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당신과 소통하고 싶습니다
당신도 저와 소통해 주시겠습니까?”

- 고양이줄고기
지선은 어느 날 메모리 박스로 초대한다는 정체 모를 메일을 받는다. 여섯 개의 방 이름이 나열되어 있는 그곳엔 ‘고양이줄고기’라는 자신의 방이 마련되어 있었다. 기억을 공유하는 곳, 메모리 박스. 하지만 그녀는 그곳에 어떤 이야기를 해야 할지 막막함을 느낀다. 지선은 아이를 가진 후 집 안에만 틀어박혀 지내고, 학원 강사인 남편은 우연히 이웃에 살게 된 선배(미욱)의 집에서 거의 살다시피 한다. 둘은 아무 사이도 아니라고 하지만 지선은 마치 둘 사이에 자신이 끼어든 것만 같은 불쾌감을 느낀다. 그런 지선의 마음 은 아랑곳 않고 남편은 꼬박꼬박 미욱의 집을 찾고, 지선은 남편의 불륜을 상상하며 괴로워한다. 아이를 원하지 않았던 남편, 자신의 잃어버린 꿈을 찾고 싶다는 남편……. 지선은 그런 남편이 서운하기만 하다. 문득 외로웠던 자신의 고교시절이 떠오른다. 그때 자신의 곁에 있어준 한 친구. 한동안 잊고 살았지만 결혼 후 가끔 그녀가 떠오를 때가 있다. 그녀는 지금 뭘 하고 있을까?

- 유리고기
수는 대학로에서 토스트를 파는 청년이다. 매일같이 그를 찾아오는 가출 소녀 미미는 마땅한 일자리를 찾지 못한 채 수의 옆에서 시간을 때울 뿐이다. 어느 날, 수에게 ‘고양이줄고기’로부터 메일이 온다. ‘당신은 누구입니까?’ 고양이줄고기 방엔 첫 번째 기억이 올라와 있었다. 하지만 수는 자신의 삶을 돌아봐도 이렇다 할 기억이 없었다. 굳이 떠올리자면 첫사랑 해파리에 대한 기억 정도. 몇 년 만에 해파리와의 기억을 떠올린 수에게 미미가 찾아와 친구를 따라 술집에서 일하게 되었다며 작별인사를 전한다. 그리고 며칠 뒤 고양이줄고기가 수를 찾아온 그날 화려하게 치장한 미미를 우연히 보게 되지만 미미는 그런 수를 외면한다.

- 나비가오리
학습지 교사인 미진. 빚에 시달리는 가족을 위해 이른 아침부터 밤 늦게까지 열심히 일하지만 자신에게 남은 건 고단한 일상뿐이다. 어느 날 그녀는 길에서 만난 낯선 남자와 외곽에 있는 모텔에 투숙한다. 그녀는 모텔방 안에서 한 통의 메일을 떠올린다. 메모리 박스. 그곳에서 자신의 아이디는 ‘나비가오리’였다. 그리고 그 뒤 수라는 남자와 지선이라는 여자부터 메일을 받게 된다. 하지만 그들과 자신이 어떤 관계가 있는지 전혀 떠올릴 수 없다. 남자와 모텔에서 지낸 지 사흘째 되던 날, 미진은 대학시절 기숙사 룸메이트였던 ‘묘’를 떠올린다. 그때 갑자기 모텔 진입로에서 붉게 타오르는 불길을 발견한다.

- 등목어
번역가인 인서는 몇 달 전 아이를 잃었다. 아이는 인큐베이터 안에서 두 달을 채 살지 못하고 죽었다. 그 후 아내는 자신과 한마디도 나누지 않는다. 위층에 새로 이사온 집에는 아이들이 있는지 밤낮없이 소음이 들려온다. 몇 번 항의를 해봤지만 윗층 여자는 도리어 그를 인정머리 없는 이웃 취급을 한다. 아내는 윗층의 소음에 신경을 전혀 쓰지 않는 듯하다. 원고 마감은 다가오고 극도로 예민해진 인서는 밖에서 만난 위층 아이들에게 조용히 해주었으면 좋겠다고 타이르다 오해를 산다. 그를 거부하는 아내에게 화가 나면서 한편으로는 지독한 소외감을 느낀다. 그러던 중 메모리 박스에 그의 기억을 적어줄 것을 요청하는 메일이 도착한다. 자신의 아이디는 등목어. 인서는 메모리 박스에 죽은 아이에 대한 이야기와 함께 어린 시절 한 동네에 살던 제비꽃 소녀와의 추억을 담는다.

