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야 학자 묵점 기세춘 선생이 쓴 우리나라 최초의 실학사상 개론서다. 봉건 조선 사회를 혁신하고자 했던 선각자들의 고민과 사상을 총정리했다. 한백겸, 이수광, 허균, 김육, 김만중, 유형원, 이익, 홍대용, 박지원, 박제가, 정약용, 최한기 등 조선 실학자들이 남긴 글을 종교, 철학, 정치, 경제, 사회, 문학, 과학 등으로 정리하고 다시 주제별로 요약하여 분석함으로써 시대적 소명으로서의 실학사상이라는 큰 줄기로 관통하게 했다.
선인의 미담이나 기술론과 청렴한 공직자상에 초점이 맞춰져 미시적 담론에 그치고 있는 오늘날 실학 관련 저작물들의 소아병적인 경향을 지양하고, 실학자들이 품었던 혁명적 사상을 총망라하며 그 속에 담긴 의미를 짚었다. 중세적인 성리학이 유일 지배 이념이었던 시대에 실학사상이 어떻게 태동하여 발전했는지 세밀하고 날카롭게 논하며 여전히 개혁이 필요한 오늘에 귀감이 될 수 있게 한다.
묵점 기세춘 선생의 우리나라 최초 실학사상 개론서
재야 한학자 묵점 기세춘 선생은 그동안 동양 고전의 오역과 왜곡을 걷어내고, 재번역 운동에 온 힘을 쏟아왔다. 철저한 고증과 비판적인 시각으로 역대 종교 권력과 정치권력의 입맛에 따라 왜곡된 동양 고전의 본모습을 드러냈다. 특히 이 책에는 기세춘 선생의 남다른 한이 서려 있다. 4·19 혁명 세력인 저자는 1961년 5·16 군부 쿠데타가 일어나자 입산하여 마르크스와 정약용의 서적을 읽으며 울분을 달래야 했다. 3년 후 서울에 올라와 공직 생활을 시작하면서 군사 정부의 근대화 드라이브에 주목하고 그들의 서구적 트랙 외에 동구적 트랙에도 관심을 두고 민족 경제적 트랙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이에 정약용 등의 실학사상과 동학 혁명 정신이 근대화의 동력이 될 수 있다는 신념으로 1965년 동학혁명연구회를 조직했다. 그러나 이 연구회가 통일혁명당의 전선 단체로 몰려 좌절하고 만다. 기세춘 선생은 그 후 줄곧 운동권 주변을 맴돌면서도 동양의 좌파인 묵자를 비롯하여 성리학과 실학에 이르기까지 동양 고전 전반을 깊이 연구하였다. 이런 연고로 10년 전에 실학사상을 정리하며 초고를 작성했고, 초고를 토대로 동양 고전 강의를 하면서 손질해나갔다. 이렇게 50년 동안 천착한 결과물이 바로 이 책이다.
