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가 가지고 있는 최고 또는 최악의 재산은 그의 아내이다.”
영국의 역사가 토마스 풀러의 말처럼, 아내가 남편의 소유물과 같이 취급되던 적이 있었다. ‘깨지기 쉬운 약한 그릇’과도 같았던 아내들은 남편의 보호 밑에서 순종하며 살아야 했다. 그렇지만 오늘날의 아내들은 어떤가? 재산의 일부였던 아내들이 직접 재산을 소유할 수 있게 되기까지, 더 나아가 여성이 참정권을 가지고 오르가슴을 느낄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기까지 걸린 2천 년의 시간 동안 감춰져 있던 그녀들의 진짜 이야기를 듣는다!
왜 ‘아내’의 역사인가?
《나는 아내와의 결혼을 후회한다》, 《아내가 결혼했다》, 《결혼은, 미친 짓이다》 등 아내, 결혼을 소재로 한 책들이 인기를 끌고 있다. 제목만으로도 파격적인 이 책들의 유행은 단순히 자극적인 내용 때문만은 아니며, 그 기저에는 반드시 결혼을 할 필요는 없다는 비혼의 등장과 동거율, 이혼율 증가로 대표되는 가족 해체 현상이 있다. 법적 가족의 위기와 더불어 1인 가족, 한부모 가족, 재혼 가족 등 다양한 가족 형태의 공존은 가족의 전통적 개념에 혼돈을 일으키고 있다. 가족이라는 틀은 계속해서 변화하고 있으며 동시에 구성원들에게 전통적 역할 대신 새로운 정체성의 정립을 요구하고 있는데, 대표적인 경우가 아내를 둘러싼 문제들이다.
현대 이전의 아내는 어머니, 안주인의 또 다른 이름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동질적인 정체성을 지니고 있었다. 아내라면 누구나 아이를 낳았고, 가사를 책임지며 남편의 안식처로서 돌봄 노동을 제공하였다. 그러나 현대의 아내들은 더 이상 집 안에만 있으려 하지 않는다. 자신의 일을 갖고 경제 활동에 참여하여 남편과 동등한 사회적, 경제적 주체가 되었고, 아내이지만 아이를 낳지 않는 여성도 있다. 새 시대의 새로운 아내상은 어디까지 변화할까? 아니, 아내라는 자리가 계속 존재하기는 할까? 이러한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 이 책은 지금껏 드러나지 않았던 아내들의 이야기를 역사의 무대에 세우려고 한다. 당대의 모범 또는 파격이었던 아내들의 이야기를 통해 앞으로 새롭게 정립될 가족의 모습을 예측해 본다.
고결하고도 발칙한 역사, 아내들의 은밀한 내면을 읽다
지금까지 아내, 그리고 그녀들의 결혼 생활을 다룬 책들은 대부분 특정 시대에 특정 측면을 매우 전문적으로 다루고 있어 일반 독자들의 손에 닿기가 쉽지 않았다. 이런 이유로 저자는 일반 독자들도 흥미롭게 읽을 수 있으면서 가볍지만은 않은, 아내들의 이야기를 역사적 흐름에 따라 하나씩 풀어놓는다. 「로미오와 줄리엣」의 모델이 된 다인 부부, 귀족이면서도 가정 형편 때문에 수녀가 됐다가 결혼 뒤 아내의 모범으로 칭송받았던 루터의 아내 카테리나, 영화 「헬프」에서처럼 차별에 시달리며 백인 가정의 가사 도우미로 일했던 흑인 아내들 등이 그 주인공이다. 저자는 이들의 삶을 통해 아내와 연관된 사회적 코드들을 읽어낸다. 다인 부부에게서는 셰익스피어 시대 영국의 비밀 결혼 관행을, 카테리나에게서는 종교개혁이 여성의 삶을 어떻게 바꿨는지를 알 수 있듯이 말이다. 더불어 로마 시대부터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혼외정사, 동성애, 피임 등에 얽힌 아내의 사연들은 여성의 성 생활과 내면의 성적 욕망에 대해서도 엿볼 수 있게 해준다.
성경부터 《코스모폴리탄》까지, 다양한 자료로 보는 아내의 모든 것
모범적인 아내들은 정말 행복했을까? 전통적인 역사 연구에서 사료의 권위는 왕실과 행정 기관의 기록, 유명인들의 저서 등 ‘공식 기록’이 가졌다. 그렇지만 공식 기록은 주로 남성의 영역이었고 그로 인해 여성들의 목소리는 역사에서 은폐되거나 삭제될 수밖에 없었다. 대외적으로 모범적이라 칭송받았던 아내들이 정말로 그러했는지, 그래서 그녀들의 삶이 행복했는지 우리로서는 확인할 길이 없다. 그래서 이 책은 공식 기록과 더불어 아내들의 일기와 편지, 아내들과 관련된 광고문, 신문 칼럼, 풍자만화, 잡지 등 사료의 범위를 확장하는 미시사적 접근 방식을 취하고 있다. 저자 매릴린 옐롬은 고대에 쓰인 성경부터 현대의 잡지 《코스모폴리탄》까지, 카이사르의 또 다른 아내 클레오파트라부터 필명으로 신문의 피임 논쟁에 참여했던 무명의 아내들까지 폭넓은 자료를 섭렵하여 아내들의 지위, 역할 등이 언제 어떻게 형성되었으며 시대에 따라 어떻게 변해 왔는지를 설명한다. 이러한 시도는 보다 더 진솔한 아내들의 이야기를 내면에서 끄집어내어 역사의 영역으로 공식화한다는 의미를 지닌다.
