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분의 드라마를 위해, 소리 위를 걷는 맨발의 디바
쓴소리를 아끼지 않는 멘토
이은미가 들려주는 음악과 무대 이야기
스무 해가 넘는 긴 시간 동안 소리 위를 걸어오며 나는 때로 혹독한 외로움을 맛보았다. 내 모든 것을 온전히 전할 수 있는 완벽한 무대를 만들기 위해 마지막 숨소리까지 혼을 싣고자 했고, 내가 원하는 소리를 내기 위해 ‘다시’를 수천 번도 넘게 외쳤다. 또 많은 이들이 행복하게 음악을 할 수 있는 세상을 꿈꾸며 미약하나마 나의 작은 외침도 멈추지 않았다. 그 시간들을 겪으며 내 곁을 스쳐 지나간 수많은 이야기들이 나란 사람을 자꾸 다듬고 깎아 둥글게 만들어주었다. 덕분에 지금의 나는 세상을 편안하게 받아들이는 여유를 갖게 되었다. 음악과 더불어 착하게 살 수 있는 내면의 힘이 생긴 것이다.---이은미
노래하는 사람, 이은미
가수 이은미. 데뷔한 지 20여 년이 흐르면서, 가수라는 단어는 이은미란 이름과 한 몸처럼, 분신처럼 딱 붙어버렸다. 이은미는 언제나 라이브로 노래하는 사람이다. 무대 위에 선 그녀의 모습 또한 익숙하다. 맨발로, 혼신을 다해 열창하는, 비일상적인 장면마저 친숙하게 만들어버린 관록의 가수다. 하지만 이은미가 무대 아래에서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노래하지 않을 때에는 음악과 어떻게 대화하는지, 그 속내를 쉽게 드러낸 적이 없기에 매우 낯설다. 라이브는 고집해야 하는 게 아니라, 당연하다고 여기는 사람답게 그녀의 화법은 에두르거나 애매함 없이 직설적이다. 특히, 음악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이야기할 때는 한없이 솔직하다. 처음부터 가수가 되겠다는 꿈을 가지고 시작한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운명처럼 음악의 손에 이끌려 오랜 시간 소리 위를 걸어온 사람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음악이 좋았다. 엄마의 등에 업히면 들려오는 심장 박동이 어린 마음을 평온하게 했고, 언니의 낡은 전축에서 흘러나온 낯선 멜로디가 나를 설레게 했다. “어렸을 때부터 가수를 꿈꾸셨나요?” 인터뷰를 하다 보면 가끔 이런 질문을 받는다. 하지만 글쎄다. 가수가 꿈이었던 때가 있었던가 싶다. 기억도 나지 않는 삶의 첫 순간부터, 음악은 내 생활이었고, 음악 하나로 나는 충분히 행복했다.”
어린 시절 이은미의 꿈은 특수학교 교사였다. 우연히 접한 음악이 그녀 인생에 행운이자 운명으로 다가온 것은 재수와 건강 이상 등으로 좌절감에 시달리던 스무 살 무렵이었다. 음악을 하는 친구들의 공연에서 관객들이 반응하는 모습을 보고 난생 처음 재미를 느껴 공연장을 찾기 시작했고, 급속도로 음악에 빠져들었다.
“음악은 잔뜩 웅크리고 있던 나의 마음속 상처를 치유해줬다. 공연장에만 가면 육체의 고통도, 마음의 짐도 잊은 채 환하게 웃으며 음악에 잔뜩 취할 수 있었다.”
우연의 조각들이 모여 운명을 만든다고 한다. 어쩌다 음악을 접하고, 빠져들긴 했지만 스스로 노래를 하겠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하던 이은미의 재능을 발견한 것은 한 선배였다. 그의 권유에 혼자 노래 연습을 시작하고, 스물한 살에 첫 번째 무대에 선 날, 그녀는 비로소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깨달았다.
“그날 이후 나는 혼자 연습에 돌입했다. 조지 벤슨을 선생님이라 생각하고 그의 발음, 심지어 호흡 하나조차 놓치지 않으려 노력했다. 노래만 하면 시간이 가는 것도, 힘든 것도 몰랐다. 일단 시작하면 온몸이 땀으로 흥건히 젖도록 노래를 불렀다. 참 이상한 일이었다. 살면서 그토록 뭔가에 몰두하고 빠져든 것은 난생처음이었다. 그렇게 일주일을 보낸 뒤, 나는 신촌의 한 라이브 카페에서 노래를 불렀다. 내 나이 스물하나, 우연처럼 운명처럼 그렇게 첫 무대에 섰다. 노래를 시작하자 관객들이 하나둘 대화를 멈추고 무대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숨죽인 채 노랫소리에 집중하던 사람들은 내가 노래를 마치자 약속이라도 한 듯 자리에서 일어나 박수를 보냈다. 나는 그날 코끝에 감돌던 매캐한 흥분의 냄새를 잊지 못한다.”
