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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영선

정조 대왕이 가려 뽑은 사기의 백미

사마천 | 일빛 | 2012년 02월 24일 첫번째 리뷰어가 되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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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영선

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12년 02월 24일
쪽수, 무게, 크기 807쪽 | 1,384g | 176*245*40mm
ISBN13 9788956451633
ISBN10 895645163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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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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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저자 소개 (1명)

저 : 사마천 (司馬遷,자장(子長))
중국 전한前漢 시기의 역사가. 공자의 『춘추』 이후 가장 오래된 역사기록 『사기』으로 중국 역사학의 아버지이자 사성史聖으로 추앙받는다. 사마천은 기원전 145년 무렵 하양夏陽(지금의 산시성 한청)에서 출생했다. 다만 그 스스로는 출생지를 하양이라 하지 않고 용문龍門이라 했다. 훌륭한 유년기 교육을 받으면서 10세에 고문을 줄줄 외웠고 이후 태사령이 된 부친 사마담을 따라 장안에서 살면서 배움의 폭을 넓혔다. 2... 중국 전한前漢 시기의 역사가. 공자의 『춘추』 이후 가장 오래된 역사기록 『사기』으로 중국 역사학의 아버지이자 사성史聖으로 추앙받는다. 사마천은 기원전 145년 무렵 하양夏陽(지금의 산시성 한청)에서 출생했다. 다만 그 스스로는 출생지를 하양이라 하지 않고 용문龍門이라 했다. 훌륭한 유년기 교육을 받으면서 10세에 고문을 줄줄 외웠고 이후 태사령이 된 부친 사마담을 따라 장안에서 살면서 배움의 폭을 넓혔다.
20세 때 천하를 견문하고 돌아와 몇 년 뒤 낭중?中 벼슬에 임명되어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당시 본격적인 지방 순시에 나선 한 무제를 수행하며 깊은 신임을 받았다. 이때 다양한 제례를 지켜본 사마천은 훗날 『사기』를 저술하면서 「봉선서」라는 편을 따로 마련하여 역대 제왕들의 제사 행위의 실체를 비판적으로 기술했다.
기원전 112년 사마천은 다시 무제를 수행하여 서쪽 지방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민정을 살폈으며 이듬해 서남이(오늘날의 쓰촨성, 구이저우성, 윈난성) 지방에 파견되어 실질적으로 지방을 관찰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원봉 3년(기원전 108) 사마천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 태사령太史令에 임명되었다. 38세의 나이로 태사령이 된 사마천은 조정에서의 직무에 충실한 한편, 아버지의 유훈에 따라 역사서 편찬을 위한 준비에 박차를 가했고 기원전 104년 새로운 역법, 태초력을 개정하기도 했다.
그러던 중 이릉의 사건이 발생했다. 흉노에게 항복한 이릉을 비호했다가 사마천은 부형의 참사를 당해 『사기』 저술이 중단될 위기에 처했다. 궁형 이후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고통스러운 고뇌와 선택을 강요받은 사마천은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수치와 고통을 극복하고 인간과 제도와 세상과 역사에 대한 균형감을 체득했다. 사마천의 죽음(기원전 91년 무렵)은 아직까지 논쟁거리로 남겨져 있다. 정사 중에는 사마천이 죽은 해와 사인에 대한 기록이 없다. 그래서 많은 연구자들은 사마천이 『사기』를 완성한 뒤 별 탈 없이 생을 마쳤기 때문이라고도 말하고 사마천의 죽음이 분명치 않기 때문이라고도 주장한다.
편자 : 정조
조선의 제22대 왕으로 재위 기간은 1776년∼1800년이다. 이름은 산, 자는 형운(亨運), 호는 홍재(弘齋)라고 한다. 영조의 둘째아들인 장헌세자의 아들로 영조 35년에 세손으로 책봉된다. 당쟁을 싫어하던 정조는 즉위한 후에 왕권을 강화하기 위하여 영조 기본정책인 탕평책을 계승하였고, 규장각을 설치해 인재들을 모으는 등 왕정 수행의 중심기구로 삼았다. 정조가 통치하던 시대를 조선의 문예부흥기라고 부르기도 하는...
교정 : 정약용
조선 후기의 실학자로 호는 다산(茶山)이다. 1783년 회시에 합격하여 암행어사·참의·좌우부승지 등을 역임했고, 1793년에는 서양식 축성법을 기초로 수원성 수축에 기여하기도 했다. 그를 아끼던 정조가 세상을 떠나고 신유교난과 황사영 백서사건으로 유배되었다. 그곳에서 『목민심서』,『경세유표』등을 저술한다.
교정 : 박제가
조선 후기의 실학자. 호는 초정(楚亭)이다. 19세 때 박지원의 문하에서 실학을 연구, 1776년 이덕무·유득공·이서구 등과 함께 저술한 『건연집(巾衍集)』이 청나라에 소개되어 조선시문사대가(朝鮮詩文四大家)의 한 사람으로 알려졌다. 저서에는 『명농초고』,『정유집』등이 있다.
역자 : 노만수
대학 시절 연작시『중세의 가을』로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당선되었다. 성균관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한 후 경향신문사에서 기자 생활을 하다가 동아시아를 공부하기 위해 일본에서 수학한 후, 중국으로 건너가 북경대학에서 수학했다. 현재는 성균관대학 동아시아학술원에서 동아시아학을 연구하고 있으며, 서울디지털대학 문예창작학부 초빙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이 외에 동아시아권 전문 번역가 및 출판 기획과 창작 활동을 겸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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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평

