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만 8,000년 전 사피엔스는 왜 아프리카를 떠났을까?
이 대담한 주장은 한 가지 질문에서 시작되었다. “왜 5만 8,000년 전 인류는 갑자기 아프리카를 떠났을까?” 지금까지 많은 학자들이 인류가 언제 아프리카를 떠났으며 어떻게 전 세계로 흩어졌는지에 대해 규명해왔다. 그러나 ‘왜 인류가 굳이 괜찮은 환경을 떠났는지’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명확하게 이야기되지 않고 있다. 이산과 이민이 일상이 된 지금의 관점에서는 새삼스러운 질문인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같은 질문을 6만 년 전 선조에게 한다면 의미가 달라진다. 『미래중독자』에서는 바로 이 점에 주목했다.
물론 ‘왜 아프리카를 떠났는가?’라는 질문은 진화론 연구의 주요 과제 가운데 하나다. 즉 이에 대해 의문을 품는 것이 다니엘 S. 밀로만의 업적은 아니다. 다만 그동안 유보된 질문에 대한 답을 제시했다는 데에서 저자만의 독창성이 드러난다.
어떤 종이 거주지를 포기한다는 것은 해결할 수 없는 문제 상황과 맞닥뜨렸음을 의미한다. 그만큼 이주는 심각한 스트레스를 각오하는 특수한 행위다. 그런데 지구상의 모든 동물들 가운데 오직 인간 일부만이 소말리아 반도라는 비옥한 환경을 떠나 오스트레일리아에서 북극까지 지구 전역으로 퍼졌다. 이에 대해 기후 조건이나 자원의 부족, 또는 다른 종과의 경쟁이나 내부적인 갈등 등 어떠한 생태학적 이유를 추정할 만한 근거는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다. 이들은 말 그대로 ‘별다른 이유 없이’ 지금까지와는 다른 곳에서 자신의 미래를 찾으려고 한 것이다.
오늘만 버리고 내일만 사는 별종, 사피엔스
저자는 바로 이 지점에서 여느 동물과 구분되는 인간만의 특징을 찾는다. 호모 사피엔스는 어느 날 문득 ‘내일’이라는 개념을 떠올렸다. 그리고 내일에 대한 막연한 기대와 두려움으로 ‘오늘만 사는 동물’의 낙원에서 추방당했으며(창세기), 돌연 아프리카를 떠나게 되었다(출애굽). 동물들 또한 동료의 죽음을 인식하는 감정과 이성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동료의 사체를 눈에 보이지 않는 곳으로 묻고, 또 그렇게 보이지 않게 된 동료를 기억하며 자신에게 닥칠 죽음이란 미래에 대해 상상(메멘토 모리)하는 존재는 오직 인간밖에 없다.
인간만이 지구상의 동물들 가운데 유일하게 아직 존재하지 않는 미래를 위해 이미 존재하는 현재를 기꺼이 포기할 수 있다. 보나 나은 내일을 위해 오늘의 즐거움을 유보한 채 땀을 흘리며, 반대로 다가오지 않은 내일을 두려워해 일찌감치 미래를 포기한 채 오늘을 즐기기도 한다(카르페 디엠). ‘내일 저곳은 오늘 이곳보다 낫겠지’라는 막연한 기대로 오늘까지 일궈낸 모든 것을 포기하는 모험을 감수하기도 한다. 내일의 발명. 그것이 저자가 꼽은 인류가 아프리카를 떠난 원인이자 지구 생태계의 정점에 선 힘의 근원이었다.
동시에 인류는 내일이라는 상상을 발명한 이후 삶에서 항상 불확실한 미래를 염두에 두느라 만성적인 불안과 공포에 시달려야 했으며, 이를 극복하기 위해 준비와 계획이라는 개념을 다시 떠올렸다. 그리고 상상된 미래를 대비하는 과정에서 축적과 잉여가 탄생했고, 이윽고 호모 사피엔스는 ‘과잉’의 소용돌이라는 현세의 지옥에 빠지게 되었다.
버지니아 모렐이 지적했듯이 유희나 잔혹함, 소통, 이타주의는 인간만의 것이 아니다. 흰쥐들은 불 꺼진 실험실에서 폭소하고, 늑대는 유희를 위해 쓸데없는 학살을 자행하는가 하면 사마귀나 돌고래는 시간屍姦과 이종 강간마저 서슴없이 벌인다(83쪽 참조). 이 책에서 저자 다니엘 S. 밀로가 주장하는 인간과 동물을 구별 짓는 인간다움이란 오직 내일이라는 상상과, 그 상상에서 비롯된 과잉이라는 현상뿐이다. 모든 것이 과잉으로 치닫는 현대사회의 모습은 이미 수만 년 전부터 예정되었던 셈이다.
인류 최대의 위기, 뇌의 발달
그렇다면 저자는 왜 ‘인류의 성공’을 이야기하면서 지금까지 제시되어온 뇌의 비약적인 성장이나 엄지손가락의 발달 대신 내일이라는 개념을 꺼낸 것일까?
