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혁명과 산업혁명 못지않게 인류문명사를 뒤바꾼 거대한 문화적 변화,
정보화 혁명의 기원을 찾아서
정보화는 결코 최근의 산물이 아니다. 정보화 혁명은 컴퓨터가 등장하기 훨씬 이전부터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분명히 하는 이 책은 ‘1700~1850 이성과 혁명이 시대 지식을 다룬 기술’이라는 부제에서도 드러나듯이 정보화 혁명의 기원을 18세기로 소급하여, 당시 과학자, 인문학자, 예술인, 사업가, 관료, 출판업자 등이 이루어낸 거대한 문화적 변화를 일목요연하게 개관한다. 사전과 지도, 자연사와 화학분야에서 이루어진 분류시스템까지 다양한 스펙트럼을 아우르면서 저자는 그들이 정보를 새로운 시각에서 생각하기 시작한 이유와 그 방법을 설명하는 가운데 당시의 거대한 문화적 사고전환이 어떤 식으로 오늘날의 정보화시대를 가능하게 만들었는지를 심도 있게 파헤친다. 이 책은 오늘날 논란이 되고 있는 문제들 중 상당수는 그 내력이 꽤 깊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상기시킨다. 요즘 우리 사회의 쟁점으로 떠오르고 있는 인터넷 상의 사생활 침해와 익명성에 관한 논쟁의 많은 부분이 프랑스 혁명기의 우편제도와 입법논쟁들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는 것은 그 사례이다.
대니얼 R. 헤드릭의 「정보화 혁명의 세계사」는 우리에게 이성과 혁명의 시대 정보화가 어떻게 새로운 형식들을 취하게 되었으며, 정보와 권력의 관계를 해명하는 한편, 어떤 식으로 유럽 및 아메리카 사회를 변모시켰는지 놀랍도록 정확하고 세밀하게 보여준다.
정보화시대는 과연 언제 시작되었을까?
흔히들 ‘정보화시대’란 컴퓨터의 등장이 이뤄낸 문화적 도약이자 새로운 시대를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것은 오랜 문화발전 과정의 가장 최근단계에 불과할 뿐이다. 정보화 시대의 개념적 뿌리는 지금으로부터 대략 3세기 전에 시작되어, 이성의 시대(17세기 말과 18세기 대부분)와 그 뒤를 잇는 혁명의 시대(1776년부터 19세기 중반까지)에 일어난 엄청난 변화들로까지 뻗어 있다. 루스벨트대학 사회과학 및 역사학 교수인 저자 대니얼 헤드릭은 정보화 혁명이 당시의 정치혁명과 산업혁명 못지않게 인류문명사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고 지적하면서 정보화 혁명이 거대한 문화적 변화의 산물이라는 점을 밝히는데 초점을 맞춘다. 20세기의 전자처리의 기본토대가 바로 이 기간에 마련되었기 때문으로 말하자면 ‘소프트웨어’라고 부를 수 있는 정보시스템의 문화혁명이 ‘하드웨어’라고 부를 수 있는 물질적 혁명을 선도한 것이다. 「정보화 혁명의 세계사」에서 저자는, 지금의 시대를 해명하는 열쇠는 18세기와 19세기 초에 개발된, 정보를 모으고 저장하고 변형하고 디스플레이하고 소통하는 시스템들을 이해하는 데 있다고 주장한다. 이 책은 1700년과 1850년 사이에 이루어진 여러 가지 개념적인 발전양상에 대한 방대한 양의 자료 분석을 간결하고 흥미로운 형태로 풀어내면서, 오늘날의 주도적인 기술들과 연결시킨다.