사마천의 『사기』를 한 권으로 읽는다!
정조 대왕이 엄선하고,
다산 정약용이 교정?교감을 본 『사기』의 정수(精髓)
『사기영선』을 최초로 완역하다.

『사기영선(史記英選)』은 정조(正祖)가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에서 그 정수(精髓)만을 친히 가려 뽑아 엮어 후학들에게 규범으로 삼고자 한 책이다. 이 책은 1796년(정조 20년)에 조선 초기에 있었던 주자소를 복설하여 정유자(丁酉字)로 간행하였고, 태백산, 오대산, 적성산 사고(史庫)에 보관케 하면서 영남과 호남, 관서의 감영에 명하여 번각(飜刻)하여 바치게 하였다. 처음에 정조는 이 책을 『어정사기영선(御定史記英選)』이란 이름의 8권 5책으로 나누어 편찬하여 간행하게 하였는데, 『사기』에서 27편, 『한서(漢書)』에서 8편을 가려 뽑아 모두 35편의 글이 실려 있다. 현재는 6권 3책이나 8권 5책의 활자본 또는 목판본 등 여러 판본이 전한다.

정조대왕이 가려 뽑고, 정약용과 박제가가 교정과 교감을 본 『사기영선』

정조는 어려서부터 책읽기를 좋아하였고, 그는 국왕이 되어서도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또한 스스로를 ‘호학군주(好學君主)’라 자부하며 군사(君師)라는 이름에 걸맞게 엄청난 저작 활동을 꾸준히 하였는데, 자신의 문집 『홍재전서(弘齋全書)』를 남긴 유일한 왕이기도 하다. 그의 문집은 180권 100책 10갑의 방대한 분량으로 어느 학자에 견주어도 손색이 없을 정도다.

정조는 또한 규장각을 세우고 여기에 편찬 기능까지 두어 수천 권의 책을 편찬하거나 혹은 편찬토록 독려하였는데, 이러한 책들은 크게 규장각 관료를 비롯한 국왕 측근의 신료들에게 분담하여 편찬하게 한 ‘명선서(命撰書)’와 정조 자신이 직접 선발의 기준을 마련하고 엮어 편찬한 ‘어정서(御定書)’로 구분할 수 있다. 그 어정서의 가장 대표적인 예가 바로 『사기영선』이다.

지금 전하는 『사기영선』은 정조가 1795년(정조 19년)에 사마천의 『사기(史記)』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 글 27편과 반고의 『한서(漢書)』에서 가려 뽑은 8편의 정수(精粹)를 덧붙인 것으로 모두 35편의 글이 실려 있다. 『홍재전서』에는 “정조 19년(1795년) 12월, 『사기영선』을 완성하다”라고 적혀 있기도 하다. 정조는 정약용과 박제가에게 교정과 교감을 보게 한 후 2년에 걸쳐 1797년에 『사기영선』을 편찬하는데, 정약용(丁若鏞)의 『자찬묘지명(自撰墓誌銘)』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1796년) 겨울이 되자 약용을 불러 규영각에 들게 하여 이만수(李晩秀), 이재학(李在學), 이익진(李翼晋), 박제가(朴齊家) 등과 함께 『사기영선』을 교정토록 하고 자주 마주 대하시며 서명(書名)을 의논하시었다. 날마다 진기한 음식을 내려 배불리 먹여주시고, 또 쌀, 땔감, 꿩, 젓갈, 홍시, 귤을 비롯한 아름답고 향기롭고 귀한 것들을 하사해 주셨다.”

박제가(朴齊家)도 자신의 문집 『정유각집(貞표閣集)』에서 “정조 21년 정약용과 함께 『사기영선』을 편찬했다”고 한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도 있다.

“정조 20년 병진(1796년)에 정유자(丁酉字)로 『어정사기영선(御定史記英選)』을 인쇄하여 배포하였다. 이어 정조는 1797년에 명을 내려 주자소(鑄字所)에서 인쇄하여 올린 『어정 사기영선』을 신하들에게 나누어주고, 태백산, 오대산, 적상산 세 산성에 나누어 보관하게 하였다. 그리고 영남, 호남, 관서에 명하여 번각 목판본으로 간행해 올리게 하였다.”

