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품’ 산업이 판매하는 매혹과 판타지의 세계,
게임의 룰을 바꾸고 영리한 패션을 시작하라!
: 럭셔리라고 쓰고 명품이라 읽는 ‘판타지 자본주의’ 벗겨내기!
이 책은 우리 사회를 ‘판타지 자본주의 시대’로 규정하고, 판타지 자본주의의 정점에 있는 럭셔리 패션 산업을 사회과학자의 시선에서 일상의 언어로 분석하고 있다. 특히 판타지를 판매하는 자들을 ‘판타스타’로, 판타지를 구매하는 자들을 ‘판타스티(판타스타의 수동형)’로 규정하며 판타스타들이 생산하는 판타지를 분석하는 데 중점을 두고 있다. 왜 보통 사람들이 럭셔리를 욕망하는지, 패션 특히 럭셔리 산업은 어떤 전략으로 판타지를 판매하고 진화해 왔는지, 패션의 미래와 대안은 무엇인지, 사회과학과 패션 세계를 종횡하며 다양한 사례와 발랄한 감성으로 풀어내고 있다. 여기에 그림 작가인 류미연이 함께 작업에 참여해 화가의 감성으로 사회과학자인 김윤성의 글을 그림으로 풀어냈다.
■ ‘판타스타’가 지배하는 판타지 자본주의 사회
우리는 지하철을 타거나 버스를 타고 이동할 때, 혹은 사람들로 가득한 강남대로나 명동의 거리를 걸을 때, 수많은 여성들의 어깨에 걸린 샤넬, 구찌, 프라다, 루이비통 가방이 자연스러운 시절을 살고 있다. 그 가방이 ‘짝퉁’이건 ‘진품’이건 간에 말이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어색한 일이다. 기사 딸린 차도 아니고 지하철이나 버스를 타고 다니는 사람들이 한 달 월급 정도는 우습게 훌쩍 뛰어 넘는 럭셔리 브랜드의 가방을 산다는 것이고, 명동이나 강남에 한국 사회 소득 상위 1퍼센트의 사람들만 나와 있을 리도 없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명품’이 일상을 지배하는 세상이다.
이게 가능한 건 패션이 판타지와 욕망으로 이루어지는 세계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바로 사람들에게 카드를 쓰게 하는 사람, 판타지를 판매하는 ‘판타스타’다. 카드를 쓰는 우리가 바로 판타스타를 좇는 ‘판타스티(‘판타스타’의 수동형)’. 이 책은 판타지와 욕망으로 이루어지는 패션 세계의 정점에 있는 ‘럭셔리’의 세계를 추적한다. 저자는 “언제나 돈을 버는 쪽, 그러니까 자본주의 세계의 승자는 환상을 만드는 판타스타 쪽이다. 판타스티들은 번번이 ‘마케팅’이라는 판타지 전략 앞에서 힘들게 번 돈을 쉽게 내어(7쪽)”준다는 사실에 질문을 던진다. 그리고 우리가 이 세계의 비밀을 벗겨냈을 때, “당하던 사람들이 더 이상 당하지 않는 그런 아침”이 올 것이라고 기대한다.
그렇다고 이 책이 ‘명품’ 소비를 무작정 ‘된장녀’의 ‘된장질’로 몰아가고 그것을 비난하는 것은 아니다. 이 책은 우리가 욕망하는 ‘명품’의 세계를 꼼꼼히 뜯어보고 제대로 질문해보자고 한다.(‘된장녀’ 담론 역시 얼마나 정치적인가!) 한마디로 ‘일단 제대로 알고 나서 판단해보자’는 거다. 그리고 나아가 판타스타들의 판에 우리 판타스티들이 개입할 여지를 만들어보자는 게다. 이왕에 패션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면, 판타스타들이 미디어의 카메라 앞에 들이민 이미지와 스토리를 앞질러 버리는 게 어떨까? “우리는 내 지갑을 열게 하려고 남들이 짜놓은 전략에 걸려드는 사람이 되기보다는 전략을 먼저 알아보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래야 이 경쟁 가득한 사회에서 살아남을 확률이 조금 높아”(277쪽)지기 때문이다.
