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가지 개념 ‘인민, 자치, 정의, 문명, 도시, 권리, 독립’으로 쌓아올린 한국 민주주의 역사의 기원
저자는 민주주의가 형성되고 발전되어온 배경 및 동인들을 역사적으로 추적함으로써 전체 그림을 완성해가는 방식으로 접근하였다. 민주주의적 시각에서 19세기사를 해석하는 작업 자체가 낯설기에 민주주의 문화를 파악할 수 있는 낯익은 개념, 즉 ‘인민, 자치, 정의, 문명, 도시, 권리, 독립’을 제시하고, 이를 매개로 민주주의의 기원을 이야기하는 방식을 택한 것이다. 또한 종적 시간과 횡적 사건들을 주제별로 엮어 재구성하는 방식의 역사 연구와 글쓰기를 시도하려는 의지도 담았다.
그리하여 민주주의 의식을 갖게 된 민주주의 향유 주체로서의 ‘인민’과 인민의 자각 과정, 민주주의 핵심 속성인 ‘자치’의 의의와 자치의 조직·문화 형성 과정, 민주주의가 추구하는 가치인 ‘정의’와 이러한 가치가 요구된 시대적 상황, 민주주의 형성의 문화적 배경으로서의 ‘문명’의 내용, 민주주의 이념 형성의 사회적 공간으로서의 ‘도시’의 역할, 민주주의의 핵심 가치나 목적으로서의 ‘권리’(인권 혹은 민권) 담론 형성 과정, 국권 침탈 상황에서 민주주의 실현을 위한 전제 조건으로서의 ‘독립’(운동)과 민주공화제 담론 등을 당시의 사회적 배경이나 사건을 분석하고, 관련 단체나 인물 등에 의해 수행된 활동이나 담론 등에 대한 세밀한 분석을 통해 파악하였다.
대중적 문체로 엮어낸 민주주의적 글쓰기 시도
이 책에는 역사학의 전문성과 대중성의 ‘경계’를 고민하고 실험해온 저자의 노력이 담겨 있다. 저자는 참여연대 아카데미 느티나무 운영위원으로 강의와 답사를 진행하고 한중일의 역사 대화를 담은 공동교재 집필진으로 활동하면서, 끊임없이 대중들과 역사를 화두로 소통해왔다.
≪민주주의를 향한 역사≫에서 저자는, 역사적 개념과 용어를 추적하기 위한 550개가 넘는 주(註)를 본문 뒤에 모으고, 본문에서는 짧고 쉽고 간결한 대중적 문체에 담아 전달하고자 했다. 직접 사료를 인용하는 경우에도 그대로 싣지 않고 뜻을 왜곡하지 않는 범위에서 가급적 풀어쓰고자 노력함으로써, 현대어로 쓰인 19세기사를 완성하였다. 독자들이 낯익은 민주주의라는 잣대로 자연스럽게 역사 속에 빠져들어 다시 그 역사를 새롭게 바라볼 수 있는 길로 이끌고자 하였다.
주요 내용
1장 인민 : 만민평등을 향한 해방의 길
민주주의의 역사를 이끌어갈 주체인 인민의 탄생은 신분제 사회에서 배제되거나 소외되었던 사람들을 인민화하는 과정을 수반했다. 1801년 공노비의 해방으로 시작된 제도적 신분 해방은 1894년 갑오개혁으로 완결되었다. 하지만 자유와 평등에 대한 자각을 바탕으로 근대적 인민이 탄생하는 과정에서 노비와 백정 출신, 그리고 여성이 인민화되는 문화적 해방에는 더 많은 시간이 걸렸다. 19세기에 농민항쟁과 농민전쟁이 노비, 백정, 여성 등의 인민화의 길을 열었다면, 20세기에는 자발적 결사체를 만들고 사회운동과 연대하면서 스스로 해방 문화를 만들어갔다. 제도적 해방뿐만 아니라 문화적 해방을 이룸으로써 진정한 인민화가 달성된다고 볼 때, 이는 100년이 넘게 걸린 ‘기나긴 혁명’이었다.
2장 자치 : 종교가 꾸린 대안 공동체
종교가 꾸린 대안의 자치공동체가 인민에게 위안과 희망의 공간을 제공했다. 일본에 나라를 빼앗기자 종교 공동체는 민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성장했다. 조선총독부가 모든 정치사회단체를 해산시켰을 때 종교단체만이 살아남았다. 나라 잃은 인민은 종교로 몰려들었다. 외래 종교인 기독교보다 동학에 뿌리를 둔 토착 종교들이 대세였다. 동학 제3대 교주 손병희가 창건한 천도교는 1910년대에 급성장하여 100만 명의 신도를 거느린 최대 종교로 떠올랐다. 천도교는 서울에 중앙교당을 두고 독립운동과 천도교의 민주화를 실현하고자 한 현실참여적 대안 공동체였다.