이 책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이 끝난 17세기 초부터 동학 혁명이 일어난 19세기까지 조선 실학자들의 사상을 체계적으로 조감한다. 실학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학자의 연구가 축적되어 있고 그 성과물도 다수 출판되어 있다. 그러나 그동안 우리가 접한 실학은 실학에 관한 일부였을 뿐이다. 오늘날 실학 관련 서적은 선인의 미담이나 기술론과 청렴한 공직자상만을 다루고 있으며, 특정한 부문에 대한 연구에 그치고 있다. 우리에게는 ‘실학 논문집’은 있으나 ‘실학사상 개론’은 없었다. 여기에 이 책의 의의가 있다. 실학자들의 고매한 인격과 품성만을 부각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들의 시대적 고민과 사상을 총망라해 종합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실학사상은 왜란을 두 차례 겪으며 조선인들이 피 흘린 땅에서 피어났다. 국토가 잿더미가 되고 인구의 절반이 희생되자 300여 년간 조선의 지배 이념으로 군림했던 성리학에 대한 회의와 반성에서 실학사상이 태동한 것이다. 이러한 실학의 결실이 동학 혁명이라고 한다면 실학자들을 청백리로만 다루는 학문적 경향은 적실하지 않을뿐더러, 위험하기까지 하다. 왕조 시대에 청렴했던 공직자와 히틀러나 일본 총독 밑에서 청렴했던 공직자가 청렴한 것은 같더라도 사상은 같지 않듯이, 청렴함과 사상은 별개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또한 청렴함만 강조된다면 그들의 다양한 사상은 은폐되고 만다. 예컨대 박학한 천재 허균을 말하면서 그의 기괴한 행적만을 다룬다면 그의 또 다른 일면인 호민豪民 혁명론은 묻혀버린다. 양면을 볼 수 있어야 그의 기괴한 행적도 구체제에 대한 저항이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이에 기세춘 선생은 한백겸, 이수광, 허균, 김육, 김만중, 유형원, 이익, 홍대용, 박지원, 박제가, 정약용, 최한기 등 실학자 개개인의 특성을 정확히 짚어내고 각각의 사상적 주요 논지를 면밀히 분석하여 시대적 소명으로 관통하는 실학사상이라는 큰 줄기로 체계화한다.
조선은 스스로 개혁할 수 없었는가?
조선 땅에는 근대화의 맹아가 있었다
일부 보수 인사들은 일제 강점기를 거치며 전근대적인 우리나라가 근대화되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친일 사관으로 바라본다면, 근대화 과정에서 우리는 주체가 되지 못하고 철저하게 객체화된다. 그렇다면 조선은 스스로 개혁할 수 없었는가?
기세춘 선생은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조선 땅에도 근대화 사상이 있었음을 실학사상을 통해 밝힌다. 실학자들은 중세적인 성리학을 지양하고 새로운 나라를 위한 근대?인 학문을 지향했다. 17세기, 조선의 지배 세력은 없어진 명나라를 섬기기 위해 당시 패권을 차지하고 있던 청나라를 배척하여 서양 문물의 유입이 막혀 고립된 미개국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러나 재야의 개방적인 선각자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한백겸은 반청 사상이 주류였던 당시에 청나라의 고증학을 수입하여 평양성 함구문 밖의 기자箕子가 남긴 전제田制를 발견하고 고증함으로써 ‘동이東夷는 사람과 짐승의 중간’이라는 주자의 화이론華夷論을 무색하게 하고 나아가 조선이야말로 선진국이었음을 과시하였다. 이로써 농자農者 유전有田의 전제 개혁을 염원하던 실학자들을 고무시켰다.
이수광은 명나라에 사신으로 왕래하면서 습득한 새로운 문물과 지식을 종합하여 왜란 직후인 1614년에 세계 최초의 백과전서인『지봉유설芝峰類說』을 지었고 1634년에 간행했다. 『지봉유설』은 영국, 프랑스, 일본 등 동서양 각국을 소개하며 그들의 군함, 무기 등 기술과 생활양식, 그리고 서양의 천주교, 세계 지도, 천문학을 전했다. 이는 1752년에 제1권이 발행된 프랑스 백과사전보다 120여 년 앞선 쾌거였다. 백과전서가 계몽사상의 기념비적인 사건으로 세계 역사에 기록될 정도로 중시되는 것은 중세 시대에는 천시하던 세속적이고 잡다한 지식이 학문으로 인정됐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계몽이고 근대성이다.
박지원은 대문호였으며 그의 작품은 한결같이 근대적이고 민중적이었다. 그는 선비의 학문에 농?공?상에 대한 학문을 포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선비들이 시문과 도덕학에만 매달릴 것이 아니라 농업과 공업과 상업의 이론도 연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그는 자동차 공업을 육성해야 한다고 힘주어 주장했다.
