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는 계급을 재생산한다?
2004년 가을 대한민국, 고교등급제와 종합부동산세
서울대 입학생의 절반 이상이 강남 출신이다. 최상류 계층이 자녀에게 최고의 교육환경을 마련해주고 최고의 성과를 얻어내는 곳, 강남. 이곳에서는 종합부동산세에 벌벌 떠는 부모가 돈(물질적 자본)으로 얻은 신분이 학벌(학력 자본)을 통해 자연스럽게 자녀에게 대물림된다. 강남과 ‘비’강남이라는 ‘차이’가 ‘차별’을 낳는 곳, 대한민국에서 학교와 교육의 문제는 곧 사회적, 계급적 문제로 귀결된다.
학교 차이가 계급 차이를 만드는 사회
상류층 자녀들은 더 좋은 대학에 입학하고 더 좋은 직업을 가지는 반면, 평범한 서민의 자녀들은 그저그런 학교에 입학해 그저 그런 직업을 가지고 부모 세대와 별 다를 것 없이 살게 되는 상황에서 ‘학력’은 ‘계급’이 된다. 계급구조는 갈수록 탄탄해진다. 그런 재생산 과정이 진행되는 학교는 계급을 재생산한다. 사람들이 이것을 화제로 삼지 않는 이유는 그 명제가 학교는 계급간, 남녀간의 정치?경제?사회적인 격차를 없애는 출발점이라는 공고한 믿음과 대치되기 때문이다.
해머타운의 ‘싸나이’들을 만나다
문제아들, 노동자가 되기로 하다
영국 미들랜드의 산업도시 해머타운. 산업혁명 때 크게 성장한 해머타운은 70년대 당시 완전한 노동자계급의 도시였다. 성인 중 학교에 다니며 공부만 하는 사람은 2%도 안 되며, 주민의 8%만이 전문직과 관리직에 종사하고, 대다수가 육체노동자들이었다. 노동인구의 80%는 제조업에 종사했다.
자신들을 ‘해머타운의 싸나이들’이라고 부르는 해머타운 고등학교의 문제아들은 대부분 이 노동자계급의 자녀들이다. 부모가 노동자라는 것이 도대체 아이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던 걸까. 착실하게 공부만 하면 되는데 왜 안 하는 걸까? 왜 스스로를 반항적이고 “무식한” 노동자로 만들어 육체노동 같은 단순한 직업을 선택하는 걸까?
노동자의 자녀들이 노동자가 되기까지
이 책 ?학교와 계급재생산 ― 반학교문화, 일상, 저항?의 지은이 폴 윌리스는 해머타운 아이들과 직접 만나 인터뷰를 하고 그것을 분석한다. 이 책의 원제 ‘노동자가 되기 위한 배움, 노동자의 자녀들이 노동자가 되기까지(Learning to labour ― How working class kid get working class jobs)’처럼 문제아 12명의 고등학교에서의 마지막 2년과 직장생활(주로 육체노동을 하는) 초기를 아우르며 아이들의 생생한 말과 행동을 담았다. 반학교문화와 일상, 저항은 이 아이들을 이해할 수 있는 코드다. ?학교와 계급재생산?은 단순히 학교가 계급을 재생산하는 제도라는 설명에서 그치지 않는다. 학교는 아이들이 필연적으로 거쳐가는 곳이며, 여기서부터 아이들은 부모가 속해 있는 계층의 문화를 알게 모르게 받아들이면서 사회에 대한 인식을 시작하고 자신의 장래를 결정하는 데 영향을 받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학교’가 상징하는 교육 제도가 꼭 불합리하다는 증거는 아니다. 실제로 ‘싸나이’들이 육체노동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노동자로 자연스럽게 유입되면서 사회가 제대로 작용하게끔 만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은이는 이 문제의 해결책으로 반학교, 탈학교를 주장하지는 않는다.
반학교문화, 일상, 저항
학교는 지배적인 생산관계를 재생산하며, 누구든지 실력만 갖추면 얼마든지 출세할 수 있다는 이데올로기를 재생산한다. ‘싸나이’들은 자신의 부모를 보면서 이것의 실체를 알아차렸다. 물론 공부를 열심히 해서 새로운 기반을 닦아나가는 것이 전혀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싸나이에게 이것은 탐탁치 않은 일이다. 공부를 열심히 해서 ‘계집애’들이나 하는 정신노동을 하는 것은 세상에 저항할 줄 모르는 바보 같은 샌님들이나 하는 일이며, 나약한 짓이라는 것이다. 건강한 팔뚝을 드러내며 땀을 흘리는 일, 무거운 것을 들어나르고 자기들끼리의 의리로 서로만 알아볼 수 있는 인사를 하는 것. 그것은 싸나이들에게 저항의 상징이 된다.
