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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 | 2013년 12월 27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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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BN13 | 97889719948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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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균(許筠). 그는 누구인가
교산 (蛟山) 허균(許筠, 1569~1618)하면 최초의 한글소설인 <홍길동전>의 저자가 떠오른다. 때문에 그에게는 시대를 앞서간 혁명가 혹은 혁신주의자의 이미지가 강하다.
그런데 그는 정말 혁명가였을까?
혹시 <사미인곡>, <속미인곡> 등 빼어난 작품으로 가사 문학의 대가(大家)이자 천재시인으로 알려진 송강(松江) 정철(鄭澈, 1536~1594)처럼 다른 얼굴을 가진 것이 아닐까.
먼저 그의 행적을 살펴보자. 탄핵-파직-재임용으로 이어지는 그의 관직생활을 보면, “관아를 자기 집에 설치하고 서울 기녀를 데리고 와 살며 무뢰배를 끌어들여 폐단을 일으켰다”[황해도 도사(都事), 1599], “상관에게 무례를 범했다”[병조정랑, 1602], “불교 숭상”[삼척부사, 1607] 등 다양한 이유로 탄핵1)을 받았다. 여기서 혁명 아니 혁신의 기운을 찾기는 쉽지 않다.
오히려 그가 이에 대해 변명하는 대신 남긴 시(詩) <파직당했다는 소식을 듣고[聞罷官作]>에 그 편린(片鱗)이 비칠 뿐이다.
“출세의 푸른 꿈 이미 버렸거늘
탄핵이 빗발친들 무슨 근심 있겠나.
~ 중략 ~
예교(禮敎)로 어찌 자유를 구속하리
부침은 오직 정(情)에 맡길 뿐.
그대들은 그대들의 법을 따르라
나는 내 삶을 살아가리니.2)”
여기에 백성 스스로 나라를 바꿀 수도 있다는 민권(民權) 사상의 단초(端初)를 보여준 <호민론(豪民論)>, 적서차별(嫡庶差別)의 철폐 등을 주장하는 <유재론(遺才論)> 등의 내용이 반영된 <홍길동전>의 존재는 그를 혁명가로 바라보게 된다.
이는 그가 역모죄로 처형된 후 조선이 망할 때(1910)까지 복권(復權)이 되지 않았기에 더욱 그렇다.
하지만 문제는 그가 동인(東人)의 수장이었던 맏형 허성(許筬, 1548~1612)이 세상을 떠난 후 그가 보여준 행적이다. 영창대군 지지세력을 제거하기 위한 계축옥사(癸丑獄事)로 그와 친분 있던 서얼들이 처형되자, 당대의 권력자인 대북(大北)의 수장 이이첨(李爾瞻, 1560~1623)의 진영으로 투신한다. 이 정도에 그쳤다면 살기 위한 발버둥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허균은 거기에 그치지 않았다. 영창대군의 친모인 인목왕후(仁穆王后) 즉각 폐위론을 제기하고, 자신의 딸을 세자 후궁으로 미는 등 적극적으로 권력을 장악하려는 모습을 보여준 것이다.
그래서 <나는 나의 법을 따르겠다>는 제목으로 허균의 작품을 엮고 옮긴이[編譯者]는 책 머리에서 “허균은 시대를 앞서간 혁명가라고도 일컬어지고, 겉과 속이 다른 간신소인배라고도 불린다.3)”고 표현한 것 같다.
호민(豪民), 혁명의 선도자(先導者)
여전히 허균이 어떤 인간이라고 평가하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그가 말하고자 했던 것은 그의 저서 등을 통해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먼저 그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인 <호민론(豪民論)>을 보면,
“천하에 두려워할 만한 존재는 오직 백성뿐이다. 백성은 홍수나 화재, 호랑이나 표범보다 훨씬 두려운 존재인데, 윗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오히려 업신여기며 모질게 부리니, 대체 무슨 이유에선가4)”라고 시작한다.
여기에 대한 대답은 간단하다. 위정자(爲政者), 즉 권력이나 재산을 가진 기득권자들이 선민의식(選民意識)에 가득 찬 욕심쟁이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허균은
“하늘이 임금을 세운 것은 백성을 잘 살게 하기 위해서지, 한 사람으로 하여금 윗자리에서 오만 방자하게 눈을 부릅뜨고 영원히 채워지지 않을 끝없는 욕심을 채우게 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니 저들 진(秦)•한(漢) 이래의 재앙은 당연한 결과지 불행한 일이 아니다.5)”라고 하여 역성혁명을 긍정한다.
이는 그가 “항상 눈앞에 보이는 것에만 얽매이며, 순순히 법에 따라 윗사람의 부림을 받는 자”인 ‘항민(恒民)’과 “집의 수입과 땅의 소출을 다 가져다 (윗사람의) 끝없는 요구에 응하면서 (그저) 한숨을 쉬며 윗사람을 탓하는 자”인 ‘원민(怨民)’6)을 이끌어 혁명을 일으키는 자들이 ‘호민(豪民)’이라고 정의한 것에서 드러난다.