박제가는 기술의 발달은 작은 국토를 넓게 사용하는 것이며, 기술이 낙후되면 작은 국토를 더 작게 사용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기술의 진보만이 나라가 잘사는 길임을 역설한 것이다. 이를 위해 유사들을 생산 무역 현장으로 하방해야 한다는 혁명적인 주장을 펴기도 했다. 만약 박제가의 시무책이 실행되었다면 조선은 서양과 동시대에 산업화를 시작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러한 근대성은 최한기에 오면 극대화된다. 최한기는 조선 최초의 유물론자로 처음으로 경험 과학을 수립한 학자다. 그는 인식이 추측과 실험에서 이루어지는 것으로 보았으므로 실험이 없는 학문을 허학虛學으로 단정했다. 특히 이기理氣를 신비한 형이상학이 아니라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형이하학적 실체로 보아 천天과 신神도 측험測驗할 수 있는 물건으로 보았다. 이로써 조선에 최초로 근대적인 과학으로서 천문학과 의학이 성립할 수 있었다.
그러나 조선은 이러한 수많은 실학자의 고민과 노력에도 불구하고 모화사상에 젖은 선비들의 당쟁이 격화되어 나라를 혁명하지 못하고 1905년에 일본에 합병되고 말았다. 하지만 실학자들의 주체성과 근대화를 위한 고민을 결과론으로만 읽어 축소해서는 안 될 것이다. 실학자들이 조선의 주류가 되지 못해 결과적으로 조선을 개혁하는 데 성공하지는 못했으나, 선각자들의 사상이 근대화의 초석이 되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성리학을 해체하고, 공자의 구학을 뛰어넘는 신학을 꿈꾸다
실학은 성리학의 실효성이 의심받으며 그에 대한 반성으로 태동했다. 그렇기 때문에 실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성리학의 어떠한 부분에 반대하며 시작되었는지 이해해야 한다. 실학자들은 이기론理氣論과 성性이 곧 이理라는 성리론으로 대표되는 성리학의 형이상학을 대체로 비판했으며, 성리학의 커다란 두 흐름인 관념론적 주리론主理論과 유물론적인 주기론主氣論 중 주기론적 성향이 강했다.
반계 유형원은 선험론적인 성리를 인정하는 보수적인 측면이 있는 반면 인식론에서는 경험론적이었다. 이는 성리학의 현학적 기풍을 반성하고 공자 본래의 경세학의 실학적 기풍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신념 때문이었다.
이익은 자연 과학에 관심을 두고 탐구했다. 그러므로 전통적인 이기론과 근대 과학이 일치되지 않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기론을 폐기해야 했지만 끝까지 버리지 않고 연구했다. 기세춘 선생은 잠정적으로 이익의 이기론을 이원론理元論과 기원론氣元論을 통합한 ‘태극太極 일원론一元論으로 이해한다. 이익이 주리主理와 주기主氣를 모두 옳다 말하고 이황의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에 찬성하기 때문이다.
담헌 홍대용은 『의산문답』에서 기존 개념 체계와 이를 이론적 기초로 하는 구체제의 허구성을 실증 과학으로 공박했다. 지동설 등 천문학적 신지식을 설명하고, 이를 기초로 기일원론氣一元論과 인물동성론人物同性論을 주장했으며, 기존의 음양설을 비판하고 술수가들이 만들어낸 오행설과 하도낙서설河圖洛書說이 기괴한 망발임을 논증한다. 그는 종래 이기론자들처럼 기를 신비화하거나, 이기론理氣論과 의리론義理論을 연관하는 것을 반대한다. 그러므로 유가들의 지킷이었던 이理는 선善이고, 기氣는 악惡이고, 양陽은 존尊이고, 음陰은 비卑라는 사상을 인정하지 않는다. 이것은 성리학의 기본 구조를 허물어버리는 것이었다.