정조는 정약용과 박제가에게 교정과 교감을 보게 하였고, 특히 다산은 정조의 명을 받고 영의정 번암(樊巖) 채제공(蔡濟恭)에게 가서 서명(書名)을 정하여 받아오기도 하였다. 이 책은 바로 그 『사기영선』을 최초로 번역한 책이다.

어려서부터 책을 좋아했고 엄청나게 다독을 했던 정조 역시 이런 역사서에 깊은 관심을 보인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방대한 역사서를 누구나 읽기는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에 정조는 그 가운데서도 정수만을 가려 뽑는 작업을 한 것이다.

이를 위해 정조는 처음에 『사기』에서 본기(本紀) 1편(『항우 본기』), 세가(世家) 2편(『소상국 세가』 『유후 세가』), 열전(列傳) 22편(『백이전』 『관중·안영전』 『오자서전』 『소진전』 『맹상군전』 『평원군전』 『신릉군전』 『범저전』 『악의전』 『굴원전』 『장이·진여전』 『회음후전』 『역생·육고전』 『원앙전』 『오왕비전』 『위기후·무안후·관부전』 『급암전』 『이장군전』 『자객전』 『유협전』 『골계전』 『화식전』)과 자서(自序) 1편(『태사공자서』)을 뽑아 6권으로 『사기영선』을 만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현재 전하는 『사기영선』은 반고의 『한서』에서 8편(『소무전』 『이릉전』 『곽광전』 『하후승전』 『위상·병길전』 『소망지전』 『조충국전』 『매복전』)과 『사기』에서 『흉노전』 1편을 더하여 권7과 권8이 보태진 것이다.

정조는 이를 초계문신(抄啓文臣)*으로 선발되었던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초정(楚亭) 박제가(朴齊家), 이만수(李晩秀), 이익진(李翼晋) 등으로 하여금 1796년 10월에 함께 규영각에 숙직하면서 교정·교감을 보게 한다. 그렇다면 이토록 정성을 쏟으며 정조가 『사기영선』을 편찬한 까닭은 무엇이며, 그 의미는 무엇일까?

첫째, 광범위한 내용을 간략하게 가려 뽑아 그 백미만을 보여주려고 하다

『사기영선』은 원문의 내용을 그대로 게재하였고, 한 곳도 고쳐 쓴 흔적이 없다. 다만 원문의 내용을 그대로 게재하고 있으나 의도적으로 조금씩 뺀 곳이 보인다. 그 하나가 열전 가운데 두 사람 이상을 합전(合傳)한 것에서 한 사람의 전만을 수록한 경우이다. 이때도 합전된 인물들을 종합하여 평한 논찬은 대체로 빼지 않고 기재하였다.

또 하나는 내용이 풍속을 해치거나 불경스러우면 한 편의 열전에서 일부 내용을 빼기도 하였다. 예를 들면 『흉노전(匈奴傳)』 중간 부분에 “흉노전에 뽑힌 것은 대개 그 문장을 취한 것이고, 묵돌(冒頓)의 일을 특별히 제거한 까닭은 그 악행을 구별하고자 했기 때문이다”라는 간주가 붙어 있다. 묵돌이 그의 아버지 두만 선우(頭曼單于)를 따라 사냥을 나갔다가 명적(明笛)을 쏘아 죽이고, 이어 그의 계모와 동생을 죽인 사실을 삭제한 까닭은 그 내용이 해괴망측하기에 정조가 의도적으로 삭제를 하였던 것이다(옮긴이의 한글 번역본에서 이를 작은 괄호 안에 번역함).

이는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思悼世子)를 잃었지만 할아버지 영조(英祖)에게 보였던 효심에서도 알 수 있듯이 정조 스스로가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내용이었으리라. 그의 세심한 인간적인 풍모를 느낄 수 있는 대목이 아닌가 싶다.

또한 『사기영선』은 일체의 평이나 해설을 붙이지 않았다. 이는 정조가 “유박반약(由博反約 : 광범위한 내용을 간략하게 가려 뽑다)”, 즉 그 백미만을 보여주자는 취지로 편찬했기 때문이다. 주석 역시도 없다고 봐야 할 정도로 매우 간략하게 붙였을 뿐이다. 이는 정조가 원문을 통해 자유로운 사고와 창의적인 사고를 하도록 바랐던 평소의 생각이 그대로 드러난 것인데, 정조는 평소에 주석보다 원문이 중요함을 강조하고 특정한 학설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해석할 수 있는 길을 열고자 하였다.