- 모래무지
DVD방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인주. 메모리 박스에서 그녀의 아이디는 ‘모래무지’이다. 하지만 그녀는 다른 이들처럼 자신의 비밀을 밝힐 용기가 없다. 인주는 선천성질결여증으로 평생 불임으로 살아야 하는 ‘결핍’된 인생이다. 그녀는 어려서부터 정상적인 여자로 성장하는 언니를 동경하며 살아왔다. 하지만 사랑하는 남자와 뉴욕으로 떠난 언니는 이제 하루가 멀다 하고 그녀에게 전화를 걸어 실연의 아픔을 쏟아내면서도 사랑을 다시 찾으리라는 희망을 갈구한다. 과거엔 인주도 회사에 취직하고 연애도 했지만, 자신의 비밀을 밝힌 후 남자는 떠났고 회사엔 그녀에 대한 소문이 퍼진다. 결국 집단생활에 공포를 느낀 인주는 사표를 내고 나와 DVD방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살아간다. 그런 그녀에게 유일한 낙이라면 매일 같은 시각이 되면 찾아와 불란서 영화를 보는 한 남자를 기다리는 일. 어느날 그가 무심코 던진 “애인 있어요?”란 말에 인주는 흔들리고, 문득 연애에 실패하고 홀로 떠난 여행에서 만난 한 여자와의 기억을 떠올린다.

- 벚꽃뱅어
평범한 직장인 지섭. 얼마 전 사랑하던 서연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 탓에 실의에 빠져 있다. 그리고 동료로부터 그녀가 임신 중이었다는 사실을 전해 듣고 충격을 받는다. 텅 비어 있는 그녀의 방에서 찾은 건 벽 한 귀퉁이에 쓰여 있는 ‘메모리 박스’라는 글자. 두 달 전쯤 그는 ‘메모리’라는 아이디를 가진 사람에게서 초대 메일을 받았던 일을 기억해 낸다. 자신의 아이디는 ‘벚꽃뱅어’. 그는 서연과 메모리 박스가 관련이 있음을 직감하고 메모리 박스에 초대된 여섯 인물들을 만나 자신과 그들 간의 공통된 기억을 지닌 사람을 찾는다. 퍼즐처럼 짜 맞춰지는 기억들. 그리고 그로부터 열흘 후, 떠나간 서연에게서 한 통의 메일이 도착한다. 자신이 지섭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밝히며 그녀는 영원한 작별을 고하지만, 그는 서연이 보내온 메일을 메모리 박스에 올리고, 서연을 기다리기로 한다. 서연과 자신을 연결시켜 주는 메모리 박스가 있기에.

