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등 사회를 넘어서기 위한 제도적 상상력
왜 한국에서는 경제성장과 민주화에도 불구하고 사회 갈등이 심화?확대되어 왔는가?
갈등 관리에 무능한 한국 민주주의의 결함은 개별 영역에서 어떻게 나타나는가?
한국에서 합의주의 제도는 어떤 형태로 시행되었고, 왜 실패했나?
한국형 갈등 조정 양식이 자리 잡지 못하게 하는 제도적 장애물과 대안적 제도는 무엇인가?
사회 갈등은 불가피,
문제는 이를 어떻게 관리할 것인가
사회 갈등에 대한 이론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갈등을 비정상적 사회병리 현상으로 보고, 이를 없앨 방법을 찾는 입장과, 갈등을 인간과 사회의 존재론적 본성에 따른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파악하는 입장이다. 후자는 현실적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는 갈등을 어떻게 관리?조정할지에 관심을 갖는다. 이 관점에서 한국의 사회 갈등, 특히 경제적 이익의 분배 및 재분배 과정에서 나타나는 집단들 간의 갈등을 보면, 갈등 관리에 무능한 한국 민주주의의 결함이 드러난다. 이때 한국의 절차적 민주주의가 다수제 민주주의 모델을 따른다는 점에 주목할 만하다. 절차적 민주주의는 다수제 민주주의와 합의제 민주주의로 유형화할 수 있다. 웨스트민스터 모델로도 불리는 다수제 민주주의는 다수대표제, 양당제, 단일 정당 정부와 같은 정치제도를 특징으로 하며 정치권력의 집중을 야기한다. 한국은 미국을 통해 다수제 민주주의와 대통령제 등을 들여왔는데, 권력 견제 기제를 제대로 마련하지 못해 대통령이 독주할 가능성이 높고, 정당정치 또한 심각할 정도로 저발전된 상태에 머물러 있다.
이 책에서는 정치 레짐 차원에서 협의주의 정치를, 생산 레짐 차원에서 조정 시장경제를, 복지 레짐 차원에서 보편주의 복지국가를 이야기한다. 그 바탕에는 합의제 민주주의가 있다. 하지만 중앙집권, 재벌, 서울 중심주의, 승자 독식 등 고도로 위계화된 한국 사회의 정치?경제?사회적 환경을 고려했을 때, 이는 여전히 낯선 제언이다. 서구에서 합의제 민주주의가 자리 잡기까지, 극렬한 이데올로기적 대결에 대한 염증과 공멸할지 모른다는 위기의식 아래 좌파와 우파가 ‘혁명’과 ‘착취’를 포기하기로 합의한 뒤에도 숱한 시행착오가 있었음을 떠올린다면 더욱 그렇다. 도발적이고 무모하기까지 해 보이는 ‘한국형 합의제 민주주의’ 해법은 과연 가능한 기획일까?
