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대학자이자 위대한 정치가 퇴계 이황이 21세기 현대인에 남긴 진언(盡言)
퇴계 이황은 동방의 주자로 칭송되는 조선시대의 위대한 학자이자 정치가였지만 직접 정치에 참여하기보다는 될 수 있으면 주요 관직에 있지 않고 지방의 한직을 맡아 그곳에 지내면서 후학 양성에 힘을 쏟으며 여생을 보냈다. 학문의 깊이를 쉽사리 헤아리기 어려웠으며, 성품은 청렴하고 질박하여 수많은 제자들이 그의 문하로 모여들었다. 심지어 바다 건너 왜에서도 퇴계 이황 선생의 학덕이 알려져 임진왜란 때 왜군들은 도산서원을 침입하여 선생이 평소 공부하던 서적들과 저술했던 책자들을 가져가 이를 토대로 하여 부족사회에서 하나의 국가로 통일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에 대한 예로 『예기』의 학기편에는 ‘옛날의 교육 방법에는 집에는 숙(塾)이 있고 당(黨)에는 상(庠)이라는 학교가 있었고, 주(州)에는 서(序)라는 주의 학교가 있었고, 국도(國都)에는 학(學)이라는 대학교가 있었다.’라는 구절이 있다. 여기서 숙(塾)은 쉽게 풀이하면 글방이란 뜻으로 오늘날 게이오대학의 정식 명칭인 게이오‘기주쿠(義塾)’대학에서 그 연원을 찾을 수 있다. 학생을 ‘주쿠세이(塾生)’이라고 부르는 등 ‘주쿠’라는 글자가 포함된 것도 학기의 가르침에서 비롯한다. 또한 무로마치 막부 때는 농군과 무사의 구별이 없었는데, 에도시대에는 성리학의 영향으로 사·농·공·상의 신분제도를 확립하였다. 퇴계 선생의 성리사상을 그대로 수용하여 교육뿐만 아니라 사회, 경제 제도와 규범을 만들어 국가의 체제를 갖추어나갔다.
퇴계 이황은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에 나아갔으나 을사사화를 겪고 어지러운 정치 세태를 보고는 조정에서 물러났다. 명종 임금과 몇몇 조정 대신들의 간곡한 부름에 의해 잠시 출사할 때도 있었지만, 신병을 이유로 벼슬자리에서 물러나 고향으로 돌아갈 것을 거듭 청원하였다. 65세에 임금이 사직을 허락할 때에는 “내 이제 비로소 산(山)사람이 되었다”고 기뻐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퇴계 이황은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이 누구보다 깊었다. 퇴계의 언행을 기록한 언행록에는 “비록 물러난 지 오래였으나, 나라를 걱정하는 생각은 늙어도 더욱 두터웠다. 그래서 가끔 학자들과 더불어 이야기하다가도 나라 일에 미치면, 선생께서는 슬픈 듯이 탄식하시고 통분해 하셨다. -정유일-”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나라의 안위를 걱정하는 정치가였다. 명종 임금이 승하한 후 뒤이어 즉위한 17살의 선조 임금(1567년)에게 무진육조소 상소문을 올려 나라를 바로 세우는 길을 일러주려고 하였고, 1568년 선조 1년에는 성학의 개요를 그림으로 설명한 성학십도를 바쳐 임금이 행해야 할 도리, 나라를 이끌어가는 방도에 관한 글을 바쳤다. 무진육조소에는 첫째, 인(仁)과 효(孝)를 다하고, 둘째, 참언(讒言)을 막아 양궁(兩宮)을 친근하게 하고, 셋째, 성학(聖學)을 돈독히 하여, 정치의 근본을 바로 세우고, 넷째, 도술(道術)을 밝혀 인심을 바로 잡을 것이며, 다섯째, 정사를 복심(腹心)에게 맡기고, 이목(耳目)을 통하게 하고, 여섯째, 수양과 반성을 성실히 하여 하늘의 총애를 받아야 한다는 정치를 바로 세우는 여섯 가지 지침이 담겨 있다. 성학십도에는 대학(大學)의 가르침부터 직접 실천한 퇴계 선생이 자신의 의견을 상세하게 부연하여 먼저 공부를 시작하는 마음가짐은 어떠해야 하는지부터 일러주고 있다. 또한 옛날의 최고 통치자로 일컫는 요임금, 순임금의 행실과 업적을 서술하여 임금은 어떻게 정치에 임해야 하는가를 말하고 있다. 이이는 “선생이 선현들이 지은 도표를 모아 자신의 의견을 더하여 성학십도(聖學十圖)를 만들어 올리고는 ‘내가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는 길은 이것뿐이다’라고 하셨다”고 말하였다.
