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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디 머큐리 추모 공연 (Freddie Mercury Tribute Concert [블루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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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디 머큐리 추모 공연 (Freddie Mercury Tribute Concert [블루레이]

[ SD Blu-ray ]
Freddie Mercury, Gary cherone, Joe Elliott, Ian Hunter, Roger Daltrey 노래 외 18명 정보 더 보기/감추기 | Eagle Rock | 2013년 10월 10일 리뷰 총점10.0 정보 더 보기/감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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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디 머큐리 추모 공연 (Freddie Mercury Tribute Concert [블루레이]

품목정보

품목정보
발매일 2013년 10월 10일
시간, 무게, 크기 270분
제조국 미국

관련분류

제품소개

감독/출연진 소개 (23명)

미국 싱어송라이터 미국 싱어송라이터
싱어송라이터 싱어송라이터
노래 : Liza Minnelli (라이자 미넬리)
노래 : Zucchero (주케로,Zucchero Sugar Fornaciari)
걸쭉하고 목소리로 노래하는 주케로(Zucchero)는 이탈리아의 국보급 가수로 통하는 인물이다. 국내에도 히트곡 모음집을 비롯한 몇 장의 앨범이 공개된 바 있다. 비록 미국과 영국의 팝 스타처럼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것은 아니지만 1990년에 유럽에서 큰 반향을 일으킨 곡 ‘Senz una donna’(Without a woman)는 국내 팬들에게도 꽤 알려져 있다. 기타 영웅 에릭 클랩튼(Eric Clapto... 걸쭉하고 목소리로 노래하는 주케로(Zucchero)는 이탈리아의 국보급 가수로 통하는 인물이다. 국내에도 히트곡 모음집을 비롯한 몇 장의 앨범이 공개된 바 있다. 비록 미국과 영국의 팝 스타처럼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것은 아니지만 1990년에 유럽에서 큰 반향을 일으킨 곡 ‘Senz una donna’(Without a woman)는 국내 팬들에게도 꽤 알려져 있다. 기타 영웅 에릭 클랩튼(Eric Clapton)과 함께 유럽 투어에 나서기도 했으며, 위대한 테너 루치아노 파바로티의 연례 자선행사로 유명한 ‘파바로티와 친구들’에 자주 모습을 드러내 얼굴도 알려져 있다. 1956년 생이며 본명은 알델모 포르나치아리(Aldelmo Fornaciari). 70년대 말에 수의약품을 전공하면서 볼롱가에서 밴드를 결성했지만 지명도를 획득하지 못했고 결국 80년대 초반에는 노래부르기에서 작곡으로 전향했다. 하지만 86년 < Respetto > 앨범과 함께 비로소 자신의 이름을 새기기 시작해 이듬해 앨범 < Blues >가 본국 이탈리아에서 밀리언셀러를 기록하면서 비로소 톱스타로 부상했다. ‘Senz una donna’가 수록된 87년의 앨범 < Ora Incenso Birra >도 유럽에서 밀리언셀러를 기록했다. ‘Senz una donna’는 1991년 영국 소울 가수 폴 영(Paul Young)과 함께 영어와 이탈리아어를 뒤섞은 버전으로 다시 발표되어 영국차트 5위에 올랐다. 이 때가 이탈리아를 벗어 국제적 명성을 확보한 시점. 한편 이 싱글이 수록된 1990년의 앨범 < Zucchero Fornaciari >는 국제적 지향을 뚜렷이 반영, 영어 노래가 포함되었으며 에릭 클랩튼과 R&B 오르간주자인 지미 스미스(Jimmy Smith)가 게스트로 참여했다. 90년대 초반 그가 영국차트에 명함을 내민 또 다른 2곡은 모두 듀엣 곡으로 소울 여가수 랜디 크로포드(Randy Crawford)와 부른 ‘Diamante’와 루치아노 파바로티와 호흡을 맞춘 ‘Miserere’로 뒤 곡은 U2의 보노(Bono)가 만들어주었다. 그는 이로써 얻은 지명도로 1994년 우드스탁 페스티벌에도 출연하기도 했으며 같은 해 퀸(Queen)의 프레디 머큐리 트리뷰트 공연에 참여해 노래하기도 했다. 그의 음악은 영국가수로 비교한다면 조 카커(Joe Cocker)와 유사한 ‘블루스와 소울 성향의 록’이다. 앨범 제목으로 ‘블루스’로 내걸었다는 점이나, 폴 영 랜디 크로포드와 노래했다는 것이 말해준다. 열정적이고 혼에 넘친 창법이란 점에서 영미 소울 가수들과 유사하지만 그러면서도 결코 이탈리아적 요소를 놓치지 않는 것이 특징. 그는 2003년 프랑스 프로듀서 알랑 시몬(Alan Simon)이 주도한 환경 프로젝트 앨범 < Gaia >에 인도네시아 앙군(Anngun)과 함께 ‘World’란 곡으로 참여했다.
나이지리아와 브라질의 혈통이 반반씩 섞여있는 실은 1990년대 영국을 대표하는 댄스 팝 가수이다. 하지만 그는 그저 가벼움만을 추구하는 댄스 음악을 하지 않는다. 풍부한 표현력이 압권인 소울풀한 보컬을 바탕으로 그는 하우스, 포크, 록, 소울 등을 넘나드는 폭넓은 스케일을 선보인다. 또 모든 곡을 직접 작곡·작사하는 싱어 송 라이터이기도 하다. 1963년 2월 19일 영국에서 태어난 그는 11살의 어린 나이에 학... 나이지리아와 브라질의 혈통이 반반씩 섞여있는 실은 1990년대 영국을 대표하는 댄스 팝 가수이다. 하지만 그는 그저 가벼움만을 추구하는 댄스 음악을 하지 않는다. 풍부한 표현력이 압권인 소울풀한 보컬을 바탕으로 그는 하우스, 포크, 록, 소울 등을 넘나드는 폭넓은 스케일을 선보인다. 또 모든 곡을 직접 작곡·작사하는 싱어 송 라이터이기도 하다. 1963년 2월 19일 영국에서 태어난 그는 11살의 어린 나이에 학교에서 주최한 무대에서 노래를 부르는 등 일찌감치 재능을 인정받았다. 열 다섯 살이 되자 독립 선언을 한 그는 낮에는 여러 직업을 전전하며 생계를 꾸려나갔고, 밤에는 런던의 클럽에서 공연을 하며 음악의 꿈을 키웠다. 1980년대 중반 펑크(Funk) 밴드 푸시(Push)에 가담하여 아시아 투어를 마친 그는 런던으로 돌아와 래퍼 체스터 카멘(Chester Kamen)으로부터 테크노 팝 아티스트 아담스키(Adamski)를 소개받고, 1990년 넘버 원 싱글이 되는 ''Killer''를 공동 작곡했다. 진솔한 그의 보컬과 주술적인 사운드가 특징인 ''Killer''의 히트로 그는 프랭키 고스 투 할리우드(Frankie Goes To Hollywood), 에이비시(ABC), 버글스(The Buggles)를 키워낸 마이다스의 손 트래버 혼(Travor Horn)의 눈에 띄어 데뷔 음반을 내게되는 행운을 잡았다. 소울과 록이 감미로운 하우스 음악과 조화되면서 신선함을 불러일으킨 1991년 데뷔작 은 ''Crazy''(영국 2위), ''Future love''(12위) 등이 히트하면서 앨범 차트 1위를 차지하였고, 300만장의 판매고를 기록하는 대성공을 거뒀다. 이 작품으로 그는 이듬해 브릿 어워즈에서 ''최고의 브리티시 남자 아티스트'', ''최고의 브리티시 앨범'' 등 두 개 부문을 수상하는 영광도 안았다. 3년 뒤인 1994년에 발표한 두 번째 작품 (데뷔작과 타이틀이 같다)도 1집을 능가하는 인기를 누렸다. 제프 벡(Jeff Beck), 자니 미첼(Joni Mitchell) 등이 참여한 음반은 영국 차트 정상을 정복하며 소포모어 징크스를 한 방에 날려보냈다. 미국에서도 영화 의 사운드트랙에 실리며 스매시 히트를 친 달콤한 발라드 ''Kiss from a rose''에 힘입어 400만장이나 팔려나가는 대박을 터트렸다. 그래미 시상식에서 ''올해의 노래'', ''올해의 레코드'', ''최고의 팝 보컬'' 등 알짜배기 상을 휩쓴 것도 이 곡 덕분이었다. 소울 음악으로 대부분을 할애한 1998년의 3집 은 전작들의 명성에는 크게 못 미치는 수준이었다. 영국 차트 44위와 미국 차트 22위, 그리고 판매량은 골드에 그쳤다. ''Kiss from a rose''에 익숙해진 팬들을 위한 제 2의 복제품을 생산해내지 못한 것이 원인이었다. 현재 실은 공연 활동에만 전념하고 있다. 새 앨범에 대한 기대는 아직 이른 듯 하다. 거의 4년마다 음반을 선보이는 그이기에 조바심 낼 필요가 없다. 아직 3년도 채 안됐다.
