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문난 골초 국가, 조선과 대한민국
17세기 중반 조선에 14년 동안 억류됐다가 탈출한 유럽인이 있다. 바로 하멜이다. 하멜은 고향 네덜란드로 돌아가 《하멜표류기》를 썼는데, 그 한 대목이 담배에 관한 것이다.
“그들 사이에는 담배가 매우 성행해 어린아이들이 4, 5세 때 이미 배우기 시작하며, 남녀 간에 담배를 피우지 않는 사람이 매우 드물다.” (본문 16쪽)
담배가 이 땅에 들어온 것이 조선 시대 광해군 때인 1616년이니, 한반도에서 담배 연기가 피오르기 시작한 지 채 400년이 되지 못한다. 그런데도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이란 말이 자연스럽게 쓰일 정도로 담배는 우리 역사에 친숙한 물품이다. 18세기 말인 정조 때에는 흡연률이 20퍼센트(전체 인구 1839만 명 중 360만 명)에 이르렀을 것으로 추정된다.
담배 사랑은 일제 강점기와 대한민국 건국을 거치면서도 식을 줄 몰랐다. 해방 뒤에는 사제담배와 양담배가 성행했다. 특히 양담배는 ‘미제’라는 아우라까지 겹치는 바람에 인기를 끌었다. 양담배 장사가 제법 쏠쏠하자 미군 트럭을 ‘차떼기’ 하는 일이 벌어지더니, 급기야는 미군 군용열차를 털다 사람이 죽는 지경에 이르렀다.
1957년 4월 12일 밤 미군 피엑스용 물품을 가득 싣고 인천을 출발해 의정부를 거쳐 동두천으로 가던 군용열차가 의정부와 덕정 사이 고갯길에서 멈춰 섰다. 열차에서 누군가가 손전등으로 신호를 보내자 한국 민간인 아홉 명이 열차로 달려가 산소 용접기로 문을 절단하고 양담배 스물네 상자를 들어내려는 순간, 미군의 총격이 시작됐다. 이 총격으로 한국인 한 명이 사망하고, 두 명이 부상당했다. (본문 52, 53쪽)
담배 도둑도 들끓었다. 1960년 9월 6일자 《조선일보》에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렸다.
대전시 인동에서 연초 소매상을 하는 이낭이 씨는 금년 들어 다섯 차례나 담배 도둑을 맞아 골치를 앓던 끝에, 좀도둑을 골려주기 위해서 아리랑 빈 갑에 나무조각을 넣어 진짜처럼 포장을 해서 20갑을 진열해놓았더니 5일 새벽 도둑이 들어 진열장을 부수고 훔쳐갔다고. 담배 대신 나무조각을 훔친 도둑도 약이 올라 재침을 노리겠지만 주인 이 씨도 새로운 방법 대책을 목하 고민 중이라는 소식. (본문 60쪽)
담뱃세에 중독된 정부
1964년 미국 공중위생국 국장인 루터 테리는 “흡연은 암을 유발한다”는 보고서를 발표한다. 이 보고서의 영향으로 1964년 미국인 1인당 담배 소비량은 1963년에 견줘 3.5퍼센트나 줄어든다. 한국에서도 관련 보도가 쏟아져 나왔지만 아무도 보고서를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한국 애연가들의 관심은 오직 담뱃값 인상이었다.
담배 사업을 전담하는 전매청과 그 후신인 한국전매공사는 세금 걷는 재미로 장사에 여념이 없었다. 오직 ‘구국의 일념’으로 담뱃세를 거둘 뿐이었다. 당시 전매청은 값싼 담배는 적게 만들고 비싼 담배는 많이 만드는 방식으로 사실상 가격을 인상하는 수법을 자주 써먹었다. 전매청의 농간에 양담배 소비가 늘고 관제담배 소비가 줄자 정부는 강력 단속으로 대응한다. 전매청과 양담배의 힘겨루기는 담배 소비만 늘릴 뿐이었다.
1975년 말 현재 세계 각국의 흡연 인구의 1인당 1일 흡연량은 한국이 여전히 ‘골초 국가’임을 말해주기에 충분했다. 개비 수로 프랑스가 5.1, 이탈리아가 5.2, 오스트리아가 6.6, 서독이 7.2, 벨기에가 7.4, 영국이 8.8, 미국이 10.4인 데 견줘 한국은 무려 14.9개비였다. (본문 74쪽)
1986년 담배 시장 개방 뒤 양담배가 밀려들자, 양담배 저지의 사명을 띠고 한국전매공사가 민간 기업 형태인 담배인삼공사로 탈바꿈한다. 그러나 양담배와 맞붙은 전쟁은 얄궂게도 온 국민을 상대로 사실상 ‘흡연 촉진’을 하는 결과를 낳고 만다.
상상을 뛰어넘는 담배 회사의 상술
1928년 아메리칸 토바코(American Tobacco)는 주력 브랜드인 럭키 스트라이크의 판촉을 위해 ‘미국 광고의 아버지’로 불리는 에드워드 버네이스(Edward Bernays)를 기용한다. 버네이스는 전문가를 고용해 담배 판촉에 나선다. 그중 한 사람이 영국 보건의료계연합 의장을 지낸 조지 뷰캔. 조지 뷰캔은 광고에 등장해 “식사를 바르게 끝내는 방법은 과일, 커피 그리고 담배 한 개비다”, “담배는 구강을 살균하는 효과가 있으며 신경을 진정시킨다”고 말한다.