나라를 위하는 길이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고민했던 퇴계 이황은 임금에게 글을 올리는 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벼슬을 버리고 도산서원을 세워 시골에서 후학양성에 힘써온 선생은 일반 백성에게도 성학의 뜻을 전하고자 하였는데 65세(1565년, 조선 명종 20년) 때 지은 한글시 도산십이곡이 바로 그것이다.
조선의 대학자 퇴계 이황이 생애 마지막으로 남긴 시조, 도산십이곡(陶山十二曲)
일생을 바친 성리학의 사상을 한꺼번에 귀결한 역작
무진육조소나 성학십도에는 시경, 서경, 주역 등 경전의 글을 그대로 인용하여 임금에게 성학의 도리를 언급한 흔적이 곳곳에 보인다. 예를 들어 무진육조소에는 “전하께서는 주역에 있는 가인괘(家人掛)의 뜻을 살펴 거울로 삼으시고,…” “시경에 ‘입을 벌려 남기(南箕) 같이 되었다’고 했고, 또한 ‘길이 효를 말하고 효가 법칙이니라’고 했습니다. 성명께옵서 이에 유의하시면 다행이겠사옵니다” “…구족(九族)을 친애하고 백성들을 평등하게 사랑하여, 시경(詩經) 주남(周南)의 관저편(關雎篇)과 인지편(麟趾篇)에서부터 소남(召南) 작소편(鵲巢篇)과 추우편(騶虞篇)에 이르는 경지를 구현할 것이오니, 어찌 오늘이라고 요임금이나 문왕의 덕치와 다르다 하겠습니까.”라는 말들이 언급되어 있는데 경전의 의미를 독파하지 않고는 뜻을 정확히 알기란 매우 어렵다.
도산십이곡에도 이와 마찬가지로 경전의 의미를 실은 시어들이 등장한다. 피미일인(彼美一人), 교교백구(皎皎白駒) 등이 그 예인데 특히 전육곡의 6연에 나오는 ‘어약연비’라는 구절은 시경의 한록(旱麓)의 구절에서 인용한 것이다.
춘풍(春風)에 화만산(花滿山)고 추야(秋夜)애 월만대(月滿臺)라.
사시가흥(四時佳興)ㅣ 사롬과 가지라.
며 어약연비(魚躍鳶飛) 운영천광(雲影天光)이아 어늬 그지 이슬고.
<전육곡의 6연>
鳶飛戾天 魚躍于淵(연비여천 어약우연) 솔개는 하늘을 날고 고기는 연못에 뛰네.
<시경의 한록(旱麓)>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리오
초야우생(草野愚生)이 이렇다 어떠하리오.
하물며 천석고황(泉石膏?)을 고쳐 무엇하리오
<전육곡의 1연>
하늘은 높고 땅은 낮아 건괘(乾卦)와 곤괘(坤卦)의 구별이 정하여졌고, 낮은 것과 높은 것이 베풀어지니 귀한 것과 천한 것이 각기 자리 잡히고, 움직이는 것과 고요한 것의 법칙이 있어서 강한 것과 유사한 것이 판단되고, 방법과 성행이 동류(同類)한 것들끼리 서로 모이고, 만물은 무리로 갈라서 공존하면서 그 상호작용의 행동에 따라 좋은 것(吉)과 나쁜 것(凶)이 생긴다. 하늘에 있어서는 일월성신(日月星辰)으로 현상이 이루어지고, 땅에 있어서는 산천초목으로 형상을 이루어, 서로의 변전 추이(變轉推移)로써 변화가 나타난다.
