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그루의 나무에 역사가 담겨 있음을 기억하라!
식민지와 결부된 식물 선교의 역사를 들여다보고
식물과 함께하는 생태적 미래를 그리다
포리 신부는 로마 가톨릭교회의 선교 단체인 프랑스 파리외방선교회에서 일본에 파견된 선교사로, 42년간 동아시아 각지를 누비며 식물을 채집하고 6만 수천 점의 표본을 남긴 불굴의 식물 채집가이다. 가히 채집광(狂)이라 할 만큼 일생을 식물 채집에 몰두한 포리 신부는 우리나라에서 현대 식물학이 태동하기 전 대한제국 시기에 세 차례에 걸쳐 한반도 전역의 식물을 체계적으로 채집한 최초의 인물이다. 제주도에 왕벚나무가 자생한다는 것을 세계 최초로 발견한 또 다른 파리외방선교회 소속 선교사 에밀 타케 신부에게 식물 채집을 가르쳐주고 그에게 제주 감귤 산업의 씨앗이 된 온주 밀감 14그루를 보낸 인물이기도 하다. 일본의 아오모리 지역에서는 아직까지도 근대적 재배 방식을 도입한 아오모리 사과의 은인으로 불리고 있다.
수십 년간 환경운동을 해온 저자 정홍규 신부는 타케 신부의 삶을 재조명하며 생태적 메시지를 전한 『에밀 타케의 선물』에 이어 그의 대선배격인 포리 신부의 이야기를 다루었다. 세계 각지에 퍼져 있는 포리의 표본과 다양한 문헌 자료를 통해 일본 열도, 사할린, 조선, 대만, 하와이 등 드넓은 지역에서 활동한 그의 여정을 한 권의 책으로 직조해냈다. 10년 가까이 포리와 타케의 삶을 추적하며 더욱 넓은 관점을 지니게 된 저자는, 동아시아 각지로 진출한 식물 선교사들의 동력과 활동 배경을 밝히고 백여 년 전 포리가 이 땅에서 펼친 활동이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며 우리는 어떤 미래로 나아가야 하는지를 총체적으로 전한다.
모든 것을 수집하라! 식민지 확장과 식물 선교사 군단
식민지 확장의 역사는 식물 자원을 포함한 자원과 지식의 수탈사이기도 하다. 예루살렘 탈환을 목적으로 시작되어 수백 년 동안 무수히 많은 함의를 품게 된 십자군 전쟁처럼, 파리외방선교회의 ‘식물 선교사 군단’ 또한 그들 스스로는 인식하지 못했을지라도 팽창의 시대에 저마다가 품은 욕망을 대신 수행하며 동아시아로 동진했다. 선교사들의 식물 채집 활동은 프랑스 식민지 확장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었다. 당시 이런 말이 돌았다고 한다. “제일 먼저 지질학자를 보내고 그다음은 선교사를 보내고 마지막으로 군대를 풀어라!” 전 세계로 파견된 파리외방선교회의 선교사들은 제국 시대 지성사 확장의 기반이 된 자연계의 정보를 모으고 세계로 퍼뜨리는 역할을 했다. 이러한 활동의 배경에는 식민지를 넓히려는 프랑스, 교세를 키우려는 종교계, 미지의 땅에 잠들어 있는 지식을 건져내려는 과학계와 원예 무역과 종자 시장을 선점하려는 기업 등의 이해관계가 얽혀 있었다. 실제로 교황청은 채집 방법을 구체적으로 명시한 회람을 보내어 채집을 독려하기도 했다. 선교사들의 식물 채집은 이처럼 다양한 이해관계가 이룬 꼭짓점에서 탄생한 셈이다. 결국 식물 선교사들은 식물 자원의 발견자이자 동시에 수탈자이기도 했다.
포리 신부도 프랑스 출신 일본 선교사로서 두 나라의 보호 아래 한반도를 자유로이 누비며 식물을 채집했다. 포리는 자신의 선교지인 일본을 아끼고 식물 채집을 하면서도 끝까지 일본 교인들을 위한 선교 활동을 저버리지 않았지만, 급박하게 돌아가는 한반도 정세에는 개의치 않고 그저 자신의 소명을 이루는 데 집중했다. 이는 정교분리의 원칙을 견지하며 식민지화와 침탈을 당연하게 여겼던 조선의 뮈텔 주교와 일본의 베를리오즈 주교가 가진 한계이기도 하다. 저자는 같은 사제로서 포리 신부에게 애정 어린 눈길을 보내면서도 역사의 흐름 속에서 한계와 단점 또한 지녔던 ‘인간’ 포리를 충실히 그려냈다. 이와 동시에 저자는 자신이 몸담고 있는 천주교의 빛과 그림자 또한 숨기지 않고 성찰하고 있다.
이제는 식물에게서 배워야 할 때
무엇보다 저자는 말없이 사라져가는 식물들의 이야기에 기꺼이 귀를 기울인다. 인간은 생태계를 구성하는 하나의 종(種)이라는 것을 잊고 주인처럼 행세하여 전 지구에 위기를 불러왔다. 그 어느 때보다도 지속 가능한 삶의 양식이 절실한 지금 우리가 돌아봐야 할 것은 우리가 발 딛고 살아가는 행성 지구를 유지하는 식물과 생태계이다. 묵묵히 생태계를 지탱하고 있는 식물을 보전하는 것은 지구의 건강한 미래를 담보하는 생물다양성을 지키고 ‘기후 정의’를 실천하는 길이다. 이러한 점에서 식물 표본은 생물의 다양성과 변이성을 보여주고, 과거에 어떤 식물이 어느 곳에 존재했고 세월에 따라 어떻게 변화했는지 또 어떻게 변화해나갈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그러나 100여 년 전 포리와 타케가 한반도에서 채집하여 제작한 식물 표본은 전 세계에 흩어져 있으며 이를 되찾기 위한 노력도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한반도 자생 식물의 운명 또한 아직까지도 일본과 유럽 등 외부의 손에 맡겨져 우리는 로열티를 지불하고 청양고추를 재배하며 앉은뱅이밀과 미스김라일락, 구상나무 등을 역수입하고 있다. 포리 역시 식물 주권 측면에서 큰 아쉬움을 남기는 인물이지만, 그는 우리 식물이 전 세계로 흩어진 경로를 확인할 수 있는 단서를 가진 실제적 인물이다. 한 포기의 풀, 한 그루의 나무에 역사가 깃들어 있다는 것을 기억하며 식물 주권을 바로잡는 것이 우리의 주권 또한 바로 세우는 길이다. 그리고 이것은 식물의 자리를 되찾아주고 전 지구와 어우러져 살아가는 식물적 삶을 배우는 첫걸음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