■ 럭셔리 산업의 이면, 판타스타 전략의 진화
지럭위명(指Lux爲名)? 럭셔리(사치재)라고 쓰고 명품이라고 읽는다
일단 ‘명품’이라는 말부터 짚고 넘어가자. 언제부턴가 한국 사회에서 ‘럭셔리(우리말로는 사치품 혹은 사치재다)’라는 말은 ‘명품’이라는 말로 대체되기 시작했다. 럭셔리를 판매하는 사람들은 그 상품이 사치스럽다는 뉘앙스를 삭제한 ‘명품’이라는 말을 유행시켰다. 저자는 이러한 현상이 우연한 일이 아니라 “패션 브랜드와 연결된 미디어에서 가르쳐 준 마케팅 세계의 언어일 뿐이고 하나의 영리한 ‘작전’”(18쪽)이라고 지적한다. 럭셔리가 ‘명품’으로 대체되는 순간 ‘최고의 기술을 잘 만들었기 때문에, 내 취향에 맞아서 산다’는 느낌만 남게 되기 때문이다. ‘명품’이라는 말에 낭비, 파산, 개인부채 같은 말은 어울리지 않는다. ‘명품’이라는 단어는 언뜻 가치중립적인 단어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이토록 정치적이다.
대중은 왜 럭셔리를 욕망하는가? = 럭셔리(판타스타)가 사람들(판타스티)의 지갑을 여는 방법
: 소스타인 베블런과 캐리 브래드쇼
사람들은 보통 자신의 소비능력을 보여주고 싶을 때 럭셔리에 돈을 들인다. 특히 패션은 입고 다니고 들고 다니면 되기 때문에 어떤 것보다도 자신을 과시할 수 있는 홍보판이 된다. 내가 특권을 지닌 소수라는 것을 강력하게 보여줄 수 있는 수단이다. 때문에 럭셔리는 일부러 적게, 어렵게 만드는 것이다. 희소성을 유지하기 위해 플라스틱 열쇠고리처럼 생산량을 늘리는 것이 어렵지 않은 경우에도 한정생산 방식을 택해 비싼 값을 유지한다. 여기에 더해 가격이 높아야 사람들이 갖고 싶어 하기 때문에 비싸기도 하다. 베블런이 밝혀낸 바로 그 심리다. 럭셔리는 생산 비용과 관계없이 심리적 이유로 값이 오르는 재화다.
저자는 우리 사회에서 소득 수준이 보통인 ‘보통 사람’들에게 럭셔리가 잘 팔리는 현상을 베블런을 빌어 설명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람들은 자기 위에 있는 계층을 흉내 내며 그 안에 속하기를 바라고, 반면 자신이 속한 계층 안에서는 차이를 두고 싶어 한다. 때문에 계층 혹은 계급의 구분이 덜한 사회일수록 유한계급을 따라하는 사람이 많은 것이다. 우리 사회의 특징 중 하나는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노동자 계급’이라는 의식이 약하고 ‘나는 중산층’이라는 심리적 기준을 가진 사람들이 많다는 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유한계급이나 누릴 수 있는 럭셔리가 금세 유행이 되고, 그 유행을 따라가야 무리에서 빠지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매스티지(Masstige=Mass+Prestige) 상품이 팔리는 이유도 이와 같다. 럭셔리 브랜드를 원하는 대중에게 브랜드 로고가 박힌 상대적으로 저렴한 상품을 대량생산해서 판매하는 것이다. 이건 ‘명품’ 소리를 들을 게 아니다. 싼 재료로 대량생산한 물건이기 때문이다. 매스티지 상품에 대한 소비는 판타지를 구매하는 상징적인 가치 이상은 없다. 럭셔리 패션 브랜드의 매출에서 옷보다 가방이나 구두, 향수 같은 액세서리의 비중이 높은 것도 매스티지 상품을 사는 대중들의 심리와 관련되어 있다. 럭셔리 메종의 옷 한 벌의 가격보다는 훨씬 저렴하면서도 그 브랜드를 소유할 수 있기 때문이다.