정조가 다스리던 시대는 성리학(性理學)의 발달이 정점에 이르고 청나라의 고증학(考證學)이 도입되던 시기였다. 그러나 정조는 항상 학자들에게 특정한 시각에 입각해 주석이 붙어 있는 경서를 볼 것이 아니라 원문을 자유롭게 해석하며 유학(儒學)의 본지를 찾을 것을 권했다. 따라서 정조는 원문 그대로의 경서(經書)들을 끊임없이 편찬하게 했는데, 『사기영선』 또한 그 맥을 같이 하고 있다. 이는 정조가 인간적인 풍모뿐만 아니라 학문과 출판의 측면에서는 학자로서의 면모를 여실히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물론 정조가 일련의 선본(選本)을 편찬해 나가는 동안에 신료들의 반대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1794년(정조18년) 초계문신 유태좌(柳台佐)는 선본 편찬은 간편한 것만 좋아하는 얄팍한 마음과 학자들에게 지름길로만 재빠르게 가려는 간사한 마음을 조장할 수 있다고 하였지만, 정조는 예전보다 서적이 엄청나게 늘어난 상황에서 이 모든 분량의 서적을 전부 다 읽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며 간략한 선본을 통해 여러 책을 섭렵하게 하는 것이 하나의 방법이라 여겼다.

이와 더불어 정조는 『홍재전서』 『춘저록(春邸錄)』에서 ‘번잡함보다 간략함을 좋아하는 것이 인간의 성정’이고, “공자도 사대(四代) 이천 년 동안의 역사와 시를 『서경』과 『시경』 등으로 간략하게 편집하였다”며 경서의 원문만을 싣거나 원문을 요약한 선집을 간행했다. 선집 간행에 대해서 정조의 생각을 엿볼 수 있는 말이 있는데, 『일득록』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지금의 사람들이 책을 읽기 싫어하는 습속이 있고, 그 전서(全書)를 읽기를 두려워하기에 핵심을 간추린 선본을 통해 그 근원에 다다를 수 있기를 바란다.”

그나마 핵심 구절을 가려 뽑아내어 학습하는 데 편리하도록 하려는 정조의 간절함이 배어있다.

둘째, 정조가 『사기영선』으로 문장의 법도를 보이려고 하다

정조는 『대학』, 『논어』, 『맹자』, 『중용』, 『시경』, 『서경』과 같은 유교 경전을 먼저 읽어야 효(孝)·제(悌)·충(忠)·신(信)의 사덕(四德)과 오상(五常)을 올바로 세우고, 다음에 『사기』를 익히고 나아가 당송팔대가의 문장을 익힌다면 문장이 저절로 순정해질 거라고 여겼다.

정조는 당시의 학자들 가운데 다수가 명말청초(明末淸初)의 패관소설(稗官小說 : 민간에서 떠도는 이야기를 주제로 한 소설)이나 서학(西學)에 경도되는 것므 비판하였지만, 근본에 해당하는 정학을 진흥시키면 말단일 뿐인 서학은 저절로 사라질 것이라 여겼다. 그래서 정조는 조선의 문풍을 어지럽히는 패관잡기류 책들을 수집하여 불태우자는 유태좌의 건의에 대해서도 정학(正學)을 밝혀 유학(儒學)과 정주학(程朱學)을 익히게 하면 되지 그들의 서적을 불태울 필요는 없다고 하였다. 정조는 타락해가는 문체를 순정한 문체로 바르게 되돌려 놓겠다는 의지로 1792년 문체반정(文體反正)을 단행하기도 하였다.

『사기영선』을 정조가 친히 문장의 모범을 보인 글들을 가려 뽑아 편찬한 뜻은 당대에 급부상한 패사소설체(역사를 소설과 같은 형식으로 꾸며서 쓰는 것)에 대한 대응책으로 『사기영선』이 문장의 법도를 세우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기를 바랐기 때문이기도 하다. 정조가 『한서』에서 여러 전을 가려 뽑았을 때의 일이다. 경연관에서 신하들이 『조황후전(趙皇后傳)』이 빠진 것을 안타깝게 여기자, 정조는 『일득록』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이 전(傳)은 참으로 빼어난 작품이지만 중간의 사실 가운데 좋지 못한 곳이 많이 있고, 문체가 염야(艶冶)하고 섬교(纖巧)하여 후세 소설가의 길을 열었다. 이 전을 특별히 뺀 것은 참으로 호오(好惡)와 취사(取捨)의 뜻을 부친 것이다.”

