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순하고 소박하지만 감동의 폭은 대단했습니다.”
나태주 시인의 옷깃을 여미게 한 시들, 시가 무엇인지 다시 묻다!
『일흔 살 1학년』은 그간 나왔던 할머니 시집이 주는 감동을 뛰어넘어 ‘시가 대체 무엇인지 되묻게 하는’ 시집이다. 이 시집의 시 한 편 한 편은 “감정의 무늬가 아주 신선하며 시의 내용이나 시각 자체가 놀랍다”, “시는 우열이나 시비(是非)에서 출발하는 게 아니라 감정의 차이와 호오(好惡)의 단계에서 오는 것인데, 그 감정의 무늬가 아주 신선”해 오래 시를 써 온 나태주 시인마저 반성하게 했다고 한다. 나태주 시인의 말처럼 『일흔 살 1학년』은 응원을 뛰어넘는 그 무엇이 있는 시집, 시의 향이 물씬 나는 시집이다.
아들이
손자가
웃고 있다
크게 입 벌리고
웃고 있다
어떤 소리일까
산보다 큰 소리일까
꽃보다 예쁜 소리일까
듣고 싶다
웃음소리
-배정동, 「듣고 싶다」(50쪽)
이 꿈 저 꿈 꿔 봐야 뭐햐
살 만치 살았는데
빈손으로 와서 빈손으로 가는 인생
아등바등할 일 뭐 있냐
갈 데는 한 군데밖에
없는 줄 알았는데
공부하러 가야지
요가 하러 가야지
장 보러 가야지
갈 데 많아서 좋네
-이수화, 「행복한 인생」(154쪽)
“내가 살아온 이야기를 썼는데, 아이고, 그게 시가 될 줄은 몰랐지.”
일흔 살 1학년, 처음 학교에 가는 마음으로 삶을 기록하다
이 시집의 제목 ‘일흔 살 1학년’은 「나는 세상을 거꾸로 살아요」를 쓴 박광춘(78세) 님을 인터뷰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나왔다.
처음 문해학교에 간 날 이 시를 썼어요. 우산이 날아갈 만큼 바람이 세게 불고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던 날이라 속옷도 다 젖고 신발에서도 물이 줄줄 흘렀어요. 근데 나는 기분이 정말 좋았어요. 꼭 일고여덟 살 1학년으로 학교에 처음 가는 것 같잖아요. 못 배운 한을 품고 80년을 살았다고 생각해 봐요. 그 기분은 누구도 못 느낄 거예요.
-시인의 말, 「나는 세상을 거꾸로 살아요」를 쓴 박광춘(78세) 님
시를 쓰게 된 과정을 묻는 질문에 박광춘 할머니는 처음 문해학교에 간 날을 떠올렸다. 하필 폭우가 쏟아지던 날이라 이가 부딪힐 만큼 춥고 비에 온통 젖어 힘들었지만 마치 초등학교에 처음 입학이라도 하는 것처럼, 일흔 몇 살이 아니라 일곱 살 1학년이 된 것처럼 기분만은 정말 좋았다고 한다. 이처럼 글 모르는 한을 품고 평생을 살아온 분들에게 국가평생교육진흥원에서 주관하는 성인 문해교육 지원 사업은 새로운 세상을 만나게 하는 통로가 되고 있다.
이제 조금이나마 글을 배우고 보니
남들과 말도 통하고 간판도 눈에 들어오네
글씨가 삐뚤빼뚤 못나도 부끄럽지 않다
요즘은 길을 걸어도 밥을 먹어도
그냥 행복하다
-변상철, 「나의 행복」에서(82쪽)
“내가 그놈의 시를 써야겠다, 하고 깊이 생각한 것이 아니고 아이고, 내가 살아온 이야기를 썼는데, 그게 시가 될 줄 몰랐지.”라는 할머니 시인(신정득, 79세)의 말에서 알 수 있듯 글을 배운 뒤 한 자 한 자 써 내려간 두세 연의 짧은 시에는 70년 이상의 긴 세월이 일기처럼 담담하게 담겨 있다. 학교 대신 남의집살이를 해야 했던 설움(「부뚜막 소녀」, 64~65쪽), 글을 몰라 노래방에서도 친구들 가방만 지키고 있어야 했던 아픔(「난 짐꾼이 아니야」, 72~73쪽)이나 전쟁 나간 남편에게 편지 대신 김 세 장씩을 넣어 보낼 수밖에 없었던 사연(「김 세 장씩」, 84쪽) 등 ‘못 배운 한을 품은 80년’의 아픔과 서러움은 세월이 지나도 쉽게 잊히지 않는다. 그런데, 이 시집의 묘미는 그 아픔이 아픔에만 머무르지 않는다는 데 있다.
