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곁의 임상노동, 우리 곁의 임상시험
대도시 시민들이 매일 출퇴근을 위해 몸을 싣고 있는 지하철 광고판에서 임상시험 대상자를 찾는 광고를 발견하는 일이 잦아졌다. 광고를 통해 모집하고 있는 임상시험 종류도 우리에게 익숙한 고혈압, 기능성 소화불량증에서 병명도 어려운 다낭성난소증후군에 이르기까지 다양해졌다.
광고만 증가한 것이 아니라 임상시험 참가자들도 증가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임상시험 참여가 이른바 ‘꿀알바’로 알려지면서 대학생, 취준생들이 시험 대상자로 대거 참여하고 있다고 한다. 2021년도 신문 보도에 따르면, 코로나19로 생계 일자리 찾기가 어려워진 실직자, 노인 등 취약계층들이 임상시험 장소로 모여들고 있다고 한다. 이들 중에는 3개월로 제한된 임상과 생동성 시험 참가 규제를 어기고 1년간 수차례 시험에 참여한 이들도 있는 것으로 알려져 이에 대한 정부의 실효성 있는 규제 재정비를 촉구하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현재 한국 임상시험 시장이 세계 시장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3.4%로 8위에 등극했는데 2004년 승인된 임상시험계획이 136건에 머물렀지만, 이 숫자는 2020년 628건으로 급증하였다. 국내 임상시험 성장에는 2004년부터 의료산업화를 근거로 이루어진 정부의 임상시험 업계에 대한 전폭적인 지원이 있었다. 정부 지원을 받은 임상시험 업계에서는 시장 확대를 위해 단기간에 많은 시험대상자들을 모집할 수 있도록 경제적 보상을 제도화하는 데만 치중했을 뿐 시험 대상자들에 대한 안전 관리 제도 구축은 소홀해 왔던 것이다. 2021년에야 ‘임상시험 안전관리시스템’이 구축되어 3개월 이내 임상 1상과 생동성 시험에 중복 참여하려는 일반인을 임상기관이 실시간으로 확인해 걸러낼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임상시험에 준하는 동의, 설명절차, 윤리규정 기준 강화도 예고되기는 하였으나 성장한 시장에 비하면 뒷북 행정이 아닐 수가 없다.
자기 신체를 실험 도구로 처분하는 사람, 임상노동자
이런 한국의 임상시험 시장 상황은 소위 사회 취약계층들이 생계를 위해 자신의 신체마저 실험 도구로 처분하고 있는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멜린다 쿠퍼와 캐서린 월드비의 『임상노동 : 지구적 생명경제 속의 조직 기증자와 피실험 대상』은 바로 이들 임상시험 대상자들이 어떤 역사적 과정을 거쳐 현재의 지위에 이르게 되었는지를 살핀다. 그리고 전 지구적 임상시험 시장의 출현이 생명공학 기술, 생의학적 기술 발전으로 가능하게 되었으며 현재 이 시장이 사용자생성혁신 모델이라는 새로운 분산형 임상실험 모델을 채택하는 쪽으로 변화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저자들은 난자 추출, 대리모 수태 과정, 배아 줄기세포 생성, 약물 시험 등과 관련하여 실험 참가자들이 겪게 되는 호르몬 변화, 약물 소비 과정 전반을 ‘임상노동’으로 정의한다. 그러면서 노동과 가치에 대한 고전적인 이론, 맑스의 이론을 갱신하여 임상 노동시장 역사와 출현 과정, 그리고 이들 노동이 다른 노동과 어떤 차이를 보이는지를 체계적으로 분석하고 있다.
임상노동 시장의 발전을 가져온 사회경제적 요인들은 무엇인가?
저자들에 따르면 임상노동 시장 형성의 배경에는 포스트포드주의 경제의 출현이 있다. 포스트포드주의 체제에서 기업의 수직적 해체가 이루어지고 정규 노동시장이 축소되면서 피고용자 개인들은 제도적인 노동보호를 받지 못하는 임상노동에 의지하게 되었다.
또 보조생식기술 개발 등의 생식의학과 줄기세포 기술 발전과 같은 생명공학 기술 혁신이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생의학 혁신으로 배아와 난자가 여성 신체로부터 분리 가능하게 되면서 유럽 난모세포 시장, 인도 수태 대리모 시장 같은 전 지구적 거래 시장이 가능해졌다. 이 과정에서 거래는 ‘백인성’을 재생산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며 이는 동유럽인 여성 난모세포에 대한 수요 증가로 나타난다. 또 대리모의 유전적 조성과 무관한 인종의 아이를 출산하는 것이 기술 혁신으로 가능해짐에 따라 수태대리모 시장이 인도에서 확산하게 되었다.