여러 학자들이 이미 지적한 바, 인류는 한때 멸종 직전의 위기에까지 몰렸다. 예를 들어 신장이 150cm를 밑도는 아시아계 여성과 체중이 150kg에 육박하는 아프리카계 남성을 나란히 놓고 보면 전혀 다른 생김새지만 이들 둘의 유전자적 공통점은 나란히 붙어 있는 형제 같은 침팬지 두 마리보다 훨씬 많다. 침팬지보다 현생 인류의 조상이 한정적이기 때문이다. 적어도 7만 년 전까지만 해도 침팬지가 인류보다 지배적인 종이었다. 과거 인류에게는 스스로를 멸종 직전에까지 빠뜨리게 한 결정적인 약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약점이란 지금까지 장점으로 꼽혀온 뇌의 비약적인 성장이다. 뇌 부피가 커지면서 인류가 불을 통제하고 언어로 정교하게 소통하며 도구를 사용할 수 있었던 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번성은 곧 정체를 맞는다. 뇌의 크기는 여전히 성장을 멈추지 않았지만 그에 반해 기술과 문화는 오랫동안 답보 상태에 머물렀기 때문이다. 호모 에렉투스는 뇌 용적이 1,100㎤까지 성장했지만 400㎤의 뇌 용적을 가진 호모 플로레시엔시스의 석기 기술과 큰 차이를 보이지 않았다.
뇌의 과도한 성장은 인류에게 만성적인 영양 부족과 난산, 그리고 특별하게 긴 유년기에서 비롯된 생존의 위협이란 심각한 위험요소를 불러왔다. 뇌의 성장으로 인류세가 개막했다는 주장은 어느 정도 결과론적이다. 따라서 현생 인류가 비슷한 조건을 가진 27종의 호미니드 가운데 유일하게 살아남은 까닭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생물학적 또는 고고학적인 범위가 아닌 철학적 심리학적인 영역에 기댈 수밖에 없다.
진화론은 정체론으로 바꿔 불러야 한다!
호모 사피엔스의 생존을 설명하기 위해 저자는 먼저 진화론을 정체론으로 바꿔 불러야 한다고 주장한다. ‘진화’라는 용어는 다윈이 『종의 기원』을 발표한 지 13년이 지나서야 가까스로 언급했다. 다윈은 생물학에 경제학이나 역사학의 개념을 도입시키는 것이나 자연을 의인화하는 것을 극도로 경계했다.
즉 다윈은 세계가 어떤 목적을 가지고 결론을 향해 나아간다는 기독교적 역사관이나 ‘보이지 않는 손’이 자연선택에 개입해 적정한 가치를 추구한다는 전제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굳이 자연에 어떤 의지가 있다는 것을 가정해야 한다면, 그는 진화가 아닌 현상 유지, 보수를 먼저 떠올렸다. 그의 먼 후배라고 할 수 있는 리처드 도킨스 또한 ‘이기적 유전자’라는 용어를 제시하며 이에 대해 매우 길게 해명해야 했다.
진화론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역설적으로 많은 이들의 상식과는 다르게 자연은 결코 보다 효율적인 방향을 ‘추구’하지 않으며 환경에 맞게 혁명적으로 진화한 적자만이 생존하지도 않았다. 다윈이 본 자연이란 어떤 의지에 의해 정교하게 짜인 시스템이 아니라 인간적인 관점에서 볼 때의 ‘우연’과 ‘불합리’에 기대 그럭저럭 균형을 이룬 세계다. 수사슴과 공작새가 핸디캡 이론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불리함을 감수하며 뿔과 꼬리를 과도하게 키운 까닭은 암컷들이 불합리하게도 그처럼 비효율적인 모습에 성적 매력을 느꼈기 때문이다. 3,000종에 이르는 뿔매미들은 성적 이형도, 방어를 위한 무기도 아니면서 거추장스러운 뿔을 단 채 지금까지 살아남았다. 그리고 그 우연과 불합리에는 인간도 포함된다.
인간을 멸종의 위기로 빠뜨린 뇌의 지나친 성장은 인간에게 지루함과 더불어 쓸데없는 상상을 하게 만들었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문제를 만드는 과잉의 반복을 불러왔다. 그리고 그러한 ‘멍 때리기’에서 소말리아 반도에 살던 인류의 선조는 우연하게도 내일이라는 개념을 떠올렸고, 그 순간 인간은 펑! 하고 폭발했다. 생물학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빅뱅에 버금가는 대격변이었던 것이다(스몰뱅).