사실 조지 마이클의 솔로 활동은 어느 정도 예견된 일이었으나 한창 절정의 인기를 누리고 있던 듀오 왬!(Wham!)을 갑작스럽게 해체하고 솔로로 나선 점은 팬들을 무척 당혹케 했다. 준비는 1984년에 이미 시작되어 왬의 최고 히트곡 ‘Careless whisper’의 경우 조지의 이름으로 싱글 발매되어 그때부터 홀로서기에 대한 예측이 분분했다. 1986년 싱글 ‘A different corner’가 미국차트 7... 사실 조지 마이클의 솔로 활동은 어느 정도 예견된 일이었으나 한창 절정의 인기를 누리고 있던 듀오 왬!(Wham!)을 갑작스럽게 해체하고 솔로로 나선 점은 팬들을 무척 당혹케 했다. 준비는 1984년에 이미 시작되어 왬의 최고 히트곡 ‘Careless whisper’의 경우 조지의 이름으로 싱글 발매되어 그때부터 홀로서기에 대한 예측이 분분했다. 1986년 싱글 ‘A different corner’가 미국차트 7위, 영국차트 1위에 오르면서 솔로를 개시한 그는 이듬해인 1987년 소울의 여왕 아레사 프랭클린(Aretha Franklin)과 듀엣곡 ‘I knew you were waiting(for me)‘을 취입하여 미국과 영국 차트 정상을 차지, 생애 최초로 그래미 트로피까지 받았다. 이후는 성공의 고공비행. 같은 해 여름 영화 < 비버리 힐스 캅 2 >에 삽입된 문제의 화제작 ‘I want your sex’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다. 영국에선 방송금지가 되었음에도 3위까지 올랐고 상대적으로 관대했던 미국에서도 2위에 오르는 호성적을 거두게 된다. 성에 대한 자유분방한 표현이 오히려 그에 대한 관심을 고조시켜 놓았다. 마침내 11월 대망의 솔로 프로젝트 < Faith >가 발매되었다. 발매 즉시 전세계적인 반향을 일으키며 손쉽게 앨범차트 정상을 차지, 12주간을 점령했고 미국에서만 현재까지 1000만장 이상을 팔아치우며 전세계적으로 2000만장에 육박하는 대박을 터뜨렸다. 싱글 히트곡들도 줄줄이 쏟아져 나와 ‘Faith(4주)’, ‘Father figure(2주)’, ‘One more try(3주)‘, ’Monkey(2주)‘등 무려 4곡이 차트 정상을 차례로 밟았다. 국내에서 큰 인기를 얻은 재즈 풍의 ‘Kissing a fool(4위)’와 미리 발표된 ‘I want your sex’까지 수록곡 중에서 총 6곡이 차트를 숨가쁘게 유린했던 88년이었다. 록, 리듬 앤 블루스, 소울, 재즈, 펑키, 댄스, 가스펠 등의 모든 음악 장르를 한 장의 앨범을 통해 접할 수 있게 만든 사실만으로도 그래미가 선정한 올해의 앨범상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데뷔앨범이 좋은 평판을 얻게 된 것은 가수로서 자질보다도 송라이터로서 조지 마이클의 자질에 스포트라이트가 집중된 측면이 작용했다. 그가 ‘Careless whisper’를 만들어낸 때는 10대였다. < Faith >는 이와 같은 조지 마이클의 놀라운 창작재능이 최고조에 달한 결정체인 셈이었다. 또한 이 앨범으로 흑인들의 전유물로만 여겼던 R&B 앨범차트에서 정상을 차지하며 1980년대 초반 블랙 빅 3(마이클 잭슨, 라이오넬 리치, 프린스)가 백인들을 흑인음악의 울타리 안으로 끌어들였던 것과 달리 백인이 그 작업을 주도하는 발판을 마련했다. 아메리칸 음악상(AMA)에선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이 조지 마이클을 팝/록 부문과 소울/R&B 부문에서 각각 최고의 남자가수로 선정했고 R&B 최우수 앨범상도 그의 몫으로 할당했다. 1990년에 출시된 두번째 프로젝트 < Listen Without Prejudice, Vol 1 >은 전작보다 한층 깊어진 동시에 여유로운 느낌을 주었지만 앨범은 미국 판매고 200만장을 포함하여 800만장 정도(?)가 팔리는데 그쳐 전작의 태풍을 재현하지는 못했다. 싱글도 ‘Praying for time(1위)’, ‘Freedom 90(7위)’, ‘Waiting for that day(21위)‘, ’Mothers Pride(50위)’등이 히트했으나 전작에 비해 훨씬 줄어든 자신의 입지를 실감해야 했다. 조지는 수록곡들의 높은 작품성에도 불구하고 앨범 홍보에 상당히 미온적이었던 소니 레코드사의 태도로 인해 앨범이 단명했다는 의혹을 갖기에 이른다. 이것이 빌미가 되어 아티스트의 음악적 자유를 인정하지 않으려 했던 소니사에 실망한 조지는 1992년 이래로 거대 레코드사를 상대로 외롭고 기나긴 법정투쟁을 시작(92.10)하게 된다. 가장 그에게 힘들었던 이 시기에 금전적, 정신적인 피해는 막대했다. 하지만 4년의 세월을 헛되이 보내지 않고 음악적 호흡을 쌓는데 집중투자한다. 그는 간간이 자선단체를 위한 행사에 참여하는 모습을 보이다가 1991년 11월 영국 웸블리 콘서트에서 자신의 우상이자 친구인 엘튼 존(Elton John)의 1974년 미국차트 2위 곡 ’Dont let the sun go down on me’를 듀엣으로 함께 불렀다. 이 실황 싱글은 4년 만에 영국차트 정상에 데뷔하였고 미국에서도 1위를 차지했다. 1992년 4월에는 에이즈 치료를 위한 자선 앨범 < Red Hot + Dance >에 수록된 신곡 ’Too funky(10위)’로 한 해 유럽에서 가장 많은 방송회수를 기록하게 된다. 이듬해에는 이미 고인이 된 프레디 머큐리(Freddy Mercury) 추모 콘서트 실황(92년)과 자신의 91년 라이브 투어 중에서 5곡의 라이브를 엄선하여 수록한 EP 음반 < Five Live EP >를 발매, 영국차트 3주간 정상을 밟았다. 퀸(Queen)의 나머지 멤버들과 함께 한 ’Somebody to love(32위)’와 영화 < 바그다드의 까페 >의 삽입곡인 제베타 스틸(Jevetta Steele)의 오리지날 ’Calling you’로 멋진 가창력을 다시 한번 뽐냈고 앨범에는 게이(Gay)들의 찬가 ’Killer/Papa was a rolling stone(77위)’와 리사 스탠스필드(Lisa Stansfield)와 함께 노래한 ’These are the days of our lives’도 수록되어있다. 1994년 소송에서 패소한 후 조지는 이에 불복, 항소했고 항소심이 진행중인 1995년 드림웍스(DreamWorks)사가 나서서 분쟁을 해결해 소니에 막대한 금전적 배상을 치르면서 조지와 새로운 계약이 체결되었다. 영국에선 메이저 레이블 버진(Virgin)과 계약이 이뤄지면서 어렵사리 그의 음악생활이 지속될 수 있었다. 무려 6년의 앨범 공백기를 깬 1996년에 세번째 앨범 < Older >가 세상에 나온다. < Faith >앨범을 그의 미국 최고의 걸작이라고 한다면 < Older >는 영국에서 최고의 걸작이 되었는데 그동안 상대적으로 박탈감을 느꼈던 영국에서의 인기가 절정에 달했기 때문이었다. 한 음반으로 영국에서만 (5X)플래티넘을 기록하며 버진 레코드 역사상 가장 빨리 팔린 앨범으로 기록되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6곡의 싱글이 차트 3위안에 드는 영국에서 최초의 기록을 남기는 기염을 토했다. 미국에선 플래티넘을 따내며 ’Jesus to a child’(7위)’와 ‘Fastlove(8위)’ 두 곡을 Top 10에 진입시켰다. 같은 해 10월에 영국 런던에서 소수의 팬들만을 모아놓고 MTV 언플러그드 공연을 실시하여 큰 호응을 얻었으며 여기서는 보니 레이트(Bonnie Raitt)의 명곡을 리메이크한 ’I cant make you love me’가 주목을 받았다. 98년 소니와의 마지막 동거작인 베스트 앨범 < Ladies & Gentlemen >을 발매하여 미국에서만 200만장 이상을 팔아치웠고 영국에선 앞서 발표한 솔로앨범들과 마찬가지로 차트 1위에 올라서 무려 8주간을 머무르는 가속페달을 밟았다. 항상 베스트 앨범이 발매될 때면 주목을 받는 것이 이전에 미발표된 신곡들인데, 조지의 앨범 역시 3곡의 신곡이 수록되어 있었고, 비버리 힐즈 공원에서 자신의 음란행위를 빗대어 묘사한 뮤직비디오로 화제를 뿌린 ‘Outside(영국 2위)’와 메리 제이 블라이즈(Mary J. Blige) 와 함께 한 스티비 원더(Stevie Wonder)의 오리지날 ‘As(영국 4위)’등이 주목의 대상이었다. 이듬해 세기말을 눈앞에 둔 시점에서 조지는 재즈 보컬리스트로 돌아왔다. 통산 4번째 솔로앨범 < Songs From The Last Century >를 커버 곡들로만 채워 격조를 높였다. 재즈의 고전들을 비롯하여 우리에게도 친숙한 로버타 플랙(Roberta Flack)의 ‘The first time ever I saw your face‘, 폴리스(Police)의 ’Roxanne‘, U2의 멤버들이 제작한 ‘Miss Sarajevo’에 이르기까지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매력을 선사한 앨범이었다. 2000년에 휘트니 휴스턴(Whitney Houston)과 취입한 듀엣곡 ‘If I told you that’이 영국을 비롯한 유럽지역의 최고의 히트곡으로 부상했고 이후 주요 콘서트에서 간간히 모습을 드러냈던 그가 올해 새 앨범 발매에 앞서 파격적인 싱글을 선보였다. 과거 ‘I want your sex‘에 버금갈만한 자극적인 곡 ’Freeek!(영국 7위)‘는 조셉 칸(Joseph Kahn)이 감독한 150만 달러짜리 뮤직 비디오가 전해주는 메시지 만으로 상당한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킨 곡이었다. 곧 새 앨범이 발매된다고 하니 그가 걸어온 변화무쌍함 때문에도 한층 기대가 된다. 생기 발랄한 버블 사운드로 청소년들의 절대적인 우상으로 군림했던 20대 초반의 왬! 시절부터 자신의 음악적 욕심을 남김없이 드러낸 솔로 데뷔시절, 성숙함이 짙게 묻어나는 30대 중반의 < Older >시절과 재즈로 수양을 한 30대 후반까지 가수로서뿐 아니라 작곡가로서 소신을 굽히지 않고 매번 변화된 모습을 보여주며 질주해온 음악인생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불혹의 나이를 목전에 둔 시점에서 보여줄 시도가 어떤 것일지 관심을 모으고있는 것이다.