그 시기의 정보시스템들 가운데 돌파구 역할을 한 것으로는 린네의 분류법과 명명법, 라부아지에가 고안한 화학시스템 그리고 십진법이 단연 돋보인다. 이 책은 18세기의 정치 산술학자들과 인구통계학자들이 데이터를 간명하게 시각적으로 표현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어떤 식으로 통계와 그래프를 발전시켜나갔는지를 상세하게 보여준다. 또한 지도 제작이 예술에서 과학으로 변화하는 과정을 추적하면서, 해상에서 경도를 정하는 방법과 지상에서 호와 자오선을 측정하는 방법을 다룬 다양한 문헌들을 소개한다. 아울러 이 책은 정보를 암호화하고 변형하는 초기 단계에 주목한다. 여기에는 사전의 발전, 샤프로 대변되는 시각통신기의 발명, 해군 깃발신호체계 및 우편제도의 이용과 목적에서 이루어진 개념적인 변화들이 다루어진다.
그렇다면 이성과 혁명의 시기에 새로운 정보시스템이 출현하게 된 까닭은 무엇일까? 주요 동인은 지금처럼 컴퓨터가 주도하는 기계가 아니라 사회적ㆍ경제적ㆍ정치적 격변이 주도한 문화적 변화였다. 이 시기 인구의 증가는 경제 성장을 동반했고 상인에게는 정보가 곧 돈이었다. 육군과 해군은 정보의 거대 소비자였다. 전문 직종들도 차별화된 정보를 요구했다. 법률가는 법전을 약사는 처방전을……. 1776년 북아메리카에서 발생한 독립전쟁과 더불어 시작된 혁명의 시대는 정보에 대한 수요를 더욱 부채질했다. 정보에 대한 수요의 증가는 필연적으로 공급의 증가를 불러왔다. 스스로를 계몽화한 사람으로 생각한 군주와 그 관료들은 제작 프로젝트, 인구조사, 무역과 농업조사 등을 통해 그들이 다스리는 영토에 대한 정보를 모았다. 공식적인 조사와 개인적인 연구 계획에 힘입어 열대식물, 생산량과 수확량, 지구의 형태, 천연두로 말미암은 사망자 수 등의 데이터가 엄믃나게 축적되었다. 증가하는 정보량은 다시 정보를 다루는 방식의 혁명, 즉 정보시스템의 혁명을 유도했다. 그리하여 분류학, 지도 제작, 사전학, 통계학, 우편제도에서 이루어낸 과학적 발전이 이성과 혁명의 시대를 규정하는 중요한 특징으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1700~1850 이성과 혁명의 시대 지식을 다룬 기술자들
「정보화 혁명의 세계사」는 이성과 혁명의 시대 지식을 다룬 기술자들을 차례대로 불러낸다. 장 바티스트 콜레르, 토머스 제프슨, 벤저민 프랭클린,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등의 유명 정치인들이 이 역사적인 무대에 모습을 드러낸다. 식물학자 칼 폰 린네, 화학자 아투안 라부아지에 인구학적 비관론자 토머스 맬서스, 시계기술자 존 해리슨, 「백과사전」의 공동저자 드니 디드로와 장 르 롱 달랑베르, 「영어사전」을 쓴 새뮤얼 존슨, 전신 발명가 새뮤얼 모스, 세계 최고봉을 자신의 이름을 따서 명명한 조지 에버리스트 등 수많은 유명인들이 진정한 지식의 기술자였다.
한편 이 책에서 거론하는 주인공들 중 많은 사람들은 전문가들에게만 알려져 있다. 이를테면 통계학자들은 아돌프 케틀레프를, 천문학자들은 카시니를 그리고 화학자들은 조지프 프리스틀리를 기억한다. 프랑스인들은 클로드 샤프가 모스보다 50년 먼저 무선을 발명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빈첸초 마르코 코로넬리(백과사전파), 토비아스 마이어(수학자), 그래프를 발명한 윌리엄 플레이페어 등 당대의 정보화 혁명에 지대한 공헌을 했음에도 오랫동안 잊혀온 사상가들 또한 수두룩하다. 사실 정보화시대의 주역은 다름 아닌 그들이었다.
정보를 모으고 저장하고 변형하고 디스플레이하고 소통하는 시스템
이 책은 정보시스템이 그 작동 목적에 다라 조직, 변형, 디스플레이, 저장, 소통이라는 다섯 개의 범주로 나누고, 각 범주마다 사례연구들을 배치했다.