이러므로 강강(剛强)한 것과 유순한 것이 서로 마찰되고 팔괘(八卦)의 현상이 서로 이행된다. 이것을 우레와 번개로 고동(鼓動)시키고 이것을 바람과 비로 적시고 윤택하게 한다. 해와 달이 운행하니 한 계절은 춥고 한 계절은 덥다. 건(乾)의 법칙은 남(男)을 이루고 곤(坤)의 법칙은 여(女)를 이룬다. 건도(乾道)는 광대(光大)한 시초를 차지하고, 곤도(坤道)는 유형의 물건을 조성한다. 건(乾)은 쉽기 때문에 알고, 땅은 간편하기 때문에 형상을 이루어 능하다. 간이하면 알기 쉽고 간단하면 좇기 쉽다. 알기 쉬우면 친근함이 있고, 좇기 쉬우면 공덕(功德)이 있으며, 친근함이 있으면 오래 갈 수 있고, 공덕(功德)이 있으면 커질 수 있다. 오래 갈 수 있는 것은 현인(賢人)의 덕성(德性)이요, 커질 수 있는 것은 현인(賢人)의 업적(業績)인 것이다. 쉽고 간편한 가운데 천하(天下)의 이치가 얻어지니, 마땅한 바를 얻으면 천지와 더불어 그 안에서 지위를 이룰 수 있음이다.
<주역의 계사상전1>
전육곡의 6연과 계사상전을 비유해보면 각각의 행이 갖는 시상과 매우 흡사한 구절을 계사상전에서 찾을 수 있다.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리오, 초야우생(草野愚生)이 이렇다 어떠하리오.’에서는 ‘하늘은 높고 땅은 낮아 건괘(乾卦)와 곤괘(坤卦)의 구별이 정하여졌고, 낮은 것과 높은 것이 베풀어지니 귀한 것과 천한 것이 각기 자리 잡히고, 움직이는 것과 고요한 것의 법칙이 있어서 강한 것과 유사한 것이 판단되고, 방법과 성행이 동류(同類)한 것들끼리 서로 모이고, 만물은 무리로 갈라서 공존하면서 그 상호작용의 행동에 따라 좋은 것(吉)과 나쁜 것(凶)이 생긴다. 하늘에 있어서는 일월성신(日月星辰)으로 현상이 이루어지고, 땅에 있어서는 산천초목으로 형상을 이루어, 서로의 변전 추이(變轉推移)로써 변화가 나타난다.’의 구절과 연결됨을 짐작할 수 있다.
‘하물며 천석고황(泉石膏?)을 고쳐 무엇하리오’에서는 ‘이러므로 강강(剛强)한 것과 유순한 것이 서로 마찰되고 팔괘(八卦)의 현상이 서로 이행된다. 이것을 우레와 번개로 고동(鼓動)시키고 이것을 바람과 비로 적시고 윤택하게 한다. 해와 달이 운행하니 한 계절은 춥고 한 계절은 덥다. 건(乾)의 법칙은 남(男)을 이루고 곤(坤)의 법칙은 여(女)를 이룬다. 건도(乾道)는 광대(光大)한 시초를 차지하고, 곤도(坤道)는 유형의 물건을 조성한다. 건(乾)은 쉽기 때문에 알고, 땅은 간편하기 때문에 형상을 이루어 능하다. 간이하면 알기 쉽고 간단하면 좇기 쉽다. 알기 쉬우면 친근함이 있고, 좇기 쉬우면 공덕(功德)이 있으며, 친근함이 있으면 오래 갈 수 있고, 공덕(功德)이 있으면 커질 수 있다. 오래 갈 수 있는 것은 현인(賢人)의 덕성(德性)이요, 커질 수 있는 것은 현인(賢人)의 업적(業績)인 것이다. 쉽고 간편한 가운데 천하(天下)의 이치가 얻어지니, 마땅한 바를 얻으면 천지와 더불어 그 안에서 지위를 이룰 수 있음이다.’의 구절이 연결된다.