세상일에 아무 관심없는 천재 작곡가 대중 음악인을 ‘음악 하는 자세’와 관련하여 분류한다면 크게 두 부류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하나는 그가 처해 있는 시대 상황을 면밀히 관찰하여 대중 정서의 현 위치를 찾으려는 사람들이며, 다른 한쪽은 주변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든 무관하게 자신의 음악만을 표출하는 데 심혈을 쏟는 사람들이다. 두 가지 스타일이 혼재되어 있는 음악인도 있을 테지만 대체로 전자의 무게 중심은 시각... 세상일에 아무 관심없는 천재 작곡가 대중 음악인을 ‘음악 하는 자세’와 관련하여 분류한다면 크게 두 부류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하나는 그가 처해 있는 시대 상황을 면밀히 관찰하여 대중 정서의 현 위치를 찾으려는 사람들이며, 다른 한쪽은 주변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든 무관하게 자신의 음악만을 표출하는 데 심혈을 쏟는 사람들이다. 두 가지 스타일이 혼재되어 있는 음악인도 있을 테지만 대체로 전자의 무게 중심은 시각(view)일 것이며 후자는 예술(art)이다. 엘튼 존은 바로 후자를 대표하는 금세기 최고 록 스타 가운데 한사람이다. 흔히 그는 1970년대를 대변하는 톱 가수로서 록 역사에 기록된다. 1970년대가 개막되면서 ‘보더 송(Border song)’을 빌보드 차트에 랭크시키며 등장한 그는 이후 당대 누구도 따를 수 없는 탁월한 선율로 인기 차트를 석권했다. 그의 멜로디를 뽑아내는 재주는 존 레논과 폴 매카트니의 쌍포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 경이적이었고 또 천재적이었다. 만약 1970년대에 그가 없었더라면 팝계의 ‘예술적 활기’는 기대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이와 관련, 록 평론가인 로버트 크리스트고(Robert Christgau)의 엘튼 존에 대한 서술은 참으로 맹쾌하다. “1960년대의 비치 보이스처럼 엘튼 존은 1970년대의 필수적인 시금석으로 남아 있다. 따라서 그가 해악의 진부성을 축약하고 있다고 믿는다면 그렇게 하라. 하지만 내 생각으로 그는 가장 유순하고 황량한 시절마저도 생기로 가득 채울 수 있다는 것을 입증한 인물이다.” 그런데 크리스트고도 인정하고 있듯이 1970년대는 사회성으로 특징지어진 1960년대 록 혁명의 정신이 함몰되어 버린 ‘록 예술성의 시대’로 정의된다. 크리스트고가 그때를 ‘해악’이니 ‘유순하고 황량한 시절’이니 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인식에 기초한 것이다. 엘튼 존 스스로도 ‘음악을 만들면서 정치적 이슈를 내거는 것은 넌센스다. 세상사를 개선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가서 음악하는 것뿐’ 이라며 자신의 비(非)참여적 음악관을 천명하곤 했다. 그는 “음악에 있어서 정치가 영향력을 발휘한다고 생각지 않는다. 말로 세상을 바꾸려 했던 1960년대 가수들을 보라. 삶은 여전히 똑같지 않은가”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가 록의 사회성에 얼마나 등을 돌렸는지는 곡 쓰기에서도 여실히 나타난다. 그는 다른 송라이터들과 달리 작사는 직접 하지 않고 남에게 맡겼는데 당시 그의 작사 파트너는 버니 토핀(Bernie Taupin)이었다. 버니가 쓴 노랫말은 지극히 개인적인 내용으로 가득 찼다. 버니는 사회를 떠난 신변잡기의 소재에 집착하면서 공상을 써내기에 급급했다. 그러나 엘튼은 그의 가사를 좀처럼 따지지 않았다. 그저 즐겁게 그의 공상을 팬들에게 전달할 뿐이었다. 그는 심지어 “난 정말 버니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른다. 어떤 사람에 대한 노래냐고 묻기는 하지만 의미를 캐내지는 않는다. 난 그의 가사 10편에 곡을 붙일 때까지 그를 만나지 않은 적도 있다”고 스스럼없이 밝히기도 했다. 자기 환상만을 늘어놓는 작사가, 그것을 검증도 없이 곡을 쓰고 즐겁게 노래하는 가수, 그들에게서 시각을 바랄 수 없다. 그런 음악은 본질적으로 예술 쪽으로 치우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엘튼 존이 1970년대의 특성을 떠 안은 인물임을 시사하는 또 하나의 중요한 단서가 있다. 1970년대는 1960년대 히피의 프리 섹스 여파로 성의 일반적 개념이 철저히 해체되어 독신, 동성애, 그룹 섹스, 배우자 바꾸기 등 새로운 섹스 스타일이 마구 고개를 들던 시기이기도 했다. 때문에 1970년대를 ‘자극의 시대’라고도 일컫는 것이다. 엘튼은 소문난 양성(兩性)주의자였다. 아니, 스스로 바이 섹슈얼(Bi-sexual)이라고 공언하고 다녔다. 그런 충격적 신상 공개는 데이비드 보위(David Bowie)를 뺀다면 록 스타들 중에서는 그에게서 최초로 나온 것이었다. 하지만 실상은 달랐다. 그는 양성주의자가 아니라 동성주의자, 즉 게이라는 사실이었다. 최근 < 디테일즈 >지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왜 그 때 호모라고 하지 않고 바이 섹슈얼이라고 했냐”하는 질문에 “아마 겁이 나서였기 때문일 거다. 진실 파기이지만 그 당시에는 가능한 한 ‘외교적’으로 말하려고 생각했다”고 답변했다. 이 부분에 관해서 그의 실체를 파악하기 위해 인터뷰 내용을 더 살펴보기로 하자. - 언제부터 여성 관계를 단계적으로 끝냈는가? :끝내다니? 어떠한 여성 관계도 결코 없었다. 그 누구도 나는 끝내고 자시고 하지 않았다. - 몇 살 때부터 자신이 게이임을 알았는가? :대략 23세쯤이었을 거다(그는 1947년생이므로 1970년쯤 된다). 그때가 나의 첫 실제 경험이었다. 아마 그 전부터 게이인지 알았을 텐데 23살에 실질적으로 그것을 맞이했다. - 그런데 결혼은 왜 했나? :잘못된 이유로 결혼했다. 난 결혼하면 내가 당하고 있는 모든 고통으로부터 벗어날 것이라고 생각했다. ‘난 게이야. 난 정말 불행해’라고 여기곤 했으니까. 동성연애자라는 여론의 화살을 피하려고 결혼했다는 얘기다. 그는 1984년 독일 출신의 레코딩 엔지니어인 레니트 블라우어(Renete Blauer)와 결혼식을 올렸다. 게이라고 공공연히 밝힌 사람이 여자에게 갔다는 이유로 화제를 모았던 이 관계는 당연히 오래가지 못했다. 둘은 3년을 채 넘기지 못하고 1987년 이혼했다. 게이 발언, 여성과 결혼, 그리고 이혼 등의 사건으로 이미 타블로이드 신문의 가십 단골이 된 그는 1988년 마침내 한 차례 커다란 홍역을 치러야 했다. 영국의 < 선 >지가 “엘튼이 10대 어린이들을 모아 놓고 입에 담을 수 없는 추잡한 섹스 파티를 벌였다”는 기사를 게재한 것이었다. 그 기사에 따르면 그는 게이를 초월하는 ‘성도착증 환자’이자 ‘성격 장애자’나 다름없었다. 인간 관계 전반에 영향을 미치고 어머니마저 창피해 스페인으로 떠나버리자 분기탱천한 그는 두주먹 불끈 쥐고 < 선 >지를 고소했고 이어 치열한 법정 공방을 벌이게 됐다. 그는 이 재판에서 승소해 명예를 회복했지만 이후 언론으로부터는 ‘흥미의 대사(Ambassador of Fun)’라는 불명예스런 타이틀을 얻었다. 애초부터 매스컴과 우호적인 관계는 아니었지만-언론의 등쌀이 마릴린 먼로를 죽이게 했다는 내용을 노래 ‘바람속의 촛불(Candle in the wind)’로 알 수 있다-그는 이 사건을 계기로 언론에 몸서리를 치게 되었다. 그는 영화 < 라이온 킹 >의 사운드 트랙은 ‘오늘밤 그대는 사랑을 느끼나요?(Can you feel the love tonight?)’으로 재기한 94년까지 근 7년 간 가능한 한 언론과의 인터뷰를 회피했다. 그의 기자 혐오증은 너무나 유명하다. 스스로도 “난 영국의 언론에 분노가 치민다. 정말로 그들이 싫다. 그들은 거짓말쟁이들이며 지구의 깡패들이다”라고 강도 높게 말하기도 했다. 그의 언론에 대한 분노는 지금도 살아 끓어 넘친다. 올해 발표된 새 앨범의 타이틀 송 ‘메이드 인 잉글랜드(Made in England-8월 19일자 빌보드 싱글 차트 52위)’가 그것을 실증해 주는 곡이다. “난 영국에서 만들어졌어. 블루 코티나차처럼 말야... ...넌 스캔들의 냄새를 좇았지. 여기 내 가운데 손가락을 봐. 난 고통의 40년을 살았어. 아무것도 기댈 것이 없어... ...넌 아직도 호모라고 얘기하고 모든 사람이 웃지.” 그가 이처럼 투정을 부리는 것도 일리는 있다. 원래가 솔직하고 감성적인 성격으로 자신의 성(性)을 고백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언론을 거치면서 일반인들의 미움과 손가락질이 생겨난 것이라고 그는 믿기 때문이다. 그의 인기가 하향세로 접어든 것도 양성주의자임을 밝힌 1976년부터였다. 그는 1989년 < 파리 마치 >지와의 인터뷰에서 “지난번 앨범 < 레그 스트라이크스 백(Reg Strikes Back) >은 전세계적으로 판매 성적이 대단히 좋았는데 유독 영국에서만은 결과가 안 좋았다. 영국인들 대부분이 < 선 >지의 악의적인 기사를 믿고 있기 때문일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의 어떤 논리적인 응수에도 불구하고 그가 ‘예술과 자극’의 1970년대라는 보수 시대를 살아왔으며 보수 성향의 인물이라는 점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그는 또 명백한 ‘록 엘리트’다. 부자라는 점에서도 그렇거니와 음악 능력의 측면에서도 그렇다. 그는 “버니의 가사를 받아 기분이 좋을 때면 곡을 쓰는데 15분도 안걸린다”고 자랑했다. 그런 천부적 재능을 밑천 삼아 그는 지금까지 무려 32장의 앨범을 발표했다. 