음악을 시작한 이후 이은미의 삶은 기승전결이 확실한 드라마 같다. 우연한 만남, 노래하는 사람으로서의 운명의 시작, 시련과 도전, 아픔과 눈물, 환희 이 모든 것들이 한데 모여 출렁인다. 흔히 ‘4분의 드라마’라고 부르는 짧은 노래 한 곡으로는 다 담을 수 없는 이야기들이 이어진다.
세상의 모든 노래에는 각자 주인이 있게 마련이다. 무수한 노래 중, 내가 사는 모습을 비추는 거울 같은 이야기를 누구나 한번쯤은 만난다. 이은미도 다르지 않다. 다만, 그녀는 자신의 이야기뿐만 아니라 다른 많은 이들의 이야기를 함께 노래한다. 그녀를 좋아하거나 싫어할 수는 있어도, 가수로서 그녀가 이룬 것들을 부정하기는 어려운 이유다. 이처럼 20여 년간 한 길을 걸어온 사람의 이야기를 담았다는 점에 이 책『이은미, 맨발의 디바』의 가치가 있다.
음악 안에서 찾은 세상
1장 ‘음악, 내게 이름을 주다’에서는 신촌에 괴물이 나타났다는 말을 들었던 데뷔 초부터 어느덧 800회가 넘는 공연을 한 중견가수로 자리 잡기까지 이은미가 걸어온 길이 그려진다. 데뷔 초 당시 일화를 보면 음악에 대한 고집은 예나 지금이나 한결같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60퍼센트는 절대 건드리지 마세요. 그 안에는 내가 하고 싶은 음악을 담을 거예요. 그걸 지켜줄 수 없다면 저는 여러분과 함께 작업할 수 없습니다.’ 내 첫 음반을 맡을 기획사가 정해졌을 때, 나는 가장 먼저 이렇게 선언했다. (중략) 기획사 제작진은 그런 나에게 ‘5집 가수’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 좋게 해석하면 음악에 대한 고집이 남다르다는 뜻이었고, 나쁘게 해석하면 그만큼 건방이 하늘을 찌른다는 의미였다. 나는 그 별명이 그리 싫지 않았다. 나를 ‘5집 가수’로 보는 한, 적어도 그들이 나와 내 음악을 함부로 대하지는 못할 것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사람들에게 사랑받았지만, 배신당하고, 상처도 받고, 정신없이 음악만 바라보며 달려온 지난날에 회한을 느끼며 방황하다가 결국 도돌이표처럼 음악으로 다시 돌아오는 이야기가 담백하고 솔직하게 이어진다.
2장, ‘음악, 세상을 바라보는 눈’에서는 음악에 대한 이은미의 확고한 생각을 들여다볼 수 있다. 그녀에게 음악이란 분석하는 것이 아니고 즐기는 것이다. 점수를 내고, 순위를 매기는 풍조도 못마땅하다고 거침없이 일갈한다.
“사람들은 음악을, 예술을 분석하려 하고 심지어 점수를 매겨 줄을 세우려 든다. (중략) 프로 음악가들에게조차 등수를 매겨 마치 그들의 음악이 딱 그만큼인 양 규정하는 것은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언짢아진다. 음악은, 예술은 분석할 수 없고 점수를 매길 수 없는 영역이다. 누가 피카소와 모네의 그림을 비교하며 점수를 매기겠는가. 서로 다른 것들이 공존하기에 예술이 아름다운 것이다. 줄 세우기는 물론이고 예술을 분석하려 드는 요즘의 풍조도 나는 못마땅하다.”
그녀는 또한 좋아하고 잘하는 것을 하는 게 맞다고 여기며, 후배들 앞에 설 때는 그들을 자신의 색깔로 물들이기보다는 방향만 제시해주려고 애쓴다. 자신의 노래, 자신의 무대는 스스로 만드는 것이 정답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3장, ‘음악, 사랑이고 희망이다’에서는 이은미의 음악 인생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공연 이야기가 이어진다. 한 번의 공연을 위해 챙겨야 할 수많은 일들, 함께 만들어나가는 스태프들의 헌신, 그들에 대한 감사, 공연에 대한 의지와 신념을 담담히 풀어놓다가, 무대에 선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드디어 털어놓는다.
“20년 넘게 소리를 만드는 작업을 하고 살면서도, 난 아직 내가 원하는 소리를 내지 못하는 경우가 자주 있다. 저마다 지문이 모두 다른 것처럼, 사람의 구강 구조나 성대의 모양, 소리를 만드는 머리나 가슴 등의 체형도 제각각이다. 때문에 내가 가지고 있는 신체적 조건만으로 모든 소리를 만족스러운 수준으로 내기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방법은 두 가지다. 하나는 무대에서 원하지 않는 소리를 내면서라도 노래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원하는 소리가 만들어질 때까지 연습하는 것이다. (중략) 나는 끊임없이 연습을 하고 또 한다. 원하는 소리를 내지 못한다면 그 곡을 노래하면서 나는 결코 행복하지 않을 것이고, 또 노래하는 내내 관객 앞에서 발가벗겨진 기분이 들 테니 말이다.”
