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각된 나의 기억, 쓰이지 못한 우리의 역사
지워진 이야기를 다시 기록하는 일
나타샤 트레스웨이는 오래전 한 인터뷰에서, 역사에서 삭제된 것들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 밝힌 바 있다. 공공의 역사적 기록뿐만 아니라 가족사에, 가족 내에서조차 이야기되지 않는 것들에, 침묵 또는 망각 속에 남겨지는 것들에, 그리고 우리가 듣게 되는 이야기 사이사이 존재하는 틈에. 그런 이야기들을 복원하거나 복구하는 것이 그의 목표다. 《네이티브 가드》도 그러한 작업의 일환이다. 공적인 역사에서 지워졌거나 누락된 존재들, 사적인 역사에서 의식적으로 망각된 기억들을 발굴하여 엮은 이 시집은 침묵당하고 삭제당한 존재들과 목소리들을 되살린다는 시인의 철학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시집을 여는 서시 ‘시간과 공간에 관한 이론들’에서 시인은 지워지고 잊힌 이들을 찾아가는 길 위로 독자들을 초대한다.
미시시피 49번 고속도로를 타고 남쪽으로 달려보라, 일
마일 일 마일씩 표지판은 당신 인생의
매 순간을 째깍째깍 표시해주고.
(...)
당신이 지니고
가야 하는 것만 가지고 오라―두꺼운 기억의 책,
여기저기 비어 있는 페이지들. _‘시간과 공간에 관한 이론들’ 중
목적지는 미국 남부, 준비물은 빈 페이지가 있는 기억의 책이다. 시인은 엄마가 허망하게 죽은 곳, 미국 남북전쟁 때 참전했지만 그 공을 인정받지 못한 흑인 병사들이 이름도 없이 묻힌 곳, 시인 자신이 흑인과 백인 사이의 혼혈로 태어나 인종차별을 겪은 곳으로 돌아가 정당하게 기록되지 못했던 이들의 이야기를 비어 있는 페이지에 적어 넣는다.
그렇게 완성해나가는 책은 시인 자신의 개인사와 미국 남부 흑인의 소외된 역사를 함께 엮어 쓴 새로운 역사서다. “시인에게 개인의 비극은 공적인 역사와 떨어질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옮긴이의 말) 보수적인 미국 남부에서 흑인 여성으로 태어난 나타샤 트레스웨이의 어머니는 당시 불법이었던 백인과의 결혼을 감행하고 유능한 커리어우먼으로서의 길을 걸으며 주체적으로 자신의 삶을 살아가고자 했지만 백인 남편과의 이혼 후 재혼한 남편에게 무참하게 살해당한다. 시인은 너무 고통스러워 의식의 영역 밖으로 밀어두었던 이 기억을 되찾아와 개인의 역사에 공백으로 남겨두었던 곳에 써 넣는다. 지극히 사적인 것처럼 보이는 이 작업은 공적인 역사를 다시 쓰는 작업으로 이어지는데, 폭력적이고 억압적인 사회와 가정에서 살아남으려 고군분투하다가 마땅히 받아야 할 공권력의 보호를 받지 못하고 죽음을 맞은 어머니의 이야기는 시인 개인에게도 비극적인 이야기지만 나타샤 트레스웨이와 그의 어머니에게만 국한되는 이야기는 아니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안전하리라 믿었던 곳에서 상상하지도 못했던 부정의와 불합리에 부딪혀 스러진 후 제대로 기억되지도, 기록되지도 못한 이들과 함께 묻혔다. “나는 지금 망자들의 이름 사이를 헤맨다: / 우리 엄마 이름, 내 머리를 누일 돌베개.”(19쪽) 어머니의 기억과 묘지를 찾은 시인의 발길은 자연스레 다른 망자들에게로 향한다.
어머니의 죽음이 망각되었던 것처럼 역사에서 의도적으로 지워진 이들도 있다. 남북전쟁 때 북부 연방 군대에서 최초의 공식 흑인 병사 연대로 인정받았던 ‘네이티브 가드’는 목숨 바쳐 싸우며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데에 공헌했음에도 미국 역사에서 완전히 누락되었다. 시인은 제3자의 입장에서 이야기하기보다는 네이티브 가드에 속한 병사가 되어 일기를 쓰는 방식을 택한다. 당사자가 자신을 지운 역사 속에 자신의 존재를 직접 기입하게 한 것이다.