편저자는 주역의 계사상전의 의미를 더욱 상세하게 설명하기 위해 수천 년 전 한의학의 원전인 『황제내경소문』에서 일치하는 내용을 발췌하여 연결하였다. 주역의 계사상전1은 황제내경소문의 생기통천론편(生氣通天論篇)의 내용과 부합한다.
황제(黃帝)께서 말씀하시길, “대저 예로부터 하늘에 통(通)하는 것(사람이 자연自然과 긴밀緊密한 협조관계協調關係를 유지維持해 나가는 것)은 생(生)의 근본(根本)이며, (이 생生의 근본根本은 하늘과 사람의) 음양(陰陽)에 근본(根本)합니다. 천지(天地)의 사이, 육합(六合)의 안에서 그 (天)기(氣)는 (땅에 있어서의) 구주(九州)와 (사람에게 있어서의) 구규(九竅)·오장(五臟)·십이절(十二節)에 (충만해) 있으니, (이들의 기氣는) 모두 천기(天氣)에 통(通)하고 있습니다. 그 (천기天氣의 음양陰陽)으로부터 생(生)하는 것은 오(五)(행行)이며, 그 기(氣)는 (소장성쇠消長盛衰의 대소大小에 따라 부연敷衍하여) 삼(三)(삼음삼양三陰三陽)으로 되니, 이를(음양오행陰陽五行이 변화變化해 가는 규율規律을) 자주 범(犯)하는 자(者)는 사기(邪氣)가 사람을 손상시키리니, 이는(음양오행陰陽五行의 변화變化에 잘 적응조화適應調和해 나가는 것은) 수명(壽命)의 근본(根本)입니다.
창천(蒼天)의 기(氣)가 청정(淸淨)하면 (사람의) 지의(志意)(정신精神)가 다스려지고(맑고 고요해지고), 이를 따르면 양기(陽氣)가 고밀(固密)해져서, 비록 적사(賊邪)(해로운 사기邪氣)가 있을지라도 능히 해(害)칠 수 없으니, 이는 (四)시(時)의 순서(順序)에 순종(順從)(인因)함입니다. 그러므로 성인(聖人)은 정신(精神)을 집중(集中)하여 모으고, 천기(天氣)에 복종(服從)(순응順應)해서 신명(神明)을 통(通)하게 합니다(인기人氣와 천기天氣의 음양변화陰陽變化를 통일統一시킵니다). 이(천기天氣)를 그르치면(失) 안으로 구규(九竅)를 닫으며 밖으로 기육(肌肉)을 막히게 하여, 위기(衛氣)가 산해(散解)하나니, 이를 일러 자상(自傷)이라 하며, (이는 스스로가) 기(氣)를 초삭시킴입니다.”
<황제내경소문의 생기통천론편(生氣通天論篇)>
후육곡은 국가 발전에 대한 내용이 중심 주제로 그 해설은 모두 예기에서 발췌하였다. 후육곡 1연의 ‘만권(萬卷) 생애(生涯)’ 시어를 통해 국가 운영의 첫 번째 기초는 학문에서 시작함을 이르고 있다. 예기의 학기는 선왕의 학제(學制)와 교육의 방법 등에 관한 내용이다.
천운대(天雲臺) 도라드러 완락재 소쇄(瀟灑)한데
만권(萬卷) 생애(生涯)로 낙사(樂事) 무궁(無窮)하여라
이 중에 왕래(往來) 풍류를 일러 무엇 할꼬
<후육곡 1연>
배우지 않고서도 스스로 생각하여 도리에 맞는 경우도 있다. 또 선량한 사(士)를 가까이 하여 이로부터 배워 스스로를 돕는 경우도 있다. 이런 방법으로 조그만 명예를 얻을 수 있을지는 모르나 뭇사람을 감동시켜 교화하기에는 부족한 점이 있다. 어진 이를 좇고 재능이 있는 사람과 친히 사귀어 자기의 지덕을 연마하는 사람은 뭇사람을 감동시키기에는 족하지만 아직 인민을 감화시키기에는 부족한 점이 있다. 그러므로 군자가 만일 만민을 감화시키고 좋은 풍속을 이룩하려 한다면 반드시 학문에 의해야 한다.