첫째, ‘정보의 조직’에서는 정보를 조직하고 분류하는 시스템을 다룬다. 이 시기에 이루어진 중요한 과학적 공헌들은 새로운 개념의 발전이 아니라 홍수처럼 쏟아진 새로운 관찰과 그것을 다루는 체계의 발전으로 귀학된다. 생명과학에서 린네의 분류법이, 화학에서 바루아지에의 원소와 분자의 명명법이, 그리고 측정과 관련된 학문에서 미터법을 알아본다.
둘째, ‘정보의 변형’에서는 정보를 수치화하는 수단인 통계가 ‘정치산술’과의 연관관계에서 논의된다. 우리 시대의 특징인 셈하고, 계량화하고, 그렇게 만들어진 숫자를 분석하는 데 이르기까지 그 열광의 진원은 18세기와 19세기 초기로 거슬러 올라가는 셈이다.
셋째, ‘정보의 디스플레이’에서는 정보를 시각화하려는 욕구의 산물인 지도와 그래프를 살펴본다. 지도 제작자들은 정보를 시각화하는 과정에서 그래프와 전통적인 지도 사이에 수많은 변종을 개발했다.
넷째, ‘정보의 저장’에서는 정보를 저장하고 검색하는 시스템인 사전과 백과사전을 다룬다. 여기서 자국어 사용과 알파벳 순서가 핵심 쟁점으로 떠오르는데, 이러한 논의들은 모두 사전과 백과사전의 이용을 좀 더 쉽고 실용적으로 만들기 위함이었다.
다섯째, ‘정보의 소통’에서는 우편제도와 사프로 대변되는 시각통신기 및 해상 깃발 신호체계는 먼 곳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에 대한 정보가 절실했던 기업, 정부, 군대의 상황을 반영하며, 특히 세기 전환기의 혁명과 무수한 전쟁들로 그 필요성은 더욱 가속화되었다.
정보화가 유럽과 아메리카 사회를 변모시키다
이 책은 동일한 정보라 하더라도 각 나라의 정치 경제, 사회의 환경에 따라 달리 적용되고 변용되었음을 보여준다. 도량형과 통계 분야가 더욱 그러했다. 도량형 시스템 중 미터법은 프랑스에서 만들어졌지만 이를 널리 보급한 나라는 영국이었다. 당시 산업화의 중심에 있던 영국으로서는 표준 치수로 대량생산할 수 있는 측정 단위가 필요했던 반면, 프랑스는 기존의 도량형 폐지를 반대한 귀족계급과 상인들의 영향력이 막강했기 때문이었다. 통계학에서도 영국, 프랑스, 미국의 초점은 서로 달랐다. 통계에 대한 관심의 근원 중 하나는 공중보건에 대한 염려인데 영국은 페스트나 천연두와 같은 질병의 원인과 예방을 통계를 통해 밝히고자 했다. 질병분류학이라 불리는 사망원인-분류시스템을 확립하고 오늘날 국제질병분류가 탄생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프랑스는 주로 국가 행정업무에 필요한 갖가지 정보들을 수집했는데 주된 동인은 세금 수입을 늘리는 데 있었다. 외국인들의 눈에 미국인은 마치 숫자에 대한 강박관념이 있는 것처럼 비쳤다. 숫자에 대한 숭배는 정치적 목적과 맞닿아 있었는데 다양한 목소리들이 불안정한 국가체제를 위협하는 듯한 상황에서 사실들이(통계 수치가) 그러한 목소리를 하나로 묶어 주리라고 믿은 것이었다. 공중위생이나 정치개혁에서 미국이 유럽보다 뒤떨어졌을지 몰라도 사회 통합을 위한 통계학의 이용에서는 선두주자였다. 예컨대 매사추세츠 주 과음방지위원회는 술과 관련된 사건 및 사고 발생률 보고서를, 필라델피아 교도소협회는 범죄, 범죄자, 감옥에 관한 통계를, 뉴욕의 도덕개혁협회는 윤락과 간음에 관한 통계를 수집했다. 경건성이나 도덕성 관련 문제에서조차 미국인들은 추측하고, 예견하고, 기대하고, 계산하는 국민이었던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