<b>일상에 지친 남자 셋, 여자 셋<br/>그들이 간직한 차갑고도 비밀스러운 비늘빛 슬픔</b><br/>문학적 감수성과 진정성을 담보하는 작가 류경희의 매혹적인 첫 장편!<br/>한국문화예술위원회 선정 문학창작지원사업 공모 당선작<br/><br/><b>소통이 부재한 삶 속에서 건져 올린 여섯 개의 아릿한 기억</b><br/>각각의 사연을 지닌 여섯 명의 사람에게 어느 날 ‘메모리 박스’에 초대한다는 익명의 메일이 도착한다. 그곳은 각자의 기억을 남기는 인터넷 사이트이다. 그들에겐 각기 다른 물고기 이름의 아이디가 부여되어 있었다. 답답한 일상에 갇혀 살아가던 그들은 하나씩 자신의 기억을 메모리 박스에 담기 시작한다. 전혀 다른 삶을 살아왔지만 그들은 메모리 박스를 통해 서로의 비밀스런 기억을 공유하며 현실 속에서 느끼는 삶의 고단함과 상처를 보듬어 나간다. 그들에게 이곳은 위안이며 치유이다. 하지만 공통분모라곤 전혀 찾을 수 없는 이들을 누가, 왜, 어떠한 목적으로 메모리 박스에 초대했을까?<br/><br/>인간 본연의 불안과 고독을 섬세한 필치로 그려낸 소설 《차고 미끈거리는 슬픔》(은행나무 刊)이 출간됐다. 2009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주관하는 문학창작지원사업의 장편소설 부분에 선정된 이 작품은 소통이 결여된 삶 속에서 살아가는 현대인의 내밀한 심리를 담아냄으로써 심사위원으로부터 ‘내면을 향한 시선의 깊이가 느껴지는 수작’이라는 평을 받았다. 또한 퍼즐을 맞추듯 6인의 등장인물이 가진 기억을 하나로 모아 익명의 ‘메모리’를 찾아가는 과정은 미스터리적 재미를 안겨준다. 그들에게 각기 부여된 물고기 이름의 아이디가 지닌 특성과 인물들의 삶을 연관지었을 때 비로소 발견하게 되는 상징성 또한 주목할 만하다. <br/><br/><b>내밀한 상처를 치유하는 비밀의 공간 ‘메모리 박스’</b><br/>메모리 박스는 상처 받은 이들을 위한 공간이다. 햇살과 남편을 맞바꾼 고양이줄고기, 캠핑카를 타고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유리고기, 촘촘한 일상에서 벗어나 낯선 남자와의 일탈을 시도하는 나비가오리, 소외감에 짓눌린 신경쇠약 직전의 남자 등목어, 결핍된 삶 속에서 희망을 찾고 싶은 모래무지, 돌아오지 않을 사랑을 기다리는 벚꽃뱅어. 이들 여섯 명은 비밀의 공간 ‘메모리 박스’에서 서로의 은밀한 상처를 치유해나간다.<br/>“등목어라는 고기에 대해 들어 본 적 있어?”<br/>아내는 없다고 했다. 그뿐이었다. 대화를 나누려는 그의 시도는 번번이 묵살되었다. 인서는 아내에게 메모리 박스라는 공간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다. 그곳은 기억을 적는 곳이야. 누군가가 나를 그곳으로 초대했어. 거기엔 물고기 이름을 가진 여섯 명의 회원이 있어. 그곳에서 나는 등목어야. 등목어, 먹이를 찾아 육지와 수면에 접해 있는 나뭇가지를 기어가는 습성이 있어 그런 이름이 붙었다지만 나는 자꾸 경전을 읽을 때 두드린다는 나무로 만든 제구가 떠올라. 인서는 속으로만 그런 말을 웅얼거렸다. <br/>- 〈등목어〉 중에서<br/><br/>유리고기 수의 말처럼 ‘지리멸렬’한 일상에 탈출구는 없다. 메모리 박스를 알게 된 이후에도 이들의 일상은 변함이 없지만, 내면에서는 조용한 변화가 일어난다. ‘소통’의 의미를 깨달은 이들은 그저 안으로만 숨고 싶었던 지난날의 자신을 돌아보며, 타인에게 마음의 문을 열고 자신에게 솔직해지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스스로 깨닫게 된다. 분노와 의심, 실망과 괴로움은 모두 자신 안에서 만들어내는 것이었음을. <br/><br/>남편이 위층으로 올라간 후 혼자가 되는 시간이면 지선은 거실 소파에 앉아 햇볕을 쬐었다. 전면유리로 된 남향인 거실 창으로는 햇살이 숨 막힐 듯 쏟아져 들어왔다. 거실에 앉아 눈을 감고 있으면 위층 여자와 남편에 대한 뭉친 원망이 출렁거리는 햇살에 올올히 풀어져 내릴 듯도 했다. <br/>석 달 전 오 층짜리 연립주택 사 층으로 이사 온 후 지선은 햇살과 남편을 맞바꾼 듯한 착각에 빠지곤 했다. 이 집에 이사 오지 않았더라면 남편은 오랫동안 연락이 끊겼던 미욱을 만나지 못했을 것이고, 하루도 거르지 않고 위층으로 올라가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br/>- 〈고양이줄고기〉 중에서<br/><br/><b>녹아서 없어질지라도 인생엔 때론 설탕 같은 희망이 필요하다</b><br/>소통을 시작한 이들은 메모리 박스 기억목록에 각자의 기억을 풀어놓기 시작한다. 고양이줄고기는 고교시절 단짝친구에 관한 추억을, 유리고기는 첫사랑 해파리에 대해, 나비가오리는 대학시절 기숙사 룸메이트였던 묘라는 여자아이에 대한 이야기를, 등목어는 어릴 적 함께 뛰어놀던 제비꽃 소녀의 기억을, 모래무지는 여행지에서 우연히 만난 한 여인에 대한 이야기를 각자 메모리 박스 안에 담는다. <br/>그리고 벚꽃뱅어는 이들의 기억을 통해 떠나버린 사랑의 흔적을 뒤쫓는다. 그는 마침내 자신의 연인이 살아온 삶의 궤적을 이해하고 그녀가 자신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받아들이게 된다. <br/>서로 다른 이야기처럼 보이던 이 모든 것들이 하나의 커다란 진실로 향할 때 비로소 이들은 자신들이 이곳 ‘메모리 박스’에 모인 이유와 ‘메모리 박스’의 진정한 가치를 깨닫게 된다. 이곳은 뜨거운 냄비 속에서 자신이 죽어가는 줄도 모르고 앉아 있는 개구리와도 같은 일상에서 유일하게 맛볼 수 있는 설탕 같은 희망이라는 사실을.<br/><br/>날 찾지 말아줘.<br/>난 이제 거기에 없어. <br/>오늘 밤이면 장거리 버스가 나를 다른 곳으로 데려갈 거야. <br/>언제 돌아갈지는 몰라. <br/>어쩌면 영영 돌아가지 않을지도 모르지.<br/>삶은 기억과 관계로 이루어진다고 나는 믿고 있어.<br/>내 기억은 잠시 접어두기로 했지만, <br/>메모리 박스에 있는 당신들은 서로의 기억을 들여다보고 관계 맺으며 소통할 수 있길 바라. <br/>그게 당신들에게 내가 줄 수 있는 마지막 선물이야.<br/>- 〈벚꽃뱅어〉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