옥은 다듬지 않으면 그릇이 될 수 없으며, 사람은 배우지 않으면 도리를 알 수 없다. 그러므로 옛날의 왕자가 나라를 세우고 인민의 위에 군림할 때는 학문을 가르치는 것을 우선으로 하였다. 열명(兌命)에 이르기를 「처음과 끝을 생각하고 언제나 배움에 힘쓴다」 하였으니 이것을 두고 말하는 것이다. …
<예기의 학기 중(中)에서>
시경, 서경, 주역, 예기 중에서도 핵심이 되는 주옥과도 같은 글을 수록하였기 때문에 도산십이곡을 감상하는 데 그치지 않고 퇴계 이황 선생이 평소 힘써 공부하였던 학문이 무엇인지에 대해 더욱 가까이 접근할 수 있다.
특히 편저자는 예기에서 한 구절씩 언급되는 시경의 시 구절에 주를 달아 시 한 편을 따로 배치하여 시경의 중요성을 부각시켰다.
도산십이곡이 남긴 또 하나의 과제
퇴계 선생은 이렇게 말하였다.
“나는 어려서부터 학문에 뜻을 두었으나, 학문을 계발해 줄 스승이나 벗이 없었다. 따라서 혼자 수십 년을 헤매었으며, 어디서부터 들어가고 어디에 충점을 두어야 할지를 모르면서 헛되이 정신이나 마음만을 소비했고, 끝없이 학문의 참뜻을 찾느라고 어떤 때에는 자리에 들지도 않고 밤새도록 조용히 앉아 있기도 했다. 그리하여 심병을 얻어 여러 해 동안 학문을 폐하게 되었다. 만약 스승과 학우가 있어 학문의 바른 길을 가리켜 주었더라면 어찌 심력을 허망하게 소비했겠는가. -김성일-”
또 이렇게 시를 읊었다.
“순임금, 주 문왕이 세상을 떠난 지 오래도록
조양(朝陽)에도 봉황새가 나오지 않고
상서로운 기린(麒麟)도 이미 멀리 갔네.
말세의 기풍은 술에 곤드레만드레 된 듯,
우러러보니 중국의 낙민(洛?)에서
많은 현인들이 연달아 나타났거늘,
나는 늦고 또한 외진 곳에서 태어나
양능(良能)과 귀재(貴材) 홀로 닦을 바 모르겠네.
아침에 도를 알면 저녁에 죽어도 가하다는
논어의 말은 참으로 뜻이 깊구나.
<도연명의 음주 20수에 화창함 중(中)에서 기 14연>
퇴계 선생은 항시 공자의 도를 흠모하여 논어를 마음속으로 깊이 새겼다. 아침에 일어나면 가만히 눈을 감고 공자와 그의 제자들이 함께 둘러앉아 학문을 토론하는 모습을 머릿속에 그리고 나서 공부에 임하였다. 공자가 지향하고자 한 학문의 목표인 인(仁), 즉 중용의 도리를 이루기 위해 얼마나 무던히도 애를 썼는지 알 수 있는 구절이다. 하지만 공부하는 방법을 몰라 이리저리 헤매었으니 지난한 세월 다 지나가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라며 토로하였다.
공자는 어떠한 책도 저술하지 않았지만 항시 제자들에게 말씀하는 바가 있었다. 특히 논어의 양화편(陽貨篇)에는 공자가 그의 아들 백어에게 “너는 시경(詩經)의 주남과 소남의 참뜻을 알아냈느냐? 사람으로서 주남과 소남의 참뜻을 알지 못하면 마치 담장을 마주보고 서 있어서 더 나아가지 못함과 같으니라.”라는 말을 하였다. 퇴계 선생 역시 어린 선조 임금에게, 또 지인이나 제자들에게 시경의 주남과 소남을 읽어보았는가라는 질문을 던져 스스로 그 뜻을 궁구할 것을 암시하였는데 도산십이곡에 함의된 뜻 역시 시경으로 귀결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