1~4장: 성경 시대~시민혁명기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2천 년의 시간 동안 아내들에게 일어났던 사회문화적 변화를 종합적으로 규명한다. 「창세기」 속 야곱은 라헬을 아내로 얻기 위해 7년 동안이나 그녀의 집에서 봉사해야 했다. 처녀라는 재산에 대한 소유권을 그녀의 아버지에게서 남편으로 이전하기 위해 비용을 지불하는 과정으로 볼 수 있는데, 성경 시대 이후에는 결혼할 때 아내가 지참금을 가지고 가는 풍습으로 변했다. 중세 시대부터는 결혼이 교회의 영역에 들어가면서 부부의 성생활은 자녀를 출산하기 위한 목적으로 한정되었다. 그러나 신학자 남편을 둔 엘로이즈가 수녀원에서 평생을 보내고 수녀원장이 되어서까지도 남편과의 성생활을 잊지 못했던 것처럼, 중세 아내들의 내면에는 성적 쾌락이 은밀하게 존재?다.
청교도 혁명은 프로테스탄트들의 아메리카 대륙 이주를 촉진했는데, 남편을 따라 이주했던 미국 최초의 여류 시인 앤 브래드스트리트도 그 중 하나였다. 그녀가 남긴 기록들을 통해 우리는 식민지 여성들에게 황폐한 환경을 견디고 가정에 정서적 안정감을 유지시켜 줄 수 있도록 신체적, 감정적으로 강인해져야 하는 동시에 공적으로는 ‘약한 그릇’으로서 어울리는 여성적 외모를 가꾸고 남편에게 의존할 것이 주문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혁명기의 아내들은 남편의 정치적 입장에 따라 매일 사선을 넘나들었지만 결말에는 조금씩 차이가 있었다. 프랑스 혁명 뒤 남편이 망명했던 라 빌리루에 백작 부인은 감옥에 투옥되었지만 “누구도 남편의 행동을 이유로 그 아내를 기소할 수 없다”고 주장해 무죄로 풀려났고, 법정에서 남편의 변호를 맡아 그를 무죄로 만들기까지 했다. 반면 귀족 부인 엘리자 드 메네르빌은 화려한 삶을 버리고 유럽 각지를 떠돌면서 보석을 팔고 부채에 색을 칠하고 프랑스어를 가르치면서 가정을 부양해야 했다.
5~10장: 빅토리아 여왕 시대~현대
빅토리아 여왕 시대부터는 사랑이 결혼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가 되었지만 여전히 혼전 성관계는 금기시되었다. 결혼식장에 들어섰을 때 이미 임신 중이었던 여성들도 있었지만 대부분 하층민이었고 여전히 중상류층 커플들은 결혼 뒤로 성관계를 미뤘다. 같은 시기 미국에서는 골드러시 바람을 타고 서부로 개척자들이 몰려들었는데 생존의 위기 속에서 모두가 성별에 상관없이 무슨 일이든 해야 했으므로 남녀의 전통 영역을 구분하는 이데올로기가 약해지기 시작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입센의 희곡《인형의 집》이 등장했다. “난 모든 것에 앞서 인간이야”라는 주인공 로라의 대사는 아내와 엄마의 역할에 앞선, 개인으로서의 여성이라는 존재의 출현을 예고했다.
19세기 말, 간호사였던 마이클 생어는 불법 낙태로 고통 받는 여성들을 보게 된 이후 성 행위와 임신에 대한 대중 강연을 하며 산아 제한 운동을 벌였다. 인위적 피임이 기독교 교리에 어긋난다는 반대자들에 의해 감옥에 갇히는 수모까지 당해야 했지만, 원치 않는 임신으로 고통스러워하는 여성들의 소망을 막을 수는 없었다. 제2차 세계대전은 아내들에게 위기인 동시에 새로운 기회였다. 생명의 위협도 있었지만, 전장으로 나간 남성들의 빈자리를 대신하여 기혼 여성들이 일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남성만의 철옹성으로 여겨졌던 조선소에서 용접공, 설비공의 영역까지 아내들이 차지했을 정도로 전쟁 시기 기혼 여성의 사회 진출은 대단한 것이었다. 1953년 처음 출간된 킨제이 보고가 사회에 일으킨 반향은 대단했다. 20세기 중반 이래 미국인의 성생활을 연구한 킨제이는 미국인의 3분의 1 이상에게 자위, 혼전 성교, 혼외정사의 경험이 있다는 조사 결과를 내놓음으로써 미국 사회에서 전통적, 종교적, 도덕적 교의가 허상에 불과함을 폭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