이러한 호민(豪民)은 서양에도 존재한다. 프랑스 대혁명 당시 제3계급을 이끌고 세상을 바꾸었던 조르주 당통(Georges Danton, 1759~1794), 막시밀리앵 드 로베스피에르(Maximilien de Robespierre, 1758~1794), 장 폴 마라(Jean Paul Marat, 1743~1793)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이런 점에서 <홍길동전>에서 서얼 출신인 홍길동이 자신을 따르는 이와 함께 율도국을 세워 왕이 되는 것처럼 백성 스스로 나라를 세울 수도 있다는 민권(民權) 사상의 싹을 엿볼 수 있다.
하지만 이를 지배계급의 입장에서 ‘호민(豪民)’이 등장하지 않도록 피지배층에 대한 수탈을 절제하자는 글로 해석하는 경우7)도 있다.
그의 속마음은 어느 쪽이었을까
허균(許筠)의 개혁안
적서차별(嫡庶差別)의 철폐 등을 주장하는 <유재론(遺才論)>을 보면,
“하늘이 인재를 내는 것은 본래 한 시대에 쓰이도록 하기 위해서다. 그러니 귀한 신분이라 해서 큰 재주를 내리는 것도 아니요, 천한 신분이라 해서 얕은 재주를 내리는 것도 아니다.
옛 현인들은 이러한 사실을 훤히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인재를 초야에서 구하기도 했고, 병졸들 사이에서 뽑기도 했으며, 싸움에 져서 포로가 된 장수를 발탁하기도 했고, 도적을 등용하거나 창고를 관리하던 선비를 쓰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산수에 묻혀 살며 가슴속에 품은 보배를 펼쳐 보이지 못한 사람이 즐비하고, 영웅호걸이 하급 관료로 묻혀 지내다 끝내 자신의 포부를 시험해 보이지 못한 일도 많이 있었다.
(이와 반대로) 우리 조선왕조에 들어와서는 가문과 과거로 제한을 두니 항상 인재가 부족한 것을 병으로 여기는 것도 당연하다8)”고 하여 서얼(庶孼)과 개가(改嫁)한 여인의 자식 등용을 거부하는 조선시대 인재등용제도를 비판했다.
뿐만 아니라 <관론(官論)>에서 “우리나라는 관서(官署)와 관리의 수가 지나치게 많고 번다(繁多)해 이루 다 말할 수 없다. 왕실 친인척을 관리하는 관서(官署)는 종인부(宗人府) 하나면 족하거늘 종친부(宗親府)/의빈부(儀賓府)/종부시(宗簿寺)를 두었고
~ 중략 ~
우리나라는 중국에 비하면 하나의 제후국 규모에 불과하다. 중국의 하나의 성(省)에 녹봉을 받는 사람이 칠백여 명인데, 우리나라는 관리가 지나치게 많아 수천 명에 이르고, 관서(官署)는 중국의 다섯 배나 되니9)”라고 하여 나라의 규모에 비해 과다한 관서(官署)와 관직을 통폐합하여 축소할 것을 권하고 있다.
<병론(兵論)>에서는
“태평한 시절이 지속되다 보니 황해도와 평안도의 고을은 연못과 누대를 꾸미고 호사스런 잔치 준비를 해서 중국 사신을 즐겁게 할 궁리나 일삼을 뿐, 변방을 굳건히 하기 위해 힘써야 할 일이 무엇인지는 전혀 알지 못한다. 그리하여 성은 허물어져 평지가 되었고 해자는 메워서 쓸모 없게 되었으며, 무기는 썩어 가고 식량 창고는 텅 비어 간다. 백성은 가혹한 세금에 시달려 열에 여덟아홉은 안쪽 땅으로 흘러 들어 왔다. 사정이 이러니 갑자기 위급한 일이 생기면 속수무책으로 무너질 수 밖에 없는 조건이 이미 다 갖추어진 셈이다.10)”라고 후금(後金)의 침략을 경고하면서
그 대책으로
“사대부와 천민을 막론하고 젊은이는 군대에 소속시키고 노인과 아이는 그들을 뒷바라지하게 해야 합니다. 지략이 있는 사람을 뽑아 압록강 연안의 고을을 맡기고 두텁게 지원하여 성곽을 수리하도록 독려11)”할 것을 제시하고, 이를 위해 <서변비로고(西邊備虜考)>를 남기었다.
이처럼 그의 개혁안은 실학의 선구자 가운데 하나로 꼽아도 무방할 정도로 현실적이고 실용적이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권력의 한 축이 되었을 때조차도 자신의 개혁안을 실천에 옮기지 못했다.
이런 예를 보면 확실히 아는 것을 실천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만약을 가정해보는 것이 우습지만 그의 삶에 있어서 전기(轉期)가 된, 계축옥사(癸丑獄事)가 없었더라면 허균의 삶과 조선의 미래는 달라지지 않았을까? 최소한 시대를 앞서간 혁명가이자 겉과 속이 다른 간신배라는 두 얼굴의 사나이는 되지 않았으리라 생각한다.
옥의 티
p. 282
허균이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며 ‘이단(異端) 사설(邪說)의 극치’라고 꾸297짖었다.
⇒ 허균이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며 ‘이단(異端) 사설(邪說)의 극치’라고 꾸짖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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