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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의 역사 1~5권 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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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의 역사 1~5권 세트

[ 전5권 ]
박종인 | 상상출판 | 2021년 11월 22일 리뷰 총점9.7 정보 더 보기/감추기
내용
4.9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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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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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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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간일 2021년 11월 22일
쪽수, 무게, 크기 1,536쪽 | 152*205*80m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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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목차

저자 소개 (1명)

1960년대에 태어나 1980년대에 대학교를 다닌 소위 386세대 신문 기자, 여행문화전문 기자, 사진가. 서울대학교에서 사회학, 뉴질랜드 UNITEC School of Design에서 현대사진학을 전공했다. 1992년부터 조선일보 기자로 활동하며 주로 여행을 담당했다. 2015년부터 ‘직시(直視)하는 사실의 역사만이 미래를 만들 수 있다’는 신념으로 ‘박종인의 땅의 역사’라는 제목인 역사 기행 기사를 연재하고 ... 1960년대에 태어나 1980년대에 대학교를 다닌 소위 386세대 신문 기자, 여행문화전문 기자, 사진가. 서울대학교에서 사회학, 뉴질랜드 UNITEC School of Design에서 현대사진학을 전공했다. 1992년부터 조선일보 기자로 활동하며 주로 여행을 담당했다. 2015년부터 ‘직시(直視)하는 사실의 역사만이 미래를 만들 수 있다’는 신념으로 ‘박종인의 땅의 역사’라는 제목인 역사 기행 기사를 연재하고 있다. 같은 제목으로 TV조선에 역사 기행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기록되지 않은 역사, 잘못 기록된 역사를 땅에 남은 흔적을 통해 확인하는 TV 시리즈이다. 잊히고 은폐된 역사를 발굴해 바로잡아 온 공로를 인정받아 2020년 ‘서재필 언론문화상’을 받았다. 지은 책으로 역사 기행 『여행의 품격』과 글쓰기 가이드 『기자의 글쓰기』, 인물 기행 『한국의 고집쟁이들』, 『행복한 고집쟁이들』, 『골목길 근대사』(공저), 여행 에세이 『내가 만난 노자』, 인도 기행서 『나마스떼』, 『우리는 천사의 눈물을 보았다』(공저)와 한국 여행 가이드북 『다섯 가지 지독한 여행 이야기』가 있다. 옮긴 책으로는 미국인에 의해 뉴욕으로 끌려온 에스키모 소년 이야기 『뉴욕 에스키모, 미닉의 일생』과 인도 서사시 『마하바라타』가 있다. 2008년 재중 탈북자 문제를 다룬 ‘천국의 국경을 넘다’로 삼성언론상을 받았다. 여행을 하고 기타를 치고 사진을 찍고 글쓰기를 가르친다.

단체전 「Labyrinth」(뉴질랜드 오클랜드), 개인전 「不二 Be In One」(가나포럼스페이스), 「구도자의 풍경 Seeker's Landscape」(인사아트센터) 등 국내외에서 사진전을 갖기도 했다. 서울대학교에서 사회학, 뉴질랜드 UNITEC School of Design에서 현대사진학, 사회에서 人生을 전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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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우수작 역사책 청소년필독서:박종인의 땅의역사5
내용 평점5점   편집/디자인 평점5점 | YES마니아 : 로얄 피* | 2022-01-11

 

꺄!!!!! 드디어 박종인 기자님의 『땅의 역사 5권』이 출간됐다. 뭐 정확히는 작년 11월에 출간되었으나, 당시에는 극강의 입덧지옥으로 책을 손에 쥘 수조차 없었던 시기였으므로T_T. 아주 임신 중기에 들어선 지금에서야 이 책을 읽었다. 이렇게 내 책장, 박종인 기자님 전용칸(ㅋㅋㅋ)에 책 한권이 또 늘어났고!


 

 

얼마 안있으면 휴직시작이라, 집에서 할것도 없으니 독서로 태교를 해볼까 하는데, 그 시작으로 땅의 역사(독서!!) 정주행을 해볼까 한다. 나는 내 뱃속에 있는 호떡이가 그저 학교에서 가르쳐준대로, TV매체에서 보여주는대로,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학교에서 가르쳐주는 사실들을 정말 그대로 믿어도 되는건지, 그 이면에는 또 다른 사실이 있는건 아닌지, 혹은 누군가의 헛된 신념으로 인해 미화된 내용을 배우는 것은 아닌지 의심하고, 비판할 줄 알며, 스스로 사실을 깨우칠 수 있는 아이가 되길 바란다. 뭐... 내 욕심일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수많은 책들에 둘러쌓인 우리집에서 자란다면, 어쩌면 가능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하ㅏㅏㅏ...