민주화 이후 25년은
갈등의 심화·확대의 기록
2007년 12월 학습지 교사의 노동 3권 보장을 요구하며 장외 투쟁을 시작한 이래 어느덧 1천6백 일을 넘긴 재능교육 노조, 22명의 희생자가 나온 쌍용자동차, 파업을 시작한 지 1,848일 만에 대법원에서 부당해고가 인정되었음에도 여전히 복직되지 못한 상태로 1천9백 일을 넘긴 콜트-콜텍 노조, 무관심 속에서 140여 일 남짓 파업을 이어가고 있는 국민일보, 해군 기지 건설을 반대하는 이들이 연행으로 시작해 연행으로 하루를 끝마친다는 제주 강정 등 현재 한국 사회에서 해결될 낌새가 없는 갈등의 현장을 떠올리기란 어렵지 않다. 갈등은 광장과 거리에서 분출되기만 할 뿐, 함께 협상 테이블에 앉아야 할 또 다른 주체는 자신을 드러내려 하지 않는다. 심지어 갈등은 회피하거나 억압되어야 할 현상으로 여겨지기까지 한다. 경제성장과 민주화를 경험했음에도 사회 갈등을 다루는 방식은 성숙되지 못한 채 갈등 자체만 심화?확대되어 온 것이 민주화 이후 25년의 기록이다. 한국의 사회 갈등을 관리?조정해 사회 통합을 유지할 수 있는 방안은 더욱 비중 있게 탐색될 필요가 있다. 이 책은 한국 사회 갈등의 역사와 성격, 제도적 원인이 무엇인지를 규명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한국 사회의 갈등 구조는 어디서 비롯되었나
권위주의 아래 억압당하고 배제되었던 사회집단의 요구는 민주화를 계기로 폭발적으로 분출되며, 이를 적극적으로 표출하는 것은 민주주의 원리에 가깝다. 그러나 합의를 바탕으로 관리?조정되지 못한 갈등은 사회적 비용만 증가시키며 민주주의 발전을 저해할 수 있다. 갈등은 적절하게 다뤄질 때 사회를 진보로 이끌지만 잘못 다뤄지면 분열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양날의 검과 같다. 좋은 정치는 갈등을 어떻게 관리하는지에 달려 있다. 한국 사회에 걸맞은 갈등 조정 양식을 개발하고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우선 갈등의 기원을 추적해 한국 사회 갈등의 구조와 성격을 밝힐 필요가 있는데, 이는 1장에서 논의된다. 냉전 반공주의의 한계 위에서 이뤄진 국가 형성, 권위주의와 노동 배제를 내용으로 하는 산업화, 이익과 가치의 다원화에 조응하지 못한 채 협애한 이념적 대표 체제 위에서 달성한 민주화라는 조건이,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는 한국 사회 갈등의 주요한 구조적?제도적 특성을 만들었다. 그리고 이는 분배 친화적인 자본주의와 참여 보장적인 민주주의를 가로막음으로써 갈등을 해소하거나 완화하는 정치적 메커니즘이 자리 잡지 못하게 했다.
문제는
경제적 분배와 재분배를 둘러싼 갈등
1997년 외환 위기 이후 한국 경제의 구조적 변화가 급격히 진행되면서 양극화가 심화되었다. 그전까지 사회경제적 갈등을 완화하고 흡수하는 유일한 기제는 성장주의로 표현되는 정치적?사회적 합의였는데, 1990년대 이후 신자유주의적 개혁이 도입되고 대자본의 이익 집중화와 이익 배분의 계층화가 나타나면서 성장주의적 갈등 관리의 한계가 명확해졌다. 대자본 친화적이고 노동 배제적인 연성 시장 국가 체제는 사회경제적 갈등을 다룰 능력을 상실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사회경제적 갈등을 증폭하고 이를 정치 불안으로 확장하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성장주의 이데올로기적 편향과 성장 지향적 목표 설정에서 벗어나지 못한 정부의 사회경제정책은 대자본의 실적을 강화하는 보조 수단으로 전락했다. 국가정책이 오히려 사회 통합에 필수적인 제도적 기반의 내재적 발전을 가로막는 장애 요인이었던 셈이다. 이런 상황에서 경제주체의 자율적인 갈등 조정을 기대하기는 어려운데, 이에 관해서는 2장에서 서술된다.
양극화 현상이야말로 사회 통합을 어렵게 하는 근본 원인이라는 점에서, 경제적 분배와 재분배를 둘러싼 갈등 문제를 확인할 필요가 있다. 3장에서는 경제적 분배와 관련된 노동 체제에 초점을 맞춘다. 정치적 민주화와 노동자 대투쟁을 경험한 1987년 이후 국가와 자본에게서 상대적으로 자율적인 민주 노조인 전노협이나 민주노총 같은 상층 노조 조직이 형성되었으나, 1997년 외환 위기 이후 노동은 국가와 자본이 펼친 공세적인 ‘유연화의 정치’에 직면했다. “노동문제를 둘러싼 노사정 간 노동 정치의 제도화 양식”을 가리키는 노동 체제는, 정치적으로 수세적 입장에 처한 노동이 만성적인 구조 조정의 압력에 시달리는 특징을 보인다. 한국의 국가와 자본은 공권력을 동원하는 등 강압적 방식으로 노동을 억압하거나, 노사관계개혁위원회와 노사정위원회 같은 사회적 합의 기구를 통한 헤게모니 정치의 방식으로 노동의 대항 정치를 무력화함으로써 노동의 요구를 굴절시켜 왔다.