럭셔리 브랜드는 더 많은 판타스티를 원하기 때문에 미디어와 결탁한다. 저자는 미디어도 판타지를 심어주는 데 한몫한다는 걸 지적한다. 뉴욕과 패션 열풍을 일으킨 미국 드라마 「섹스 앤 더 시티」의 주인공 ‘캐리 브래드쇼’. 캐리라는 캐릭터는 패션산업을 위한 미디어의 봉사를 그대로 보여준다. 캐리는 럭셔리 패션 브랜드에 열광하는 인물이지만 훤칠한 미녀도, 귀족 집안의 부유한 여성도 아니다. ‘나’와 닮은 점을 쉽게 찾을 수 있어 친근하게 느껴지는 좋은 ‘따라하기 모델’이라는 점이다. 이 드라마는 억압된 남성들의 ‘된장녀’ 공격에 대한 방어논리까지 쥐어준다. 내가 벌어서 나를 보상하기 위해 쓴다는 논리. 게다가 캐리는 넉넉지 않은 수입에도 소비성이 좋은 사람으로 설정되어 있다. 드라마를 보며 사람들은 나는 캐리보다 돈은 더 벌고 덜 쓰니까 괜찮다고 위로 받는다. 하지만 이 드라마는 미국 경제의 거품과 미국 국민들의 빚더미, 맨해튼에서만 ‘섹스 앤 더 시티’의 삶이 가능하다는 것은 말하지 않는다. “모든 돈과 권력이 모이는 미국이라는 제국의 심장인 뉴욕의 캐리들은 정부에 돈 좀 더 찍으라고 할 수 있지만 힘없는 ‘원화’란 돈을 쓰는 한국의 서울에서는 그럴 수 없”(167쪽)는데도 말이다.
미디어에서 ‘셀러브리티’ 등의 이름으로 패션 리더들을 계속 만들어가는 것 역시도 그들의 전략이다. “파리 발, 뉴욕 발 패션 권력들은 자신들이 막강한 이 상태가 좋기 때문에 합리적인 정보를 주기보다는 판타지만을 일반적으로 제공하는 구조를 더 튼튼히 하고 싶을 것이다. 게다가 소비자들이 다양해지는 쪽보다는 한쪽으로 몰려가는 편이 돈 벌기엔 쉽기 때문에 계속해서 ‘리더’, ‘패션 리더’의 스타일을 따르도록 주문을 걸고 있다”(409~410쪽)는 것이다.
저자는 줄기차게 말한다. 유한계급이 아닌 대다수의 보통 사람의 현실과 잔고에 대해서. 럭셔리 소비란 패션 산업과 패션 미디어의 판타스타들이 만들어낸 판타지의 한 조각, 다시 말해 ‘이미지’를 구매하는 것이다. 소득이 보통인 ‘보통 사람’은 지갑을 열고 잠깐 그 이미지에 젖을 수 있지만 현실은 이미지가 아니고, 더더군다나 은행의 잔고는 냉정한 현실이라는 것이다.
■ 이제 게임의 룰을 바꾸자!
패션에도 철학이 필요하다: 샤넬의 패션 모더니즘과 여성 해방의 철학
저자는 “잘 팔릴 유행을 기획하려면 시대를 잘 해석하고 사람들이 바라는 게 뭔지 잘 짚어주어야 한다. 여기에는 철학과 감각이 필요하다. 즉 자본가와 철학자가 모두 필요한 것(38쪽)”이라고 말한다. 샤넬에서 지금의 패션이 배워야 할 지점이 바로 이것이라고 저자는 강조한다. 바로 샤넬의 패션 모더니즘과 여성해방의 철학이다. 샤넬 역시 사람들에게 판타지를 판매했지만, 그녀 이후로 더 이상 폐병을 유발하던 코르셋처럼 건강에 해로운 옷을 평상복으로 입지는 않게 되었다.