 

아첨을 위해 만든 선정비를

강물에 집어던져야 합니다

땅의역사5, 54p

 

시대를 막론하고 세상이 문명계로 진입하면 사회를 다스리는 규율이 생기고 규율을 집행하는 국가조직이 운영된다. 집행하는 자는 공무원이다. 사회기강을 바로잡고 국가가 필요한 세금을 거두려면 그 공무원의 기강이 서 있고 부패하지 않아야 한다. 그래서 문명국가라면 응당 공무원계를 감찰하는 제도 또한 운영했고 운영한다. 예컨데 이런, ‘매년 말 관찰사는 수령칠사의 실적을 왕에게 보고한다. 칠사는 논밭과 뽕밭을 성하게 하고, 인구를 늘리고, 학교를 일으키고, 군정을 바르게 하고, 부역을 고르게 하고, 송사를 간명하게 하고, 간사하고 교활한 풍속을 그치게 하는 것이다.(『대전통편』, 「이전」)’ p 056

 

 

모름지기 한 나라를 운영하는 정부 집단은 청렴해야한다. 정부가 청렴해야만 국민이 마음을 놓고 세금을 납부할 것이다. 내 세금이 헛된 곳이 쓰이지 않는 믿음이 있을테니 말이다.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청렴해야할 정부는 생각보다 많이 부패했다. 분명 해당 집단을 감찰하는 제도가 있음에도, 예나지금이나 유명무실한 것도 하등 바뀌지 않았다.

 

 

 

 

 

 

 

국내여행을 좋아하기에, 난 지금까지 꽤 많은 도시를 가보았다. 그리고 백이면 백, 해당 도시에는 꼭 역대 수령들의 ‘선정비’가 즐비해있었다. 산성입구, 읍성입구, 관아입구, 동사무소 입구 등등등. 장소야 달랐지만, 대부분의 지자체들은 자기 도시에서 나뒹구는 선정비들을 한 곳아 모아 정비해두곤 했다. 

 

 

본디 선정비라는 것은 그 고을에 살던 백성들이, 고을을 다스리던 수령에게 감사한 마음으로 세워주는 것이다. 수령에게 감사한 마음이 생기는 이유는 단 하나, 그 고을의 백성들을 잘 살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한마디로 청렴하거나,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이 투철한 그런 수령들을 위해 백성들이 손수 세워주는 것이다. 그런 선정비를 내가 돌아다니면서 본 것만 수백개인데, 그렇다면 조선엔 그렇게 좋은 수령들이 많았다는 이야기인가? 분명 역사속에서 배운 조선백성들의 삶은 세금에 허덕이다 죽거나, 혹은 스스로 도적이 되거나, 민란을 일으키거나 그랬을텐데.

 

 

물론 아산 현감으로 부임했던 토정 이지함처럼 고을민들을 위해 애썼던, 좋은 수령들도 분명 있긴 했다.

 

안그런 선정비도 물론 많지만, 선정비는 학정의 상징이다. 2007년 충북대 교수 임용한이 경기도 안성과 죽산의 역대 수령 305명  가운데 현존하는 선정비 주인공 75명을  분석해보니 8%만이 ‘수령칠사’에 의해 우수 수령 자격이 있는 사람들이었다.(임용한, 「조선 후기 수령 선정비의 분석)」 역대 조선 정부에서도 이를 모를 리 없었다. p 057

 

 

민란의 시대, 19세기가 왔다. 조선왕국의 기저질환인 삼정문란이 극에 달하던 시대였다. 선정비는 1863년 고종 즉위와 함께 급증했다. (…생략…) 대표적인 증거가 1893년 고부군수 조병갑이 세운 아비 조규순 영세불망비다. 멀쩡하게 있던 비석을 없애고 값비썬 오석으로 새 비석을 만든 뒤 비각 건립 명목으로 군민에게 1000냥을 뜯어낸 비석이다. 이는 이듬해 동학농민전쟁의 불씨가 됐다. p 058

 

 

하지만 조선시대에 세워진 선정비군의 실상은 대체로 부정부패의 온상이다. 대부분의 선정비는 수령들이 고을민들에게 강제로 만들게한 것에 불과했다. 그렇게 강제 건립 선정비중 제일 유명한게 바로 고부군수 조병갑이 세우게 한 지 아비 조규순의 영세불망비. 동학농민운동의 기폭제가 된, 바로 그것이었다.