한국의 복지 체제를 다루는 4장에서는 경제적 재분배 문제를 살핀다. 한국의 사회보장제도는 낮은 노동비용을 토대로 비교 우위를 유지하려는 기업의 요구를 수용하며 발전해 왔다. 이와 더불어 사회보장에 따른 재정 부담을 최소화하려는 정부의 태도가 사회보장제도의 발전을 결정적으로 제약했다. 국가는 사회복지 공급 측면에서 소득 이전자, 서비스 공급자, 재원 보조자 역할에는 소홀한 채, 규제자 역할에 치중했다. 결국 한국의 복지 체제는 정규직과 비정규직 노동자 간 지위의 차별을 낳았고, 공공 부조 수급권자와 (이마저 누리지 못하고 낮은 시장 임금으로 살아가는) 비수급 빈곤층을 차별하는 빈곤층의 이중화를 초래했다. 현재 한국의 복지 체제는 시장의 불평등을 완화하고 사회 통합을 꾀하는 데 효과적이지 못할뿐더러, 사회적 갈등을 관리하는 데도 취약하다.
대안은
갈등 조정 친화적인 한국형 합의제 민주주의
경제적 분배와 재분배 문제를 둘러싼 갈등 문제를 다루는 데는, 노동을 대표하고 보편주의 복지를 구현하려는 의지와 실력을 지닌 정치 세력이 요구된다. 강제력과 지속성이 보장되지 않은 채, 개별 영역에서 대안을 모색하거나 행정적 개선을 시행하는 것만으로는 한계가 명확하기 때문이다. 제도적 대안을 이야기하는 5장에서는, 민주주의란 기본적으로 절차적 민주주의라는 입장을 밝힌다. 민주주의의 제도나 절차가 국가나 사회에 의한 시장 조정과 개입을 쉽고 편하게 함으로써 경제 민주화를 항시적으로 촉진하고 보편적 복지의 확장을 지속적으로 압박하는 경향이 강하다면, 사회경제적 민주주의 혹은 실질적 민주주의가 실현될 가능성이 높고, 분배를 둘러싼 사회 갈등 문제가 심각해질 가능성은 낮아진다는 것이다.
저자들은 사회 갈등의 조정과 관리가 좀 더 체계적이고 공평하며 무엇보다 더 ‘민주적’으로 이뤄지는 곳은 다수제 민주주의보다 합의제 민주주의 유형이 발달한 곳이라고 본다. 복지 자본주의라고 불리는 유럽형 ‘조정 시장경제’가 발전하고 보편주의 복지국가가 형성?지속되는 현상은 대개 합의제 민주주의 국가에서 목격된다는 점에서, 한국형 합의제 민주주의를 발전시켜야 한국 사회의 갈등 문제를 안정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결론을 도출한다. 합의제 민주주의의 핵심 요소는 사회경제적 약자를 포함한 모든 시민들의 이익과 선호를 있는 그대로 대변할 수 있는 유력 정당들의 상존을 구조화하는 제도와 절차다. 이 같은 ‘포괄의 정치’는 협의주의 정치의 핵심 제도 요소인 비례대표제, 온건 다당제, 연립정부 등이 갖춰진 곳에서 제대로 작동하는데, 특히 비례대표제야말로 가장 기본적인 정치제도임을 강조한다. 제도적 상상력이 변화의 시작이 될 수 있다는 저자들의 믿음은, “제도는 언제나 중요한 변수”라는 말로 표현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