이와 같이 『사기영선』은 정조가 자신의 문학관과 문장관에 의거하여 신중히 선발하였음을 알 수 있는데, 정조의 이런 노력은 당대 문단의 사조를 선도하여 일정한 준칙을 정하고자 한 것이다. 특히 정조는 앞서 말한 대로 당대에 이르러 만연한 패사소설체를 일소하고 문장의 순정화(純正化)를 꾀하고자 하였다. 그 결과 순정한 문장의 모범으로 『사기』와 『한서』를 바탕으로 가려 뽑은 『사기영선』을 편찬한 것으로 보인다.
정조는 이렇게 편찬한 『사기영선』을 자주 문인들에게 하사하였는데, 예를 들면 1797년 1월에 제주(濟州) 승보시(陞補試)에 장원한 세 사람에게 『사기영선』을 내려주었고, 9월에는 능행(陵幸) 행렬이 지나갔던 열 곳의 읍(邑)의 유생(儒生)을 대상으로 한 별시(別試) 선발자들에게도 『사기영선』을 하사하였다.

셋째, 만인의 본보기가 되는 인물을 주로 가려 뽑다

『사기영선』에 수록된 인물을 보면 대체로 공신, 충신, 명재상, 지사, 협객, 청백리, 인인(仁人 : 어진 자), 포의지사(布衣之士 : 벼슬을 하지 않은 가난한 선비), 학자 등 나라에 보탬이 되고 만인의 귀감이 될 만한 인물들이다. 물론 오왕(吳王) 비(틪)처럼 황실의 핏줄이면서 반란을 일으킨 자나 두영(竇창)과 전분(田밸)처럼 외척으로 정치 기강을 문란하게 한 자나, 장이와 진여처럼 욕심에 눈이 멀어 친구에서 원수라는 비극적인 관계가 되고 만 자도 일부 수록하고 있다. 이로 미루어 보면 정조는 유교적 통치 질서에 입각하여 역사적으로 본보기가 될 만한 인물의 예를 비교하여 보여줌으로써 문교 정치를 하고자 했던 듯싶다.

정조는 『일득록』에서 “제왕의 학문은 마땅히 경전(經傳)을 위주로 하여야 하지만, 『사기』 또한 우선적으로 빨리 숙독해야 한다. 대개 성왕(聖王)과 명군(明君)의 정치 방법과 정치 책략, 명신의 뛰어난 보좌와 드넓고도 위대한 공적을 어린 나이 때부터 익히고 알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라고 말하였듯이 역사(『사기영선』)를 통해 스스로를 포함해 신하들에게 교훈의 전달을 일차적 목적으로 삼았던 것이다. 이미 말했듯이 『일득록』에서 다음과 같은 견해도 밝혔다.

“지금의 문체는 너무나 나긋나긋하고 부드럽고 연약하여 그 거꾸러짐이 마치 바람 앞의 버들가지와 같고, 그 문체의 겉만 화려하고 알맹이가 없는 부화(浮華)함과 가볍기가 마치 물거품 위의 꽃과 같기에 이 『사기영선』을 편찬하여 문단의 붉은 깃발로 삼고자 한다. 『한서』의 경우에는 문체가 단아하고 엄숙하고 장중하고 깊다. 때문에 『하후승전(夏侯勝傳)』, 『소망지전(蕭望之傳)』, 『매복전(梅福傳)』 등 여러 전을 그 아래에 부록으로 붙였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조황후전(趙皇后傳)』 같은 경우에는 그 이야기가 후세의 패총(稗叢) 문체를 열어놓은 것이라 곧바로 없애 버렸다.”

정조는 궁중의 추악한 비사를 담은 『조황후전』을 뛰어난 문장의 기준으로 뽑았다가 아예 삭제하였다. 문체가 후대의 폐관 소설(稗官小說)을 싹트게 한 점과 그 내용이 추악하여 차마 입에 올릴 수 없는 탓이었다. 기괴하고 신기한 소품(小品) 문장을 싫어하고 남녀 간의 비밀스런 애정 비사를 입에 올리기 싫어한 정조의 성격을 엿볼 수 있다.

위 글로 미루어 보아 정조는 『사기영선』에 외척들의 세가(世家)를 뺀 이유도 능히 짐작할 수가 있을 터이고, 총애하는 수빈 박씨(綏嬪朴氏)의 아버지 박준원(朴準源)이 외척이라고 해서 단숨에 큰 벼슬아치로 삼지 않았듯이 특히나 외척의 발호를 경계한 정조의 정치 행위를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듯싶다. 그래서 정조는 역설적으로 『위기·무안후 열전(魏其侯武安侯列傳)』을 『사기영선』에 실으면서 위기후(魏其侯) 두영과 무안후(武安侯) 전분의 이야기를 반면교사로 삼고자 했을 것이다.