 

 

권력과 왕비는

영원히 서인이 갖도록 하자

땅의역사5, 82p

 

‘세상에 전해 오기를 반정(인조반정) 초에 공신들이 모여 맹세할 때 두 가지 비밀스러운 약속을 했는데, 그것은 ‘왕실 혼인을 놓치지말자(물실국혼)’와 ‘재야 학자를 추천하여 장려하자(숭용산림)’는 것이다. 이는 자신들의 형세를 굳게하여 명예와 실익을 거두려는 것이었다.(『당의통략』) p 083

 

 

숭용산림과 마찬가지로, 물실국혼은 단순한 의지 차원을 넘어 현실화된 계획이었다. 추존왕(사후에 왕으로 규정된 왕족)을 포함해 인조부터 고종까지 조선 왕비는 계비를 포함해 모두 20명이었다. 이 가운데 숙종의 계비 경주 김씨 인원왕후, 경종비 청송 심씨 단의왕후, 추존왕인 진종비 풍양 조씨를 제외한 17명이 노론 가문 출신이었다. (…생략…) 노론은 숙종과 영, 정조, 순조 이후 세도정치를 거치며 크고 작은 부침속에서도 왕비만은 절대로 빼앗기지 않았다. 1623년 맺은 권력 수호의 맹세와 이후 목숨을 건 조직적 권력욕이 만들어낸 기형적인 초장기 독재의 근간이다. p 070

 

너도 알고 나도 아는 다 아는 사실 하나. 후기 조선은 서인이 권력을 쥐고 놓지 않았고, 서인들 사이에서도 권력을 쥐기 위해 서로 분열하다가, 최종 승자는 서인 중에서도 노론. 만약 그들이 정치를 잘했다면, 이렇게까지 욕먹을이 없겠으나, 그들은 오로지 사리사욕을 위해, 그놈의 소중화 조선을 위해서 살며 부패하였고, 그 결과 조선은 망국행 기차에 탑승했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권력을 잡은 서인은 과거로 임용되는 공무원 조직과 상관없는 ‘산림직’을 신설했다. 재야의 ‘명망 있는 학자들’추천으로 뽑는 자리이니, 이 자리는 자기들이 산림이라 인정한 자들만 갈 수 있는 자리였다. 그해 5월 성균관에 종4품 사업이라는 관직이 신설됐다. 1646년에는 세자 교육직에 당상관인 찬선과 종5품 익선, 종7품 자의가 설치됐다. 그리고 1658년 효종 때 마침네 ‘좨주’라는 정3품 관직이 성균관에 신설됐다. 좨주는 산림을 위한 최고 영예직이었다. 산림에서는 성균관 최고직인 대사성보다 좨주를 높게 쳐줬다. p 087

 

 

첫 번째로 좨주에 임명된 사람은 송준길이었다. 두 번째 좨주는 송준길의 동학이자 거물 중의 거물 송시열이었다. 역대 좨주 24명 가운데 정조 때 좨주 송덕상과 송환기, 순조 때 송치규는 모두 송시열의 후손이었다. 현종 때 송계간과 철종 때 송래회는 송준길의 후손이었다. 고종 17년인 1880년 8월 28일 임명된 마지막 좨주 송병선은 송시열의 9세손이었다. 마음만 먹으면 ‘멀리서 조정의 권세를 좌지우지하는’ 보스와 정계 파벌의 연결수단이었따. 이렇듯 서인과 노론의 권력장악은 끈질기고 강력했다. p 088

 

서인이 부르짖던 소중화 조선의 시작은 병자호란 이후였다. 송시열을 비롯한 서인들은 고작 오랑캐 나라인 ‘청’에 굴복한 것에 대해 용납할 수 없었다. ‘청’에다가는 찍소리도 못하면서, 뒤로는 조선은 명에 사대를 했으으니 명이 망했어도 조선이 섬기는 나라는 ‘명’이라고 외치며, 그렇게 사라져버린 ‘명’에 대한 충성심을 아로 새겼다. 

 

 

송시열 사후 그 제자들은 스승인 송시열의 유언에 따라 충북 괴산에 명나라에 제사를 지낼 ‘만동묘’를 설치했고, 조선왕 숙종은 창덕궁 깊숙한 곳에 명나라에 대한 제사를 지낼 ‘대보단’을 설치했다.

 

 

여기에 더해, 조선의 (서인)선비들이라는 것들은 죽은 뒤 자기 비문의 시작을 ‘유명조선국’으로 시작하게 했다. 한마디로 ‘명나라의 신하 조선국’이라는 뜻이다. 그런 이들이 조선 후기 권력을 틀어쥐고, 놓지않았다. 백성을 위한 정치를 하는게 아니라, 본인들을 위한 정치를 했다.

