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10월 12일[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한 날] 어떤 기념행사도 필요 없다.
그날은 우리에게 제삿날이기 때문이다.” ― 멕시코 복음화 500년을 맞아 멕시코 ‘원주민협의회’에서
“우리들은 지난 500년에 걸친 투쟁의 산물이다.” ― 멕시코 사파티스타 민족해방군의 선언문
지금으로부터 20년 전인 1992년, 즉 ‘아메리카 대륙 발견 500주년’을 맞이하여 ‘복음화 500주년’ 기념 축제가 벌어졌던 이 날을 아메리카 인디오들은 자신들의 ‘제삿날’에 비유했다. 한편, 사파티스타 민족해방군 부사령관 마르코스는 자신의 나이가 500살이 넘었다고 말한다. 1492년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대륙 도착 이후 계속된 수탈과 저항의 역사를 자신의 나이로 삼았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에게 1492년의 의미는 무엇인가?
이 책 『1492년, 타자의 은폐: ‘근대성 신화’의 기원을 찾아서』는 세계적 석학 엔리케 두셀의 대표 저작으로, 아메리카 대륙 ‘발견’ 500주년을 얼마 앞두고 프랑크푸르트에서 열었던 강연을 책으로 묶어 낸 것이다. 이 책은 이슬람 세계의 변방에 불과하던 유럽이 1492년 이래 라틴아메리카 타자를 정복하고 그들의 차이를 은폐함으로써 세계사의 중심에 서게 된 과정을 타자의 관점, 즉 억압받았던 민중의 삶과 역사를 통하여 새롭게 서술한다. 이 책을 통하여 우리는 그 기원에서부터 배타성과 폭력성을 감추고 있는 근대성의 신화를 벗겨 냄으로써, 억압과 수탈의 구조로부터 타자를 해방시킬 수 있는 새로운 방법론을 모색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일찍이 1960년대 후반부터 해방신학, 종속이론, 탈식민주의 등 라틴아메리카의 비판적 사상을 만들어 가고 전파하는 데 앞장서 왔을 뿐 아니라, 해방철학으로 세계적 명성이 높은 엔리케 두셀이지만 국내에는 그의 저작이 제대로 번역되어 있지 않았다. 이제 이 책의 출간으로 소문만 무성했던 해방철학의 구체적 면모를 직접 접할 수 있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이 책은 ‘지식의 탈식민화’ 논의의 풍부화에 기여하는 것은 물론, ‘식민화’된 우리 지식에 대해 성찰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근대성 신화’의 이면: 은폐, 정복, 그리고 착취
엔리케 두셀의 철학은 레비나스의 타자철학으로부터 영향을 많이 받았다. 레비나스는 타자를 섣불리 동일시하거나 배제해 버리는 유럽 철학의 전체성을 비판하는데, 두셀은 여기에 ‘라틴아메리카인’으로서 자신의 실존적 경험을 더해 점차 ‘해방철학’으로 발전시켜 나갔다(유럽 이민자의 후손으로 자신을 유럽 자아와 동일시하던 두셀은 유럽 유학 중 자신이 라틴아메리카 출신의 타자라는 사실을 비로소 절감했다고 한다). 두셀은 해방철학적 성찰을 통하여 ‘근대성’이 서구에 의해 기획되고 재생산된 또 하나의 신화라고 밝히며, 주변부의 타자를 동일성의 논리로 ‘은폐’하고 ‘정복’하며 ‘착취’하는 ‘근대성 신화’의 이면을 드러낸다.
'발견의 재발견 : 타자의 발견(dis-cover)이 아닌, 타자의 은폐(cover)
엔리케 두셀은 ‘발견’으로 해석되는 1492년의 사건을 ‘은폐’라는 개념으로 재해석한다. 라틴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한 유럽인들은 타자를 발견(dis-cover)했지만, 이들이 지닌 차이를 수용할 수는 없었다. 그들은 이 지역의 고유한 철학과 가치, 원주민의 정신세계를 철저히 대상화함으로써 ‘야만, 열등, 미개’라고 규정하고, 그 위에 서구의 것을 강요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흡수되거나 통합되지 않는 것은 제거하면서 말이다. 결과적으로 라틴아메리카의 타자성은 계몽의 논리하에 ‘은폐’(cover)되어 버리고 말았다. 라틴아메리카 고유의 역사 역시 1492년 당시뿐 아니라 현재까지도 상당 부분 은폐되고 있다. 라틴아메리카 인디오들이 아메리카 대륙의 발견 이후가 되어서야 겨우 세계사에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는 서술은 유럽중심적 시각의 오만함을 드러내 주는 일례이다. 두셀은 이 책에서 1492년 이전의 세계지도와 역사적 기록물을 통해 유럽이 이전까지는 세계의 변방에 지나지 않았음을 보여 주는 동시에 아메리카 대륙의 고유한 역사를 밝히고 있다.
