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학자의 시선으로 전통마을의 가치를 재발견하다
- 새로운 건축 패러다임으로 읽는 전통마을 건축 순례기
전근대시기에 조성되어 지금까지 사람들이 살고 있는 역사마을을 일컫는 ‘전통마을’은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살아온 선조들의 오래된 지혜의 공간이다. 그중에서도 하회와 양동마을은 2010년 8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5, 6백 년의 역사를 지닌 한국의 전통마을이 21세기에 세계인의 주목을 받고 그 가치를 인정받은 것이다. 그렇다면 시대를 초월해 빛을 발하는 한국의 전통마을의 가치는 진정 무엇일까?
이 책은 ‘건축학자의 시선’으로 한국의 전통마을의 가치를 탐구한 건축 순례기이다. 거대한 집합적 공간인 ‘마을’의 공간 배치를 거시적인 안목으로 바라봄으로써, ‘전통마을’에 담긴 선조들의 오래된 건축학적 지혜를 새롭게 조명하고 있다. 1985년 대학원생 시절부터 26년간 전통마을을 찾아다니며 연구해온 건축학자 한필원, 그는 기존 서구 건축이론의 잣대에서 벗어나 한국의 전통마을에 내포된 철학과 원리들을 찾는 작업을 통해 건축의 패러다임을 바꾸어놓은 보편적 이론으로서의 전통마을론을 펼친다. 전국의 대표적인 전통마을 12곳을 찾아 ‘사상, 문화, 사회, 환경’이라는 매우 포괄적이고 보편적인 네 개의 시선으로 우리 전통마을에 숨어 있는 논리와 질서, 그리고 시대를 초월하는 가치를 밝혔다.
옻골마을, 한개마을, 낙안읍성에서는 선조들의 사상이 어떻게 마을의 공간과 장소로 구체화되었는지를 살펴보며 구조마다에 위계성과 확장성이라는 질서가 부여되어 있음을 들려준다. 다양한 ‘문화’가 숨쉬는 성읍마을, 하회마을, 강골마을에서는 한국의 문화는 어디나 다 비슷하다는 고정관념을 깨며, 양동마을, 도래마을, 닭실마을 등 대표적인 씨족마을에서는 마을 공간 곳곳에서 성리학자의 전형적인 삶의 방식을 읽을 수 있으며, 원터마을, 외암마을, 왕곡마을에서는 자연과 조화를 이루어온 선조들의 지속 가능한 삶을 확인할 수 있다. 전통마을의 공간은 공동체의 소통과 결속을 뒷받침하며, 소수의 사람들이 최상을 차지하기보다 모두가 최적의 생활을 누릴 수 있는 해법을 담고 있다. 이 책은 우리 전통마을에서 땅과 건축과 인간의 진정한 관계를 재발견할 뿐 아니라 더불어 현재와 미래의 주거공간에 대한 훌륭한 지침을 들려준다.
전통마을의 물리적 현상들을 개별적으로 바라보기보다 유기적으로 연결해 파악하면, 전통마을은 물리적 공간과 정신적 내용이 결합된 의미 있는 하나의 체계로 다가온다. 사상ㆍ문화ㆍ사회ㆍ환경 등 네 가지 시선으로 그 의미 체계를 해석하면, 우리는 놀랍게도 전통마을에 이 시대가 가장 필요로 하는 가치들이 숨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전통마을에는 공동체의 소통과 결속을 뒷받침하며, 소수의 사람들이 최상을 차지하기보다 모두가 최적을 누릴 수 있는 해법이 담겨 있다. 그리고 인간이 자연과 하나되어 건강하게 공존하는 다양한 논리들이 숨어 있다. 독자들이 이 책에 소개한 열두 마을을 하나씩 찾아서 이 글을 바탕으로 마을공간을 읽어나간다면, 바람직한 주거공간에 담긴 소중한 가치들을 발견할 수 있으리라.
- '전통마을을 보는 네 가지 시선'(45쪽) 중에서
마을공간에 뿌리내린 사상과 개념들
- 사상, 전통마을을 읽는 첫 번째 시선
저자는 마을이 만들어질 당시 거주자들의 정신, 곧 사상이 어떻게 마을공간에 구현되었는지 관심 있게 살폈다. 특히 사상 자체보다 사상이 낳은 ‘위계성’, ‘확장성’, ‘다양성’이라는 세 개념이 마을공간에 어떻게 구체화되었는지를 살폈다. 먼저, ‘질서 있는 사회’를 추구한 성리학은 마을공간에 ‘위계’를 부여했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위계가 높은 것일수록 마을공간 뒤에 위치한다는 ‘전후(前後) 개념’이다. 이는 ‘중심과 주변’으로 세계를 파악하는 기독교사상의 서구 건축이론과 다른 점이다.