 

 

 

 

 

송시열에게 주자는 시작이었다. 주자는 금에 멸망하던 송을 살리는 인물이었고 그 자신은 청에 핍박받는 조선을 살릴 학자였다. 명나라가 멸망하자 송시열은 조선을 명의 계승자라 자처했다. 그는 소중화 조선의 주자였다. p 094

 

 

윤증의 아버지 윤선거에게는 친구가 많았다. 송시열도 있었고 어린 윤휴도 있었다. 송시열은 송나라 유학자 주희(주자) 마니아였다. 윤휴는 공맹 사상을 주자와 다르게 해석했다. 송시열은 그런 윤휴를 사이비로 낙인찍었다. 윤선서가 윤휴를 두둔했다. 윤선거도 사이비라 낙인찍혔다. p 114

 

 

서인들의 정신적 지주이자 영수였던 송시열. 그는 성리학, 그 중에서도 주자의 성리학을 신봉하던 사람이었다. 유학의 나라로 시작한 조선이었지만, 이 때 유학은, 공자와 맹자가 가르치던 유학이 아니라, 오로지 주자가 해석한 유학, 즉 주자의 성리학, 주자학만이 학문으로써 기능했다. 주자학이 아닌, 다른 이가 해석한 유학을 공부한이들은 사문난적으로 매도되었다. 요즘말로 하면 ‘왕따’, ‘고립’ 되었다. 그렇게 유학의 나라 조선에선, 공자와 맹자의 유학이 아닌, 주자학이 점령했다. 한반도내에 뿌리깊게 잠식된 비뚤어진 유교사상의 시작이다.

 

 

 

의정부 산에는 공주님이 잠들어있다

땅의역사5, 138p

 

작년 6월, 의정부 천보산에 위치한 ‘족두리묘’라 불리는 곳을 발품팔아서, 겨우 찾았다. 족두리묘의 주인, 그녀는 바로 효종의 양녀 의순공주 다.

 

 

 

 

정묘/병자호란이 있은 뒤, 청은 조선에 많은 것을 요구했다. 그중엔 공녀도 있었다. 인조 사후 효종이 즉위를 하였는데, 청에서 이번에도 공녀를 요청했다. 정확히는 청나라 섭정왕 도르곤의 측실를 맞이하고 싶으니, 조선 왕실의 딸을 보내라는 것이었다. 당시 효종은 딸부자였다. 효종을 비롯한 종친들에게도 딸들이 있었다. 하지만 효종을 비롯하여, 날고기는 종친들은 자신들의 딸을 숨겼다.

 

(금림군의 딸)의순공주로 간택이 결정되고 사흘 뒤 효종이  관료들에게 이리 물었다. “근래에 사대부집에서 서로 다퉈 혼사를 치른다는데 사실인가?” 사정을 모르는 양반들이 간택을 면하려고 결혼행진곡을 벌인다는 소문이었다. 효종은 열 살 된 세자와 열한 살과 아홉 살 먹은 공주 혼인을 걱정하며 8~12세 사대부 자녀 혼인 금지령을 내렸다.(『효종실록』) ‘두 살배기 공주 하나뿐’이라는 말은 삼척동자도 아는 가짜라는 자백이었다. p143

 

효종이 딸을 숨기고, 종친들이 딸을 숨긴다고 한들, 청에서 조선왕실의 딸을 보내라는 압박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그때, 효종을 위한 구원투수가 나타났으니, 바로 효종의 10촌인 금림군 이개윤이다. 10촌이면 거의 남이나 다를바 없으나, 금림군 역시 조선 이씨 종친이었다. 금림군은 자신의 딸 이애숙을 바쳤고, 효종은 이애숙을 자신의 양녀로 삼아 ‘의순공주’에 봉하고 청나라로 보냈다. 양녀라고는 하나 옹주가 아닌, 공주로 책봉하였으니, 어엿한 조선왕과 조선왕비의 딸과 같았다.

 

 

금림군이라고 하여 자신의 딸을 청나라에 보내고 싶었을까? 남들이야 이개윤이 눈에 멀어 딸을 바쳤다고는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남이야기를 쉽게 하는 사람들의 반응일 뿐이다. 뭐, 딸을 바친 이개윤의 진심은 본인만 알겠지만. 여하튼 청나라에 딸을 보낸 이후 오랜시간이 흐른뒤, 이개윤은 자신의 딸을 다시 고국으로 데리고 왔다.

 

 

숱한 여자들이 청으로 끌려갔다가 매우 적은 숫자로 돌아왔다. 환향녀라 부른다. 이들에 대한 반응은 차가웠다. p 144

 

 

청나라에 끌려간 여자들은 의순공주 뿐만이 아니다. 일반 여염집 아녀자부터 사대부가의 아녀자까지, 조선의 여자란 여자들은 대거 청나라로 끌려갔다. 이후 그녀들이 목숨걸고 힘들게 도망쳐오거나, 혹은 속환되어 조선땅으로 돌아왔을 때, 조선은 그녀들에게 너무나 냉정했다. 조선의 왕부터 사대부, 여염집의 남자들까지 그녀들을 ‘환항녀’라며 손가락질했다. 훗날 ‘환향녀’는 비속어인 ‘화냥녀’라는 말로 남았다.

