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주의 시작은 곧 인류의 시작
우선 먼저 한번 생각해보자. 우리는 언제 맥주를 마실까? 목이 마를 때 아니면 알코올의 취기가 생각날 때? 갈증과 배고픔은 어느 것이 먼저랄 것 없이 인간이라면 누구나 해결해야만 하는 절박한 본능이다.
태초의 인류는 약 1만 년 전부터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밀과 보리 씨앗을 뿌려 그 몇 십 배 되는 곡식을 얻는 것이다. 하지만 처음에는 씨앗도 부실했고, 기술도 빈약했고, 환경도 열악했다. 당연히 수확은 많지 않았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일을 해도 농사로 얻는 곡물은 얼마 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고대 인류는 과일 채집이나 사냥과 같은 보다 확실한 수단 대신에 농사라는 불확실하고 힘이 많이 드는 선택을 했을까? 그래서 누군가 이런 도발적이고 논쟁적인 질문을 던졌다. 만약 얼마 되지 않은 곡식이라면 당신은 빵을 만들 것인가, 아니면 맥주를 만들 것인가? 그리고 만약 곡식이 우연히 발효되어 나무 구덩이나 가죽 주머니에 생긴 알코올을 마셔서 황홀경을 맛본 인간이라면 도대체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물론 이 물음에는 논쟁의 여지가 아주 많다. 하지만 이제야 그들의 심정이 겨우 이해는 되지 않는가? 맥주가 가져다주는 그 놀라운 황홀감을 다시 맛보고 싶다는 그 간절한 소망을…
사실 맥주의 시작을 정확히 알 수는 없다. 단지 남아있는 고고학적 자료들을 증거로 다양한 과학적 분석과 논리적 추론을 통해 짐작할 뿐이다. 맥주는 이렇게 인류의 탄생과 함께 시작해 바빌론의 모래바람과 이집트 피라미드 공사현장, 가장 오래된 이야기 중 하나라는 [길가메시 서사시]에까지 그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다. 그리고 고대 그리스와 로마 시대를 거치면서 맥주 양조는 이제 오늘날의 맥주 제조 방식과 어느 정도 비슷한 형태를 띠게 된다. 하지만 고대 로마는 이런 맥주 양조 기술의 발전과 함께, 맥주에 대한 또 다른 유산을 하나 남긴다. 그건 바로 와인과 맥주에 대한 인식의 차이다. 맥주는 노동자들이 땀흘려 일하고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마시는 술이고, 포도주는 그렇지 않다는 인상 말이다. 이 책에는 이런 우리가 막연하게 느끼고 있던 맥주에 대한 모든 것을 역사적 연원을 거슬러 올라가 한층 분명하고 또렷하게 드러내준다.
맥주의 세 가지 맛은 몰트의 단맛, 홉의 쓴맛, 효모의 맛
맥주는 싹틔운 보리(몰트), 홉, 효모, 그리고 물, 이 네 가지 재료로 만든다. 그렇다면 맥주의 맛도 이 세 가지로 나눌 수 있지 않을까? 물은 맛이 없으니 뺀다면 말이다. 맥주의 맛은 몰트의 단맛, 홉의 아릿한 쓴맛, 발효를 통해 효모가 만들어내는 독특한 ‘효모의 맛’으로 나눌 수 있다. 곡물과 야생 효모만으로 발효를 해서 만든 맥주에는 고유의 달콤한 단맛이 가득하다. ‘하느님에 대한 기도와 땀흘려 일하는 노동은 함께 지켜야 한다’는 성 베네데토의 수도원에서 만들어낸 맥주들이 바로 그러하다.
홉의 등장은 드라마틱하다. 홉은 단맛의 균형을 맞춰주는 쓴맛과 향을 제공하기 때문에도 중요하지만, 맥주가 상하지 않게 해주는 방부제의 효능이 있다. 홉을 사용하게 되면서 맥주를 보관할 수 있게 되었고, 먼 거리를 운반하여 팔 수 있게 된 것이다. 홉의 등장은 이런 맥주의 맛과 보관 외에도 중세의 권력 구조를 바꿔놓는 시발점이 되기도 한다.