3장 정의 : 공정하고 공평한 세상을 향한 100년의 항쟁
19세기는 농민항쟁의 시대였다. 한 세기 내내 전국에서 농민항쟁이 일어났다. 변란(1811년 평안도 농민전쟁), 민란(1862년 농민항쟁)을 거쳐 전쟁(1894년 동학농민전쟁)으로 진화해갔다. 19세기의 농민항쟁은 신분 해방을 통한 인민의 탄생, 그리고 종교적 자치공동체의 경험과 함께 진행되었다. 신분제라는 차별적 제도와 문화를 기반으로 소수의 독점 권력이 스스로 법을 위반하고 세상을 쥐락펴락하는 현실에 인민은 직접 행동으로 맞섰다. 인민은 향회 혹은 동학 조직을 기반으로 불공정하고 불공평한 권력을 향해 정의로운 나라와 사회를 요구하며 항쟁했다. 여기에서 정의란 공평한 기회와 공정한 분배가 실현되는 투명한 사회의 실현을 의미한다. 특히 인민들은 ‘모든 인민은 조세와 관련하여 평등하게 취급되어야 하며, 조세는 인민의 부담 능력에 따라 배분되어야 한다’라는 조세 평등주의, 즉 조세 정의를 갈망했다.
4장 문명 : 신문과 학교에서 익히는 시민성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 신문인 ≪독립신문≫이 문명화에 기여한 역할은 지대했다. 문명을 전파하고 계몽하면서 문명 담론과 동시에 민주주의 담론을 확산시켰다. 시민으로 살아가는 데 필요한 가치, 태도, 관계, 제도 등을 계몽하여 시민성을 적극적으로 양성했다. 학교는 문명화를 위한 가장 효율적인 제도이자 수단의 하나였다. 인민의 교육열은 서양인이 주목할 정도로 높았다. 권력이 문명화 인력을 양성하는 선민교육을 추구했다면, 인민은 누구나 공평하게 문명화를 누릴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보통교육을 갈망했다. 학교는 시민으로서의 삶을 체질화하는 공간이었다. 미래의 동량인 어린이들이 문명의 가치와 일상을 배우는 학교는 곧 시민의 양성소였다.
5장 도시 : 자발적 결사체와 시위·집회 공간의 탄생
독립협회는 자발적 결사체의 효시였다. 서울에 본부를 두고 지방에 지회를 설치하여 전국적 조직으로서의 면모를 갖추었다. 고종과 독립협회의 위상을 놓고 담론 투쟁을 전개했고, 인민과 함께 토론회를 펼쳤다. 독립협회는 단 3년간의 활약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만큼 압축적인 성장을 이뤄냈다. 독립협회 해산 이후 탄생한 자발적 결사체들은 너도나도 독립협회의 계승을 표방했다. 1905년 을사조약 체결에 즈음하여 결사체의 시대가 도래했다. 각 지역에 연고가 있는 학회들은 교육 진흥에 전력을 다했다. 아래로부터의 개혁 세력인 동학 계열과 위로부터의 개혁 세력인 독립협회 계열이 결합하여 처음에는 일진회에서, 나중에는 대한협회에서 함께 활동했다. 자발적 결사체의 결성 붐과 함께 국채보상운동과 같은 자발적 결사체 주도의 전국적 대중운동도 이 시기에 등장했다.
6장 권리 : 인권과 민권의 자각
1905년 을사조약 이후 나라가 존망의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도 신문·잡지 등의 미디어와 자발적 결사체들은 민권 담론을 적극적으로 설파했다. 민권의 신장이 곧 독립과 부강의 길이라고 주장했다. 민권이 살아야 국권도 산다고 절박하게 호소했다. 하지만 국권이 있어야 민권도 있다는 주장을 넘어서기가 쉽지 않았다. 국권론이 갖는 현실적 무게감 때문이었다. 민권론자들은 또 하나의 대안으로 지방자치의 실현을 모색했다. 지방자치를 통해 인민이 민권을 누릴 기회를 갖게 하자는 것이었다. 이 역시 국망을 넘어서지 못하고 좌절되고 말았다. 하지만 밀알은 썩지 않았다. 인권과 민권에 대한 자각과 실천의 도도한 흐름은 민족이란 집단의 생존과 권리를 확보하기 위한 민주주의 투쟁, 즉 독립운동으로 이어졌다.
7장 독립 : 민주공화정으로의 길
독립이라는 절체절명의 화두가 19세기 조선에 던진 또 하나의 절박한 과제는 어떤 정치체제를 선택하느냐였다. 대한제국 황제와 권력은 전제군주정의 강화를 택했다. 지식인과 인민 중에는 의회를 갖춘 입헌군주제를 꿈꾸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자발적 결사체와 시위·집회를 통해 의회 개설 운동을 추진했으나 좌절되었다. 러일전쟁에서 전제군주국인 러시아가 입헌군주국인 일본에 패하자, 입헌군주제만이 주권을 수호하고 자강을 이뤄낼 수 있다는 목소리가 더욱 높아졌다. 차츰 황제가 없는 나라, 공화제에 찬성하는 사람들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때마침 중국에서는 신해혁명으로 공화정이 등장했다. 결국 나라를 잃은 후, 국민이 아닌 민족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세워 민주공화제를 채택했다. 민주공화제로 가는 길목에는 인민의 독립 의지를 온 세상에 알린 3·1운동이 자리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