물론 이 왕성한 생산력을 아티스트의 성실성이라는 측면에서 극구 칭송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비틀어보면 그것은 음악 엘리트만이 할 수 있는 일 아닐까. 실제로 그는 비평계 일각으로부터 ‘음악의 과소비’를 행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으며 그가 1970년대 후반 ‘엘리트만이 아니라 누구나 음악할 수 있다’는 평등의 이데올로기를 내건 펑크 진영의 공격 대상이 된 것도 이 때문이었다. 아직도 그의 이름에는 ‘로커’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그러며 연상되는 과거의 거친 피아노 연주나 기행적 무대는 분명 폭발과 반란을 특질로 하는 록의 전형적 제스처였다. 그러나 지금 그에게서 그러한 ‘록의 반항적 미학’을 발견하기는 어렵다. ‘오늘밤 사랑을 느끼나요’가 말해주듯 중산층의 격조와 결탁한 ‘AOR(Adult Oriented Rock)’이나 스탠더드 팝으로 색깔을 바꾸어 안전지대에 정착해 있다. < 타임 >지는 얼마전 그의 새로운 전성기가 도래했음을 대서특필하는 순간에도 ‘그에게는 실재(實在)하는 록 스타의 고뇌와 거친 감정이 부족하다’는 지적을 빼놓지 않았다. 그가 ‘팝계의 불사조’라는 작위를 하사 받아야 함은 마땅하다. 정글과도 같은 팝계를 4반세기에 걸쳐 롱런한 ‘영광의 생존’만으로도 그는 위대하다. 1993년에 이미 엘비스 프레슬리의 벽을 넘어 24년간 한 해도 거르지 않고 매년 차트 40위권의 히트곡을 낸(올해로 그 햇수는 26년으로 늘어났다) 사실만으로도 그의 위력을 충분히 실감할 수 있다. 마흔여덟 살의 노장이 신인들 틈새에서 몇 백만 장의 음반 판매고를 올리는 것 또한 우리 입장에서는 부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사실 그 나이의 사람에게 록에 대한 충성을 요구하는 것도 무리일 것이다. 하지만 그에게는 시각이 없다. 그는 4반세기 동안 그의 관점을 개인으로부터 해방시킨 적이 없었다. 그렇기에 보수적인 시대에 환영을 받고 있는 것이다. 내내 부진하다가 미국 사회에 보수적인 기류가 소생한 지난해(1994년) 재기한 것을 보라. 그의 노래들 ‘굿바이 옐로 브릭 로드(Goodbye yellow brick road)’ ‘오늘밤(Tonight)’ ‘미안하다는 말은 정말 어려워(Sorry seems to be the hardest word)’ 등은 아직도 우리들에게 높은 인기를 누리고 있다. 그는 실로 우리의 팝송 청취와 수용이 예술적 가치에만 집중되어 있음을 상징하는 인물이라는 생각이 든다.
노래 : David Bowie (데이비드 보위)
무차별 변신으로 일관해온 록의 순례자 1947년 영국 런던의 브릭스턴 태생인 데이비드 보위는 애청곡이 많은 뮤지션은 아니다. 이름도 꽤 알려졌고 차트 활동도 부진한 편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정감에 맞는 음악을 하지 않았던 탓인지 인기곡 하나 남겨 놓지 못했다. 그러나 영미 록 역사에서, 특히 1970년대를 논할 때, 빠질 수 없는 인물로 기록된다. 이른바 ‘살아 있는 전설’이다. 그는 1969년 미국에서... 무차별 변신으로 일관해온 록의 순례자 1947년 영국 런던의 브릭스턴 태생인 데이비드 보위는 애청곡이 많은 뮤지션은 아니다. 이름도 꽤 알려졌고 차트 활동도 부진한 편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정감에 맞는 음악을 하지 않았던 탓인지 인기곡 하나 남겨 놓지 못했다. 그러나 영미 록 역사에서, 특히 1970년대를 논할 때, 빠질 수 없는 인물로 기록된다. 이른바 ‘살아 있는 전설’이다. 그는 1969년 미국에서 아폴로 11호가 사상 최초로 달에 착륙했을 때에 맞춰 공상 과학(SF)의 환상을 실은 ‘우주의 괴짜(Space oddity)’를 발표해 주목을 받았다. 그리고는 불세출의 걸작 앨범 < 지기 스타더스트와 화성에서 온 거미들의 흥망(The Rise And Fall Of Ziggy Stardust And Spiders From Mars) >을 통해 남녀 일체의 파격을 선보이며 진보적인 록 뮤지션으로 떠올랐다. 그는 스스로 동성이자 초월자인 ‘지기’로 분해 무대의 시각적 충격을 강조했으며 현상을 거부하는 반란을 일상화했다. 흔히 ‘자극의 시대’로 일컬어지는 1970년대와 맞물린 이러한 퍼스낼리티 설정은 즉각 록의 새로운 규범으로 확립되었다. 그것이 ‘글램 록’ 또는 ‘글리터 록’이란 것이었다. 그는 가수가 노래하는 사람, 무대가 노래하는 장소라는 등식과 관념을 넘어섰다. 화려하고 원색적인 화장에 반짝거리는 의상을 하고 나와 무대에서 노래할 뿐만 아니라 ‘연기’를 했다. 그것은 자극적인 퍼포먼스였다. 그는 1972년 “지금 충격을 줄 수 있는 유일한 것은 극단으로 가는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는 팬들이 지기의 이미지를 오용하여 반사회적인 폭력을 일삼게 되자 곧바로 지기의 탈을 벗어버렸다. 이 시점부터 그는 어느 것 하나에 정착하는 법이 없었다. ‘다이아몬드의 개(Diamond dogs)’로 예언자가 되는 듯 하더니 ‘로우(Low)’에서는 은둔자로 변신했으며 나중에는 ‘야윈 백인공작(Thin white duke)’으로 탈바꿈했다. 음악도 이곳 저곳을 넘나들었다. 하드한 기타록을 하다가 소울 음악을 시도하기도 했으며 전자 음악도 했고 심지어 디스코 댄스 음악 세계에 빠지기도 했다. 긍정적으로 볼 때 그는 새로운 것에 과감히 가슴을 열어 끊임없는 혁신을 이룩한 음악인이었다. 데카당적인 틀은 유지했지만 그 속에서는 종잡을 수 없는 ‘예술적 보헤미안’임을 의도적으로 나타냈다. 하지만 ‘한 우물 파기’에 의미를 두는 사람들은 그를 ‘뿌리 없는 실험 병자’로 ‘음악적 곡예사’로 배격했다. 그가 펼쳐 놓은 무수한 장르의 파편들과 끝없는 변신의 행적을 보면 카멜레온이요, 기회주의자였음은 누구도 부인하기 어렵다. 과연 이같은 무차별 변신을 두둔해야 하는가. 그러나 록계에서는 그의 음악이 언제나 예측 불허였으며 누구도 흉내낼 수 없을 만큼 독창적이라는 점을 높게 평가한다. 30년간 록계에 몸담으면서 오로지 실험 정신으로 일관해 온 순례자로 떠받드는 것이다. 그는 1993년 AP통신과의 회견에서 자신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난 내가 한 것을 동료들과 비교할 때 나를 모험적인 작가로 생각한다. 난 한 곳에 머무는 것이 체질적으로 싫다. 그래서 악평이 나오기도 한다... 난 스튜디오에 들어가 머릿속에 담은 구체화된 아이디어가 내 자신을 놀라게 하는지를 본다. 밖에서 누군가 그것을 좋아할 사람이 있을 테지만 그러나 나는 기본적으로 나 자신을 위해 곡을 쓴다.” 그의 곡예는 대중의 기호를 쫓은 상술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예술성을 자극하는 것, 바로 그 점에 봉사했다. 즉 ‘예술적 동기’로 자신의 음악 세계를 형상화해 온 셈이다. 이처럼 록예술에 집착한, 그리고 진보적인 뮤지션의 음악은 대중의 폭넓은 사랑과는 대부분 무관하다. 음악적으로 볼 때도 곡조나 편곡에 있어서 일반적인 패턴을 따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그는 빌보드 차트 1위곡을 두 곡이나 보유하고 있다. 예술의 개가로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사실은 그가 때로 ‘대중적인 접근’을 시도하기도 했다는 반증이다. 때문에 1위곡들인 ‘명성(Fame)’이나 ‘춤을 춥시다(Let’s dance)’는 그다지 호평을 받는 편이 아니다. 특히 디스코 리듬에 전자 댄스 음악적 요소가 전면화된 ‘춤을 춥시다’는 노골적으로 상업성을 겨냥, 보위의 골수 팬들을 실망시켰다. 1977년 < 로우 >앨범 발표 당시 “되도록 이 앨범이 팔리지 않기를 바란다”는 요지의 말을 했던 그를 전제할 때 그것은 명백한 일탈이었다. 그는 ‘춤을 춥시다’의 성공이 너무 거대했던지 이후 그 그림자에 가려 주류에서 급격히 멀어졌다. 줄기차게 앨범을 내놓았지만 상업적 성과도 내리막길을 달렸고 평자들의 호의도 식었다. 세월이 많이 흐른 뒤 그 자신도 그때의 성공을 부끄러워했다. 그는 1995년 < 뉴욕 타임스 >지에 “‘춤을 춥시다’로 빅히트를 한 것은 최악의 상황이었다. 난 대중적인 인기를 누른 적이 없었는데 갑자기 내가 풍선껌 포장지와 같은 처지에 서게 된 느낌이었다.” 라고 술회했다(가끔 목격할 수 있는 일이지만 서구 록스타들은 반성도 참 잘한다!). 그는 이때 2년만에 이색적인 앨범 < 아웃사이드(Outside) >와 함께 컴백했다. 이색적이라고 표현한 것은 한편의 심리적인 추리소설을 사운드트랙화 했기 때문이다. ‘나단 애들러의 일기’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이 앨범은 기괴한 10대 소년의 살인 사건을 수사하는 사립 탐정과 그 주변 용의자들에 관해 노래하고 있다. 이 ‘예술적 추리 사건’의 진상은 1999년 발매될 마지막 앨범에서 규명된다고 한다. 그러니까 이번 < 아웃사이드 >앨범은 시리즈의 첫편인 셈이다. 데이비드 보위는 이 앨범을 제작하기 위해 한 때 명콤비였던 걸출한 프로듀서 브라이언 이노(Brian Eno)와 다시 손을 잡았다. 그것은 1980년대의 부끄러운 상업적 성공을 기억에서 지우려는 몸부림처럼 보인다. ‘비상업적’인 과거의 면모를 회복하기 위한 의지의 산물이라고나 할까? 즉흥성이 중시된 연주나 몽환적 부유(浮遊)의 분위기가 그것을 설명해 준다. 마치 ‘안 팔려도 그만’이라는 당당함이 배어 있는 음반이다. 그는 인기의 억압으로부터 탈출하려는 자세를 되찾음으로써 ‘영원한 로커’임을 재확인시키고 있다. 록이란 게 원래 그런 음악이다.