박지원은 서양 과학을 접하면서 우주는 티끌 같은 물질이 쌓여 생성되었음을 알았다. 그러므로 천제를 부인했고, 기일원론에 더욱 경도되었다. 그는 이기理氣의 불멸성을 인정하지만 이理는 기氣의 운동 법칙으로 간주한다. 우주뿐 아니라 역사도 물질세계처럼 변증법적인 운동이라고 믿게 되었다. 이 점에서는 율곡의 주기론과 다를 바 없다. 그러나 연암은 기를 형이상학적이고 추상적인 것으로 보지 않고 티끌처럼 구체적인 물질의 최소 단위로 보았고, 음양의 두 기에서 정신이 나온다고 보았다는 점에서 유물론적이다. 이러한 유물론은 혜강에 의해 체계화되고 정설로 제기된다.
다산 정약용은 성리학을 해체해버린다. ‘성性’은 기호嗜好에 불과하고 이理는 옥의 무늬와 결이라는 뜻에 불과한 것이라고 논증한다. 따라서 인성을 이기론으로 설명하는 것을 반대한다. 형이상학으로서 이기론은 일부 수긍하지만 그것은 인성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그가 말하는 기발일도설氣發一途說은 당위적 인륜을 말한 것이 아니고 존재적 물리만을 말하는 것이므로 퇴계, 고봉, 율곡의 사칠론四七論과는 전혀 다르다. 다산은 성리학의 기본 구조를 부정하고 이기론을 새롭게 재구성함으로써 새로운 철학 체계를 세우려 했다.
실학자들의 이러한 철학 사상은 최한기에게 와서 종합된다. 최한기는 동양 최초로 공자 이래의 구학을 청산하고 새로운 철학 체계를 수립한 유물론 철학자였다. 그래서 스스로 자신의 학문을 ‘기학氣學’이라고 명명했다. 천지 만물을 유일자인 기氣의 운행 조화로 보는 우주 일체론이다. 이로써 구학에서 말하는 무형의 신神, 도道, 성性, 이理를 통틀어 유형의 기氣로 통합했다. 그는 성리학에서 말하는 도와 이理는 다만 기 활동의 흔적이라고 말한다. 또한 성리학에서 말하는 기氣는 천지 활동 운화의 기氣가 아니라 형기形氣와 혈기血氣를 말한 것뿐이라고 비판한다.
문장가 연암과, 청백리 다산을 잊어라!
그들은 조선의 혁명가였다
연암 박지원이나, 다산 정약용을 모르는 이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문장가로서의 연암, 청백리로서의 다산을 넘어선 다른 모습은 우리에게 낯설다. 문장가와 청백리만으로 그들을 접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세춘 선생은 이를 넘어서 연암과 다산을 혁명가로 읽는다.
연암은 대문호였으며 그의 문학 작품은 모두 근대적 사상의 결과물이었다. 그는 조선 사회가 혁명적으로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법고창신法古創新을 주장했다. 연암은 성리학을 새롭게 해석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못했다. 그는 청나라와 일본이 받아들이고 있던 서양 문물에 대해 개방적이었다. 그러므로 집권 세력인 서인의 집권 명분이자, 당시 국시와 같았던 반청反淸 북벌론北伐論을 반대하고 북학론北學論을 주장한 북학파의 영수로서 수난과 가난을 감수했다. 철학적으로 성리학과 대립하는 새로운 담론 체계를 구성하려 하지는 않았으나 문예 혁명 운동을 통해 이를 함축적으로 제시했다. 그래서 근대적인 문체의 창신을 이루었고, 그 속에 새로운 사상의 씨앗을 심었다. 지배 세력이 연암의 문체창신 운동을 공격한 것은 문장 형식의 혁파 때문만이 아니라 문장에 깃든 혁명성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기세춘 선생은 이러한 맥락으로 문장가 연암을 읽어야 연암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라 말한다.
