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즘: 차이와 사이』는……
서구 페미니즘 이론을 우리 문화 속에 녹여낸 한국 페미니즘의 결실
문학동네는 한국영미문학페미니즘학회에서 펴낸 첫 책 『페미니즘: 어제와 오늘』에 이어 11년 만에 두번째 책 『페미니즘: 차이와 사이』를 출간했다. 『페미니즘: 차이와 사이』는 서구 페미니즘 이론을 정리ㆍ요약하는 것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한국이라는 특수한 토양에서 자라고 성장한 우리 페미니즘의 결실을 담아내고 있다. 초기 페미니즘의 출발지였던 여성학과 사회학에서 문학ㆍ문화 비평으로 그 지반을 확장한 한국의 페미니즘은 텍스트와 강의실 너머 사회문화 전반에 걸친 각종 이슈와 현상에 비판적으로 개입하면서 독자적인 목소리를 내고자 노력해왔다. 이 책은 다양한 영역에서 울리는 이러한 목소리들을 모아 ‘오늘ㆍ여기ㆍ우리’ 페미니즘의 전체적인 지도를 그려나간다.
남성성 연구에서 신재생산기술 담론까지, 최신 페미니즘 이론의 총망라
오늘의 페미니즘은 누구를,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여성이라는 범주만을 고집하던 페미니즘은 폐기된 지 이미 오래다. 성 정체성의 고정성과 수행성 사이의 미세한 균열과 간극을 포착해내는 퀴어 이론과의 접경지대를 지나 남성 및 남성성에 대한 연구에 이르기까지, 오늘날 페미니즘이 아우르는 대상의 범위와 폭은 점점 넓어지고 있다. 『페미니즘: 차이와 사이』는 이러한 젠더 연구의 최전선을 추적하고, 이를 우리 대중문화 현실에 비추어본다. 젠더 분열의 징후로 드러나는 ‘꽃미남’과 ‘식스팩’을 통해 대중문화에 재현된 남성성을 분석하거나, 『엄마를 부탁해』와 마더 등의 문화 컨텐츠를 텍스트 삼아 모성 재현 이데올로기를 비판적으로 읽어내는 시도를 그 예로 들 수 있다. 사회적 이슈가 되곤 하면서도 주의 깊게 다루어지지 않은 현대 여성의 거식증 문제나 노년 여성 문제에 대한 면밀한 검토도 이루어진다. 나아가 이슬람 여성의 베일, 이주여성 노동, 아시아 여성, 민족 담론, 번역 및 혼종적 주체 등에 대한 섬세한 고찰은 인종과 국가의 경계를 넘어 전 지구적 차원의 문제들을 함께 고민하고 동참하는 페미니즘의 실천 윤리를 환기시킨다. 이러한 실천과 더불어 과학기술 분야로까지 연구 영역을 확장한 과학기술 관련 최신 페미니즘 이론도 소개한다. 경계 허물기와 타자 개념의 삭제를 시도하는 해러웨이의 사이보그 이론, 테크노 페미니즘, 생명 및 재생산에 개입하는 과학기술의 정치성을 비판적으로 점검하는 신재생산기술 담론은 생명 윤리가 부재하는 내일의 도래 가능성에 대해 경고한다. 그리고 페미니즘을 경유하는 레비나스의 타자 윤리학, 에코페미니즘이 지향하는 생태 공동체 등을 검토하며 페미니즘의 근저에 놓인 돌봄과 배려의 윤리가 어떤 방식으로 실현될 수 있는지 물음을 던진다.
차이의 정치학, 사이의 지형학
이렇듯 페미니즘의 틀로 각종 사회 문제와 다양한 문화 현상을 조망하고 사유하는 방법을 제시함으로써 이 책이 기획하는 바는 두 가지다. 페미니즘 이론들이 생산하는 차이의 정치성에 주목하고, 그 이론들 사이를 횡단하고 접목하면서 이론과 현실의 차이를 소거해나가는 건강한 페미니즘의 생성이 그 첫째다. 다름과 차이를 지배하는 권력에 저항하고 그 권력의 바깥으로 밀려난 타자를 돌보는 주체, 저항과 돌봄의 이중 과제를 수행해나가는 건강한 페미니즘적 주체의 양산이 두번째다. 『페미니즘: 차이와 사이』는 차이의 정치, 사이의 지형을 예리하게 감지하고 구축해나가는 ‘오늘ㆍ여기ㆍ우리’의 페미니즘을 요청한다.
1부는 ‘젠더ㆍ섹슈얼리티ㆍ육체’의 문제를 조망하는 글들을 모았다.
「페미니즘과 퀴어 이론」(윤조원)은 퀴어 이론의 등장이 페미니즘에 던지는 불편한 메시지를 화두 삼아 양자 사이의 공존 가능성을 탐색한다.
「남성, 남성성, 페미니스트 이론」(이명호)은 남성 및 남성성 연구가 페미니즘을 성차화된 육체와 젠더 정체성들을 횡단하는 가변적이고 유동적인 페미니즘으로 재구축하는 데 공헌할 수 있다고 역설한다.
「현대 여성의 새로운 히스테리, 거식증」(박주영)이 진단하는 현대 여성의 거식증은 가부장적 사회가 요구하는 이상적인 날씬함의 이데올로기, 그 덫에 걸린 여성의 절망을 드러내는 일종의 질병이다.