두영과 전분은 모두 학식과 덕망이 뛰어나지 못했으나 외척 관계를 이용해 요직에 오르고 외척이라는 이유로 작위를 계속 유지할 수 있었다. 둘 사이에는 본래 원한이 없었지만 조정에서 총애를 받기 위해 싸우다 결국에는 모두 패가망신하고 만다. 전분과 두영, 이 두 외척 귀족 집단 간의 모순을 통해 한나라 초기 봉건 통치 집단의 교만과 잔인함을 드러내고자 했던 사마천의 의도대로 정조도 외척이나 종실 측근의 부정적인 측면을 널리 알리고자 했을 것이다. 정조가 매복이 국정을 쥐락펴락하는 외척 왕봉(王鳳)을 탄핵하기 위해 올린 상소문을 높이 친 까닭도 아마도 이런 이유가 아닌가 싶다.

정조가 『한서』에서 가려 뽑은 인물들을 보면 이릉(李陵)과 소무(蘇武)와 조충국(趙忠國)은 애국적이고 비장한 의지를 지닌 애국지사이고, 곽광(?光)과 위상(魏相)과 병길(丙吉)은 사직의 운명을 지탱한 충신들이고, 하후승(夏侯勝)과 소망지(蕭望之)와 매복은 굳센 의지와 고결한 정신을 지닌 학자들이다. 제왕으로서 정조는 이와 같은 인물들이야말로 『한서』의 정신이 담긴 인물이라고 보았을 것이고, 조선에서도 이러한 인물을 닮은 신하가 나와 주기를 바랐을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원래 『한서』 『이광·소건전(李廣蘇建傳)』에는 이릉 다음에 소무가 나오는데, 정조는 『사기영선』에서 소무를 이릉 앞에 두었다는 것이다. 정조는 이릉의 흉노 투항이 불가피한 선택이든 자발적인 선택이든, 오점을 남긴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기에 끝까지 절개를 지킨 소무를 흉노에 투항한 이릉보다 높게 평가한 것이었다. 이 외에도 조선이란 나라의 최고 경영자로서 정조는 왕권 강화를 위해 신권을 견제해야 한다는 측면에서 곽광을 뽑았을 것인데, 이는 제왕으로서 나라를 다스리기 위한 노회한 정치가로서의 면모를 느끼게 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넷째, ‘소통과 의리’를 『사기영선』으로 보여주고자 하다

정조는 노회한 정치가라기보다는 공신, 정치, 경제를 실제 다루면서 보여준 그의 모습은 진정한 정치가로서의 면모를 더 많이 엿볼 수 있는데, 그의 개혁 정책 가운데 탕평책(蕩平策)이라든지 백성들의 삶을 진심으로 보살피려 했음을 역사를 통해 알 수 있다.

특히 정조는 “멀리 있는 사람은 법을 두려워하여 감히 말하지 않고 가까이 있는 신하는 나의 뜻을 따를 뿐 말하고자 하지 않는다”며 신하들의 간쟁을 북돋았다. 이는 『사기영선』에서도 드러나는데, “사람의 신하된 도리로서 마땅히 직언을 하고 정론을 펼치는 것을 꺼리지 않으면 그만이지 구차하게 황제의 뜻에만 아부”하지 않은 신하의 전범으로 하후승을 높이 추켜세운 것은 간언만큼 중요한 것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조선에서는 북방의 변경 민족 문제를 논의할 때, 조충국(趙充國)이 ‘둔전책(屯田策)’이라는 장구한 책략을 펼쳐 강족(羌族)을 스스로 굴복하게 한 이야기를 자주 언급하고 있다. 정조도 반고가 『서전(泯傳)』에서 “병법의 상책은 싸우지 않고도 적을 항복시키는 데 있다. 영평후(營平侯 : 조충국)는 백발이 성성한 나이 일흔여섯 이후에 큰 전공을 세우고 개인의 영달보다는 장구한 전략을 내놓았다. 강족을 공격하라는 선제의 명을 따르지 않고 대신 둔전책을 내놓아 황제의 믿음을 얻었던 것”이라고 밝힌 것처럼, 올곧은 장군의 전형인 조충국에게 큰 매력을 느꼈을 것이다.

정조 역시 언로가 뚫려야 양식이 있고 지조 있는 지식인이 결국 좌절하지 않고 시대의 병폐를 정확하게 진단하는 충언을 올릴 수 있음을 알았기에 ‘비판적 지식인’들을 충직한 신하의 전범으로 삼았다. 그래서 간언의 대명사 격인 굴원(屈原)과 악의(樂毅)와 원앙(袁햠)과 역이기(켦食其)와 육고(陸賈)를 충간을 잘한 충신의 거울로 삼으려고 이들을 『사기영선』에 포함시킨 것이다. 나아가 정조는 데릴사위인 순우곤(淳于?)이나 난쟁이 가수였던 우전(優朴)과 같은 비천한 골계가들의 혜안과 기지가 빛나는 우스갯소리도 간언으로 높이 사며 그 역사적 공적을 인정해 주었다. “감히 군주의 싫어하는 낯빛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옳다고 생각하는 바를 나타내었으며, 자기 몸을 돌아보지 않고 나라를 위해 장구한 계획을 세웠다”고 칭찬한 원앙의 직언은 정조에게도 따끔한 일침이 되지 않았을까? 또한 “군주의 장점은 따르고 잘못된 점은 바로 잡아주어야만 위아래가 서로 친해지는 것”임을 몸소 보여준 관중과 안영 역시 위아래로 소통을 잘한 사회 통합의 달인이었기에 『사기영선』에 꼭 적합한 인물이었을 터이다.