 

 

경기도 의정부 천보산 기슭에 금림군 가족묘역이 있다. 동쪽 끝 비석 없는 묘는 ‘족두리산소’라 불린다. 오랑캐 땅을 밟기 전 공주가 압록강에 투신해 족두리만 모셨다고 믿는다. p 145

 

 

다시 의순공주 이야기. 의순공주가 청나라로 가는 배를 타고 가다가 바다에 몸을 던졌는데, 족두리만 발견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조선 사람들은 의순공주의 정절을 높이사고, 동정하며 그 족두리를 천보산 자락에 묻었다고 하니, 그게 바로 현재 의정부 천보산 자락에 있는 ‘족두리묘’다. 

 

 

정말 아이러니한 사실은 실제 의순공주는 청나라로 건너가 섭정왕 도르곤의 측실이 되었고, 이후에 ‘살아서’ 조선으로 돌아왔다는 점이다. 버젓이 살아있는 사람을 죽은 사람으로 만들면서까지, 조선이라는 나라는 ‘청에 대한 복수심’과 ‘여인의 정절’을 부각시켰던 것이다. 본인들이 지켜야 할 사람들을, 지키지 못하여 일어난 비극이었음에도 말이다. 

 

허세의 제국-대한제국

땅의역사5, 156p

 

말도 많고 탈도 많은 대한제국. 적어도 내가 학교에서 배울 때, 고종이 세운 대한제국은 ‘나라의 자주독립을 위해’ 세운 ‘황제국’이었다. 이 시기에 이미 서양은 산업혁명, 시민혁명 등 모든게 일어나며, 흔히 말하는 근대국가로 바뀐 뒤였다. 심지어 이때 조선에 빨대꽂고 쪽쪽 빨아먹은 일본조차도 서양의 모든 문물을 배우며, 근대국가로 나아갔다. 하지만 고종이 세운 대한제국은 오로지 ‘황제’인 자신을 위한 나라였다. 대한제국 헌법을 보면 더 확실하게 알 수 있다.

 

제1조, 대한제국은 세계만국에 공인되온바 자주 독립하온 제국이니라. 

제2조, 대한제국의 정치는 이전부터 5백 년간 전래하시고 이후부터는 항만세(恒萬歲) 불변하오실 전제정치이니라. 

제3조, 대한국 대황제께옵서는 무한하온 군권(君權)을 향유하옵시느니 공법에 이르는 바 자립정체이니라. 

제4조, 대한국 신민이 대황제의 향유하옵시는 군권을 침손할 행위가 있으면 그 행위의 사전과 사후를 막론하고 신민의 도리를 잃어버린 자로 인정할지니라. 

제5조, 대한국 대황제께옵서는 국내 육해군을 통솔하옵셔서 편제를 정하옵시고 계엄·해엄을 명하옵시니라. 

제6조, 대한국 대황제께옵서는 법률을 제정하옵셔서 그 반포와 집행을 명하옵시고, 만국의 공공한 법률을 효방하사 국내법률로 개정하옵시고 

대사·특사·감형·복권을명하옵시느니 공법에 이른바 자정율례(自定律例)이니라. 

제7조, 대한국 대황제께옵서는 행정 각 부부(府部)의 관제와 문무관의 봉급을 제정 혹은 개정하옵시고 행정상 필요한 칙령을 발하옵시느니 공법에 이른바 자행치리(自行治理)이니라.

제8조, 대한국 대황제께옵서는 문무관의 출척·임면을 행하옵시고 작위·훈장 및 기타 영전을 수여 혹은 체탈하옵시느니 공법에 이른바 자선신공(自選臣工)이니라. 

제9조, 대한국 대황제께옵서는 각 국가에 사신을 파송·주찰케 하옵시고 선전·강화 및 제반약조를 체결하옵시느니 공법에 이른바 자견사신(自遣使臣)이니라.

대한제국 헌법

 

 

 

 

 

 

왕실 식재료 담당부서는 명래궁이다. 명래궁은 중궁전 소속이다. 1893년 명래궁 지출액은 444만 6912냥이었다. 이 가운데 식재료비가 354만 2335냥이었다. 이해 왕실에서 지낸 고사와 다례는 모두 29회였다. 연회 또한 37회였다. 1894년 2월에는 220만냥을 들여 왕의 생일 축하파티를 벌였다. 1853년 이래 균형을 유지했던 명례궁 수지는 1884년 이후 급속도로 적자로 돌아서 1893년에는 적자가 자그마치 150만냥이었다. 바로 이 1884년부터 1893년까지가 무당 진령군과 사내 이유인이 왕비 옆에 들러붙어 나라를 가지고 놀던 그 시기다. “금강산 일만이천봉에 쌀 한 섬과 돈 열 냥씩 바치면 나라가 평안하다”는 계시에 국왕 부부는 꼼짝없이 나랏돈을 제수비로 바쳤다.(『매천야록』) p 171

 

 