노래 : Robert Plant (로버트 플랜트)
1990년도 히트 싱글 ’All around the world’로 소개된 리사 스탠스필드(Lisa Stansfield)는 남성에 비해 상대적으로 그 층이 엷은 백인 여성 리듬 앤 블루스 싱어의 자리를 풍요롭게 한 영국 출신의 싱어 송라이터다. 그녀는 1980년대에 활동한 티나 마리(Teena Marie), 테일러 데인(Taylor Dayne), 알리슨 모이엣(Alison Moyet)처럼 끈적끈적하고 짙은 리듬 앤... 1990년도 히트 싱글 ’All around the world’로 소개된 리사 스탠스필드(Lisa Stansfield)는 남성에 비해 상대적으로 그 층이 엷은 백인 여성 리듬 앤 블루스 싱어의 자리를 풍요롭게 한 영국 출신의 싱어 송라이터다. 그녀는 1980년대에 활동한 티나 마리(Teena Marie), 테일러 데인(Taylor Dayne), 알리슨 모이엣(Alison Moyet)처럼 끈적끈적하고 짙은 리듬 앤 블루스 창법을 구사함으로써 흑과 백의 작은 통합을 이룩했다. 1988년 ’Jackie(54위)’라는 싱글로 빌보드 싱글 차트에도 자신들의 명함을 제시한 바 있는 댄스 팝 그룹 더 블루 존(The Blue Zone)에서 리드 보컬을 담당했던 스탠스필드는 작곡 파트너인 이안 디바니(Ian Devaney), 앤디 모리스(Andy Morris)와 함께 솔로 음반 < Affection >을 1989년에 공개하면서 화려한 독립을 시작했다. 첫 싱글 ’All around the world’가 빌보드 차트 3위까지 오르면서 상업적인 성공과 함께 평단 측으로부터도 훌륭한 가창력을 소유한 여가수란 호평도 얻었다. 이어진 싱글 ’You can’t deny it(14위)’와 ’This is the right time(21위)’도 준히트를 기록하자 그녀의 미래는 밝았으며 두 번째 앨범에 대한 기대도 커져갔다. 그러나 1991년에 공개된 2집 < Real Love >는 ’Change(27위)’와 ’All woman(56위)’만이 미미한 반응을 얻는데 그쳤고, 1993년의 < So Natural >에서는 단 한 곡의 싱글 히트곡도 배출하지 못하자 그녀의 이름은 꺼져가는 촛불의 연소처럼 우리의 뇌리에서 서서히 사라져갔다. 허나 소울 디스코의 황제 배리 화이트(Barry White)의 원곡 ’Never, Never gonna give you up(74위)’을 수록한 < Lisa Stansfield >로 1997년에 담담하게 복귀한 이 미녀 가수는 2001년에도 새로운 앨범 < Face Up >을 공개해 음악 팬들의 마음에 되살아났다. 시간이 흐를수록 이탈리아의 명배우 소피아 로렌의 외모를 닮아 가는 리사 스탠스필드는 1965년 영국에서 태어났다. 청소년 시절부터 그녀를 사로잡은 것은 1970년대 미국에서 번창했던 소울 디스코 같은 흑인 음악과 1980년대 영국의 클럽가를 휩쓸었던 댄스뮤직이었다. 바로 이 두 요소가 리사 스탠스필드의 음악 기초가 되는 핵심 재료이기 때문에 그녀의 음악에는 흑인 음악의 열정과 댄스 음악의 세련된 흥겨움이 자연스럽게 서로를 끌어안고 있다. 현재 리사 스탠스필드의 앨범이 음반 매장에서 수십만 장씩 팔릴 정도의 매력을 잃어버린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녀의 음악은 여전히 매력적이다.
애니 레녹스(Annie Lennox)는 1980년대를 대표하는 뉴웨이브 그룹 유리드믹스(Eurythmics) 시절부터 가창력과 음악적인 능력을 동시에 인정받은 여성 싱어 송라이터다. 그녀의 작곡 실력과 회색 톤의 깊고 중성적인 음색, 그리고 소울풀한 창법은 12년 동안 3장의 앨범만을 발표하는 활동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쉽게 흔들리지 않는 여성 싱어 송라이터 위치를 굳건히 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54년 1... 애니 레녹스(Annie Lennox)는 1980년대를 대표하는 뉴웨이브 그룹 유리드믹스(Eurythmics) 시절부터 가창력과 음악적인 능력을 동시에 인정받은 여성 싱어 송라이터다. 그녀의 작곡 실력과 회색 톤의 깊고 중성적인 음색, 그리고 소울풀한 창법은 12년 동안 3장의 앨범만을 발표하는 활동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쉽게 흔들리지 않는 여성 싱어 송라이터 위치를 굳건히 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54년 12월 25일, 스코틀랜드의 애버딘에서 태어난 애니 레녹스는 어린 시절부터 배운 피아노와 바이올린으로 음악 잠재력을 키웠다. 1970년대 후반 그녀가 웨이트리스로 일하고 있던 레스토랑에서 데이브 스튜어트를 만나서 결성한 유리드믹스는 1980년부터 11년 동안 역동적인 활동을 보여주면서 1991년에 화려한 대미(大尾)를 장식했다. 그러나 그녀의 첫 싱글은 유리드믹스에 몸담고 있던 1988년에 소울 싱어 알 그린(Al Green)과 듀엣으로 부른 ‘Put a little love in your heart(9위)’이다. 그 해에 개봉된 영화 에 삽입된 이 노래로 가능성을 타진한 애니 레녹스는 그룹 해산 1년 후인 1992년에 공식적으로 솔로 데뷔 앨범 를 발표해 ‘Why(34위)’와 ‘Walking on broken glass(14위)’가 그녀의 인지도를 높였다. 1995년에 공개한 솔로 2집 는 100% 다른 가수들의 노래를 리메이크 한 대범한 앨범이었다. 싱글히트곡으로는 더 러버 스피크스(The Lover Speaks)의 오리지널을 다시 불러 그녀에게 그래미 최우수 여성 가수상을 안겨준 ‘No more “I love you’s”(23위)’ 뿐이었지만 국내에서는 프로콜 해럼(Procol Harum)의 원곡을 커버한 ‘A whiter shade of pale’도 높은 인기를 누렸고, 펑크 밴드 클래시(Clash)의 노래를 재해석한 ‘Train in vain’ 등 익히 알려진 곡들은 매니아 층으로부터 환영받았다. 새로운 밀레니엄을 전후 한 시기에 1980년대의 뉴웨이브 음악을 재조명하는 분위기가 조성되자 애니 레녹스와 데이브 스튜어트는 일시적으로 모여 자선 공연을 갖기도 했다. 2003년에는 8년만에 세 번째 솔로 앨범을 공개해 조금도 퇴색하지 않은 카리스마를 발산하고 있다.
노래 : Elizabeth Taylor (엘리자베스 테일러)
엘리자베스 테일러는 영화계에 발을 들여놓은 40년대부터 지금까지 아름다움의 대명사로 불리우는 할리우드 최고 스타이다. 영국 출신이지만 일찌감치 할리우드에 진출해 아역 배우로 이름을 날리던 엘리자베스 테일러는 타고난 아름다움으로 할리우드를 정복했고, 몽고메리 클리프트(젊은이의 양지), 제임스 딘(자이언트), 리처드 버튼(클레오파트라, 말괄량이 길들이기) 등 당대 최고의 스타들과 출연하며 많은 염문을 뿌리기도 했다.... 엘리자베스 테일러는 영화계에 발을 들여놓은 40년대부터 지금까지 아름다움의 대명사로 불리우는 할리우드 최고 스타이다. 영국 출신이지만 일찌감치 할리우드에 진출해 아역 배우로 이름을 날리던 엘리자베스 테일러는 타고난 아름다움으로 할리우드를 정복했고, 몽고메리 클리프트(젊은이의 양지), 제임스 딘(자이언트), 리처드 버튼(클레오파트라, 말괄량이 길들이기) 등 당대 최고의 스타들과 출연하며 많은 염문을 뿌리기도 했다. 1960년 <버터필드>와 1966년 <누가 버지니아 울프를 두려워하랴>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누렸다. 여덟 번의 결혼으로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온 것으로도 유명하다.