근대 자아의 새로운 명제 : 나는 정복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cogito ergo sum). 이성에 대한 근대 서구 철학자들의 믿음을 단적으로 보여 주는, 너무나도 유명한 데카르트의 명제(1637)이다. 헤겔, 칸트를 비롯한 근대 철학자들은 유럽이 보편적 이성을 내적 원동력으로 삼아 발전된 근대를 열었다고 믿었으며, 서구유럽을 세계사 발전과정의 ‘중심’, ‘정점’에 놓았다. 그리고 이들은 ‘종교개혁’, ‘프랑스혁명’, ‘계몽주의’ 이 세 가지 사건을 근대성의 기원이 되는 때로 보았다.
하지만 두셀이 보기에, 이 세 사건에 선행하는 ‘1492년’이야말로 유럽쟀 근대성이 탄생한 순간이었다. 합리적이고 보편적인 사고를 통해서가 아니라, 아메리카 인디오를 지배하고 착취함으로써 유럽이 ‘중심’으로 거듭날 수 있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유럽인들이 내세웠던 합리적이고 보편적인 근대성은 결국 지배의 헤게모니를 강화하고 폭력을 정당화하기 위한 것이었다. ‘합리적이고 성숙한’ 유럽인들은 ‘계몽’과 ‘복음화’라는 미명하에 ‘미개한’ 라틴아메리카 인디오들을 정복하고, 이들을 노예 삼아 착취하기 시작했다. 유럽인들은 이러한 폭력의 역사를 은폐한 채 근대의 자아가 ‘생각하는 자아’(ego cogito)라고 믿었지만, 그건 분명 ‘정복하는 자아’(ego conquiro)였다. 두셀의 이러한 해방철학적 성찰을 통해 우리는 근대 자아의 명제를 다음과 같이 수정해 볼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정복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고 말이다.
근대의 새로운 신화 : 끝나지 않은 ‘인신공희’(人身供犧)
오지에의 말처럼, 돈이 “뺨에 피를 묻히고 세상에 태어났다면”, 자본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모든 구멍에서 피와 오물을 흘리며 태어났다. ― 마르크스, 『자본론』(본문 200쪽에서 재인용)
인류의 지평을 밝히는 여섯번째 태양처럼 새로운 신(자본)이 새로운 ‘희생신화’를 요구했고, 틀라카엘렐의 신화는 그에 못지않은 희생신화에게 자리를 내주었다. 그 신화는 애덤 스미스의 말처럼 시장을 조화롭게 조정하는 ‘하느님의 손’이고, 프리드리히 하이에크의 말처럼 완전경쟁이다. (본문 176쪽))
‘이성적이고 성숙한’ 유럽인들이 보기에 아스테카의 인신공희 전통은 실로 경악할 만한 일이었다. 어떻게 사람을 신에게 제물로 바칠 수 있단 말인가. 이는 ‘비이성적’이고 ‘금수 같은’ 일이었다. 그것이 현세를 유지하기 위한 아스테카의 오랜 전통에 따라 행해진 것이라는 사실, 그들의 세계관 안에서는 충분히 합리적일 수도 있다는 사실은 안중에도 없었다. 이 역시 합리적인 유럽의 이성에 따라 계몽되어야 마땅했다. 서구 유럽인의 계몽으로 인해 아스테카의 야만적인 전통은 절멸했지만, 역설적이게도 ‘인간 희생의 신화’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아스테카의 태양신 우이칠로포츠틀리의 희생신화는 끝났지만 더 많은 인간제물을 필요로 하는 ‘근대성의 희생신화’가 시작된 것이었다. 그 신은 다름 아닌 화폐자본이었다. 이 새로운 신을 위해 새로운 제단에서 희생된 사람은 1492년 이래 식민화된 민중, 세계 주변부(이른바 제3세계)의 민중이었다. 지금껏 이들의 희생은 근대화에 수반되는 불가피한 희생, 비용이라는 논리로 은폐되기 일쑤였다. 그러기에 두셀은 객관화된 가치, 익명의 상품으로 이전되어 서구의 근대화에 흡수되어 버린 라틴아메리카 민중들의 처절했던 삶을 드러내는 데 주력했고, 그들을 ‘해방’시키고자 묵묵히 자신의 철학적 작업을 수행해 온 것이다(“나는 저 사람들의 이름으로, 자신들의 삶을 어떤 용도로 사용했는지 알고 싶어 청구서를 요구하는 저 사람들의 심정으로 지금, 이 자리에서 강연을 하려고 한다”). 이러한 역사적 서술 속에서 두셀은 라틴아메리카 대륙의 구조화된 빈곤 문제가 국지적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전 지구적인 근대화의 기획과 맞물려 있음을 다시 한번 명확하게 밝힌다. 그리고 식민지 과거뿐 아니라 현재까지도 비유럽적 타자를 질곡에 빠뜨리는 이러한 근대의 문제를 ‘해방 기획’으로 극복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그렇다면 두셀이 말하는, ‘해방 기획’이란 무엇일까?