1894년 갑오개혁 때 진령군은 거열형을 선고받고 기록에서 사라졌다. 처형했다는 기록도 없다. 그냥 사라졌다. 이유인은 죽을 때 까지 권력을 놓지 않았다. 처형과 유배를 주장하는 상소에 고종은 처형은 유배로 낮추고, 유배는 몇 달만에 특사로 풀어주는 특별사면을 내리곤 했다. 귀에 발린 소리를 하는 이유인 외에는 아무도 믿지 않은 것이다. p 173

 

 

그 이유인을 정신문화연구원은 ‘한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항일운동가’라고 적어놓았다. 애국계몽운동단체 보안회를 해산시키려 한 이유인을 보안회 부회장으로 국권회복운동에 앞장선다고 적었고(『횡성신문』) 또 다른 애국단체 공진회가 탐관오리 제1적으로 붙잡은 이유인(『윤치호 일기』)을 ‘공진회사건으로 구속됐다가 이듬해 석방됐다’며 마치 좋은 일을 한 듯 기록했다. 2011년 충주 온 산을 뒤져 이유인 무덤을 찾아낸 김봉균이 말했다. ”그 어떤 방식으로도 나라를 위해 한 일이 없는 사람이라, 논문을 쓰려다가 말았다”고. 그런 사람이 항일운동을 했다고, 한다. p 177

 

 

지금은 우리에게 익숙한 단어 ‘비선실세’. 비선실세는 조선말에도 있었다. 고종과 민비의 뒤에 서서, 그들을 좌지우지하던 비선실세는 무당 진령군과 그의 양아들 이유인이다. 이들에 이야기는 몇년전까지 유명했던 비선실세 최순실 보다도 더 스펙타클하다. 정말 궁금하다면 책을 읽어보길!

 

 

 

 

 

3월 11일 고종은 러시아 황제 대관식에 민영환을 파견했다. 3월 29일 고종은 미국인 모스에게 경인철도 부설권을 양여했다. 4월 17일 역시 미국인 모스에게 평안도 운산금광 채굴권을 양여했다. 4월 22일 러시아인 니시켄스키에게 함경도 경원과 종성 사금광 채굴권을 양여하고 7월 3일 프랑스 기업 그리러사에 경의선 철도 부설권을 양여했다. 9월 9일 러시아인 ‘뿌리너’가 설립한 합성조선목상회사에 압록강 유역과 울릉도 벌목과 양목 권한을 허락했다. 이듬해 1월 18일 일본 황태후가 죽자 19일부터 27일까지 경운궁에 가서 상복을 입었다. (『고종실록』) 그리고 23일뒤 경운궁으로 고종이 돌아갔다. 이게 아관 1년 동안 고종이 한 일이다. p 199

 

 

조선에서 궁을 버리고 도망갔던 왕은 셋있다. 선조(임진왜란, 아주 길게 1회)와 인조(이괄의난, 정묘호란, 병자호란, 무려 3회), 그리고 고종(아관파천)이다.

 

 

선조는 궁을 버리고 도망갔다가 돌아온 뒤, 임진왜란에서 승리한 이유는 전적으로 명나라 덕분이라 했다. 본인이 명나라와 가까운 의주까지 도망친 이유를 합리화하기 아주 좋은 방법이었다. 인조는 더이상 말하면 입 아프니 넘어간다. 그다음 고종, 고종은 일본이 민비를 시해한 후 신변에 위협을 느껴 러시아 공사관, 즉 아관으로 도주했다. 아관으로 도망간 고종은 그 기간동안 어떻게 살았을까?

 

 

참 놀랍게도 고종은 신변의 위협을 느껴 아관으로 도망간 것 치고는, 너무 잘 살았다. 나들이 갈 것 다 가고, 일본 고위 인사들과 만남도 자주 가졌다. 아관으로 도망간 이유는 분명 일본에게 신변의 위협을 느껴서였을텐데 말이다. 심지어 본인 즉위 40주년 행사를 아주 성대하게 치르기 위해 나라의 국고를 끌어다 썼다. 경복궁 (건물 약 500동) 및 경운궁(現덕수궁) 중건을 포함하여 평양에는 360칸 짜리 대 궁궐 공사를 진행하고 있었다.

 

 

심지어 아관에 있던 그 기간동안 고종은 서양에 각종 이권을 팔아넘겼다. 학교에선 서양에 각종 이권을 빼앗겼다고 배웠지만, 실상은 달랐다. 고종은 서양에 각종 이권을 무상으로 양여하지 않았다. 고종 본인이 원했던 현금지급이나 매해 일정금액 지급하는 조건을 달았다. 본인의 호위호식과 엄청난 궁궐공사를 위해 자금이 필요하기도 했으니 말이다. 다만, 고종은 대외감각이 없어도 너무 없었기에, 뭐 좋게 말하면 순진하다고 해야할까? 그래서 헛물을 겨케된 상황이 늘어났을 뿐이다. 특히 미국에 양여한 운산금광 채굴권은 미국인 외교관 알렌을 절대 신임한 고종과 민비의 적극적인 지지도 있었다.