버네이스가 기획한 또 다른 행사가 ‘자유의 횃불’ 행진이다. 젊은 여성 열 명이 뉴욕 시 맨해튼 5번가를 담배를 피우며 활보하는 행사였는데, 이 정도로도 언론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겉으로는 담배를 여성해방의 상징으로 연결한 것이지만, 속셈은 여성해방을 명분 삼아 여성의 담배 소비를 늘리려는 것이었다.
1986년 우리나라 담배 시장이 개방된 뒤로 양담배 회사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판촉을 벌였다. 처음 시도한 것은 불법 경품 제공. 제품보다 더 비싼 수첩, 볼펜, 미니 카메라, 라이터 따위를 끼워 파는 불공정거래행위를 하다 시민 단체에 고발당한다. 양담배 회사가 후원한 외국 가수들의 내한 공연과 양담배 회사가 설치한 담배 자동판매기도 문제였다. 공연은 담배 광고에 이용됐고, 담배 자판기를 이용하는 사람의 60~80퍼센트가 청소년이었기 때문이다. 1992년 5월 27일 금연운동협의회가 발표한 자료를 보면, 우리나라 고등학생 3학년 남학생 흡연율이 44.8퍼센트로 나타났다.
양담배 회사들의 물불을 가리지 않는 판촉 활동은 미국 내 담배 규제 때문이었다. 미국 내 규제가 강화돼 줄어드는 매출을 해외 시장에서 채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 결과 선진국에서는 해마다 흡연률이 1퍼센트씩 줄어들었지만 개발도상국에서는 오히려 2퍼센트씩 늘어났다.
클루거는 담배 산업이 광고의 도움을 받아 성장했음을 강조했다. 그는 조지프 컬먼, 조지 와이스먼 등 담배업계의 거물들과도 만나 이들이 돈 버는 재미에 빠져 인간에게 끼치는 폐해에 대해서는 관심을 전혀 쏟지 않는다는 사실을 실토하도록 유도했다. 컬먼은 은퇴 후 “나는 양심이라곤 눈곱만큼도 없다”고 말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본문 148쪽)
특히 ‘내고장 담배사기운동’이 양담배 회사에는 눈엣가시 같았다. 국산 담배건 양담배건 자기 고장에서 담배를 사면 세수가 증대돼 지방재정이 튼튼해지는 것을 알리는 운동이었지만, 애향심에 애국심이 자연스럽게 따라붙기 마련이라 아무래도 양담배 쪽이 불리했기 때문이다. 마침내 미국 정부까지 나서서 ‘내고장 담배사기운동’을 중단하라고 요구했고, 우리 정부는 이 요구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1995년 5월 담배 시장 개방 7년 만에 외국산 담배의 시장점유율이 10퍼센트 선을 훌쩍 뛰어넘었다.
담배는 죽음이다. 속지 말자
담배의 해악이 알려지면서 금연 운동 또한 뜨겁게 펼쳐졌다. 1995년 9월부터 시행된 국민건강증진법은 금연 운동에 새바람을 불어넣었다. 그러자 ‘흡연 3권’을 요구하는 애연가들이 덩달아 늘어나기 시작했다. 이들이 주장하는 흡연 3권이란 담배를 자유롭게 피울 수 있는 권리(흡연자유권), 쾌적한 시설과 환경에서 담배를 피울 권리(흡연환경권), 기호품인 담배를 즐길 수 있는 헌법상 권리(행복추구권)를 말한다.
그렇지만 이미 대세는 금연으로 기운 상태였다. 미국에서는 담배 회사에 피해 보상을 요구하는 담배 재판이 여러 건 제기돼 몇몇 소송에서 담배 회사가 패소했다. 2000년 7월 14일 플로리다 주 마이애미 순회법원 배심원단은 담배 회사에 총 1450억 달러(약 160조 원)에 이르는 천문학적인 배상금을 지급하라고 평결했다.
2003년 3월 1일에는 세계보건기구 170여 개 회원국이 ‘담배 규제 기본협약’ 초안에 최종 합의했고, 2006년 2월 22일에는 우리나라에서 ‘담배 제조·매매 금지 법안’이 국회에 입법, 청원됐다. 이 법안은 담배의 제조와 매매를 전면 금지하는 것을 내용으로 한다. 다만 담배 농가, 담배 소매상에 대한 대책을 마련하고 흡연율을 충분히 낮추는 데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에 10년을 유예기간으로 둔다는 부칙 조항을 담았다.
2010년 2월 22일, 박재갑 교수는 ‘담배 없는 세상연맹’, 경실련 등의 단체와 함께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대통령께 드리는 공개 청원’을 발표했다. (중략) 그는 “정부가 독극물보다 더한 담배가 팔리도록 허용하는 것은 국민에 대한 사기”라며, 국가가 국민들을 담배 중독에 빠뜨려 놓고 그걸 통해 한 해 7조 원을 세금으로 걷어들이는 지금의 상황은 마약 장사로 떼돈을 버는 ‘조직폭력배’가 하는 짓과 다름없다고 주장했다. (본문 226쪽)
그렇지만 우리나라에서 처음 제기된 담배 소송은 원고 패소 판결을 받았다. 소송을 제기한 지 7년 4개월 만이었다. 2007년 1월 25일 서울 중앙법원 민사합의13부는 “폐암에 걸린 것이 반드시 흡연 때문이라고 볼 증거가 없다”며 원고 패소 판결을 내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