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한국 역사에서 엘리트를 ‘선비’라고 일컬어 왔고, 선비는 유교의 ‘士’ 또는 ‘士大夫’와 같은 뜻으로 여겨왔으나, 이러한 통념의 틀을 완전히 뒤집은 지성사 저술이 나와 학계를 놀라게 하고 있다.
저자는 70 평생 한국의 사회경제사, 신분사, 사상사에 관한 150여 편의 학술논문과 40여 권의 단독 저서를 낸 바 있는 한영우 이화학술원 석좌교수이다.
한영우 교수는 ‘선비’의 연원을 우리 고대인 고조선시대나 삼국시대에서 찾고 있다. 중국 사람들이 기록한 ‘仙人’ 또는 ‘先人’이 바로 우리말 ‘선비’ 또는 ‘선배’의 번역어로 보는 것이다.
그리고 저자는 단군신화에 나오는 삼신(三神)인 환인은 하늘의 신이요, 환웅은 땅의 신이며, 단군은 사람의 신을 말하는 것으로, 이는 곧 天·地·人 사상을 말하며, 홍익인간(弘益人間)은 우리 고유의 공동체정신을 말하는 것으로 본다.
따라서 한국 전통의 선비(엘리트)들은, 그 뒤 중국을 거쳐 들어온 불교와 유교를 받아들이면서도 우리 고유 사상을 바탕으로 하여 외래사상을 통합하여 사고하고 행동했다고 본다.
예컨대 고구려의 조의선인(早衣仙人)이나 신라의 화랑(花郞)으로 이어졌고 고려의 재가화상(在家和尙)·사장(社長)·향도(香徒) 등으로 전통의 엘리트들이 내려오면서 외래문화를 소화 내지는 체화(體化)했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우리 선비정신은 무교(巫敎)에서 시작된 ‘홍익정신’을 바탕으로 불교와 접합되고, 뒤에는 유교와 접목되어 한국 선비의 독특한 ‘체질’을 형성했는데, 이는 달리 말하면 한국인의 ‘문화적 유전인자’(DNA)로 해석할 수 있다.
선비정신의 핵심은 천지인(天地人)을 하나로 보는 우주공동체 사상, 여기서 파생된 ‘생명존중’, ‘낙천성’, ‘신바람’, ‘흥’, ‘미소’, ‘해학’, ‘공동체정신’, ‘공익정신’, ‘민본정치’ 등으로 나타났으며, 이를 바탕으로 한국의 정치, 경제, 사회, 예술문화는 다른 나라와 다른 독특한 개성과 체질을 지니게 되었다.
천지인 합일사상은 ‘셋’[三]에 대한 숭상과 ‘음양오행’사상으로도 나타나, 우리나라의 풍속과 언어생활 등에는 셋과 음양오행이 깊숙이 반영되어 있다. 음양오행사상에 바탕을 둔 ‘태극’(太極)에 대한 사랑이 나타나고, ‘태극기’가 조선시대에도 명나라와 청나라 사신을 맞이할 때 국기(國旗)처럼 사용된 것이다.
그리고 이 책에서는 이전에 유학자[士]로만 보아온 인물들이 유불무(儒佛巫)를 통합한 인간상으로 새롭게 조명되고 있다. 예를 들면, 강감찬은 유학자인 동시에 불교도요, 화랑도를 계승한 인물이다. 조선시대 대표적인 유학자들도 마찬가지로 유불무 곧 문무(文武)를 겸비한 인물로 볼 수 있다. 세종이나 정조 또한 이런 시각에서 해석된다. 이순신도 문무를 겸비하고 화랑정신을 계승하였고, 조식은 칼을 찬 선비이다. 조선 선비들이 왜란이나 한말의 국난을 당했을 때 의병장으로 등장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한편, 공동체적 종교단체이며 무사단체였던 화랑도는 고려시대에 재가화상(在家和尙), 사장(社長), 향도(香徒) 등으로 계승되고, 조선시대 이후로는 차츰 ‘두레패’와 ‘상두꾼’으로 진화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들의 종교적이고 군사적인 놀이문화가 국난을 당했을 때 의병(義兵)으로 표출된 것이다.
선비정신은 전통을 존중하면서 동시에 외래문화를 선별적으로 수용하는 ‘법고창신’(法古創新)의 정신으로 이어졌고, 이것이 개항기의 ‘동도서기’(東道西器), 대한제국의 ‘구본신참’(舊本新參)으로 계승되어 자주적인 근대화 지향의 정신을 낳았다. 일제시대의 민족주의와 민주주의 사상가들에게도 그대로 이어져 전통과 서양문화를 절충하는 한국적인 ‘신민주주의’(新民主主義)와 ‘신민족주의’(新民族主義)를 낳았다. 안재홍, 조소앙 등이 그런 인물이다.
결론적으로 이 책은 한국의 전통문화와 전통사상을 새로운 시각에서 해석하면서, 이런 전통을 미래의 신문명 건설에 지침으로 삼아야 한다는 강렬한 문제의식을 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