다산은 청렴한 공직자였으나, 10여 년의 짧은 관료 생활 이후 당시의 불온서적으로 취급받던 글을 쉬지 않고 써내려갔다. 그의 『경세유표經世遺表』의 ‘유표遺表’란 죽은 후에 유언으로 임금에게 올려달라는 뜻이었다. 그러므로 다산을 청렴한 공무원의 표상이나, 수원 화성을 지은 훌륭한 건축가로만 평가하는 것은 한쪽으로 치우친 안일한 자세라고 할 수 있다. 다산은 40세부터 75세까지 35년간 500여 권의 책을 쓴 학자이며 거기에서 진면목이 드러난다. 그는 성리학을 개혁하여 새로운 경세학經世學을 정립하려 했던 탁월한 사상가였다. 일제日帝는 다산의 『경세유표』를 동학 혁명의 교과서로 지목했었다.『경세유표』는 민생 중심으로 개혁할 새로운 제도를 제시했고, 이상 사회의 구상을 보여주는 신아구방新我舊邦을 표방하였다. 정약용은 평등사상, 군왕 선출론, 민회의를 제안한 혁명적인 정치 사상가였다. 다산이야말로 조선의 루소였던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를 청렴만 공무원이라는 코드로만 읽어야 할 것인가?
이것이 정녕 300년 전의 생각인가?
새로운 시대를 열망했던 조선 선비들의 혁명적 사상!
우리나라에서는 언제부터 지구가 구 형태로 자전한다고 생각했을까? 또, 언제부터 태생적인 성별 차별과 신분 차별에 의구심을 표했을까? 강화도조약 이후 일본과 서구의 문물이 들어오면서부터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래서 300년 전 실학자들의 사상을 읽으면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 지금은 당연하게 생각하는 과학적 지식과 보편적 사상이지만 당시 봉건 사회에서 이러한 생각이 나왔다는 것은 혁명이었다.
-유형원, 신분 상승의 기회와 노예 해방을 논하다
전통적인 유가들은 신분의 세습과 차별을 통치의 근간으로 삼았고, 사농공상의 신분 세습을 위해 사민四民 분업 정책을 고수했다. 성리학은 사민의 역할을 확실히 구분하는 질서를 옹호했지만 공맹의 노예적인 신분 세습과는 달리 사士의 세습을 인정하지 않고, 농민에게 사士 계급으로의 신분 상승을 용인했다. 그러나 극소수의 부유한 자영농 이외에 소작농의 자녀는 교육받을 기회를 보장받지 못했으므로 실질적으로는 신분 이동이 불가능한 형편이었다. 이에 실학자 유형원은 토지의 평등 분배로 자영농을 육성하고 교육 기회를 보장하여 계급 상승의 기회를 열어주려고 했다. 그는 교육의 확충과 학생의 입학 선발, 학비 보조 문제를 중시했다. 특히 무상 교육에서 더 나아가 고등교육의 경우는 학업 기간에 가족을 부양할 수 없으므로 그들에게 전답을 주어 가족의 생계를 걱정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그는 조선 봉건 사회에서 최초로 노비 해방을 주장했다.
-홍대용, 그래도 지구는 돈다
홍대용은 성리학이 허학虛學임을 깨닫고 진보적이고 실학적인 묵가墨家로 개종하려 했다고 고백한다. 그는 과학에 남다른 관심을 보였으며, 혼천의를 제작하고 산수 교과서를 집필한 과학자였다. 1700년대에 지구가 자전한다고 주장했고, 이러한 생각은 그의 벗 박지원에게로 이어졌다. 홍대용은 종교적인 천제의 개념을 부정하며, 그 대신 자연법칙을 가치의 기준으로 삼았는데 이는 훗날 최한기에게 계승되었다. 홍대용의 지동설이 그의 독창적인 발견인지 중국을 통해서 알게 된 것인지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풍수설이 유행하던 당시에 지동설을 주장한다는 것은 획기적이었다.