 

 

지금은 학교에서 어떻게 가르치는지 모르겠으나, 적어도 내가 배웠을 땐 이 모든 이권이 서양에 강제로 ‘빼앗긴’ 이권이었다.

 

 

한 정권이, 국가가 당연히 해야 할 바를 한다고 해서 이를 칭찬한다면 잘못이다. 근대화의 시기에 법제를 정비하고 정부 조직을 개편하는 조치는 칭찬의 대상이 아니라, 당연한 일이다. 이를 하지 않으면 비판을 받아야 한다. 고종이 한 일은 장차 황제로 등극해 머물 황궁 설계와 이권 양여와 미래의 황제로서 평상시에나 해야 할 의전이었다. p 200

 

 

나라가 평화롭고 안전하며 국고가 탄탄하고 전제왕권 시대라면, 고종이 추진한 대규모 궁궐 공사는 큰 문제가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때는 열강들이 아시아로 눈을 돌리던 서세동점의 시기였으며, 옆 나라 일본조차도 조선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던 때였다. 고종이 정말 나라와 백성을 생각하는 조선의 왕이었다면, 주변 정세를 제대로 파악하고, 어떻게 해야 조선이라는 나라가 살아남을 수 있을지를 생각했어야 했다. 자기 자신의 안위가 아닌, ‘나라와 백성’을 생각했어야 했다.

 

 

하지만 고종의 대환장파티는 여기서 끝이나지 않는다.

 

 

 

 

 

1897년 10월 12일 대한제국의 황제가 된 고종은 제국 선포 2년 6개월 뒤인 1900년 4월 19일 ‘훈장조례’를 발표하고 근대 훈장제도를 실시했다. 대한제국 훈장은 크게 일곱 등급이었는데, 그 가운데 가장 격이 높은 훈장은 금척대훈장이었다. 두 황제 광무제 고종과 융희제 순종은 모두 이 금척대훈장을 받았다. 황제들을 제외한 인물로 첫 번째 금척대훈장을 받은 사람은 1904년 대한제국을 방문한 독일 헨리 친왕이다. 헨리 친왕 서훈 나흘 뒤 또 다른 외국 인사가 금척대훈장을 받았는데, 일본 추밀원 의장인 일본 후작 이토 히로부미다. p 264

 

 

대한제국이 일본에 넘어간 세 가지 결정적인 조약은 1904년 한일의정서와 1905년 을사조약(2차 한일협약), 1910년 한일병합조약이다. 기이하게도 그 세 고비마다 대한제국 황실은 훈장을 광범위하고 납득하기 어렵게 남발했다. p 267

 

 

(1904년 한일의정서를 맺은 직후) 이날 황제는 주한일본공사 하야시 곤스케를 비롯한 일본공사관 직원 ‘전원’에게 훈장을 내렸다. 나흘 뒤 황제가 조령을 내렸다. “이토 히로부미를 특별히 대훈위에 서훈하고 금척대수장을 주라.” 다음 날 황제는 이토가 타고 온 군함 함장 대위 이노우에 도시오와 시바후 사이치로에게도 훈장을 하사했다. 명분은 ‘친목과 친애의 뜻’이었다. p 269

 

 

1910년 8월 22일 대한제국 정부는 창덕궁 흥복헌에서 마지막 회의를 열고 한일병합조약을 체결을 의결했다. 나흘 뒤 황제 순종은 내각총리대신 이완용과 궁내부 민병석에게 금척대수장을, 내부대신 박제순과 탁지부 고영희, 농상공부 조중응 따위에게 이화대수장을 하사했다. 모두 10명이었다. 8월 29일 ‘한일병합조약’이 공포됐다. 나라가 사라졌다. p 270

 

 

대한제국 선포 후 고종은 ‘훈장제도’를 실시했다. 그 훈장을 지급한 시기와, 훈장을 받은 사람들을 보면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다. 

 

 

현 정부가 정권을 잡은 이후 정말 아이러니하게도, ‘고종’미화에 많은 힘을 기울였다. 망국의 왕이라 동정하거나, 독립운동을 위해 애썼다거나, 심지어 고종이 아관으로 피신한 길(실제로 그길도 아니었지만)을 복원하며 관광자원으로 널리 알리기도 했다. 고종이 나라의 독립을 위해 헤이그로 보냈떤 특사들은 이런 연설을 했다. 그들은 연설에서 조선 정부의 학정과 부패를 낱낱이 고발했다. 하지만 이부분은 철저히 가려지고, 학교에서는 가르치지 않았다. 그저 고종이 (황제국 조선의)자주독립을 위해 헤이그로 특사를 보낸 사실만 가르쳤을뿐.

