먼 클리미에(Simon Climie)를 포함하여 전작 < Riding With The King >의 세션팀이 그대로 참여했다. 또한 시카고 소울의 거장 커티스 메이필드(Cutis Mayfield)의 빈자리를 남겨둔 채 임프레션스(The Impressions)가 부드러운 화음을 더하고 있다. 블루스뿐만 아니라 레게, 컨트리, 테크노 등 다양한 장르로 음악 지류를 넓히고 있는 클랩튼은 새 앨범에서도 그 폭을 확대했다. 퓨전 재즈풍의 기타 연주가 도입됐으며, 라틴 음악의 요소도 엿보인다. 보사 노바의 흥취가 물씬 풍기는 첫 곡 ‘Reptile’을 비롯해, ‘Modern girl’, ‘Son & sylvia’ 등에서 알 수 있다. ‘리듬’에 대한 클랩튼의 지속적인 실험이다. 선배들을 향한 오마쥬도 계속된다. 에릭 클랩튼의 음악적 스승 중 한 명인 기타리스트 J.J. 케일(J.J. Cale)의 ‘Travelin` light’, 1985년에 세상을 떠난 ‘점프 블루스의 대가’ 빅 조 터너(Big Joe Turner)의 고전 ‘Got you on my mind’ 등이 그것이다. 또한 스티비 원더(Stevie Wonder)의 1980년대 히트넘버 ‘I ain`t gonna stand for it’, 레이 찰스(Ray Charles)의 ‘Come back baby’를 새롭게 재해석하며 두 명의 맹인 거장에 대해 경의를 표하고 있다. 그는 그러나 ‘향수’를 풍기지 않는다. 애절하면서도 포근하게 감싸안는 음색과 선율로 그만의 분위기를 낸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곡조에 맞게 ‘톤’을 찾아내는, 바로 ‘기타의 신’만이 할 수 있는 특허품이다. 음악을 만들고 듣는 이가 인간이지만 ‘비인간적’인 음악이 판치는 요즘이다. 그러나 에릭 클랩튼의 음악과 인생은 접점이 없는 평행선을 달리지 않는다. 합일점을 찾아 예술로 승화시킨다. 그래서 그의 음악에는 희노애락이 담겨져 있다. 특히 역경 속에서 소중한 음악의 싹을 틔우고 키워냈다. 내면의 고통과 이별의 슬픔을 블루스로 쏟아냈다. ‘인간의 음악’이다. 당연하다. 허나 바로 이 점 때문에 클랩튼은 전설로 추앙 받는다.
연주 : Jim Keltner (짐 켈트너,James Lee Keltner)
드럼, 퍼커션 연주자. 드럼, 퍼커션 연주자.
밴드 : Tom Petty & The Heartbreakers (탐 페티 앤 더 하트브레이커즈 (락 밴드))
멤버 : 톰 페티(Tom Petty, 보컬, 기타), 조니 선더스(Johnny Thunders, 보컬, 기타), 왈터 루어(Walter Lure, 보컬, 기타), 제리 놀란(Jerry Nolan, 드럼), 빌리 래쓰(Billy Rath, 보컬, 베이스) 멤버 : 톰 페티(Tom Petty, 보컬, 기타), 조니 선더스(Johnny Thunders, 보컬, 기타), 왈터 루어(Walter Lure, 보컬, 기타), 제리 놀란(Jerry Nolan, 드럼), 빌리 래쓰(Billy Rath, 보컬, 베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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