「자아로부터의 비상, 에로스」(최성희)는 에로티시즘을 둘러싼 페미니즘 내부의 각종 분열을 직시하면서, 자기 성실성에 기초한 페미니즘 성 윤리를 기반으로 한 디오니소스적 에로티시즘의 구축을 주장한다.
「노년 여성을 위한 나라는 없다」(연점숙)는 보부아르, 베티 프리던, 저메인 그리어가 말년에 집필한 노화의 여성적 경험 및 그 의미에 관한 글을 비판적으로 읽어나가면서 성숙한 나이 듦에 대해 숙고한다.
「‘꽃미남’과 ‘식스팩’: 대중문화 속 오늘의 남성성」(윤조원)에 따르면, 대중문화 속 남성들이 포스트모던 소비사회가 구축한 새로운 남성성의 한 양태로 수행하는 ‘메트로섹슈얼리티’는 기존의 남성성에 대한 일종의 도전이자 성차와 젠더 정치학의 표층이 재조정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잣대이다.
2부는 ‘지구화ㆍ(탈)민족ㆍ여성의 삶’과 관련된 쟁점들을 다룬다.
「민족경계 안팎의 여성과 남성」(박미선)은 민족 연구에서 남성이 누리는 특권이 해체되어야 하며, 페미니즘을 통해 지역과 세계를 매개하는 상상계로서의 민족을 더욱 정교하게 이론화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베일 속에는 이슬람도, 여성도 없다」(오은경)는 베일이 제국과 식민지의 권력 관계 및 민족과 종교의 가부장적 메커니즘을 작동시키는 환상 기제임을 밝히면서 이슬람 여성을 논의할 때마다 불거지는 베일 담론 자체를 벗어날 것을 촉구한다.
「‘아시아 여성주의 문화연구’를 구축하기」(태혜숙)는 각기 다른 경험을 가진 아시아 여성들을 하나의 공동체로 연대하게 만들고, 비교주의적 작업을 통해 서로 상충하는 차이들의 협상과 공존이 가능한 장을 마련하고자 한다.
「번역, 이산 여성 주체의 이언어적 받아쓰기」(이명호)는 번역의 관점에서 차학경의 『딕테』를 분석한다. 두 언어와 문화가 겹치는 경계선적 공간에서 혼종적 주체로 살아가는 한국계 미국인 이주여성의 파편적 기억을 드러내고, 이 속에서 다언어ㆍ다문화ㆍ다장소를 횡단하는 이주여성의 여성적 계보와 서사를 발견한다.
3부에서는 ‘신화ㆍ종교ㆍ윤리’ 관련 문제를 성찰해본다.
「레비나스, 타자 윤리학, 페미니즘」(이희원)은 페미니스트 관점에서 레비나스의 타자 윤리학을 전유한 이리가레와 구엔더의 이론을 비판적으로 점검하면서, 모성이 곧 희생이라는 레비나스의 가부장적 공식을 깰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여신 신화와 새로운 상징질서 찾기」(박정오)는 새로운 상징질서를 찾아야 하는 페미니즘에 여신 재구축 작업이 절실하다고 보고, 현대적으로 재해석된 아르테미스와 아테나 여신 신화에서 그 예를 찾는다.
「모성 서사와 그 불만: 『엄마를 부탁해』와 마더에 나타난 모성 이데올로기 비판의 문화지형 」(조선정)에 따르면, 모성을 여전히 낭만화시키는 『엄마를 부탁해』와 모성을 괴물 혹은 마녀와 동일시하는 오래된 신화를 은밀히 재생산하는 마더는 둘 다 모성을 철저히 성차별적으로 제도화하는 ‘근대’의 산물이다.
「배려의 윤리와 정의의 윤리」(김종갑)는 캐럴 길리건이 『다른 목소리로』에서 제안한 정의의 윤리에 대한 배려의 윤리의 우월성 관점으로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를 읽어낸다.
4부는 자연ㆍ과학기술ㆍ여성 관련 주제를 다룬 글들을 엮었다.
「생태 파괴 시대의 페미니즘」(박혜영)은 경제개발과 신자유주의적 착취로 인한 자연 파괴가 과학기술로는 회복 불가능한 지점에 이르렀다고 진단하고, 돌봄의 생태윤리와 남녀가 상호의존하는 자급적 공동체 설립을 그 대안으로 제시한다.
「과학기술 시대의 페미니즘과 사이보그론」(장정희)은 해러웨이의 이론을 집중적으로 조명하고,‘경계 해체와 동반종 사이의 교류’라는 지점에서 전 지구화로 인한 여성 착취 및 젠더와 모성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고 역설한다.
「페미니스트 신재생산기술 담론의 정치성」(정문영)은 여성의 몸을 파편화시키는 과학기술의 객관화ㆍ시각화 과정을 폭로하고, 신재생산기술의 발달로 불안정해지는 몸의 경계에서 새로운 몸의 경계가 배태될 가능성을 읽어낸다.
한국영미문학페미니즘학회는……
1992년 창립한 한국영미문학페미니즘학회는 페미니즘 관점에서 영미문학을 가르치고 쓰는 학자와 연구자로 구성된 학술공동체이다. 영미 페미니즘을 한국에 소개하고 우리의 맥락에 맞게 변용하여, 한국 페미니즘을 외국에 알리는 역할을 하고자 한다. 책과 강의실에 머물지 않고 일상 속에서 페미니즘을 풀어내는 실천적 목소리를 내려고 노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