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를 읽는 생명공감,
젓가락을 알면 우리의 미래가 보인다
“우리가 그렇게 찾아다니던 한국인의 역사와 문화가 지금 내 밥상 위에 가지런히 놓여 있다. 그것도 모르고 우리는 그동안 큰 이야기만 찾아다닌 거다.”
이어령의 마지막 저작 ‘한국인 이야기’, 그리고 그 가운데 첫 번째 유고작 『너 누구니』. 문학비평가이면서 학자, 언론인, 소설가, 시인, 행정가, 문화 기획자 등 다채롭고 화려한 이력의 소유자. 저자의 이름 앞에는 으레 ‘우리 시대의 석학’, ‘대표 지성’, ‘문화계의 거목’ 같은 수사가 따라붙었다. 그러나 저자는 생의 말년에 이르러 그 모든 화려한 직함과 수사를 뒤로하고 그저 ‘이야기꾼’으로 남고자 했다.
그는 우리의 이야기가 우리의 의식과 무의식을 지배하는 비밀들을 천년만년을 이어온 생명줄처럼 담고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역사도 이론도 아니며, 우리의 생명과 더불어 자연스럽게 형성되고 계승되어온 ‘문화유전자(Meme)’다. 이야기 속에 서고(書庫)에 잠들어 있는 지식보다 깊은 인간의 진실과 생명의 본질이 담겨 있음을 알기에, 저자는 스스로 21세기의 패관(稗官)을 자처한다. 저잣거리와 술청과 사랑방과 드나들며 이야기들을 기록해 온 조선시대의 패관처럼, 저자는 온갖 텍스트와 인터넷에 떠도는 집단 지성을 채록하고 재구성하여 이제까지 누구도 들려주지 못했던 ‘한국인 이야기’를 풀어냈다.
로마인 이야기는 로마의 황제와 영웅, 역사적 인물들의 이야기지만, 한국인 이야기는 역사에 등장하지 않는 ‘나’의 이야기, ‘너’의 이야기이며 ‘우리’들의 이야기다. 그의 이야기, 저들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로마인 이야기를 읽었어도, 한국인 이야기를 읽은 한국인은 없다. 아라비아에는 천하루 밤 동안 이어지는 아라비아의 이야기가 있고, 한국에는 밤마다 끝도 없이 이어지던 한국의 이야기가 있다. 꼬부랑 할머니가 꼬부랑 지팡이를 짚고 꼬부랑 고개를 넘다가 꼬부랑 강아지를 만나…. 한국인의 정신에는 세계의 어느 곳에서도 듣기 힘든 꼬부랑 할머니 이야기의 유전자가 있다. 밑도 끝도 없이 꼬불꼬불 이어지던 그 이야기들 속에 한국인의 집단 기억과 문화적 원형이 담겨 있다. 저자가 현재를 살아갈 우리에게, 미래를 살아갈 아이들에게 들려주려는 이야기도 그 꼬부랑 할머니 같은 이야기다. ‘한국인 이야기’ 시리즈 각 권의 구조가 열두 고개로 되어있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최초의 역사를 만든 이는 싸움꾼이 아니라 이야기꾼입니다.
그 이야기 속 가장 큰 상징은 부지깽이를 든 여성입니다.
그것이 우리나라에 오면 꼬부랑 할머니가 되죠.”
『너 어디에서 왔니』에 이은 ‘한국인 이야기’의 두 번째 책, 『너 누구니』의 표지 그림은 젓가락이 지구를 들어올리는 모습이다. 비유지만, 한편으로 매우 사실적이다. 이 책에서 이어령은 작은 젓가락 한 벌로 한국을 집어 들고, 동아시아를 집어 들고, 마침내 세계를 정확히 집어 그 문명의 본질을 풀어 놓는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할까? 젓가락의 지렛대 원리 때문이 아니다. 작은 사물이지만, 그것에는 우리가 계승하고 발전시킨 상징체계의 유산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바로 앞서 말한 문화유전자, 젓가락의 밈(Meme)이다.
‘밈’은 본디 인간의 문화유전자를 지칭하는 학술용어였다. 몸 안의 DNA에 따라 인간이 조금씩 다른 겉모습을 가지듯, 밈의 학습에 의해 사람은 문화적 개성을 지니게 된다. 저자는 말한다. 한국인이 되기 위해 한국인의 생체유전자를 갖고 있을 필요는 없다. 하지만 한국인의 문화유전자를 가지고 있어야 한국인이 된다. 곧 ‘DNA보다 밈’이다.
저자는 젓가락 안에 숨겨진 밈이 얼마나 한국인들의 정신과 맞닿아 있는지를 풍부한 지식과 독창적인 분석으로 풀어내며, 왜 젓가락이 한국인의 과거와 미래와 맞닿아 있는지 증명한다. 한국보다 오히려 일본에서 크나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던 『축소지향의 일본인』에서 선보였듯, 작은 사물로 세상 만물을 풀어내는 데 저자가 탁월한 역량을 지녔음을 우리는 재확인한다. 반대로 말하면, 『너 누구니』는 인류 문화가 하나의 사물에 어떻게 아로새겨져 있는지를 고찰하는 작업이다. 우리에게 친숙하기 이를 데 없는 젓가락이라는 소품을 이용해 쉽고 재미있으면서도 거대한 문명사적 통찰까지 한데 녹여낸 문화-기호학적 탐구라고도 하겠다. 매크로-하드에서 마이크로-소프트로의 전환을 이루는, 적소위대의 정신이 여기 있다.
물론 우리의 문화유전자가 깃들어 있는 소품은 젓가락만이 아니다. 책을 읽으며 독자는 문화를 이야기하는 수단이 꼭 젓가락일 필요는 없다고 느끼게 될 것이다. 하지만 젓가락만큼 ‘우리가 누구인가’를 설명하기에 적절한 도구도 또 없음을 동시에 발견하게 되리라. 저자의 소망대로 21세기 문화강국으로 거듭난 한국. 역시 저자의 소망대로, 인류의 정신사적 전환을 젓가락의 감각으로 이루어낼 한국인의 미래를 이 책을 읽으며 그려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