이 빌어먹고도 찬란한 내일에 중독된 가련한 짐승, 인간
어떤 주기설에 입각한 묵시록적인 예언들이 각광을 받는 현상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인간을 움직이는 두 가지 힘을 꼽자면 내일에 대한 공포와 내일에 대한 기대일 것이다. 마찬가지로 인류의 역사를 거칠게 요약하자면 미래에 대한 기대로 광야를 40년간 헤맨 모세의 탈출기와 미래에 대한 두려움으로 자식들을 잡아먹은 크로노스 사이의 어디쯤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인간이 오늘을 사는 까닭은 미래의 기대에 취했거나, 또는 미래에 대한 불안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다. 마치 지금 여기 한국인들처럼 말이다. 훗날 인류세를 연 호모 사피엔스를 한마디로 정의한다면 다음과 같을 것이다. “미래에 사로잡힌 별종.”
저자가 한국어판 서문에서 밝혔다시피 현대인들 가운데에서도 특히 한국인들은 미래에 중독되었다. 그래서 지금 여기 한국사회에서는 행복하게 살기 위해 미래라는 한 가지만 포기하자는 이야기마저 나오고 있다. 내일을 전제로 하는 사회제도인 결혼, 출산, 노후대비에 대한 기대를 놓기만 하면 오늘이 편안해진다는 것이다. 내일이 인류를 찬란한 오늘로 이끈 힘이고 축복이자, 오늘을 담보로 하는 불안과 공포를 만든 지긋지긋하고 빌어먹을 저주이기도 했다는 점에서 볼 때 가장 극단과 과잉으로 치닫는 한국사회에서 내일이 포기하자는 주장이 나오는 것은 저자의 지적처럼 당연할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우리를 사로잡은 근거 없는 기대와 불안의 과잉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리턴 투 이노센스’, 내일이 발명되기 이전으로의 회귀인 것일까? 이에 대해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내일은 없다는 생각으로 오늘에 만족하는 존재는 짐승이거나 해탈한 부처다. 그러니 우리는 내일에 사로잡혀 더 많이 불안해하고 초조한 채 더욱 과잉을 추구함으로써 더 깊은 번뇌의 지옥에 빠질 수밖에 없다. 과잉이야말로 인간다움이다.’
이 책을 읽는다면 오늘도 친구에게서 들을지도 모를 “내일 보자”라는 인사말이 다르게 들릴 것이다.
한국의 독자들께 드리는 글 중에서
아마도 한국에서 서양인이라고 부를 이 가련한 인간들이 한국이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 가장 먼저 떠올리는 이미지는 삼성과 핵폭탄일 것이다. 한국의 누군가는 삼성과 핵을 동시에 떠올리는 데 불쾌감을 느낄지도 모르겠고, 반대로 그 둘이 묘하게 어울린다는 짓궂은 생각을 할지도 모르겠다. 이에 대해 한국의 독자들께서는 너무 노엽게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러한 무례는 한국인들이 이탈리아에서 피자와 마피아를 우선 떠올리는 것이나 이스라엘이라고 하면 탈무드와 팔레스타인부터 생각하는 것과 그다지 다르진 않을 것이다. 아마 그럴 것이라고 믿는다.
(중략)
나는 이 글에서 나의 책이 다가갈 독자들을 남한사람으로 한정짓지 않고 그저 한국인, 또는 한국의 독자들이라고 적는다. 이런 나의 단어 선택이 한국의 깊은 역사와 복잡한 사정을 모르는 데 따른 천진함에서 비롯된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확신하는 것이, 확신하고 싶은 것이 있다. 언제일지는 모르지만 남한사람이 아닌 한국인들이 이 책을 읽을 것이다.
(중략)
멸종 직전의 인류는 어느 날 문득 내일을 떠올렸고, 그 순간 폭발하면서 지금에 이르는 위험하고 위대한 길에 나섰다. 그렇게 인간은 삼성 핸드폰을 만들었고, 불행히도 핵폭탄도 만들었다.
(중략)
내일이 ‘발명’된 이후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거나 또는 아마 앞으로도 절대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 일이 바로 우리 삶의 중심이 되었다. 상상하기 어려운 일들이 내일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아주 작은 가능성은 우리 인간의 머리 위를 맴돌았고, 급기야 꿈으로까지 나타나게 되었다. 그것에 대해 한국에 사는 사람들보다 더 똑똑하게, 그리고 더 깊이 아는 사람이 있을까?
민족과 지역을 막론하고 ‘내일’이라는 개념은 막연한 기대와 희망을 전제로 한다. 그리고 동시에 ‘내일’은 불행의 원천이 되기도 한다. 특히 오늘날 한국의 젊은이들은 희미하기만 한 ‘내일의 희망’을 위해 기꺼이 오늘의 즐거움을 포기해가며 누구보다 치열하게 노력하는 한편, 다가오지 않은 내일에 얽매여 그 두려움 때문에 노후계획이나 결혼, 출산 등 많은 것을 포기한 채 오늘에 만족한다고도 한다. 인류가 미래라는 발명품에 중독된 별종이라고 한다면, 한국인들께서는 인류의 어떤 상징이 될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