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의 문제의식
과거제도는 언제 또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이것이 이 책의 주제다. 많은 연구자들이 일찍부터 관심을 가져왔던 이 문제는 학계에서 어느 정도 합의가 이루어져 있다. 수대(隨代) 혹은 늦어도 당초(唐初)에 자발적인 일반민 응시자를 정기적으로 시험해서 관인을 뽑는 새로운 제도가 생겼으며, 분열의 시대를 마감한 통일제국이 이러한 변화를 주도했다는 것에 대해 이견은 별로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저자는 이와 같은 통설이 후대의 기록에 지나치게 의지하거나 혹은 과거의 한 측면, 특히 선발 주체인 국가권력의 관점에 편향된 결론은 아닌지 의구심을 가진다. 그리고 과거를 개방적이고 객관적인 시험제도로 특징짓고 여기에서 ‘근대적’ 선진성을 찾아 왔던 ‘현재’ 위주의 관점이 지닌 위험성을 우려한다.
그리하여 저자는 과거가 만들어지던 당시의 다양한 전개 가능성에 유념한다. 훗날 과거라 불리게 될 고정된 형태로의 귀결을 전제하지 않고, 이 제도의 확립 뒤 쓰인 기록들에 혼입되었을지 모르는 고정관념까지 경계한다. 이 책이 비교적 단순한 주제임에도 불구하고 매우 번잡한 논의와 고증이 불가피하였고, 제도의 ‘형성’이란 다소 생경한 제목을 갖게 된 까닭이 여기에 있다.
이 책의 목표와 범위
초기 과거제도의 역사상과 당대 지식인의 존재형태를 치밀한 논리로써 체계화해보려는 이 책의 목표와 범위는 이렇게 구성된다. 첫째, 사료와 밀착된 연구이다. 당전기(唐前期) 과거에 관한 기존 연구들은 대부분 후대에 정리된 문헌에 의지하여 왔다. 그러나 상당한 시차를 가진 이러한 기록들은 당시의 사실을 직접 전하는 자료들과 대조하여 점검해야만 한다. 이를 위해 요긴한 사료가 근래에 주목되기 시작한 묘지(墓地) 등의 석각자료(石刻資料)들이다.
이 책의 논술은 이러한 일차성 자료를 근거로 하여 이루어진다. 묘주(墓主)의 표장(表揚)을 목적으로 쓰인 묘지명의 사료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이를 통해서만 알 수 있는 새로운 사실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기존의 문헌들도 이와 비교될 때 그 진위를 분명히 드러내기도 한다. 이렇게 이 책은 사료들에 대한 치밀하고 비판적인 검토를 바탕에 두고 전개된다.
둘째, 과거제도의 동태적 분석이다. 종래의 많은 연구들처럼 송대 이후의 제도를 기준으로 당대의 과거를 보면, 개방성이나 공정성의 보장이 미흡하다는 한계의 지적으로 결론을 맺기 쉽다. 그러나 당대 과거제도의 진정한 역사적 의미는 여기에 있지 않다. 다양한 사회세력들 사이의 역학 관계 속에서 숱한 우여곡절을 거치며 새로운 제도를 정착시켜 나가는 동적인 과정이 중요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 책은 과거제도를 둘러싼 두 주체, 곧 황제를 정점에 둔 국가권력이라는 선발자와 위진남북조 이래 축적된 사회문화적 배경을 지닌 사인(士人) 응시자의 관계에 주목한다. 서로 공조하고 또 길항하는 양자의 상호작용에 대한 이해 없이는 당대 과거제도의 진면목을 밝힐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분석 시각과 방법은 일반적인 제도사 연구가 흔히 보이는 경직성을 피할 방안이기도 하다.
셋째, 과거제도에 대한 새로운 이해이다. 과거가 객관적인 시험으로써 기득권층을 배제하고 군주권에 의탁한 관료들을 배출하는 제도였던 것은 일면 사실이다. 그러나 과거제도는 이와 다른 성격도 갖는다. 저자가 특별히 중시하는 응시자의 관점에서 볼 때, 사인의 집단화와 그 독자적인 정체성 확보 역시 과거와 무관하지 않기 때문이다.
즉, 문학적 소양을 중시한 시험 내용이나 복잡한 시험 절차로 인해 생긴 응시자들 사이의 사적인 유대와 동류의식 또한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갖는다. 이러한 과거제도의 성격은 자신들의 역사 속에서 ‘근대성’의 선취를 확인하려던 중국의 연구자나 독자적인 시대 구분론에 의거하여 ‘귀족’과 ‘사대부’를 일도양단한 일본의 연구들이 간과해왔다. 따라서 외국 학계와 상이한 관점에서 출발한 이 책은 이렇게 독창성을 확보해나간다.