록 기타리스트 록 기타리스트
연주 : Tony Iommi (토니 아이오미,Frank Anthony Iommi)
밴드 : Guns N' Roses (건즈 앤 로지스)
건스 앤 로지스는 원초적이고 육감적인 하드 록을 바탕으로 팝과 블루스, 펑크, 재즈 등 다양한 음악 스펙트럼을 펼치며 한 시대를 풍미했던 그룹이다. 대부분의 메탈 그룹들이 한 가지 스타일에만 천착하는 것과는 달리, 그들은 다각화된 접근법을 통해 헤비메탈이 단지 ’때리고 부수는’ 음악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입증한 팀이었다. 그래서 개혁에 실패한 동료 그룹들이 하나씩 궤도를 이탈 할 때에도 그들은 제자리를 지키며 팬들... 건스 앤 로지스는 원초적이고 육감적인 하드 록을 바탕으로 팝과 블루스, 펑크, 재즈 등 다양한 음악 스펙트럼을 펼치며 한 시대를 풍미했던 그룹이다. 대부분의 메탈 그룹들이 한 가지 스타일에만 천착하는 것과는 달리, 그들은 다각화된 접근법을 통해 헤비메탈이 단지 ’때리고 부수는’ 음악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입증한 팀이었다. 그래서 개혁에 실패한 동료 그룹들이 하나씩 궤도를 이탈 할 때에도 그들은 제자리를 지키며 팬들을 끌어 모았다. 특히 고음역대의 옥타브를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보컬리스트 액슬 로즈와 뛰어난 필을 소유한 작곡가 이지 스트래들린, 그리고 감각적인 리프를 만드는 데 천부적인 재능을 지닌 기타리스트 슬래시의 막강 트라이앵글은 1990년대 초까지 엄청난 위력을 발휘하며 지구촌 음악 시장을 장악했다. 당시 국내에서도 메탈리카, 본 조비 등과 함께 왕좌를 놓고 다툴 만큼 그들의 인기는 대단했다. 하지만 밴드의 출발은 심히 미약했다. 건스 앤 로지스는 1985년 미국 LA 지역의 록 밴드 할리우드 로즈(Hollywood Rose)를 거치고 L.A. 건스(L.A Guns)의 멤버로 활약하던 액슬 로즈와 이지 스트래들린이 무명 밴드에 속해있던 베이시스트 더프 맥케이건과 조우하면서 스타트라인을 끊었다. 그리고 얼마 후 슬래시와 스티븐 애들러가 합류하면서 라인업이 완성되었다. 그 당시 그들은 또래 L.A. 그룹들이 그러하듯 짙은 마스카라와 여성적인 복장을 전면에 내세우는 등 글램 록의 영향권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비슷비슷한 무리들 속에서 그들은 제대로 된 데뷔조차 하지 못한 채 마이너리그를 전전했다. 건스 앤 로지스는 그러나 다른 L.A. 록 커뮤니티 회원들처럼 ’Woman In Look’에만 머물지는 않았다. 그들만의 변별점을 찾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바로 음악 본연으로 회귀하는 전략이었다. 팝과 구별되지 않는 말랑말랑한 멜로디를 집어 던지고 ’소음과 파괴의 향연’의 길로 접어들면서 해법을 찾은 것이다. 1987년 공개되어 지금까지 모두 1500만장이라는 경이적인 판매 데이터를 올린 < Appetite For Destruction >은 그런 의도로 만들어졌다. 비단 판매량 측면에서 뿐 만 아니라 이 음반은 평론가들에 의해 헤비메탈 역사를 뒤흔든 문제작으로 종종 거론된다. 얼마 전 미국의 유명 록 저널 지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헤비메탈 앨범 리스트’에서 이 음반을 자신 있게 1위로 지명하기도 했다. 무대 위를 종횡무진하는 ’악동’ 액슬의 보컬과 이지와 슬래시의 절묘한 콤비 플레이가 환상적인 하모니를 펼쳐낸 음반에서는 ’Sweet child o’ mine’, ’Paradise city’, ’Welcome to the jungle’ 등이 톱 텐 안에 드는 히트를 기록했다. 그들에 대한 대중의 반응은 뜨거운 것이어서 뒤이어 공개된 미니 음반 < G N’ R Lies >도 차트 5위권에 진입하는 쾌거를 올렸다. 시대는 그러나 그들을 그냥 내버려두지 않았다. 오랜 동안 지하에서 침묵을 지키던 인디의 흐름은 이제 격류가 되어 돈과 향락에만 집착하는 부패한 메인스트림 록, 즉 헤비메탈을 삼켜버릴 준비를 하고 있었다. 팬들도 슬슬 그들의 복지부동에 반감을 표시하기에 이르렀다. 분위기를 파악하지 못하고 과거의 영화에만 침잠해 있던 많은 팝 메탈 밴드들이 구조조정의 대상이 되었다. 건스 앤 로지스는 불길한 전조를 직감했고, 오히려 정공법을 통해 위기를 돌파하자는 결론을 내렸다. 그것은 새 시대의 록, 즉, 얼터너티브가 모사조차 할 수 없는 주류 록의 위용으로 그들을 압도해 버리자는 계획이었다. 1992년 음반 < Use Your Illusion Ⅰ >, < Use Your Illusion Ⅱ >는 그렇게 해서 탄생했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두 장으로 나누어 발매된 음반은 얼터너티브 록 폭발의 진원지가 된 너바나의 마스터피스 < Nevermind >와 시장에서 정면충돌하게 되는 운명을 맞게 되었다. 그룹의 생사를 좌우하게 될 이 회전(會戰)에서 팬들은 양자의 손을 다 들어주었다. 너바나의 괴력은 마이클 잭슨의 음반을 끌어내릴 만큼 무시무시했지만, 헤비메탈이 보여줄 수 있는 음악적 역량이 총 집결된 < Use Your Illusion Ⅰ >, < Use Your Illusion Ⅱ > 에 대한 관심도 무시 못할 만큼 뜨거웠다. 동시에 발표된 음반은 빌보드 앨범 차트에 각 1, 2위로 진격하는 전과를 올렸다. 수록곡 중 아직도 11월만 되면 울려 퍼지는 대서사시 ’November rain’을 비롯, 밥 딜런의 시그니처 송을 멋지게 리메이크 한 ’Knockin’ on heaven’s door’, 서정적인 발라드 ’Estranged’, ’Don’t cry’, 영화 < 터미네이터 2 >에 삽입되었던 ’You could be mine’등이 줄기차게 리퀘스트를 받았다. 대규모 오케스트라의 도입 등 거대 자본의 지원 하에서만 가능한 모든 것들이 떠날 채비를 하던 팬들의 귀를 다시 포섭했다. 비극이 잉태된 것은 그룹이 성공의 궤도에 완연히 올라선 직후였다. 중요한 한 축을 담당해 왔던 이지 스트래들린이 탈퇴를 통보한 것이다. 그의 독립선언으로 밴드 내 주도권 싸움이 극에 달했음이 밝혀졌다. 사공이 많은 배는 결코 순항할 수 없음을 다시 한번 입증한 사례였다. 그의 자리는 길비 클락으로 메워졌으나 이때부터 그룹 내부에는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1993년 공개된 커버 앨범 < The Spaghetti Incident? >는 당시 그룹의 내정(內政)이 얼마나 위태로웠는지를 보여주는 반증이었다. 1995년 슬래시마저 솔로 앨범을 발표하며 독자 행동을 개시하자 액슬 로즈의 입장은 극도로 난처해졌다. 설상가상으로 더프 맥케이건과 드러머 매트 소럼마저 프로젝트 밴드 뉴로틱 아웃사이더(Neurotic Outsider)로 건너가 버려, 건스 앤 로지스는 사실상 ’활동중단’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거기에 뒤얽힌 멤버들간의 고소 사건은 그룹의 분열에 방점을 찍어버렸다. 1990년대 말 그룹은 해체된 것과 마찬가지였다. 폭행 등 가십거리로만 몇 차례 타블로이드를 장식했을 뿐이었다. 그 이후 액슬 로즈는 새로운 멤버들을 영입하며 그룹의 부활에 힘쓰고 있음을 공공연하게 언론에 흘렸다. 2000년에는 상당히 구체적으로 음반 작업이 진행되고 있음을 밝혔지만 별다른 진척과정은 없었다. 그러던 중, 얼마 전 액슬 로즈는 투어 계획까지 상세하게 밝히며 그룹이 확실히 재건에 들어갔음을 암시했다. 그들의 복귀가 어떤 형태로 진행될지는 좀더 지켜봐야 할 것 같지만, 한 시절을 뒤흔들었던 록 그룹의 역사가 다시 ’진행모드’로 들어선 것은 팬들에게 큰 선물이 아닐 수 없다. 벤드멤버 추가 : 더프 맥케이건(Duff McKagan, 베이스), 매트 소럼(Matt Sorum, 드럼), 디지 리드(Dizzy Reed, 키보드), 길비 클락(Gilby Clarke, 기타), 스티븐 애들러(Steven Adler, 드럼), 폴 휴지(Paul Huge, 기타), 로빈 핑크(Robin Finck, 기타), 브라이언 맨티어(Brian Mantia, 드럼), 토미 스틴슨(Tommy Stinson, 베이스), 조시 프리즈(Josh Freese, 드럼), 버켓헤드(Buckethead, 기타), 리처드 포르터스(Richard Fortus, 기타), 트레이시 건스(Tracii Guns, 기타), 롭 가드너(Rob Gardner, 드럼)
미국 보스턴 출신의 헤비메탈 밴드 익스트림은 이름처럼 극단적인 음악을 하는 그룹이 절대 아니다. LA 메탈의 끝물에 등장하여 밴 헤일런(Van Halen) 스타일의 하드 록과 팝 메탈을 적절히 구사하는 팀이다. 하지만 그들의 음악 속에는 펑크(Funk), 블루스, 재즈, 스탠더드 등 다양한 요소들이 용해되어 있다. 그래서 딱히 어느 특별한 카테고리에 묶는 것은 별 반 의미가 없어 보인다. 록 사운드를 중심으로 여... 미국 보스턴 출신의 헤비메탈 밴드 익스트림은 이름처럼 극단적인 음악을 하는 그룹이 절대 아니다. LA 메탈의 끝물에 등장하여 밴 헤일런(Van Halen) 스타일의 하드 록과 팝 메탈을 적절히 구사하는 팀이다. 하지만 그들의 음악 속에는 펑크(Funk), 블루스, 재즈, 스탠더드 등 다양한 요소들이 용해되어 있다. 그래서 딱히 어느 특별한 카테고리에 묶는 것은 별 반 의미가 없어 보인다. 록 사운드를 중심으로 여러 장르를 끌어들이는 ‘크로스오버’의 전형을 보여준 것이다. 국내에서 크게 히트한 ‘More than words'', ‘When I first kissed you'' 같은 곡들만 봐도 알 수 있다. 익스트림은 이미 1985년에 < The Dream >이라는 앨범을 발표했던 밴드 드림(Dream)에서 보컬을 맡았던 게리 세론(Gary Cherone)과 드러머 폴 기어리(Paul Geary)가 신펄(Sinful)이라는 로컬 그룹에서 활동하던 기타리스트 누노 베텐커트(Nuno Bettencourt)와 함께 1986년 결성하였다. 이듬해 누노의 소개로 베이시스트 팻 배저(Pat Badger)가 합류하면서 완벽한 진용을 갖췄다. 1989년에 발표된 그룹의 데뷔작 < Extreme >은 차트 80위에 머물며 그다지 큰 주목을 끌지 못했다. 하지만 ‘Rock a bye bye'', ‘Kid ego'' 등은 후속 작품에 대한 기대치를 한껏 높였다. 1991년에 내놓은 2집 < Extreme Ⅱ: Pornograffitti >는 그룹의 명성을 전세계로 전파시킨 견인차 역할을 한 작품이다. 록 기타의 전통을 유지하면서 최첨단 하이테크 기교까지 펼쳐내는 누노 베텐커트의 기타 테크닉은 절정에 달했고, 게리 세론의 시니컬한 음색은 곡의 흐름을 자유자재로 타고 있다. 헤비메탈의 장르 범주에서 벗어나 다채로운 음악 텍스쳐를 도입했다. 차트 정상을 차지한 어쿠스틱 발라드 ‘More than words''를 비롯해, ‘Hole hearted'', ‘Get the funk out'' 등이 대변한다. 그러나 2집 앨범의 엄청난 성공은 1992년의 세 번째 음반 < Ⅲ Sides To Every Story >의 음악적 실험을 그늘로 드리워지게 했다. ‘Yours’, ‘Mine'', ‘The Truth''의 총 3부작으로 나눠진 이 앨범은 웅장한 오케스트레이션을 사용하여 오페라적이고 클래식컬한 면모가 두드러졌다. 퀸(Queen)을 연상케 하는 ‘Stop the world'', 잔잔한 누노의 어쿠스틱 기타와 70인조 오케스트라와의 협연으로 심포닉 느낌이 강조된 ‘Rise ''n shine'' 등으로 작품성 측면에서는 전작보다 더 좋은 평가를 받았지만 판매실적은 저조하였다. 드러머를 마이크 맨기니(Mike Mangini)로 바꾸고 3년 뒤에 발표한 마지막 앨범 < Waiting For The Punchline >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익스트림은 음악적으로 뛰어난 실력을 갖췄음에도 불구하고, ‘More than words''의 벽을 넘지 못해 1996년 10월 해체하고 말았다. 1990년대 가장 전도유망(前途有望) 했던 록 밴드 중의 하나가 종언을 고한 순간이었다. 이후 게리 세론은 새미 해이거(Sammy Hagar)를 대신하여 밴 헤일런의 보컬리스트로 ‘영전(榮轉)’되었고, 누노 베텐커트는 솔로 앨범을 발표하며 얼터너티브 록으로 방향전환을 꾀했다.