다음과 같은 사항은 꼭 설명할 필요가 있다:
항복의 백기를 들었는데 학살당한 경우―
포트필로에서 발생한 흑인 집단 학살; 우리의
새로운 이름, 아프리카 군단(Corps d’Afrique)―우리에게서
네이티브를 가져가는 단어들; 촌뜨기들과 자유민들―
자기 고향 땅에서 추방당한 사람들; 병자들, 불구자들,
잃어버린 모든 팔다리, 그리고 남아 있는 것들: 환상-
통, 텅 빈 소매에 떠도는 기억; 게티즈버그에서
돼지에게 먹힌 사람들, 무덤에 아무 표지도 없는
사람들; 모든 죽은 편지들, 대답 없는;
시간이 침묵하게 하고 말 사람들의 말해지지 않은 이야기들.
전쟁터 아래에는, 다시 초록이 일고,
죽은 자들은 썩어가고―까맣게 잊고서, 우리가
밟고 있는 뼈의 발판. 진실을 말하자면. _‘네이티브 가드’ 중
전쟁터에서 목격한 것들을 읊는 흑인 병사의 목소리는 일기라는 사적인 글쓰기 형식을 통해 더욱 솔직하고 꾸밈없는 증언이 된다. 이렇게 공적 역사는 사실 개인사와 다르지 않음을, 권력이 선택적으로 기록하고 엮어 ‘역사’라 이름 붙인 개인들의 이야기 밖에 남겨진 이들의 이야기도 기억되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남북전쟁의 현장에서 다시 지금의 미국으로 돌아온 시인은 국가가 역사에서 지워버린 존재들, 사회가 추방해버린 존재들을 불러내어 목소리를 부여한다. ‘네이티브 가드’의 흑인 병사가 다른 사람의 일기장을 가져와 그 위에 자신의 일기를 겹쳐 썼듯이, 약자들을 외면하고 소외시킨 이들의 흔적이 가득한 곳 위에 자신의 이야기를 겹쳐 쓴다. 여전히 강자들이 만들어낸 역사가 공고한 곳, 자신을 타자화하는 곳에서 시인은 원래 기록되었어야 마땅한 사람들, 말들, 사건들을 발굴하여 새로운 역사로 써 내려간다.
길들도, 빌딩들과 기념비들도 다
남부 연합을 기리기 위해 이름 붙여진 곳,
그 오래된 깃발이 아직도 걸려 있는 곳, 나는 돌아온다
미시시피로, 내 존재를 범죄로 만들어준
주(州)로―물라토, 혼혈―내 원래의 땅에서
내가 네이티브인데, 이곳에 그들은 나를 묻을 것이다. _‘남부’ 중
토박이면서 속박된 이들
모든 슬픔과 고통을 함께 앓아야 하는 이들
“1966년생의 시인이 먼 미국에서 쓴 남부의 역사가 이곳 한국에서 어떤 독자를 만나게 될까? (…) 그 이야기는 오늘, 이 땅에서 한국어의 옷을 입고 누구에게 가닿을까.” _‘옮긴이의 말’ 중
시인의 개인사와 미국 남부 흑인의 역사는 우리와 상관없는 것처럼 다가올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타샤 트레스웨이는 “내가 쓰는 글 속의 사람들과 그들의 삶, 그들의 특정한 상황에 익숙하지 않은 독자들이 그들에 대해 무언가 알게 되고, 그 사람들 속에서 자기 자신을 발견하기를, 그로 인해 인류 공동체를 확장할 수 있기를 원한다”라고 한다. 끔찍한 살인 사건의 피해자가 된 시인의 어머니나 남북전쟁에서 싸운 흑인 병사들의 이야기는 멀게 느껴질 수 있으나, 가정 폭력에 고통받다가 목숨을 잃은 여성과 국가권력에 의해 억압당하고 지워지는 약자들의 이야기는 우리의 것이기도 하다. 시인은 그렇게 목소리를 뺏기거나 잃은 사람들을 찾아가 그들의 아픔을 들여다보고, 그들의 이야기를 세상에 남기고, 그 행위를 통해 그들에게, 또 그들 안에 있는 우리에게 힘을 준다. 미시시피 49번 고속도로 위로 초대받은 독자들은 이 여정을 따라가며 시 속에 그려진 존재들의 삶을 목격하고, 단순히 지켜보는 것을 넘어서 그들을 기억하고 기록하는 일에 함께하기를 요청받는다.
사전을 찾아보면 ‘네이티브’의 첫 의미는, 놀랍게도, ‘토박이의’가 아니라 ‘노예나 속박의 상태로 태어난 사람들’이다. (…) 나, 우리 각자, 우리 모두는 이 땅을, 내가 눈감고 있는 내 안의 모순들을, 외면하고 있는 이웃의 슬픔을, 국가의 운명을, 꾸밈없이, 속절없이 함께 앓을 수밖에 없는 존재다. 그래서 더욱더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지켜주는 ‘가드’가 되어야 할 것이다. _‘옮긴이의 말’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