 

 

“잔인한 지난 정권의 학정과 부패에 질려 있던 우리 한국인은 일본인을 희망과 공감으로 맞이했다. 

우리는 일본이 부패한 관리들에게 엄격한 잣대를 적용해 만민에게 정의를 구현하며

 정부에 솔직한 충고를 해주리라고 믿었다. 

우리는 일본이 그 기회를 활용해 한국인에게 필요한 개혁을 하리라 믿었다.”

헤이그특사 연설문 中

 

 

고종이 독립을 위해 애썼다는 증거로 제시하는 독립협회 지원에도 반전이 있다. 독립협회에서 ‘입헌군주제’라는 안건이 나오는 순간, 고종은 독립협회에 등을 돌렸다. 온갖 자금과 인력을 동원해서 독립협회를 해산시켰다. 이럼에도 고종을 망국의 왕이라 미화하고, 독립운동을 위해 애썼다는 얼토당토 않는 말을 하는 사람들이 아직도 많다. 뭐, 다행이라면 다행이랄까? 최근이라면 최근부터 고종에 대한 비판적인 의식이 곳곳에서 나오는걸 보면 말이다.

 

 

 

 

우리는 언제나 빛나는 역사만 배운다. 어떻게 보면 미화된 역사일수도 있고, 그림자만 철저히 가려진 역사일 수도 있다. 하지만 빛나는 역사 속에서 우리가 배울점이 얼마나 있을까. 진정한 교훈을 얻고,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배우기 위해선 빛나는 역사가 아닌 그림자 속의 역사를 배워야 한다. 그림자 속의 역사를 알리고, 많은 사람들을 깨우치려고 했었던 대표적인 역사서가 바로 류성룡의 『징비록』이다. 임진왜란~정유재란 이후에 집필된 바로 그 책이다. 당시 조선정부가 얼마나 무능했는지, 당시 조선의 일부 장수들이 얼마나 무능했는지, 조선이 무엇때문에 일본의 침략을 받았는지, 당시 조선의 최종결정권자였던 선조는 어떠한 행동을 했는지가 아주 적나라하게 나와있다. 물론 그 속에는 이순신 장군처럼 빛나는 기록도 있지만, 정말 슬프게도 그런 빛나는 기록은 아주 극소수에 불과하다. 류성룡이 일부로 빛나는 역사를 축소한게 아니라, 기록으로 남기고 싶어도 그만큼 빛나는 역사가 없었기에, 당시의 조선은 부패할대로 부패해서 무능의 역사밖에 없었기에 그랬던거다. 

 

 

비참했던 7년 전쟁이 끝난후 류성룡은 무능했던 조선을 바로잡기 위해, 류성룡은 위정자들이 들춰내지 않는 잘못들을 속속들이 들어냈다. 이유는 단 한가지, ‘지난 일의 잘못을 바로 잡아 훗날에 환란이 없도록 조심하기 위해’ 서였다. 그래서 『징비록』을 집필하였다.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은 그림자 속의 역사를 배우고 싶어하지 않았다. 임진/정유재란 발발한지 불과 50년도 채 안되서, 정묘/병자호란이 일어났다. 류성룡이 훗날을 위해 집필했던 『징비록』은 조선 사회에선 널리 읽히지 않았다는 방증이다(아이러니하게도 이 책은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에서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오히려 임진/정유재란 이후, 인조가 재위하면서 조선정부는 더더욱 부패해졌다. 조선 정부의 부패는 한번씩 바로잡을 타이밍이 있었지만, 역시나 바로 잡지 못했고, 종국엔 일본에 의해 나라가 식민지가 되는 상황까지 치달았다. 이 모든 일은 조선을 침범한 외세만 잘못한게 아니다. 그런 상황까지 몰고간 조선 정부의 무능과 부패도 그에 못지 않은 잘못이다.

 

 

이후 몇 백년의 시간이 지나 민주공화국인 대한민국이 되었다. 지금도 여전히 위정자들, 국민들은 그림자 속의 역사를 배우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런 역사를 들추면 매국노라느니, 빨갱이라느니 매도하기 바쁘다. 이렇게 ‘징비’라는 단어 자체를 철저히 무시하는 이런 환경에서, 과연 우리나라가 정상적으로 굴러갈 수 있을까? 

 

 

우리 근대사를 보면 대한민국 시기 군부독재를 비롯하여 전 정부의 국정농단, 현 정부의 독단 등 정권이 바뀌든, 이어지든 악순환은 끊이지 않고 계속되고 있다. 다음 정부는 다르겠지, 또 다음 정부는 다르겠지 하며 희망을 가졌지만, 매번 배신의 연속이었다. 심지어 다음 대선주자들의 행보를 보자니, 참으로 기가찰 노릇이지 않은가. 누가 대통령이 되든 이런 상황은 변하지 않을 것이며, 희망도 없어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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