넷째, 사(士), 곧 동아시아 특유의 지식인에 대한 이해의 심화이다. 기존의 많은 연구들은 과거제도를 기반으로 한 관료와 그 응시자들을 ‘사대부’로 개념화하고, 국가권력이나 군주에 대한 종속성으로써 이들을 특징짓는다. 그러나 통일제국이 원래 의도하였던 관인 선발 방식이 후대로 이어지는 과거제도로 바뀌어가는 과정에 주목한 이 책은 이와 다른 결론을 예상한다.
남북조 시기 이래의 문화적 전통을 잇는 사인이 이 변화에서 능동적 역할을 담당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과거를 통해 등장한 새로운 사인들이 수행한 ‘공공적 지식인(public intellectual)’으로서의 주체적 활동도 설명할 수 있게도 한다. 사실 이러한 사인의 존재형태는 당대의 과거에서 유래한 ‘선배(先輩)’라는 말에서 그 어원을 찾기도 하는, 조선시대의 ‘선비’에서 잘 드러난다. 그러므로 이 책은 단지 중국 당대의 역사상만이 아니라 과거제도를 시행하였던 동아시아 지역의 전통적 지식인상의 일면을 해명하는 데도 기여할 것이다.
과거제도의 원형
제1부 ‘과거제도의 원형’은 통일제국의 초창기인 수 문제~당 태종 치세에 시행된 관인선발제도의 특징을 밝혔다. 아직 미래가 불확실했던 왕조의 관직은 인기가 없었고, 이 시기의 황제들은 관인으로서의 자격을 갖춘 사람들을 적극적으로 포섭·양성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당시 관인 선발 과정을 일컫는 ‘빈공(賓貢)’이란 말에서 잘 드러나는 것처럼, 그 대상자에 대한 높은 예우가 좋은 예이다.
여러 가지 명목으로 빈번히 내려진 구현(求賢) 조칙, 관학(官學)의 중시와 그 진흥책 등도 동일한 맥락에서 이해된다. 그러나 후대의 상거(常擧, 정기적으로 특정한 기준 아래 실시된 시험, 이 책에서 고찰하는 과거제도는 기본적으로 이 ‘상거’를 말한다) 과목처럼 정례화된 시험을 통해 관인을 선발했다는 확실한 증거는 이 시기에 발견되지 않는다.
태종 연간 “진사(進士)”라는 명칭의 급제자들이 나타나지만, 이들이 받은 관직은 훗날의 진사과 합격자에 비하여 훨씬 높을 뿐더러 그 품계의 편차 또한 단일한 관인 선발 과목이기에는 너무 크다. 그렇다면 전통적인 찰거(察擧, 한대(漢代)부터 추천을 받아 관인을 선발해오던 제도)나 임시 조칙으로 선발된 관인까지 여기에 포함되고, 이것은 상거로서의 진사과와 다른 ‘광의의 진사’로 판단된다.
다만 분열의 시대에 거의 쓰이지 않던 이 단어의 재등장은 기존 제도와의 차이를 시사한다. 또 ‘진(進)’과 사민(四民)의 하나인 ‘사(士)’가 결합된 그 형태를 보면, 이것이 무관(無官)의 평민을 주된 대상으로 삼는다는 점도 주목된다. 그러므로 기존의 연구들 같이 이때 벌써 과거제도가 만들어졌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더라도, 그 ‘원형’이 생겨났던 사실은 분명하다.
상거의 독자적 발전
제2부 ‘상거의 독자적 발전’은 과거가 새로운 관인선발제도로 정착해가는 고종~예종 치세의 상황을 검토하였다. 고종 초에 ‘광의의 진사’가 제거(制擧, 황제가 특별한 인재 발탁을 위해 시행한 시험)와 상거로 분화되고, 정기적으로 실시된 상거는 고종 말 다양한 평가 방식도 채용해서 과거의 특징을 구비해갔다.
이때 첩경(帖經)과 잡문(雜文) 시험이 각각 추가된 명경과(明經科)와 진사과(進士科)가 그 대표적인 예인데, 이 두 과목은 계속된 궁중 정변의 와중에서도 중요한 입사(入仕) 방법으로 자리를 잡았다. 무측천 집권기에 진사과와 명경과의 자발적 응거·시험의 강화, 급제자의 승진 기회 증대 양상이 뚜렷해지는 것이다. 그리고 중종과 예종은 당초의 정책을 계승해 관학을 중시함으로써 관학 교육과 직결된 명경과의 위상을 높임과 동시에 관인 선발의 중앙집권성도 증대시켰다.
그런데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이 있다. 당시 진사과와 명경과 급제자의 계량적 분석에서 드러나는 두 과목의 상이한 모습이 그것이다. 진사과 합격자의 초관은 명경과보다 낮지만, 승급·종관의 경우 이와 반대이기 때문이다. 상거의 독립 뒤 일관되게 나타나는 이러한 현상은 두 과거 과목을 일률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움을 뜻하며, 이 제도의 형성 과정에 대한 세심한 주의를 요구한다. 고종 때와 무측천~예종 시기 사이에도 흥미로운 차이가 존재한다면 더욱 그러하다. 진사과 급제자들은 명문 성씨가 줄어들고 신흥 성씨가 늘어나는 추세이나, 명경과의 경우 이와 거꾸로인 것이다. 응거 방법에서도 진사과와 명경과는 각기 향공(鄕貢)과 생도(生徒)의 관계가 한층 긴밀해지는 상반된 경향이 발견된다.