싸나이들에게 저항은 일상이다. 선생님 몰래 수업을 땡땡이치는 것은 ‘모험심’이고, 아이들끼리의 주먹다짐은 ‘진정한 용기’다. 여자를 꼬시는 것은 ‘남성성의 발현’이다. 저녁 때 술집에 가서 자기들끼리 모여서 술을 마시는 것은 ‘어른 사내가 되었다는 증거’다. 하루가 멀다 하고 말썽을 일으키는 이런 일들은 일단 재미있다. 그래서 아이들은 이 재미를 포기할 수 없다. 싸나이들은 집단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과 우월감을 획득한다.
학교와 일터
‘싸나이’들은 ‘계집애’들에게나 어울리는 정신노동보다 ‘싸나이’의 힘을 과시할 수 있는 육체노동을 선호한다. 노동자가 남성성을 강조하며 힘을 쓰는 일에 보람을 느끼는 것처럼 ‘싸나이’들도 마찬가지인 것이다. 육체노동을 선호하는 것은 남성 위주의 가부장적 사고와 연결된다. 술과 여자를 끼고 노는 것도 좋아한다. 술과 여자는 남성적인 능력의 척도가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이들은 학생일 때도 몰래 선술집에 가서 술을 퍼마시며 자기들끼리 으쓱댄다. 자신의 여자친구는 순종적이며 순결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의미를 두지 않고 만나는 여자애들은 찝쩍대보기 일쑤다. 학교 수업을 땡땡이치지 않고 엉덩이 붙이고 지루한 수업을 듣는 것은 범생이들이나 하는 바보짓이다. 땡땡이는 남성의 용기를 보여주는 일이기 때문이다. 장난이나 농담에 적극 반응하지 못하고 소심하게 앉아 있는 것도 ‘계집애’ 같은 일이다. 이 아이들은 남성이 가사를 분담하는 것에 동의하지 않는다. 이런 문화는 노동현장에서도 발견된다. 결국 반학교문화와 노동현장문화는 동떨어져 있지 않은 셈이다. 반학교문화는 노동현장문화로 이어지며, 노동현장으로 새로운 노동력이 유입되는 원인이 된다. ‘싸나이’들에게는 차라리 노동현장으로 가는 것이 좋다. 이 아이들에게 취업은 학교 밖으로 쫓겨나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이 즐겁게 생활하며 노는 장소를 노동현장으로 옮기는 것일 뿐이다. 거기서 ‘범생이’보다 더 쉽게 적응하는 아이들은 자신에 대해서 긍정적인 자기 인식을 시작함과 동시에 당당해진다.
?싸나이?들은 스스로 산업일꾼이 되면서 동시에 정치사회적인 저항세력이 되는 주체가 된다. 이 책은 이렇게 기존 체제와 지배계급에 대한 저항의 과정에서 형성된 ‘싸나이’들의 문화가 어떻게 다시 원래 체제의 효과적인 작동에 도움을 주는지 정리하고 있다.
모든 사람을 위한 교육을 위해 ― “포기하든지 계속 밀고 나가든지”
공공성의 강화냐 교육소비자의 무한 권리 보장이냐는 물론 중요한 문제다. 하지만 정작 교육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학생’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려는 시도는 없었다. 아이들은 수동적인 대상으로, 주어진 환경에서 공부만 하는 미완성의 객체로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아이들의 목소리에는 우리가 모르는 무언가가 있다. 아이들의 역동적인 문화와 그 문화에서 발견되는 아이들의 미래, 학교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할 작은 변화, 반학교문화를 긍정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방법 등. 이 책은 학교, 또는 교실이 한 사회의 축소판이라는 사실을 보여 주는 생생한 보고서다.
지은이에 따르면 학교는 일종의 전쟁터다. 학생들 모두가 성공할 순 없다. 한 교실 안에는 미래의 자본가와 노동자, 부자와 빈민이 함께 공부하고 있다. 물론 ‘강남’은 예외지만. 사회적이고 기술적인 분업체제 속에서 개인이 담당하는 기능은 모순과 갈등을 통해 재생산되었고, 이런 재생산을 통해 개인의 삶이 고착화되는 불운이 이미 시작되었다.
그러나 많은 면담과 사례분석을 통한 결론은 ‘반학교’적이거나 ‘탈학교’적인 것이 아니다. 책에는 이 아이들을 “어떻게 해야 하느냐”에 대한 똑부러진 정답은 없다. 12명의 문제아들의 생생한 목소리를 담은 책은 이렇게 끝을 맺는다.
“포기하든지 아니면 낙심하지 않고 계속 밀고 나아가든지Whistle down the wind or whistle in the dark.?
비공식집단
어느 날 밤 우린 밖으로 나가
거리를 쏘다니며
지나가는 사람들을 찝적댄다
세상에 반항하고 있는 것 같긴 하지만
우린 그게 재미 있는 걸
…
만일 내가 우리 패거리에 끼지 않았다면
과연 무엇을 했을까
(영어시간에 데렉이 지은 시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