두셀의 ‘해방 기획’: 억압받는 민중의 물적 삶과 언어를 회복하라!
허물을 벗어 버리자! 이제 방법론적으로 원주민의 피부, 아프리카 노예의 피부, 비천한 메스티소의 피부, 가난한 농부의 피부, 착취당하는 노동자의 피부, 현대 라틴아메리카 도시에서 비참하게 우글거리는 수백만의 소외된 사람의 피부를 갖자. 억압받는 민중의 눈을 우리 눈으로 삼자. (본문 113쪽)
인디오, 노예, 메스티소, 크리오요, 농민, 노동자, 변두리인. 레비나스 철학의 ‘타자’는 두셀의 해방철학에서 가난하고 억압받는 ‘민중’, 우리 눈앞에 보이는 가난한 라틴아메리카의 ‘민중’으로 구체화되었다. 두셀이 말하는 ‘해방’이란 곧 구체화된 타자인 ‘민중의 해방’이다. 기아 수준의 임금을 받으며 먹고살아가는 주변부 삶에게 ‘추상적인 해방’(인식론적 해방)의 문제보다 더 시급한 것은 물적 해방의 문제였기에, 두셀은 주변부 세계에 점증하는 빈곤의 문제를 파악하고 궁극적으로는 경제적 해방까지 바라보려 했다(여기에는 마르크스 텍스트에 대한 본격적인 독해가 영향을 미쳤다).
두셀의 철학에서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두셀은 이성 자체를 부정하는 후근대론(post-modernism)의 입장과 자신의 철학을 철저히 구별하고 있다. 그는 ‘근대성’에 포함된 합리적이고 해방적인 개념을 부정하지는 않으며, 다만 근대성 이면에 숨겨진 비합리성과 폭력성을 부정하고 극릺하려는 것이다. 두셀은 근대성(modernity)의 비합리성을 극복하려는 자신의 기획에 ‘통근대성’(trans-modernity)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만들어 붙인다. ‘타자의 언어’, ‘타자의 이성’을 긍정하는 가운데 모든 주체들이 평등하게 의사소통할 수 있는 장을 만들어 가는 것이 그가 말하는 ‘해방 기획’의 또 다른 주된 내용이다.
서구 유럽 중심의 근대성, 이성에 대한 다양한 비판 담론이 넘쳐나는 때에, 두셀의 철학은 자칫 ‘유행이 지난 학문’처럼 비쳐질 수도 있다. 하지만 오늘날 ‘신자유주의 완전경쟁 신화'에 매몰되어 있는 우리에게 두셀의 ‘해방 철학’이 주는 메시지는 단순하면서도 강렬하다. 억압받는 타자의 삶에 주목하라, 그리고 그의 물적 삶과 언어(이성)가 회복될 수 있는 장을 마련하라! 기본적인 물적 삶의 토대는커녕 언어조차 갖고 있지 못한, 변두리의 타자들(두셀의 개념으로 ‘일곱번째 민중’)이 늘어나고 있는 가운데, 두셀의 이러한 해방 기획이 오늘날의 무수한 신화들(이를테면, 개발신화)의 이면을 드러내 보이고, 크고 작은 균열을 내는 데 기여할 수 있길 기대해 본다.