이처럼 상거의 정착 실상에서 확인되는 두 과목의 차이는 곧 과거를 둘러싼 제도와 현실의 괴리를 의미한다고 해도 좋다. 당조가 명경과·생도를 중시하여 그 제도적 지위를 높였음에도 불구하고, 실제 현실 속에서 진사과·향공의 중요성이 커져가는 듯하기 때문이다. 진사과 급제자들 가운데 신흥 세력이 비교적 많았던 것은 이 과목의 낮은 위상 덕분에 접근하기 용이했던 결과일 수 있다. 그런데 이들이 중종 연간부터 『진사등과기(進士登科記)』를 스스로 편찬하는 등 동류의식에 입각한 집단행동을 보인다. 이는 상대적으로 열등한 지위에 있던 진사과 응시자·급제자의 자구책이었겠지만, 현실적으로 이들의 사회적 영향력 확대에 기여했다고 생각된다.
과거제도의 확립
제3부 ‘과거제도의 확립’은 청말까지 이어진 예부(禮部) 주관 시험이 출현한 현종 시기의 과거제도를 고찰한다. 특히 제도와 상이한 현실을 낳은 진사과 응시자·급제자의 움직임에 주목하였다. 『당육전(唐六典)』을 보면, 상거가 현종 연간 관인선발제도의 중심을 차지하고, 또 이것이 교육·전선(銓選)제도와 긴밀하게 결합해서 매우 체계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때 ‘선관(選官)’과 ‘거사(擧士)’를 이부(吏部)와 예부의 업무로 구분시킨 예부시(禮部試)도 생겨남으로써 찰거와의 차이도 더 확연해졌다. 따라서 이 시기에 새로운 관인선발제도가 확립되었다는 데 이론의 여지는 없다.
그런데 예부시의 등장은 양면성을 갖는다. ‘선관’과 분리된 상거를 통한 입사 절차가 복잡해지면서 국가권력의 통제력이 커졌지만, ‘거사’의 최종 단계가 된 성시(省試, 중앙에서의 최종 시험)의 권위와 그 응시자·급제자의 위상 역시 높아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조정의 정책과 어긋나는 사인들의 주체적 움직임도 예전보다 활발해질 수 있었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는 진사과 응시자들을 관학으로 흡수할 목적으로 만든 광문관(廣文館)의 역할 부전(不全)이나 향공의 폐지 시도와 그 좌절 등에서 잘 드러난다. 당시 진사과와 명경과 급제자들의 계량적 분석도 이를 확인해준다. 명경과의 초관이 진사과보다 높고 향공 대비 생도 비율도 증가하여 당조의 의도에 부합한다. 그러나 사인들은 여전히 진사과와 향공을 중시했을 뿐더러, 이런 양상이 예부시 시행 이후 더욱 두드러져 가는 것이다.
이와 같은 현상은 과거 응시자의 입장에서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제도의 정착과 더불어 이들의 긍지가 커졌음에도 불구하고, 급제 후 까다로운 과정까지 거쳐 실제로 받은 관직은 기대에 못 미쳤기 때문이다. 이러한 모순적 상황은 명경과보다 경쟁이 치열했던 진사과, 전통적인 찰거와 유사하여 자존감이 높았던 향공의 경우 더욱 심각하였다. 그러므로 이들은 과거 합격이나 좋은 관직을 위해 남달리 분투해야만 했으며, 이를 명증하는 것이 바로 문학작품을 이용한 사적인 교제와 청탁의 만연이다.
진사과 응시자·급제자의 이처럼 적극적인 행태는 그들 특유의 동류의식을 촉진시켰는데, 왕영연(王?然, 692~724, 개원5년 진사과 급제)의 행권(行卷, 유력자에게 자작 시문을 바쳐서 그들의 호평을 기대하는 행위)이나 고문운동(古文運動)의 선구자로 유명한 소영사(蕭穎士, 717~768, 개원23년 진사과 급제) 중심의 사인집단 등이 좋은 실례이다. 이렇게 집단화되어간 이들의 사회적 영향력은 점차 증대될 수 있었거니와 문학의 이념적 가치를 강조한 소영사 집단의 논리나 당시 관계(官界)에서 그 비중이 커지고 있던 벽소/벽서(?召, ?署)도 이러한 분위기에 일조했다. 상거 가운데 진사과의 현실적 위상이 점점 높아져서 마침내 이 과목을 과거제도와 동일시하게 만든 변화 또한 이러한 역사적 배경의 소산이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