효모의 맛은 우리에게 많이 알려진 ‘후가르든(호가든)’이라는 맥주의 맛을 떠올리면 짐작할 수 있다. 이 책에는 이렇게 맥주를 구성하는 각각의 재료들이 어떻게 등장하여 그 독특한 맛을 내게 되었는지, 그리고 그 재료들의 등장과 도입, 그리고 사라짐이 경제와 권력 구조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생생하게 보여준다. 팔팔 끓여야만 만들 수 있는 맥주가 중세 시대 전염병이 퍼지지 않게 해주는 역할까지 했다는 것을 보게 되면 맥주가 인류 역사와 얼마나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지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맥주가 다양해지면 맥도날드는 줄어든다?
술을 만들거나 팔지 못했던 금주법의 시대가 끝나고 1950년대 이후부터 미국에서는 몇 종류의 맥주만 만들어졌다. 자동화를 통한 대량 생산으로 가격 경쟁력을 확보하고 엄청난 광고와 배급망을 통해 미국에는 단지 몇 개의 맥주만 보일 뿐, 다른 맥주는 찾기 쉽지 않게 되었다. 규모와 자본에 밀려 지역의 작은 양조장들은 경쟁력을 잃었기 때문이었다. 1950~80년대까지 미국의 지역 양조장의 수는 꾸준히 줄어, 결국 미국 전역에 지역 양조장이 44개 밖에 되지 않을 때, 황금빛 아치를 내세운 맥도날드는 그와 반대로 미국 전역을 뒤덮었다.
다양한 맛을 접하지 않게 되면, 입맛도 평준화, 획일화되는 걸까? 맥주의 획일화가 바로 입맛과 생활양식까지 비슷하게 만든 것과 어떤 연관관계가 있지는 않았을까? 단순히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 입맛을 돋우기 위해 마신다고 생각했던 맥주가 우리의 식생활과 생활 패턴에까지 막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이 책에서 다양한 역사적 사례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독일의 한자동맹을 비롯한 물류 시스템, 인도에 대한 영국의 식민정책, 청교도의 북미대륙 도착과 미국의 독립, 그리고 무엇보다 생명의 신비를 밝히고 물질의 본질을 파헤치는 과학 발전과 기술의 발달이 맥주 맛의 다양성과 관련하여 어떤 영향을 주고 받았는지 흥미진진하게 찾아볼 수 있다.
우리나라 맥주의 대부분은 미국식 라거다. 브랜드에 따라 미세한 맛의 차이는 있지만 거의 같은 종류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 나오는 맥주에는 다양성이 부족한 편이라고들 말한다. 미국식 라거는 2차 대전 후 미국의 생활 양식과 인구 구성에 따라 만들어졌고, 우리나라도 이를 많이 참조했다. 미국의 사례를 보면서 우리나라 맥주의 다양성이 왜 부족한지 그 현상에 대한 몇 가지 이유도 이 책에서 찾을 수 있다.
초콜릿을 먹을 때는 어떤 맥주와 함께 먹을까?
맥주는 몰트와 홉, 효모의 종류와 양조법에 따라 무수히 많은 맛과 향이 가능하다. 그래서 그 다양한 풍미에 어울리는 음식도 수없이 다를 수 밖에 없다. 우리 한국사람에게 감자탕을 먹을 때는 맥주보다 소주다. 이렇게 음식에 따라 어울리는 음료수 혹은 술이 있다. 그렇다면 초콜릿을 선물로 받았을 때, 어떤 맥주와 함께 먹으면 좋을까? 마트에 들렀는데, 포도주와 맥주가 선반에 가득한데, 어떤 맥주를 고르면 좋을까? 이 책에서는 맥주를 역사적 발전 단계별로 각각의 알코올 세기나 쓴맛 정도와 같은 특성에 따라 구분하고, 그 맛과 향, 질감의 독특함을 알기 쉽게 설명하면서, 그런 풍미에 어울리는 함께 먹는 음식도 추천한다. 물론 음식 조합에 정답은 없지만, 맥주에 낯선 사람에게는 발디딤돌 역할을, 맥주를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간결하고 정확하게 정리된 체계를 줄 수 있는 인포그래픽이 좋은 가이드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