-최한기, 민에 의한 민을 위한 정치, 세계 평화, 남녀평등 교육을 말하다
최한기는 민民에 의한 민民을 위한 정치를 주장한 민주주의자였다. 그는 민중이 좋고 싫은 것으로 선악을 결정하는 ‘공론公論’, 인민과 더불어 공동으로 다스리는 ‘공치公治’, 공론에 의한 선거로 인재를 선발하는 ‘공선公選’, 국가 사무를 온 국민이 함께 처리하는 공제共濟를 주장했다. 또한 그는 오륜五倫에 세계 평화(兆民有和) 항목을 추가하여 육륜六倫으로 하자는 세계주의자이기도 했다. 그래서 동도서기론東道西器論을 구체화해 문자와 도덕은 중국으로 과학 기술은 서양으로 통일하자는 주장을 펴기도 했다. 다만 나라마다 통용되는 풍속과 제도와 관례를 존중하고 의복, 음식, 주택 등은 전통을 지키도록 하자고 제안했다.
이처럼 세계주의자인 최한기는 성별, 인종, 국가를 초월한 두루 평등한 사랑을 주장한 묵자의 겸애사상을 그대로 수용하여 유교의 혈연적이고 차별적인 사랑인 인애仁愛를 극복한다. 그래서 여자의 교육도 남자와 다를 것이 없다고 말하며 유교의 남녀 차별을 배격했다.
-조선의 실학자들, 토지 분배를 논하다
유형원은 조선 학자로서 최초로 국가 제도의 전반적인 개혁을 주장했는데 그중에서도 핵심은 토지 제도의 개혁이었다. 요지는 토지의 공공소유제, 즉 공전제公田制를 시행하여 1인당 1경의 토지를 평등하게 분배하자는 것이다. 반계를 시작으로 이후 실학자들은 토지 공유제를 강력히 주장하고 왕에게 직접 건의함으로써 공론화하기에 이르렀다.
이익은 영업전제永業田制를 주장했다. 영업전제란 나라에서 집집마다 살림에 알맞게 영구히 소유할 토지의 일정한 수량을 정해주고 그 정해진 일정량의 영업전은 매매를 금지하고 그 수량을 초과한 농토는 매매를 자유롭게 한다는 것이다. 이런 제도를 오랫동안 시행하면 누구나 영업전을 확보할 기회가 주어져 점진적으로 균전均田이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정약용은 초기에는 정전제와 균전제를 시행 불가능한 것으로 생각했다. 균전제를 대신하는 방안으로 여전제閭田制를 주장했다. 여전제란 토지를 마을 공동체의 공동소유로 하여 공동 경작, 공동 분배를 원칙으로 하는 마을 공산제였다. 그러나 만년의 저술인「정전의井田議」에서는 화폐를 발행하여 유상 구매하는 방법으로 정전제를 시행하자는 주장을 폈다.
실학은 박물관 전시용이 아니다
유교적 도덕론은 여전히 우리의 행동을 규제하고 있다. 가시적 남녀 차별과 신분 차별은 없어졌지만, 누구도 우리 사회에 성별과 직업에 차별이 없다고 단언하지 못한다. 보수적 유교 사상이 기저에 깔려 존재하는 오늘날, 사회 모순을 혁파하려 했던 연암과 다산을 필두로 한 실학자들의 사상은 우리에게 과거가 아니라 현실을 직면하게 한다.
조선 실학자들의 사상은 시대상에 비해 너무도 조숙했다. 공리공담의 주류 학풍을 벗어나 서구의 과학 지식을 수용하고 유물론므 지향했으며, 남녀 차별과 반상 차별, 토지 분배까지 논했다. 무상 교육을 주장했던 유형원의 주장은 반값 등록금이 사회 이슈로 등장한 지금까지도 생명력이 있다. 이처럼 사회에 만연한 보수적 패러다임을 버리고 새로운 사회를 꿈꾸었던 실학자들의 혁명성은 변화를 꿈꾸는 우리에게 지금도 유효하다. 일제 미제의 잔재에서 허우적거리는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한 것이 바로 주체성과 개혁성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우리가 실학을 박물관에 묻어두지 않고, 세상 밖으로 꺼내야 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