영국 셰필드 출신의 5인조 그룹 데프 레퍼드는 1980년대 전세계를 장악한 NWOBHM(New Wave Of British Heavy Metal)을 논할 때 절대 빼놓을 수 없는 핵심 밴드이다. 그들은 1970년 후반부터 모터헤드(Motorhead), 아이언 메이든(Iron Maiden), 주다스 프리스트(Judas Priest) 등의 쟁쟁한 그룹들과 함께 영국 헤비메탈의 중흥을 외치며 지구촌 공습을 단행했다. ... 영국 셰필드 출신의 5인조 그룹 데프 레퍼드는 1980년대 전세계를 장악한 NWOBHM(New Wave Of British Heavy Metal)을 논할 때 절대 빼놓을 수 없는 핵심 밴드이다. 그들은 1970년 후반부터 모터헤드(Motorhead), 아이언 메이든(Iron Maiden), 주다스 프리스트(Judas Priest) 등의 쟁쟁한 그룹들과 함께 영국 헤비메탈의 중흥을 외치며 지구촌 공습을 단행했다. 특히 그들은 거칠고 투박한 사운드로 무장했던 다른 동료 밴드들과는 달리 듣기 편한 멜로디가 가미된 소프트한 메탈 사운드로 영국은 물론이고, 본 조비(Bon Jovi), 밴 헤일런(Van Halen) 등이 선점하고 있던 미국 시장까지 점령하며 1980년대 최고의 헤비메탈 밴드 중 하나로 우뚝 솟았다. 또한 그들은 1980년대의 음악 혁명이라 불리며 ’보는 음악 시대’를 이끌어낸 MTV의 전략(글램 스타일의 음악과 잘 생긴 외모, 그리고 섹시한 옷차림 등등)에 전적으로 부합하면서 음악 산업을 잘 이용하는 밴드로 평가받고 있다. 이런 밴드의 음악과 이미지 메이킹은 1980년대 중/후반 전성기를 누렸던 LA 메탈 그룹들의 생존방식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하지만 무엇보다 데프 레퍼드를 세계 정상의 반열에 올려놓을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드러머 릭 앨런(Rick Allen)과 멤버들이 보여준 한 편의 드라마 같은 인간 승리와 눈물겨운 우정 때문일 것이다. 1980년대 중반 절정의 인기를 구가하고 있을 때 불의의 사고로 인해 드러머에게는 생명줄이나 다름없는 왼쪽 팔을 절단한 앨런이 특수 제작한 전자 드럼 키트를 가지고 두 발로 연주를 하며 재기에 성공했을 때 전 세계 음악팬들은 진한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앨런이 음악 생활을 포기하지 않도록 옆에서 용기를 북돋아 주던 멤버들의 끈끈한 우정은 잦은 라인업 교체를 일삼는 여러 밴드들에게 좋은 귀감이 됐다. 데프 레퍼드는 1977년 기타리스트 피트 윌리스(Pete Willis)와 스티브 클락(Steve Clark), 보컬리스트 조 엘리엇(Joe Elliot), 그리고 베이시스트 릭 새비지(Rick Savage)로 첫 출발을 했다. 1년 뒤인 1978년 드러머 릭 앨런이 가세하면서 완벽한 진용을 구축한 그들은 세 트랙이 담겨있는 EP < Getcha Rocks Off >를 1979년 발표하며 음악계에 정식으로 데뷔했다. 미니 앨범에 대한 주위의 괜찮은 반응에 힘입어 그들은 BBB 라디오의 유명 프로그램인 존 필 쇼(John Peel Show)에 출연하였고, 음악 언론에서도 NWOBHM의 기대주로 뽑히는 등 화려하게 신고식을 치렀다. 이에 탄력을 받아 포노그램(Phonogram) 산하의 < 버티고(Vertigo) > 레코드사와 계약을 체결한 그들은 1980년 데뷔작 < On Through The Night >(영국 15위, 미국 51위), 1981년 소포모어 음반 < High ’N’ Dry >(영국 26위, 미국 38위) 등을 연속적으로 내놓으며 세계 시장 진출의 발판을 마련했다. 이후 한 번 불붙기 시작한 데프 레퍼드의 상승세는 약간의 멤버 변화와 위기를 헤쳐나가며 1980년대 내내 식을 줄 몰랐다. 알코올 문제로 인해 피트 윌리스를 퇴출시키고, 글램 록 그룹 걸(Girl)의 멤버였던 필 콜렌(Phil Collen)을 받아들이고 만든 1983년 작품 < Pyromania >는 마이클 잭슨의 마스터피스 < Thriller >의 광풍에 밀려 아깝게도 미국 차트 2위에 오르는 데 그쳤지만, 장장 92주간 차트 내에서 머물며 오랫동안 위력을 떨쳤다. 그들은 릭 앨런이 1984년 12월 31일 자동차 사고로 한 팔을 절단하는 불행을 겪었음에도 멤버들의 서로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돌파하고 1987년 네 번째 작품 < Hysteria >로 극적으로 재기했다. 영국과 미국에서 모두 정상을 차지한 음반은 ‘Pour some sugar’(미국 2위), ‘Animal’(19위), ‘Hysteria’(10위), ‘Love bites’(1위), ‘Armageddon it’(3위), ‘Rocket’(12위) 등의 히트곡들을 차례로 쏘아 올리며 미국에서만 1000만장(다이아몬드)이 넘는 기념비적인 판매고를 기록했다. 메탈 매니아뿐만 아니라 대중들도 접하기에 좋은 달콤한 팝이 가미된 메탈 사운드와 MTV의 막강 지원이 제대로 먹혀든 것이다. 이 앨범으로 그들은 1989년 아메리칸 음악 시상식에서 ‘최우수 헤비메탈 앨범’, ‘최우수 헤비메탈 아티스트’ 부분을 수상하는 영광은 안았고, 전작 < Pyromania >(당시 600만장)에 이어 연속으로 음반을 500만장 이상 판매한 최초의 그룹이 되었다. 헤비메탈에서 얼터너티브로 음악 조류가 이동한 1990년대에 접어들어서도 데프 레퍼드는 수그러들지 않고 거침없는 행보를 해나갔다. 1991년 1월 8일 알코올 중독으로 사망한 스티브 클락의 부재에도 불구하고 1992년 발표한 음반 < Adrenalize >으로 그들은 < Hysteria >에 이어 영미 앨범 차트 1위를 석권했고, 곧이어 디오(Dio), 화이트스네이크(Whitesnake) 등의 유명 밴드를 거친 거물 기타리스트 비비안 캠벨(Vivian Campbell)을 맞아들여 스티브의 공백을 메웠다. 계속해서 1993년에는 희귀곡과 미발표곡 등을 한데 묶은 컴필레이션 작품 < Retro=active >(미국 9위, 영국 6위)를 공개했고, 3년 후인 1996년에는 음악적인 변화를 단행한 6집 < Slang >(미국 14위, 영국 5위)를, 그리고 1999년에는 7집 < Euphoria >을 차례로 선보이며 녹슬지 않은 노장 밴드의 뜨거운 열정을 만방에 떨쳤다. 현재 데프 레퍼드는 신보 작업 중이라고 하는데, 조 엘리엇에 따르면 모던 록 사운드의 < Slang >과 그룹의 트레이드마크인 팝 메탈을 표방한 < Euphoria >을 믹스해놓은 작품이 탄생할 것이라고 한다. 과연 ‘-ia’ 앨범 시리즈를 좋아하는 올드 팬들과 취향이 다른 신세대 록 매니아들 모두를 소화해낼 수 있는 절충 사운드를 만들어낼 지 관심이다.