연습에 매진하고, 나이 들면서 자연스레 사람 안에서 희망을 찾고, 삶과 죽음에 대해 생각하는 보통 사람, 이은미가 보인다.
4장, ‘음악, 그 안에 꽃이 있다’ 에서는 음악인으로서 사는 어려움과 본질적 고통, 그럼에도 조급할 필요 없다고 말하는 숙성된 이야기가 나온다. 나보다 잘할 수는 있어도, 나처럼 할 수는 없다는 신념 하나로 버티는 프로 음악가로서 그 이면을 가감 없이 내보인다.
“‘노래만 잘하면 훌륭한 가수 아닌가요?’ 틀린 말은 아니지만 맞는 말도 아니다. 노래를 잘한다고 무조건 매력적인 것은 아니다. 노래하는 모습이 매력적이긴 해도 노래를 잘하지 못할 수 있다. 프로 음악가는 노래를 잘하는 것은 물론 노래하는 모습까지 매력적이어야 한다.”
음악을 하다 보면 누구나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엄청난 괴리감을 느끼게 되는데, 그 거리를 줄이기 위한 답으로 이은미가 내놓는 것은 단 한 가지다. 오직 연습. 치열한 연구와 끊임없는 성장만이 음악가로서 끝까지 살아남는 길이라는 것이다.
다정하지 않아도 괜찮은 멘토, 이은미
2010년, MBC 오디션 프로그램 「위대한 탄생」에 멘토로 출연했을 때, 이은미는 내내 화제였다. 자라나는 새싹을 꼭 그렇게 야박한 말로 기를 죽여야 했냐는 말을 들었을 정도로, 그녀는 냉정해 보였다. 책을 통해 뒤늦게나마 당시 그녀의 진심을 들어볼 수 있다.
“더 따뜻하게 그들을 품지 못한 것은 내 부족한 소양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에게 ‘따뜻한 품’은 대중의 관심만으로 충분하다. 내가 그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대중에게 오래도록 사랑받을 수 있도록 실력을 키워주는 것이라 믿었다. (중략) 그들은 드라마가 아닌, 철저히 실력만으로 승부를 내야 하는 냉혹한 현실과 마주해야 한다. 그들의 드라마에 환호를 보내던 대중의 관심은 오래지 않아 또 다른 드라마를 찾아 옮겨갈 것이다. 그렇기에 나는 갑자기 홀로 망망대해를 항해해야 하는 아이들의 배가 목적지를 향해 가는 동안 난파되지 않도록, 또 그들이 외로운 항해에 힘겨워하지 않도록, 최소한 무엇이 닻이고 돛이며 방향타인지 항해에 필요한 기본 지식과 기술만큼은 가르쳐주는 것이 멘토로서 내 역할이라 믿었다.”
진실은 다정할 필요가 없다. 다만, 거기에 진심만 담겨 있으면 된다.『이은미, 맨발의 디바』에서 멘토로서, 선배 가수로서 이은미는 처음부터 끝까지 거짓 없이, 체험에서 우러나온 조언을 아끼지 않는다.
“가수가 되려면 먼저 스스로 자신이 무대에 설 수 있는 사람인지 판단해야 한다. 때문에 나의 첫 번째 대답은 단연코 재능이다. 재능 없이 프로 음악가가 되기는 힘들다. 노력으로 극복할 수 있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 노력만으로 안 되는 게 예술이다.”
가수로서의 재능이란 풍부한 성량, 곡을 해석하는 탁월한 감성, 소리를 구분할 수 있는 귀 등을 말한다. 이은미는 그중에서도 특히 소리를 구분할 줄 아는 귀를 타고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여긴다. 노력으로 극복할 수 없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물론 완벽한 재능을 타고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기에, 노력과 근성은 더더욱 필수적이다. 마지막으로, 그녀는 스스로를 단속하는 인성을 먼저 갖춰야 행복한 가수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늘 대중 앞에 노출되는 가수들에게 인문학적 소양은 매우 소중하다. 특히 수많은 대중 앞에 서길 원하는 어린 친구들에겐 절대적으로 필요한 자질이다. 대중의 관심과 사랑을 갈구하기 이전에 사람이 얼마나 귀한 존재이며, 가수로서 대중과 제대로 소통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깨달아야 한다. 스스로 단단해지지 않으면 모래성처럼 쉽게 무너지고 만다. 타인의 시선을 즐기기에 앞서 스스로를 알고 또 자신이 어디를 향해 달려가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라도, 가끔은 달리는 열차에서 내려 숨을 고를 줄 알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