특히 정조는 춘추전국 시대와 한나라 때에 지배층이 교유하기를 꺼렸다는 자객(섭정?政과 형가荊軻)과 서민 협객 주가(朱家), 시골 협객 극맹(劇孟), 저?거리 협객 곽해(郭解)의 전기까지도 소중하게 여긴 까닭은 그들이 하는 짓이 비록 지방의 치안을 어지럽게 하기도 하였지만, 강개한 성품으로 곧은 절개와 의리를 만천하에 펼쳐 보이고 반드시 ‘언행일치’를 하는 기풍을 세웠다는 긍정적인 가치가 있었기 때문이다.
정조 역시 아버지 사도세자가 죽은 후 할아버지 영조의 보살핌을 받았지만, 정조는 세손 시절에 자신을 감시하는 눈길을 의식하며 살았고, 좌의정 홍인한(洪麟漢), 정후겸(鄭厚謙) 등의 반대파들로 인해 항상 불안한 처지에 놓여 있었다. 정조가 왕위에 오른 후 그런 정조를 보호한 서명선(徐命善), 홍국영(洪國榮), 정민시(鄭民始), 이진형(李鎭衡) 등과 ‘동덕회(同德會)’을 만들어 매년 친목 모임을 가졌고, 또한 단종과 효종에게 충성한 인물들 가운데 사육신(死六臣)과 송시열(宋時烈) 등을 표창하며 그 의리를 높이 산 것도 아마도 이런 이유였을 것이다.

또한 장사치들의 전기인 『화식열전(貨殖列傳)』을 『사기영선』에 포함한 까닭은 그들이 종사하던 일이 천직이었지만 ‘부해지면 덕을 행하라’는 것을 몸소 보여준 범려, ‘내 집의 밭과 가축에서 얻은 것이 아니면 먹지도 입지도 않고’ 고을의 모범이 된 선곡(宣曲 : 섬서성 서안시 서남쪽) 임씨(任氏)의 예처럼 ‘화식(貨殖 : 부의 증식)’이 왕도 정치의 한 일환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정조는 사회 지도층 벼슬아치나 그 어떤 방면에서든 성공한 자들이 솔선수범하여 사회의 모든 구성원이 동의하는 의로움, 더 나아가 사회의 모든 구성원을 위한 의로움을 실천하여야만 그것이 바로 공익의 추구이고 이러한 공익이 실현되어야만 사회 통합이 가능하다는 자신의 통치철학을 『사기영선』을 통해 보여주고자 한 의도를 엿볼 수 있다.

실제 『사기영선』을 읽다보면, “모곤(茅坤 : 명나라 문학자)이 이른바 『화식전(貨殖傳)』을 읽으면 부를 추구하고 싶고, 『유협전(游俠傳)』을 읽으면 목숨을 가볍게 여기고 싶고, 『이장군전(李將軍傳)』을 읽으면 곧바로 나가 싸우고 싶다”라고 할 정도로 마음에 와 닿는다.

다섯째, 사람의 겉모양이 아니라 됨됨이가 중요함을 알리고자 하다

이 밖에도 『홍재전서』에 나오는 정조의 어록을 보면 정조가 『사기영선』에 왜 그러한 인물을 가려 뽑았는가를 추론해 볼 수가 있다.

“말(馬)을 잘 알아보는 사람은 그 빠름을 볼 뿐 색이 검거나 누렇거나 따지지 않으며 독서를 잘 하는 사람은 그 뜻을 본받지 그 문사(文辭)를 본받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선비를 잘 취하는 사람은 그 마음을 취하지 그 모양을 취하지 않는다. 선비의 마음을 보아 등용해야 한다.”