어느 한 분 빠짐없이 모두, 아픔과 슬픔은 품위를 잃지 않은 익살로 슬쩍 돌리고, 글을 배우고 난 ‘지금의 나’를 자랑스럽게 여기며 당당하게 세상을 향해 나아간다. 인생에 대한 원망과 한탄 대신 현재의 기쁨과 만족을 표현한다. 억수같이 쏟아지는 비를 맞으면서도 꼭 ‘일흔 살 1학년’으로 처음 학교에 가는 것 같아 기뻤다는 그 마음처럼 말이다.
바퀴벌레 약을 받으러
아파트 관리소에 갔다
할머니 여기 사인하세요!
사인이 머꼬?
여기 빈칸에 이름 쓰세요!
이름을 써 주고
바퀴벌레 약을 받아 왔다
기분이 좋았다
이름 쓰는 것이 사인인 줄
그때서야 처음 알았다
자꾸만 웃음이 났다
-박영희, 「사인했어요」(145쪽)
나태주, 김성규, 오은 시인과 오연경 평론가가 엮은이로 참여해 총 3부로 시집을 구성했다. 1부 ‘멧돼지 보낼게’에는 할머니들만의 유머가 드러나는 재미있는 시들을, 2부 ‘네 목소리가 듣고 싶은 겨’에는 못 배운 한을 품고 산 아픔을 표현한 시들을, 3부 ‘갈 데 많아서 좋네’에는 글을 배운 후 얻은 자신감과 기쁨을 노래한 시들을 모았다. 판형과 글자 크기 역시 성인 문해교육 교실에서 공부하시는 분들이 편히 보실 수 있게 ‘큰 글자책’만큼 크게 잡아 가독성을 고려하였다.
‘나만 몰랐던 새로운 세상’에 눈떠 이전과 다른 세상을 사는 기쁨, 더 많이 배우고 싶은 욕심, 뒤늦게 나만의 책가방과 함께 공부하는 친구와 선생님이 생긴 충만함, 간판과 은행 창구, 자식들 앞에서 당당해진 마음 등이 시마다 솔직하게 담겨 있다. 나이와 상관없이 배움은 언제나 “즐겁고 황홀한 첫 경험”(「첫 경험」, 126쪽)이라는 것을, 배움을 통해 다시 소녀가 되고 청년이 되고 시민이 되고 자기 삶의 주체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이 시집을 통해 다시 생각하게 될 것이다.
작가의 말
못 배운 것이 한이 되어서 불쑥 쓴 것이 그렇게 됐어요. 내가 그놈의 시를 써야겠다 하고 깊이 생각한 것이 아니고 내가 살아온 게 까막눈이라 그 이야기를 썼는데, 아이고, 그게 시가 될 줄 몰랐지.
―「도로 까막눈」을 쓴 신정득(79세) 님
어떻게 한 번에 써. 쓰고 고치고, 쓰고 또 고치고……. 이래야 맞나 저래야 맞나, 금방 못 쓰고 만날 고쳤어. 시를 쓸 때는 내가 살아온 이야기라 옛날 일이 생각나서 마음이 좀 우울했지만 다 쓰고 나니까 기분이 좋았지!
―「나를 들키고 싶지 않았다」를 쓴 김금례(78세) 님
오래오래 문해학교를 다니고 싶었는데 건강이 나빠졌어요. 건강해지면 언제 든 다시 학교에 가고 싶습니다. 힘들어도 계속하다 보니 나도 모르는 사이에 생각보다 많은 것을 할 수 있었어요. 여러분도 몸과 마음이 건강할 때 공부를 하면 뭐든 좋아질 거예요.
―「아이스께끼」를 쓴 김순신(80세) 님
글을 모를 땐 차도 잘 못 탔는데 이제는 어딜 가도 떳떳하고 자신감이 있어요. 내가 아프고 죽는다고 해도, 팔십이 넘어도 공부하러 다닐 거예요. 용기 내서 배우니까 마음이 더 젊어진 것 같고 좋아요. 시방은 손자가 뭐 물어보면 “야, 거기 받침이 들어가야지.” 하고 가르쳐도 주지!
―「나는 짐꾼이 아니야」를 쓴 송앵두(73세) 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