멤버 : James Hetfield, Kirk Hammett, Lars Ulrich, Robert Trujillo ‘스래시 메탈의 제왕’메탈리카는 메탈이라는 장르명과 동의어로 불릴 만큼 헤비메탈의 거칠게 질주하는 흐름 속에서 매우 커다란 족적을 남긴 그룹이다. 우선 그들은 1970년대 후반 극점에 다다른 펑크의 애티튜드와 1980년대 초반 전세계를 진동시킨 영국 헤비메탈의 새로운 흐름, 즉 NWOBHM(Ne... 멤버 : James Hetfield, Kirk Hammett, Lars Ulrich, Robert Trujillo

‘스래시 메탈의 제왕’메탈리카는 메탈이라는 장르명과 동의어로 불릴 만큼 헤비메탈의 거칠게 질주하는 흐름 속에서 매우 커다란 족적을 남긴 그룹이다. 우선 그들은 1970년대 후반 극점에 다다른 펑크의 애티튜드와 1980년대 초반 전세계를 진동시킨 영국 헤비메탈의 새로운 흐름, 즉 NWOBHM(New Wave Of British Heavy Metal)의 음악적 자양분을 받고 음지에서 등장한 스래시 메탈(Thrash Metal)에 생명력을 불어넣어 ‘세계화’시켰다. 이로 인해 그들은 슬레이어(Slayer), 메가데스(Megadeth), 앤스랙스(Anthrax) 등과 함께 ‘스래시 메탈의 사인방’으로 불리며 1980년대 헤비메탈 네트워크를 점령하며 최고의 인기를 누렸다. 또한 그들의 엄청난 굉음을 동반한 사운드는 스래시 메탈의 영역에만 그치지 않고, 이후 등장한 데스 메탈, 블랙 메탈 등 익스트림 메탈 계열의 장르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펑크 세례를 받은 직선적인 기타 리프, 커다란 울림을 자랑하는 투 베이스 드럼과 파워 베이스, 포효하는 보컬은 헤비메탈의 공식으로 자리잡았다. 하지만 무엇보다 메탈리카가 위대한 그룹으로 평가받고 있는 중요한 이유는 바로 ‘진지함’에 있다. 그들은 무겁고 심각한 사회 비판적인 메시지를 앞세워 기존의 헤비메탈이 폭력적이고 그루피를 양산해내는 가벼운 음악이라는 이미지를 깨트리는데 선구자적 역할을 했다. 이는 1980년대 주류 미디어(MTV)와 동반자 관계를 맺고 메인스트림을 장악한 예쁘장한 팝 메탈에 대한 얼터너티브이기도 했다. 때문에 메탈리카는 헤비메탈 키드들은 물론이고, 음악팬들 나아가 평단으로부터도 호평을 받는 흔치 않는 메탈 그룹이다. 메탈리카는 1981년 덴마크 출신의 드러머 라스 울리히(Lars Ulrich)에 의해 미국 LA에서 결성된 밴드. 울리히는 NWOBHM의 간판 밴드인 모터헤드(Mortoehead)의 팬클럽을 운영하면서 보다 강력하고 기운 센 사운드를 분출하는 그룹을 만들기로 마음먹고 제임스 헷필드(James Hetfield, 보컬·기타), 로이드 그랜트(Lloyd Grant, 기타) 등과 함께 메탈리카의 밑그림을 그렸다. 그들은 같은 해 데모 음반 < Hit The Lights >의 녹음직후 로이드가 팀을 떠나자 그 자리에 데이브 머스테인(Dave Mustaine)을 끌어들였고, 추가로 베이시스트 론 매거브니(Ron McGovney)를 영입하여 밴드의 첫 진용을 구축했다. 하지만 이후 여러 데모 테이프의 녹음과 클럽 등지의 공연 등을 통해 멤버들간의 실력차가 확연히 드러나자 메탈리카는 론 매거브니와 데이브 머스테인을 퇴출시키고 클리프 버튼(Cliff Burton)과 커크 해밋(Kirk Hammett)을 차례로 맞아들였다. 그룹에서 쫓겨난 데이브 머스테인이 ‘타도! 메탈리카’를 외치며 메가데스(Megadeth)를 조직한 것은 유명한 일화로 남아있다. 완벽한 라인업을 갖춘 메탈리카는 1983년 데뷔작 < Kill ’Em All >, 1년 뒤인 1984년 소포모어 앨범 < Ride The Lightning >을 발표하며 스래시 메탈의 탄생을 고했다. 이 작품들은 비록 발매 당시 상업적으로는 성공을 거두지 못했지만, 현재 하드코어 펑크와 NWOBHM의 조우라는 측면에서 높은 평가를 받으며 메탈리카의 고전으로 기록되어진다. 앞 선 두 장의 음반이 스래시 메탈의 초석을 다졌다면, 1986년 내놓은 3집 < Master Of Puppets >는 스래시 메탈의 완벽한 정의를 내린 작품이었다. 물샐틈없이 꽉 짜인 연주, 대곡 지향적 스타일의 드라마틱한 곡 구성, 사운드의 거침없는 쿵쿵거림은 스래시 메탈을 넘어서 헤비메탈 역사의 절정이었다. 라디오 전파를 탈 히트 싱글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앨범은 미국 차트 29위, 영국 차트 41위에 랭크되며 단숨에 300만장 이상을 팔아치우는 기염을 토했다. 이때부터 메탈리카는 음악성과 상업성을 두루 획득하며 최고의 인기를 구가했다. 1986년 9월 27일 스웨덴에서 버스사고로 인해 사망한 클리프 버튼을 대신에 정식 멤버로 제이슨 뉴스테드(Jason Newsted)가 가세하여 만든 1988년 4집 < ...And Justice for All >(미국 6위), 팝 감각을 대폭 수용한 1991년 5집 < Metallica >(미국 1위) 등이 연이어 메인스트림에서 히트를 기록했다. 여기에서 ‘One’, ‘Enter sandman’, ‘The unforgiven’, ‘Nothing else matters’등의 인기곡들이 터져 나왔다. 그들은 그러나 몇 년간의 공백기를 거친 뒤 공개한 1996년 6집 < Load >에서 깜짝 놀랄만한 변신을 시도했다. 당시 음악계의 트렌드였던 얼터너티브 록 사운드를 받아들인 것이다. 밴드의 예상치 못한 변화에 대해 한편에서는 메탈리카가 메탈을 버렸다며 혹평을 했고, 또 다른 한편에서는 새로운 사운드와의 조화로 더욱 발전된 메탈리카로 재탄생했다며 호평을 하는 등 의견이 분분했다. 허나 이런 논란에도 불구하고 앨범은 빌보드 차트 정상을 차지하며 다시 한번 밴드의 위력을 뽐냈고, 1년 뒤에 내놓은 < Load >의 클론 7집 < Reload > 역시 차트 1위에 우뚝 올라섰다. 이 같은 그들의 궤도 이탈은 얼터너티브 록에 그치지 않고 1999년 샌프란시스코 심포니와의 협연으로 라이브 앨범 < S&M >을 내놓으며 클래식과의 크로스오버로 계속 이어졌다. 하지만 현재 별다른 기복 없이 꾸준히 나아가던 메탈리카의 음악길에 뿌연 안개가 드리워진 상태다. 지난 1월 베이시스트 제이슨 뉴스테드가 갑작스레 탈퇴 선언을 한 것이다. 표면적으로는 건강상의 이유라고 하지만, 사실 밴드 멤버들간에 심각한 내분이 있었음이 여러 외지 인터뷰를 통해 밝혀졌다. 때문에 원래 스케줄대로라면 내년 초에 선보일 그들의 새 앨범도 예정대로 나올지 확실치 않아 보인다. 앞으로 메탈리카가 얼마만큼 멤버들간에 신뢰성을 회복하느냐가 그들이 영원한 메탈의 지존으로 남아있을 수 있는가 하는 관건이 될 것이다.

줄거리

Track Listing:

[OPENING ACTS]
1) Intro 2) Brian May / Roger Taylor / John Deacon Introduction 3) Metallica Enter Sandman 4) Metallica Sad But True 5) Metallica Nothing Else Matters 6) Freddie Montage (Insert) 7) Extreme Queen Medley 8) Freddie Montage (Insert) 9) Def Leppard & Brian May Now I'm Here 10) Queen I'm Going Slightly Mad video (Insert) 11) Bob Geldof Too Late God 12) Guns n' Roses Paradise City 13) Guns n' Roses Knocking On Heavens Door 14) Elizabeth Taylor Speech

[MAIN QUEEN SET]
1) Joe Elliot, Slash & Queen Tie Your Mother Down 2) Roger Daltrey, Tony Iommi & Queen I Want It All 3) Zucchero & Queen Las Palabras De Amor 4) Gary Cherone, Tony Iommi & Queen Hammer To Fall 5) James Hetfield, Tony Iommi & Queen Stone Cold Crazy 6) Robert Plant & Queen Crazy Little Thing Called Love 7) Brian May Too Much Love Will Kill You 8) Paul Young & Queen Radio Ga Ga 9) Seal & Queen Who Wants To Live Forever 10) Lisa Stansfield & Queen I Want To Break Free 11) David Bowie, Annie Lennox & Queen Under Pressure 12) Ian Hunter, David Bowie, Mick Ronson & Queen All The Young Dudes 13) David Bowie, Mick Ronson & Queen Heroes 14) George Michael & Queen Year Of 39 15) George Michael, Lisa Stansfield & Queen These Are The Days Of Our Lives 16) George Michael, London Gospel Choir & Queen Somebody To Love 17) Elton John, Axl Rose & Queen Bohemian Rhapsody 18) Elton John, Tony Iommi & Queen The Show Must Go On 19) Axl Rose & Queen We Will Rock You 20) Liza Minelli & Ensemble We Are The Champions

[BONUS MATERIAL]
1) Rehearsal Footage 2) Documentary 3) Photo Galleries 4) Fac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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