정조는 이렇게 인재는 겉모양이 아닌 알맹이가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며 먼저 사람 됨됨이, 즉 수신(修身)이 잘 된 인물을 선호하였다. 그래서 의로움과 양보라는 도덕적 정신주의가 드높았던 백이와 숙제를 『사기영선』에 포함시키고, 또 ‘청백리(淸白吏)’였던 급암(汲菴)을 높이 샀을 것이다. “사대부는 청렴해야 하니 청렴한 후에야 득실을 따지는 기틀에 물들이지 않을 수 있으며 사대부는 공정한 뒤에야 현명함과 사악함의 분별을 잘 할 수 있다”라고 한 정조의 어록에서도 급암은 물론이고 명재상 소하(蕭何)와 안영(晏창)을 『사기영선』에 넣은 까닭을 짐작해 볼 수 있다. 그들이 청렴하고 공정하고 지혜롭고 현명한 신하의 표상이었기 때문이다.

정조가 강조했던 또 하나의 정치 원칙은 ‘명검론(名檢論)’이다. 명검이란 명분에 맞게 자신을 검속하는 절제의 논리이다. 정조는 벼슬아치가 명검을 할 줄 모르면 사회 통합에 해로운 존재라고 간주하며, “사대부가 평소에 의리를 밝히고 행검(行檢 : 자기 절제)을 닦으면 조정의 일처리가 반드시 해볼 만할 터인데 장부 처리나 하면서 일하는 듯이 하는 것은 말단이다”라고 하였다. 이는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는 것인데, 이런 측면에서도 장량(張良)과 소하와 안영과 악의와 굴원과 역이기와 육고와 같은 충신들은 모범적인 벼슬아치의 거울로 인식되었다.

아울러 정조는 “의리(義理)란 공(公)으로서 사사로이 치우쳐서는 안 되는 것이다. 세상에는 혹시 기회를 타고 자신이 중히 여겨짐을 빙자하여 자신의 사(私)를 끼고 남을 빼앗는 데까지 이르는 자가 있으니, 그 역시 불인(不仁)이 심한 것이다”라며 ‘공과 사가 분명한’, 즉 공정한 통치 철학을 실현하고자 했다. 그래서 한신과 같은 인재를 몰라보고 자신의 일가붙이에게만 상을 주고, 자기가 예뻐하는 자만을 왕과 제후로 삼은 항우의 공평하지 못한 처사를 제왕 통치의 반면교사로 삼았던 것이다.

또한 정조는 “인심이 날로 변하고 세속의 도리가 날로 어지러워지고 조정이 날로 비루해지며 풍속과 습관이 날로 병드는 것은 모두 나아가는 것을 어렵게 하고 물러가는 것을 쉽게 여기는 이른바 진퇴가 확실한 선비의 존재가 없기 때문”이라며 선비의 진퇴론을 중요시하기도 했다. 정조가 진퇴를 잘못해 토사구팽(兎死狗烹)을 당한 회음후(淮陰侯) 한신(韓信)과 오자서(伍子胥)를 『사기영선』에 포함시키면서도 절묘한 진퇴로 소하처럼 의심을 받거나 수감이 되지 않으면서 좋은 결말을 맺은 장량을 가려 뽑은 까닭이 아닌가 싶다.

“나무를 잘라 바둑판을 만들고 가죽을 잘라 공을 만드는데도 법도가 있지 않음이 없으니 하물며 글에 있어 서랴?”라는 송나라의 정치가이고 문인인 구양수(歐陽修)의 말처럼 지금 수천 년을 망라한 인물들 가운데 『사기영선』에 오로지 서른다섯 편을 가려 뽑았으니, 너무 간단하게 줄였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글의 법도에서 지극한 것을 취하여 배우는 자의 사표(師表 : 모범적인 인물)로 삼을 만하다 여긴 정조, 여기서 그의 생각의 한 편린(片鱗)을 읽어보자. 정조(正祖)가 쓴 『춘추를 완독하던 날 자궁(혜경궁 홍씨)께서 음식을 마련하여 기쁨을 표하므로 읊어서 신하들에게 보이다(春秋完讀日 慈宮設饌識喜 뜰示諸臣)』(1799년) 라는 글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나는 삼여(三餘 : 겨울철, 밤, 비 올 때) 때마다 한 질의 책 읽기를 매년 상례로 삼았고, 직접 선별한 책을 반드시 인쇄하여 안팎에 배포했다. 이는 문풍을 진흥하고 습속을 바로 잡으려는 고심에서였다. 책이 배포되면 직접 먼저 읽어서 익혔는데, ……정사년(丁巳年 : 1797년)에 『사기영선』을 새로 인쇄하였다. 10월 8일에 읽기 시작하여 12월 27일에 완독하였으니, 80일이 걸렸다.”

이 글은 일종의 독서기라 할 수 있는데, 정조는 『사기영선(史記英選)』을 인쇄한 후 신하들에게 탐독을 권하면서도 틈틈이 시간을 내어 다시 한번 이 책을 완독하였음을 알 수 있다. 겨울 밤, 어느 눈이 내리던 날에도 정조가 이 책을 읽고 있는 모습이 눈에 보이는 듯 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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