한편, 줄기세포 기술 혁신은 난모세포나 대리모와는 다른 방식으로 여성의 참여 노동을 변화시킨다고 분석한다. 배아줄기세포 생성은 난자 혹은 잉여배아 기증 여성에게 과배란 노동 참여, 약물투여 위험 감내, 배아에 대한 모성적 감정으로 인한 스트레스 인내 등을 요구한다. 이런 여성들의 적극적인 참여 없이는 줄기세포 연구란 가능하지 않은 것인데 이에 대한 평가가 제대로 진행되지 않았음을 이 책은 비판한다. 저자들은 기존 페미니즘적 설명에서도 이에 대한 분석이 적합하게 수행되지 못했다고 본다.
고지된 동의와 특정이행의 문제점
‘동의’는 오늘날 많은 기업의 책임 회피, 위험 회피 전략으로 사용된다. 대리모 계약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저자들에 따르면 임상산업에서 널리 활용되고 있는 ‘고지된 동의’는 역사적으로 ‘동의 후 책임 없음’ 원칙에 근거하는 노동 관련법인 불법행위법에서 유래한다. 자본이 미리 노동자들의 ‘동의’를 받는 것은 과거 ‘직장에서 발생하는 사고와 위험 부담을 노동자 개인에게 전가’하는 수단이었다. 지금은 ‘고지된 동의’ 양식이 국제 생명윤리협정에 의해 ‘인권’의 지위로 격상되었지만, 그 역사를 살펴보면 이것이 자본과 전문가 집단의 위험 관리 전략으로 출발했음이 분명하다고 저자들은 밝힌다. 따라서 현재 임상노동에 적용되고 있는 ‘고지된 동의’가 누구를 위한 것인지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이 책은 암시한다.
아울러 저자들은 수태대리모 관련 법에 적용되고 있는 노동계약과 관련된 ‘특정이행’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다. 다른 종류의 계약에서라면 금전적 손해배상으로 충분할 사항에 관해서 특정이행이 강제된다는 것은 법원이 계약 내용의 완수를 명령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대리모 계약에 특정이행이 적용된다는 것은 법원이 대리모에게 아이의 양도를 명령해 계약을 완수하도록 강제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이러한 법률이 2010년 인도의회에 상정되어 있었고, 이런 예외적인 법 적용이 가능한 것은 법원이 대리모의 어떤 권리보다도 ‘의뢰 부모’의 계약적 권리를 우선하기 때문이다. 이 법에 따르면 대리모는 출산 시 아이에 대한 모든 권리를 포기해야 한다. 이처럼 노동 역사와의 관계 속에서 임상노동을 검토한 저자들의 분석은 생명윤리 원칙에 대한 비판적 검토를 가능케 한다.
신약 시험 현장의 변화 ― 감옥과 병원에서 민간 영역으로, 그리고 약물 소비자들에 의한 혁신으로
이 책에 따르면, 신약 효능을 실험하는 임상시험 시장은 역사적으로 감옥과 병원에서의 폐쇄된 임상실험 형태로 출발했다. 그러다 점차 민간 클리닉과 임상수탁시험기관에서 개인 용역계약의 형태로 이루어지는 개방형 임상실험으로 변해왔다. 이 책은 이를 포스트포드주의 경제, 신자유주의 경제의 도래와 연관 지어 설명한다. 또한, 저자들에 따르면 제약 산업은 오늘날 혁신 속도의 감소와 특허 만료로 위기감을 느끼고 있다. 이에 대한 대응으로서 기업들은 ‘사용자생성혁신 모델’이라는 새로운 임상시험모델을 채택하는데, 이는 사실상 다중을 무급 임상노동에 동원하는 것이다.
저자들은 ‘사용자생성혁신 모델’이 에이즈치료 운동의 대두, 과학의 민주화 운동의 영향을 받아 출현하게 되었다고 보는데, 이 모델에서는 약품 소비자들이 인터넷 플랫폼을 매개로 시판 후 능동 감시 프로그램에 참여하여 스스로 실험을 관리하고 모니터링하는 전문가 역할도 수행한다. 일부 임상노동 참여자만이 아니라 일반 대중이 고도의 위험에 노출되는 상황이 된 것이다. 저자들은 이처럼 대중에게 위험을 전가하는 제약기업이 임상실험이 가져다주는 지적재산에 대한 독점적 특권을 보유하는 것이 과연 공정한가를 묻는다. 불공정한 교환을 시정해야 한다는 목소리들이 제기될 때가 도래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