샤넬이 활동하던 시대는 왕과 귀족이 구시대로 물러나고 평범한 사람들이 사회의 주인이 되기 시작한 새로운 시대였다. 시민혁명과 산업혁명에 더불어 세상에는 꺡대중’이 등장했고, 이제 ‘대중’이 가장 중요한 ‘소비자’가 되었다. 샤넬은 하나둘 사회에 진출해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여성 소비자 대중에 주목했다. 샤넬은 신여성들이 사회생활을 하면서 입을 수 있는 여성용 슈트를 ‘발명’했고, 가방을 어깨에 걸 수 있어 양손을 자유롭게 쓸 수 있는데다가 퀼팅 처리를 해 웬만한 흠은 티가 나지 않을 진정한 의미의 첫 퍼스널 백인 2.55백을 선보였다. 풍만한 가슴과 엉덩이를 강조하기 위해 코르셋을 입고 무거운 페티코트를 입던 여성들에게 짧은 머리에 직선적인 옷 선을 강조한 중성적인 스타일인 ‘가르손느(소년같은 여인)’ 스타일을 제시하기도 했다.
여성해방에서 자연해방으로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연합군 병사들이 줄을 서 사갔다는 전설적인 향수 ‘샤넬 넘버 파이브’에는 여든 가지가 넘는 천연 추출물이 들어간다고 한다. 개중에는 장미나무를 짜내 만든 기름이 반드시 필요하다. 장미나무는 카리브 해 연안의 프랑스령 기아나와 아마존 숲에서 주로 자란다. 그런데 향수 원료로 하도 베어낸 탓에 40여 년 만에 멸종 직전의 위기종이 되었다. 향수 생산자들은 프랑스령 기아나에서 더 이상 장미나무를 찾을 수 없게 되자 아마존 숲에서 장미나무를 찾아냈다. 하지만 그 울창한 아마존의 숲에서도 이제는 장미나무가 귀하다.
장미나무가 없어진다면? 많은 패션 상품은 생존에 필요해서 사는 물건이 아니라 나를 만족시키고 싶다는 욕망에서 소비 행위가 일어나는 상품이다. 하물며 럭셔리라면? 장미나무가 자랄 수 없는 환경에서 ‘샤넬 넘버 파이브’는 더 이상 ‘샤넬 넘버 파이브’가 아니다.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그 비싼 돈을 들이면서 대충 사고 싶은 사람은 없다. 무언가가 달라졌다면 더 이상 같지 않다. 그러니 사람들이 같은 물건이라고 하면서 품질을 조금씩 떨어트리는 회사에 화도 내고 소비자의 권리를 요구하는 것 아”(136쪽)니냐고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러니 굳이 숭고한 도덕을 들먹이며 착한 척하기 위해서도 아니고, 환경보호론자에게 미안하지 않기 위해서도 아니고, 남들보다 생태계의 공존을 잘 이해하기 때문이 아니라도, 내가 누릴 호사와 내가 지닌 독특한 취향을 지키기 위해서 우리는 생태를 잘 알 필요가 있다”(136쪽)고 말이다.
이제 게임의 룰을 바꾸자
저자는 질문한다. 다음 시대의 패션을 이끌어간 샤넬은 누가 될 것이냐고. 그리고 답한다. 샤넬이 ‘여성해방’의 정신을 구현했다면 앞으로 패션에서 구현되어야 할 철학은 바로 ‘생태’라는 가치라고. ‘자연해방’의 정신이다. 이는 패션 생태계의 종 다양성에도 적용될 문제이고, 생산자들의 패션 철학에서도 구현되어야 할 몫이다.
그리고 여기에 하나 더. 저자의 말대로 논쟁에서 이기는 가장 좋은 방법은 논쟁의 규칙을 내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한국 사회에서 ‘럭셔리’가 ‘명품’이라는 말이 되는 순간, 게임의 규칙은 정해진 게다. 해서 저자는 이제 ‘명품’이라는 단어를 버리자고 주장한다. ‘사치품’이라는 말이 잘 붙지 않는다면 차라리 원래 이름인 ‘럭셔리’라는 단어를 사용하자고. 브랜드나 스타 디자이너는 신이 아니라 판타지를 두르고 있는 인간이라는 걸 기억하자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