또한 풍수와 성리학적 자연관은 마을을 구성하는 ‘확정성’의 개념을 낳았다. 선조들은 마을을 독립되고 자족적인 공간으로 보지 않고 주변 지역과 유기적으로 연결되는 것으로 보았다. 마을이 넒은 주변 지역을 경영하는 베이스캠프가 되기고 하고(옻골마을), 마주 보는 산의 기운에 대응하는 조각을 조성해 주변 자연을 주거공간으로 흡수하기도 했다(낙안읍성). 관찰자인 남보다 ‘나’를 중심에 놓기에 건물을 배치할 때 건물이 바깥에서 어떻게 보일까보다 건물 안에서 무엇이 내다보이는지를 중요시했다. 이러한 확장의 시각은 주체성과 연결된다. 저자는 그렇기 때문에 전통마을에 가면 바깥에서 건축물 구경에 머물지 말고 건물 안에서 바깥 풍경을 바라보라고 권한다.
마지막으로 ‘다양성’을 들 수 있다. 전통마을의 밑바탕을 이루는 사상은 같으나 그 구현 방식은 현실 조건에 맞추어 매우 다양하다. 선조들은 《경국대전》, 《택리지》, 《임원경제지》, 《주자가례》 등과 같은 교범의 개념에 충실하면서도 현실에 맞게 다양하게 변주해왔다. 이 ‘다양성’ 덕분에 전통마을 답사는 늘 새롭게 다가온다.
다양한 문화를 만나는 공간, 전통마을
- 문화, 전통마을을 읽는 두 번째 시선
마을은 사람들이 특정한 자연환경을 선택해 주거지를 조성하고 그 안에 인공환경을 구축한 결과물로, 그 안에는 사람들의 문화가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다. 사람의 집단, 문화, 물리적 환경은 서로 밀접히 관련되어 있어 이들 중 하나만 떼어내어 본다면 마을을 온전히 이해하기 힘들다. 따라서 전통마을의 문화는 총체적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이 책에서는 성읍, 하회, 강골마을을 통해 전통마을의 다양한 측면을 드러내고 있다. 토속적인 공간 속에 부모와 자녀 세대의 평등한 삶을 구현하고 있는 성읍마을, 양반과 평민 계층이 서로 용인하고 지지하면서 공존해온 하회마을, 전통마을이 근대기에 변모해간 양상을 다양한 한옥의 출현으로 살펴본 강골마을을 통해 문화의 다양함을 만날 수 있다. 특히 신당(神堂)이라는 점에서는 동일하지만 다른 공간 구성을 나타내고 있는 성읍의 안할망당과 하회의 삼신당을 비교해본다면, 전통마을은 어디나 다 비슷하다는 기존 관념이 얼마나 잘못된 통념인지 깨닫게 된다.
씨족마을, 관계가 만드는 유기체적 공간
- 사회, 전통마을을 읽는 세 번째 시선
씨족은 동성동본을 가진 사람들의 집단으로, 씨족마을은 하나 또는 몇 개의 씨족집단이 일정한 지역에 모여 사는 것을 일컫는다. 종가를 중심으로 모인 씨족마을은 가족들이 분가하면서 사람과 집이 함께 증가하거나 또는 줄어들기도 하고, 또 새로운 씨족이 유입되기도 하면서 유기체적인 발전을 거듭해왔다. 조선의 사림들은 대개 씨족마을에서 태어나 서당에서 공부하고, 일부는 과거에 급제하여 중앙관직에 진출했다가 말년에 낙향하여 제자를 양성하고, 죽어서는 마을 선산에 묻히고 영혼은 사당에 모셔졌다. 이렇듯 씨족마을은 성리학자의 전형적인 삶의 방식과 대응하면서 공간을 구성했으며, 그러한 면에서 조선 후기 사회학의 참고서라 할 만하다. 이 책에서는 양동, 도래, 닭실마을 같은 씨족마을에서 거주자들의 사회관계가 공간구조(길, 주택, 공동시설, 산, 물, 나무 등과 같은 요소들이 맺고 있는 상호관계)에 어떻게 자연스럽고 조화롭게 구현되었는지를 살폈다.
지속 가능한 오래된 미래, 전통마을
- 환경, 전통마을을 읽는 네 번째 시선
‘자연과 조화로운 삶’으로서의 한국의 전통마을은 환경친화적 거주지이기도 하다. 여기서 ‘환경친화적 거주지’란 거주지의 건설과 유지와 관리가 주변 생태계에 미치는 영향을 최소화하는 ‘자연조건에 대한 적응 능력’을 비롯해, 자원의 소모를 최소화하고 자체 순환기능을 통해 일정한 재생능력을 갖춘 ‘자원의 순환’ 요건, 그리고 여름에는 에어컨 없이도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한 것처럼 전통적인 ‘에너지 절감 시스템’ 요건을 갖춘 곳을 말한다. 한국 전통마을의 환경친화성을 형성한 주요 이론이자 방법론으로 풍수지리가 있다. 풍수지리는 환경적으로 지속 가능한 장소를 찾는 이론으로, 이상적인 땅을 뜻하는 ‘명당’은 곧 인간이 소속감을 느끼는 편안한 장소에 다름 아니다. 한국에서는 실제로 이상적인 장소가 많지 않으므로 부족하고 문제가 있는 곳을 보완하는 ‘비보(裨補)’ 풍수 개념이 발달해 있다.
이 책에서는 부동산 가격이라는 풍향계가 지시하는 대로 보따리를 싸야 하는 도시 유목민과 달리, 전통마을에 깃든 지속가능성의 비결을 원터, 외암, 왕곡 세 마을 답사를 통해 살펴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